< -- 2. 2009 트리플 A -- >
타자와 투수 모두 처음 상대방을 상대하게 되면 투수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야구다. 하지만, 준혁에겐 최고의 치트가 있었다.
바로 투수가 던진 공이 홈플레이트를 통과할 때의 위치를 표시해주는 둥근 원모양의 타깃표시 말이다.
보통 93마일(약 150키로)이상의 페스트볼이 투수의 손을 떠나 홈플레이트까지 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0.4초 내외. 그리고 타자는 0.1초에서 0.15초 사이에 볼인지 스트라이크인지를 구분 하고, 공을 칠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을 내려야만 배트에 공을 맞출 수 있는 타이밍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한다. 친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맞출 수 있는 타이밍을 얻어낼 수 있다는 거다. 그런데, 정상급이라 불리는 투수들은 거의 모두 페스트볼과 변화구의 이동궤적이 타자들이 볼을 판단하는 0.1~0.15초 사이에서는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변화는 그 이후부터 일어난다. 그러니, 정상급 투수들의 변화구에 타자들은 왜 저런 공에 방망이가 나가느냐 싶을 정도로 헛스윙을 남발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다 시피, 준혁만은 달랐다.
공의 홈플레이트 통과지점이 그의 시야에 표시가 되어있었기에 투수가 투구하고 난다음의 0.15초 동안 이동한 공의 궤적을 보면서 오히려 대략의 공의 구질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정확한 설명은 못되겠지만, 간단하게 말해보자면 0.15초 동안 진행한 공의 높이와 그의 시야에 표시된 홈플레이트 통과지점의 위치의 높이 차이를 확인해보면 떨어지는 변화구인지 직선에 가까운 궤적을 보이는 페스트볼인지 구분이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물론, 준혁도 여타의 다른 타자들과 같이 0.15초 사이에 공의 구질을 판단해야한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았지만, 이것은 분명 엄청난 메리트임에는 틀림없었다. 상대편 투수가 초구를 던지기 위해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그와 함께 준혁의 시야에는 가상의 스트라이크존 범위를 표시해주는 사각형의 틀이 나타났다. 가상의 스트라이크존이다.
그리고 잠시 후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나는 순간. 가상의 스트라이크존 위에 공의 통과 위치가 표시되었다.
시합 전 살펴본 상대팀 선발투수의 구질은 크게 3가지였다. 평균구속 93마일의 페스트볼과 체인지업, 그리고 꽤나 각이 좋다고 알려진 커브였는데, 출발지점 근처의 공위 위치와 가상의 스트라이크존 통과 위치의 낙폭을 봐서는 체인지업으로 보였다.
물론 처음 상대하는 투수이고, 투수들마다 던지는 체인지업의 떨어지는 폭이 천차만별이기에 첫 구를 보고 확신을 할 수는 없었지만, 상대하는 투수의 구질을 생각하면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준혁은 정작 배트를 휘두르지는 않았다.
가상의 스트라이크존에서 공 한 개정도 빠졌기 때문이었다.
--파앙--
" 스트라이크!"
하지만 주심의 선언은 스트라이크 였다.
' 오닐 주심이라고 했던가? 이 사람은 낮은 코스가 후한가 보네? '
기본적으로 스트라이크존에 대한 규정은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각각의 주심들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생겼다. 그래서 시합에 들어가면 투수와 타자들 모두 그날 주심의 성향을 파악하고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게임의 옵션이 그대로 눈에 보인다는 치트 키를 가지고 있는 준혁이라고 해도 다를 바가 없었다.
' 뭐... 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스트라이크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
수확은 있었다. 첫째는 오늘 주심을 보고 있는 오닐 씨가 낮은 쪽 스트라이크를 잘 잡아준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상대편투수의 체인지업의 떨어지는 낙폭을 확인한 것이었다. 정상급 체인지업 투수들은 낙폭도 자유자재로 바꾼다지만, 그것까지 할 수 있는 투수가 메이저에 올라가지 못하고 AAA에서 전전하고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무시하기로 했다. 다시금 타석에 들어서서 자제를 잡고 있자, 투수로부터 제 2구가 들어왔다.
시작위치와 도착지점의 표시를 봐서 이번엔 페스트볼 계열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초구보다 코스가 더 애매했다.
' 이렇게나 코너워크를 잘 이용하는 투수였나? '
첫타석 이었고 처음 상대하는 투수라는 생각에 준혁은 이번공도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혹시나 일이 잘못되어 2스트라이크를 먼저 먹게 되더라도 커트에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공은 가상의 스트라이크존 바깥쪽으로 공 반개를 걸치며 홈플레이트를 통과해 포수 미트로 들어갔다.
" 스트라이크~!"
그런데, 혹시나 했더니 이번에도 스트라이크 판정을 내리는 주심이다.
' 이거 정말 스트라이크 존이 상당히 넓은 심판이잖아. '
순식간에 노볼 2스트라이크로 카운트가 몰려버렸다. 준혁이 주심의 성향을 보려고 조금 기다렸던 점도 없지 않아있었고, 주심의 스트라이크존이 조금 넓은 감도 없잖아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투수가 주심이 설정한 스트라이크존으로 꽉 찬 공을 연속으로 던질 줄은 몰랐다. 상대팀 선발투수가 비록 3점대 후반의 준수한 방어율을 이번시즌 기록하고 있기는 했지만, 준혁이 시합 전 본 자료에는 볼넷 허용 개수도 적은 편이 아니었고, 코너 코너를 활용하는 피칭을 하는 투수라기보다는 빠른 페스트볼을 앞세워 체인지업과 커브로 헛스윙과 범타를 유도하는 스타일로 나와 있었기에 그쪽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오늘 2이닝 삼자범퇴였잖아? '
잊고 있었다. 3회말 7번 타자인 자신이 선두타자로 타석에 나섰으니 당연한 결과였는데, 간과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젠장 오늘 투수가 긁히는 날인가 보네. 이거 똥 됐네. '
다쳐서 타자로 전향하기 전까지 투수를 했던 그였다. 그랬기에 긁히는 날의 투수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당해 줄 수는 없는 것이 또 현실이었다. 오늘은 AAA데뷔전이었다. 그리고 첫타석 이었다. 수비에서 보여준 임팩트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선 정말 중요한 타석이었다. 2번째 3번째 타석에서 할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화룡점정'을 위해서는 모아진 시선이 흐트러지기 전에 사고를 쳐야하는 것이다.
'아저씨. 미안해. 엄청 긁히는 날에 초치기는 싫은데, 나도 살고 봐야하거든. '
상대편 투수가 진짜 아저씨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긴 것만 봐서는 꽤나 연식이 나가보인다. 이렇게 말하는 준혁 그 자신도 정신은 아저씨지만 말이다.3구째가 들어왔다. 이번에도 바깥쪽 빠른공이었다. 그런데, 코스가 ...' 젠장할! '이었다.
가상스트라이크존에서 공 한 개가 빠졌다.
하지만, 반개 빠지는 공에 스트라이크가 선언되었기에 준혁은 배트를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깡--
3루 측 파울 존으로 굴러가는 파울이 되었다. 그의 위치와 너무 멀어 억지로 안타를 만들려다가는 십중팔구 아웃될 것이 뻔 한 공이어서 커트시킨 것이었다.
이후 연이어 4개의 공을 더 상대했다. 2개는 커트시키고 2개는 볼이 되었다. 낮은 체인지업과 커브로 헛스윙을 유도하는 공을 던졌었는데, 공의 통과지점이 눈에 보이는 준 혁에게는 오히려 이런 공들은 볼카운트를 거저 주는 공과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7구까지 투수에게 던지게 했고, 2볼 2스트라이크를 기록했다. 그리고 또다시 8구와 9구를 연속 커트해 내자, 10구째 다시 낮은 코스의 공이 들어왔다. 앞선 9구째 낮은 공을 건드려 주었다는 것을 떠올린 듯(초구와 같은 높이의 공이라 건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그 코스를 노리고 들어왔는데, 이번엔 앞 선공보다 좀 더 낮았고, 주심의 낮은 코스 스트라이크 존의 마지노선을 파악하고 있던 준혁의 방망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3볼 2스트라이크의 풀카운트가 되고 말았다.
잠시 숨도 돌릴 겸, 준혁은 방망이에 타르 액을 바르러 타석을 벗어났다.
" 리. 너 대단하다. "
대기타석에서 준비하고 있던 코일이 타르 액 캔을 넘겨주며 말했다.
" 뭘. 이것 가지고. 안타치고 살아나가야 대단한 거지. 안 그래? "
어떻게 보면 자기 자랑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코일의 귀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2스트라이크로 몰린 상황에서 투수로 하여금 10구를 던지게 하고 풀카운트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다시 타석으로 들어가며 준혁은 마음속으로 빌었다.
' 제발 포볼은 주지 마라.'
벌써 11구째의 공을 던지게 되는 상대편 투수였다. 한 이닝에 던져야할 공을 자신을 상대로 다 던지게 되다보니 짜증도 나고, 알게 모르게 지치기도 했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포볼을 내주게 된다면 더욱 위험해진다는 것을 투수라면 모를 리가 없을 터 승부를 걸어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유인구는 아니었으면 하는 준혁이었다. 뻔히 볼인 것을 알면서, 휘두를 수는 없는 것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1루까지 걸어 나가기도 싫었다. 상대팀 투수는 오늘 공이 긁히는 날이다. 그러니 볼넷은 주지 않는다고 전재를 깔고 나서 생각을 해봤다.
' 내가 투수라고 하더라도 떨어지는 유인구에는 반응조차 않는 타자라면 꽉 찬 스트라이크 존을 이용해서 승부를 걸지 않겠어? 게다가 오늘주심이 바깥쪽과 낮은 쪽에 후하잖아. 분명 그쪽으로 확률이 높을 거야. '
준혁의 생각대로 온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준혁은 커트엔 자신이 있었다. 준비를 마치고 노멀 스텐스로 타석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준혁은 투수가 와인드업에서 투구로 넘어가는 순간 왼쪽 뒷발을 홈플레이트 쪽으로 살짝 안으로 집어넣었다. 순간적으로 오픈스탠스로 타격자세를 바꾸며 홈플레이트와 자신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그리고, 그 직후 가상의 스트라이크존에 투수가 던진 공의 통과위치가 나타났다.
' !!! '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다만, 이번엔 어느 한쪽만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주심의 넓은 스트라이크존을 최대한 이용해서 바깥쪽하고도 낮은 코스로 꽉 찬 공이었다. 정말 공이 긁히는 날이 분명했다. 아무리 코스가 보인다지만, 앞선 타격 때였다면 커트도 힘들었을 코스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준혁이 순간적으로 오픈스탠스를 만들며 홈플레이트로 몸을 당겨놓은 덕분에 공을 방망이에 맞출 수 있는 타이밍과 거리는 만들었지만, 정작 이 스탠스 이동 때문에 배팅타점이 흔들려 버린 것이었다. 이미 방망이는 회전을 시작한 상태였고, 이대로라면 잘해야 파울이었고, 평범한 땅볼이나 내야뜬공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 준혁의 시야 외곽이 번쩍였다.
--따악!
--
준혁의 밀어 친 타구가 3루수 머리위로 날아갔다.3루수는 자신의 머리위로 타구가 날아오자 점프를 시도했다. 점핑만으로 충분히 잡을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잡을 수가 없었다. 보통의 라인드라이브 타구보다 속도가 더 빨랐다. 그러니, 평소의 타이밍으로 뛰어서는 이미 글러브를 통과하고 난 후였다.
--슈우웃~~!!
--
타구는 떨어질 줄 몰랐다. 그리고는 곧장 펜스를 노바운드로 강타했다.
-텅-
게다가 튕겨져 나오는 궤적도 정직했다.
아무리 수비가 처지는 좌익수라지만, 펜스에 맞고 튕겨져 나온 공을 노바운드로 처리하게 된다면 상황은 달랐다. 이런 공마저 2루로 송구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지명타자가 있는 AL로 옮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거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정작 장타를 치고서도 준혁은 2루로 갈 수 없었다. 타구가 너무 빨랐고 깨끗했다.
게다가 좌익수답지 않게 펜스플레이도 깔끔했다. 아쉬웠지만 1루에서 멈추는 게 정답이었다.
" 와아아~~!!! "
하지만, 홈팬들은 알았다. 타구의 질이 너무 좋다보니 오히려 단타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을. 그러니 열광과 탄성의 함성소리가 함께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2회까지 홈팀 타자들을 상대로 삼자범퇴를 잡고 있던 투수를 상대로 11구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고, 그것도 모자라 선두타자로 2루타성 1루타를 치고 나갔으니 좋아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적장 당사자인 준혁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 순간 슈퍼모드가 발동해서 망정이지, 큰일 날 뻔 했다 싶었기 때문이다.
"아. 당최 발동 조건을 정확하게 모르니 살 떨리잖아. "
생각지도 않은 타이밍에서 터져 나와 다행이다 싶긴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게임을 만든 작자들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아무리 너무 리얼로 치우친 게임에 재미란 요소를 만들어주기 위해 집어넣은 거라지만, 밝혀진 정보가
'경기를 하며 포인트가 일정이상 쌓이면 발동한다.'
달랑 이것뿐이니, 게다가 그 포인트가 쌓이는 것을 확인할 방법조차 만들어놓지 않았으니 원망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준혁과는 달리, 덕아웃에서 그의 타격을 지켜보고 있던 트로이 깅리치 타격코치는 전혀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2스트라이크에 몰리고도 상대방투수로 하여금 11구나 던지게 한 커트능력과 선구안도 대단했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마지막 11구째 때의 타격 스탠스를 변화시키며 안타를 만들어낸 상황이었다. 보통의 타자였다면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 스탠스를 바꾼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고, 그렇게 하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그런 미친 짓을 버젓이 하는 놈이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 타격은 역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 나는 것이야. ' 그러면서 AA에서 올라온 평가서에 붙어있던 별첨내용이 첨부형식이 아니라 본 내용이 되었어야했다고 생각했다. 대단한 물건이 들어왔다는 생각에 가슴의 떨림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준혁은 벗어놓은 타격용 장갑을 다가온 주루코치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주루용 장갑을 뒷주머니에서 꺼내 꼈다. 그 와중에 코치가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고는 지시를 했다.
" AA에서 하던 데로 한번 보여봐. "
그린라이트 사인이었다. AA에서도 루상에 주자로 나가면 상당히 빠른 발을 선보였던 준혁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한번 보고자 하는 듯했다. 1루타로 끝난 것에 아쉬움이 남아 있던 그로써는 바라던 바였다. 준혁은 슬슬 리드를 하며 투수를 살폈다. 투수가 공을 던지기위해 와인드업을 시작하면 가상의 스트라이크존이 표시된다고 앞서 이야길 했었다. 그런데 버그인지는 몰라도 이것이 그가 주자로 나간 상태에서도 그대로 적용이되는 것이었다. 1루에 있는 자신에게 견제구를 던지는 것도 타석에서 투수가 타자에게 공을 던지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주자로 나가 있을 때 준혁의 시야에 가상스트라이크존이 생성되지 않으면 투수가 100% 홈의 다음 타자를 향해 공을 던진다는 말이었다. 타격 때와 수비 때와는 달리 준혁이 마음만 먹으면 100%에 가까운 성공률을 보여줄 수 도 있는 것이 도루란 말과도 같았고, 이것이 실재 AA에서 보여준 그의 경악스러운 도루성공률의 정체였다. 그리고 이것은 AAA의 코칭스태프들도 기대를 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AA에서의 자료가 상대팀에게도 없을 리가 없었다.
너무 늦게 포텐이 터지다보니 정작 유망주랭킹에는 그 어디에도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스카우트들끼리는 모두 준혁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모른다면 스카우트 자격을 때려치워야한다.) 그러니, 자연스레 견제가 많아졌다. 준혁의 다음은 8번 9번으로 내려가는 하위타선이었고, 더군다나 9번은 투수였다. 0대0의 팽팽한 상황. 선취점을 먼저 가져가는 팀이 분위기를 먼저 잡게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뻔 한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도루를 시도할 확률이 높은 준혁에 대한 견제구가 자연히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견제를 하고, 폼으로 현혹을 시키려고 하더라도 소용없다는 것을 상대방이 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도루에서 리드 폭을 잡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봤다. 리드 폭을 조금 적게 잡더라도 몸의 무게중심을 2루 쪽으로 두어 빠른 스타트를 노릴 것인가? 아니면 리드 폭을 좀 더 넓게 잡고는 무게중심을 1루 쪽으로 향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지금 준혁이 선택한 것은 리드 폭을 넓게 잡는 것이었다. 투수가 타자와 승부하는 순간을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으니, 리드 폭을 줄여 스타트를 빠르게 가져가는 포지션을 만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투수가 다시금 셋 포지션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잠시 멈춘다. 주자가 도루를 하기위해서는 이 상태에서 투수의 공이 홈으로 날아가느냐? 아니면 1루로 견제가 들어오느냐 하는 것을 판단하고 뛰어야하는 것이다.
여기서 판단을 잘못 내려버리면-혹은 투수의 폼에 속거나하면-어이없는 횡사가 벌어지는 것이고, 판단이 제대로 되면 투수의 투구 폼을 뺏고는 여유롭게 도루에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준혁은 이런 과정들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눈에 투수가 어디로 던질지 뻔히 보이는데, 그냥 냅다 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투수가 홈으로 공을 던지기 위해 와인드업을 하는 순간 이미 준혁은 2루로 스타트를 끊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투수의 투구 폼을 뺐었다는 상황이었다.
-다다다다~-
준혁이 뛰는 것을 보고는 투수의 공을 받자마자 포수가 2루로 송구를 했다. 하지만, 투수가 투구 폼을 완벽하게 빼앗기다보니, 포수의 송구가 아무리 자연 태그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더라도 아웃을 시킬 수 없었다.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한 준혁의 손은 이미 베이스를 터치하고 한참을 지난 후였으니까 말이다. 당연히 세입이었다. 준혁은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덕아웃을 향해 들어 보인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는 타임을 요청하고 버클 속에 들어간 흙을 털어낸다.
" 앞으로 조금 더 봐야겠지만, 솔직히 오늘 시합내용만 봐도 저놈 물건인데요? "
수비에서도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타격과 주루, 도루능력도 그에 못지않았다. 도드슨 수비코치가 조금은 상기된 목소리로 토니 비즐리 감독을 보며 말한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 맞아. 방금 타격만 봐서는 파워도 괜찮아 보이는 것 같은데 말이야. 타격코치, AA에서 준혁 리에 대한 파워평가가 정확한 걸까? "
감독의 질문에 트로이 깅리치 타격코치는 턱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 글쎄요. 그 문제는 저도 고민이긴 합니다. AA에서의 평가를 재껴 두더라도, 며칠간의 배팅훈련을 직접 지켜 본 바로는 힘이 조금 부족한 것은 분명해 보였거든요. "
"흠. 그렇단 말이지. 거참 이상하구만. 방금 전의 타격은 라인드라이브로 낮게 깔리지만 않았다면 홈런이 되고도 남았을 공이었거든. 힘도 실려 있어서 겨우 펜스를 넘어가는 홈런이 아니라 진짜 홈런 말이야. "
"네.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봤으니까요. 연습타격만 봐서는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 타구를 어떻게 저렇게 날리는지. "
명색이 타격코치인데 감독이 본 것을 못 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준혁의 방금타구가 슈퍼모드란 존재에 의해 나왔다는 것을 모르는 두 사람은 평생가도 풀 수가 없는 수수께끼와 다름없는 타구였다.
" 아무튼 파워만 갖추어지면 완전 5툴 플레이어로 대성할 수 있겠어. 깅리치 코치 다른 건 몰라도 배팅파워 쪽으로 신경 쫌 써보게나. "
" 네. 저도 그러려고 생각 중이었습니다. 하하하. "
" 도드슨 코치도 조금 더 해주고. 그래. 다들 이번엔 우리도 물건 하나 키워보자고. "
준혁이 이대로만 커준다면, 내년 BA유망주랭킹에서 1위는 따 놓은 당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레 화기애애해지는 AAA 시라큐스 치프의 덕아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