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2009 새로운 시작 -- >
" 늦었다. 늦었어. "
가게에 딸린 방안으로 들어온 준혁은 TV리모컨의 스위치부터 눌렀다. 그리고는, 전원이 들어오자마자, 바삐 채널을 바꿨다. 그날그날의 메이저리그의 하이라이트를 보여주는 야구관련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서였는데, 잠자리에 들 기전 꼭 시청을 할 정도로 준혁의 애청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늦게 까지 있었던 손님과 셔터문과 주전자(?)와의 추돌사건으로 평소보다 방에 늦게 들어오게 된 그였고, 그러다보니, 이미 프로그램은 상당량 진행이 된 후였다. 덕분에 씻는 것 마저 미루어두고 TV앞자리를 지켰지만, 그가 보고자 했던 팀의 경기는 이미 지나가 버려, 볼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가벼운 한숨마저 나왔다.
그런 그의 눈에 방안 한편에 놓인 종이박스 하나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 안에 담겨진 물건이 무엇인지 떠올랐다.
' 오랜만에... 한판 해봐? '
준혁은 곧바로 종이박스를 열었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꺼내드는데.
그건 바로 비디오 게임기였다. 최신게임기? 그런 건 아니었다. 요즘은 체험형 4D게임기까지 나오는 세상이라지만, 그가 꺼내든 게임기는 예전 2000년도 초창기때 유행하던 구식 게임기였다.
하지만, 그가 이 신작 게임타이틀도 나오지 않는 구형게임기를 버리지 않고, 있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다.
준혁은 전직 야구선수였다.
그것도 고등학교 졸업 후 메이저리그 구단의 러브콜을 받아 계약금 90만 달러에 입단까지 했던 유망주였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의 혹사로 입단 다음해에 바로 어깨 수술을 받아야만 했고, 타자로의 전향을 시도했으나, 좀처럼 기량을 보여주지 못한 채, 결국은 구단으로부터 방출을 당했었다. 사람이라면 모두다, 어릴 적 하고자하는 꿈들이 있었기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 혹의 집안의 반대, 또는 불의의 사고 등으로 그 꿈을 포기하고 살아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준혁도 이런 아픔으로 야구를 접어야만 했고, 한국으로 돌아와 세월이 흐른 지금은 동네슈퍼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되었지만, 예전 어릴 적의 야구하던 아련한 추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구식 게임기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단지 2009년의 데이터(준혁이 방출 당하던 년도다.)가 들어있는 게임타이틀이 돌아간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요즘의 게임과는 비교조차 힘들 정도로 조잡한 게임화면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뛰던-비록 마이너리그에서 끝난 선수생활이었지만-시기에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던 선수들로 게임을 하며 느끼는 기분은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준혁만의 향수였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게임을 하다 보니, 조작방법부터 가물가물했다. 이문제야 매뉴얼을 읽어보는 것으로 금방 해결할 수 있다지만, 감이란 놈은 달랐다. 야구와 같은 스포츠게임이란 것들이 본래 단순히 버튼만 누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긴 했지만, 지금 준혁이 패드를 붙잡고 용을 쓰고 있는 게임은 야구 게임 중에서도 유저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기로 유명했다. 타격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정확한 타이밍에 배트를 휘두르지 않으면 안타를 좀처럼 처낼 수 없는 그런 게임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만큼 그 당시엔 최고의 디테일을 보여주는 게임이었고, 선수들에 대한 자료도 무척이나 자세했다.
하지만, 이런 점들이 지금의 준혁에겐 좋게 느껴질 수 없었다. 연거푸 헛스윙... 타이밍을 잡지 못해 삼자범퇴를 당하고... 수비에 들어가서 투수를 조작하면 통타를 당하고 있으니... 아무리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기분이 좋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쉬움을 달래고 향수를 느껴보기 위해 기분 좋으라고 시작한 것이 오히려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아아, 진짜. "
준혁은 신경질적으로 리셋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엄청난 점수 차이로 지고 있던 경기를 지워버렸다.
초기화면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는 하나의 매뉴가 눈에 들어왔다.
" 그래! 듀토리얼 모드가 있었지. "
게임 자체의 난이도 때문인지, 다른 게임과는 달리 별도의 연습모드가 삽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준혁은 곧바로 듀토리얼 모드를 선택했다.
"역시! "
듀토리얼 모드가 정답이었다. 이제는 때리는 족족 타구가 뻗어 나갔다. 그와 더불어 재미도 배가 됐다.
덕분에 시간이 꽤나 흘러버렸고, 장사를 하는 그의 입장에 더 이상 잠을 미룰 수 없게 되어 본게임은 한게임도 해보지 못하고 듀토리얼 모드만 해본 것으로 끝을 내야했지만, 기분만은 처음과 달리 한결 좋아졌다.
역시 게임은 스트레스 해소하라고 만들어진 것이지, 쌓이라고 만든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 좋았어! 내일 두고 보자고. '
TV화면속의 상대편 투수를 보며 투지를 불태운 준혁은 실내등을 껐다. 그리고는 서둘러 누웠다. 평소보다 늦은 잠자리라서 그런지, 눕자마자 잠이 쏟아졌고.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준혁의 숨소리만이 고요한 정적을 깨트리고 있을 때쯤, 어디선가에서 흘러나온 파아란 안개가 방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