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장 네루만, 제국이 되다
스르르륵.
얼굴을 매만지는 매끄러운 비단 감촉의 느낌.
빠져나오기 싫은 잠의 골짜기에서 서서히 정신을 차려야 함이 아쉬웠다.
하지만 코끝에 감도는 익숙한 향기에 눈을 떠야만 했다.
"카... 카이어님......"
그리고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
사르르 힘겹게 눈꺼풀이 올라갔다.
'아르미스......'
그러했다.
내 코끝에 익숙한 향기는 아르미스의 내음.
'내 방?'
아르미스의 얼굴 뒤로 보이는 방 안의 모습.
네루만 대저택에 존재하는 사부가 강탈하려던 내 방이었다.
'마족 병사들은?'
전쟁이 끝났기에 내가 이렇게 누워 있을 수가 있겠지만, 궁금하였다.
마족 놈이 소환한 마계 병사 놈들이 어찌 되었는지 말이다.
"괜찮으세요? 아픈 곳은 없나요?"
걱정이 진하게 밴 아르미스의 물음.
'어라? 아프지가 않네.'
정신을 잃을 당시 배를 칼로 쑤시고, 머리에다가 종을 씌워 놓고 두드리는 것처럼 고통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짱하기 그지없었다.
"아르미스, 전투는 어찌 되었소?"
"전투요? 벌써 끝난 지 열흘이 되어갑니다."
"여, 열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났건만 열흘이 흘러 버렸다.
"마계에서 소환된 마물들은 모두 죽었답니다. 스카이나이트들의 맹공격을 받고 살아날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답니다."
"아......"
그제야 생각이 났다.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스카이나이트들이 발사했던 엄청난 숫자의 스피어.
자신들을 보호해 주던 군장단인 마족이 없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처리했을 것이다.
"감축드려요, 카이어님."
입가에 빙긋 미소를 지으며 감축드린다는 말을 꺼내는 아르미스
"......?"
의문에 찬 시선으로 그녀의 투명한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대륙의 멸망 위기에서 암흑제국을 물리치고 마족 슬레이어가 되신 카이어님을 위하여 대륙 모든 제국과 왕국들이 만장일치로 네루만을 제국으로 인정하였으며 카이어님을 황제로 추대하였습니다."
"허억!"
"그것뿐만 아니라, 라비테르 제국을 네루만 제국 영토로 편입시키기로 했답니다."
"......"
놀라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땅이라면 자다가도 한쪽이라도 더 얻고자 하는 대륙 왕국들이 네루만을 제국으로 인정하고 나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한다.
거기에 대륙에서 오페른 제국과 쌍벽을 이루는 라비테르 제국을 덤으로 준다는 이 소식.
기쁨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휴우......'
내색하지 않고 길게 숨을 들이켰다.
내가 생각해도 그 정도 대가는 충분히 받아도 될 나의 영웅적 행보.
'그래, 황제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한때는 네루만을 경영하기도 벅찼던 나.
어느새 커져 버린 마나홀만큼이나 내 똥배짱도 대마법사급이 되어 있었다.
'가만, 마나홀이......'
갑자기 번뜩 스치는 마나홀.
마족 놈의 마나 하트가 분명한 것을 삼키고 열흘씩이나 잠을 퍼잔 나에게 변화가 없을 리는 만무했다.
급히 마나를 일으켜 서클을 확인해 갔다.
위이이잉.
내 부름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마나의 흐름.
달랐다.
구닥다리 386컴퓨터를 최신형 CPU와 메인보드, 램, 그리고 그래픽 카드 빵빵한 놈으로 바꾼 것처럼 거침없이 유동되는 마나의 흐름.
'하나, 둘, 셋... 이곱... 여덟... 허어어어억!'
속으로 마나홀을 세던 내 몸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수학도 아니고 산수만 알면 알 수 있는 마나홀의 개수.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방 안에 울려 터져 나오는 비명.
내 비명에 놀라는 아르미스.
덥석.
그런 아르미스를 힘껏 껴안았다.
"왜......"
놀란 아르미스의 물음.
"고마워. 이게 다 아르미스 덕분이야."
"네?"
고맙다는 말에 귀엽게 눈을 동그랗게 뜬 아르미스.
두근거리는 심장이 그녀의 귀여운 얼굴과 투명한 피부, 그리고 은은하게 풍겨오는 여인의 향기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읍!"
망설일 것이 없었다.
이제 신 빼고 세상 무서울 것 없는 나.
아르미스의 입술을 달콤하게 훔쳐 갔다.
'흐흐흐, 이제 다 죽었어.'
드디어 완성된 나의 파라다이스.
마음껏 즐길 것이었다.
열심히 개고생한 나의 인생.
본전에 고리 이자를 쳐서 확실하게 뽕을 뽑을 작정이다.
"아......"
그리고 오늘의 나로 존재하게 만들어준 아르미스와 감사(?)의 마음을 나누는 자리.
아르미스의 개미허리를 단단한 오르팔로 붙잡아갔다.
이제 영원히 아르미스를 지켜주리라 마음먹으며......
★★★★★★★★★★★★★★★★★★★★★
"감축드리옵니다!"
"주군, 감축드리옵니다!"
목이 마른 사슴처럼 아르미스의 입술을 정신없이 탐하였다.
그렇게 얼마간 아르미스의 입술과 스파크를 만들어내는 중에, 데르발이 찾아왔다.
그리고 깨어난 나를 발견하고 펑펑 눈물을 흘리던 충신.
데르발이 울자 나도 울었다.
바즈란 제국에서 쫓겨 루알 산맥을 거의 맨몸으로 넘던 그 순간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난 데르발이 말했다.
지금 대전 안에 영지의 중요 기사들과 참전했던 각 왕국의 중요 지휘관들이 기다리고 있다 말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짧게 보고를 잊지 않는 데르발.
네루만을 공격했던 모든 잡것들의 정리가 끝이 났으며 그 와중에도 돈 될 만한 것들은 따로 빼놓았다고 조용히 보고를 마쳤다.
참으로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데르발.
아주 후한 상을 내려주리라 마음을 먹었다.
★★★★★★★★★★★★★★★★★★★★★
'저 존경이 팍팍 담긴 눈빛들이라니. 흐흐흐.'
자신들이 보고도 믿기지 못했을 마족의 대갈통을 후려치던 내 모습.
대륙 역사를 새로이 쓴 위대하고, 정열적이며, 강력하고, 성격 착하고 얼굴 착하고 능력 차간 나를, 거대한 대전 안에 모인 이들이 뜨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나를 황제 대하듯 극진한 예를 취했다.
"모두들 수고가 많았소이다."
사람은 위치가 격상이 되면 자연스럽게 변하는 법.
네루만의 백작 영주가 아닌 이제 황제가 될 귀한 몸.
이런 날을 예상하며 장만해 두었던 내 성안의 의자.
베베토 모습이 멋지게 장식된 푹신한 의자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캬아, 바로 이 맛이야.'
의자에 앉아 눈 아래로 보이는 뭇 영지의 기사들과 각국 고위급 귀족들.
수고가 많았다는 말을 던지며 한껏 위엄을 잡았다.
"진심으로 감축드리옵니다. 앞으로도 본 안다인 왕국은 네루만 영지, 아니, 제국과 혈맹이 될 것임을 이 자리에서 밝히는 바입니다."
안다인 왕국에서 파견된 고위급 귀족이 자신의 신분도 밝히지 않고 혈맹을 선포했다.
"폐하, 저희 델피란 왕국의 국왕 전하께서는 영원한 동맹을 염원하시며 소신에게 이리 전하였습니다. 앞으로 네루만 제국에서 왕국의 힘을 필요로 한다면 직접 전하께서 전 왕국의 전력을 몰고 왕국의 일처럼 돕겠다 하였사옵니다!"
"폐하! 저희 파킨츠 왕국에서도......"
갑작스럽게 시작된 왕국들의 충성 경쟁.
누가 보면 전국을 통일한 조폭 두목이 지방 보스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었다.
'알아서 잘들 기네.'
사실 이런 시간도 필요했다.
앞으로 내가 꿈꾸는 칼리얀 대륙은 내 살아생전에 더 이상 피비린내를 맡고 싶지 않았다.
내가 대륙을 일통한 황제가 아니기에 모든 대륙인들의 삶에 관여할 수는 없지만, 힘없는 이들이 가장 서럽고 힘들게 생각하는 전쟁만은 막고 싶었다.
'아이린도 있네. 어라, 루셀도 있고, 하이네스도... 헐! 로시아테는 언제 와 있었어?'
귓가에 윙윙 울리는 각 왕국들의 입에 발린 소리를 듣는 와중에 근 천여 명의 사람이 들어찬 대전 안에서 나의 여인들을 찾아내었다.
타박타박.
그렇게 각 왕국의 귀족들이 내 앞에서 뭐라뭐라 떠들고 있을 때, 대전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한 여인.
거침없이 대전 통로를 지나쳐 나에게 다가왔다.
'웁스!'
뭇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내 앞으로 다가오는 여인.
"호호, 사람 많네."
테미르 종족들의 지배자인 로코로이아.
이제 갓 목욕을 끝내었는지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털썩.
그리고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내 옆자리에 앉아버리는 로코로이아.
찌리리릿.
대담한 로코로이아의 행동에 벙찐 귀족들과 달리 눈에서 레이저 광선을 발사하는 뭇 여인들.
"자기야, 잘 잤어?"
'자, 자기... 크윽.'
본래부터 안하무인 로코로이아.
쭉쭉빵빵해진 상체를 내 옆으로 돌리며 상쾌한 박하향이 나는 입술을 나풀거렸다.
"으, 응."
기대만큼 잘 자라준 로코로이아의 자기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마디.
"호호. 며칠 자더니 우리 서방님 얼굴에서 광채가 나네."
사라사락.
말과 함께 거침없이 사람들 앞에서 내 뺨을 사랑스럽게 쓰다듬는 로코로이아.
'그래, 용기있는 여인만이 영웅을 차지하는 법이지.'
원래부터 나 또한 그리 격식을 중요시하지 않는 이였다.
더군다나 이제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힘을 소유한 절대자.
사람을 죽이는 것도, 괴홈히는 것도 아닌 단지 정신적으로 괴롭게(?) 하는 이 정도 행동쯤이야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꼬맹이, 밥은 먹었어?"
"앙~ 밥 많이 먹었어."
'아이고, 귀여운 것.'
로리는 아니었지만 현재 황후로 점찍은 여인들 중에서 가장 생산년도가 최신형 신제품인 로코로이아.
"큼큼......"
하지만 우리들의 엽기 행각이 나만 좋게 보일 수만은 없는 것.
감히 나에게 말을 못하는 귀족들과 기사들과 달리 데르발이 헛기침을 해대었다.
'빨리 솔로를 탈출시켜 줘야겠네.'
남들이 보기에 데르발이 나의 주의를 환기시캬 준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데르발의 경고로 들렸다.
여태까지 뼛골 빠지게 일한 자신에게도 커플의 축복을 내려달라는 행동으로 말이다.
"다시 한 번 대륙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 여러분들의 공로에 감사하는 바이오. 데르발 경."
"네, 주군!"
폐하라는 말보다 듣기 좋은 데르발의 주군이라는 말.
"앞으로 한 달 후 정식으로 대관식을 가질 것이니 준비해 주시오."
"며여여여여영!"
내 말에 힘차게 며을 외치는 데르발.
"각 왕국의 귀족들도 잘 알아들었으리라 믿소."
"며, 명을 받드옵니다."
조용한 한마디에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드는 귀족들.
아마 이곳을 나가는 즉시 연락용 루미카르를 날리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오늘은 여러 가지로 처리할 일이 많으니 영지의 중요 기사들만 남고 모두들 물러나시오."
그리고 이어진 축객령.
정리할 일이 많았다.
얼떨결에 얻게 된 라비테르 제국의 운영과 이번 전투로 인하여 사망한 이들에 대한 보상 문제 등등.
기사들의 주군으로서 처리할 일들이 많았다.
"알겠사옵니다."
물러나는 귀족들 사이로 보이는 일단의 신관들과 성기사.
나름대로 큰 역할을 했지만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못했기에 결코 칭찬을 해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 조금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다면 앞으로 라비테르 제국에서는 절대 포교 활동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로시아테 공주, 로코로이아, 그리고 아이린 경, 루셀, 하이네스, 크리시아 경은 남아도 좋소."
다른 이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려다가 내 부름에 상기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여인들.
이제 제대로 챙겨줄 것이었다.
열 명의 황후를 두어도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황제의 자리.
내 파라다이스의 안주인이 될 여인들이 나를 바라보며 따스한 눈빛을 보내었다.
'움하하하. 인생 뭐 있어. 행복하게 살다 가면 그뿐이지.'
앞으로 마음껏 펼쳐질 내 인생.
황좌에 앉아 느긋하게 삶의 여유를 즐겼다.
★★★★★★★★★★★★★★★★★★★★★
"현재, 라비테르 황성은 오페른 제국에서 파병된 병사들이 점령하고 있다 합니다. 그리고 각 영지에는 살아남은 귀족의 친척들과 기사들, 그리고 자경단들이 임시로 안정을 꾀하고 있다는 정보입니다."
알타카스 덕분에 쑥대밭이 된 라비테르 제국.
온전하게 남아 있는 귀족이나 스카이나이트들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데스 와이번이나 데스 스카이나이트가 되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라이케르가 오페른 제국의 황태자란 말이지.'
놀랍게도 영지를 떠난 라이케르가 대륙의 삼대 제국 중 수위를 다투는 오페른 제국의 황태자였다.
범상치 않다 싶었지만 황태자나 되는 녀석이 내 영지에서 눈칫밥 먹고 지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다행스럽게 코비란 산맥과 베츠 산맥에 거주하던 몬스터놈들이 암흑제국에 홀려 상당수 죽임을 당해 걱정을 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군께서 제국을 다스린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면서 제국에서 말썽을 피우는 자들이 없다고 합니다."
귀족들과 기사들도 없건만 고분고분한 양이 되어버린 라비테르 제국.
알타카스가 제대로 교육을 시켜놔서 그런지 복종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다.
"이번 전투로 영지 기사들은 얼마나 죽었는가."
애써 데르발이 말하지 않았지만 데스 와이번과의 전투에서 사망에 이른 자들이 제법 있을 것이었다.
"총 136명의 스카이나이트가 장렬하게 산화했습니다. 각 연합군과 성기사들 또한 약 700명 정도가 사망했습니다."
"흐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확실한 숫자를 듣자 마음이 아파왔다.
중요한 기사들은 모두 무사했지만 죽은 이들 또한 나의 기사들.
"유족들에게 최대한 예의를 표하도록 하라."
"명!"
나와 네루만을 위하여 피 흘린 자들을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당연한 일.
나 또한 그들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왔기에 죽은 이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주군, 황제의 위에 오르신다면 황성은 어느 곳으로 정하실 것이옵니까?"
데르발과 샤일트, 세들리안, 제니스, 그리고 행정 기사들과 나의 여인들만이 존재하는 대전 안.
데르발이 황성을 정하라 말을 꺼내었다.
"네루만 제국의 황성은 이곳이다."
정할 것도 없었다.
내가 설계한 파라다이스의 중심지는 이곳 네루만 대성이었다.
"하지만 제국을 다스리기에는 너무 변방에 있는 것이 아닌지......"
"그 점은 걱정 말라. 네루만의 행정 체계와 같이 제국도 개편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 도시에는 네루만 황성과 연결된 이동 마법진이 모두 설치될 것이다."
"헛!"
"마, 마법진......"
이동 마법진이 설치된다는 말에 놀라는 기사들.
내 말대로 된다면 굳이 황성을 옮길 필요가 없었다.
필요하면 언제나 이동이 가능할 것이기에 말이다.
"데르발 경, 이번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이들의 명단을 작성해서 보고하라. 그리고 이 시간부터 네루만의 영지 스카이나이트들은 모두 네루만 제국 황실 근위 스카이나이트로 지위를 격상할 것이니 그에 알맞은 준비를 하도록."
"명!"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나만의 제국.
일사불란하게 명을 내렸다.
"그리고 경들에게도 할 말이 있다."
목숨을 걸고 나를 도와 네루만을 지켜낸 핵심 인물들.
내 말에 모두 나를 보았다.
"경들의 충정은 절대 잊지 않겠다. 그러나 작위는 수여할지언정 다른 제국들처럼 귀족들에게 영지를 하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영지의 세율은 30% 통일할 것이며, 그중에서 5%의 소출권을 작위에 걸맞게 경들에게 하사할 것이다."
"추웅!"
불만있는 표정을 짓는 기사가 하나도 없었다.
그동안 네루만을 다스렸던 나의 스타일을 알기에 넓은 땅이 생겨도 욕심을 내지 않았다.
'중앙 집권화의 권력을 이룰 것이다.'
내가 인권우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귀족들로 인하여 힘없는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나라를 지키는 귀족들은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으면 되는 것이며, 백성들은 자신들의 생업에 종사하며 노력한 만큼 결심을 얻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파라다이스의 모토였다.
"그동안 모두 수고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부탁한다."
내가 잘났지만 그렇다고 내 기사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서로 어울려 사는 아름다운 사회.
네루만 제국은 그런 곳이었다.
"추웅!"
내 말에 충을 외치는 기사들의 모습.
입가에 빙긋이 미소가 지어졌다.
★★★★★★★★★★★★★★★★★★★★★
'하아......'
카이어와 기사들의 대화를 들으며 감탄의 한숨을 속으로 내뱉는 로시아테.
황족이나 왕족, 아니,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았건만 자연스러운 위엄을 보이는 카이어의 모습.
언제나 웃음을 머금고 장난스럽게 세상을 사는 카이어였건만 달라 보였다.
알타카스가 일으킨 암흑제국의 난을 평정하고 소환된 상급 마족을 처리한 영웅.
대제국의 땅을 다스리기에 어느 하나 부족함없는 자신감과 능력을 보였다.
'이번 기회에 우리 왕국도 제국에 편입시켜 버릴까......'
왕국의 선조들에게 미안했지만 이제는 다스리기에 벅찬 하비스 왕국.
네루만 제국에 모든 것을 맡겨 백성들의 평안을 꾀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시아테 공주."
생각에 잠겨 있는 로시아테 공주의 귀에 들리는 사랑하는 님의 다정한 음성.
"네......"
"로엔 공국을 하비스 왕국에 돌려줄 생각이오. 공주의 생각은 어떠하오?"
"로, 로엔 공국을요?"
"그렇소. 듣자 하니 로엔 공국도 알타카스에게 당하여 기사들 대부분이 사라졌다 들었소. 어차피 공국은 과거 왕국의 영토였으니 이번 기회에 복속시켜 줄 생각이오."
부드럽게 웃으며 엄청난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는 카이어.
생각의 크기가 달랐다.
'라비테르가 아니라 대륙을 다 줘도... 카이어님의 마음을 채울 수 없을 것이야. 하아......'
로시아테는 또 한 번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는 세상을 다 가져도 기쁘게 생각하지 않을 남자 중의 남자라고 말이다.
★★★★★★★★★★★★★★★★★★★★★
'치잇... 바람둥이가 왜 이리 멋있는 거야.'
마음을 확 빼앗겨 버린 아이린.
좌중을 압도하는 카이어의 포스에 억울한 마음이 살짝 들었다.
여자가 많을 줄은 알았건만 뭇사람들 앞에서 과감한 애정행각을 서슴지 않는 대범성을 보이는 카이어.
어마어마한 땅덩어리를 삼켜도 전혀 기뻐하는 내색이 없었다.
'간장해야겠어. 잘못하다가는......'
대전 안에 남아 있는 자신을 비롯한 카이어의 여인들.
아름답지 않은 여인이 없었고, 개성 또한 저마다 달랐다.
그런 여인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린.
독한 마음을 먹었다.
이제부터라도 로코로이아라 불리는 꼬맹이가 하는 것처럼 닭살스럽지만 카이어에게 애교질 좀 할 것을 말이다.
★★★★★★★★★★★★★★★★★★★★★
'결국 당신이... 내 복수를 해버렸네요.'
짧은 머리칼을 버리고 이제는 제법 자라난 어색한 머리칼을 소유한 루셀, 아니, 루미니아.
가문을 멸망케 한 라비테르 제국의 라인케 백작을 카이어가 처단한 것을 알고 있었다.
'고마워요... 부족한 나를 이렇게 생각해 줘서.'
그리고 고마워했다.
이곳에 모인 여인들 중에서 가장 비천한 신분일 수도 있건만, 자신을 잊지 않는 카이어.
그를 생각하자 얼굴이 사르르 붉어졌다.
제국 기사학교에서 있었던 카이어와의 잊지 못할 첫 키스.
루미니아는 아무런 욕심이 없었다.
그저 이렇게 카이어와 함께 영원한 행복을 꿈꾸며 살고 싶을 뿐이었다.
★★★★★★★★★★★★★★★★★★★★★
'가문의 율법에 어긋나지만... 아쉬운 내가 포기해야지.'
자신이 모시는 황녀 아이지스가 사랑하는 카이어.
하이네스는 광전사 가문의 전통을 이번에는 버리기로 하였다.
가문의 이름으로 들이대기에는 너무나 커버린 카이어.
하이네스는 현명한 선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눈을 들어 봐도 자신보다 뭣 하나 꿀릴 것이 없는 여인들이 카이어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멍청하게 너는 내 거야라는 독점 선언을 할 수는 없었다.
'흥! 그래도 반드시... 애는 내가 먼저 낳을 거야!'
그래도 죽지 않는 자존심.
엉뚱한 일(?)에 승부욕을 활활 발산시키는 하이네스였다.
★★★★★★★★★★★★★★★★★★★★★
'휴우......'
카이어의 모습을 보며 길게 한숨을 쉬는 크리시아.
그와 함께 라비테르 제국 황성을 급습했다가 상당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그렇기에 암흑제국의 도발에 참전할 것인가에 대하여 왕국 귀족들 간에 말이 좀 있었다.
하지만 하일드리안 제국의 참전 때문에 자연스럽게 카이어를 도울 수 있었다.
'다행이야. 조금만 판단을 잘못 내렸다면......'
만약 카이어에게 등을 돌렸다면 그 이후에 벌어질 사태는 생각만으로 끔찍했다.
크리시아의 인생을 떠나서 케스미르 왕국 전체에 대하여 안 좋은 일이 발생할 것이 분명했다.
공간의 제약 따위는 간단히 넘어설 카이어의 능력.
만약 해적 소탕이라는 명분하에 케스미르 왕국을 공격했다면 단숨에 해상왕국은 무너졌을 것이다.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왕국을 위해서... 아니, 내 여자로서의 인생을 위해서 말이야.'
지금까지 봐온 카이어의 성격으로는 여인들이 많다고 하여 차별할 성격이 아니었다.
혹자는 바람둥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어찌하겠는가.
향기로운 꿀을 품은 꽃에 벌과 나비가 달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대륙에 다시 나오기 어려운 영웅을 차지하기 위해 여인들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티아벨도 곧 합류하겠네.'
카이어가 황제가 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새침데기 티아벨이 하일드리안 제국에서 날아올 것이다.
남자 보는 눈 하나만큼은 정확한 티아벨.
여기 있는 여인들을 비롯하여 모두 다 선의의 경쟁자.
앞으로 카이어를 위해서 누가 더 헌신할 수 있는지 크리시아는 보여주리라 마음먹었다.
바다의 여인이 아닌 이제 사랑하는 이와 꽃밭 정원을 거닐고 싶은 수수한 욕망을 소유한 한 여인의 작은 소망을 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