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장 황제를 꿈꾸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라 가면~? 초딩은 혼자 남아 게임 하지요~♬."
21세기 섬에 사는 초딩의 하루를 잘 설명해 주는 엄마가 섬 그늘에 신 버전을 흥얼거리며 불렀다.
7서클에 이르자 세상이 달라 보였다.
6서클과 달리 거칠게 없이 모든 것이 내 것 같은 이 기분.
'7서클부터는 대마법사의 칭호를 받는다 했으니 이제 나도 대마법사네. 그것도 21세기 대마법사 말이야. 흐흐흐.'
졸졸졸 흐르는 저택의 정원 길.
언제나 상쾌한 기온 덕분에 이름 모를 새들이 날아와 운치를 더하였다.
"카이어....."
내 이름을 불러주는 조심스러운 여인의 목소리.
"하하. 루셀, 오늘은 훈련이 없나 보네?"
왕국들의 바즈란 침공 소식이 들려오자 아이지스를 비롯한 제국의 손님들은 매일같이 훈련을 실시했다.
아이린 백작의 지휘 아래 편대 비행과 집단 전투술을 수련하느라 얼굴 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얼굴을 보이는 루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로서 살아가야 했기에 평소에는 남성미를 풍기는 그녀였지만, 내 앞에서는 얼굴을 붉히는 수줍은 여인에 불과했다.
"응, 오늘은 쉬는 날이야."
짧은 머리칼에 투명한 은빛 눈동자가 매력적인 루셀.
밝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으이구 귀여운 것.'
이것이 사는 맛이 아니겠는가.
이미 일부일처제를 수호하겠다는 어울리지 않는 양심 따위는 멀리 우주선에 태워 태양계 밖으로 내보낸 지 오래였다.
"그럼, 점심 같이 먹을까?"
"좋아!"
내 제안을 기다렸다는 듯이 눈빛을 빛내는 그녀.
'누가 뭐라도 넌 내 첫 여자야.'
처음에 여자인 줄도 모르고 루셀에게 향했던 내 요상한 감정에 얼마나 괴로웠던가.
그리고 그 이후에 여인임을 알고 나누었던 짜릿한 키스.
도장이 찍힌 이상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는 다 틀렸다.
맹수는 한 번 찍은 사냥감을(?) 절대 놓지 않는 법이었다.
"상급 정령은 언제쯤 소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그게..... 쉽지가 않아. 네가 가르쳐 줬지만 내 능력이 부족한가 봐."
상급 정령 이야기가 나오자 시무룩해지는 루셀.
나야 처음 계약부터 최상급 정령을 꼬실 수 있었지만 어디 그게 나처럼 쉽겠는가.
"열심히 해. 내가 좋아줄게."
"호호, 고마워."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여인의 웃음소리를 내는 루셀.
밝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인이었다.
복수를 위하여 남자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 아름다움은 빼앗기지 않았다.
"어이, 카이어 백작 나으리."
그렇게 루셀과 오붓한 시간을 가지며 정원을 산책하는 와중에 들려오는 반갑지 않는 남자의 목소리.
'헐.....'
분수가 있는 중앙 정원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일단의 무리들.
'다들 모여 있네.'
바즈란에서 찾아온 만년 손님들.
아이지스 황녀와 아이린 백작, 그리고 꼬맹이 황자 라즈시온과 로세로 경이 보였다.
'아쉽네.'
오늘 잘하면 루셀과의 짜릿한 입맞춤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건만, 꿈을 빼앗아가는 이들.
아쉽지만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았다.
"루셀, 다음에 같이 해야겠다."
"응... 괜찮아."
오늘은 같이 밥을 먹을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루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벅저벅.
그리고 분수에 서 있는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열심히 하더니 당당해졌네.'
같은 건물에 살지만 서로 바빴기에 하루에 제대로 인사할 시간이 없었다.
이들 또한 바빴지만 7서클에 오른 기념으로 머리에 저장된 마법 지식들은 모두 펼쳐 봐야 했다.
저서클과 달리 공식을 안다고 바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마나 배열과 수식이 복잡했기에 몸에 익숙할 때까지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여 요긴한 마법 몇 개는 항상 메모라이즈해 두어야 했다.
아무리 똑똑한 마법사라 해도 메모라이즈해 두었던 마법은 잠에 빠져드는 동시에 잊어버려야 했다.
자칫 잠에 빠져 망각의 칼날에 휘둘려 공식 한두 개가 연결이 빠진 상태로, 그 다음날 사용하다가는 그날이 제삿날이 될 수 있었다.
"어째, 요즘 더 바빠지신 것 같소이다, 네루만의 위대한 영주님."
로세로 경이 놀리는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하하. 저보다 여러분이 더 바쁜 게 아니었는지요."
"형아, 시간 나면 대련 좀 해줘. 요즘 부쩍 실력이 늘었는지 이제는 천 번을 휘둘러도 팔이 안 아파."
참으로 어린것이 지독했다.
저 나이 때 나도 검술을 배웠지만 저놈처럼 지독하게 하지는 않았다.
"물론이지. 말 나온 김에 오늘 점심 먹고 한판 어때?"
"정말?"
"당근 아니, 당연하지."
"고마워 형! 형은 정말 나의 우상이야."
"감사합니다, 카이어님."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즐거워하는 동생의 모습에 정이 뚝뚝 흐르는 눈길로 고마움을 전하는 아이지스.
'감사는 무슨, 다 저놈 때문에 인연이 되었는데.'
라즈시온 덕분에 도서관에서 인연이 된 아이지스.
그녀의 미소가 아름다운 모습에 흐뭇한 눈길로 응답했다.
"어떻습니까? 오늘 시간이 괜찮으시면 저희를 식사에 초대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로세로가 밥을 먹자 청하였다.
"물론입니다. 오랜만에 삼겹살 파티를 하지요."
"와! 오늘 킴치에 삼겹살 먹는 거야!"
'에이구 꼬맹이 벌써 한국 놈 다 됐네.'
대한민국 대다수 국민들이 즐겨 먹는 삼겹살에 김치.
지난 겨울에 담근 김치가 적당히 익어 요즘 매일 행복한 밥상을 맞이했다.
매일같이 노력하여 이제는 거의 내 손맛에 근접한 루시아 어머니 덕분에 김치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데르발도, 아르미스도 다 부르자.'
파라다이스가 별게 있겠는가.
이렇게 매일같이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천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나 그렇게 욕심 많은 놈이 아니었다.
남들 다 있는 정원에 분수 하나 가지고 사는 소박한(?) 네루만 영주.
누가 나를 욕할 수 있겠는가.
내 할 일 다 하고 정당하게 번 내 시간과 정성으로 장만한 나의 노력품일진대 말이다.
아니, 가끔은 폴트비란처럼 불만있는 놈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놈들에게 난 한마디 해줄 것이다.
'땅 파서 묻어버리기 전에 조용히 주둥이 닥쳐 주세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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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에 파종한 봄 밀 수확이 상당히 좋습니다. 그동안 농사를 짓지 못해 토양에 영양분이 풍부한 까닭에 몇 년정도는 이모작을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로써 식량 걱정은 끝이 났네.'
50만이 넘어가는 네루만 백성들을 10년 정도는 충분히 먹일 수 있는 식량이 벌써 확보가 되었다.
워낙 양질의 토양에 성수로 종자소독이 되었기에 넉넉한 곡식을 수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암흑 상단에서 대금은 모두 지급되었는가."
"주군이 명하신 대로 모두 제국 금화로 결제가 되었습니다."
'대단힌 놈들이야.'
돈이라면 지 마누라도 팔아먹을 지독한 암흑 상단놈들.
제국들의 감시를 피해서 대규모 상행을 잘도 성사시켰다.
"부족한 다른 것들은 없는가?"
"없습니다. 드워프님들과 엘프님들 덕분에 중요한 건물들은 대충 완성된 것 같습니다. 몬스터들도 와이번들의 식량 창고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조절이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몬스터가 골칫덩어리가 아닌 고마운 존재가 되었다.
와이번의 숫자가 400마리에 근접하는 와중에 그들을 매일 먹일 가축은 없었다.
내가 먹을 삼겹살을 그들에게 양보할 수 없는 법.
순찰을 핑계로 와이번들은 식량창고로 지정된 장소를 날며 배를 채웠다.
"그런데 주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보고를 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데르발.
"말해보게."
언제나 허심탄회하게 모든 것을 말하고 사는 데르발.
주군과 기사의 관계였지만 형제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이제는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뜬금없이 준비를 할 것 같다는 데르발.
"무슨 말인가?"
"주군, 언제까지 이렇게 계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바즈란 제국에서 하사하신 네루만의 영주와 백작위는 이제 벗어던질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껏 백작위를 사용하신 것만으로도 바즈란에 받은 은혜는 다 갚았다고 생각합니다."
뜨거운 목소리로 말을 꺼내는 데르발.
'드디어 때가 된 것인가.'
나도 현재의 내 작위가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데르발 말대로 바즈란의 전 황제에게 받았던 은혜는 이제 다 갚았다.
그가 준 백작위의 작위는 이제 내가 걸칠 옷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 혼자 진행할 수 있는 일은 또한 아니었다.
백성들과 기사들 모두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제국이라고 해봐야 네루만에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주군께서 다른 왕국에 빚을 지거나 눈치를 보실 필요도 없습니다. 주군은 저희 모든 기사들과 네루만의 자랑이자 영웅이십니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데르발의 진심이 섞여 있는 충언.
"그 말뜻은....."
"주군, 이제 왕위에 오르셔야 합니다! 대륙에 우뚝 네루만을 반석에 올려놓으시고 뭇 적들로부터 용감함을 증명하신 주군께서는 왕의 자격이 충분하시옵니다!"
'오예!!!'
왕의 자격이 충분하다는 데르발의 말에 마음의 입은 이미 무한정 찢어져 버렸다.
강씨 가문에 누가 있어 왕위에 올라본 선조가 계시던가.
이제는 우리 가문도 왕의 반열에 오를 때가 찾아온 것이다.
"자네의 충정은 알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네."
"주군! 때가 아니라니요. 대륙이 혼란스러운 이때, 주군은 충분히 성군의 자질을 몸소 증명하셨습니다. 더욱이 이제는 그 누구도 네루만을 어찌 못하지 않습니까. 왕국을 선포하시고 부족한 저희들을 이끌어주시옵소서. 이는 모든 기사들과 백성들의 간절한 소망이옵니다!"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뜨거움으로 외치는 데르발.
내가 어찌 그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아직은 정말 때가 아니다.
'라비테르 그놈들을 꺾기 전까지는 왕위에 오를 수 없다.'
입에 가시 같은 라비테르 황제.
그놈이 항복을 외치는 그 순간 나는 내 발로 왕위에 오를 것이다.
아주 멋지고 폼나게 말이다.
"데르발."
"하명하시옵소서."
"자네와 기사들의 마음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정말로 지금은 때가 아니네. 대륙이 혼돈에 이때 기다렸다는 듯이 왕위에 오른다면 전 대륙인들이 비웃을 것이네. 그깟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승리 몇 번 거뒀다고 왕위에 올랐다고 말이야."
물론 그런 말에 신경 쓸 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데르발에게 굳이 그런 내 본심을 얘기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난 이 우직한 기사에게는 평생 멋진 주군으로 남고 싶었다.
"조금만 기다리게. 내 주변의 모든 적을 발아래 꿇리고 대륙이 평안해지는 날. 그날이 바로 내가 당당한 자네의 국왕이 되어주겠네."
"주, 주군....."
감동 만배를 먹은 표정으로 눈시울을 붉히는 순진한 기사 데르발.
"우리 노력해 보세. 네루만을 이 대륙에서 가장 살기 좋은 왕국으로 만들어보세나."
"목숨을 다 바쳐 주군을 보필하겠나이다. 주군은 소신에게 있어 신보다 더 위대한 존재이시옵니다!"
이제는 신급 이상의 존재로 나를 대하는 데르발.
'왕국이라, 왕국..... 흐흐흐.'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이름, 왕국.
거칠 것이 없었다.
사실 왕족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
'이왕 하는 김에 황제 한번 먹어봐?'
아주 소박한(?) 또 다른 꿈을 꿈꾸었다.
어차피 돈도 들지 않는 꿈들.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었다.
★★★★★★★★★★★★★★★★★★★★★
"아, 아바마마 이곳은....."
붉은 안개와 피 냄새가 자욱하고 음침한 마나가 숨 쉬는 지하 공간.
화려한 궁중 예복을 차려입은 한 남자가 아바마를 부르며 조심스럽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궁에 이런 곳이 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지금껏 수십 년을 살아왔기에 황궁 어느 곳에 어떤 조각이 있다는 것까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난생처음 보는 지하 공간.
그런 곳으로 아버지인 황제가 자신을 이끌었다.
"이제는 너도 강해질 때가 되었다 생각하지 않느냐."
언제나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위엄에 휩싸인 황제.
아버지의 굵고 차가운 목소리에 황태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검을 들기보다는 책 읽기를 좋아하고, 정치에 관여하기보다는 그림이나 시를 사랑하는 라비테르 제국의 황태자.
그렇기에 황위계열 일순위이건만 동생에게 무시를 당하였다.
아니, 상당수 귀족들이 자신이 황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었다.
"아바마마... 소자는....."
등을 보이고 있는 아버지를 향해 쥐 죽은 듯한 목소리를 내는 황태자.
무서웠다.
언제나 아버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왔고, 입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친아버지는 다른 곳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릴 적에는 수없이 해보았었다.
"페르피아스, 너의 피는 연약하다. 그런 피를 이제는 이 아버지가 모두 거둬들일 것이다."
아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형수에게 선고하듯 차갑게 말을 뱉는 황제 하드베르야.
"그, 그게 무슨....."
평소 자신에게 그리 관심을 표하지 않는 황제였기에 오늘 부른다는 말에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런데 음산한 목소리로 피를 모두 거둬들인다는 황제의 말.
황태자 페르피아스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 진위를 파악하고자 했다.
"쯧쯧, 병신 같은 놈."
이어지는 황제의 병신 같다는 말.
쿠웅!
"아, 아바마마, 소자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황태자의 자리를 동생에게 물려줘도 전혀 불만이 없사옵니다. 그저, 아바마마 곁에서 평생을 살다 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죽어서 황태자의 자리를 내놓으라는 뜻으로 해석한 페르피아스.
바닥에 주저앉아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스윽.
그때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스멀스멀 사방 공간을 에워싸는 차가운 마나의 기운.
고개를 찧다 말고 흠칫 놀라는 황태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헉!"
그리고 그 순간 황태자 페르피아스는 비명을 질러야 했다.
"다, 당신은....."
황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절대 황제가 아닌 자가 빨간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가에 차가운 비웃음 하나를 베어 물고서.
"크크크."
그리고 황제가 다가왔다.
공포에 질려 바닥에 오줌을 지리고 있는 황태자를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