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장 바다 위를 날다
'헐.....'
야간 비행을 좋아했다.
특히 아르미스와 함께 나는 밤바다는 소름 끼치도록 행복한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미, 미친 거 아냐?'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해 질 무렵, 항구의 상공에서 크리시아의 와이번과 조우하였다.
그리고 다짜고짜 바다를 향해 비행을 시작했다.
'벌써 3시간째, 도대체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해가 지고 달이 훤히 빛을 뿌리기 시작하는 초저녁.
별들이 헤엄치는 푸른 바다 위를 무작정 날았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베베토도 지쳐서 돌아갈 수 없는 거리.
만약 바다 위에 착륙해서 숨이라도 돌리려다가는 바다 몬스터와 마수들에 의하여 깊은 해저 속으로 끌려 들어가 영원히 인생 빠빠이할 참이었다.
'설마 날아서 갈 생각은 아니겠지.'
케스미르 군도는 네루만 항구에서 바즈란 제국 황성만큼 이나 먼 거리.
온갖 불길한 상상 속에 속이 바짝 타 들어갔다.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총각귀신으로 죽기에는 내가 흘린 땀방울들이 억울하였다.
'어.....? 저건!'
그때였다.
갑자기 바다 위 상공 몇백 미터 위를 날던 크리시아가 바다를 향해 급강하를 시도했고, 그 순간 뒤를 따르던 내 눈에 보이는 한 존재.
'배!'
잔잔한 파도 위에서 세 폭의 긴 돛을 내리고 달빛을 받으며 항해 중인 커다란 배 한 척.
'오오오! 저게 말로만 듣던 와이번 수송선!'
현대의 항공모함으로 분류할 수 있는 칼리얀 대륙의 거대 범선.
실로 엄청났다.
중학교 때 진해에 놀러 가서 보았던 그 어떤 군함보다 더 커 보이는 와이번 수송선.
배 곳곳에 걸린 마법 등불 사이로 놈의 무시무시한 덩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호오, 저런 구조라니.'
특이한 구조였다.
여타의 배들과 확연히 다른 와이번 수송선.
중간 부분과 뒷부분에는 수십 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돛이 세 개 달려 있었고, 그 앞부분은 와이번들이 착륙해서 쉴 수 있는 장소가 보였다.
'열두 마리를 실을 수 있을 정도라면 대형 와이번 수송선이잖아.'
와이번 수송선이 있는 함대와 없는 함대는 천양지차.
만약 바다 위에서 와이번 수송선이 존재하는 함대를 만나는 순간 적국의 함대는 앉아서 무릎 꿇고 죽기를 기도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창공 위에 떠서 항해 중인 배에 블레스트 스피어 몇 방을 던지면 그 어떤 배라도 구멍이 숭숭 뚫려 가라앉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케스미르 해적들이 바다를 지배할 수 있었다.
대륙 각국이 해상로를 개척하려 하여도 해적들의 해전 능력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와이번 수송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바다를 앞마당처럼 여기고 사는 이들과 대해에서 눈뜬장님과 같은 각국 함대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수송선이 최소 수십 대는 되겠지.'
크리시아가 몰고 있는 함대도 와이번이 수십 마리라 하였다.
그런 함대가 총 7개라고 크리시아에게 들었다.
'착륙하라는 신호군.'
생각하는 와중에 어느새 크리시아의 와이번은 수송선 위의 한쪽에 착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서 붉은 마법등을 든 수병들이 착륙 신호를 보냈다.
"베베토, 멋지게 착륙해 봐."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
난생처음 배 위에 착륙하건만 두려워하지 않는 베베토.
힘찬 울음을 토하고 천천히 날개를 퍼덕이며 착륙 자세를 취했다.
파락, 파락, 파라라락.
근육질의 베베토의 날개에서 강한 역풍이 만들어지며 항해 중인 배 위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쿠웅.
온몸에 느껴지는 작은 진동.
'생각보다 재밌는데?'
지상에 착륙하는 것과 확연히 다른 배 위의 착륙 방법.
자칫 잘못하다가는 착륙하다 바다에 꼴아박을 수 있었기에 스릴이 느껴졌다.
"어머, 베베토. 착륙 비행이 멋진데."
에어 플레이트 투구를 벗고서 베베토 곁에 다가와 칭찬을 아끼지 않는 크리시아.
바다를 닮은 그녀의 푸른 머리칼이 해풍에 자연스럽게 흩날렸다.
'바다에 있으니 빛이 나네.'
크리시아도 그 누구에 뒤지지 않는 자신만의 건강함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배 위에서 보는 그녀의 모습은 독특한 그 무엇이 있었다.
간장과 만두, 눈사람과 벙어리장갑 같은 어울림.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크리시아의 목소리는 하모니를 이루며 내 가슴을 간질였다.
이 바쁜 와중에도 주책 맞은 바람기는 쉬지 않았다.
쿠오오, 쿠오오.
크리시아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 부리를 하늘로 쳐들고 기분 좋게 크르릉거리는 베베토.
그런 베베토의 날개를 쓰다듬는 크리시아.
좌우지간 부러운 녀석이었다.
"충! 사령관님을 뵙습니다."
"추웅!"
수송선의 갑판에 나타나 군례를 올리는 한 남자.
"함장님이 때맞춰 나타나지 않았다면 바다에서 미아가 될 뻔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사령관님께서는 여기 계시는 그 어떤 수병들보다 바다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호호, 모두 함장님의 가르침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함장이라면 이 배를 지휘하는 자가 아닌가.'
마법 등불 아래에 모습을 보이는 남자.
나이는 이제 50대 초반 정도로 보였고, 텁수룩한 수염과 튼튼한 몸뚱이는 전형적인 바다 사나이로 보였다.
그것도 평범한 이가 아니라 해적 대장처럼.
"사령관님, 그런데 이분이 그 유명하신 네루만의 영주, 카이어 백작님이신지요."
"네, 여기 계시는 분이 바로 카이어 백작님이십니다."
'어라? 나를 알아?'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해적 아저씨가 알은체를 해왔다.
"하하, 만나서 반갑습니다. 함장 아날타얀 백작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네루만의 영주, 카이어 백작이라 합니다."
웃으며 반겨주는 이에게 얼굴을 찡그릴 수는 없는 법.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정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저녁 정찬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호호, 듣던 중 반가운 말이네요. 오는 동안에 배가 고파서 기절하는 줄 알았거든요."
활달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크리시아.
순수한 바다에서 자란 여인이라 말에 꾸밈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밥도 안 먹고 날아왔네.'
얼떨결에 끌려온 수송선.
꾸에에엑, 꾸에에엑.
수병들 몇 명이 먹음직스러운 돼지 한 마리를 끌고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엄청나게 큰 배답게 와이번으 식량으로 사용하는 동물들도 실려 있는 것 같았다.
★★★★★★★★★★★★★★★★★★★★★
"오늘 이렇게 귀한 인연을 허락하신 인연의 주관자 로메로님께 감사의 잔을 올립니다."
챙! 채쟁!
말로만 듣고 소설에서만 보았던 배에서의 정찬.
상급자인 크리시아가 있었지만 배의 주인인 아날타얀 백작이 식사를 주도했다.
베에서만큼은 선장이 왕이라는 말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진수성찬이네.'
사실 배에서 하는 식사라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넓은 식탁에 차려지는 코스별 요리에 눈이 휘둥그레 뜨여졌다.
대귀족가의 정찬에 뒤지지 않는 성대한 상차림.
꿀에 발라 구워진 이름 모를 살진 새고기와 훈제된 각종 고기들,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생선 스튜와 튀김, 거기에 따끈따끈한 빵과 이름 모를 각종 과일들은 식욕을 팍팍 돌게 만들었다.
'마법 창고도 갖추고 있단 말이지?'
21세기 항공모함에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편의성.
마법 덕분에 장시간 항해에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
꿀꺽.
'캬아, 맛 좋고.'
맥주는 아니더라도 거의 아이스 와인 수준의 달콤한 포도주.
입맛을 돋우는 데 제격이었다.
사각사각.
미스릴로 만든 포크를 들고 부드러운 육즙이 배어 나오는 고기를 썰었다.
'오오!'
절로 터져 나오는 경탄성.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예상치 못한 음식에 기쁨은 배가 되었다.
'이번 기회에 수송선 한 번 키워봐?'
있어서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후에 영지가 안정되면 동대륙도 한 번 가보고 싶었고, 칼리얀 대륙 곳곳을 여행하고 싶었다.
그리고 와이번 수송선은 딱 맞는 크루즈 여행선이었다.
'망고 비슷한 과일도 있네.'
바다를 주름잡고 대륙과 대륙 사이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케스미르 왕국.
듣도 보도 못한 과일들 십여 가지가 예쁘게 식탁을 장식하고 있었다.
"다음 수송선은 준비되었나요?"
"사령관님의 지시대로 좌표를 잡고 항해 중일 것입니다. 예상 시간에 떠나시면 목적 지점에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함장님이 루미카르를 날려 한 번 더 확인해 주세요."
함장보다 더 높은 계급인 사령관이건만 존대어를 사용하는 크리시아.
말을 들어 판단하건대, 그가 바로 크리시아에게 바다를 가르쳐 준 스승인 것 같았다.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랜만에 펼쳐 보는 긴급 수송이지만 결코 실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말을 쉽게 하였다.
딱 보아하니 긴급 수송이라는 미명하에 수송선을 바다에 띄워놓고 그 사이사이로 와이번을 타고 이동하는 것 같았다.
오는 와중에 마법 나침반과 별들을 보며 방향을 잡던 크리시아.
만약 조금이라도 각도가 어긋나고 문제가 발생하면 그대로 바다에 추락해 죽을 수 있건만, 아날타얀 백작은 태연히 걱정하지 말라 하였다.
"혹시 그 긴급 수송 중에 사고가 난 적은 없습니까?"
고기를 썰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벌어진 일이라....."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달리 수십 년 만에 처음이라는 말을 뱉으며 확실히 대답을 하지 못하는 백작.
고기를 썰던 자세 그대로 몸이 굳었다.
"하하, 그래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바람과 자유의 신이신 보르미오님께 사령관님께 축복을 듬뿍 내려주셨습니다. 저희 왕국에서 크리시아 공주님, 아니, 사령관님은 행운의 마스코트로 통한답니다."
'허얼.....'
무슨 과학적이거나 상습적으로 안전하게 긴급 수송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크리시아가 행운을 받았기에 걱정 말라는 함장.
'썩을.'
얼굴이 굳어지며 속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나에게 하나뿐인 목숨을 저리 쉽게 취급하다니.
진작 알았다면 이런 무모한 짓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카이어님, 절 못 믿으시나요?"
입가에 살포시 여우 웃음을 지으며 정곡을 팍 찔러오는 크리시아.
"무슨 말씀을. 잘못되어도 아리따운 크리시아님과 죽음도 함께할 것인데 뭐가 두렵겠습니까. 하하하."
"정말요? 호호, 카이어님은 낭만을 아신다니까....."
낭만을 말하며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는 크리시아.
'낭만은 개뿔!'
목숨을 맡겼기에 어쩔 수 없이 경고가 함축된 말을 던졌건만, 소주에 밥 말아 먹는 낭만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봄바람처럼 매달렸다.
"카이어 백작님."
나를 부르는 아날타얀 백작의 부름.
"말씀하십시오, 함장님."
상대가 존중했기에 백작에게 경어를 사용했다.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오시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마수 한 마리 못 잡을 것처럼 약해 보이시는데 대륙을 들었다 놨다 하신다 들었습니다. 방법이 있다면 제게도 가르쳐 주십시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지으며 똥배짱을 부리는 이유를 묻는 아날타얀.
"글쎄요...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큰 나무는 조용하고자 하나 바람이 불어 나무를 흔들어대니 흔들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을 그대로 담았다.
조용히 살고자 했건만 나와 네루만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대륙의 기존 권력들.
둘 중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었다.
'배가 크니 출렁거리지도 않네.'
바다도 제법 잔잔했지만 여기는 먼바다.
2미터 정도 되는 파도 높이이건만 커다란 배는 자신의 몸으로 파도의 운동력을 흡수하고 있었다.
"하하! 듣고 보니 가슴에 확 와 닿는 말씀입니다. 카이어 백작님은 영주로서의 능력뿐 아니라 음유시인의 자질도 넘치십니다."
나의 재능을 알아주는 아날타얀 백작.
입가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내 마음을 대신하였다.
★★★★★★★★★★★★★★★★★★★★★
쉬이이이이이이익.
철썩철썩.
특이한 구조의 배였다.
언젠가 크리시아가 설명했던 파벤스라는 힘줄로 만든 것이 분명한 굵은 줄.
배의 중앙부터 후면부까지 달려 있는 돛대를 팽팽히 지켜주고 있었다.
배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이런 구조라면 배가 빙빙 돌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법진을 사용하는군.'
딛고 있는 발바닥 밑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세찬 기운.
마법진을 사용하여 배의 중심을 잡고 항해를 하는 것 같았다.
쿠오오오.
파도를 가르며 전진하건만 워낙 갑판이 높아 물이 튀지 않았다.
지정된 좌석에 누워 있던 베베토가 내 냄새를 맡았는지 고개를 들어 가볍게 울음을 토했다.
'환상이네.'
검푸른 파도 위로 수평선 끝부터 반대편 끝까지 늘어서 있는 온갖 빛깔의 별들.
비행 중에 보는 별빛 못지않게 마음에 무한 감동을 선물했다.
쿠오쿠오.
별들의 장관에 취해 고개를 들고 있는 사이, 나만큼이나 잠이 오지 않는 듯한 베베토가 나를 불렀다.
'흐흐, 쌤통이다.'
요즘 왜 이리 베베토만 보면 심술이 나는지 모르겠다.
밤이면 밤마다 놈의 행복에 찬 비명을 들으며 원통해하던 내 속 좁은 마음.
당분간 베베토에게 허락된 독수공방에 마음이 다 시원했다.
'자식, 그래도 양심은 있네.'
물론 베베토 옆 좌석에 크리시아의 점박이 암컷 와이번도 있었지만 보는 이들의 눈이 많은지 입맛만 다시는 베베토.
자신을 바라보는 내 통쾌한 눈동자를 보더니 고개를 자신의 날갯죽지에 묻었다.
'안전 고리를 저렇게 매놓으면 추락할 염려는 없겠네.'
파도가 높아도 버틸 수 있게 몸통을 덮고 있는 특수한 장치.
와이번 방어구에 연결되어 있는 가죽으로 만든 장치는 곳곳에 안전 고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전 고리는 바닥에 놓여 있는 단단한 쇠 고정 장치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쯤이면 포로 교환이 다 끝났겠지.....'
본래는 내가 나설 자리였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라이케르를 보내었다
평소 나에게 보이던 싸가지라면 충분히 제국 귀족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었다.
★★★★★★★★★★★★★★★★★★★★★
"마, 마법사들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이오?"
"마법사? 아! 그 탈주하려던 죄인들."
네루만과 하비스 왕국의 국경에 설치된 임시 협상 장소.
늦은 밤이건만 천막으로 만들어진 협상 장소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네루만의 영주를 불러주시오! 이건 약속했던 내용과 다르지 않소이까!"
라비테르 제국 포로들을 돌려받고 협상 대금을 지불하러 나타난 제국 황실에서 파견된 트레빌타 후작.
네루만의 영주라는 작자가 직접 나타나지 않고 작위도 없는 일개 스카이나이트가 협상 대리인으로 나올 때부터 기분이 팍 상해 있었다.
라비테르 제국에서는 몇몇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두려울 존재는 없는 자신이었건만 눈앞에 싸가지없는 곱슬머리 기사놈은 시건방을 떨었다.
일반적으로 기사라면 적국 귀족이라 해도 예우를 하는 것이 귀족의 예법이건만, 눈앞의 라이케르라 이름을 밝힌 스카이나이트는 후작 따위는 귀족도 아닌 것처럼 대하였다.
지금도 대화 중에 코털을 뽑으며 심드렁하게 자신의 질문에 답하는 놈.
은은하게 발산되는 강력한 마나의 기운만 아니었다면 진작 검을 뽑았을 것이다.
"바빠. 우리 주군은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이, 이이!!!"
최대한 예의를 차렸건만 툭툭 반말을 뱉는 라이케르라는 놈.
만약 기사들이 회의장 안에 있었다면 진작 결투를 신청하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회의장 안에는 달랑 두 사람뿐.
그것도 마법 처리가 된 천을 사용한 막사였기에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알았어, 알았다고. 일단 앉아. 그리고 대금 중에 마법사들거 빼고 지불해."
분노에 얼굴이 시뻘게진 트레빌타 후작.
그런 후작을 향해 손사래를 치며 앉으라 말하는 싸가지없는 스카이나이트.
"그리고 포로들 중에 1만 명이 자진으로 투항했어. 그러니까 그 1만 명에 대한 돈도 공제해 줄게."
진흙 바닥에 코 박고 넘어진 사람에게 물을 끼얹는 라이케르의 염장 지르는 말들.
트레빌타 후작은 분노를 넘어 허탈함을 맛보아야 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무식한 스카이나이트 녀석.
이런 작자를 협상 대리인으로 내세운 네루만의 영주라는 자에 대하여 분노가 이글이글 피어올랐다.
"그래서 계산을 뽑아봤는데... 선금으로 받은 100만 골드빼고 총 995만 골드만 더 받으면 될 것 같아."
끝까지 반말이었다.
"아니, 마법사들과 1만 명의 병사를 제외한다면 800만 골드면 충분할 것인데, 어찌 200만 골드가 더 붙는단 말이오!"
화가 났지만 포로들을 무사히 데려오라는 황명을 받은 트레빌타 후작.
어이없는 와중에도 계산의 부정확성을 밝혔다.
"쯧쯧, 장사 한두 번 하나. 분명 협상은 한 달 전에 했잖아. 내 말이 맞지?"
"그, 그렇소."
"그럼 그 한 달 동안 들어간 포로들 밥값하고 치료비, 기타 등등 부수적으로 발생하 비용은 누가 내야 할까? 돈도 없고 인정만 많은 주군께서 지불해야 할까, 아니면 싸가지없이 영지를 침범한 라비테르 제국에게 받아야 할까? 어깨 위에 머리통을 붙이고 사는 인간이라면 그 정도 상식은 가지고 살 거 아냐."
"....."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라이케르라는 자.
"그리고 누구는 땅 파서 장사해? 바쁜 와중에 잠도 못 자고 고생한 내 인건비는 누가 지불해? 당연히 원죄를 지은 그대들이 지불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
이제는 자신의 인건비까지 운운하는 악마 같은 놈.
"자자, 빨리빨리 서명하자고. 밤이 늦어지면 그만큼 비싼 내 인건비도 늘어나고 와이번들 숙박비도 늘어난다고."
아쉬운 자들의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라이케르.
한 장의 종이를 내밀며 서명하기를 권했다.
"왜, 싫어? 그럼 말아 쩨쩨한 돈 몇 푼에 포로 협상이 결렬되면 그 성격 음흉한 황제가 좋아라 하겠네. 후작이라는 작자가 도무지 융통성이 없다고 말이야."
음흉한 황제를 운운하는 순간 온몸을 부르르 떠는 트레빌타.
라이케르라는 자의 말이 맞았다.
지금 이 순간 돈 몇 푼에 명을 완수하지 못하면 그 책임은 모두 후작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뻔하였다.
'으드득! 오늘의 이 수모는 반드시 갚아줄 것이다!'
허탈함과 분노의 열탕 속에서 이를 가는 후작.
머리 색과 똑같은 블루빛 눈동자를 가진 라이케르라는 놈을 노려보았다.
네루만을 다시 공격하는 순간, 저놈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잡아 찢어 죽일 것이라고.....
★★★★★★★★★★★★★★★★★★★★★
'으으! 정말 지겹다!'
아침까지만 해도 좋았다.
이른 새벽 따뜻한 빵에 수프를 마시고 수송선에서 이륙하였다.
그리고 찾아온 동트는 태양의 광명을 바라보며 사나이 웅지를 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끝도 없고 쉴 곳도 없는 바다를 가로지르기를 몇 시간.
섬 하나 보이지 않는 대해는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다.
육지와 달리 처음이나 끝이나 똑같은 바다의 질릴 것 같은 표정.
치밀어 오르는 구토를 참으며 앞서 날아가는 크리시아의 뒤통수만 볼 뿐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날아온 거야? 제대로 가긴 가는 거야?'
나 때문에 고생길을 자초하고 나선 크리시아.
그런 그녀를 못 믿는 내 자신이 유치했지만 바다에 코 박고 죽고 싶지는 않았다.
'베베토도 조금씩 지쳐 가는데.....'
대충 계산해 보아도 6시간 정도는 쉬지 않고 날아온 것 같았다.
시간당 40킬로씩만 잡아도 240킬로가 넘는 거리.
어젯밤의 비행과 수송선의 이동 거리까지 합산하면 400킬로 정도는 넘게 움직인 것 같았다.
현대의 자동차나 비행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곳에서는 엄청난 이동 거리였다.
그것도 망망대해를 움직이는 것치고는 말이다.
쉬이이이이이이익.
그때, 앞서 날던 크리시아의 와이번이 밑으로 고개를 처박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오오오! 저, 저것은!'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오는 하나의 존재.
'섬이다! 섬!'
영화나 만화 같은 것에서 바다를 항해하던 이들이 육지를 발견하면 환호성을 지르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무섭고 두려운 바다의 품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
바다 위에서 우뚝 솟은 작은 섬 하나.
답답했던 숨통이 팍! 하고 터졌다.
쇄애애애애애애액.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베베토도 기분 좋은 울음을 토하며 급강하를 시작했다.
나도 그렇지만 베베토도 처음인 바다 건너기.
영혼의 한줄기 축복 같은 섬의 해변가에 순식간에 착륙하였다.
"하아!"
착륙하자마자 안전 고리를 풀고 모래사장 위로 뛰어내렸다.
'이제 살 것 같네.'
그리 크지 않은 섬이지만 나무들도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숲을 보자 눈에 생기가 돌았다.
"힘들었죠?"
크리시아가 상큼한 미소를 날리며 힘들었지 않냐 물어왔다.
'분위기 참 묘하네.'
바다에 사는 인어처럼 싱싱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크리시아.
매력적인 여인과 함께 인간의 기척이 전혀 없는 무인도에 착륙하자 기분이 묘해졌다.
더군다나 나에게 호감을 팍팍 표하는 크리시아.
그녀는 눈빛이 마주칠 때마다 흐드러지게 핀 봄꽃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륙과 케스미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섬이에요. 우리 바다 사람들에게는 안식의 뿔피리라 불리는 곳이에요."
'안식의 뿔피리?'
특이한 이름으로 불리는 섬이었다.
"저기 보이는 바위에 물이 차면 뿔피리 소리가 납니다. 그 소리는 이곳에서 수십 킬로까지 울려 퍼진답니다."
"아!"
이제야 생각이 났다.
이 섬에 다다르기 전에 희미하게 들려왔던 뿔피리 소리.
처음에는 투구가 고장난 줄 알았었다.
"항해 중에 이곳 뿔피리 소리가 들리면 모두들 안식을 얻고 평안을 얻게 됩니다. 카이어님도 이번에 직접 경험해 보셨겠지만, 망망대해 속에서 이런 섬 하나를 만나면 바다 사람들은 눈물까지 흘리게 됩니다. 섬은... 우리들에게 어머니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크리시아의 섬 예찬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할 거예요."
'저, 점심!'
생각해 보니 배가 고팠다.
"제가 빵과 물을 준비해 왔으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말과 함께 자신의 와이번에게 다가가는 크리시아.
"섬에 돼지나 그런 식용동물들은 없겠지요?"
"네? 네에..... 안타깝게도 섬이 작아서."
새는 보이는 것 같았지만 잡아먹기에는 턱없이 작아 양에 안 찼다.
그리고 나는 이런 곳에서 빵 몇 쪼가리로 배를 채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베베토!"
쿠오오오오!
모래사장을 뼈다귀를 감추는 개처럼 발톱으로 파며 놀고있는 베베토.
내 부름에 고개를 쳐들었다.
"물고기 사냥 가자!"
쿠오, 쿠오오오!
"플라이!"
베베토를 기다릴 것도 없었다.
플라이 마법을 펼치며 해변을 박찼다.
"카, 카이어님!"
갑자기 날아오르자 놀라 내 이름을 부르는 크리시아.
"하하, 나뭇가지 좀 주워다 놓으십시오."
크리시아에게 말을 하며 바다 위를 날아올랐다.
맑고 투명하였기에 내장까지 다 보이는 바다 내부.
마법사만이 펼칠 수 있는 물고기 사냥법을 생각하며 마나를 활성화시켰다.
금강산도 식후경.
아무리 바빠도 밥은 제대로 먹고 살자가 내 인생 지론이었다.
한 번 지나간 자장면이 다시 오지 않는 것처럼, 한 번 놓친 식사 시간은 인생에 있어서 다시 올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