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대마법사-107화 (107/221)

제107장 로코로이아

쇄애애애애애액.

점점 살벌한 추위의 원조인 북쪽과 가까워지는 산들.

에어 플레이트를 착용하지 못했다면 얼어 죽어도 진작 얼어 죽었을 추위가 투구 사이로 보였다.

'썩을, 고작 감자 몇 개라니.'

나에게 패배한 칸타하르의 아버지 아이쉰 족장은 고분고분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테미르 종족이 처한 어려운 환경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는 내가 족장의 낚시질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까. 너무 쉽게 이겼어.'

그래도 일족의 족장이자 위험한 산맥에서 전투로 다져 왔을 족장.

후에 빠져나갈 변명거리를 만들기 위해 일부로 패배했는지도 몰랐다.

파라라라라락.

'그래도 부족 깃발을 얻었으니 다행이지.'

대주술사 로코로이아를 만나기 위해서는 아이쉰 부족 마을에서 와이번을 타고 몇 시간을 더 날아가야 했다.

가는 와중에 몇 개의 테미르 부족 마을을 지나쳐야 했고, 그 부족들 중에는 와이번을 소유한 이들도 있기에 쓸데없는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쉰 부족을 상징하는 하얀 마수 가죽에 그려진 큰 바위 그림이 전투를 막아주었다.

로코로이아가 허락한 부족의 깃발.

그 깃발을 소유한 자를 공격하는 자는 로코로이아를 무시하는 일이라, 감히 다른 종족들은 공격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단 말이야.'

바즈란 제국과 국경을 맞댄 리토르 산맥 부근에 부족들이 넓에 퍼져 있었지만, 대주술사인 로코로이아는 네루만에서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오라크 성에서 5시간 정도의 비행 거리.

북쪽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는 줄 알았건만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큰 부족은 수만 명의 전사가 있다 했지. 대충 다 합치면 20만 정도 되려나.'

족장이 자신의 막사에서 먹을 거라고 준 것은 맛이 비린 산감자였다.

일반 감자도 아니고, 야생에서 캘 수 있는 산감자는 먹을 수는 있지만, 그 비린 독특한 맛 때문에 먹을 것이 없을 때나 억지로 먹어야 하는 고약한 식량이었다.

그런 산감자를 떡하니 나에게 대접한 족장.

보아하니 곧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굶어 죽거나 몬스터들에게 비상식량으로 전락할 것이 안 봐도 뻔하였다.

'성수처럼, 주술사가 만들어준 주술품이 없으면 마수들이 공격해 온다 이거지.'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있었다.

마수들을 막아주는 성수처럼 주술사가 만든 주술품들이 마수들의 침입을 막아준다는 것.

그런 까닭에 척박한 산맥에 사는 테미르 부족들은 절대적으로 주술사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 하였다.

'응?'

그렇게 얼마쯤 몇 개의 부족 마을을 지나고, 히말라야 산맥처럼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산맥을 지나치는 순간, 저 멀리 보이는 일단의 와이번 떼들.

'야, 야생 와이번!!!!!'

눈이 홱까닥 돌아갔다.

대륙에서 돈을 주고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와이번.

한두 마리도 아니었다.

무려 백여 마리가 넘는 크고 작은 야생 와이번들이 무리 지어 비행을 하며 날아가고 있었다.

당장 잡아간다면 와이번 걱정을 싹 씻어버릴 수 있는 숫자.

꿀꺽 침이 넘어갔다.

'허억! 참새도 아니고 왜 이리 많아!!'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무리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엄청난 산맥 저 멀리서 무리 지어 날아가는 또 다른 와이번들.

늦은 가을, 벼 위로 날아드는 참새 떼처럼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캬아, 이곳에 둥지를 틀고 와이번 사냥하면 딱이겠네.'

부화하기 전에 성수로 담그지 않으면 태어나는 순간 흉포한 야생의 몬스터에 불과한 와이번.

술 광고 표지에 등장하는 섹시한 모델들처럼 보기 좋은 그림에 불과했다.

"저깁니다! 저곳이 어머니의 마을입니다!"

와이번들을 향해 침을 흘리고 있을 때, 뒤에 타고 있던 칸타하르가 마나를 돋워 소리쳤다.

길잡이 노릇을 위해 휘험한 이곳까지 따라온 것이다.

'와우!'

와이번을 바라보다 산모퉁이를 하나 돌았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등장하는 신전.

'피라미드?'

이집트 피라미드 정도는 아니지만 이런 산 꼬라지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규모의 피라미드 형태의 신전.

'화, 황금!!!! 오, 신이시여!'

더욱더 놀라운 것은 석양의 빨간 빛과 어울려 눈을 아리게 만드는 노란 광채.

피라미드 최상층에 서 있는 달 문양.

족히 10미터 정도 크기가 되는 달 문양은 샛노란 황금 덩어리로 만들어져 있었다.

"어머니의 수, 수호 전사들입니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

칸타하르가 놀라 소리친 후에 베베토가 적을 발겨하고 울음을 토했다.

'켁.....'

베베토를 발견하고 속속 이륙하는 와이번.

족히 100마리가 넘을 테미르 족의 회색 와이번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걸 어째?'

아무리 나라 해도 100마리의 와이번은 무리였다.

빠른 결정을 내려야 했다.

위험한 곳에 온다는 이유로 최신형 와이번 방어구를 베베토에게 착용시켰지만, 수십 발의 스피에 맞는다면 그대로 한 많은 이 세상과 작별해야 할 판.

도망을 가야 한다면 와이번들이 상승하고 있는 지금밖에 없었다.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무식하면 용감해지는 법.

목적을 위해서 사소한(?) 위험은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엘리트들이라 이건가?'

아이쉰 부족 깃발을 소지하고 있었지만, 제국 스카이나이트 복장을 하고 있기에 대륙 공용어로 누구냐 묻는 수호 전사들.

짧은 시간에 사방을 완벽하게 포위하였다.

"아이쉰 부족의 족장인 신성한 바위 앞의 첫 번째 장자의 큰 손가락 칸타하르라 합니다. 중요한 일로 일족의 어머니를 찾아뵙고자 왔습니다!!!!!"

정지 비행 상태로 전환한 베베토 앞에서 구형 스피어를 들고 있는 수호 전사에게 마나를 돋워 힘차게 소리치는 칸타하르.

만약 아이쉰 부족 깃발이 없었다면 지금 난리가 났을 것이 분명했다.

"저자는 누구인가! 왜 아이쉰 부족의 족장인 신성한 바위 앞의 첫 번째 장자의 큰 손가락이 제국 복장을 하고 있는가? 루아티카파 다아노니아 하르파티아!!"

공용어로 지껄이다 뒤에는 테미르 어로 사용하는 수호 전사.

"아티파오... 루카샤, 카이어!"

칸타하르가 테미르 어로 뭐라 소리치면서 마지막에 내 이름을 말했다.

파앗!

말이 끝나자 수호 전사들의 스피어에 마나가 발사 상태로 변해가는 것이 보였다.

'한 번 해보겠다는 거야!'

그냥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 법.

머릿속으로 방어 마법과 공격 마법들이 순식간에 그려졌다.

놈들이 방심하는 틈을 탄다면 정령과 마법으로 도망을 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였다.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그때, 갑자기 신전 쪽에서 날카로운 신호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흠칫 놀라는 수호 전사들.

"착륙하라, 아래로 착륙하라!"

스피어로 지상을 가리키며 착륙하라 소리쳤다.

'자식아, 귀 안 먹었어!'

마나를 돋워 소리치는 수호 전사를 살짝 노려봐 주며 베베토를 지상에 착지시켜 갔다.

'상당히 오래된 건축물이야.'

주술사들이 머무는 곳이 분명한 신전.

산들과 산 사이에 위치한 볼록하게 솟은 거대한 분지 위에, 높이 10미터는 되는 돌 성벽 안에 피라미드 건축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런 분지에 자리 잡은 와이번 격납고로 보이는 공터.

100마리 와이번의 호위를 받으며 테미르 부족의 심장부에 착륙하였다.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 자식은 왜 이렇게 겁이 없어?'

똑똑하기 그지없는 베베토가 위험을 모를 리가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뼈와 살이 분리될 수도 있건만, 태연하게 날개를 퍼덕이며 우아하게 착지하는 베베토.

주인을 닮아 간이 제대로 부은 것 같았다.

차자자작.

베베토가 착륙을 하자 테미르 놈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검은 겁옷과 망토를 착용한 기사 급 병사들이 창을 겨누었다.

'특별 제작된 갑옷이군. 누군지 몰라도 장사 제대로 해먹었네.'

딱 보아도 테미르 놈들이 만든 갑옷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륙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작품.

테미르 놈들과 교역을 해 먹고사는 놈들이 제공해 준 것이 분명했다.

쿠르르르르르르르!

카이이이이이이이!

숫자도 많건만 베베토 머리 위를 날며 신경질적으로 울부짖는 와이번.

수컷들이 분명했다.

그런 수컷들의 도발적인 울음소리에도 와이번의 제왕이라도 되는 양 스윽 고개를 돌려 뭐야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베베토.

주객이 전도된 것처럼 느껴졌다.

"무기를 버려라!"

와이번 위에서 내린 수호 전사 놈이 무기를 버리라 하였다.

'구형 에어 플레이트까지 착용하고..... 당장 전력으로 사용해도 문제없겠는데.'

몇 달 전 영지를 공격했던 놈들은 가죽 갑옷이나 옷도 걸치지 않은 자들도 있었건만, 이곳에 있는 놈들은 정식으로 에어 플레이트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아이쉰 부족은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건만, 한 벌에 수만에서 수십만 골드를 처바른 수호 전사라는 놈들.

이곳도 상식이 숨 쉬는 공간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딸깍.

이미 착륙까지 한 상태라 검을 차고 있으나 별 차이가 없었다.

검집과 투구를 풀러 칸타하르에게 건넸다.

"잘 가지고 있게."

"목숨처럼 지키겠습니다, 영주님."

내 영지의 기사도 아니건만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칸타하르.

이번 일만 잘 풀리면 데리고 있어도 될 것 같았다.

"따라와라."

"베베토, 놀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쿠오오! 쿠오!

걱정 말라는 듯 내 손을 긴 부리로 비비는 베베토.

'벌써 저녁이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하루의 일과.

늦게 일어난 죄로 오늘 하루 개고생의 벌을 받는 것 같았다.

★★★★★★★★★★★★★★★★★★★★★

'놀랍군, 놀라워!'

수호 전사라는 놈들에게 끌려온 것은 피라미드처럼 생겨먹은 신전의 내부.

놀랍게도 바깥은 살이 에일 정도로 매섭게 추웠건만, 피라미드 내부는 거의 따뜻한 봄날처럼 훈훈했다.

'마법.....'

대륙의 때가 안 묻었을 줄 알았건만, 마법은 이곳까지 침투해 있었다.

'그런데... 왜 이리 찝찝해?'

일반적인 마나의 기운이라면 별문제가 없었겠지만, 묘하게 거슬렸다.

마법진이 드러나지 않고 석벽 속에 묻혀 있기에 살펴볼 수 없었지만, 내가 불쾌한 일이라면 단 하나.

'흑마법, 제기랄.....'

위험에 대한 경고 수준이 최고 수위에 이르렀다.

만약, 이곳이 대륙에서 자취를 거의 감춘 흑마법사들의 영향권 안에 있다면 내 안전에 심각하게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로코로이아인지 코코코인지 걸리기만 해봐!'

"뭐 하나! 움직여라!"

'아따, 아자씨 성격도 급하시네.'

끌려가면서도 미로 같은 피라미드 내부를 머릿속에 담았다.

호랑이 굴에 버금가는 이곳.

헤헤거리며 끌려갔다가는 오늘 밤, 개 밥통 속에서 살점이 굴러다닐 수도 있었다.

저벅저벅.

앞뒤로 포위한 10명의 수호 전사들.

놈들의 몸에서는 상급 블레이드 기사의 냄새가 났다.

테미르 놈들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정예가 분명했다.

'이 정도 퇴색할 정도라면 최소 수백 년은 넘었겠는데.'

피라미드 안은 테미르 어로 보이는 요상한 문자가 가득 쓰여 있었고, 수많은 황금 벽화가 그러져 있었다.

인간과 몬스터들의 전쟁도 있었고, 처음 보는 신들의 모습과 천지창조 같은 탄생, 곡식 등등, 인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미개한 줄 알았건만, 나름대로 문명인이잖아.'

고대로부터의 관습을 유지하고 살아온 것이 분명한 테미르 종족.

과거에는 대륙인들보다 더 위대한 문명인이었던 적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 동안 3미터 높이의 회랑을 걸어 피라미드 내부를 걸었을까, 갑자기 확하고 눈부신 빛이 보이더니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와우!'

그리고 다시 한 번 터지는 감탄사.

피라미드 안에 이런 대규모 공간이 존재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바즈란 제국 영광의 홀 정도의 넓이.

'세상에 하늘이 다 보이네!'

더욱이 놀랍게도 홀의 중앙 천장은 내가 오면서 보았던 황금 달이 보였다.

'공중부양 마법이다.'

지지하는 물체도 없건만 피라미드 상층부에 찬란하게 떠있는 황금 달.

영구 마법에 걸려 있는 듯 그냥 떠 있었다.

'보호 마법이 유리창 역할을 하다니. 고서클 마법사의 솜씨다, 거의 8서클에 이른.....'

충격이었다.

건달프 사부 말고도 대륙에 8서클 마법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동시에 등이 서늘해졌다.

만약 이곳에 8서클 마법사가 있다면 최소 백 살까지 살고자 하는 내 장수 계획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할 수 있었다.

파밧.

긴장감이 높아지자 마나홀이 활성화되었다.

'전사들의 숫자는 모두 50명, 이곳저곳에 마법진. 완벽하게 보호를 받는군.'

제단으로 보이는 100미터 전방의 상층부.

골드 드래곤이 조각된 5미터 정도의 대형 향로에서는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고, 청아한 향기가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 야생 와이번 떼를 보고 욕망의 침을 삼켰건만, 이제는 위험 때문에 침이 넘어갔다.

'로코로이아, 어서 나타나라!'

예상대로 사악한 할망구가 나타난다면 안면에 파이어 볼을 날리고 튈 생각이었다.

흑마법의 기운이 물씬거리는 이곳에서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진짜 마지막 기회일 것이 분명했다.

"아쉬포티아... 아르미스다니아....."

'으으!'

공포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홀 안에 울리는 낮은 목소리.

테미르 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목소리는 내 심장을 얼음덩어리로 만들었다.

"라이케쉬... 포르하드아!"

화르르르르르르!

갑자기 확 커지는 목소리와 함께 향로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불길.

불쇼라면 좋겠지만, 이것은 존재하는 위험한 현실.

마나홀을 활성화시켜 다가올 위험을 대비하였다.

"꿇어라! 네루만의 영주여!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드바이스님께 선택받은 모든 일족의 어머니 로코로이아님이시다! 영광으로 어머니를 맞이하라!"

등 뒤에서 들려오는 차가운 경고.

'참나, 우리 어머니께도 무릎 꿇지 않는 난데, 어디서! 콱!'

철퍽.

마음과 달리 그냥 꿇었다.

뭐 무릎 꿇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아직 로코로이아라는 테미르 족의 대장을 보기 전에 사고를 칠 수 없었다.

베베토를 타고 날아오는 동안 빳빳해진 다리도 풀 겸, 무릎꿇기 운동이라 생각하였다.

사박사박.

무릎 꿇는 내 귀로 들리는 사박거리는 가벼운 발자국.

한둘이 아니었다.

적어도 열 명 이상의 발자국 소리.

묵직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모두 여자들.

화르르르르르.

어찌했는지 모르지만 다시 한 번 피어오르는 향로의 불꽃.

"라히바히드 아쉬라이카암 하시테이아....."

알아들을 수 없지만 듣기에 썩 괜찮은 합창 소리가 홀 안을 울렸다.

"고개를 들라, 네루만의 영주여."

'얼라리요?'

나에게 고개를 들라 말하는 여인의 목소리.

사악한 흑마법사 할망구라 예상했건만,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아직 앳된 여인의 음성.

스윽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멀리 떨어져 있건만, 마나 덕분에 2,0의 시력을 넘어서는 내 눈에 보이는 장면.

'여자아이?'

제단 밑에 위치한 달이 그려진 황금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 아니, 소녀.

이제 갓 15살 정도 됐을까?

'황금 머리칼?'

놀랍게도 대륙에서도 보기 드문 진한 황금 머리칼이 은빛끈에 묶여 검은 광택의 사제복 위로 매끄럽게 흘러내려 있었다.

'하아, 완전 귀엽네.'

상상하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90프로 이상을 사악한 할망구라 생각했건만 황금 의자에 앉아 있는 로코로이아라는 대주술사는 이제 갓 열다섯 살의 풋풋한 청춘.

한눈에 보아도 태양 한 번 본 적 없는 것처럼 진주를 곱게 갈아 바른 것 같은 투명한 피부, 살짝 치켜진 눈썹, 보랏빛이 감도는 눈동자, 작은 콧날과 그에 어울리는 입술.

꿀꺽.

다시 침이 넘어갔다.

'에라이, 예비 범죄인아.'

아직 나도 미성년자였건만, 나보다 더 어린 새파랗게 자라나는 새싹을 보고 침을 삼켰다.

내 몸속에 흐르는 야성 수컷의 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몹쓸(?) 놈이었다.

"그래, 무슨 일로 이곳까지 왔는가? 목숨이 담보 되지 않는 이곳에 말이야....."

테미르 종족에게는 신과 같은 존재였기에 반말하는 것이 아주 익숙해 보였다.

'저 어린것이 테미르 놈들을 조종하는 우두머리라 이거지?'

고개를 든 상태로 로코로이아를 보았다.

십여 명의 황금 달이 그려진 검은 사제복을 착용한 여인들의 호위를 받는 로코로이아라는 소녀.

아무래도 믿기지 않았다.

나도 저 나이 때는 플레이스테이션이나, 닌텐도 따위를 가지고 놀았었다.

그런데 나보다 젊은(?) 것이 제국을 위협할 정도로 지모를 겸비했다 믿을 수 없었다.

어머니 뱃속에서 정치를 배우지 않았다면 모를까.

더욱이 말하는 와중에도 아낌없이 호기심을 보이는 로코로이아라는 소녀.

'수상해.'

보이지 않았지만 명탐정 기질이 발휘되었다.

"하하. 위명이 자자하신 로코로이아님을 알현하기 위해서 한 번 찾아와 봤습니다. 소문에 듣던 것보다 더욱 아름다우십니다."

특기인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며 칭찬 신공을 발휘했다.

반짝반짝.

평범한 칭찬에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는 소녀.

'응?'

그때 보였다.

여인의 귓가에 걸려 있는 요상한 귀걸이.

마치 보청기처럼 보이는 귀걸이는 검은 재질로 만들었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마법 수신기!'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마법의 대가인 스승에게서 전수받은 마법 지식 중에는 저런 마법 수신기가 존재했었다.

'딱 걸렸어, 요 여우야.'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지 않나 의심이 들었다.

"말을 삼가라. 이곳은 어머니가 잠들어 계신 달의 제. 허망된 말을 지껄이면 신께서 노하실 것이다."

반짝이는 눈빛과 달리 말하는 싸가지는 세상 다 산 어르신들의 어투.

'후후, 귀여운 것.'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눈앞의 로코로이아라는 소녀가 조종당하고 있음을 짐작하였다.

'제법 연기도 할 줄알고. 탤런트 하면 대성하겠어.'

이번 기회에 엔터테인머트 회사 하나 차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 귀여운 미모에, 은방울 같은 목소리에, 춤 좀 가르치고, 마법 좀 가르치면 세계적으로 대박을 터뜨릴 수 있는 작품이 될 것 같았다.

"무례하였다면 죄송합니다. 사실은 테미르 종족과 거래를 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지금 누구와 거래를 하시는지 모르지만, 지금 거래하는 반절의 금액으로 원하시는 모든 물건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식량뿐만 아니라, 최신형 블레스 스피어도 말입니다."

떡밥을 던지고 씨익 웃음을 지었다.

암중에서 나를 감시하고 대주술사라 불리는 로코로이아를 조종하는 자.

대가리가 오크 수준만 아니라면 파격적인 내 조건을 덥석 물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짐시간의 침묵이 있은 후, 무슨 지시를 받은 듯 입을 여는 꼬맹이.

"쉽게 결정할 성격이 아닌 것 같다. 잠시 회의를 해야 할 것 같으니 물러나 있으라. 곧 부를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이거 재미있는데.'

인생이 권태롭지 않았지만, 비밀을 파헤치는 묘한 쾌감.

귀여운 여우의 말에 나를 인도하는 수호 전사를 따라 홀 밖으로 나가며 사방을 순식간에 훑어보았다.

'저곳이군.'

그리고 보았다.

꼬맹이 머리 10미터 위에 반짝이는 검은 크리스털.

그곳을 통해 나를 살피고 있음을 알아챘다.

'하아, 그런데 저녁밥 안 주나?'

오늘 하루 먹은 거라고는 맛없는 산감자 몇 알.

떡 벌어진 진수성찬은 아니더라도 달걀 프라이에 하얀 빵과 꿀, 그리고 고기 수프가 언제나 대기하고 있는 창공단이 그리웠다.

'이래서 집 나오면 왕고생이라니까.....'

휴가를 마치고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들어서면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

역시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물에 밥 말아 김치에 먹어도 내 집 밥이 최고라고.....

★★★★★★★★★★★★★★★★★★★★★

"저자가 정말 네루만의 영주란 말이오?"

"그런 것 같소이다. 어둠의 상단 놈들이 알려준 정보에 의하면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애송이 스카이나이트가 바즈란 제국 황실을 시끄럽게 했다 하였소."

"느낌이 별로 좋지 않소. 저놈의 검은 눈동자는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고....."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작고 연한 붉빛 마법등 밑.

세 명의 검은 로브를 착용한 이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좋은 조건이 아니지 않소. 그동안 어둠의 상단 놈들에게 알면서도 당했음이 너무 원통하오. 놈들이 낌새를 채지 못하도록 우리들이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지만, 놈들과 교역으로 손해 본 황금을 돈으로 따지자면, 지난 10년 동안 수천만 골드는 될 것이오. 하잘것없는 수형 스피어를 10만 골드씩이나 받다니..... 으드득, 세상에 나가는 순간 놈들의 씨를 말려 버릴 것이오!"

"참으시오, 아직 그분의 무덤을 열지 못했지 않소. 그곳을 열 때까지만 참으시오. 만약, 우리가 그분의 무덤을 열고 절망의 힘을 소유한다면, 그깟 어둠의 상단 놈들이 문제겠소. 대륙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오."

"흐흐, 그래서 이곳에서 쥐 죽은 듯이 참고 있는 것이 아니오."

누가 보는 이도 없건만 얼굴도 드러나지 않게 깊숙하게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세 명의 인물.

음산한 마나가 그들의 주변을 휘돌고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소이까? 네루만의 영주라는 자와 거래를 하겠소?"

"더 이상 손해를 볼 수 없소이다. 얼마 전 테미르 전사 놈들을 보내 확인해 보지 않았소이까. 네루만은 더 이상 만만히 볼 곳이 아니오. 그러니까, 영주라는 작자가 냄새를 맡고 이곳까지 기어들어 오지 않았겠소이까."

"그럼 거래를 하는 것으로 결정 내린 것으로 하겠소. 신형 스피어까지 갖춘다면 우리의 전력은 몇 배로 늘 것이오."

"휴우, 어서 빨리 그분의 무덤을 열어야 할 터인데. 그래야 5서클의 저주에서 해방될 것이 아니오."

"흐흐. 걱정하지 마시오. 곧 로코로이아의 환생이라는 계집이 성년이 될 것이오. 그때, 그분의 무덤이 열릴 것이니 그때까지만 참읍시다."

"크크크....."

"어둠의 힘을 위해....."

사방이 사일런스 마법으로 차단된 방.

흑마법사가 분명한 세 명의 마법사들이 음산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들이 지금 거래를 하고자 하는 네루만의 영주가 어떤 자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

와작와작.

'맛있다.'

그래도 제법 손님 좀 치러봤는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밥이 나왔다.

그것도 고기도 올려와 있었고, 수프와 빵도 있었다.

루시아 어머니가 만들어준 음식보다는 맛이 없었지만, 시장이 반찬이었다.

"꺼억....."

몇 명의 남자가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지만 모조리 쓸어 담았다.

어둠 속에서 로코로이아를 조종하는 놈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체력 보충이 먼저였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아이쉰 족장과 칸타하르으 정보가 없었다면 임기응변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무패라 하지 않던가.

'그런데 어둠의 기운은 누가 만들어낸 거야?'

지금껏 네루만을 침공한 테미르 종족들 중에는 흑마법사는 고사하고 마법사도 없었다.

'고난이도의 마법 지식이 없다면, 이런 엄청난 마법 건물을 건설할 수 없다. 분명, 대마법사다.'

산맥 속에 자리 잡은 피라미드.

대륙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정도 수준이면 대륙을 발칵 뒤집어놓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부럽네.'

나도 마나의 길을 걷는 마법사.

아직까지 요원한 7서클의 벽은 보이지 않는 무게로 어깨를 짓눌렀다.

마법이라는 것이 마나가 많다고, 알고 있는 지식이 많다고 해서 서클 벽이 깨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깨달음.

고승이 새벽에 홀로 깨어 풍경 소리만으로도 생사의 진리를 깨달아 득도하는 것처럼 마법도 그러하였다.

그런데 사부 이외에도 인간이 절대 이룰 수 없다는 8서클 마법에 이른 자.

질투가 나지 않으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로코로이아님이 부르신다. 밖으로 나오라."

밖에서 들려오는 전사의 외침.

나에게 배정된 방에서 밖으로 나갔다.

밥도 먹었겠다 이제부터 두뇌 싸움이 필요할 때였다.

'로코로이아... 훗.'

이름처럼 귀여운 소녀.

"갑시다."

당당하게 전사들 앞을 걸었다.

미녀를 만나러 가는 길.

인생의 또 다른 즐거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조건을 수락하겠다."

'앗싸!'

고개를 끄덕이며 교역을 허락하는 로코로이아.

처음 올 때 목표는 칸타하르의 말처럼 테미르 종족을 도와주기 위해서였지만, 이제는 목표가 바뀌었다.

대마법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이곳 신전의 해부와, 저 로코로이아를 조종하는 자들을 끄집어내는 것이 목표였다.

예전에 내가 알고 있는 테미르 놈들이라면 그리 큰 적이 아니었지만, 지금 마주친 놈들은 큰 위험을 내재하고 있었다.

자칫 네루만의 평화를 송두리째 파괴할 정도로.

"로코로이아님의 현명하신 선택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가까이 보니까 더 귀엽네.'

지금 나와 꼬맹이와의 거리는 20미터.

그 사이에 20여 명의 수호 전사들이 양옆으로 서 있고, 10여 명의 여자 주술사들이 존재했다.

"첫 번째 계약으로, 약 10만 명이 겨울을 날 수 있는 밀을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예상했던 첫 번째 품목.

"두 번째는 블레스트 스피어 300발을 부탁한다. 가격은 한 발당 제국 화폐로 5만 골드로 하겠다."

'헉! 300발?'

첫 거래부터 화끈하였다.

겨우내 10만 명이 먹을 수 있는 밀이라 해야 상등품으로 구입해도 수십만 골드면 되겠지만, 블레스트 스피어 300발은 의외였다.

'무언가 있다.'

말투가 소녀가 할 말이 아니었다.

가까운 곳에서 살피니 얼굴 근육과 말투가 어색하였다.

앵무새처럼 조잘거린다는 느낌.

말을 하면서도 귀찮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제는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많은 스피어는 시간이 제법 걸릴 것입니다."

"왜? 그 정도 능력도 안 되는 것인가?"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300발의 블레스트 스피어라면 제 영지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스피어를 거래하기 전에 로코로이아님께서 중요 부족들의 수장을 불러 네루만을 침범하지 않겠다 확언해 주십시오."

"음....."

"만약 확언해 주신다면 이번 해가 가기 전에 거래를 성사 시키겠습니다."

내 말에 고민에 빠지는 로코로이아.

"좋다, 네 말대로 하겠다."

"그럼 언제....."

"앞으로 일주일 후, 내 성년식에 모든 일족의 족장들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 확언해 주겠다. 또한, 그대도 약속을 그때에 이행해야 할 것이다."

'성년식?'

아무리 잘 봐줘야 열다섯 정도밖에 안 되건만 성년식을 치른다는 로코로이아.

'위험한 곳에 사는 종족들은 성년식이 빠르다더니 그럴 수도 있겠지.'

테미르 관습을 다 알지 못하는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일주일 후, 스피어부터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다."

"아닙니다. 별빛보다 고귀한 로코로이아님을 뵌 것만으로도 영광일 따름입니다."

소녀를 바라보며 말투에 버터 칠을 진하게 발랐다.

"....."

내 말에 할 말을 잃고 얼굴을 사과빛으로 물들이는 로코로이아.

일단 호감을 품게 만드는데 성공한 것 같았다.

짝짝.

철퍽.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손뼉을 짝짝 치는 꼬맹이.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수호 전사들 중 한 명이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내 앞에 던졌다.

"열어봐라, 계약금이다."

"우리 사이에 뭘 이런 걸 다....."

말과는 달리 가죽 주머니를 들어 안을 살폈다.

'오 예!!!'

칸타하르의 말처럼 황금과 보석 광산이 많은 것 같았다.

열어본 가죽 주머니 안에는 손톱만 한 다이아몬드부터, 오리알만 한 루비와 같은 보석 종류가 가득 담겨 있었다.

가격은 정확히 모르지만 족히 몇십만 골드는 나갈 것 같았다.

'어차피, 왕따들끼리 뭉쳐야만 살 수 있다. 테미르 놈들과 적이 아닌 거래 관계가 된다면 편할 것이다.'

주변에 널리고 널린 적들.

대륙을 지배하는 기성 세력에 맞설 방법은 힘없고 소외받은 자들의 동맹밖에 없었다.

어차피 해적들이나 테미르 종족들은 나 아니면 누구 하나 손 내밀어줄 놈도 없었다.

"그럼, 정확히 일주일 후에 뵙겠습니다.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무탈하시기를."

매너 하면 또 한 매너 하는 나였다.

고개를 숙여 미래의 월드 미스를 위해 경의를 표했다.

'잘 먹고 쑥쑥 커라. 큼큼.'

마지막으로 꼬맹이를 보았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고 보조개가 예쁘게 피어 있는 로코로이아.

나를 향해 특이한 보라색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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