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장 칸타하르
"하암....."
깨끗한 하얀 침대보가 사그락거리며 얼굴을 간질였고, 게으른 영주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잤는지 창가로 보이는 겨울 햇살은 진작 떠올라 있었고, 바쁠 것 없는 영지의 기사들은 영주를 깨우지 않았다.
'인생 뭐 있어, 이렇게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그만이지.'
네루만에 첫눈이 내리고 벌써 보름이 지났다.
영지를 침탈한 하비스 왕국군과 네르안의 성기사들은 나와 영지민들의 힘 앞에 철저히 무릎을 꿇었다.
250마리가 넘는 와이번 중에 살아서 도망친 놈들은 겨우 수십여 마리.
사망한 와이번의 숫자가 100여 마리요, 붙잡힌 포로의 숫자가 수만 명.
육로를 통해 도망치던 대부분의 하비스 왕국군들은 포로가 되었다.
평원에서 튀어봐야 화톳불 위의 밤 신세.
톡톡 튀다가 와이번과 영지 기마병 앞에 속속 무릎을 꿇었다.
물론 개중에 국경을 넘는 독한 놈들도 있었다.
하지만 국경을 넘어 돌아가 봤자 놈들을 맞이한 것은 하비스 국왕군.
듣기로 왕실을 모욕하던 대부분의 귀족들은 반역죄를 물어 참형을 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한다.
약한 여인으로만 여겨졌던 로시아테의 파격적인 국정 장악력.
비록 쓸데없는 네루만 침공 때문에 왕국 전체의 전력은 약화되었지만,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어 왕국은 국왕의 통치력이 발휘되는 제대로 된 왕국이 되었다.
"제법 짭짤했단 말이야."
양심상 살아남은 와이번들은 모두 꿀꺽할 수 없었다.
그리 안 해도 얼마 남지 않은 하비스 왕국의 와이번들을 내가 삼켜 버린다면 도와주기로 한 나는 도둑놈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눈물을 머금고 살아남은 100여 마리의 와이번을 왕국에 인도하기로 하였다.
물론 와이번 방어구와 에어 플레이트도 함께 말이다.
"흐흐... 와이번 사체와 기타 군수물푼은 다 내 것이란 말이지."
공짜는 아니었다.
죽어서도 한 가격 하는 와이번 사체와 부서진 방어구와 에어 플레이트는 네루만 차지가 되었따.
거기에 군마와 각종 병장기들은 10년 동안 군수품 걱장하지 않을 정도로 넉넉하고도 넘쳤다.
"하아... 그런데 그 또라이 기사들이 남아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다 좋을 수만은 없었다.
아르미스가 보인 대성령의 감응에 머리가 빡, 돌아버린 성기사들.
좋게 보내준다고 했건만, 눈물을 줄줄 흘리며 성녀가 있는 네루만에 남겠다고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아르미스를 보호하는데 쓸 곳 많은 내 기사들을 사용하는 것보다 성기사들이 제격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숫자.
살아남은 900명의 성기사들 중에서 무려 300명이 영지에 남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졸지에 창공단은 하얀 망토를 착용한 성기사들 판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참을 만했다.
여차하면 영지의 가용 전력이 될 수도 있기에 인정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왜! 내가 아르미스를 만나는데 일일이 성기사들의 제지를 받아야 하는 거냐고!!!!"
네루만에선 왕인 내가 내 땅에 만들어진 신전에 들어갈 때마다 일일이 성기사들의 제지를 받아야 했으며, 옛날처럼 아르미스에게 편하게 말을 놓을 수도 없었다.
몇 마디 일상어투를 던지기만 해도 눈을 부라리며 결투를 청할 것 같은 성기사들.
굴러들어 온 호박덩어리가 아닌, 골칫덩어리들이었다.
아르미스가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한 것은 좋았지만, 소소한 내 일상의 기쁨이 사라진 것은 불만 그 자체였다.
"으갸갸!!"
길게 기지개를 켜며 침대 밖으로 나왔다.
어제까지 정신없이 전쟁 뒤치다꺼리를 했지만 오늘부터는 할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데르발과 그의 동료들인 행정관이 자체적으로 하급 관료들을 뽑아 행정의 체계를 잡아가고 있었고, 기사들은 병사들과 구슬땀을 흘리며 훈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잘 굴러가는 영지.
생각만 해도 흐뭇하였다.
꼬로록.
늦잠을 잔 덕분에 아침을 먹지 못했고, 식욕이 왕성한 청소년인 나는 창자들의 아우성 소리를 들었다.
"조금만 참아, 꽉꽉 눌러 담아줄 테니까."
배를 쓰다듬으며 작은 반란자들을 달랬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곡물 수확에 이제 영지 자체의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아니, 내년에는 곡물 수출도 가능할 것이 분명했다.
"클리어!"
머리를 대충 손으로 정리하고 온몸에 클리어 마법을 펼쳤다.
휘이이이잉.
2서클 상태 마법 중 하나인 클리어.
마나가 휩쓸고 간 자리에 상큼함이 감돌았다.
철컥처컥.
그리고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에어 플레이트를 착용했다.
겨울에는 핫 팩이요, 여름에는 개인용 에어컨 기능을 발휘하는 에어 플레이트.
착용하지 않으면 가슴 한쪽이 허전할 정도로 삶의 일부분이 되어 있었다.
"오늘 하루도 상쾌하게 출발해 볼까!"'
갑옷까지 착용하고 걸음을 옮겼다.
식당에 들러 나만을 위한 정찬을 먹고, 데르발을 불러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고 베베토를 타고 영지 한 바퀴 휘돌면 오후가 될 것이고, 시간이 남으면 수인족들에게 마법 수련을 빙자한 사랑의 매나 실컷 안겨주고 나면 저녁 무렵일 것이다.
그렇게 저녁이 되면 좋은 안주에 맥주나 한잔하고, 기사들과 회포를 푸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딸각.
방문을 열었다.
집무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침실.
"일어나셨습니까, 영주님."
'헉!'
내가 세운 알찬 하루의 계획을 실천하려 밖으로 나오자 나를 맞이하는 데르발의 힘찬 음성.
"어, 어쩐 일인가? 이... 아침부터?"
"외람된 말씀이지만 곧 점심시간입니다. 그리고 처리하실 일들이 제법 많아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그래....."
두툼한 서류를 들고 서 있는 데르발.
내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그의 행동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 뒤처리에 잠 못 이루었을 충성스러운 데르발.
그 반면에 늦잠을 아주 제대로 퍼질러 자고 일어난 영주.
다른 곳에 소문날까 두려웠다.
"식사는 집무실로 가져올 것입니다. 안으로 드십시오."
'쩝... 밥은 밥상에서 먹어야 맛있는데.'
"응... 그러지. 하하. 한 끼 밥이 뭐가 중요하겠는기."
마음과 달리 얼굴에는 어색한 웃음이 지어졌다.
첫 단추부터 틀어지는 오늘 하루의 일진.
아무래도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
"땔감이 없다고?"
"그렇습니다. 영주님도 아시다시피 네루만 평원은 장작을 구할 수 있는 산들이 없습니다."
"아니, 그러면 그동안 어떻게 생활했는가? 겨울은 상당히 매섭다 들었는데?"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심각한 표정으로 땔감 문제를 꺼내는 데르발.
황당하게도 제법 매서운 날씨건만, 덴포스를 비롯한 네루만 영지민들 모두 추위를 맨몸으로 견디고 있다 하였다.
"듣기로 오크 똥을 말려 사용했다 합니다. 겨울에는 오크들의 활동이 뜸하였고, 그때 오크들이 거했던 곳에 가서 말린 오크 똥을 주워 임시로나마 사용했다 합니다. 하지만 올해는 마을 가까운 곳에 있던 오크들이 토벌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합니다."
"얼어 죽을 정도인가?"
"풍부한 오크 가죽 덕분에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상당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수프 같은 따스한 음식들을 해 먹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방 또한 차갑기 그지없습니다."
말만 듣고도 머리에 그려지는 영지민들의 고달픈 삶.
극한의 생존 문제는 아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건만 듣고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럼 10월부터 맨몸으로 버텼단 말이야?'
조금만 추워도 팍팍 보일러를 때던 지구에서의 삶.
그런 지구와 달리 장작이 없어서 추운 겨울밤을 덜덜 떨면서 보내야 할 영지민들의 고달픈 생활이 팍팍 가슴을 쑤시고 들어왔다.
'장작이라... 장작.'
구한다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가구에 다섯 명씩만 잡아도 적어도 10만 가구. 그들 모두가 긴 겨울을 날 수 있는 장작은 어마어마한 분량일 것이다.
지금부터 병사들과 노예들을 닦달하여도 필요한 장작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마법도 생각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마법 화로 장치를 가동하기 위해서는 하급 마정석이라도 필요했다.
그러나 비용도 만만치 않을 뿐만 아니라 10만 개의 마법 화로는 백 년에 걸쳐 만들어도 안 될 숫자였다.
'쩝, 골치 아프네.'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석유라도 펑펑 난다면 모를까... 어, 가만!'
석유를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생각나는 한 광물.
초등학교 저학년에 다닐 적에 사라졌던 정겨운 교실의 난로
그리고 그 연료인 석탄.
"바로 그거야!"
"네?"
갑작스럽게 내지른 한마디에 놀란 데르발.
네루만 주변에 널린 것이 산.
그리고 그 산 중에는 석탄을 품고 있을 놈이 몇 개는 있을 것이다.
자원 빈국인 대한민국에도 석탄은 제법 있지 않은가.
'잘만 하면 질 좋은 노천 탄광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자원의 보고들인 산맥.
"내가 알아서 하겠네."
"역시 주군이십니다. 주군께 말씀드리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하하, 뭐 이 정도를 가지고."
또릿또릿 눈동자를 반짝이며 존경심을 팍팍 뿌리는 데르발.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럴 때마다 좋은 주군이 되기도 그리 어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집마다 화로와 굴뚝이 있겠지?"
"당연히 있습니다. 부엌 화로는 흘과 돌로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집도 개량해야겠네.'
나도 본 적 있는 이곳 백성들의 주택.
부족한 나무를 대신해 얼키설키 흙과 돌, 거기에 밀짚을 엮어 만든 이곳 집들은 지구에서는 돼지 움막으로도 사용 못할 수준이었다.
"벽돌은 계속 생산되고 있는가?"
"노예들을 동원하여 매일같이 생산하고 있습니다. 마법 건조실 덕분에 하루에 1,000장 정도 만ㄷ르어지고 있습니다."
"열 배로 올려."
"네?"
"마법 건조실을 더 만들어줄 터이니 생산량을 열 배로 올릴 수 있도록 만들게."
"아, 알겠습니다."
봄이 되어 언 땅이 녹으면서 다시 엘프들을 동원하여 도로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도로가 완성이 되면 도로를 이용하여 요새를 건축하고 그 뒤로는 영지민들 주택 개량 사업에 돌입할 것이다.
'할 일이 한둘이 아니네.'
대충 이 정도이니 막상 세부적으로 들어가자면 얼마나 많은 일들이 존재하겠는가.
"다음 안건은 무엇인가?"
"더 이상 창공단에 공터가 없습니다. 성기사들이 사용하는 임시 막사를 건축하고 나니 와이번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격납고가 없습니다. 주군께서도 알다시피 지금 하비스 왕국에 돌려줄 와이번들은 성 밖에 들판에 있을 정도입니다. 그 문제도 빨리 해결하셔야 할 것입니다."
'휴우. 벌써 꽉 찬 거야?'
처음 외인 창공단에 올 때만 해도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불과 일 년이 지나기 전에 넓던 창공단에 더 이상 건물을 지을 땅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하비스 왕국에서 연락은 없는가?"
"며칠 전 곧 와이번들을 데려갈 스카이나이트들을 보낸다는 연락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카이나이트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기에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새 술은 새 술병에 담으라는 격언처럼 과감하게 왕국 개혁을 감행한 로시아테.
대부분이 귀족들로 이루어진 스카이나이트들을 노예로 만들고 죽여 버렸으니 인재가 바닥났을 것이다.
그렇기에 왕국 전력에 가장 중요한 와이번을 데려갈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다시 연락해 보게. 그 돼지들 때문에 내 와이번들만 힘들어 죽을 판이니."
상처 입은 와이번들을 모두 성수를 이용해 치료했고, 반항하던 녀석들은 베베토와 그 직속 똘마니가 된 골드 와이번을 이용하여 정신 개조를 시켜놨다.
하지만 문제는 놈들이 처먹는 식량.
아직 영지에서 귀중한 돼지나 소 같은 식량을 줄 수 없기에 매일같이 스키이나이트들이 오크 사냥을 나가는 판이었다.
아직까지 남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몬스터들 판이었기에 쉽게 사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루에 한 마리만 먹어치워도 100마리에 이르렀기에 뒤치다꺼리가 상당히 귀찮았다.
"바로 루미카르를 날리겠습니다."
"다른 안건은 없는가?"
"사실 오늘 보고드리는 안건 중에 이게 가장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응? 그게 뭔가?"
데르발이 심각한 표정을 지을 정도라면 비중이 작지 않을 것이다.
"테미르 부족 노예 중에 한 명이 영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 합니다."
"노예가? 나를? 왜?"
노예라 하지만 짐승처럼 다루지 않았다..
추울까 봐 오크 가죽으로 만든 겨울용 외투까지 만들어 입히라 하였다.
그것도 하루 세끼 다 먹이고 노동도 일일 10시간을 넘지 않게 규제하였으며, 일주일에 하루는 쉬게 만들어주었다.
"테미르 부족 중에 무슨 족장 아들이라고 합니다. 영주님께 테미르 와이번에 대해여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와이번?"
시큰둥하던 마음이 솔깃하게 바뀌었다.
하비스 왕국에 돌려줄 와이번을 꿀꺽하면 주변에서 우리 영지를 무시할 놈들이 없겠지만 내 양심에 반하는 행동이었기에 절대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영지 와이번 확충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 겨울에 호전적인 라비테르 제국 놈들이 쳐들어오지는 않겠지만 봄이 되면 어찌 될지 몰랐다.
자존심 강한 놈들이 자신들의 명예와 같은 골드 와이번 납치 사건과 황태자 위해 사건을 알고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한 번 만나보시겠습니까? 밖에 대기시켜 놨습니다."
"물론, 어서 들여보내게."
"알겠습니다, 주군."
배가 고픈 것도 잊을 정도였다.
와이번을 확충하기 위해서 제국 국경을 침범하여 빼앗아 오고 싶은 충동도 느낄 정도였다.
만약, 내가 와이번 숫자가 200만 넘었어도 하비스 왕국 놈들이 겁없이 영지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
'테미르 놈들의 와이번도 쓸 만하단 말이야.'
성수가 아닌 주술로 포섭된 테미르 놈들의 와이번.
지금도 오라크 성의 중요한 전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저벅저벅.
"주군, 데려왔습니다."
"들어오라."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 데르발의 음성이 들려왔다.
끼익.
그리고 열린 방문 사이로 들어서는 두 사람.
'별다른 특징도 없는데, 왜 종족이 나뉘는 거야?'
차이점이라고 해야 터키인과 유럽인 정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지만 이곳 사람들을 테미르 종족들을 콕, 하고 직어냈다.
서양인들은 한국 사람과 동양 다른 민족을 잘 구별하지 못하지만, 내가 필리민 인과 한국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 쉬운것처럼 그런 차별적인 외모가 있는 것 같았다.
"대 네루만의 영주이신 카이어 드 네루만 백작님이시다. 예를 갖추어라!"
방에 들어선 키 180 정도의 코가 큰 테미르 청년에게 꾸중을 하는 데르발.
"영주님을 뵈옵니다."
'어라? 말을 잘하네?'
생각보다 능숙한 발음으로 대륙 공용어를 말하는 테미르 청년.
거칠게 만들어진 오크 외투만 아니라면 노예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얼굴에 피둥피둥 살이 올라 있었다.
"이름이 뭔가?"
"아이쉰 부족의 칸타하르라고 합니다."
칸하하르라 밝힌 남자.
족장의 아들이라 그런지 다른 테미르 인들보다 말쑥해 보였다.
"그래, 반갑다, 칸타하르.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빙빙 돌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영주님, 저희 테미르 부족을 도와주십시오!"
".....?"
와이번에 대한 말은 어디로 가고 다짜고짜 도와달라고 말하는 칸타하르.
'내 얼굴이 그렇게 착하게 생겼나? 왜 다들 나만 보면 도와달라고 그래!!'
그리 착하게 살아온 것 같지 않건만, 내가 성자라도 되는양 도움을 청하는 이들.
"내가 왜 자네를 도와주어야 하는가? 너희 종족들은 내 영지민의 생명과 재산을 약탈한 도적놈들인데."
사람 만만하게 보일 필요가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살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입니다. 저희도 배부르게 산다면 목숨 걸고 바즈란 제국 놈들과 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배고픕니다! 몬스터와 마수들 때문에 사냥을 하기도 버거우며, 농사는 지어봐야 소출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보석과 금을 채취하며 살아가지만, 상인 놈들은 번번이 약속을 어길 뿐만 아니라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후려칠 뿐입니다. 영주님, 그동안 이곳에서 노예를 하면서 태어나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목숨을 내걸고 사냥을 하지 않아도 땀만 조금 흘리면 하루 세끼 밥이 나오고, 몬스터 때문에 잠을 설치지도 않았습니다. 거기에 일주일에 하루씩 쉬는 꿀맛 같은 휴식은 평생 처음으로 맛보는 평안이었습니다."
'쩝, 할 말 없네.'
자유가 억압당하고 나름대로 착취를 당하고 사는 노예의 삶이었건만, 인생 최대의 행복이라는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어찌 보면 네루만 백성들과 거의 동급의 삶을 살았다 할 수 있는 이들.
살짝 동점심이 일었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이더냐? 너희들을 그리 대하는 것은 모두 내 양심에서 일어난 문제일 뿐이다. 더군다나 네놈들은 불쌍한 내 병사들과 백성들을 해치지 않았더냐!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이웃의 담을 넘지 않는 것이 사람으로 태어난 자의 도리인 것이다."
"수천 년 동안 반목한 종족 간의 문제입니다. 영주님이 아실지 모르겠지만, 한때는 이곳 네루만은 우리 선조들의 땅이었습니다. 그런 소중한 대지를 이방인들에게 빼앗기고, 저희 테미르 부족들은 척박하고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는 북쪽 어머니의 산맥에 숨어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주님께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곳에서 남아도는 식량을 저희에게 허락하신다면 죽어서도 변치않을 혈맹을 맺을 것입니다. 영주님! 내 새끼와 부모가 굶주려 죽는 상황에서 이웃집 담을 넘지 말라 말하시는 것은 도리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인 것입니다."
'더 할 말이 없네.'
나도 자신할 수 없었다.
만약 내 가족이 굶어 죽게 생겼다면 나 역시 이웃의 담을 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 자식, 왜 이리 말을 잘해?'
다른 테미르 놈들과 달리 유창한 말로 고상한 철학적 문제까지 끄집어낼 줄 아는 칸타하르라는 놈.,
다시 보였다.
"이자가 확답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지금 50여 부족이 넘는 테미르 부족들은 대형 부족에 의하여 의사결정을 빼앗겼다 합니다. 그런데 대형 부족이 아닌, 중소 부족의 족장 아들이라는 이자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데르발이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맞습니다. 하지만 잘못 알고 계시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는 대형 부족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대주술사이신 로코리이아님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대주술사?"
세상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테미르 종족들 세계.
가장 넓은 국경을 차지하고 있는 바즈란 제국에서는 야만족에 더불어 광기 어린 살육자라 평하고 상대하지 않았다.
욕 중에서 후레자식보다 더 나쁜 욕이 '에이 테미르 같은놈아' 라는 말일 정도였다.
그런 테미르의 알려지지 않은 권력 관계를 말하는 칸타하르.
"대종족들이라 하더라도 대주술사이신 로코로이아님의 명에는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 종족을 탄생시킨 만인의 어머니의 환생이 로코로이아님이십니다."
'말로만 듣던 사악한 마녀 할망구!'
첫 느낌이 딱 그거였다.
사람들의 피로 목욕하고, 그 머리로 제사를 올리며, 이상한 춤을 추고 온갖 추접스러운 장식들을 목에 걸친 주술사.
칸타하르의 설명에 쬐금 더 테미르 상황이 이해를 더갔다.
'발전하지 못한 사회일수록 신의 매개체인 주술사에 목을 매는 법이지.'
지금도 대주술사라는 이름을 말하며 존경과 경외, 두려움을 눈동자로 보이는 칸타하르.
"그분을 만나주십시오. 그리고 영주님의 진실한 마음으로 동맹을 청하시면 더 이상 저희 부족으로 인한 고통을 이곳 네루만 사람들은 받지 않을 것입니다. 영주님!!"
"안 됩니다! 그런 위험한 곳에 주군을 보낼 수 없습니다! 이자의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십시오. 주군을 꼬드겨 사지로 보내려는 간악한 술수입니다. 분명 저에게는 와이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위험하기 그지없는 테미르 종족 연합에, 그것도 대주술사를 만나라니요. 재고할 가치도 없습니다!"
나의 안전을 모든 것의 최우선으로 삼는 데르발.
펄쩍 뛰며 칸타하르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래서 대주술사님을 만나보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대주술사님만 허락하신다면 부족들이 수집한 야생 와이번 알로 일 년에 수십 마리의 와이번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 목숨을 걸고 보증하겠습니다!"
피를 토하듯 절규하는 칸타하르.
말에서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데르발의 말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제안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적의 아가리로 협상을 하러 들어가는 행동.
다른 이가 했어도 내가 도시락 싸들고 말릴 참이었다.
"좋아, 네 말을 믿겠다."
"헉! 주, 주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쿵쿵.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감사하다 말하는 칸타하르.
그러나 그건 다른 사람들 이야기고, 나는 자신있었다.
테미르 놈들뿐만 아니라, 드래곤 레어에서도 살아날 자신이 있었다.
뭐, 아니면 말고지만.
"제, 제가 가겠습니다. 주군! 주군은 네루만의 희망시며 미래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지에 주군을 보낼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리는 데르발.
그런 데르발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 이번 기회에 싹 정리하고 올 테니 나만 믿어. 언제 내가 데르발 경 실망시키는 거 봤어?"
"주군....."
내 고집을 꺾지 못함을 알고 안타깝게 내 눈동자를 바라보는 데르발.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주었다.
"언제쯤 출발하면 되겠는가?"
"지금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래? 그럼 바로 다녀오지."
"그, 그렇게나 빨리....."
화끈한 내 성격에 놀란 데르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된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마음에 안 들면 확 불 질러 버리고 올 테니까.'
어차피 한 번쯤은 다녀와야 할 곳이었다.
병사들을 이끌고 가서 정벌을 하던가 해야지, 왜구들도 아니고 매년 놈들 때문에 전전긍긍 살아가는 것은 체질이 아니었다.
'흐흐. 기다려라, 사악한 주술사! 네루만의 영주, 카이어님이 가신다!!'
테미르 종족을 좌지우지한다는 대주술사 로코로이아.
어젯밤 꿈 잘 꾸었기를 바랄 뿐이다.
수틀리면 오늘이 내년 제삿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리라.
★★★★★★★★★★★★★★★★★★★★★
"사라졌다고요?"
"공주님, 죄송합니다. 사방으로 놈의 행방을 찾았지만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하아... 안타깝군요. 한스케인 그자를 잡아야 모든 일이 완벽하게 마무리되는 것인데....."
하비스 왕국의 궁전.
로시아테 공주는 역적 한스케인이 도주했다는 소식에 한숨일 길게 내쉬었다.
네루만으로 하비스 귀족과 기사들이 몰려간 이후로 정신없이 오늘까지 시간을 보냈다.
근위기사단과 병사들, 그리고 얼마 안 되는 국왕의 귀족들의 병사들을 모아 거사를 일으켰다.
만약, 한스케인 공작을 비롯하여 중요 귀족들 몇 명이라도 왕국에 남아 있었다면 거사는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돌보심으로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다.
단 하나, 한스케인 공작이 사라진 것을 빼고.
"짐작컨대, 라비테르 제국으로 망명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 모습을 보였던 곳이 코비란 산맥 쪽이라 하였습니다."
"가장 우려하던 바가 현실이 되었군요. 한스케인 그자만은 꼭 잡았어야 하는데."
아쉬움을 버리지 못한 로시아테.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네루만에서 퇴각하는 귀족들의 와이번들을 카발론 백작령에서 모조리 생포하였다.
국경을 넘어 네루만 스카이나이트들이 쫓아오지 않자, 하나둘씩 카발론 백작령에 착륙하던 귀족들.
대기하고 있던 근위기사들을 통해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스케인 공작은 잡지 못했다.
무슨 까닭인지 가장 늦게 백작령에 도착하여 한참 귀족들과 드잡이하던 근위기사들의 모습을 보고 줄행랑을 친 것이다.
그리고 얼마 동안 왕국에 머무르며 동정을 살피더니 코비란 산맥 쪽에서 사라져 버렸다.
휘하의 스카이나이트 십여 명을 이끌고 말이다.
"이제 아쉬움은 이쯤에서 거두셔야 할 것입니다. 해결해야 할 일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왕국 대부분의 영지가 주인 없는 영지가 되었습니다. 임시로 행정관들을 파견했지만 영주만 한 권한을 행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속히 능력있는 기사들이나 몰락한 귀족들 중에서 적임자를 찾아내어 영지에 내려보내야 할 것입닏. 그리고 네루만에 있는 왕국 소속 와이번들도 우선적으로 데려와야할 것입니다. 네루만의 영주 카이어가 언제 마음이 변하맂 모르는 일입니다."
늙은 충신이자 외척인 사피드안 공작.
외손녀인 로시아테 공주에게 이것저것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와이번 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이어 그분은... 세상에서 아버지 다음으로 제가 존경하는 분입니다."
카이어라는 이름을 말하며 강한 믿음을 보이는 로시아테.
"공주님, 세상에 믿을 자는 나 자신밖에 없음을 이 늙은이는 충고하고 싶습니다. 일국의 운영은 절대 감정적으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료요, 오늘의 동료가 내일의 적이 되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입니다. 더군다나 네루만과는 영지를 맞대고 있는 가상 적국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왕국을 도와준 것은 고맙지만 너무 믿지 마십시오."
나름대로 정치와 세상 물정을 깨달은 사피드안 공작이 노안을 반짝이며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외할아버지의 충언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황공하옵니다, 공주마마."
자르마니안 하비스 국왕은 요즘 더 상태가 좋지 않아 침실에서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기에 왕국의 중요 대사를 모두 로시아테 혼자 처리했다.
"귀족들로 추천할 자가 있다면 외할아버지께서 말해주세요. 그리고 왕국의 중요 곡창 지대와 한스케인 공작령, 몇몇 대귀족 영지는 국왕 직할령으로 삼을 것입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귀족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왕실이 될 것입니다. 그 누구도 감히 저를 비롯한 하비스 왕실에 반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살아 숨 쉬는 그날까지....."
여린 마음을 소유했던 북부대륙의 꽃 로시아테 공주의 강인한 다짐.
사피드안 공작은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자신도 귀족이었지만 왕실이 바로 서지 않는 왕국은 오래지 않아 멸망의 길로 향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비스 왕국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였다.
하나가 아닌, 모두가 사는 길.
그때가 바로 지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