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대마법사-97화 (97/221)

제97장 하일드리안의 미녀, 티아벨

차자작, 차자작.

"와아! 영주님, 낫질이 예술입니다!"

'뭘 이 정도를 가지고.'

차마 고백하지 못했다.

내가 예전에 소처럼 쟁기도 끌었다는 것을.

'이제 추수가 다 끝났네.'

도시 덴포스 주변에 펼쳐져 있던 넓은 황금벌판.

어느새 허수아비들만 남기고 허허벌판이 되어버렸다.

마수와 몬스터들의 습격도 벌써 삼 주 전.

시멘트를 처발라 시아리스 요새를 다시 복원하였고, 와이번 일개 편대를 상주시켰다.

강력한 마수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방치한다면 그것은 곧 죄악이었다.

"다 끝났습니다, 주군."

덴포스를 수비하는 병사들을 이끌고 대민 봉사를 나왔다.

바쁜 와중이었지만 수고한 영지민들과 땀 한 방울이라도 같이 흘리고 싶었다.

"축제 준비는 잘되어가나?"

일주일 후로 다가온 풍요와 축제의 여신 세피르의 축제일.

세피르를 모시는 사제 한 명 없지만 영지가 다시 태어난 기념으로 축제를 명했다.

"거의 다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 곡마단만 오면 될 것 같습니다."

"수고했어."

"주군의 수고에 비하면 제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안드리아프와 테베디안이 오고 난 뒤에 한결 편안해진 데르발.

그러나 결코 일이 줄어들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리라.

든든한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 힘든 줄 모르는 것이다.

"상단에서 연락은 없나?"

"며칠 전에 출발했다고 합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심려는 무슨....."

제국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안전해야 데르발을 비롯해 기사들이 편안해질 것이다.

"오늘 도착한다고 했나?"

"저녁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염전은 다 완성됐나?"

"어제부로 공사가 끝났습니다."

마음이 통한다는 게 이럴 때 좋은 것 같았다.

한마디를 하면 바로 이해를 하고 내가 원하는 답을 건네주는 데르발.

신이 주신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식들, 빨리들 좀 오지.'

케스미르 왕국과 거래를 위하여 오늘 저녁 크리시아가 도착한다고 했다.

마정석이 부족해서 마법진이 가동 못하는 것이 몇 군데 있건만 그들은 느긋하기만 했다.

"도로 공사 하는 곳에 갈 것이니 마무리를 부탁하네."

"다녀오십시오, 주군."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는 데르발.

"모두들 수고했다."

"추웅!!"

병장기 대신 낫과 같은 농기구를 들고 있던 수백 명의 병사들이 힘차게 충을 외쳤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서서히 완성되어 가는 영지.

시간만 허락한다면 그 어느 곳보다 잘 먹고 잘사는 곳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운명의 신들이 큰 마음먹고 허락한다면.

★★★★★★★★★★★★★★★★★★★★★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요! 왕실의 허락도 없이 스카이 나이트와 병사들이 국경으로 움직이다니!"

긴급하게 소집된 하비스 왕궁에서의 귀족회의.

싸늘한 로시아테의 일갈이 회의장을 휩쓸었다.

"왜 이리 역정을 내십니까? 우리가 반역이라도 저질렀습니까? 이미 왕실의 재가가 났고, 저희도 통보를 하지 않았습니까. 추수가 끝나면 상처받은 하비스 왕국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하여 귀족들과 기사들이 의로운 검을 들었건만, 인가라니요!!"

회의장에 몰아치는 한스케인의 망발.

파르르 몸을 떨며 왕좌를 움켜쥐는 로시아테.

'미안해요. 더 이상 제 힘으로는.....'

마음속으로 한 남자에게 미안함을 전하는 로시아테.

"앞으로 일주일 후! 하비스 왕실과 왕국을 위하여 검을 든 의로운 기사들은 오만한 네루만 영주를 징벌할 것입니다! 이미 동참하고자 하는 모든 영주와 기사들이 속속 국경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행동이 신께서 허락하시는지, 자비의 여신 네르안님을 모시는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징벌에 동참했습니다."

"아....."

성기사들과 사제라는 말에 로시아테는 참았던 신음을 흘렸다.

신전까지 한 팔을 도왔다면 이제는 절대 막을 수 없었다.

듣기로 이미 하비스 왕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라비테르 제국과 바즈란 제국에서도 모종의 허락이 떨어졌다 한다.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소신들은 물러가겠습니다. 당분간 뵙기 어려울 터이니 귀족 정례 회의는 다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방적인 통보를 전하는 한스케인.

사라락.

절망에 빠진 로시아테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사라락.

그 뒤를 따라 하비스 왕국의 주요 귀족들 또한 인사를 올리며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하아....."

분노로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움켜쥐고 참았던 탁한 숨을 뱉어내는 로시아테.

주르륵, 그녀의 양 볼에서 서로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네, 네놈들을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야....."

어린 시절, 생각이라는 것을 할 때부터 느껴졌던 귀족들의 냉대.

한 나라의 후계자가 될 공주였건만 귀족들은 철저히 로시아테를 무시하였다.

아니, 하비스라는 성을 사용하는 왕실 사람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숨을 죽이며 살았다.

"으드득."'

텅비어 버린 왕실 회의장.

로시아테는 난생처음 이를 갈았다.

왕실과 자신을 무시한 귀족들.

놈들을 사라지게 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것이라 다짐하였다.

★★★★★★★★★★★★★★★★★★★★★

콰드드드드드드드득.

"천천히 부어!"

그그그그그그극.

'언제 봐도 대단하단 말이야.'

엘프들이 부리는 정령들의 유기적인 협동력에 감탄이 흘러나왔다.

엘프들이 도로 공사를 도와주기를 한 달.

예상과 달리 하루에 5킬로씩 길이 뚫리고 시멘트가 부어졌다.

자갈과 모래는 강을 따라 아무 곳에나 널려 있었고, 시멘트 가루가 매일같이 충원되니 일이 쑥쑥 진행되었다.

'조금만 더 하면 숨통이 뚫린다! 네루만을 숨 쉬게 할 거대한 혈맥이 뚫리는 것이야!'

베베토를 타고 바라보는 네루만 대로.

공사가 완료된 곳은 흙으로 덮어 철저히 위장하였다.

상인들이 이용하는 상행로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새로운 길을 뚫었으며, 병사와 노예들 또한 공사가 끝나는 날까지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다.

사실 엘프들이 나타났다는 것도 네루만 주민들 대부분은 모르고 있었다.

영지민들이라고 해봐야 덴포스를 중심으로 뭉쳐 있기에 엘프들을 볼 일이 없었다.

'앞으로 5일 정도면 국경에 이를 수 있다.'

일차 목표까지 이제 남은 거리는 고작 30킬로.

하늘이 도왔는지 가을이 되어서 비는 얼마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쌀쌀해지는 날씨를 보아하니 곧 겨울이 들이닥칠 것 같았다.

사계절이 제법 뚜렷한 네루만이라 하였고, 겨울은 생각보다 매섭다 하였다.

휘이이이이익.

'나르미아스.'

베베토를 타고 활공하자 어느새 내 옆에 나타난 나르미아스.

엘프 에어 플레이트의 특성 때문에 가면처럼 보이는 투구.

나를 보고 있는 나르미아스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었다.

'소심한 A형 엘프들 같으니라고.'

이왕 세상에 나오기로 마음먹었으면 한꺼번에 나와서 도와줄 것이지, 하루에 20명 안팎으로만 엘프들이 나타났다.

그것도 나르미아스를 제외하고 몇 명씩 얼굴이 바뀌었다.

쿠오오오오오!

나르미아스를 태운 하르피가 옆에서 알짱거리자 울음을 토하며 날개에 힘을 가하는 베베토.

쉬이이이이이익.

다른 엘프들보다 반 배나 큰 놈답게 날갯짓 몇 번에 앞으로 휙 치고 나갔다.

휘이이이이익.

이에 지지 않으려는 나르미아스의 하르피.

베베토의 3분지 1만 한 체격으로 잘도 쫓아왔다.

'한번 달려볼까.'

너무나 바쁜 일상이었기에 나르미아스와 이렇다 할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러나 갑자기 주어진 스피드 놀이.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

작은 놈이 열심히 따라오자 코에서 김을 뿜으며 날개를 파닥거리는 베베토.

끼아아아아아아아!

지지 않고 하르피 녀석도 울음을 토하며 날개를 퍼덕였다.

휘리리리리리리링.

때마침 불어오는 루알 산맥의 바람.

파라라라락, 망토 자락이 끊어질 듯이 바람에 날렸다.

그리고 잠시간의 꿀맛 같은 비행이 시작되었다.

옆에 있기만 해도 행복한 미소를 짓는 나르미아스와의 즐거운 한때였다.

★★★★★★★★★★★★★★★★★★★★★

'어라, 저분은 또 누구셔?'

늦은 밤.

케스미르 왕국을 대표하는 크리시아를 창공단 활주로에서 기다렸다.

그렇게 약속 시간에 가까이 되었을 때, 두 마리의 와이번이 외인 창공단 활주로에 천천히 하강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크리시아의 회색 와이번 옆에 나란히 착륙하는 와이번에 눈이 활짝 떠졌다.

'화이트 와이번! 와우! 완전 유니콘이 따로 없네.'

검은 주둥이와 발목을 제외하고는 온통 새하얀 화이트 와이번.

난새처음 보는 화이트 와이번에 정신이 쏙 빠졌다.

창공단 마법 등에 반사되는 잡털 하나 없는 순백의 화이트 와이번은 보는 이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고도 넘쳤다.

타악.

정신없이 화이트 와이번을 보고 있을 때 바닥으로 뛰어내리는 두 사람.

'여자?'

크리시아와 함께 착지한 이는 놀랍게도 여자였다.

'저 누나는 또 누구야?'

밤이면 쌀쌀해지는 날씨 때문에 아직 투구를 착용하고 있는 두 여인.

몇 번 본 적이 있는 크리시아의 에어 플레이트와 착연히 다른 백색의 에어 플레이트를 착용한 여자.

남자용과 달리 체구가 작은 에어 플레이트는 보기에 깜찍했다.

"주군, 하일드리안 제국 스카이 나이트 같습니다."

다가오는 여인을 보고 있던 데르발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하일드리안? 그 얼음제국 하일드리안!!'

북부 대륙에 존재하는 얼음제국 하일드리안.

대륙과 거의 교류가 없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다.

생각보다 마법이 발달되어 있고 일 년 중에 반년 이상이 겨울이라는 그곳.

'왜? 뭐 하러 여기까지 온 거야?'

갑작스럽게 드는 의문.

나와 일면식도 없는 하일드리안 제국 스카이 나이트의 방문은 확실히 의외였다.

달깍.

내 앞에 다가와 투구를 벗는 크리시아.

촤르르르르륵.

그녀의 푸른 머리칼이 투구 밖으로 흘러내렸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카이어 백작님."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안부를 묻는 크리시아.

"하하, 덕분에 아주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늦으셨습니다.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 안 그래도 긴 목이 더 늘어날 뻔했습니다."

"어머, 설마 제가 보고 싶어서....."

놀라는 척하며 내숭을 떠는 불여우.

"글쎄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실망이에요. 그래도 전 매일같이 카이어님을 생각했는데."

'엥? 매일같이 나를?'

불여우가 꼬리를 쳤다.

그러나 내가 바보도 아니고, 나는 씨익 웃으면서 아직도 투구를 착용하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싸늘하네.'

무슨 재질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순백의 에어 플레이트.

고귀해 보였다.

얼음여왕의 망토처럼 도도한 에어 플레이트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이 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신지....."

딸깍.

내 물음이 울리자 천천히 투구를 푸는 여인.

사라라라락.

투구 안에 감춰져 있던 머리칼이 길게 흘러내렸다.

'헉! 이, 이건 뭐야!!!'

놀랍게도 투구 밖으로 흘러나온 머리칼은 온통 백색.

영화에서 봤던 백발마녀도 아니건만 여인의 기다란 머리칼은 투명한 광채가 흐르는 백발이었다.

'하아! 죽인다!'

사실 백발은 참으로 소화하기 어려운 컨셉이었다.

어정쩡한 마스크를 소유한 자가 백발 헤어를 장착한다면 보는 이로 하여금 패죽이고 싶은 흥분을 만들어내는 것이 백발이었다.

그러나 깨끗한 피부와 차갑고 이지적인 얼굴을 가진 자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아이템, 백발.

놀랍게도 백발 소녀는 백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하는 축복받은 마스크를 소유하고 있었다.

작은 달걀형의 턱 선.

상큼하게 치켜 올라간 눈썹과 눈꼬리는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도도함을 사방에 확실히 뿌리고 있었고, 하얀 눈썹과 조화를 이루는 푸른 눈동자는 한겨울의 호수 같은 깨끗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거기에 붉은 입술은 한겨울에 빨갛게 익어버린 앵두.

난생처음 보는 얼음으로 조각한 듯한 미녀였다.

"티아벨이라 합니다."

티아벨이라는 귀엽고 깜찍한 이름의 주인인 여인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전해왔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네루만의 영주 카이어라고 합니다."

나 역시 마주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여인의 신분.

도도함과 어울리는 카리스마가 여인의 전신에서 은연중에 흐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따뜻한 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손으로 여인들을 에스코트했다.

끄덕.

나의 친절에 눈을 살짝 감아 고마움을 전하는 여인.

'케켁, 같이 살다가는 숨 막혀 돌아가시겠네.'

바늘로 찔러도 바늘만 부러질 것 같은 티아벨의 도도함.

다른 단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도도함.

딱 그 한 단어만이 티아벨을 설명할 수 있는 전부였다.

★★★★★★★★★★★★★★★★★★★★★

'하아, 찻잔 잡는 일도 저렇게 정성이 들어가다니.'

단아하고 고귀한 분위기를 풍기는 아이지스 황녀와 쌍벽을 이룰 만한 티아벨.

동작 하나하나가 다 계산된 듯 행동하였다.

집무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차를 마시는데 나도 모르게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국왕 전하께서도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네루만에서 식량을 비롯하여 성수까지 안정적으로 공급해 주신다면 저희 또한 다른 곳에 비하여 훨씬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거라 하셨습니다."

"그리 허락해 주심을 감사드린다 전해주십시오."

남들은 해적이라 말하지만 나에게는 귀중한 존재였다.

"호호,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정석이 많이 필요하신 것 같아 2급 마정석 2개, 3급 마정석 25개, 4급은 50개, 5급은 300개 정도를 가지고 왔습니다."

'허억!'

단순 계산만으로도 천만 골드는 훌쩍 넘어갈 마정석이건만 뉘 집 강아지 이름처럼 쉽게 말을 꺼내는 크리시아.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크리시아가 말한 마정석만 있다면 염전이 완성되고, 내가 설계한 블레스트 스피어의 신형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며, 곧바로 내가 머물 도시 규모의 축성 공사도 시작할 수 있었다.

"감사는요. 이 정도는 해야 동맹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눈을 찡긋거리며 동맹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크리시아.

'그래, 동맹 먹자. 어차피 너나 나나 외로운 처지인데.'

"동맹보다는 혈맹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하하."

"혈맹요? 호호호, 역시 카이어님은 통이 크시다니까."

"이럴 게 아니라 와인 한잔 어떻습니까?"

"와인이요? 호호, 주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업된 기분에 술 한잔하자 청했다.

"티아벨님, 괜찮겠습니까?"

'호오, 정체가 뭐야.'

케스미르 왕국의 공주임이 확실한 크리시아가 조심스럽게 티아벨에게 의중을 물었다.

"편한 대로 하십시오."

음성조차 쨍그랑 부딪치는 얼음같이 맑고 차가운 티아벨.

마치 이곳 주인이 내가 아니라 티아벨인 것같이 느껴졌다.

★★★★★★★★★★★★★★★★★★★★★

"독수리 두 마리가 나무에 앉아 있는데 사냥꾼이 나타나 그중 한 마리를 화살로 명중시켰습니다. 그때 독수리가 나무에서 떨어지며 사냥꾼에게 '왜 나만 잡아요. 쟤도 잡아요!' 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남아 있는 독수리 한 마리가 사냥꾼에게 뭐라 하신 줄 아십니까?"

한 잔의 술이 들어가고, 두 잔이 넘어가고, 세 잔째를 즐겁게 마시다 보니 어느새 흥겨워진 분위기.

고전 참새 시리즈의 한 토막을 대륙 버전으로 각색하며 여인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어머, 그 독수리 참 나빠요. 죽을 거라면 혼자 죽지, 동료까지 죽여 달라니....."

보기 좋은 건강한 피부를 소유한 크리시아가 독수리가 나쁘다 말을 꺼내었다.

"티아벨님은 뭐라 생각하십니까?"

몇 번째 계속 농담만 무표정하게 듣고만 있던 티아벨에게 질문을 돌렸다.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역시 술은 위대하단 말이야.'

분위기에 휩쓸려 몇 잔의 술을 마신 티아벨.

하얀 피부에 살며시 홍조가 도는 모습이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어서 얘기해 주세요. 살아남은 독수리가 사냥꾼에게 뭐라 했어요?"

크리시아가 궁금한 듯 눈을 반짝이며 내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스윽.

크리시아의 뒤를 이어 새파란 겨울 호수 같은 눈동자로 나를 보는 티아벨.

그녀의 눈동자도 궁금함이 반짝이고 있었다.

"살아남은 독수리가 사냥꾼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쟤 아직 안 죽었데요. 한 발 더 쏴주세요!'"

"뭐, 뭐예요?! 호호호호호호호호."

"풋!"

'오우! 역시 농담의 위력은 위대해.'

집무실을 울릴 정도로 자지러지게 웃는 크리시아.

그런 크리시아의 웃음에 전염이라도 된 양 기다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풋, 하고 웃는 티아벨.

분위기 참 좋았다.

여인들과 이렇게 한가롭게 노닥거릴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반짝.

그러나 웃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보고 있는 크리시아의 눈과 허공에서 부딪쳤다.

씨익.

입가에 짓는 정체 모를 미소.

씨익.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돈도 드는 것도 아니고 미인이 웃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

'정말 매력적이란 말이야.'

처음 볼 때부터 특이한 남자라 생각이 들었다.

귀족이라 으스대지도 않고 장난스럽게 행동하다가도 매순간마다 진지하게 최선을 다하는 카이어라는 남자.

영지에서 벌이고 있는 일들이 속속 보고될 때마다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케스미르 왕국을 제외하고도 네루만을 노리고 있는 테미르 놈들과 라비테르 제국, 그리고 몬스터 천지인 곳에서 친구가 아닌 강적을 스스럼없이 만들어내는 카이어.

정보에 의하면, 마탑과 대상단은 물론 신전까지 등을 돌렸다 한다.

그러나 전혀 위축됨이 없이 영지를 잘 이끌고 있는 카이어.

'그거 알아요? 당신 때문에 나 왕국에서 못 나올 뻔한 것.'

말하지 않아 모를 것이다.

케스미르 왕국이 네루만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던가.

그런데 크리시아는 아버지인 국왕과 섬을 차지하고 있는 귀족들에게 말해야 했다.

네루만을 점령이 아닌, 동맹의 동반자로 삼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귀족들이 얼마나 크리시아를 질책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질책 속에서도 꿋꿋이 동맹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크리시아.

아버지인 국와의 지지가 없었다면 2함대 사령관 직위까지 반납하고 왕궁에서 수나 놓으며 살 뻔하였다.

'실망시키지 말아요. 당신이 약해지는 순간, 케스미르의 귀족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

카이어가 강하기 때문에 동맹이 완성되었다.

귀족들도 알고 있는 카이어의 무력.

단숨에 어찌할 수 없다는것을 알기에 임새 동맹 관계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흐음, 티아벨.....'

크리시아가 카이어를 보고 있는 사이 얼음제국에서도 가장 도도하기로 소문난 티아벨이 발그레한 얼굴로 카이어를 곁눈질하고 있음을 발견한 크리시아.

살짝 고개를 저었다.

장난기 넘치는, 아직은 어린 네루만의 영주가 풍기는 묘한 매력.

한번 맛본 사람은 빠져나오기 힘들 것이었다.

자상한 오빠 같기도 하고, 개구쟁이 동생 같기도 하며, 때로는 듬직한 아버지 같은 여러 매력을 가진 남자.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다는 것은 만날 때마다 확인할 수 있었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마정석은 바로 내드리겠습니다. 식량과 필요한 성수는 카조프네 바람이 잠잠해지는 로메로님의 계절에 가지러 오겠습니다."

떠날 때가 되었기에 아쉬운 작별 인사를 고했다.

"감사합니다. 크리시아님의 따스한 마음은 언제까지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호호,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카이어의 말 한마디에 날아갈 것 같은 행복감을 맛보는 크리시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어느새 헤어 나올 수 없는 운명의 거미줄에 묶여 버린 것을.

★★★★★★★★★★★★★★★★★★★★★

"후후....."

밤늦게 찾아와 향기로운 추억을 남기고 사라진 두 여인.

손에 들린 묵직한 마정석 자루는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녀석들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밉다고 해야 하나."

어느새 불이 꺼져 있는 네르안님의 임시 신전.

요즘 새 엄마가 되어 바쁜 아르미스는 다섯 와이번을 양육하느라 지쳐서 자는 것 같았다.

나와 데이트할 시간도 없이.

쉬리리리리링.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가을을 지배하는 루차카트 바람은 낭인이 되어 사리지고, 겨울바람 카조프네가 어느새 성큼 다가와 네루만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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