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대마법사-93화 (93/221)

제93장 데르발의 친구

'이곳에 요새를 건설한다.'

네루만 평원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 터를 확정했다.

하비스 왕국과의 국경에서 약 10킬로 정도 떨어진 평원에 위치한 작은 구릉.

사방이 훤히 보이는 이곳이 요새로는 적지였다.

'통행로와 떨어져 있기에 보이지 않는다. 재료를 모아서 한꺼번에 해치운다면 절대 놈들은 모를 것이다.'

엘프들의 도움을 받은 지 일주일.

해가 지면 엘프 마을로 돌아가는 엘프들은 참으로 부지런했다.

아침이 밝아오면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있는 곳을 귀신같이 찾아왔다.

그 이류를 나르미아스에게 묻자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텔레파시 같은 종류의 능력이 나르미아스에게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내 영지를 침범하는 그 누구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요새 터를 선정하자 불끈 호기가 일었다.

인구도 적고 가진 자원도 부족하지만 절대 꿀리지 않는 자존심.

멀리 평원 너머로 보이는 루알 산맥의 웅장한 기세가 나에게 전달되는 것 같았다.

사라라라라라락.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일주일 사이로 완전하게 물러간 따스한 바람.

산머리부터 시작된 붉은 단풍의 물결은 어느새 아래까지 오색 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곧 추수철이다. 추수만 잘 끝나면 영지는 안정될 것다.'

엘프들의 도움으로 일주일 만에 30킬로 정도의 도로가 완성되었다.

더 할 수도 있었지만 마차로 나르는 재료에 한계가 있었다.

와이번들을 동원할 수도 있었지만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적들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섣불리 사용할 수 없었다.

'두 달 정도면 덴포스에서 이곳까지 도로가 완설될 것이다.'

엘프들은 불만이 없었다.

매일 똑같은 일의 반복이었건만 사방 몇 킬로 안에 갇혀 백년 이상의 세월을 살아온 엘프들에게는 즐거운 일로 치부되는 것 같았다.

쫄깃한 밀가루 빵의 맛을 보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엘프들도 있었다.

'로시아테는 잘 있겠지?'

오고 가는 상인들을 통해 하비스 왕국에 아직 변고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인들이 아는 것은 한계가 있는 법.

그 연약한 여인이 무슨 힘으로 드센 귀족들의 등쌀을 견디고 있을까 하며 마음이 살짝 아파오기도 했다.

'곧 만나게 될 때까지 조금만 참으시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열심히 힘을 키워 내년 봄에 한꺼번에 하비스 왕국의 골칫덩이들을 쓸어버리는 것밖에 없었다.

"돌아가자."

쿠오오오오오오!

요즘 따라 더욱 늠름해진 베베토.

다른 와이번보다 한 배 반 정도 더 큰 베베토가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요새 터를 이륙했다.

'몬스터 놈들의 동향이 수상쩍다 했지.'

도로 공사와 시작되는 추수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시아리스 요새에서 루알 산맥 쪽으로 쫓겨난 몬스터들이 요즘 부쩍 나타난다는 보고를 받았다.

또한, 몬스터 토벌을 단행하지 못한 다른 지역에서도 점점 활발하게 몬스터가 이동하고 있다 하였다.

놈들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인간들이 곡식을 추수할 때가 되었음을.

★★★★★★★★★★★★★★★★★★★★★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올해 왕실 재정도 파탄이 날 것 같습니다."

"파탄이라니요? 듣기로 올해는 풍작을 이뤄 각 영지에서 세금이 잘 걷어지고 있다 들었는데, 파탄이라니요!"

"아, 물론 몇몇 영지는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공주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하비스 왕국의 영지들은 워낙 지출할 것이 많지 않습니까? 국왕군이 국경을 수비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왕실 직할령이 넓은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

하비스 왕국 왕성의 정례회의장.

풍작을 이뤘건만 왕실 재정 파탄을 운운하는 한스케인 공작의 말에 국왕 집무 대행을 맡고 있는 로시아테 공주는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저희 영지도 올해도 국세를 그리 많이 낼 형편이 아닙니다. 지난 여름에 강물이 범람하는 바람에 농작물이 상당한 피해를 봤습니다. 그 점을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르켄토 백작의 땅에는 강도 없지 않습니까!"

"강은 없지만 비가 오면 그놈의 물이 불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공주를 향해 이죽거리며 세금 깎기에 혈안이 된 귀족들.

장부에 기록된 세금도 얼마 없건만 거기서 또 깎으려 하였다.

"조용히 하시오. 왕실 재정이 튼튼해야 경들의 영지도 안전한 법. 작년처럼 각 영지에서 10퍼센트의 세금을 납부하시오."

멀쩡히 국왕 집무 대행 공주가 있건만 귀족들에게 명을 내리는 한스케인 공작.

그는 국왕을 지지하던 사피드안 공작이 몇 년 동안 병 때문에 저택 밖으로 나오지 못하자 제 세상을 만났다.

"공주님,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들러리에 불과한 로시아테 공주.

입술을 깨물며 치욕을 견뎠다.

만약 여기서 무너진다면 지금껏 욕됨을 견디고 참아온 보람이 없었다.

"마, 말하세요."

"다음 안건은 네루만 영지에 대한 배상건입니다."

"그 이야기는 내년 봄에 실력 행사하기로 결정 나지 않았나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네루만에 다녀온 상인들과 용병들의 말에 따르면, 네루만이 올해는 아주 대풍을 이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이번 추수만 끝나면 바로 병사들을 일으켜 배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아, 아니, 왕실과 상의도 없이 군사를 일으키다니요! 너무 하시는 것 아닙니까!"

지금껏 참고 있던 로시아테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한스케인 공작과 귀족들을 노려보았다.

"진정하십시오, 공주님. 국왕 전하께서도 출병을 이미 허락하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번 배상 문제로 인한 군사 출병은 왕실 기사나 병사들이 참여하지 않는 순수한 영주들의 연합군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공주님이 나서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

정계에서 잔뼈가 굵어 대성에 이른 한스케인 공작.

그런 공작을 나이 어린 로시아테가 말로 막아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차피 왕가의 권위 따위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

'카이어님이 봄까지 막아달라 했는데.'

로시아테의 마음은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한스케인과 귀족들이 이렇게 나온다면 막을 명분이 없었다.

어차피 출병에 대해서 국왕의 허락은 오래전에 떨어졌다.

"기다리세요. 추수가 다 끝날 때까지는 절대 출병을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로시아테 폰 하비스의 이름으로 명하는 바입니다."

독한 마음을 먹은 로시아테가 준엄한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누구 하나 대답하지 않는 귀족들.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로시아테를 이건 뭐야, 라는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

"데르발, 몬스터들과 테미르 놈들의 동향은 어떠한가?"

"테미르 놈들은 저번 전투 이후로 잠잠합니다. 그런데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시아리스 쪽에서 물러난 놈들이 루알 산맥으로 숨어들었다가 다시 기어나오고 있으며, 다른 쪽에서도 서서히 덴포스를 향해 포위하듯이 다가오는 형상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확 쓸어버리고 싶은데.'

몬스터 토벌 당시처럼 전 힘을 다해 네루만에서 몬스터들을 몰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역부족이었다.

와이번과 스카이 나이트들이 충원됐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병력으로는 방어하기에도 벅찰 지경이었다.

안전한 상행을 위하여 시아리스 요새와 하비스로 통하는 중요 요새에는 병사들이 상주해야 했고, 나머지 병사들도 테미르 놈들의 도발과 곳곳에서 포위한 몬스터들의 공격에 상시 대비해야 했다.

"일단 계속 구입한 군마들을 통하여 발 빠른 기마대를 만들고 있습니다. 스카이 나이트들과 입체적인 공격을 가한다면 영지 수호에는 별문제 없을 것입니다."

네루만 전도를 바라보며 데르발이 문제없을 것이라 말했다.

'이론상으로는 그렇지만 불길하고 찝찝한 기분이 맴돈단 말이야.'

뭐랄까? 말할 수 없는 묘한 텁텁함.

익지 않은 바나나를 입에 문 것 같았다.

"추수는 어느 정도 진행됐나?"

"드라빌트로 개간한 땅이 모두 덴포스 주변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변부터 차근차근 수확을 하고 있습니다. 일손이 모자란 곳은 영주님의 지시대로 병사들에게 휴가를 주어 무리없이 수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수확이 다 끝나면 세금은 모두 밀을 비롯한 식량으로 받아 덴포스를 비롯한 각 요새에 분산하여 비치하게."

"알겠습니다."

하나둘씩 빠르게 안정되어 가는 영지.

병사들은 정예화되어 갔고, 영지 개발도 순조로웠다.

이제 추수만 마치면 내년까지 식량 걱정은 없을 것이다.

바다와 강에서 잡아들이는 생선도 상당한 양이라 하였다.

'너무 조용해. 마치 태풍 전야의 고요함처럼.....'

사방에 깔아놓은 적들이 이렇게 조용해도 될까 의문이 들었다.

'썅, 언 놈이든지 오기만 해보. 빤스까지 홀라당 벗겨 버릴테니!'

보이지 않는 적들을 향해 전투 의지를 불태웠다.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버텨야 했다.

네루만의 힘이 축적되는 그날까지.

"영주님! 밖에 사람들이 영주님을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또 누구야?'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누군지 좀 보고 와."

정신없는 틈에 아무나 만날 수는 없었다.

'제일 위험한 놈들은 라비테르 놈들인데.'

굴어 들어온 떡을 발로 찰 수도 없었기에 골드 와이번을 쓱싹한 일이 마음에 자꾸 걸렸다.

2황자라는 놈이 싸가지없게만 안 나왔어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와이번을 더 확충해야 하는데, 확 털어버려?'

지금껏 제 돈 주고 와이번을 구입해 본 적이 없는 나였다.

"주군, 데르발입니다."

"응? 들어와."

나를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러 나간 데르발이 돌아왔다.

끼이이익.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데르발.

'어라? 저분들은 누구셔?'

"인사드려. 내가 모시는 세상에 단 한 분뿐인 주군이시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이어 백작님. 안드리아프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테베디안이라 합니다."

'데르발이 아는 이들이야?'

들어올 때부터 입이 찢어져라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데르발.

"제국 행정학교 동기들입니다."

"아! 하하, 만나게 되어 반갑소. 네루만의 영주 카이어라고 하오."

'오오! 기다리던 인재들이군.'

바즈란 제국의 진정한 엘리트들이라 할 수 있는 제국 행정 학교 출신의 인재들.

데르발과 비슷한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잘생긴 형아들이었다.

특히 안드리아프라는 푸른 눈과 갈색 눈동자가 같이 존재하는 오드아이였다.

"늦게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죄송한 줄은 알아? 세상에 하나뿐인 친구가 그렇게 편지에 구구절절하게 얘기했건만 이제야 찾아오다니 정말 자네들에게 실망이야. 이 데르발을 그 정도밖에 믿지 않다니 말이야."

"자네에게 면목이 없네. 집안을 정리하느라 어쩔 수가 없었네."

진짜 친구인 것 같았다.

데르발의 장난스런 추궁에도 진심 어린 마음으로 미안함을 표현하는 두 사람.

"집안 정리라 함은 무슨 말인가?"

"그게....."

내 물음에 말끝을 흐리는 안드리아프.

"데르발의 편지를 받고 저희도 바로 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영주님과 황태자 전하, 그리고 귀족들과의 안 좋은 소문에 잠시 망설였습니다."

큰 키에 순박한 청년처럼 보이는 테베디안이 입을 열었다.

"영주님도 알다시피 네루만의 위치적 특성 때문에 한번 결정을 내리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점점 안 좋은 소식들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데르발처럼 목숨을 바칠 주군이라면 당연히 찾아왔겠지만 저희에게는 모험일 수밖에 없습니다."

안드리아프가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에궁, 나라도 그랬겠지.'

생판 모르는 놈을 주군으로 모셔야 하는 상황에서 달랑 친구 편지 하나로 다니고 있던 안정적인 직장을 관두고 가족들과 떨어지는 것이 어찌 모험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리고 네루만이 바즈란 제국 영토라지만 찾아오기 쉬운 곳도 아니었다.

"이해하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가족들은 어떻게 했나? 부모님들은?"

데르발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황급히 물었다.

"일단 말씀만 드리고 왔네. 자네 생각에 빨리 정리한다고 했는데도 이렇게 늦어버렸네."

생각해 보니 데르발도 가족이 있었다.

"이곳까지 왔다면 마음의 결정을 내렸을 터인데, 어떻게 할 것인가? 나와 네루만 영지를 위해 일해주겠나?"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데르발과 저희 둘은 제국 행적학교 때 맹세했습니다. 진정한 주군을 찾는다면 모두 다 같이 그분을 우리들의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말입니다."

"주군! 신 안드리아프, 주군께 맹세합니다."

"신 테베디안, 주군께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근문자흑이라고 했던가. 역시 데르발 친구들다워.'

친구를 믿기에 친구가 선택한 주군까지 믿는 아름다운 우정.

아마 이곳까지 오면서 마음의 결정을 확실히 한 것 같았다.

"고맙네.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주군이 되겠네."

진실한 이들에게 미사여구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서로의 마음을 열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데르발, 안드리아프와 테베디안 경을 기사로 임명할 것이니 밖에 그리 공포하게."

"기, 기사 말씀이십니까?"

기사라는 말에 놀라는 두 사람.

행정학교를 졸업한 이들에게 행정 요원이 아닌 기사로 임명한 이들은 제국 역사상 몇 없을 것이다.

"왜 싫은가?"

"아닙니다! 주군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만나자마자 파격적으로 기사에 임명하자 흥분한 두 사람.

꿈이 있어도 신분의 제약 때문에 마음속의 그림을 펼쳐 보지도 못하는 이곳 대륙의 인재들.

나는 이들을 되도록 많이 내 품에 안을 것이다.

"데르발, 루비스 상단에 연락하게."

"어떤 연락 말씀이신지....."

"경들의 가족 모두를 네루만으로 데려오게."

"......"

"앞으로 이곳보다 더 안전한 곳은 없을 것이야."

"주군....."

"자자! 다들 움직이자고. 경들의 땀 한 방울이 네루만 백성들의 피 한 방울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최선을 다해주록!"

"충!!!"

'됐어!'

기분이 뿌듯했다.

천 조각이 모여 한 벌의 옷이 되듯 하나눌씩 모습을 갖춰가는 네루만 영지.

오늘 하루도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리라 마음먹었다.

내가 흘린 땀 한 방울의 무게는 모든 네루만 백서들의 기쁨의 눈물일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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