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장 왕따들의 저녁 만찬
"멍청한 놈아! 그곳이 아니란 말이야!"
투닥투닥.
'공사판이 따로 없네.'
창공단에는 더 이상 머물고 있는 난민이 없었다.
그 대신 왕창 늘어나 있는 와이번 때문에 격납고를 비롯한 각종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고 있었다.
'빨리 이사를 가야 할 텐데.'
낡은 도시 덴포스.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창공단 이외에 내가 이사 갈 곳은 없었다.
물론 루켄스 자작이 살던 가데인 성이 있었지만 남이 쓰다만 성을 사용하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다.
땡땡땡!
"와이번이 착륙한다!!!"
'이제 오는군.'
실과 바늘처럼 늘 붙어 다니는 라이케르와 제니스.
그 둘은 하비스 왕국에서 온 손님들을 모시고 천천히 창공단 중앙 공터에 착륙하고 있었다.
'오잉? 저 새대가리,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하비스에서 온 사자들을 맞이하는 중에 보이는 익숙한 한 마리의 와이번.
'헉! 로, 로시아테!'
낯익은 와이번에서 내리는 여자 스카이 나이트.
나와 멧돼지 고기를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던 모습 그대로의 로시아테였다.
차자자작.
로시아테가 내리자 그 뒤를 따라 내린 하비스의 스카이 나이트들이 로시아테의 뒤로 그림자처럼 달라붙었다.
요인 경호에 익숙한 것으로 보아 왕실 근위 스카이 나이트들이 분명했다.
'반가운 손님이 첮아왔군.'
국경 침공에 대하여 논하러 온 것이 분명했기에 나름대로 대비하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면 황태자 와이번에게도 마법을 난사하던 내가 그깟 비리비리한 왕국에 협박을 당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로시아테를 보는 순간 마음이 달라졌다.
타다다다다닥.
하비스 왕국 기사들과 로시아테가 나를 향해 다가오자 기사들이 달려와 내 양옆에 도열했다.
'많이 컸어.'
어느 영주 부럽지 않았다.
창공단 내 가득 와이번들이 먹이를 쫓는 닭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것도 골드 와이번까지 늘어서 있는 모습은 이들을 두렵게 할 것이었다.
딸깍.
촤르르르르륵.
걸어오는 중에 투구를 벗는 로시아테.
"허억!"
"음...."
보기 드문 빛나는 웨이브 진 금발이 태양에 드러나고 블루 다이아몬드 같은 눈동자가 반짝이는 미녀의 등장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하는 기사와 병사들.
북부의 꽃이라 불리는 로시아테의 미모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하하, 어서 오십시오, 로시아테 공주님."
입가에 즐거운 미소를 베어 문 로시아테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내가 제국의 백작이라지만 상대는 왕국의 공주였다.
"또 뵙게 되었습니다, 카이어 백작님."
드레스를 입지 않았기에 살짝 마주 고개를 숙이는 로시아테.
'흐음, 향기 좋다.'
로시아테가 다가오자 은은한 제비꽃 향기가 사방에 퍼졌다.
"뭣들 하는가! 예로써 로시아테 공주님을 모시지 않고!"
차자장!
"충!"
내 명령에 검을 빼어 들고 힘차게 충을 외치는 20여 명의 기사들.
"이리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치의 흐트러짐없이 자신을 맞이해 주자 감사하다 말을 꺼내는 로시아테.
"별말씀을요. 먼 곳에서 오셔서 피곤하셨을 터인데, 어서 들어가시지요."
"피곤하지는 않았습니다. 날아오면서 활기찬 네루만 평원을 보았더니 마음이 다 개운합니다."
보는 이들의 시선이 있기에 늙다리 귀족 흉내를 내며 로시아테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저기 있는 골드 와이번들은 어디서...."
라비테르 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에 누구보다 골드 와이번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로시아테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베베토와 수인족들에게 얻어터져 털이 제법 빠진 털갈이하는 개새끼 같은 모양의 골드 와이번들.
그것들은 격납고 밖에 나와 대가리를 처박고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집을 잃어버렸는지 코비란 산맥에서 어슬렁거리기에 주워왔습니다."
"네? 주, 주워와요?"
라비테르 제국의 황실을 상징하는 골드 와이번을 주워왔다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묻는 로시아테.
'많이 알면 다친다네.'
"왜, 한 마리 분양해 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골드 와이번이 가지는 의미를 알기에 화들짝 놀라며 거부하는 로시아테.
"그럼 안으로 드시지요."
"네...."
바즈란 황궁에서 나에게 빚진 것이 있기에 고분고분한 로시아테의 모습.
'가슴 떨리네.'
예쁜 여인을 집에 초대하는 이 기분.
아는 사람만이 알 것이었다.
★★★★★★★★★★★★★★★★★★★★★
'활기가 넘치고 있어.'
하비스 왕국을 떠나기 전 네루만에 대하여 그동안 수집한 정보를 들었던 로시아테.
대형 상단, 특히 루비스 상단과 엄청난 거래를 하는지, 어마어마한 물동량이 매일같이 국경을 통해 네루만으로 향하고 있다 들었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정보들이 많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국에서 포기하고 정규 군단을 후퇴시켰다는 것을 대륙 사람들 중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더군다나 거의 백만 마리가 넘는 몬스터들이 사람 대신 살아가고 있다는 네루만 평원.
그렇기에 눈앞의 카이어라는 남자가 임시 영주가 되어 몇 달 동안 엄청난 발전을 했다는 소문을 로시아테는 믿지 않았다.
하비스 왕국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로시아테였기에 국가와 영지 경영이 단 몇 달 사이에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까지 날아오면서 보았던 네루만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로시아테.
하비스에서 이곳 네루만의 중심지인 덴포스까지 날아오면서 보았던 것은 몬스터가 아닌, 수백 명씩 떼를 지어 이동하는 기마병들의 모습뿐이었다.
아니, 간간이 몬스터들도 보였지만, 그리 위협이 될 만한 숫작 아니었다.
'곡식이 부족하다 했거늘, 도시 주변에 심어져 있는 그 넓은 밭은 어디서 났단 말인가.'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은 도시 덴포스 주변에 펼쳐진 엄청난 경작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덴포스가 몬스터들에게 함락당하지 모른다고 했건만, 거짓말처럼 눈앞에는 익어가는 푸른 가을 밀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기사와 병사들 모두 살아있는 눈빛을 지니고 있다.'
카이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영주의 집무실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격이 떨어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던 로시아테는 주변을 스치듯 바라보며 네루만을 파악했다.
"저녁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잠시 쉬셨다가 저녁에 뵙겠습니다."
창공단 단장실로 보이는 곳의 입구에 다다라 저녁에 보자며 듬직한 미소를 지어주는 카이어.
"저녁에 뵙겠습니다."
듣기 좋은 카이어의 목소리에 얼굴을 사르륵 붉히는 로시아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입구에 대기하고 있는 시녀들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의 박동을 발걸음마다 느끼며.
★★★★★★★★★★★★★★★★★★★★★
"곧 네루만 해상입니다."
"함대를 정박시켜라."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저 멀리 아련하게 보이는 해안가.
와이번 10여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와이번 수송선 갑판에 앉아 있던 크리시아 총사령관이 명령을 내렸다.
케스미르 군도 해적들, 아니 스스로 해상왕국이라 칭하는 케스미르 국왕으 셋째 딸이자 왕국 2함대의 총사령의 위치에 있는 크리시아.
매일 반복되는 바다 생활에 살짝 그을린 피부는 탄력적인 몸매를 소유한 크리시아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생각보다 늦은 연락이라, 이거지.'
최상급 성수와 교환할 때 던졌던 미끼.
다른 거래보다 넉넉하게 마정석을 비롯하여 대가를 지불했다.
무너져 가는 영지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물품들을 던져 카이어라는 자를 시험했다.
크리시아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정도 대금이라면 빠른 시간 안에 다시 거래를 하자고 연락이 올 줄 알았다.
제국에서 버림받은데다 테미르 놈들뿐만 아니라 몬스터까지, 사방에 적들밖에 없는 카이어라는 자가 손잡을 곳은 자신들밖에 없다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제법 긴 시간 동안 연락하지 않는 카이어.
거기에 더해 놀랍게도 속속 들어오는 정보에 의하면, 와이번을 몇 달 만에 40여 마리 넘게 획득하여 전력으로 삼았다 한다.
'긴장을 늦췄다가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대륙에 거점을 마련하고자 하는 왕국의 염원이 무너질 수 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 왔던 순간인가.
그 누구도 삼키기에는 뜨거운 네루만.
바즈란 제국이 물러나기를 기원하며 해마다 위협을 가해 그들을 압박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지역 파벌들을 정리하고 소리 소문 없이 네루만을 영토로 확보하고자 했던 케스미르 왕국.
언제까지 다른 제국과 왕국의 해상 통로를 봉쇄하고 노략질과 중간무역으로 먹고살 수는 없었다.
특히 식량의 안정적인 확보는 섬밖에 없는 케스미르 왕국의 최대 소원이었다.
'카이어... 카이어....'
모든 일이 예상대로 잘 풀어지다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카이어 준남작이라 불리는 새파란 애송이.
며칠 전 급박하게 날아온 정보의 의하면, 황제에게서 백작위의 작위와 함께 네루만을 영질 하사받았다 한다.
"와이번을 대기시켜라!"
"충!"
미끼를 던졌음에도 반응하지 않던 카이어의 부름.
아니 갈 수 없었다.
"후후...."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카이어.
그를 생각하며 크리시아는 조용한 웃음을 지었다.
거친 바다에서 살아온 크리시아가 보아도 남자다운 그.
오늘 드디어 그를 만나는 날이었다.
★★★★★★★★★★★★★★★★★★★★★
"저녁 만찬이요?"
"왜 부담스럽습니까?"
"아, 아니, 그건 아닌데...."
테레사 수녀도 아니건만 매일처럼 신과 아픈 자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아르미스.
임시 신전을 찾아온 수백 명의 백성들에게 신의 은총을 헌사하였기에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걸 보면 아무리 신의 사랑을 듬뿍 받는 사제라 할지라도 육신이 피곤한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기다리겠습니다."
"네에...."
참으로 순종적인 여인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옆에서 바라보며 무언의 응원을 해주는 아르미스.
내 말에 '네' 라고 대답하였다.
'오늘 일진 한번 좋네.'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건만 저녁에 찾아온 만찬.
그것도 세 명의 월드 미스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미녀들과의 식사.
생각만 해도 흐뭇하였다.
땡땡땡!
그리고 밖에서 울리는 요란한 종소리.
"와이번이 나타났다!"
목청 좋은 망루의 병사들이 새로운 손님이 왔음을 알려왔다.
★★★★★★★★★★★★★★★★★★★★★
"죽여 버릴 거야! 그놈을 갈가리 찢어 죽여 버릴 거야! 크아아아아아아!"
와장차자자장!
대륙 삼대제국 중 가장 강력한 무력을 소유한 라비테르 제국의 황궁.
2황자 알스케인이 머무는 오파른 궁전의 침실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처절한 분노의 함성이 궁 안을 휘저었다.
"진정하십시오, 전하. 아직 몸이 다 완쾌되지 않았습니다."
"진정? 제가 지금 진정하게 되었습니까! 그 새끼가 살아서 숨 쉬는 동안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서 병사들을 준비해 주십시오! 아바마마에게는 제가 말을 할 터이니 외할아버지께서는 스카이 나이트들을 소집해 주십시오! 네루만의 그 어린 잡종 놈에게 빼앗긴 내 와이번과 명예를 찾아와야 합니다."
동굴에 갇혀 일주일이 넘게 굶주렸던 황자 알스케인.
그로서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죽음의 공포였다.
대륙을 호령하는 라비테르 제국 황실에서 태어나 온갖 귀여움과 사랑을 받으며 존귀하게 커왔던 알스케인 황자.
형인 페르피아스 황태자보다 다음 대의 제국을 이끌어갈 재목감으로 더 잘 알려진 알스케인이 핏발 선 눈동자로 영지에서 불려온 야노비스 공작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리 안 해도 전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놈은 바즈란 제국의 귀족입니다. 함부로 명분없이 침공했다가는 제국 간의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명분? 제국의 황자인 제가 죽을 뻔하였건만, 그보다 더한 명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언제부터 우리 제국이 바즈란 놈들이 두려워 꼬리를 말았단 말입니까!!!!"'
죽음의 위기에서 깨어난 뒤로 한층 더 난폭해진 알스케인 황자.
자유자재로 사용하던 마나가 속박당하고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동굴 안에서 일주일 넘게 굶주렸기에 그러한 고통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고 바로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야노비스 공작은 잘 알고 있었다.
"좀 더 정확한 정보와 명분이 필요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소신이 전하의 가슴속에 들어찬 분노를 한꺼번에 날려드리겠습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개새끼의 심장을 씹어 먹을 것이야! 그 개새끼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심화가 가슴까지 들어찬 알스케인 황자의 분노가 라비테르 제국 황궁을 울렸다.
그가 개새끼라 부르는 자가 지금 행복에 겨워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 햇곡식으로 만든 음식들인가 봐요."
'흐흐흐, 완전 꽃밭이군.'
그 어떤 귀족가에 비교하여도 남루하기 그지없는 창공단 식당.
널찍한 식탁 위로 영지민들이 가져온 곡식으로 만든 음식들이 한상 차려져 있었다.
덴포스 여관들 중에서 가장 음식을 잘하는 자들을 초대하여 장만한 음식.
노릿노릿 구워진 큼지막한 감자와 여러 가지 과일과 야채와 꿀과 우유로 버무려진 샐러드, 바다와 강에서 잡아온 참치와 이를 모를 생선 구이.
부드러운 하얀 빵과 훈제로 구워진 소와 돼지고기, 닭고기는 내가 봐도 훌륭한 정찬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었고, 보기 좋게 선탠한 해적가의 여식인 크리시아의 맑은 목소리를 빼고 로시아테는 그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식기 전에 음식을 들도록 하지요."
하루 종일 뛰어다녔던 나였기에 배가 고팠다.
학교에 다닐 때라면 지금 이 시간은 아간 쟈율 학습 시간.
배고픈 늑대처럼 매점을 어슬렁거리며 컵라면을 비롯한 식량 획득에 열을 올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나를 중심으로 좌측에는 아르미스와 데르발이, 우측에는 크리시아와 로시아테가 앉았다.
"맛있어요! 태어나 가장 맛있는 감자인 것 같아요."
해적 집안답게 성격이 활달한 크리시아가 포크로 감자를 분해하며 씹다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하하, 그게 다 특별한 방법을 거쳐 생산된 감자라 그렇습니다."'
내가 미리 맛본 바에 의하면, 다른 감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특별한 방법이요?"
"최상급 포션으로 종자 소독을 거친 종자로 심어서 그렇습니다."
"네, 네에?! 최상급 포션으로요?!"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주고 구입해 간 최상급 포션.
그런 귀한 물건으로 종자 소독을 했다는 말에 크리시아의 얼굴은 황당하다 못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정말 특이한 방법이군요...."
조용히 있던 로시아테도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한마디 뱉었다.
"여기 계시는 아르미스 사제님 덕분입니다."
내 말에 고개를 돌려 아르미스를 바라보는 두 여인.
갑작스러운 시선 집중에 얼굴을 붉히는 순수 천사, 아르미스.
"이분이 그 사제님이시군요."
로시아테가 아르미스를 바라보며 이 여자가 그 사제냐는 듯 물었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로시아테가 그냥 방문했다면 더 기뻤겠지만 오늘은 하비스 왕국의 대표로 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말이 나왔으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하비스 왕국은 저희 영지에 끼친 손해를 어찌 보상할 생각이신지요."
".....?"
보상이라는 말에 무슨 자다가 봉창을 두들기냐는 표정을 짓는 로시아테.
"감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범법 행위를 저지른 자들을 보호해 준 하비스 왕국,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카발론 백작령에 대해 손해배상 및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이는 바즈란 제국 황제 폐하께서 영지와 작위를 하사하신 카이어 드 네루만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것입니다."
황제에게 정식으로 네루만을 영지로 인정받았기에 나는 네루만이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그, 그건...."
"무엄하시오! 어느 안전이라고 협박하는 것이오!"
내 말에 당황해하는 로시아테의 표정에 말뚝같이 서 있던 두 명의 근위기사 중 선임자로 보이는 자가 얼굴을 붉히며 무엄하다 입을 놀렸다.
"경의 이름은 무언가?"
제 아무리 근위기사라 해도 이제 나는 제국의 백작위.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놈의 이름을 물었다.
"루치아스 경, 물러나세요."
"하지만 공주님...."
"두 분 다 밖으로 나가세요. 이는 하비스 왕실의 이름으로 내리는 명령입니다."
"충!"
뭐라고 입을 뻥긋거리던 루치아스라는 근위기사는 로시아테의 명령에 충이라 외치며 밖으로 나갔다.
살기 어린 눈으로 나를 한 번 노려보고서.
'자식, 너 오늘 운수대통한 줄 알아라. 어디서 눈알을 부라리고 난리야!'
감히 내 구역에서 나에게 시비를 거는 자.
설사 제국의 황제라 하더라도 분위기 파악 못하면 귀싸대기를 날려 버릴 것이다.
"죄송합니다, 카이어 백작님."
"아닙니다. 근위기사라면 당연히 저 정도 충성심은 있어야지요."
로시아테의 분위기는 어느새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 손해배상이라는 말씀은 지나치다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국경에서 벌어진 일을 원만하게 처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본 왕국의 귀족들이 국경을 봉쇄하고 카이어님께 그 죗값을 묻는다 하는 것을 제가 말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신다면...."
말끝을 흘리며 차가우면서도 서운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로시아테.
'호오, 그랬군.'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한 로시아테.
그러나 호감이라는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기에는 하비스와 풀어야 할 과제가 많았다.
앞으로 네루만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하비스 왕국과 어떤 식으로든지 관계를 정리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아르미스가 어두운 표정으로 죄송하다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 감히 네루만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아르미스님을 납치한 자들과 그놈들을 보호한 놈이 잘못이지, 왜 아르미스님이 죄송하다고 하십니까. 설사 대신관, 아니, 그 어떤 제국이나 왕국이라도 아르미스님을 노린다면... 제가 놈들을 지옥의 불구덩이에 던져 버리겠습니다!"
파바바밧.
내 감정에 따라 식당 안을 휘몰아치는 마나.
"....."
일순간 조용해지는 공간.
순수한 내 감정을 여과업싱 드러냈다.
"부러워요. 카이어님께 이리 보호를 받으시는 사제님이라니....''
제3자 입장인 크리시아가 부럽다는 말을 꺼내며 아르미스를 묘한 눈길로 보았다.
그에 반하여 더없이 차가워진 표정의 로시아테.
"이미 바즈란 제국 황실에서 답을 주었습니다. 제국은 전혀 관여할 수 없는 일개 영주의 일이라고 말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후후/'
짐작하던 바였다.
내가 비록 네루만 영지를 하사받은 백작이지만 그게 어디 주고 싶어서 준 것이던가.
"그래서요?"
"그러니까....'
그래서라는 한마디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하는 로시아테.
'엥? 저, 저건!'
로시아테 공주를 심문하는 듯 바라보고 있던 내 눈동자에 보이는 반짝이는 작은 보석.
울고 있었다.
서서히 붉어지는 로시아테의 블루빛 눈동자.
이슬 한 방울이 억울한 듯 맺혀 있었다.
'왜 울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지금은 내 영지와 하비스 왕국의 공적인 일로 대면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말 몇 마디에 눈물을 보이는 로시아테.
"저, 저한테... 그러면 안 되잖아요. 저는... 카이어님을 믿고... 흑흑~!"'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로시아테.
덜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쏜살같이 밖으로 향해 나가 버렸다.
'얼라리요? 이 무슨 시츄에이션이야?'
갑자기 여자를 울린 천하의 악당이 되어버린 나.
인연이라고 해봐야 멧돼지 고기를 사이좋게 나눠 먹은 것과 늑대 같은 황태자에게서 구해준 죄밖에 없는 나.
저한테 그러면 안 되잖냐는 말에 나를 보는 두 여인의 시선.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아르미스가 마음이 아팠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로시아테의 뒤를 따라 나가 버렸다.
"저, 저도 잠시 할 일이 생각나서...."
가시방석 같은 분위기에 데르발도 밖으로 나가고자 핑계를 대었다.
'아니, 당당하게 말할 때는 언제고... 참나.'
알다가도 모를 여자의 마음이라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여자를 울리다니... 호호, 카이어님,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쁜 남자 같아요."
'컥! 나, 나쁜 남자.'
덩달아 나쁜 남자로 몰렸다.
"그럼 크리시아님과도 이야기를 해볼까요?"
어차피 나쁜 남자로 몰렸다.
이참에 크리시아를 향해 화살을 돌렸다.
"호호, 그런 눈빛으로 보면 무서워요. 전 부드러운 레이디 랍니다."
'헐, 레이디가 다 얼어 죽었나.'
그때 얼피 듣기로 공주라 불렸던 크리시아.
공주라는 두 여인이 이렇게 서로 달랐다.
"제가 크리시아님을 보고자 한 것은 거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거래라 하심은...."
만만치 않은 심계를 가진 여인답게 말끝을 흐리며 나를 향해 가지런한 하얀 치아를 보이며 웃는 크리시아.
"마정석을 구해주십시오."'
"마정석요?"
"알아본 바에 의하면, 얼음제국 하일드리안에서 생산되는 마정석을 케스미르 왕국에서 대부분 처리한다 들었습니다. 그 마정석 중 일부를 저희에게 팔아주십시오."
"어머,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았나요? 저희야 그저 하일드리안 제국에서 주는 마정석으로 적게 이문을 남기고 넘길 뿐인데.'
'에라이, 이쁜 여우야.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라.'
내숭을 떠는 꼬리 아홉 개의 불여우.
"그러니까 그 적게 이문을 남기는 마정석을 저에게 달라는 말입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불여우와 말장난하는 것은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그러면 저에게 무얼 해주실 건데요?"
한 손으로 얼굴을 괴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미녀.
"원하시는 걸 말씀하시면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해드리겠습니다."
내가 계획하는 영지 발전을 위해서는 마정석이 많이 필요했다.
제 아무리 드워프라 하더라도 마정석은 쉽게 구할 수 없는 광물.
더군다나 대륙의 모든 마탑과 사이가 좋지 않은 나였다.
"약속해 주실 수 있나요? 카이어님의 이름을 걸고."
'이름을 걸고라... 설마 날 해적으로 취직시키는 건 아니겠지?'
"카이어 드 네루만,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어차피 내가 들어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하는 약속.
아쉬운 나였기에 이름을 걸고 맹세하였다.
"호호, 그럼 거래가 성립된 걸로 알겠습니다, 카이어 드 네루만 백작님."
이름과 작위를 부를 때 악센트를 주며 강하게 발음하는 불여우 크리시아.
씨익.
속을 알 수 없는 불여우를 향해 밝은 미소를 날려주었다.
어차피 동료라고 해도 나중에 남을 사람들은 대륙의 왕따들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