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대마법사-86화 (9권) (86/221)

턱봉이[poik66] 타이핑 했습니다!

제86장 굴러들어 온 마법사들

"데르발, 오늘부로 각 마탑과 상단을 감시하게. 탈세 횟수와 금지 품목 거래를 명확하게 기록하라."

"명!"

"동시에 정보 길드나 암흑 길드의 활동을 금지한다. 정식으로 나에게 허가받지 않은 길드원들은 발견 즉시 체포 구금하여 노예로 삼을 것이며, 그 재산 또한 압류할 것이다. 이는 지체하지 말고 즉시 시행한다."

"명!"

'집안을 깨끗이 정리해야 한다. 거대한 뚝도 작은 구멍 하나에 무너지는 법. 외부의 적들보다 내부의 적이 더 두려운 법이야.'

어렸을 때 읽었던 수많은 위인전기에 나와 있던 교훈.

특히 즐겨 읽던 삼국지를 통하여 기준을 세웠다.

'곧 적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나와 네루만을 뜯어먹고자 달려든 배고픈 승냥이 떼들이....'

안 봐도 짐작할 수 있는 내 적들.

이미 한둘이 아니었다.

썩어 빠진 기존 세상의 기준이 되어 있던 마탑과 제국, 그리고 상단들, 나아가 신전들까지 이제는 모두 나의 적들이었다.

그러나 두렵지 않았다.

충성스러운 기사들과 나를 믿고 의지하는 백성들, 그리고 내가 가진 능력이라면 한번 해볼 만하였다.

"스카이 나이트 교육은 어찌 되고 있는가?"

"현재 총 47마리의 와이번과 43명의 스카이 나이트가 확보 되었습니다."

'벌써 50마리에 가까워졌군.'

얼마 전에 라비테르 제국 놈들에게서 털어왔던 온전한 22마리의 와이번이 엄청난 역할을 했다.

'지금쯤이면 소문이 들어갔겠지.'

대놓고 라비테르 제국을 상징하는 골드 와이번을 창공단에 착륙시켰으니 정보가 빠른 제국이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곧 나타날 것이다.

"경들도 알다시피 곧 네루만을 향해 적들이 이빨을 드러낼 것이다. 그것도 상대하기 힘든 적들로만 말이야."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모두 매일매일 전투를 치른다는 각오로 각자의 임무에 충실하기를 바란다. 이상 오늘의 회의를 마친다."

"추웅!"

군기가 확실하게 들어가 있었다.

장난스러운 라이케르도 힘차게 군례를 올리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데르발 경은 잠시 남아 있도록."

"저희들은 물러가겠습니다."

"수고들 하게."

어제 벌어졌던 전투에 피곤할 만도 하건만 이른 아침부터 순찰을 나가야 하는 스카이 나이트들.

영지 안정을 위해서 다른 그 누구보다 그들의 땀이 필요할 때였다.

"데르발...."

"말씀하십시오, 주군."

"나 잘하고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주군! 주군께서는 대륙 역사에 지금껏 없었던 한 획을 긋고 계십니다."

언제나 내 열성팬인 데르발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대륙 역사에 집어넣었다.

"하하, 고마워. 사실 그 말이 듣고 싶었어."

'정말 공부가 제일 쉬운 거야.'

공부가 제일 쉽다는 선배들의 말처럼 공부만큼 쉬운 게 없는 것 같았다.

하는 만큼 성적이 나오고 평가가 정해지는 공부.

그런데 아직 성년도 안 된, 여러모로 부족한 내가 영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인구 50만 명의 생사여탈을 쥐고 있는 절대 영주가 되어서 말이다.

"그건 그렇고, 만약 하비스 왕국이 어제의 사건을 빌미로 전쟁을 일으키거나 국경을 봉쇄한다면 영지에 타격이 얼마나 올 것 같은가?"

"실은 저도 어제 내내 그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군이 말씀하신 대로 네루만의 생사는 지금 하비스 왕국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급자족되지 않는 식량에서부터 옷감, 소금, 하다못해 화살촉 하나, 생활필수품과 군용품까지, 영지 내에서는 제대로 생산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비스 왕국기 국경을 봉쇄한다면...."

똑똑한 데르발도 말을 잇지 못하고 나와 같은 예상을 하고 있었다.

'21세기라면 산맥을 뚫고 도로라도 낼 것인데... 쩝.'

앞쪽은 바다요, 양쪽은 첩첩산중이고, 나머지 뒤쪽은 불편한 관계.

마음 같아서는 산맥을 뚫어 도로를 내고 싶었다.

"당장 국경을 봉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차피 하비스 왕국의 군력은 공국 수준이고, 네루만의 거래를 하는 대형 상단을 봉쇄하기에는 그들의 힘이 미약합니다. 다만 중소 상인들과 용병, 기타 네루만을 찾는 이주민들이 움직이기는 힘들 것입니다. 물론 군마와 같은 군사 물품도 제약을 받을 것입니다."

'아직은 아쉬운 입장이라 이건가.'

제아무리 대마법사의 지식과 21세기 문명을 접해본 나라하더라도 혼자서 네루만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쉬지 않고 달려왔음에도 생각만큼 만족스럽지 않았다.

'하비스 왕국 따위에 발목을 잡힐 수는 없다. 아쉬운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놈들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

오기가 아닌 의지가 굵은 촛불의 심지처럼 타올랐다.

다른 놈들이 안 된다고 할 때가 가장 좋은 때라고 누가 그랬던가.

"만약 네루만이 소금의 주산지가 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암염이나 기타 다른 곳에서 만드는 소금보다 질도 훌륭하고 가격도 저렴하다면 어찌 되겠는가?"

"소금 말씀이십니까?"

"응. 소금 말일세."

"그렇게만 된다면 하비스 왕국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지금도 생산량에 비하여 소비량이 많아 소금은 각 왕국에서 전략 비축 물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값싸고 질좋은 소금이 만들어져 제공된다면 하비스 왕국 따위는 우리 네루만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데르발 또한 내 생각과 일치했다.

'염전을 만들어야 해. 그것도 크고 널찍한 놈들로 말이야.'

21세기의 지구라면 염전을 만드는 것이 쉽겠지만 이곳 대륙에서는 쉽지 않았다.

바닷물을 끌어올려 말릴 수 있는 장치가 없기 때문이었다.

'시멘트로 바닥을 만들고 검은 돌로 그 위를 덮는다. 그렇게 된다면....'

각종 폐품 쓰레기로 만들어지는 21세기 시멘트와 달리 순수한 광물로 만들어지는 이곳 시멘트.

독성이 있다 하더라도 염려할 수준은 아닐 것이다.

"참, 내가 지시한 마차는 얼마나 확보했나?"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영주님이 원하시는 성능의 마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이를 먹은 코르탄이라는 목재가 많이 필요한데, 지금 영지에서는 목재가 없습니다. 루알 산맥에 접근해야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쉬운 대로 일반 목재로 마차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병사들을 동원해서라도 목재를 확보하게. 영지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물품이니 될수록 많이 확보하도록."

"알겠습니다, 주군."

'엘프와 드워프들의 도움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직까지 사방의 적들이 그렇게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네루만.

그러나 계획한 것들이 하나둘씩 이루어진다면 놈들도 적극적으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똑똑.

"영주님, 잠시 나와보셔야겠습니다."

데르발에게 남은 지시를 하려는 순간, 밖에서 들려오는 기사의 목소리.

"무슨 일인가?"

"영주님을 뵙고자 영지민들이 찾아왔습니다."

"영지민들이?"

기사의 말에 의문이 들었다.

'중요하게 할 말이라도 있나?'

나름대로 영지민들에게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대우를 해주었다.

다른 귀족들에게는 거의 가축 취급을 받는 이곳 대륙의 평민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함부로 사람을 죽이거나 다른 귀족들처럼 그들을 가축으로 보기에는 나의 가슴속에 박힌 똑같은 인간이라는 신념이 허락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다른 왕국이나 영지보다 파격적으로 영지민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주군, 제가 나가 보겠습니다."

"아니야. 영주인 나를 찾아왔다 하니 내가 나가봐야지."

그렇다고 해서 21세기 자유 시민처럼 무한정의 권리를 허락하지는 않았다.

사상과 문화,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가 지구만큼 돌아가야만이 이들에게도 그런 날이 올 것이었다.

나 혼자서 대륙 사람들을 계몽한답시고 민주주의를 설파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막 발걸음을 떼는 아이에게 마라톤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

"영주님을 뵈옵니다!"

터더더덕.

'이, 이게 다 뭐야?'

집무실로 사용하는 단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광경.

수백 명의 영지민들이 내가 나타나기 무섭게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그런 영지민들 앞에 놓여 있는 수십여 대의 마차.

마차에는 이제 갓 따온 먹음직스러운 옥수수와 수박과 같은 과일, 그리고 어른 주먹만 한 감자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것들이 다 무엇인가?"

모양을 보아하니 한두 마을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열 곳 이상의 마을 사람들이 찾아온 것 같았다.

"자비의 여신께서 허락하신 네루만의 영주님께 드리는 저희의 작은 마음이옵니다. 영주님의 보살핌으로 저희들 평생 처음으로 대풍을 이루게 되었사옵니다! 영주님께 바치기에는 민망하오나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각 마을에서 첫 수확한 곡식과 과일들이옵니다. 부디, 물리치지 마시고 받아주시옵소서."

"받아주시옵소서!"

찾아온 촌장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촌장이 절절한 마음으로 받아주라 청하였다.

'벌써 수확의 계절인가....'

워낙 정신없이 지나갔던 시간들이었다.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지난 몇 달들.

"감사히 먹겠소."

마음이야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하고 싶었지만 내 위치는 이들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영주.

가벼이 나를 낮출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흑흑, 살아생전 이런 때가 올 줄은...."

대륙에 사는 평민들의 삶은 대부분 비참했다.

높은 세금과 같은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귀족들의 작태.

더구나 네루만 평원은 다른 곳보다 더욱 살기 힘든 곳이었다.

가혹한 수탈에 비견할 만한 몬스터들의 공격.

눈물을 흘리는 영지민들의 말처럼 그들에게 살아생전 마음 편하게 농사를 지을 때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대륙 그 어느 곳보다 살기 좋은 영지로 만들어드릴 터이니.'

인간 생존의 기본인 의, 식, 주.

내가 이들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성의였다.

'그런데 저들은 또 뭐야?'

아르미스 납치 사건 이후로 강화된 창공단의 경비.

밖에서 구경하고 있는 백성들 틈에서 익숙한 마나의 향기가 느껴졌다.

"데르발, 저기 로브를 걸치고 있는 자들을 집무실로 데리고 오라."

"명!"

데르발도 힐끔거리며 수상한 자들을 보고 있었는지, 바로 대답하고 옆의 기사에게 조용히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영지민들이 돌아갈 때 필요한 것이 없는지 잘 살펴보고, 부족한 것이 있다면 아낌없이 지원하도록."

"알겠습니다, 주군."

돈으로 따지자면 얼마 안 되는 곡식과 과일이지만 나를 생각하는 영지민들의 마음이 담긴 고마운 음식.

공짜로 먹을 수 없었다.

"좋은 것들을 골라내어 네르안님의 신전을 바치도록 하라."

보기에 좋은 음식들.

신전이 눈앞에 있는데 싸가지없이 먼저 먹을 수 없었다.

대한민국을 수호해 주시는 산신령 어르신들처럼 이곳 대륙을 보살펴 주는 신전 할마시들과 할배들.

예의로써 대해야 했다.

뼈대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근본있는 자라면 이 정도는 기본일 것이었다.

★★★★★★★★★★★★★★★★★★★★★

'마법사? 호오, 이것들이 이제 나타났다, 이거지.'

용병들 중에도 마법사들이 있었건만 이렇다 할 지원이 없었다.

무슨 일인지 지원했던 마법사들이 갑자기 사라졌고, 그 이후로 병사로 지원하는 자들도 없었다.

파격적으로 마법서들을 제공하겠다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오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일곱 명의 마법사가 집무실에 나타났다.

여행자 로브를 착용하고 검을 착용해서 삼류 용병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몸에서 느껴지는 마나 냄새는 숨길 수 없었다.

"마법사들 같은데, 나한테 할 말이 있는가?"

움찔.

자신들의 정체를 바로 알아내자 놀라는 마법사들.

"정말 소문처럼 영주님은 마검사의 길을 걷는 분이군요."

'이자가 리더인가?'

아무리 잘 봐줘야 4서클 정도에 이른 마법사.

나이도 사십대 중반으로, 특출 날 정도의 실력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나머지는 겨우 마법사의 칭호를 받을 정도인 3서클 정도의 실력자들.

나이도 사십대부터 삼십대까지 다양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나에게 할 말이 있는가?"

꼴에 마법사라고 말투에서 자존심을 꺾지 않는 그들이었다.

"아직도 영주님이 하신 약속이 유효하신지 묻고 싶어서 왔습니다."

"약속?"

"그렇습니다. 영주님 밑으로 귀속되면 저희들이 원하는 고서클의 마법서를 주실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놈들 봐라?'

진작 좋은 말로 할 때 찾아왔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거의 공국 크기만 한 영지에 마법사라고는 달랑 나 하나밖에 없어서 지난 몇 달 동안 얼마나 개고생했던가.

마법서를 비롯하여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건만 날 무시하고 이제야 나를 찾아온 마법사들.

그들로서는 아마 그동안 내가 했던 말을 믿지 못한 것 같았다.

마법사라는 것이 원래 마탑의 마법사가 아니라면 거의 사부에게서 제자로 이어지는 게 마법사들의 전통.

마탑이라 하더라도 실력이 뛰어나 인정받는 자들만이 고서클의 마법서를 볼 수 있다 하였다.

그런데 준남작, 그것도 검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내가 마법서를 제공한다는 말을 본래부터 의심 많은 마법사들로서는 당연히 믿을 수 없었음이라.

원래 있는 놈들이 더 야박하고, 똑똑한 놈들이 제 꾀에 넘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건 왜 묻는 것이던가?"

입가에 살짝 조소를 머금고 마법사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대충 눈치를 채고 어서 오십시오, 라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니었다.

'어디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알면서 물으시는 것은 저희들을 무시하는 처사이신지요? 상당히 불쾌합니다."

"불쾌?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불쾌라는 말을 되물으며 방 안이 떠나가라 큰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불쾌라고 했는가?"

"....."

내 물음에 입술을 깨무는 마법사들.

내 행동과 말투에서 상당한 치욕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저희가 잘못 찾아온 것 같습니다. 여느 귀족들과는 차별된다라는 소문과 다른 영주님을 뵈오니 역시 사람은 직접 만나봐야 근본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마법사들을 대표해서 냉랭한 말을 꺼내는 사십대 중반의 마법사.

그래도 명색이 마법사라고, 아침 일찍 면도한 파르스름한 수염 자국이 날카로운 턱 선을 따라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웃기는 놈들이군."

"이이!!!!!!"

"으드득."

마법사라는 지위는 모든 곳에서 환영을 받는 존재.

특히 3서클에 이른 정식 마법사라면 왕국의 지방 영지에서는 대접을 받는 위치였다.

그런 마법사들을 향해 웃기는 놈들이라 칭하자 얼굴을 벌겋게 달구며 이를 가는 족속들.

"네놈들이 과연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보아하니 마탑에서 쫓겨나거나 스승에게 버림받아 어디서 몇 가지 마법이나 배운 것들이 마법사입네 하고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 것이더냐.  후후, 오크를 만나도 오줌을 지리고 도망갈 놈들 주제에 말이야."

"닥치시오! 아무리 당신이 네루만의 영주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소!!!!!!!!"

나의 이죽거림에 터져 나오는 분노에 찬 마법사의 외침.

아픈 현실을 건드리자 참았던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진 것 같았다.

감히 내 앞에서.

퍼억!

"컥!"

쿠웅!

손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타격감.

잘도 내 앞에서 주댕이를 나불거리던 마법사가 짧은 신음을 뱉더니 손을 배를 움켜쥐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음...."

"....."

갑작스런 폭력 앞에 얼굴색이 노랗게 변하는 마법사들.

"내 앞에서 재롱떨고 싶더냐? 그깟 양이나 몰고 힘없는 평민들 앞에서 으스대던 마법으로 날 겁 줄 자 있더냐? 그 잘난 입 말고 말이야. 크크크."

나는 사악한 악당의 웃음을 지으며 마법사들을 노려보았다.

내 눈빛을 감히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거나 딴 데로 시선을 돌리는 마법사들.

"주제 파악도 못하는 것들이 감히 누구 앞에서 어깨에 힘을 주는 것이더냐. 갈 곳도 없는 힘없는 것들이 강자 앞에 고개를 숙이지 못할망정 다수의 힘을 믿고 까불고 싶더냐. 내가 펼치는 파이어 볼도 못 막을 것들이."

위이이이이잉.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서클을 활성화시켰다.

그 순간 집무실 안을 가득 메우는 마나의 짙은 향기.

"으으...."

"허억!"

"이, 이럴 수가!"

깡패 앞에서는 사시미가 왕이고, 군대에서는 계급이 짱이라 누가 그랬던가.

마법사들 앞에서 마나 자랑을 하자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던 마법사들이 경외에 찬 시선으로 자신들 곁에 밀집한 마나향에 취해 버렸다.

'자식들이, 감히 어디서 까불어.'

영주님 제 이름은 누구고, 앞으로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할터이니 하늘의 양식 같은 마법서를 허락해 주십시오. 목숨 바쳐서 충성하겠습니다, 라고 했으면 이런 일이 터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나를 평가하려 했던 놈들.

실력도 없는 것들이 자존심만 가득 차 있었다.

"이제 알았느냐, 네놈들의 형편없는 실력을 말이야. 기껏해야 4서클에 이르러 용병들과 오크나 잡다가 어느 이름 모를 길가에서 뒈질 놈들이 어디서 마법사라고 목에 힘을 주는 것이야. 마탑에서 쫓겨나고 스승에게서 버림받은 놈들이라면 그만큼 자존심을 버리고 살아야지. 쯧쯧, 내가 네놈들과 같은 마법사라는 것이 수치스러울 뿐이다."

"그만하시오!"

"닥쳐! 네, 네가 뭘 아낟고 우리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크으! 죽일 놈!!!"

'오호! 남자라면 그만한 깡다구가 있어야지.'

놈들도 알고 있었다.

괜히 이곳에서 개폼 잡아봐야 나한테 맞거나 기사들에게 잡혀 철찰에 갇힌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나의 놀림에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마법사들.

이제야 흥미가 생겼다.

"한번 해보겠다는 것이냐? 딱 보아하니 이 병신 말고는 다들 3서클 마법사 같은데, 파이어 애로우라도 날리려고? 아니면 라이트닝? 푸하하하하!"

3서클부터 마법사라 칭함을 받지만 그 정도로 평민들이 두려워하는 마법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공격 마법의 최고봉이래야 라이트닝 정도밖에 되지 않는 마법사.

보통 용병들이 3서클 마법사를 데리고 있는 경우는 강화 주문이나 홀드 같은 상태 마법이나 치료 마법 때문일 것이다.

블레이드를 다루는 기사나 실력있는 용병들에게 3서클 마법사는 전혀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꺼져!"

집무실을 울리는 차가운 한마디.

마법사들은 꺼지라는 말에 입을 다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좋은 말로 할 때 찾아오지 않고 그깟 마법도 마법이라고 잔머리를 굴리다 찾아온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그리 뻣뻣한 것이더냐? 너희들 눈에는 내가 쓰레기 같은 네놈들이나 상대하고 있을 정ㅇ도로 할 일 없는 존재로 보이더냐? 수십 만 네루만 영지민들의 목숨을 손에 쥐고 있는 내가 네놈들의 놀이 상대로 보이냔 말이더냐!!!!"

내가 필요할 때는 나타나지 않았던 마법사들.

그나마 있던 마법사들도 어느 날 다 도망을 가버렸다.

그런 마법사들이 마법서를 구걸하러 나타났다.

그것도 당당하게.

"꺼져 버려. 난 패배자들 따윈 안 키워."

이들이 아니어도 나에겐 수인족 마법사들이 있었다.

내 명령이라면 불속에라도 뛰어들 마법사들.

"저, 저희들도 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마탑에서 영주님께 복속하는 순간 마법사의 비석에서 삭제한다고 모든 마법사들에게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아무리 저희들이 떠돌아다니는 마법사라지만... 마법사입니다. 마나를 섬기고 마나를 위하여 살다 갈 저희들의 흔적이 마지막으로 남을 마법사의 비석만큼은... 크으."

내 주먹을 맞고 쓰러져 있던 마법사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뚝뚝 눈물을 흘리며 찾아오지 못한 이유를 말하였다.

'마탑... 이 오크 거시기만 한 놈들이....'

3서클 마법사가 되면 의무적으로 기록되는 마법사의 비석.

나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마법사의 비석이라 불리는 마법사 인명록에 등록되어야만 대륙에서 마법사로 활동할 수 있다 하였다.

그런 마법사의 비석에서 이름을 지워 버리면 마법사들은 어느 곳도 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후후, 그래서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것이더냐? 아무것도 마법 발전에 도움이 안 될 그깟 비석의 이름 몇 자가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날릴 정도로 가치있는 것이더냐!"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마법서를 제공하겠다거나 마탑에 소개시켜 주겠다며 부려먹었던 귀족들! 그 누구 하나 소속 없고 스승 없는 저희들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돈 몇 푼을 던지는 자들이 고작이었습니다! 저희들도 배우고 싶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더 마나의 지식이 되고 싶습니다! 이런 치욕스러운 마법사의 삶이 아닌, 마나의 자식으로서 떳떳이 이 세상을 살다 가고 싶습니다!!!!!!"

마법사의 절규.

이해가 갔다.

21세기의 지구에서도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학연이나 지연, 혈연이 없다면 상류층에 올라가기는 요원한 일.

사람 사는 이곳도 다를 바 없었다.

최고의 엘리트라 불리는 마법사들끼리도 편을 가르며 어린 싹들을 배척하고 있었다.

"늦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이리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알아주십시오. 영주님이 다른 귀족들처럼 단지 저희들을 부려먹을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판단하는 데 시간이 이리 걸렸습니다. 만약... 다시 한 번 저희들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목숨을 걸고 영주님께 제 마나를 맡기겠습니다. 이를 마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마나에 대한 맹세.

마나에 대하여 맹세를 깨뜨리는 순간 마나의 거품으로 돌아가는 드래곤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약속을 저버리면 마법을 펼칠 때마다 뇌리 속에 남아 마법 발현을 제한하게 만든다는 마법사들만의 절대약속.

"영주님께 목숨을 다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제발 저희들을... 마나의 자식으로 살다 가게 해주십시오!!!!!!!!"

"허락해 주십시오!!!!!"

"크윽...."

쿵, 쿠웅.

갑작스러운 반전.

자존심 빼면 시체라 불리는 마법사들이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흘리는 뜨거운 눈물.

'에휴....'

이해가 갔다.

한번 마법사의 길로 들어선다면 다시는 다른 길로 갈 수가 없다 하였다.

마법을 펼치는 순간 세상 모든 것이 내 것 같은 그 기분.

조금만 더 하면 더욱 강한 마나의 힘을 맛볼 수 있다는 그 희망.

자식과 마누라를 팔아서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나의 길.

그런 마법사들의 미쳐 버릴 것 같은 열정은 같은 마법사가 아니면 절대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이 장가도 아니 가고 젊은 시절 냄새나는 연구실과 수련실에서 청춘을 불태우는 것이다.

사실 마법사가 필요했다.

수련실에 처박혀 나오지 않는 수인족들은 전투 마법에 특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격 괴팍한 사부가 그들을 내친 이유는 그들의 성향이 공격 마법에 특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아이가 골고루 먹어야 쑥쑥 자라듯이 마법사도 이론과 실전, 공격 마법뿐만 아니라 성향 마법, 연금술까지 두루섭렵을 해야 한다고 머릿속의 지식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저들을 잘만 키우면....'

더욱이 지금 영지 발전을 위해서는 마법사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나가라."

"...크윽."

"차라리 이 자리에서...."

나가라는 말에 할복이라도 할 것 같은 눈빛을 보이는 마법사들.

"나가서 아무에게나 물으면 임시로 사용하는 마탑을 알려줄 것이다."

"헉!"

"그, 그럼 저희들을!"

"지켜보겠다, 그대들이 진정 마나의 자식으로 부끄럽게 살다 가지 않는 모습을."

"영주님!!!"

말뜻을 알아듣고 눈물, 콧물 줄줄 흘리는 마법사들.

'다 죽었다고 복창해!'

승낙은 했지만 쉽게 달콤한 마나의 세계로 인도하고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갑자기 생각나는 처절한 마법 수련기.

건달프 스승 밑에서 목숨을 걸고 배웠던 마법들.

'너희들이 알아, 눈물 젖은 멧돼지 고기 맛을?'

감격에 젖어 흐느끼는 마법사들은 모르고 있었다.

100년 전, 대륙을 그 이름 하나만으로 벌벌 떨게 만들었던 금안의 사신, 아이달.

파렴치한을 넘어 마족과 동창생 먹고 다크 나이트들과 일촌 맺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

딱 그만큼만 돌려줄 생각이었다.

마나의 자식으로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죽어서도 잊지 못하게....

제87 공짜 없는 세상

'동서남북으로 일단 길게 도로를 건설한 다음 다리도 몇 곳 건설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지점에 방어 거점 요새를 만들고, 중점 도시들과 그와 연계되는 중소 도시, 그리고 마을까지, 행정 단위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달콤했던 휴식이 언제였냐는 듯 영지로 돌아오자 각종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다른 왕국과 영지들이 어떠한지는 잘 모르지만 지구에서 누렸던 편리함을 이곳 영지에 건설하고자 생각하였다.

'최우선적인 문제는 도로 건설이란 말이지.'

트럭과 각종 기계장비들만 있다면 후다닥 해치울 도로 공사.

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평지에 자를 대고 쭉 선만 그으면 되는데, 문제는 공사 장비가 영 시원찮다는 것이다.

이제 곧 제법 혹독하다는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욕심 같아서는 그전에 대충의 밑그림을 완성하고 싶었다.

'올해가 고비다. 라비테르 제국과 하비스 왕국, 요놈들이 제일 문제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어차피 마주쳐야 할 적이라면 언젠가는 맞짱을 떠야 하는 것이 인과의 법칙이었다.

쉬이이이이이이이익.

어느새 바람의 색깔이 바뀌어 있었다.

뜨거운 태양빛을 품고 있던 바람들이 서늘한 기운을 창공에 토해내고 있었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

태충 일을 지시하고 나서 쉴 사이도 없이 영지 순찰을 나왔다.

도시 덴포스에서 날아올라 염전으로 쓸 만한 바닷가와 도로가 건설될 곳들을 둘러보았다.

'한번 시험해 볼까.'

단기간에 건설할 수 있는 도로를 생각하다 갑자기 생각난 마법과 정령.

21세기 하이테크 기술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는 신이 축복해 준 능력이 있었다.

"베베토, 착륙해."

쿠오오오오!

쇄애애애애애애액.

'워워! 진정해. 넌 솔개가 아니란 말이야.'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도 아니면서 요즘 과격한 행동을 즐기는 베베토.

착륙하라는 말에 날개를 접고 급강하를 시작했다.

'장가보내 달라는 협박이냐?'

얼굴과 몸에 부딪치는 묵직한 풍력.

무언가 나에게 불만이 많은 것 같은 베베토는 그렇게 온몸으로 감정을 표했다.

쉬이이이이익.

퍼러러러러러러럭.

지상 10여 미터까지 그렇게 내려오더니 날개를 활짝 펴서 가뿐히 착륙하는 베베토.

쿠오오오오오오오오!

누가 수컷 아니랄까 봐 자신의 행동을 자화자찬하며 오만한 울음을 토했다.

'곧 기다려, 인마. 제대로 방 잡아줄게.'

넘쳐흐르는 베베토의 힘(?).

종족 번시깅 주는 환희의 세계로 인도해야만 무사 비행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터억.

가볍게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바위도 없고 그냥 길만 쭉 내면 된다, 이거지."

언제 보아도 감탄이 나오는 네루만 평야.

완벽한 기후 조건에서 쑥쑥 자란 풀들과 이름 모를 꽃들이 수북하게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땅을 딱딱하게 누르기 위해서는... 윈드 프레스!"

퍼어어어어어엉!

메모라이즈해 두었던 5서클 풍계 마법.

마법 영창과 동시에 파란빛이 번쩍이더니 내가 바라보는 대지를 향해 강력하게 자신의 힘을 드러냈다.

파스스스.

"콜록콜록."

주변의 흙들이 들썩이는 순간, 사방에서 싸하니 일어나는 먼지.

"제길, 이건 아니잖아."

잠시 후, 먼지가 가시고 난 뒤에 보이는 광경에 인상을 썼다.

약 10미터 전방에 강한 풍력에 눌려 찌그러져 있는 대지.

지름 5미터 정도의 공간이 1미터 깊이로 푹 가라앉아 있었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하다가 어느 세월에 도로를 놓는단 말인가."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것이 분명하였다.

네루만에 이런 식으로 도로를 만들다가는 내가 늙어 죽어도 못할 것이다.

"노임 소환!"

위이잉.

말과 함께 마나홀의 마나가 출렁거리며 빠져나갔다.

슈우욱.

그리고 발밑의 흙덩어리가 쑤욱 하고 솟아오르며 사람 형상으로 변했다.

대지의 중급 정령 노임이었다.

"반가워, 노임. 오늘 나 좀 도와줄래?"

끄덕끄덕.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 모양의 흙덩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쭈욱 평평한 길로 만들어줘. 마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게 말이야."

손으로 100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가리켰다.

꾸물럭꾸물럭.

와드드드드드드득.

'오오오!'

명령이 내려지자 가차없이 실행에 옮기는 충성스러운 정령.

우두둑거리는 땅의 뼈 부러지는 소리가 울리며 대지에 폭 1미터 정도의 길이 나고 있었다.

'제법인데.'

30센티 정도 대지가 가라앉으며 딱딱하게 변하였다.

발로 밟아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강도.

마음에 쏙 들었다.

'허억!'

하지만 노임이 점점 멀어지고 길이 날수록 아이스크림이 태양에 녹듯이 사라지는 마나홀의 마나.

'이런 된장!'

우두둑, 와드드득.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지가 함몰되고 단단하게 변하는 것은 좋았지만 마나홀이 비어가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이것도 무리다.'

1미터 폭의 길을 100미터 정도 만들어내는 데 생각보다 많은 마나가 소모되자 인상이 구겨졌다.

노임이 몸을 움직이고 힘을 사용하는 모든 것이 소환자의 마나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마나 소모량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대로라면 하루에 몇백 미터도 힘들 것 같군.'

중급 정령의 능력과 내 마나량의 한계 때문에 힘들 것 같은 도로 공사.

'결론은 엘프들밖에 없다.'

네루만 동서를 관통하려면 수백 킬로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폭 2차선 정도의 크기로 말이다.

'드워프들과 달리 철저하게 세상과 단잘하며 살아온 엘프들이 과연 나를 도와줄 것인가? 하아, 그들을 어떻게 꼬여야 한단 말인가....'

내로라하는 낚시꾼이 된 나로서도 얻기 힘든 엘프들의 도움.

인간들과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담을 쌓고 살아온 왕따 엘프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미끼가 부족했다.

'엘프들은 모두 정령사. 그들이 도와준다면 일이 쉽게 끝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아쉽기만 한 엘프들.

드워프에 이어 엘프들까지 가세한다면 내가 꿈꾸는 파라다이스가 단시간에 이뤄질 수 있을 것 같았다.

★★★★★★★★★★★★★★★★★★★★★

"케스미르 해적들에게 연락을 취하시오. 새로운 거래를 하고 싶다고."

"해, 해적들에게 말입니까?"

"데르발 경, 겁나는 것은 아니겠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해적이라는 소리에 말을 더듬는 데르발.

"해적들이 얼마 전 건네준 루미카르를 날린다면 될 것이오."

"알겠습니다."

"저기 부근에 방파제를 건설하면 더 안전할 것 같은데, 데르발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 안 해도 어부들에게 물어본 결과, 저곳만 잘 막아진다면 폭풍이 밀려와도 걱정이 없을 거라 했습니다. 아마 방파제가 건설된다면 지금 수용할 수 있는 배들의 몇 배를 더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물고기 맛 좀 보는 건가.'

네루만의 안정적인 생산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바다 개발도 필수였다.

아직 덜 오염되고 포획이 남발되지 않아 거의 북극 수준의 어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바다.

50만 네루만 백서들이 먹을 생선은 그리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어자원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내가 꿈꾼다는 데 있었다.

사방이 막혀 있는 네루만 평원.

해상로만 확보한다면 영지 발전에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었다.

'잘 만하면 대륙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업의 영지가 될 수도 있다.'

공식적으로 해적들은 대륙에서 상행위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해적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타 대륙과 거래를 할 수 없는 현실.

적은 적은 나의 친구라는 격언처럼 해적들을 이용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영주님, 그 시멘트라는 물건 말입니다."

"응? 왜?"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돌을 가루로 만들어 다시 돌처럼 딱딱하게 만들어내는 시멘트 덕분에 수리 공사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더 좋은 것을 보여줄게.'

건달프 사부가 지구에서 뭔 짓을 한지는 몰라도 엄청난 과학 지식이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지식을 활용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염된 공기 속에서의 생활은 지구에서만으로 충분했다.

적당히, 나의 파라다이스를 완성하기에 필요한 지식들만 활용할 것이었다.

"테미르 노예 놈들은 말썽 부리지 않지?"

석회석과 광물 채굴에 투입한 테미르 노예들.

"처음에는 제법 반항하더니 요즘은 아주 조용하다고 합니다. 주군께서 명하신 대로 하루 10시간 정도만 광물 채취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하루 세 끼의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하자 아주 말을 잘 듣고 있습니다."

'복 받은 줄 알아라, 새끼들아.'

내 수족 같은 영지에 침공하여 피를 흘리게 만든 테미르 놈들.

노예로 삼았지만 영화에서처럼 무식하게 다룰 수는 없었다.

인권을 떠나서 그놈들도 마을에 처자식이 있을 것이기에 짐승으로 여길 수 없었다.

"목수들이 아직 충원되지 않았나?"

"아직... 이주민들이 많지가 않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찾아온 떠돌이들이 약 300명 정도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적은 숫자군.'

이곳은 인구 충원하고 싶다고 해서 확 늘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영지민들 대부분 귀족들의 개인 노예로 부려지는 이곳에서 자유민들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거기에 대륙 사람들 모두 알고 있는 네루만에 대한 소문.

미치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몰려올 이유가 없었다.

"노예를 구입하게."

"네?"

"내가 듣기로 대륙에는 노예 상인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들을 통해서 노예를 모두 구입해."

"모두라 하심은...."

"가족이어도 좋고 나이가 많다고 해도 상관없다. 구할 수 있다면 모두 데려오게."

"알겠습니다."

휘리리리리리링.

데르발과 함께 항구가 훤히 보이는 절벽 위에 섰다.

그런 나를 향해 불어오는 바다의 짭짜름한 향기.

하루 종일 뜨거웠던 머리가 시원하게 식혀짐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새 저무는 해를 등지고 작은 돛단배 몇 척이 항구로 돌아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평화스러운 광경.

입가에 바다를 닮은 시원한 미소가 한줄기 그려져 갔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해가 저물어 감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

"뭐라고? 하비스 왕국 쪽에서 와이번이 날아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적어도 10마리의 와이번이 국경을 방금 넘었다는 보고입니다."

"10마리?"

'에게, 달랑 10마리?'

적이라고 하기에는 숫자가 미미했다.

나에 대한 소문을 알고 그렇게 허접한 숫자를 보낼 리 없는 하비스 왕국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제국의 백작이라지만 타국의 국경을 넘는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였다.

"평범한 와이번들은 아니라 합니다. 하비스 왕실 문장인 다섯 창과 방패 문양이 보였다 합니다."

'일단 적은 아니란 말이군.'

요 며칠 조용하다 싶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많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영지민들과 촌장들이 수레를 끌고 유행처럼 나를 찾아왔다.

성수로 종자 소독을 한 덕분에 병충해에 전혀 해를 입지 않고 평생 처음 대풍을 맞았다는 영지민들.

그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나에게 가장 좋은 수확물들을 가지고 왔다.

그런 영지민들 덕분에 창공단의 식량 창고는 가득 채워졌다.

하지만 그런 평화도 잠시.

하비스 왕국에서 나를 찾아오고 있었다.

"손님들이 찾아온 모양이니 제니스 경에게 연락해서 인도해 오라 하라."

"명!"

보고를 하던 기사가 내 명령에 복명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주군, 오늘 다른 분들도 온다고 했습니다."

"아! 맞아."

'날도 참 잘 잡는군.'

케스미르 해적들에게 연락용 새인 루미카르를 날린 지 이틀 만에 답장이 왔다.

앞으로 일주일 후에 찾아온다는 연락.

그리고 오늘이 그 일주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괜히 잘못하다가는 소문이 안 좋게 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저지르는 일에 걱정이 태산이 데르발.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적들과 한통속이라는 소문이 나기라도 한다면 좋지 않다는 표정을 보였다.

"데르발, 내가 살던 곳에 이런 말이 있어."

".....?"

"매도 먼저 맞는 게 덜 아프고, 어차피 붙을 판이라면 선빵을 날리라고 말이야."

"....."

눈을 뜨고 내 말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르발.

"걱정하지 마. 어차피 이게 최선이니까."

"죄송합니다, 주군. 괜히 제가 불측한 상상을 한 것 같습니다."

데르발의 말에 씨익 웃음을 날렸다.

충신이라면 당연히 저 정도 충언은 할 수 있는 법이었다.

내게도 귀에 달콤한 말을 듣는 것보다 할 말을 하는 이들을 품을 수 있는 아량 정도는 있었다.

물론 주제 파악 못하고 입만 난불거리는 놈들은 빼고 말이다.

"괜찮아. 대신 손님들 접대를 준비하게. 우리에게 중요한 분들이니까."

"알겠습니다, 주군."

"무료했는데 마침 잘됐어.'

고래 같은 양 제국 사이에 끼어 눈치만 보고 살아온 하비스 왕국.

거기에 왕국을 선포했지만 해적이라 불리며 무시당하는 케스미르 해상 왕국.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네루만 영주인 나와 함께 왕따 동맹을 결성한다면 딱 맞을 판이었다.

어차피 우리가 뭔 짓을 해도 다른 놈들은 코웃음을 칠 게 분명했다.

찌질이들이 쌩쇼한다고 말이다.

★★★★★★★★★★★★★★★★★★★★★

지이이이이잉.

'흐흐흐, 감회가 새롭네.'

임시 마탑이라고 해봐야 널찍한 창공단 한쪽에 만들어놓은 임시 가건물.

그 안에 자리 잡은 마나 응축기 안에서 마나 호흡을 펼치고 있는 마법사들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묘한 희열이 느껴졌다.

남의 고통을 보고 즐거움을 얻는 변태는 아니었지만 내가 당한 만큼 돌려주고 싶은 본능은 살아 있었다.

"어때 배울 만한가?"

"아, 아주 좋습니다."

나에게 찾아온 마법사들의 대표 역할을 하고 있는 게스아닌 마법사.

지난 일주일 동안 잘도 버텼다.

"그래? 다행이야. 이제부터 진짜 시작인데. 생각보다 잘 견뎌내 주고 있어."

"....."

나도 익히 경험해 본 마나 응축기의 고통.

근육을 늘리고 싶다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무식한 운동으로 근육을 붙게 만드는 것처럼 마나 양을 늘리기 위해서는 마나홀을 확장해야만 한다.

그런데 쉽게 얻는 대신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죽을 맛일 것이야. 흐흐.'

거의 전문 고기 수준이었던 마나 응축기 안에서의 고통.

독하게 살아온 마법사들답게 아직까지는 잘 참고 있었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내 말에 마나 응축기 안의 마법사들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모습은 나만 보는 것이 아닐 것이었다.

"참! 오늘부터 자네들을 위해 특별히 고서클 마법사들을 섭외해 왔네. 내가 간간이 도와주기는 하겠지만 워낙 바빠서 일대일로는 시간이 나지 않아서 말이야."

"여, 영주님, 그렇게까지 마음을 써주신다니... 정말...."

지난 고통도 잊고 감동을 먹은 게스아닌과 마법사들.

"뭘, 이 정도를 가지고. 그대들은 이제부터 나와 운명을 같이하는 마나의 친구들 아닌가."

"...감사합니다, 영주님...."

'감사? 크크, 그 마음, 단 하루 만이라도 잊지 않기를 바라네.'

"들어들 와!"

밖에 대고 들어오라 소리쳤다.

스스스슥.

명령이 떨어지자 이중으로 된 문을 열고 들어서는 다섯 그림자.

"헛!"

"불렀는가, 주인."

언제나 혀가 짧은 수인족 하시포트.

'정말 엄청난 학구열이야.'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집중력을 발휘하는 수인족들.

그들은 강력한 육체에 비하여 마법 지식 습득 능력은 떨어졌다.

그 대신 잔머리가 아닌 노력으로 그 부족함을 메우는 수인족들이었다.

'늬들, 이제 다 죽었어.'

속 좁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좋은 사람이 아닌 나.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마법사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묵념 의식을 행했다.

"여기 있는 마법사들을 한 달 안에 각각 한 서클씩 올려."

"헉!"

"만약 목표한 바를 채우지 못한다면...."

수인족들과 입을 벌리고 놀라는 마법사들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씨익 상큼한 미소를 날렸다.

"더 이상의 마법은 없어."

"알겠다, 주인. 반드시 그리 만들겠다."

결의를 다지는 하시포트와 수인족.

"....."

수인족들의 굳건한 다짐에 한기를 느꼈는지 몸을 부르르 떠는 마법사들.

"그럼 수고들 해."

손을 흔들며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마법사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흐흐.'

마법사들을 빨리 육성해야 내 육신이 편해질 것이다.

밤마다 블레스트 스피어에 마법진을 새겨 넣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인형 눈알을 붙이는 알바도 아니고, 돈도 안 되는 것이 괜스레 사람 피곤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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