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장 굴러들어 온 떡들
'어라? 왜 이리 사람이 많아?'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에 딸그락 딸그락 상단의 뒤를쫓아 오기에는 성미에 맞지 않았다.
도망간 용병 와이번 놈들이 대가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다시 되돌아올 리는 없었기에 다섯 명의 스카이나이트를 남기고 스카이나이트들은 오라크 성에 되돌려보냈다.
그렇게 일을 처리하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베베토를 타고 미리 도착한 창공단.
길게 줄을 선 백성들이 꾸역꾸역 넓은 창공단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식량 배급이라도 하나?'
없는 동안 대부분의 일 처리를 데르발에 맡겨놓았다.
세부적인 행정령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데르발이었기에 믿고 맡긴 것이다.
"영주님이 돌아오셨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영주님이시다!"
베베토와 나를 알아본 백성들과 병사들이 손을 흔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아마 대륙에서 이렇게까지 영지민들에게 사랑받는 영주는 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황제에게 정식으로 임명된 영주는 아니었지만.
퍼럭 퍼럭 퍼러러럭.
'얼라리요?'
베베토가 착륙하는 동안에 보이는 광경.
커다란 천막 하나가 떡하니 활주로 중앙에 놓여 있었고 백성들이 그 앞에 줄을 서고 있었다.
그것도 경건한 자세를 유지하며 성호를 긋고 있는 백성들.
'누가 왔나?'
내가 왔건만 데르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충!"
베베토가 착륙하자 와이번을 담당하는 병사들이 달려와 충을 외쳤다.
"무슨 일인가?"
"사제님이 오셨습니다."
"사, 사제?"'
얼굴에 '나 행복해요' 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병사가 힘차게 대답했다.
'자원봉사 나왔나?'
아르미스의 얼굴이 번뜩 떠올랐지만 그건 아니었다.
루비스 상단에서 연락이 없었을뿐더러 그 먼 거리를 이리 빠른 시간 안에 온다는 것이 말이 안 되었다.
내 편지를 받자마자 말을 타고 산 넘고 물 건너야만 가능한 이동 거리였다.
'어쨌거나 고마운 분이군. 이런 곳을 다 찾아와 주고 말이야.'
배고프고 지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신의 목소리만큼 훌륭한 위로제는 없었다.
모든 인간들의 고난을 알고 이해해 주시는 선신들이라면 더욱더 사람을 치료하는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신의 사제들이 주는 어설픈 축복이라도 인간들은 받고 싶은 것이다.
인간들 스스로 완벽한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한 영원히 그럴 것이다.
탈칵.
비행 투구를 벗어 한 손에 들었다.
아무리 내가 영주라지만 신의 사제에게는 나도 위로받고 싶은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흐흐, 여사제면 더욱 훌륭할 텐데.'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아르미스의 그 성스러운 미모.
사제를 뽑는 기준이 이곳에서는 순수한 마음 플러스 미모인 것이 확실했다.
이 대륙에 살면서 만난 여사제치고 안 예쁜 사제가 하나도 없었다.
인간이나 신이나 보는 눈은 다 똑같은 것이 분명했다.
"신의 손길로 어린 양의 죄를 사하고 치료를 허락하노라 큐어."
파앗!
"와아...."
"자비하신 네르아님의 손길이다!"
'응? 네, 네르안?'
내가 다가가고 있음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천막만을 바라보는 백성들.
따스한 신성력이 빛이 되어 반짝였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네르안님의 종이시여!"
아픈 곳이 치료가 된 듯 감격으로 울먹이는 중년의 남자.
"죄송합니다.... 진작 여러분들의 아픔을 알았더라면...."
'이... 이 목소리는!'
귓가에 들려오는 아련한 여인의 목소리.
벼락을 맞은 듯 영혼이 파르르 떨렸다.
"영, 영주님!"
"모두 비켜주시오. 영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때 나를 알아본 백성들이 서둘러 자리를 양보했다.
저벅저벅.
발걸음을 따라 쿵쿵 뛰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천막 앞으로 걸어갔다.
사박사박.
그때 천막 아에서 밖으로 나오는 하얀 가죽신.
스윽.
그리고 하얀 로브에 감싸인 여린 육신이 따사로운 햇빛에 몸을 서서히 드러냈다.
쿵! 쿵! 쿵!
영혼보다 먼저 알아챈 심장이 요동쳤다.
스르르륵.
로브로 반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여인.
기다랗고 하얀 손가락으로 로브를 거두었다.
"아...."
터져 나오는 신음.
"부족한 네르안님의 종... 아르미스가 카이어님을 뵙습니다."
왼손으로 로브의 가슴 쪽을 누르며 고개를 숙이는 그녀.
'아, 아르미스!'
그녀가 찾아왔다.
다급한 상황에 말도 안 되는 편지를 보내 불렀건만 정말로 찾아온 그녀 아르미스.
은빛 광채가 뒤섞여 있는 부드러운 푸른빛의 긴 머리칼을 한쪽으로 다소곳이 묶고, 성스러운 후광을 뒷배경 삼아 앞에 나타난 아르미스.
"멀리서 이곳까지 달려와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뭇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예의에 한 점 어긋남이 없이 고개를 숙여 아르미스에게 경의를 표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신의 뜻대로라는 말을 읆으며 사르르 얼굴을 붉히는 아르미스의 투명한 얼굴.
쿵쿵쿵.
내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저 심장 소리만 요란하게 울릴 뿐이었다.
★★★★★★★★★★★★★★★★★★★★★
'혼자 힘으로 어찌 저럴 수 있단 말인가.'
지치지도 않는 강철 체력의 신의 사자.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건만 아르미스는 지치지도 않고 찾아온 이들에게 신의 축복과 은총을 내려주었다.
"대단한 성력입니다. 혼자서 저리 많은 사람들을 감당하다니...."
데르발도 놀라워했다.
그가 아는 상식에도 저리 많은 이들에게 일일이 성력을 나눠주는 사제가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데르발."
"네, 주군."
"도시를 건설하자."
"도시라 하심은...."
뜬금없는 내 말에 의문을 표하는 데르발.
"제국도 부럽지 않을 거대한 땅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야. 적어도 대륙 그 어느 황도나 왕성보다 큰 대도시를 말이야!"
"헛....!"
예상을 넘어서는 내 말에 데르발이 놀라 신음을 흘렸다.
"왜, 자신없나?"
창밖에서 등을 돌려 데르발을 보았다.
"아닙니다. 주군이 하시는 일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지실 것입니다!"
맹목적인 충성을 가슴에 삼키고 사는 데르발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것도 3년 안에 말이야."
"네, 네에! 3년 안에 말입니까!"
3년이라는 말에 거듭 놀라는 데르발.
제국의 황성도 보통 수십 년 단위로 건설이 되건만, 그것보다 더 큰 건축물을 3년 안에 완성한다는 내 말이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성안에는 덴포스 도시만 한 내성을 건설할 것이야. 그리고 그 옆에는 적어도 삼백여 기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창공단이 들어설 것이고, 또 한쪽에는 창공단만 한 성전도 만들어질 것이야. 어때, 근사하지?"
"....."
내 물음에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못하는 데르발.
내가 말하는 것들을 상상해 보는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주, 주군, 그건 도시가 아니라...."
다만 뭔 말이 하고 싶은지 말을 더듬었다.
'그래, 사나이 포부가 있지.'
차근차간 그려지는 파라다이스의 설계도.
지금까지는 아주 훌륭하게 진행이 되어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리되게 만들 것이었다.
"그만 백성들을 돌려보내게. 그리고 근사한 저녁을 준비해줘."
"알겠습니다, 주군."
아무리 신의 축복을 듬뿍 받은 존재라지만 체력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는 법.
아르미스도 쉴 때가 되었다.
'저렇게 하다가는 지쳐 쓰러질 것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신의 사랑에 굶주려 있던 네루만 백성들.
네르안의 사제가 왔다는 소문이 나면 사방에서 물밀 듯 밀려올 것이 분명했다.
"좀 씻어볼까."
마법으로 매일 세척(?)을 했지만 오늘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싶었다.
먼 길을 찾아왔을 귀한 손님과 이대로 식사를 할 수는 없었다.
"흐흐...."
입가에 번지는 알 수 없는 미소.
오늘 밤 아르미스와 함께할 모든 시간들.
생각만 해도 행복 그 자체였다.
★★★★★★★★★★★★★★★★★★★★★
"맛있어요."
참 간결한 한마디였건만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었다.
"감사합니다, 신의 종이시여."
아르미스의 소박한 미소가 곁들인 칭찬에 루시아 어머니가 활짝 웃었다.
"이거 서운한데요. 평소 제가 먹던 것보다 훨씬 맛있는 것 같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하하, 농담입니다. 평소 맛과 똑같습니다. 몇몇 음식들은 못 본 것들이지만...."
내 말에 고개를 푹 수그리며 부끄러워하는 루시아 어머니.
이곳 대륙 사람들에게 있어 신의 종들은 이런 위치였다.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도 모르고 돈과 명예에 혈안이 되어 있는 신의 종들.
그들이 죽어서 지옥에 안 간다면 누가 갈 것이겠는가.
"오시는데 힘들지 않았습니까?"
두근거리던 심장이 식사 끝나갈 무렵에는 평안하게 바뀌었다.
평소에는 입지도 않았던 예복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아르미스와 함께한 식사 시간.
음식이 더욱 맛있는 것 같았다.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편지를 받는 그 순간, 신께 날개라도 달아달라고 기도를 청할 뻔했습니다."
왜 힘들지 않았겠는가.
아직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대륙 곳곳의 험로를 상단의 거친 용병들과 함께 왔을 터, 환하게 웃는 아르미스의 미소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고맙습니다."
진실을 담은 눈길로 마법등에 반짝이는 아르미스의 투명한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사라락.
대답 대신 밀크쉐이크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아르미스.
내 입가에도 그녀의 미소를 닮은 녀석이 방긋 만들어졌다.
"그런데 아르미스님은 어떻게 주군을 아시는지요?"
한 손으로도 능숙하게 식사를 하던 데르발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신이 허락하신 은총 덕분입니다."
짧고도 간결한 명답.
자비의 여신 네르안님이 사람 볼 줄은 제대로 알고 계셨다.
"카이어님이 아니었다면 전 아직도 방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네르안님이 말씀하시는 낮아지는 사랑에 대한 뜻도 모르고...."
말을 흘리며 그윽한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는 아르미스.
꿀꺽.
마른침이 소리없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저도 인연의 주관자이신 로메로님이 아니었다면 주군을 만나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비참했던 인생을 구원해 주신 주군을 말입니다...."
두 사람의 뜨거운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이 사람들이 쑥스럽게.'
화끈거리는 얼굴.
나름대로 철판을 깔고 인생을 살았다 생각했건만 낯 뜨거운 칭찬에 덜 오염이 된 것 같았다.
"창공단의 격납고 하나를 신전으로 개조해 놓겠습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어차피 남아도는 건물입니다. 부족하지만 잠시만 기다리시면 네르안님을 위한 대신전을 건설해 드리겠습니다. 아르미스님을 위해서가 아닌, 신께 드리는 제 간절한 정성으로 말입니다."
침을 바르지 않고도 줄줄 새어 나오는 말들.
잘 알지 못하는 네르안에게 어찌 간절한 정성을 담을 수 있겠는가.
"감사합니다. 카이어님 같은 분들만 세상에 있다면 신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안식과 평안이 강물처럼 흐르는 천국이 완성될 것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감사 인사를 올리는 아르미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겠소. 움하하하하하.'
신전이 건설되면 얻게 되는 이득이 한둘이 아니었다.
네루만 백성들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고, 대신전이 건설되면 아르미스의 마음을 닮은 사제들이 육성될 것이다.
'그리고 만들어지는 성수는.... 흐흐흐.'
황금알을 낳는 거위보다 더 짭짤한 수입을 안겨주는 성수 장사.
신도 공짜로 이곳에 둥지를 틀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이었다.
신이나 인간이나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끈끈한 정이 오래 유지되는 법이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었지만....
★★★★★★★★★★★★★★★★★★★★★
쉬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파라라라라라라라락
대지를 뒤덮을 것같이 넓게 펴진 베베토의 긴 날개.
창공이 허락한 바람을 들이켜며 긴 그림자를 만들어내었다.
"아...."
귓가에 들려오는 나직한 신음.
'크으....'
차마 내뱉지 못한 뜨거운 신음.
쌍코피가 안 터진 것이 다행이었다.
언젠가 약속했던 아르미스의 야간 비행.
식사를 마친 늦은 밤.
달은 하늘의 축복처럼 빛으로 노래를 불렀고, 나는 잠 못드는 아르미스를 불렀다.
그리고 시작된 야간 비행.
날씨는 어느새 초여름으로 들어서는 길목.
에어 플레이트를 벗어버리고 비행용 가죽옷을 걸쳤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
미인을 태우자 신이 난 베베토 녀석이 힘찬 울음을 토하며 특기인 급강하 롤러코스터 비행으 실시했다.
콰악.
순간 허리를 움켜잡은 아르미스가 잔뜩 힘을 주었다.
'흐윽!'
그리고 등판에 느껴지는 봉긋한 그 무엇.
비행 때문도 아니건만 정신이 어질거렸다.
'어무이!!!!!!'
힘차게 불러보는 어머니.
이 짜릿함! 뒤에 짦은 치마의 예쁘장한 여자들을 태우고 달리는 야타 오토바이족의 기분이 이럴까.
비행소년(?)만이 맛볼 수 있는 황홀함.
'베베토, 한 바퀴 더!'
한번 기회를 잡았을 때 끝장을 봐야 하는 법.
고삐를 잡아당겨 내 간절한 의사를 베베토에게 전했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내 기쁨이 자신의 안락한 미래를 위한 보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 빠른 베베토.
급강하에 이어서 삼중 회전 돌기를 시도했다.
"어멋!"
그리고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덮쳐 오는(?) 아르미스의 손길.
참으로 흐뭇한 비행이 아닐 수 없었다.
★★★★★★★★★★★★★★★★★★★★★
"아... 아름다워요."
한바탕 폭풍 같은 비행이 끝나고 잔잔히 파도치는 바다 위를 날았다.
사락사락 바람 소리처럼 날갯짓을 하는 베베토 덕분에 느긋해진 비행.
달빛 젖은 바다에 취한 아르미스가 아름답다 말을 꺼냈다.
'당신이 더 아름답습니다.'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 바다를 감상하는 아르미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그려졌다.
"언제든... 불러만 주십시오. 아르미스님을 위해서라면 폭풍우 치는 바다도 날 수 있습니다."
"고마워요... 카이어님...."
등 뒤에서 속삭이는 아르미스의 가냘픈 목소리.
등판을 타고 기분 좋게 울림을 전해왔다.
"인연의 끈은 끝이 없어서 모든 하늘과 땅을 뒤엎는다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인연의 끈을 놓고 싶지 않습니다...."
'아르미스님과 함께라면.'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짧은 순간의 고백.
사라락.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아르미스의 부드러운 두 팔이 허리를 안아왔다.
파락 파락 파라라라락.
바다 위를 조용히 나는 베베토.
꿈결 같은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거친 삶에서 가끔씩 쉬어갈 수 있는 여유처럼 그렇게 나에게도 행복이라는 놈이 살짝 윙크를 날려주고 있었다.
★★★★★★★★★★★★★★★★★★★★★
"500만 골드는 제국 골드로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500만 골드는 항시 사용할 수 있는 예비금으로 상단에 맡겨 두겠습니다."
"그렇게 저희 상단을 믿어주시다니 총지배상인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올리는 바입니다."
파격적인 내 제안에 자메르가 고개를 숙였다.
"네루만 영지 밖까지는 병사들과 스카이나이트들이 호위 할 것입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하하, 충분합니다. 그 어느 누가 있어 네루만의 사자를 건드리려 하겠습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렌키스 지부장에게 말만 하십시오. 상단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자메르가 이끄는 루비스 상단이 돌아왔다.
덴포스에 도착한 상단은 바로 상행을 떠난다 하였다.
대륙에 소문이 퍼지기 전에, 다른 곳에서 손을 쓰기 전에 물건들을 팔고자 함일 것이다.
"모쪼록 좋은 성과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이 은혜 반드시 몇 배로 갚겠습니다."
'당연한 말씀! 먹고 튀면 배 쨀 것이야.'
"라이케르 경, 영지 밖까지 잘 모셔다 주도록."
"헤헤, 저만 믿으십시오. 확실히 모시겠습니다."
요즘 영지 안전 통로를 확보하려 동분서주하는 라이케르와 제니스.
생각보다 죽이 제법 맞는지 두 사람은 잘 어울려 다녔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잠깐, 이걸 가지고 가십시오."
"이건...."
"성수입니다. 그것도 아침에 만든 따끈한 최고급입니다."
"헉! 최, 최고급 성수 말입니까!"
유리병에 담겨 있는 은은한 블루 빛의 성수.
'한 번 먹어보고 광고 부탁하오. 흐흐.'
이른 아침 기도를 하고 있는 아르미스에게 깨끗한 샘물을 내밀었다.
그리고 잠깐의 기도 뒤에 만들어진 최고급 성수.
아르미스만 있다면 평생 굶어 죽을 일은 없었다.
"이렇게 귀한 것을...."
감동의 연속타를 맞고 감격해하는 자메르.
"자메르님과 루비스 상단의 도움이 있어야 본 영지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영주님의 고귀한 뜻을 잘 받들겠습니다."
돈도 안 드는 몇 마디에 자메르의 마음을 얻었다.
나를 보는 눈빛이 불과 몇 분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상인의 마음을 얻는 것.
소녀시대 모두의 마음을 얻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출발하라!"
부피가 큰 식량이 아닌 순수 드워프 명품이 실려 있는 십여 대의 마차.
히이이이잉.
덜컹덜컹.
병사들 천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힘차게 출발하였다.
'이제 한번 놀아볼까.'
"데르발, 다들 모아놨지?"
"네, 주군. 창공단 활주로에 모아두었습니다."
'이제 소문 좀 났겠지.'
포로로 잡아온 상인들과 용병들, 그리고 마법사들을 영지민들이 보는 앞에서 창공단으로 끌고 들어갔다.
아마 지금쯤 각 마탑이나 정보 길드, 상인들은 상황 파악에 정신이 없을 것이었다.
★★★★★★★★★★★★★★★★★★★★★
"바즈란 제국과 황실, 나아가 본인의 명예를 더럽히고 영지에서 반란을 획책한 그대들을 모두 참수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나, 신성한 대지에 더러운 피를 뿌릴 수 없기에 강제 추방을 명한다! 동시에 착용하고 있는 일체의 물품과 재산들은 피해액에 갈음하여 몰수를 명하는 바이다!"
"....."
며칠 동안 포로 신세로 끌려온 이들의 얼굴에 안도감과 함께 허탈함이 보였다.
"코르베인 상단의 부단주 테스케, 본인의 결정에 동의하는가?"
"...책임은 스스로 지는 것이 아니겠소."
말에 뼈가 들어가 있는 테스케.
"가우스 마탑의 부탑주는 본인의 판결에 불만이 있는가?"
"으드득...."
대답 대신 손에 마나 팔찌를 착용하고 이를 가는 가분수 마법사.
마음 같아서는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었지만 신성한(?) 재판장에서 품위 떨어지게 그럴 수 없었다.
"헤르스 용병단 세들리안 단장은 동의하는가?"
"동의합니다."
허벅지를 깊숙이 찔렸지만 내가 펼친 힐 마법에 피만 한 바가지 정도 흘렸을 뿐인 세들리안.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뜨거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영주님,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저와 제 휘하 용병들을 받아주십시오."
'헐? 이게 웬 떡이야?'
갑작스러운 세들리안의 제안.
제국에도 십여 명이 넘지 않는 마스터 급 실력자가 기사단급 용병들을 이끌고 망명을 요청하고 있었다.
진작부터 탐이 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욕심이었다.
그런데 세들리안은 이미 용병들과 얘기가 된 듯 확정적으로 말을 꺼냈다.
"저희 용병단은 이제 갈 곳이 없습니다. 영주님 덕분에 불패의 신화가 깨졌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을 책임져 주십시오."
'얼라리요.'
용병들의 세계에 대해서 자세히는 몰랐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기사들이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는 것처럼 용병들에게 의뢰의 성공은 필수적인 덕목일 것이다.
'눈빛이 살아 있다.'
하지만 그 차원이 아님을 확신했다.
잔잔하지만 깊숙한 곳에서 타오르는 뜨거운 열정.
"좋다. 단, 일반 병사에 준하는 대우를 할 것이다. 그래도 오겠는가?"
그냥 받아들이는 건 바보나 하는 짓.
얼마나 자존심을 굽히고 들어오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만약 이들이 내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이들이라면 난 또 다른 날개를 얻는 것이리라.
"주군 뜻대로 하십시오. 신 세들리안, 주군을 영접합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세들리안이 무릎을 꿇고 복종의 예를 취하였다.
그 뒤를 따라 무릎을 꿇고 힘차게 외치는 500명의 용병들.
'잉, 이게 꿈이야 생시야?'
블레이드를 다룰 줄 아는 기사급 용병은 대륙 어느 곳에 가서도 대접을 받았다.
얼마 전 네루만에 있던 용병들 중에서도 이런 실력자들은 기껏해야 수십 명을 넘지 않았다.
그런데 한꺼번에 500명이 넘는 용병들이 내 밑에 들어왔다.
'평범한 용병이 아니다!'
그리고 느껴졌다.
보통의 용병들과 다른 세들리안의 용병단의 기세.
마치 영지에서 잘 훈련받은 기사들 같았다.
"일어나라. 이제 그대들은 나의 병사들이다."
"감사합니다, 주군!"
정확한 이유를 물어봐야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좋았다.
코르베인 상단의 호주머니까지 털털 털어 부가 수입을 올렸고, 와이번 세 마리를 더 획득하여 창고에 고이 모셔두었다.
거기에 쓸 만한 용병들 500명의 획득.
세상에 나같이 운이 좋은 놈은 정말 드물 것이었다.
로또에 이중 삼중으로 당첨된 기분이 아마 이런 기분일 것이다.
"상인들과 마법사들을 영지 밖으로 추방하라!"
"충!"
더 이상 별 볼일 없는 테스케와 마법사 둘.
간단하게 게임 오버시켜 버렸다.
"데르발 경, 이들에게 숙소를 지정해 주게. 세들리안은 나와 잠시 얘기하세."
"주군의 명을 받드옵니다."
★★★★★★★★★★★★★★★★★★★★★
"감히... 본 마탑을 어찌 보고...."
믿을 수 없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실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마법사.
가우스 마탑의 네루만 지부장 올토이스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목숨이 서너 개라도 되는 듯 천방지축 날뛰는 카이어라는 놈.
이번에는 놀랍게도 코르베인 상단과 가우스 마탑에 선전포고를 했다.
"6서클 마검사라니.... 으드득."
가우스 마탑에 올리는 급보.
나이도 어린 놈이 6서클 마검사에 정령사까지 의심된다는 믿지 못할 보고서를 작성하며 올토이스는 또 한 번 몸을 떨었다.
순수한 마법사로서의 질투.
열 살 때 시작된 마법 공부가 오십대에 이르러서야 5서클에 다다랐다.
그런데 새파랗게 어린놈이 6서클 마법사.
그것도 가우스 마탑의 부탑주 두 명과 와이번 세 마리를 작살 냈다는 말도 안 되는 사실에 두려움까지 일었다.
한때는 마탑에서도 뛰어나다는 소리를 들었던 올토이스였다.
그런 올토이스와 비교할 수 없는 서클을 완성한 카이어라는 놈.
반드시 죽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 분노와 살기는 보고서에 착실히 담겼다.
철컥.
하루에 1,000킬로가 넘는 비행 능력을 소유한 루미카르의 발둥 상자에 보고서를 담았다.
"가랏."
파다다닥.
올토이스의 명령에 열린 창문을 통해 빠르게 사라지는 루미카르.
이틀 후면 이곳의 참극이 알려질 것이다.
대륙에서 제국도 두려워하지 않는 가우스 마탑의 자존심을 건드린 놈.
비명에 갈 놈의 최후를 생각하며 올토이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을... 씹어 먹으리라."
마법사의 뜨거운 분노.
그리고 그 순간 도시 덴포스의 창공을 날아가는 루미카르들의 행렬.
네루만에 불어올 미래의 폭풍들이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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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원하나."
차를 앞에 두고 세들리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황금갈색의 머리칼을 소유한 사십대 초반의 남자.
유난히 빛나는 갈색 눈동자.
약간 각이 졌지만 무난한 인상의 소유자인 세들리안 단장.
내 물음에 지그시 내 눈동자를 응시하였다.
"주군께 제 검이 꺾이는 순간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복수는 사라지고 잃어버렸던 꿈이 생각났습니다."
고백처럼 울리는 세들리안의 말.
"세상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젊은 시절 집에서 쫓겨나 용병이 되어 천하를 방랑했습니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내 것을 탐한 이를 죽이려 힘을 길렀습니다. 그리고 그 복수가 거의 끝에 다다른 순간 주군께 검이 꺾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이미 나를 아는 이들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그곳을 힘으로 빼앗은들 흘러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주군의 검에 살이 뚫리면서 깨달았습니다."
'귀족이었군.'
말속에 숨어 있는 의미에서 세들리안이 귀족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반 평민이 집을 빼앗겼다고 그렇게 긴 세월 동안 방랑하며 힘을 축적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것도 멋진...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멋진 기사.
참으로 멋진 말이었다.
세상에 수없이 많은 기사들이 있건만 정말로 멋진 기사는 드물 것이다.
멋진의 기준이 저마다 다르지만 몽롱하게 소년처럼 빛을 내는 세들리안이 꿈꾸는 기사는 정말 멋진 기사일 것 같았다.
"주군, 제 소망을 이루게 도와주십시오. 저만 믿고 바람에 휩쓸리는 구름처럼 살아갈 저와 제 부하들에게 구름이 머물 수 있는 커다란 산이 되어주십시오! 아니, 주군이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어젯밤 꿈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그만 방황을 끝내고 제 꿈을 찾으라고 말입니다."
거친 용병드르이 대장이 꺼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연속.
멋진 기사의 꿈.
저 사십대 초반의 용병 아저씨에게서 순수한 영혼의 향기가 느껴져 왔다.
"자네 정도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훌륭한 주군을 택할 수 있을 것인데, 하필 네루만에서 그것도 나를 택했는가. 가진 것이라고는 희망밖에 없는데...."
'크윽, 미치겠네.'
말을 하면서도 점점 버터에 밥 비벼 먹을 정도로 말투가 변한 내 자신이 싫었다.
이게 어찌 고삐리가 뱉을 말이던가.
"주군... 그 희망을 나눠 주십시오. 죽기 전, 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고삐리 말에 현혹되어 불나방처럼 날아오는 아저씨.
"...후회하지 않겠는가?"
"물론입니다!"
"기사단장 세들리안 경 앞으로 잘 부탁한다."
"헛...."
기사단장이라는 말에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세들리안.
"멋진 기사라 불리려면 기사단장 정도는 되어야지 네루만 제1기사단장 세들리안 경. 하하. 멋있지 않나?"
"주, 주군...."
대륙에서 이름을 날리는 용병단장도 좋지만 기사단장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는 달랐다.
'쏠려면 확실하게 쏴줘야지. 한번 믿어봐. 제대로 밀어줄테니까.'
어차피 기사단이 하나쯤 필요했다.
그것도 어지간한 몬스터 따위는 단숨에 밀어버릴 강력한 기사단.
그리고 신의 축복처럼 나를 찾아온 세들리안.
딱 나에게 발목 잡히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