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장 조건
'헐? 저, 저게 도대체 몇 마리야!'
야만 종족 테미르 놈들의 공격이라 했기에 쬐금 방심했던 마음.
그런 마음을 산산이 박살 내버리는 어마어마한 와이번 무리.
'한 놈, 두 놈! 으아아! 삼십 마리가 넘잖아!'
독수리가 사체를 발견하고 빙빙 하늘을 돌듯이 거대한 원을 그리며 공중을 맴돌고 있는 와이번들.
대충 세어봐도 삼십 마리가 넘어갔다.
'그런데 저 자식들, 갑옷도 없네?'
와이번을 보호하는 보호 마법구뿐만 아니라 스카이나이트들도 에어 플레이트를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파란 빛이 나는 가죽 옷을 착용한 채로 블레스트 스피어만 들고 있는 놈들.
그런 놈들이 타고 있는 와이번들의 몸통에는 마법진 같지만 마법진이 아닌 요상한 도형과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음....'
무작정 북쪽으로 날아오르기를 한 시간.
북쪽 또한 작은 구룽 같은 산을 빼고는 모든 곳이 평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덕분에 제법 넓은 곳을 볼 수 있었고, 곧 병사들 무리를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찾은 병사들이 사방을 향해 뿔뿔이 도망치고 있다는 것과 삼십여 마리의 와이번들 밑에 포위되어 있는 인간들 몇몇이 내가 만나야 할 그 누구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
'제길.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아무리 나라 해도 눈앞을 어지럽히는 삼십 마리의 와이번이라는 숫자가 부담스러웠다.
'살려, 말어?'
적들과의 거리는 약 4킬로 정도.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한 듯 놈들은 방향을 틀지 않았다.
그러나 순간 고민이 들었다.
여기서 토끼면 그만이었지만 놈들에게 발각되면 목숨 내놓고 한판 벌여야 했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헉!'
하지만 그런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쌈닭 조폭 출신인 행동대장 베베토.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삼십 마리의 적들을 향해 우렁차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래, 고맙다! 아이구!'
베베토의 울음에 화들짝 놀란 수십 마리의 와이번.
앞 다투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이제는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
블레스트 스피어를 양손으로 뽑아 들었다.
'가, 가만! 이거 모자라잖아!!!!!'
설마하는 마음에 20개 정도의 블레스트 스피어만 가지고 왔다.
그런데 적은 삼십 마리가 넘는 상황.
아무리 빼고 더해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놈이 있었지!'
순간 번뜩 생각나는 한 존재.
내 말이라면 드래곤 코라도 물 그놈.
"슈리엘, 컴 온!"'
쉬휘휘휘휘휘!
특이한 정령이라는 존재.
강렬한 소망이 일자 은빛 바람의 독수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슈리엘! 가서 신나게 물어뜯어!"
파앗!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바람의 슈리엘.
'윽!'
거기에 비례하여 소멸하는 마나.
'가만.... 저것들도 다 와이번 아냐!'
블레스트 스피어에 마나를 넣는 순간 갑자기 드는 생각.
하늘을 가득 메운 와이번들이 적이 아닌 돈 덩어리로 보였다.
'으흐흐.... 이게 웬 떡이야?'
마리당 백만 단위가 넘어가는 와이번 가격.
아쉽게도 마법 방어구가 없었지만 와이번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상황.
블레스트 스피어를 손에서 내렸다.
마법 방어구도 없는 놈들이었기에 맞으면 골로 갈 수 있었다.
'이놈들 다 죽었어.'
놈들이 도망갈 틈을 주지 않고 한 방에 잡아야 했다.
쿠오오오오오오!
나를 신롸하는지, 천성이 간이 부은 건지 알 수 없는 베베토.
신나게 울음을 토하며 전속 돌진했다.
파바밧.
그리고 어느새 2킬로미터로 다가온 적 스카이나이트들.
내 돌격이 우스웠는지 선두를 이루고 있는 다섯 놈들만 블레스트 스피어에 마나를 집어넣고 있었다.
위이이잉.
그런 놈들을 바라보며 마나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
"미...미친!"
"저, 저런 말도 안 되는...."
1대 30의 전투였지만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 야이크스 백작과 기사들.
갑작스럽게 나타난 중급 정령의 모습에 한가닥 희망을 가졌지만 스카이나이트가 블레스트 스피어를 내려뜨리는 광경에 절망에 빠졌다.
한눈에 보기에 삶을 포기한 자의 행동.
한 가닥 기대는 처참히 사라져 버렸다.
쉬쉬쉬쉬쉭.
그런 절망 속에 테미르 종족 스카이나이트들의 손에서 블레스트 스피어가 발사되었다.
끼오오오오오오!
콰직!
그 와중에 중급 정령 슈리엘은 제일 앞에서 날아오던 와이번의 날개를 힘차게 물었다.
크라라라라라라라라라!
얼마나 강력하게 물렸는지 비명을 토하며 빙글빙글 회전하며 추락하는 와이번.
오른쪽 날개를 사용할 수 없을 만큼 큰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퍼버버버버버버벙!
"허억!"
"마, 마법!"
슈리엘의 행동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던 야이크스의 기사들.
갑자기 공중에서 울리는 강렬한 폭음.
"윈, 윈드 토이네도!! 어떻게 비행 중에 5서클 마법을!"
야이크스의 전속 마법사인 할마인이 놀라 신음을 토했다.
일반적으로 마법은 메모라이즈 상태에서도 자세나 신경이 안정화되어야만 발현이 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와이번을 타고 급격한 상황에서 정확히 마법을 발현한 자.
용기가 넘치는 자거나 간댕이가 부은 자가 틀림없었다.
"움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마법으로 날아오는 블레스트 스피어를 격추한 정체 모를 스카이나이트.
하늘이 떠나가라 광소를 터뜨렸다.
지이이이잉!
그리고 웃음 뒤에 스카이나이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 발광.
파바바바바바밧.
강렬하게 응축되던 마나들이 하늘을 갈랐다.
쉬이이이이이이익! 쉬이이이이이이이익!
"윈드 커터 중첩 마법! 오오오...."
보고 있던 마법사의 입에서 감탄의 신음이 길게 흘러나왔다.
중첩 마법도 아니었다.
아무리 5서클 마법사라 해도 저 자세나 상태에서는 두 번을 펼쳐도 훌륭하다는 마스터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정체 모를 스카이나이트는 한두 번도 아니고 무려 일곱 번이 넘는 마법을 난사하였다.
끼아아아아악!
쿠구궁.
정령에 물린 와이번이 중심을 잃고 지상에 충돌하며 처절한 비명을 울렸다.
마법 방어구가 없기에 중요한 날갯죽지를 물린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라시포르트....!!!!"
"으아아아!"
그리고 무식하게 돌진하던 테미르 스카이나이트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
수적으로 우세하지만 방어적으로 지극히 불리한 테미르 종족 연합의 와이번.
4서클 마법들이 하얀 광채와 함께 밀려들자 정신줄을 놓아 버렸다.
끼에에에에에에에!
쿠아아아아아아아아!
적을 우습게보고 밀집 대형으로 날아오던 와이번들.
한 방에 하나씩 날개가 찢겨지며 지상으로 추락해 갔다.
와이번 가죽의 특성상 4서클 마법 정도는 어느 정도 방어가 가능했지만 5서클 급의 마나가 담긴 마법에는 칼날 앞에서 돼지 가죽 신세.
50미터 이상의 높이에서 와이번들은 찢겨진 날개를 펄럭이며 지상에 빠르게 입맞춤해 갔다.
쿠궁 쿠구궁.
쿠에에에에에에에에~~~!!
쉬이이이이이익.
마법에 걸려든 와이번 한 무리가 지상에 추락할 때, 나머지 와이번들은 좌우로 재빨리 갈라지며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전투 의지를 상실하고 급격히 꼬리를 보이며 도망치는 테미르 스카이나이트들.
기세등등하던 모습으로 병사들을 유린하던 당당함은 사라지고 도망자의 추접스러운 모습만 보이고 있었다.
"세상에...."
"이, 이종교배 와이번!"
믿을 수 없는 승리에 정신을 놓고 있던 야이크스 백작의 마법사들과 기사들.
그제야 보였다.
자신들을 죽음에서 구해준 와이번이 제국에서 멸시당하는 저주받은 이종교배 와이번이라는 것을.
퍼럭, 퍼러러럭.
와이번들이 멀찍이 도망가자 천천히 야이크스 백작 앞에 착륙하는 이종교배 와이번.
바즈란 제국을 상징하는 블랙 와이번의 육중한 검은 광택과 태양에 빛나는 황금 줄무늬가 사람들의 눈 속을 파고들었다.
터억.
붉은 망토를 두른 스카이나이트가 안전 고리를 풀고 지상에 착지했다.
저벅저벅.
그리고 야이크스 백작 앞으로 다가왔다.
딸깍.
마법 투구를 여는 스카이나이트..
"음...."
투구가 열리고 보이는 낯설고 앳된 얼굴.
상상하던 모습이 아닌 검은 머리칼의 준수한 남자의 모습에 저마다 신음을 낮게 흘렸다.
"야이크스 백작님을 뵙습니다. 외인 창공단 소속 카이어 드 아달로 준남작이라 합니다."
투구를 왼손의 겨드랑이에 끼고 오른손으로 기사의 예를 올리는 카이어 준남작.
엄청난 실력에 비해 생각지 못한 작위에 기사들의 얼굴에 의혹이 어렸다.
이 정도 능력자라면 자작, 아니, 백작위를 줘도 구할 수 없는 실력자였다.
"반갑네. 야이크스 드 레부아닌 백작이라고 하네."
기사들과 마법사와 달리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게 카이어의 인사를 받은 야이크스 백작.
파바밧.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리고 튀는 작은 불꽃.
씨익.
카이어의 입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쿠에에에!
쿵쿵쿵!
날개 가죽이 찢겨 나갔건만 몸이 온전한 테미르 종족의 와이번 한 마리가 신경질적인 울음을 토하며 달려왔다.
"베베토, 밟아."
조용히 울리는 카이어의 명령.
쿠오오오오오오오!
팔짝 날아오르며 기쁨을 토하는 베베토라는 와이번.
콰직.
쿠에에에에에에에에에!
사뿐히 날아올라 무식하게 밟아버리는 육중한 이종교배 와이번의 광기 어린 모습.
"꿀꺽...."
지켜보던 이들의 입에서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조용히 웃고 있는 검은 머리의 미소년.
앞으로 적으로 마주치지 말아야겠다는 조용한 다짐을 모두의 가슴속에 품었다.
★★★★★★★★★★★★★★★★★★★★★
"정식으로 감사함을 전하는 바이네."
"아닙니다. 황제 폐하의 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였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정말 기사다운 귀족이야.'
사람의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었다.
테미르 종족 놈들의 와이번을 몰아내고 바로 하이튼이라는 마을을 구하러 출발하였다.
자신들을 괴롭히던 와이번이 사라지자 모여든 야이크스 백작의 정병들.
달려드는 몬스터 무리를 단숨에 밀어내 버렸다.
그리고 찾아온 야이크스 백작과의 일대일 대화 시간.
마을이기보다는 요새에 가까운 하이튼.
상급 지휘관들이 머무는 집무실에서 눈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런데 정말 놀랍군. 제국에 자네 같은 천재 마법사가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네. 그것도 정령을 소환하는 마법사라...."
궁금했던지 내 정체를 간접적으로 물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똑똑히 보았을 내 마법 실력.
아무리 천재라도 5서클은 내 나이 때에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더욱이 정령까지 소환할 수 있는 능력자는 대륙에 없을 것이었다.
"오해이십니다. 마법사는 맞지만 정령사는 아닙니다."
"정령사가 아니라? 그런데 어찌 중급 정령이 소환되었는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스윽 팔을 내밀며 사부가 내 팔에 끼어놓은 은빛 팔찌를 보여주었다.
"호오, 아주 귀중하 마법 아이템 같군."
"그렇습니다. 스승님께서 하사해 준 정령 아티팩트입니다. 이것만 착용하고 있다면 중급 바람의 정령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
마나를 다루는 기사였다.
그런 기사가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사부의 차원이동 마법팔찌.
마법사가 봐도 해석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물건이었다.
"그런데 자네는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가? 외인 창공단은 자네 같은 인재가 머물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넫."
"신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종교배 와이번을 소유한 자에 대한 사람들의 벌이기도 하고요."
"음... 그렇군."
이종교배 와이번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야이크스 백작.
그도 제국의 귀족이었기에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었다.
"백작님, 그런데 테미르 놈들에게 저리 많은 와이번들이 있었습니까?"
이제는 내가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 점을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네. 와이번 알을 구해도 부화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하거늘, 놈들은 그 상식을 파괴하고 있네. 마치 와이번을 검을 만들듯 찍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야. 특히, 요 일년 사이 놈들의 집단 공격이 심해지고 있네."
'좋지 않은 소식이군.'
강적들이 사방에 널려 있건만 새로이 들려오는 불길한 소식이었다.
만약 놈들이 마법 방어구까지 착용한다면 대책이 없을 것이었다.
쿠에에에에!
쿠크크크크크크.
'베베토 이 녀석, 살살 하라니까.'
군사용 마을이었기에 격납고도 다섯 기나 있었다.
그 격납고 안에 잡혀온 와이번 다섯 마리를 집어넣었다.
날개가 찢겨졌기에 장시간 요양이 필요한 와이번들.
베베토에게 개기다 몇 대 얻어터진 다음 이곳까지 걸어서 끌려왔다.
물론 수컷 두 마리가 정신을 차리고 베베토에게 개겼지만, 늑신나게 얻어터지고 잠잠해졌다.
그와는 반대로 암컷 와이번들은 베베토의 굵은 근육에 미리 항복해 버리고는 고분고분히 이곳까지 끌려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신교육.
베베토가 개겼던 수컷 와이번들을 확실히 교육시키고 있음이 비명 소리를 듣고 짐작할 수 있었다.
"하하. 자네 와이번은 내가 알던 와이번과 차원이 다르군. 이종교배 와이번이라지만 저렇게 야생적이라니."
"남자라면 저 정도 박력은 있어야죠."
"박력? 푸하하! 자네를 닮은 것 같군."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리는 야이크스.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사내라면 거친 야생의 매력이 있어햐 하는 법.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거칠게, 그것이 바로 남자의 매력이 아니겠는가.
"그건 그렇고.... 이거 어떡하나. 애써 나와 병사들의 목숨을 구해준 자네에게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어라? 지금 이 말은 배째라?'
내가 알고 있던 이곳 상식과 다른 말을 뱉어내는 야이크스 백작.
사각턱의 강인한 얼굴을 살짝 붉혔다.
"하하. 황제 폐하와 제국을 위하는 일에 어찌 물질을 따지겠습니까. 사망한 와이번 가죽으로도 충분합니다."
지상에 추락한 일곱 마리 와이번.
그중에서 두 놈은 대가리부터 처박았는지 목이 부러져 즉사하였다.
살아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형편없는 가격이지만 가죽과 뼈만 해체해도 10만 골드 이상은 너끈히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믿음직스럽군. 그런 자네가 이런 곳으로 오다니. 어떤가, 이번에 나를 따라 다시 본국으로 갈 마음은 없는가? 황실 소속이 아니면 내 영지 소속의 스카이나이트가 되어도 좋네. 작위도 남작위 이상은 내가 보장하지."
내 가식을 가장한 호탕한 웃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스카웃하려는 야이크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황제 폐하가 허락한 제 임지. 그 명을 따라 목숨 바쳐 네루만의 안녕을 일궈낼 것입니다."
"휴우.... 자네 마음은 잘 알겠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자네도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제국은 네루만을 포기하기로 이미 결정했다네.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 말하겠네. 이미 철수 명령은 떨어졌고, 두 달 안으로 제국으로 귀환하라는 제국 군사위의 명령이 하달되었네."
'헐? 벌써?'
예상보다 빠른 결정에 잠시 당황스러웠다.
"그렇다면 이곳에 남아 있는 백성들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또, 이곳 출신 병사들은 어디로 가라는 말인지...."
대충 알고 있지만 확실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이곳 네루만은 황제 직할령도 아니고 영주가 있는 영지도 아니네. 다만 임시적 속주로 남아 있던 상태. 제국이 이곳을 포기하는 순간. 백성드로가 이곳 출신 병사들은 남겨질 것이네. 지금 제국은 그들을 포용할 수 없네...."
"음...."
"너무 걱정은 하지 말게. 아마 루켄스 자작에게 모든 권한을 이양할 생각이네. 그렇게 된다면 자체적으로 어느 정도 안전은 보장할 수 있을 것이네."
'호오, 그렇게는 안 되지.'
지금부터 중요한 순간이었다.
흘러가는 물길을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려야 했다.
"그것에 대해서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묵직하게 할 말이 있다 전했다.
"중요한 얘기인 것 같군. 술 한잔하겠나?"
"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나이를 거저먹은 이가 아님을 증명하듯 내 표정을 읽었다.
"귀한 술은 아니지만 내가 즐겨먹는 술이라네. 독하지만 아침에 뒤끝 없는 사내다운 술이지."
처음부터 부관도 동행하지 않은 대화.
야이크스는 집무실에 놓여 있는 청색의 술병을 들었다.
또로로.
주석으로 만든 잔에 푸른 색감의 술을 따르는 야이크스.
"위대한 황제 폐하와 제국의 안녕을 위하여!"
선창을 하는 야이크스 백작.
"위하여!"
잔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꿀꺽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으음."
동시에 흘러나오는 두 사람의 신음.
불이 난다는 말을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이리라.
식도를 넘어가면서 일어나는 내부의 불길.
용암을 삼킨 것 같은 뜨겁고 얼얼한 기운이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하아...."
뱉어지는 숨결.
'정말 남자답군.'
강렬한 알코올과 은은한 주향이 입을 타고 밖으로 토해졌다.
"바로 이 맛이야. 첫 전투에서 살인을 행할 때 선배 기사가 나에게 권했던 술이네. 술의 이름은 루카스시나. 망각의 친구라는 고대 언어지."
술잔을 친구 보듯 바라보는 야이크스.
'나도 중독될 것 같은데.'
적을 향해 돌진하는 전사의 심장과 같이 붉고 뜨거운 술 루카스시나.
벌써 영혼에 깊숙이 각인되어 버렸다.
"이제 이야기해 보게. 나에게 긴히 할 말이라는 것이 무언가."
잔에서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는 야이크스의 침착한 갈색 눈동자.
"저에게 주십시오."
".....?"
갑자기 달라는 말에 의문을 띠는 야이크스.
"루켄스 자작에게 양도할 병사들을 저에게 모두 주십시오."
"병사들을? 자네에게?"
백작이 놀라 되물었다.
"백작님도 아실 것입니다. 루켄스라는 작자가 이곳 백성들을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 그런 자에게 병사들마저 넘겨주신다면 백작님은 네루만을 헌신짝 버리듯 버려 버린 제국 귀족들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최선의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죽음보다 더 치욕스러운 삶을 선사한 악질적인 귀족으로 말입니다."
눈앞의 남자에게는 어설픈 수사여구 따위는 필요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가슴 대 가슴, 진실과 진실로 승부를 해야 했다.
파르르.
내 말에 손에 힘이 들어가는지 들고 있던 술잔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조용하면서 위엄 가득한 목소리로 나를 똑바로 보는 백작.
끄덕.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님이 기회를 주신다면 제국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네루만을 지켜낼 것입니다."
"....."
뜨거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자신있는가. 사방에 몬스터와 적밖에 없는 이곳을 자네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낼 자신 말인가?"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나 모두 다 똑같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뜨겁게 생명을 살다간 자는 거기에 알맞은 숭고한 죽음이, 더럽고 치사하게 살다 간 자의 죽음은 그에 걸맞은 곰팡이 같은 음습한 죽음이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 전 뜨겁고 치열하게 살다 갈 것입니다. 죽어서도 후회하지 않는, 그런 폭풍 같은 인생을 말입니다."
미련없이 하루하루를 산 자와 욕망과 오욕으로 산 자가 같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나에게서 눈을 거둬 술잔을 바라보는 야이크스.
"좋아. 자네 뜻을 따라주지."
'성공이다!'
예견치 못한 확답에 환호성이 터졌다.
변변한 와이번도 없는 총사령관이었지만 그의 한마디에 수만 명의 훈련받은 정병이 내 휘하로 들어올 수 있었다.
"단, 조건이 있네."
'엥? 조건?'
하지만 이런 큰일이 쉽게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자네가 루켄스 자작을 대신하여 이곳을 다스릴 수 있는 자격을 보여주게."
뜬금없이 자격을 말하는 백작.
"어떤 자격을 말씀하시는지....?"
"정확히 한 달의 시간을 주겠네. 그 시간 안에 루켄스를 무너뜨려 보게. 그러면 자네 뜻대로 병사들뿐만 아니라 필요한 일체의 군사 물품을 양도하겠네."
'음....'
파격적인 제안이자 당연한 이야기.
비록 내 실력이 월등하다 하나 혼자만의 힘으로 네루만을 방어한다는 것은 쉽게 증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루켄스는 십 년의 세월 동안 자신의 힘을 이곳 네루만에 떨치고 있는 자.
나 같아도 애송이 같은 나에게 병사들을 인도하느니 실력을 입증한 루켄스에게 넘겨줄 것이다.
어차피 귀족들 중에 루켄스보다 더한 자들이 많을 것이기에.
"알겠습니다. 백작님의 뜻대로 제 능력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하하. 그래야지. 기사라면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책임과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순서지. 카이어, 한번 해보게. 내 지켜보겠네."
내 대답에 화통한 웃음을 터뜨리는 야이크스.
"자! 그럼 한 잔 더하세. 자네 같은 친구를 만난 기념으로 이 병은 다 비워야 하지 않겠나."
단단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잔에 술을 채우는 백작.
"감사합니다. 이 잔은 백작님을 만나게 해주신 인연의 신 로메로님께 바치겠습니다."
어느새 잔을 가득 채운 독주.
꿀꺽 힘차게 입 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크으...."
입 안을 얼얼하게 태우며 사라지는 한 잔의 독주.
내가 뱉은 말처럼 느껴졌다.
뜨겁고 화끈한 진한 그 맛.
내가 꿈꾸는 내 인생과 닮은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