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장 오늘을 살아가는 자에게 필요한 것
"이곳 총사령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말해보게."
"야이크스 백작요? 천생 야전 사령관이죠. 마스터에 근접한 검술에 적을 보고 물러서지 않는 용맹함까지. 이곳에서는 야이크스 백작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이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도 최전방 요새에서 방어를 하고 있는 그가 있기에 이곳 사람들이 그나마 지금까지 숨을 쉬고 있으니까요."
물음에 확고한 음성으로 야이크스 백작을 향해 신뢰를 보내는 라이케르.
"제국 내에서도 유명합니다. 평범한 기사로 시작해서 백작위까지 이른 실력과 귀족입니다."
"그런 자가 왜 이곳까지 왔나? 백작위라면 제국 내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위치인데."
"야이크스 백작은 무력은 뛰어나도 정치력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본래 신분이 귀족이 아닌 일개 기사 가문 충신에 타고난 꼬장꼬장한 성품으로 귀족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데르발도 알고 있는 바를 말했다.
"내가 짐작하는 바와 다르군. 루켄스 같은 놈을 놔두는 작자라면 돈 밝히는 무능한 귀족인 줄 알았는데...."
"스카이나이트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야이크스 백작이 부임한 지 약 5년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온 스카이나이트들이 해적과 테미르 종족 놈들과 전투를 벌이다 대부분 격투당하고, 지금 남아 있는 와이번은 백작이 타고 다니는 놈만 있습니다. 그렇기에 스카이나이트를 소유하고 있는 루켄스 자작을 놔두는 것일 것입니다."
'호오, 제법 정세 파악도 뛰어나단 말이야.'
여자를 밝히는 데만 능력을 보이는 줄 알았건만, 정세 파악 능력도 있는 라이케르.
하루 사이에 수백 명이 넘는 용병들을 실력대로 분리하였고, 그들을 통솔할 수 있는 백부장도 임명해 놓았다.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인재였다.
"지금 어디에 있나?"
"테미르 종족과 마수와 몬스터들의 출몰이 빈번한 북부 영지에 있을 것입니다. 그쪽 방향은 산맥이 보호하지 않는 뻥뚫린 평지입니다."
"한번 만나보시겠습니까?"
라이케르의 설명을 듣고 데르발이 물어왔다.
집무실에 모인 야간 회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들을 찾아갔다.
"아니, 아직은.... 그건 그렇고 덴포스 치안과 방어는 총사령관 소속 병사들이 맡고 있는가?"
"그게 애매합니다. 성벽과 주변 중요 요새들은 총사령관 소속 병사들이 방어를 하고 있지만 도시 치안은 루켄스 자작의 병사들이 임의적으로 행사하고 있습니다. 총사령관과 모종의 합의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가 루켄스 자작 사병들을 공격해서 성에서 몰아내면 총사령관은 어떻게 나올 것 같은가?"
"글쎄요...."
"흐흐.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총사령부 병사들은 루켄스 자작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라이케르가 알 수 없는 음침한 미소를 날리며 확신 가득한 말을 꺼내었다.
"왜?"
"이곳을 방어하고 있는 병사들은 대부분 이곳 토착 주민들입니다. 네루만에서는 성인 남성이 되면 용병이 되거나 자원 입대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루켄스 자작가의 사병들도 그런가?"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여기 몰려온 용병들도 대부분 이곳 주민들입니다. 외부에서 온 용병들은 루켄스 자작과의 충돌을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왜 나에게?"
"분노의 폭발입니다.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제국에 대한 원망은 참을 수 있지만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목을 죄여오는 루켄스 자작에 대한 원성은 이미 모두의 마음에 가득 찬 상태 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카이어님은 희망입니다."
'어라?'
라이케르의 눈동자에서 활활 불길이 일었다.
'의외로 정의심도 불타오른단 말이야.'
라이케르의 말투에 담겨 있는 뜨거운 분노에 속으로 감탄하였다.
제비족 사촌같이 보이는 얼굴과 달리 머릿속에 제법 괜찮은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크으! 결정적으로 루켄스, 이 더럽고 치사한 놈은 죽어도 용서하지 못할 대역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대역죄?"
그동안 참고 있었던 듯 비분강개한 음성으로 주먹을 움켜쥐는 라이케르.
대역죄란 말에 귀가 솔깃했다.
"이천 대를 때리고 한 대를 더 때리고 싶은 그놈이! 나의 성은을 받아 마땅한 여인들을 다른 곳에 팔아치우는 천벌받을 짓을 벌이고 있습니다! 인신매매라뇨! 아직 내 손길도 잡지 못한 꽃다운 여인들을.... 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루켄스 그 작자를 몰아낼 때까지 제 영혼을 걸겠습니다!"
"....."
라이케르의 말이 끝나고 데르발과 나는 입을 턱하니 벌려야 했다.
루켄스를 저렇게 처절히 미워하는 이유가 단지 자신의 사랑을 받아야 할 여인들을 인신매매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던 것.
'크으! 나중에 반드시 팔아버린다! 내 곁에 놔뒀다가는 위험해!'
그리고 마음먹었다.
루켄스가 쫓겨나는 날.
라이케르 저 작자도 노예로 팔아버리거나 쪽배에 태워 멀리멀리 쫓아내리라 굳게 다짐하였다.
★★★★★★★★★★★★★★★★★★★★★
'이 정도라니....'
"어이, 거기! 줄을 서라고!"
"이제 격납고는 다 찼으니 밖에다가 천막을 쳐!"
긴긴 밤 이것저것 생각을 하다 잠시 잠이 들었고, 그리고 찾아온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밀려드는 난민들 때문에 창공단은 어수선한 하루를 시작햅ㅆ다.
"용병들과 모려드는 난민이 천 명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당장 아침 먹을거리부터 부족합니다."
난감하기는 데르발도 마찬가지였다.
소문이 돌았는지 먹지도 입지도 못한 이들이 가족들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창공단의 정문.
용병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난민들을 정리하였다.
"루비스 상단에 사람을 보내 필요한 물건들을 받아와. 그리고 쉴 곳과 먹을 것을 제공해 줘."
"알겠습니다."
얼마나 고생했는지 대부분 비쩍 마른 이들.
가난이 익숙해져 버린 덴포스의 그늘 아래서 힘들게 숨을 쉬고 있던 이들이 살고자 나를 찾아왔다.
그런 이들을 매정하게 쫓아낼 수 없었다.
'죽일 놈....'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루켄스 자작.
차오르는 분노에 가슴이 차가워졌다.
"기사님! 저희 딸좀 찾아주십시오!"
"흑흑.... 자비로우신 기사님, 가여운 제 딸을 찾아주세요...."
난민들 같은 사람들 중에 중년의 부부가 용병들에게 말을 묻더니 나를 향해 달려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 이제 열여섯밖에 안 된 하나뿐인 딸인데.... 크윽. 루켄스 자작가 병사들이 보호비를 내라며 데리고 갔습니다! 기사님! 평생 종이라도 될 터이니 제 딸을 찾아주십시오. 노예로 팔려가기에는... 너무나 억울합니다!"
다 큰 아저씨가 눈물을 참으며 오열을 토했다.
"제 여동생도 찾아주세요!"
"기사님! 엄마를 찾아주세요!"
중년 부부가 무릎을 꿇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달려와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동생과 누이, 심지어 엄마까지 찾아달라고 울부짖었다.
'더러운 놈....'
할 짓이 없어서 인신매매까지 하는 악당 루켄스 자작.
두 주먹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돈은 귀족들이 본래 그런다 치더라도 생명과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쓰레기 같은 자작.
더 이상 용서할 수 없었다.
땡! 땡! 땡!
"벼, 병사들이 몰려온다!"
"루켄스 자작가의 병사들이다!"
그때 갑자기 울리는 망루의 종소리와 용병들의 놀람이 담긴 외침.
쿠오오오오오오오오!
"와이번이 나타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 멀리 점으로 다가오는 한 존재.
은빛 미스릴 방어구를 착용한 회색 와이번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이며 창공단으로 급속히 다가왔다.
"주군...."
데르발이 나를 보았다.
"으아아아! 우리를 잡으러 왔나 봐!"
"으아아아앙! 싫어! 노예로 팔려가긴 실어! 으아아아아아앙!"
난민들이 와이번을 보며 비명을 지르거나 울었다.
지옥의 저승사자를 보는 것같이 얼굴에 죽음의 공포가 어려 있었다.
"뭐 해! 밥값 해야지! 저 새끼들 한 놈도 못 들어오게 정문을 콱 틀어막아!"
하프메일과 창과 검을 착용한 루켄스 자작가의 병사들이 척척거리며 정문을 압박해 왔건만 대항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 용병들.
그런 용병들을 향해 기사로 임명된 라이케르가 소리를 빽질렀다.
타다닥.
그리고 검을 뽑아 들며 정문을 향해 달려갔다.
우르르.
라이케르가 선두에 서자 수십여 명의 용병들이 그 뒤를 따랐다.
"반항하면 참살한다! 너희들은 지금 루켄스 자작님의 농노들과 죄인들을 불법적으로 감금하고 있다! 속히, 농노들과 죄인들을 내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
정문 앞에서 들려오는 마나가 담긴 외침.
"저, 저희를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기사님, 살려주세요! 끌려가면 저희는 다 죽은 목숨입니다!"
"우아아아아아앙!"
어른들과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아무 죄도 없이 그저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개처럼 살아가는 이들.
마지막 남은 희망을 나에게 걸었다.
'버리지 않습니다! 절대로!'
무법지대와 다를 바 없는 네루만 평원.
예수나 마호메트 같은 선지자는 아니었지만,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는 양심이라는 놈이 활활 타올랐다.
쉬이이이이이익.
퍼어어어억!
"헉...."
"아아아악!"
그렇게 나에게 애원하며 무릎을 꿇고 있는 어느 남자의 등판에 꽂히는 은빛 창.
강력한 힘이 담겨 있는 블레스트 스피어에 남자의 몸뚱이는 폭탄에 맞은 듯 산산조각이 나 터져 버렸다.
후두두둑, 사방으로 떨어지는 살점과 핏덩이.
순식간에 일어난 살인에 정신이 멍해졌다.
"아빠!!!!!!!!!!!!!!!!!"
"여, 여보!!!!!!!!!!!!!!!!!"
터져 나간 시체를 보고 오열하는 가족들.
툭 하고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진 느낌이 들었다.
쉬이이익.
몸을 날려 베베토가 있는 격납고로 향했다.
'죽여 버린다.... 개새끼....!'
아무 힘도 없는 백성들을 향해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하는 악의 종자.
블레스트 스피어를 던지고 창공을 한 바퀴 휘돌고 있었다.
방금 전 일어난 살인과 무관하다는 듯 한껏 여유를 부리며.
★★★★★★★★★★★★★★★★★★★★★
"날아! 베베토!"
쿠오오오오오오오오!
덜덜 떨리는 분노에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고, 내 마음을 알아챈 베베토가 힘껏 날개를 펄럭렸다.
'이노옴!'
베베토가 박차 오르기 전에 공격할 기회가 있었건만 멀찍이 돌아서 나를 기다리는 자.
후회할 것이다.
베베토가 나는 순간 더 이상 놈에게 행운 따위는 없을 것이었다.
'쓸어버린다.'
차자자장.
"막아! 다 때려잡아!"
"모두 참살하라!"
"와아아아아!"
그동안 쌓인 것이 많은 듯 라이케르의 지휘를 받은 용병들이 정문을 향해 방패를 앞세우고 돌격해 오는 병사들을 맞이하는 모습이 보였다.
수백 명의 용병들이 있었건만 앞에서 싸우는 자는 기껏 100여 명.
적어도 3, 400명은 되는 루켄스 사병들과 수적으로 차이가 났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라이케르 정도의 실력자를 상대할 자는 저놈들 중에 없을 것이기에.
'후후, 한번 해보자는 거지.'
주제 파악도 못한 와이번과 스카이나이트.
순식간에 고도를 높인 베베토의 정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팟!
그 순간 블레스트 스피어의 마법창에 불빛이 보였다.
나를 우습게본 행동.
스윽.
창을 하나 빼어 들었다.
쿠오오오!
베베토가 힘껏 울음을 토하며 놈을 향해 직선으로 날았다.
크아아아아!
놈의 와이번도 나를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오직 머릿속에는 놈의 뜨거운 피만 그려질 뿐이었다.
★★★★★★★★★★★★★★★★★★★★★
'흐흐, 어리석은 놈.'
겁도 없는 애송이가 정면 승부를 택해왔다.
정보에 의하면 이제 와이번을 조종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수련생이라는 놈.
운 좋게 이종교배 와이번을 얻을 수 있었지만, 스카이나이트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벌어지는 승부는 지상보다 더 냉정한 능력을 요구했다.
비행 실력과 배짱, 거기에 와이번과의 친숙도.
이제 갓 와이번을 운용하는 애송이와 10년 동안 와이번과 동고동락을 한 자신과 비교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한 방에 보내주마!'
감히 겁도 없이 용병들을 모으고, 거기에 더하여 농노로 끌고 갈 놈들을 받아준 카이어라는 놈.
루켄스 자작에게 보고할 것도 없이 바로 병사들을 몰아왔다.
이 정도 사건이면 자신의 손에서 해결해야 할 일.
굳이 다른 스카이나이트들을 모을 필요도 없었다.
'좀 더! 좀 더!'
놈을 노려보고 있는 와중에 마법 투구로 보이는 거리는 약 1킬로.
멍청하게 덩치만 큰 놈의 와이번이 도망갈 곳은 없었다.
하지만 야생 와이번을 사냥하듯 루켄스 자작의 스카이나이트 팔미언 거리를 더욱 압축해 갔다.
'지금!'
그리고 500미터 달하는 순간 힘차에 마나를 잔뜩 머금은 블레스트 스피어를 날렸다.
마나의 궤적을 날리며 날아가는 은빛 블레스트 스피어.
'넌 죽었어! 애송이! 크크.'
회피 기동을 해도 절대 피할 수 없는 거리.
이미 스피어는 덩치 큰 황금 줄무늬 와이번의 심장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허엇!!!!!!!!"
자신이 날린 스피어가 와이번의 심장을 꿰뚫을 장면을 상상하던 팔미어.
갑자기 와이번 앞에서 번쩍이는 푸른 빛깔에 비명이 토해졌다.
콰과광!
뒤늦게 귓가에 들려오는 폭음.
'마, 마검사!'
놀랍게도 자신이 날린 스피어가 무언가에 부딪쳐 지상으로 튕겨져 버렸다.
그리고 퍼뜩 머리에 그려지는 마검사라는 단어.
'위험하다!'
마검사라는 단어 뒤에 찾아온 등골 시린 공포.
그 순간 보였다.
직선을 서로를 향해 마주 달렸기에 어느새 거리는 100미터.
애송이의 손에 들린 은빛 블레스트 스피어가 자신을 향해 겨누어져 있는 모습.
덜덜덜.
스피어를 다시 뽑아 들어야 하건만 머리를 하얗게 장식한 공포에 손을 바람에 떠는 나뭇잎처럼 떠는 팔미어.
파앗!
놈의 손에서 스피어가 공간을 가르며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안 돼!!!!!!!!!!!!!!'
100여 미터도 안 되는 짧은 거리.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스피어를 보며 내뱉은 처절한 마음의 비명.
콰직.
에어 플레이트를 뚫고 들어오는 묵직한 창.
파르르르르.
'제.... 기.... 일....'
미스릴 갑옷 때문에 뚫고 지나가지는 못했지만 심장에 깊숙이 박혀 등 뒤로 비집고 나온 블레스트 스피어.
고통 따위는 없었다.
어느새 하얗게 비어가는 의식.
팔미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기억의 파편이었다.
★★★★★★★★★★★★★★★★★★★★★
"베베토! 저놈을 찍어버려!"
크아아아아!
자신의 주인이 스피어에 관통당해 죽었음을 알지 못하는 회색 와이번.
거리가 가까워지자 비명을 토하며 스스로 몸을 틀어 지상으로 하강하였다.
그런 와이번을 찍어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쿠오오오오오오오!
전투에 피가 끓어올랐는지 흥분한 베베토.
하늘이 들썩일 정도의 울음을 토하더니 회색 와이번의 등판을 향해 내리꽂혀 갔다.
쉬익 쉬이이이익.
베베토가 뒤에서 쫓자 꽁지에 불이 난 듯 도망치는 와이번.
콰직!
하지만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속도로 달라붙은 베베토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날개와 몸통이 연결된 부분을 찍어 눌렀다.
크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갑작스러운 고통에 처절한 고통의 신음을 울리는 회색 와이번.
화득 화득 화드드득.
그런 놈을 찍어서 무지막지한 힘으로 하늘로 끌어 올리는 천하장사 베베토.
"허억...."
"저, 저럴 수가!"
지상의 전투는 치열하게 시작하기도 전에 멈췄다.
자신들을 이끌던 스카이나이트와 와이번이 죽고 패배한 모습.
"으아아아아!"
"후, 후퇴하라!"
루켄스 자작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을 쳤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카이어님이 승리하셨다!"
용병들과 백성들이 두 손을 번쩍 치켜 올리며 승리의 함성을 토했다.
"베베토! 내려가자!"
먼저 걸어온 시비.
이대로 멍하니 있다면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쿠오오오!
자신의 강력함에 신이 난 베베토.,
바동거리는 와이번을 끌고 지상에 착륙하였다.
쿠구궁.
능히 몇 톤은 나가는 와이번이 내동댕이쳐졌다.
"데르발! 라이케르!"
"명!"
가볍게 와이번을 잡아버리고 지상에 착지한 나를 향해 상기된 얼굴의 데르발과 라이케르가 달려왔다.
"용병들을 모아라! 지금 바로 덴포스를 접수한다!"
"....."
갑작스러운 파격적인 명령에 당황하는 두 사람.
"데르발은 도시를 수비하는 수비군에게 귀족 간의 사적인 분쟁이 일어났음을 알려라. 그리고 라이케르는 용병들을 규합하여 나를 따르라!"
"며영!"
"휘이이~! 명을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확실한 명령이 내려지자 휘파람을 불며 즐거워하는 라이케르.
"야! 얘들아! 고용주의 명령이다! 루켄스 자작의 저택을 털러 가잖다! 모두 나를 따르라!"
다음 명령을 들을 것도 없이 알아서 척척 용병들을 선동하는 라이케르.
'루켄스, 단숨에 허를 찔러주지!'
이제 부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가 이렇게 큰 판을 벌이리라 상상도 못했을 루켄스 자작.
네루만 평원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도시 루켄스를 내가 점령하리라 마음먹었다.
이왕 시작하는 한판.
크면 클수록 화끈하고 먹을 것이 넘쳐 날 것이었다.
"베베토, 가자!"
쿠오오오오오오오~!
명령을 내리자 길게 울음을 토하며 긴 날개를 펄럭이는 베베토.
"다 쓸어버리자!"
"개자식들을 도시에서 몰아내자!!!!!!!!"
내가 보여준 한 판 승부에 힘을 얻었는지 우렁찬 함성을 지르는 용병들.
"움하하하! 오늘 저녁에는 승리의 파티다! 모두 돌격!"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두두두두두두두.
야생마들처럼 라이케르의 뒤를 따라 미친 듯 돌격하는 용병들.
'루켄스, 한번 붙어보자!'
한번 빼어 든 칼.
이제 남은 것은 맞장의 승부뿐이었다.
★★★★★★★★★★★★★★★★★★★★★
"뭐? 점령?"
"그렇습니다. 방금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카이어라는 애송이 준남작이 도시 덴포스를 무력 점령했다 합니다."
"무슨 말이야! 어떻게 그자가 덴포스를 삼킬 수 있어! 루켄스 자작가의 병사들과 팔미어가 있는데 어떻게?"
보호구역 순찰을 돌고 온 제니스에게 금박한 상황이 전달되었다.
"팔미어는 공중전 중에 사망. 자작가의 500병사들 중에 사망자과 중상자 50명 정도, 400여 명이 투항, 100여 명이 도주했다고 합니다."
"....."
정보를 담당하는 기사가 차분하게 보고하였다.
"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크크. 평범한 애송이가 아닌 줄은 알았건만 단 며칠 만에 덴포스를 점령하다니.... 미치겠네."
몇 명 되지도 않는 스카이나이트였기에 언제나 붙어 다니는 제니스의 펴낻원 베르케스와 아티스안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미친.... 루켄스 자작이 가만있지 않을 것인데."
덴포스에 주둔한 루켄스 자작가 병사들과 기사들은 얼마되지 않았다.
제니스 휘하의 사병들만으로도 충분히 덴포스를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뒤에 닥쳐올 루켄스 자작의 맹공.
네루만에 주둔한 바즈란 정병들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현재 루켄스의 전력은 막강하였다.
"잘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지내다가는 루켄스 자작에게 잡아먹힐 것이 뻔했습니다. 차라리 이번 기회를 발판 삼아 루켄스와 한판 승부를 벌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주군, 베르케스 말처럼 어차피 몇 달 후면 벌어질 일이었습니다. 저도 이번 기회를 잘 살려 루켄스 자작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니스가 고심하는 사이 휘하의 스카이나이트들이 적극적인 공세를 전해왔다.
"루켄스가 문제가 아니야.... 놈 뒤에 그놈들이 있어. 단숨에 이곳쯤은 박살 내버릴 수 있는 그놈들이...."
고뇌하는 제니스의 눈동자에 살짝 두려움이 일렁였다.
루켄스 자작도 벅차건만 그 뒤에 있는 조력자.
라비테르 제국도 어찌할 수 없는 그놈들과 루켄스가 손을 잡고 있음을 요 근래 명확히 알아낼 수 있었다.
'카이어, 마지막 기회다. 나를 찾아와라.... 그래야만 네가 살 수 있다.'
그리고 생각나는 카이어의 얼굴.
대륙에서 드문 검은 머리칼을 소유한 엉뚱한 생각의 사나이.
제니스가 지금껏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일을 단 며칠 만에 폭풍치듯 이룩해 버린 의문의 남자.
의심치 않았다.
스카이나이트를 비롯한 모든 전력에서 월등하게 밀리는 카이어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해올 것임을.
"이 시간부로 비상체제로 돌입한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항시 출동 태세를 유지하도록!"
"명!"
덴포스에서 말을 타고 서너 시간 거리인 루켄스 자작의 본거지 가데인 성.
카이어가 도움을 요청하는 즉시 루켄스와 한판 승부를 벌이리라 제니스는 마음먹었다.
이대로 시간만 보내다가는 어차피 죽거나 도망쳐야 하는 현실.
이제 지금껏 갈아두었던 검을 빼 들 시간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
"포로 372명, 사망 57명 도주는 약 80명, 용병들의 피해는 사망 1명, 부상자 7명입니다. 그리고 잡혀 있던 약 150명의 사람들을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루켄스 자작가 병사들과의 짧은 전투.
내친김에 소나기처럼 후두둑 덴포스를 점령해 버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데르발의 보고.
지그시 눈을 감고 상황을 정리했다.
'계획보다 빨리 일이 벌어졌군.'
지금쯤이면 루켄스 자작의 귀에 덴포스의 전투가 전해졌을 것이다.
내가 먼저 시비를 걸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누구 하나 죽어야 끝나는 치킨 게임에 돌입했다.
"또한 약 15만 골드의 현금과 갑옷을 비롯한 병장기 수백 벌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15만? 생각보다 짭짤하군.'
이곳이 이럴진대 루켄스 자작의 본성에는 얼마나 많은 돈이 있을지 상상이 안 갔다.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루켄스 자작이 가만있지 않을 것인데...."
보고하는 와중에도 얼굴빛이 가히 좋지 않은 데르발.
머리라는 것을 몸통 위에 달고 있는 자라면 지금 현실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어찌하긴! 다 조져 버려야지!"
승리에 고무된 듯 라이케르가 자신감을 팍팍 뿌렸다.
"데르발,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무식함이 철철 흐르는 라이케르와 달리 현명한 데르발에게 질문을 던졌다.
"현재 주군께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엥? 밀어버리는 방법 말고 세 가기씩이나 있어?"
"첫째, 덴포스를 중심으로 민심을 안정시켜 용병들을 비롯한 지원병을 받아 본격전에 돌입하는 방법. 둘째, 제니스 남작과 연합하여 루켄스 자작군과 일전을 벌이는 방법. 셀째, 깔끔해게 망명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데르발이라 해도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가장 실현 가능성 있는 방법은 그중에서 제니스 남작과 손을 잡는 방법이겠네?"
데르발의 말에 라이케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최선의 방법을 말해왔다.
'제니스....'
제니스 남작의 강인한 얼굴이 떠올랐다.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을 것이야.'
먼저 손 내미는 쪽이 그 사람 밑으로 들어가는 꼴이었다.
천하의 강혁이 사랑하는 여인이 아닌 여자 따위에 무릎을 꿇고 싶지는 않았다.
"문제는 빨리 끝내셔야 한다는 것이빈다. 곧 제국에서 공식 철군의 명령이 내려지면 네루만은 루켄스 자작에게 넘어가는 것이 기정사실입니다. 거기에 남겨진 2만이 넘는 이곳 자원병들이 루켄스 자작에게 넘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답이 없습니다."
절대적 열세.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주군...."
듣고 있던 라이케르가 조용히 나를 주군이라 불러왔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다른 건 아니고...."
말을 하면서 머리를 긁적이는 라이케르.
"여기에서 뭐 하려고 그러는 거요? 곧 몬스터나 해적, 아니면 라비테르 제국 놈들에게 넘어갈 저주받은 평원을 어찌하려는 것이오? 대가리에 돌 맞지 않고서야 영주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닐 터인데."
내가 지금 하는 행동에 의문이 있었던 라이케르.
솔직하게 물어왔다.
"....."
거기에 데르발도 궁금한 듯 바라보았다.
막상 의기가 넘쳐 올라 내 뜻대로 루켄스 자작이라는 벌집을 건드렸지만, 내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냥."
"그, 그냥이라 함은...."
"라이케르 경, 그대는 길에서 맞닥뜨린 오크가 죽이려 덤벼드는데 방어하기 전에 이유를 따지나? 독화살에 맞아 생사를 헤매는데 누가 봤는지 꼭 알아내고 치료를 받나?"
"그건 아니지만...."
"나도 그래. 난 여기에 발령을 받았을 뿐이고, 루켄스라는 놈은 내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데 아주 위험한 놈이고, 난 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뿐이야. 더 이상 이유는 없다. 우선 나를 살피고 그 다음에 주변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숭고한 희생 정신으로 살아가는 대사제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 살아가는 진정한 이유인 것이야."
"....."
방 안에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데르발, 잡아놓은 와이번은 어디 있는가?"
"베베토의 격납고에 임시로 묶어놨습니다. 날개 상처가 상당해 어디 도망도 못 갈 것입니다."
베베토의 강철 발톱에 힘줄이 찍혀 중상을 입은 와이번.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발 빠른 용병들이나 정보원들을 투입하여 루켄스 자작의 동태를 살피도록."
"명!"
내 말에 생각에 잠긴 라이케르와 달리 힘차게 명을 외치는 데르발.
내가 무엇을 하든 믿고 따라오는 데르발이었기에 많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데르발이 좋았다.
한 치 앞도 모르는 내일을 사는 인생들.
무슨 거대한 포부와 희망이 있겠는가.
그저 생각만 해도 행복한 꿈 하나와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힘찬 매일매일의 발걸음.
그거 하나면 족하였다.
그리고 꿈 이외에 남는 것들은 모두 사치.
오늘을 살아가는 자에게는 필요없는 장식품들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