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장 결투
'휴우.'
창공단 상공에 이르자 보이는 백여 마리가 넘는 와이번 무리들.
창공단 수신호 탑에서 강력한 푸른 조명등이 하늘을 비췄고, 그 순간 사방에서 와이번들이 몰려들어 왔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겠군.'
다들 귀족인 스카이나이트들.
깊은 밤중에 똥개 훈련을 당한 원한을 품고 있음이 당연할 것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것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어느새 소녀가 아닌 제국의 황녀로 돌아온 아이지스.
등 뒤에서 위엄있는 목소리로 책임지겠다는 말을 꺼냈다.
"착륙하라!"
옆에서 이끌던 근위 스카이나이트의 입에서 착륙하라는 말이 나왔다.
'지랄발광 황태자도 나왔겠지?'
다른 놈들은 황녀의 권위로 어찌할 수 있지만, 단 하나 걸리는 놈은 성격 개차반 황태자.
마법등이 모두 가동되어 훤히 밝혀져 있는 창공단 활주로의 중앙 공터로 베베토를 이끌었다.
무슨 까닭인지 순순히 순응하는 베베토.
안타까웠다.
자칫 오늘이 마지막 비행이 될 수도 있었다.
퍼러럭, 퍼러럭.
중무장한 기사와 병사들이 가득 들어찬 중앙 공터.
흥분한 베베토를 달래며 천천히 착륙을 시도했다.
'동물원 원숭이 꼴이네.'
적어도 천 쌍이 넘는 이들의 시선.
베베토가 천천히 착륙하는 와중에 주변을 날고 있던 와이번들도 자신들의 격납고 앞으로 착륙하고 있었다.
도망을 대비하여 비행하고 있는 20여 마리의 와이번을 제외하고.
쿠궁.
베베토의 육중한 몸이 바닥에 닿았다.
"다 왔습니다, 황녀님."
"수고했어요. 카이어 경."
나도 강심장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아이지스.
서로 깍듯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황녀님을 모셔라!'
누군가의 명령이 떨어졌고, 황녀를 호위하는 근위기사들이 달려왔다.
쿠오오오!
근위기사들이 사납게 다가오자 베베토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가만히 있어...."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베베토를 진정시켰다.
'자식들, 쫄기는.'
저주이자 금기로 여겨지는 베베토의 투기에 겁을 먹은 근위기사들.
내가 베베토를 달래자 그제야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스르르륵.
안전장치를 풀고 베베토의 날개를 타고 미끄러져 내리는 아이지스.
철컥.
나도 안전장치를 풀고 베베토의 몸에서 뛰어내렸다.
척!
바닥에 발이 닿았다.
"황녀님을 납치한 죄인을 체포하라! 반항 시 참살해도 좋다!"
차자장!
'납치? 참나.'
황녀가 나를 납치했건만 오히려 날 파렴치범으로 몰아가는 근위기사들.
와이번을 착륙시킨 스카이나이트들도 황급히 달려와 주변을 에워쌌다.
"모두 멈추세요!"
하지만 나에게는 히든카드가 있었다.
당당하고 위엄에 찬 모습으로 아이지스가 나섰다.
"카이어 경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오늘 벌어진 모든 일은 제가 계획한 일들입니다."
흔들림없이 단아하고 힘있는 목소리로 기사들을 제지한 아이지스.
그녀의 모습에 검을 들고 다가서던 이들이 멈춰 섰다.
제 아무리 어떤 이라 하더라도 황녀의 권위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저놈을 포박하라!"
그러나 단 한 명, 아이지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자가 있었다.
그 이름은 바로.
'싸갈탱이! 폴트비란!'
재수 만 년짜리 이 제국의 황태자였다.
"멈춰!"
황태자에 지지 않고 내 앞을 막아서는 아이지스.
"아이지스...."
근위기사들이 호위를 받으며 서 있던 폴트비란이 사나운 사각턱을 앞세우고 아이지스에게 다가왔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너 하나 때문에 이 밤중에 쉬지도 못하고 황도의 황실을 보호할 스카이나이트를 이 사방을 헤맨 것을 알고 있느냔 말이야!"
살벌한 눈빛을 뿜어내며 아이지스를 추궁하는 폴트비란.
"오라버니, 그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짝!
"악!"
'아니! 이 자식이!'
"무슨 변명이 필요하단 말이더냐! 금기로 취급되는 이종교배 와이번을 몰아 창공단을 뒤집어놓은 너의 죄를! 네가 아무리 이 제국의 황녀라 하더라도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음을 아느냔 말이더냐!"
수많은 귀족들과 병사들 앞에서 서슴없이 손을 날린 무식한 짐승새끼.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준엄하게 꾸짖고 있었다.
'웃고 있다.'
그러나 보였다.
놈의 광기에 젖은 눈동자가 희열에 찬 웃음을 짓고 있음이.
"근위기사!"
"충!"
"저주받은 와이번을 측참하라! 그리고 저 죄인을 포박하라!"
"명!"
붉은 망토를 착용한 제국과 황실의 날선 검, 근위기사들.
차장.
황태자의 명령에 모든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파앗.
그리고 그들의 검에서 블레이드의 푸른빛이 별빛처럼 쏟아져 나왔다.
"모, 모두 멈춰요! 멈추란 말이에요!"
왼쪽 뺨에 선명하게 손자국이 남아 있고, 입술이 터져 피를 흘리는 아이지스.
슬픔에 찬 목소리로 근위기사들의 앞을 막아섰다.
"아이지스! 감히 네가 내 명령을 어기겠다는 것이더냐! 이 제국의 황태자인 나의 명을!"
"이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모두 다 나의 계획이라 밝혔건만 제국의 귀중한 재산인 와이번을 죽이고, 아무 죄도 없는 수련 기사를 체포하는 것은 오라버니의 월권입니다! 분명 제국법에는 와이번을 죽여야 할 경우에는 오직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어명이 있을 때뿐이라 적시되어 있습니다!"
"워, 월권? 네...네가 감히!"
아이지스의 냉정한 일갈에 눈동자가 돌아간 황태자.
입에 거품만 물면 광견병에 걸린 미친놈이라 불릴 정도였다.
"네! 월권입니다. 만약 제가 죄가 있다면, 그것은 아바마마가 판달할 것이빈다. 황태자인 오라버니가 아니라 말입니다."
차분하고 당당한 아이지스의 외침.
"크하하하하하하하하!"
하늘을 바라보며 광소를 터뜨리는 황태자.
창!
갑자기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을 빼 들었다.
"일개 황녀 주제에 이 제국의 다음 대 황제가 될 나의 명예를 더럽히다니.... 네년을 용서치 않을 것이야!"
'위험하다!'
충분히 또라이인 황태자가 사건을 칠 수도 있었다.
아니, 치고도 남을 놈이었다.
스윽.
아이지스의 팔을 잡아 내 뒤로 뺐다.
"후후. 이제 일개 수련생 나부랭이가 내 앞을 막아서겠다?"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향해 살기를 번뜩이는 폴트비란.
"참으십시오, 황태자 전하."
'메르모스 후작.'
창공단의 단장이자 황실 근위 스카이나이트 부단장의 신분인 메르모스 후작이 나타났다.
"메르모스 후작, 나서지 말라!"
미친놈이 메르모스 후작에게도 분노를 표출했다.
"이번 사건은 아무 일도 아닐 수 있지만, 자칫 황제 폐하께서 진노하실 일도 될 수 있습니다. 전하, 잠시만 화를 거두어 주십시오."
부르르.
황제 폐하라는 말에 몸을 떠는 황태자.
또라이가 황제는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조, 좋다. 하지만 이놈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만만하다 이건가?'
와이번과 황녀는 황제의 명령이 있어야만 죄를 추궁할 수 있지만, 일개 수련 기사인 나는 아니었다.
'확 조져 버려?'
바보 같은 놈들이 내가 기사라는 것만 알고 있지 마법사와 정령사를 겸한 멀티 플레이어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황태자 새끼는 정면에 있는 상황.
주먹만으로 골로 보낼 수 있었다.
"카이어 경은 제 부탁으로 움직인 것입니다."
"시끄럽다! 네 부탁으로 움직였다는 놈이 와이번을 조종해? 그것도 이제 수련 기사 주제에 스카이나이트들도 다루기 힘들다는 이종교배종을 말이야!"
'누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나! 그리고 조종은 내가 한 게 아니라 저놈이 알아서 했다고!'
억울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내 말을 믿어줄 놈은 이 자리에 별로 없었다.
"전하, 아무리 수련 기사라 하더라도 국법으로 준기사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아무런 증명의 기회도 없이 추궁하심은...."
"메르모스 후작, 경고한다. 만약 더 이상 나의 권위에 먹칠을 하면... 경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
평범한 귀족도 아닌 제국 수뇌부라 할 수 있는 후작에게까지 자신의 광기를 드러내는 폴트비란.
일순간 공터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전하의 말은 위험한 발언이십니다!"
그러나 정의는 쉽게 물러나지 않는 법이었다.
'아이린!'
위기 때마다 등장하는 나의 세일러문 아이린이 앞으로 나섰다.
"제국을 지탱하는 국법을 무시하는 발언은 취하해 주십시오. 제국을 수호하는 귀족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발언이십니다."
"으드득."
대답 대신 이를 가는 폴트비란.
"아이린 백작은 감히 이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끼어드시는 것입니까!"
황태자를 대신하여 다른 귀족들이 앞에 나섰다.
스카이나이트 대부분이 귀족의 작위를 받은 자들이었다.
"어떤 자리라니! 귀명의 명예가 걸려 있는 자리지!"
아이린과 편대를 이루는 로세로가 나섰다.
"아니, 이자가!"
'잘한다! 잘해!'
나 때문이 아닌 근본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귀족들 간의 파벌이 전면에 튀어나왔다.
황태자를 편드는 많은 이들과 아이린 등 뒤에 서 몇몇 스카이나이트들, 그리고 중립적인 위치에 선 제법 많은 숫자.
'잘 돌아간다. 쯧쯧.'
폴트비란이 황제가 되는 순간 오늘의 이 작은 문제는 제국 곳곳으로 퍼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좋다. 소명할 기회를 주지. 단, 기사의 명예 회복에 관한 관습에 따라서 말이야. 크크크."
'기사의 명예 회복에 관한 관습?'
"아, 아니. 일개 수련 기사에게...."
"시끄럽다! 그럼 이 제국의 황태자인 내 명예는 누가 목숨으로 보상할 것이란 말이더냐!"
"....."
새파란 폴트비란의 음성.
아이린조차 입을 다물었다.
'설마 결투?'
중세 영화를 보면 나오는 기사들의 명예에 관한 결투.
머리에 퍼뜩 그려졌다.
"카이어라고 했지? 흐흐. 그 잘난 실력으로 네놈의 무고함을 증명해 보거라."
'개새끼, 언젠가 네놈을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주마!'
황태자라는 새끼가 대놓고 폭력적인데다가 비열, 음탕의 극치를 달렸다/
'가만, 그냥 결투만 하면 맹숭맹숭하지. 저 자식 자존심도 센 것 같은데 낚시질 한번 해봐?'
건달프 사부에게 배운 진정한 비기인 낚시질.
머리를 비상하게 돌렸다.
"전하, 무고한 소신을 벌하신다면 달게 받겠나이다. 그러나...."
무고함과 벌을 강조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울분을 토할 것 같은 비장하고 장중한 음성에 황태자가 미끼를 물려고 입질을 하였다.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기사의 명예란 목숨보다 더 소중한 기사의 영혼과 같은 것. 황태자 전하께 모욕을 당하고 이대로 물러난다면 전 살아도 산목숨이 아닐 것입니다."
"모욕? 푸하하하! 평민 주제에 기사에 대하여 듣기는 많이 들은 모양이로구나. 그래서 어찌 하겠다는 것이더냐?"
내 말에 광소를 터뜨리며 즐거워하는 놈.
'이 자식 진짜 밥맛이네.'
그러나 아니꼬아도 놈은 이 제국의 황태자.
황제가 된다면 이 제국의 모든 것들은 벌벌 떨 것이었다.
"제가 패한다면 스스로 자진을 하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승리하여 명예를 회복한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 주시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강하게 나갔다.
"자진? 그래, 알아서 죽어준다면 나야 고맙지. 그렇지 않아도 네놈은 눈에 거슬렸거든. 아주 심히 말이야."
다른 귀족들과 기사들, 그리고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서슴없이 듣기 거북한 말을 뱉어내는 폴트비란.
놈은 모를 것이었다.
오늘과 같은 날이 반복된다면 놈의 곁에는 썩은 간신배들만 넘쳐날 것이라는 것을.
"이 미천한 기사의 목숨 값으로도 부족하겠지만 황태자 전하의 이름으로 약속하여 주시옵소서!"
"좋아! 어떤 조건이라도 약속하지. 네놈이 이길 경우는 없을 테니까. 하하하하!"
'오예! 딱 걸렸어!'
붕어 대가리 같은 놈이 딱 걸려들었다.
"제가 승리한다면 여기 있는 이종교배 와이번을 저에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헉!"
"이종교배 와이번을?"
예상치 못한 나의 조건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놀라워하였다.
"이 잡종을? 크크크. 어려운 일도 아니지. 메르모스 후작, 나의 명예를 위하여 이종교배 와이번을 결투의 증명으로 내 줄 수 있겠는가?"
"대바즈란 제국의 황태자 전하의 명예를 어찌 저런 잡종 와이번과 비교할 수 있겠나이까. 소신은 황태자 전하의 명예에 따를 뿐이옵니다."
아까와는 달리 몸을 사리는 메르모스 후작.
더 이상 자신이 나서거나 해줄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지스가 나서려 하였다.
스슥.
아이지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황녀를 떠나 서로 간의 명예가 걸려 있는 기사들의 한판 승부.
설사 황제가 나선다 하더라도 말릴 수가 없었다.
'아이린,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오. 나 안 죽으니까.'
아이지스의 뒤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린.
수련생들은 한 명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기숙사에 잡혀 있는 것 같았다.
"하일데이 경! 본 황태자의 명예를 위하여 검을 들겠는가?"
"목숨으로 황태자의 명예를 위한 검이 되겠나이다!"
성격도 급한 폴트비란.
자신을 호위하고 있는 근위기사들 중 한 명을 호명하였다.
'흥! 겁쟁이 같은 놈.'
자신의 명예는 자신의 손으로 지켜야 의미있는 법.
레이디도 아니면서 대리기사를 통하여 명옐흘 운운하는 황태자 놈이 비열해 보였따.
'근위기사 중에서도 강한 놈이겠지.'
다음 대 황제가 될 황태자를 호위하는 근위기사.
그런 자들 중에서 호명될 정도라면 마스터 급에 필적한 놈이 분명할 것이었다.
'마법이나 정령을 사용할 수도 없고. 아쉽네.'
지금까지 밝히지 않은 나의 진정한 실력.
여기서 드러낸다면 첩자로 오인받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아이린 백작님, 검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롱 소드를 꺼내주는 아이린.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을 증인 삼아 명예를 위한 결투를 청하는 바입니다."
검은 하일데이 경이라 불리는 기사 놈에게 향했지만 눈동자는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이 십장생 같은 놈!'
"허락한다."
근엄한 척 똥폼을 잡으며 준엄하게 한마디를 뱉어내는 황태자.
'베베토 잘 봐라. 너의 자유를 위한 이 주인님의 투쟁을!'
모든 것을 황금 눈동자로 지켜보고 있는 베베토.
도망치지 못하도록 사방에서 블레스트 스피어를 겨눈 기사들 수십 명이 포위하고 있었다.
창!
검을 빼어 드는 단단한 체격의 하일데이.
파앗.
놈의 검에서 블레이드가 새파랗게 빛을 뿜었다.
휘익.
아이린의 롱 소드로 놈의 심장을 가리켰다.
'넌 뒈졌어!'
"탓!"
내가 자세를 잡자 선수도 양보 안 하고 검을 날려 오는 하일데이.
'흥!'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파아앗!
검에서 이는 파란 마나의 물결.
그리고 깨어나는 온몸의 세포.
그래고 일도양단으로 베어오는 놈의 검을 향해 힘껏 검을 부딪쳐 갔다.
★★★★★★★★★★★★★★★★★★★★★
'카이어....'
바즈란 제국의 황녀지만 오늘처럼 이런 수모와 흥분을 동시에 맛본 적은 없었다.
오라비가 광폭한 줄은 알았건만 자신에게 손찌검을 할 정도인 줄은 몰랐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누구에게 맞아본 적이 없는 아이지스.
그것도 수많은 귀족들과 기사, 병사들 앞에서 당한 수모.
울고 싶었다.
황제가 있었다면 소리 내어 통곡하고 싶었다.
그러나 황녀라는 위치는 울고 싶어도 마음대로 울 수도 없는 고귀한 자리.
이를 악물며 분노를 삼켰다.
그리고 이어진 폴트비란의 망나니 같은 행동.
자신에게 풀지 못한 화를 애꿎은 수련 기사인 카이어에게 향했다.
'하필, 곧 마스터에 오른다는 하일데이 경이라니....'
아이지스도 잘 알고 있는 하일데이라는 이름.
황태자를 목숨처럼 신봉하는 근위기사.
삼십 중반의 나이에 마스터에 근접한 경지에 이른 근위기사로 황실에 소문이 자자하게 나 있었다.
폴트비란이 황제에 오르는 순간 기사단장 자리 하나쯤은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기사와 목숨을 건 결투를 벌여야 하는 카이어.
두려움이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와 뭇 기사들 앞에서도 당당하지 그지없는 모습.
자신의 앞에서 검을 빼 들고 있었다.
'승리의 여신 오르미온님! 부디, 저 기사가 승리할 수 있도록 간절히 청하옵니다!'
두 손을 모아 승리의 여신께 기도를 올리는 아이지스.
"타앗!"
그녀의 기도가 끝나기 전에 두 사람이 부딪쳐 갔다.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날카로운 검에 새파란 광망을 씌우고서.
★★★★★★★★★★★★★★★★★★★★★
퍼버벙!
검과 검이 부딪쳤건만 쇳소리 대신 들려오는 굉음.
"헛!"
마나의 파편이 불똥처럼 사방으로 튀었고, 대결을 벌이는 두 사람의 기세에 근접해 있던 이들이 서둘러 물러났다.
퍼버버버버벙!
마법등 불빛 아래서도 선명하게 궤적을 그리는 검의 그림자.
대부분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스카이나이트들이었건만 두 사람의 무지막지한 대결에 손에 땀이 배어났다.
빨랐다.
쉬이익ㅡ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검의 잔상을 남기면 어느새 검은 상대의 목을 노리고 있었고, 방어하는 자의 검은 목을 노려오는 검을 튕겨낸 뒤 상대의 허리를 베어가고 있었다.
핑핑 눈이 돌아갈 지경.
만약 자신이 저 결투에 뛰어들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상상하던 몇몇 스카이나이트들과 기사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동시에 놀랐다.
창공단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황태자의 오른팔, 하일데이 남작.
기사의 아들로 태어나 순수한 실력만으로 남작의 작위를 따낸 검의 대가.
비록 스카이나이트는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실력과 신임을 황태자에게 받고 있음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 하일데이의 검을 받아내는 일개 수련 기사.
모두의 시선은 황태자 앞에서 겁없이 명예를 운운하며 결투를 청한 애송이에게 향했다.
카이어라 불리는 검은 머리의 수련 기사에게.
★★★★★★★★★★★★★★★★★★★★★
퍼벙!
'강하다!'
황태자가 대신 내보낸 이유가 있었다.
빈틈이 없었다.
완력이면 완력, 스피드면 스피드, 거기에 마나까지.
공수 전환이 재빠르고, 빈틈을 노리는 살모사의 혓바닥처럼 검을 들이밀었다.
'잘못하면 질 수도 있다.'
정신을 집중하며 한 수 한 수를 정확히 받아냈다.
블레이드에 새파랗게 감싸인 검.
맞으면 골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제법이구나."
십여 차례 공격을 퍼붓더니 여유로운 자세로 몸을 빼고 한 마디 던지는 하일데이.
"미 투."
".....?"
영어로 짧게 대답하자 의문을 표하는 하일데이. 그러나 자신을 무시한다 생각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파즈즈즈즈.
'이게 결판을 보려 하는군.'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다.
비장의 한 수를 펼치려는 듯 검에 마나를 잔뜩 불어넣는 근위기사.
마법이나 정령을 사용할까 생각 중이었다.
'아! 맞아!'
그 순간 떠오르는 한 장면.
'한번 해보자!'
광견사 칼데인 백작이 펼쳤던 마스터의 절기.
그동안 머릿속으로 수없기 그 절기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다.
대놓고 마법과 검술을 수련할 기회가 적었던 그동안의 시간.
자기 전에 집중 마법을 걸어놓고 머릿속으로 수많은 가상 전투를 연구하였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5서클 마법과 검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최근에 이론적으로 완성한 칼데인 백작의 한 수.
스네이크 팬텀이라 불렸던 그림자 검술.
'밑져야 본전이지!'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다행이도 주변에 고서클 마법사가 없는 상황.
여차하면 마법과 정령술을 펼쳐 도망가면 그뿐이었다.
파앗!
마나를 끌어올려 검에 담았다.
'실체적인 마나 검을 만들어내야 해!'
환영이 아닌, 실체하는 또 다른 마나검.
백작처럼 대여섯 개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세 개 정도는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극도의 쾌검 속에 마나를 담아내야 한다.'
이론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탓!"
하일데이가 달려왔다.
쉬이이익.
'헛! 이놈도!'
부챗살처럼 파장을 만들며 달려들어 오는 하일데이의 검.
어설펐지만 마스터가 만들어내는 그림자 검의 냄새가 풍겼다.
'부숴 버려!'
검에 담긴 마나에 의지를 보냈다.
나를 억압하고 파괴하려는 자들에 대한 분노의 힘.
검을 뿌려갔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나하나에 마나를 담은 검.
"헉!"
"마나 쉐도우!"
구경하던 기사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놀란 외침.
'됐다!'
온 힘을 다하였건만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마나 쉐도우는 딱 세 개.
그것도 하나는 미완성.
퍼거거거겅!
'훗!'
그림자 검이었건만 하일데이의 검과 부딪치며 부서져 가자 충격파가 밀려왔다.
푸가강!
다시 부딪치며 부서지는 두 번째 그림자 검.
"헉!"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공격을 어렵게 막아내던 하일데이의 입에서 힘에 겨운 비명이 들려왔다.
'허점!'
두 번째까지 막아내고 어설퍼 보이는 반 토막짜리 그림자 검에 허둥지둥 당황하는 하일데이.
검을 들어 막는 순간, 난공불락의 성벽에 구멍이 난 것처럼 하일데이의 몸뚱이가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퍼겅!
푹!
"컥!"
동시에 들려오는 세 가지의 음향.
세 번째 그림자 검을 가까스로 쳐 낸 하일데이의 검과 빈틈으로 찌른 내 검이 오른쪽 배에 박혀 버린 파육음, 그리고 비명까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순간에 울렸다.
철컹.
돌바닥 위에 떨어지는 하일데이의 검.
"신, 신관을 불러와라!"
"이... 이럴 수가."
"수, 수련 기사가 이겼다."
흥건하게 흘리는 핏물에 놀란 기사들.
스윽.
촤아악.
아무렇지 않게 검을 뽑았다.
목숨을 걸고 펼친 한 판의 결투.
승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였다.
"힐!"
스카이나이트들 중에서 마법사들이 달려와 힐 마법을 펼쳤다.
마나에 당한 상처.
일반적인 검상과 달리 신속한 조치가 없다면 죽을 수도 있었다.
"이...이이이!"
믿었던 기사의 패배에 분노를 한껏 드러내는 폴트비란.
다친 기사의 생사보다는 자신의 망가진 명예가 더 소중한 자였다.
"하일데이 경의 양보로 제가 승리했습니다."
고통에 눈을 찡그리고 있는 하일데이에게 검을 들고 기사의 예를 올렸다.
"져, 졌다. 크으으."
힐 마법에 피는 멈췄지만 고통이 극에 달하고 있을 하일데이.
그래도 남아 있는 기사의 자존심이 있었던지 쓰러지지 않고 패배를 자인했다.
"흥!"
하일데이를 차갑게 바라보는 황태자.
차가운 비웃음을 날리고 등을 돌렸다.
'가긴 어딜 가!'
그냥 보낼 내가 아니었다.
"와이번을 허락해 주신 황태자 전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충성을 다하여 제국과 황제 폐하를 보필하겠나이다!"
돈도 안 드는 거짓부렁의 말.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려 사라지는 황태자에게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렸다.
"카이어 경...."
와락.
'으헉! 이, 이게 웬 떡이야!'
결투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던 아이지스 황녀가 달려와 갑작스럽게 가슴에 안겼다.
찌릿!
그 순간 놀라움에 젖어 있던 남자 기사들의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발사되기 시작했다.
그와는 반대로 여성 기사들의 눈에 어리는 감동의 눈빛.
'좌우지간 이놈의 인기는.... 움하하하하하!'
얼떨결에 품에 안겨 버린 한 마리의 꽃사슴.
당환한 겉모습과 달리 속에서는 즐거움의 웃음이 터졌다.
'아, 아이린.'
묘한 시선으로 보고 있는 한 여인의 눈동자를 보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