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장 데르발
'죽, 죽인다!'
플라이 마법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고공비행.
쉬이이이이이이익.
귓가에 들려오는 바람 소리.
어찔거리며 보이는 지상의 풍경.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하얀 뭉게구름.
거기에 은은히 투구 안으로 스며오는 아이린의 채취.
내가 꿈꾸던 비행이었다.
'자유롭다. 그리고 뜨겁다.'
21세기 전투기보다는 못할 것이지만 나름대로 빠른 와이번.
휙휙 스쳐 지나가는 정경에 내가 바람이 된 것처럼 몸과 정신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 하나.
와이번 한 번 탔다고 이런 말하기는 그렇지만, 천하를 다가진것 같은 사나이의 패기가 끓어올랐다.
거대한 동체에 어울리는 와이번의 커다랗고 힘있는 날갯짓.
두려울 것이 전혀 없었다.
"꽉 잡아!"
'꽉?'
갑자기 들려오는 아이린의 마나 섞인 음성.
쉬이이이익.
와이번이 갑자기 태양을 향해 돌진하는 것처럼 상공을 향해 급상승했다.
'크으! 놀이기구는 게임도 안 돼!'
제법 즐겨 탔던 샷테월드의 여러 가지 놀이기구들.
이 정도로 짜릿한 흥분을 주진 못했었다.
'어?'
발바닥까지 저릿저릿할 정도의 흥분이 정점에 도달해 있던 어느 순간.
갑자기 와이번이 오르던 것을 멈춰 섰다.
휘익.
그리고 놀랍게도 거대한 동체를 휙 돌리며 머리를 아래로 향하는 와이번.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쇄애애애애애애애애액.
마법으로 보호되는 수련생 에어 플레이트 투구를 착용하고 있었건만 세포 하나하나까지 전달되는 감각.
대한민국 최고 난이도를 자랑한다는 월미도 바이킹은 명함도 못 내밀 공포 그 자체였다.
'누굴 죽이려 하는 거야! 크으으으으!'
비행 중에 받는다는 기압의 압력.
아이린의 가슴, 아니, 허리를 꽉 껴안고 있는 손에 힘이 더해졌다.
지상에서 수 킬로는 떨어진 상공에서 떨어지는 기분.
어릴 적 생각만으로 잠결에 오줌을 지리던 전설의 고향의 처녀 귀신을 보는 것만큼이나 섬뜩하였다.
쉬이이이잉.
그렇게 얼마 정도 지상으로 추락하던 와이번.
몸을 급격히 틀더니 수평비행으로 전환하였다.
탈칵.
촤르르르르르르르.
'음....'
느릿한 속도로 비행을 하는 와이번 위에서 투구를 벗어버리는 아이린.
그녀의 은빛 머리칼이 바람을 타고 내 눈앞을 어지럽혔다.
"숨을 들이켜 봐. 마음껏, 가슴 터지도록...."
아이린의 속삭이는 한마디.
탈칵.
주문에 걸린 것처럼 투구를 벗었다.
쉬이이이이이잉.
봄날의 어느 날.
햇살 따뜻한 오후의 하얀 구름을 머금은 푸른 하늘.
"아...."
폐부에 들어찬, 지금껏 살아왔던 더러운 삶의 찌꺼기를 씻어내는 긴 한숨.
눈이 잠겼다.
그리고 깊숙이 하늘의 공기를 빨아 마셨다.
아기 때 어머니의 젖을 빨던 것처럼.
"좋아. 난 하늘이.... 그리고 소망해. 언젠가는 저 태양을 향해 끝까지 날아보기를...."
짧은 단어를 시처럼 읆어대는 아이린.
달라 보였다.
내가 알던 바즈란 제국의 똑똑하고 어여쁜 백작 여인이 아니라 무언가 소중한 꿈을 꾸고 있는 소녀로 보였다.
아직 세상의 어둠 따위는 모르는.
"으아아아아아아!"
"호호호, 호호호호!"
'이 목소리는!'
고개가 뒤로 돌려졌다.
'아이고, 내가 미쳐.'
그리고 보았다.
어느새 투구도 벗어 던진 채 스카이나이트를 밀어내고 앞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하이네스.
휘링 휘링 휘리링.
하이네스의 거친 채찍에(?) 비행 중에 정신을 못 차리는 와이번과 그 주인.
어디 가서 제발 내 동생이라고 말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적응 못하는 자들도 있네.'
이미 완벽히 적응하다 못해 광란의 질주를 벌이는 하이네스와 달리 기진맥진하거나 벌벌 떨며 고개를 처박는 몇몇 수련생들.
'루셀....'
그중에 내가 아는 이도 있었다.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질 때까지 적응하지 못하면 바로 탈락인데.'
익히 알고 있는 비행 실습의 목표.
부적응자에 대한 일차 선별이 목적이라 하였다.
"창공단으로 돌아간다!"
온 창공이 다 울릴 정도로 외치는 아이린의 맑은 목소리.
쉬이이익.
와이번이 한쪽 날개를 반쯤 접으며 방향을 선회하였다.
'베베토.'
그리고 갑자기 떠오르는 어둠 속의 와이번 베베토.
놈에게 이 멋진 하늘을 선물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와 함께 말이다.
★★★★★★★★★★★★★★★★★★★★★
"괜찮아?"
"네 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어라, 이 자식 봐라?'
얼굴이 하얗게 탈색이 된 루셀 녀석.
와이번에 적응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를 세상 밖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수고해."
뭐 그런다고 해서 눈 하나 까딱할 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렇게 예민할 때 두드려 패서 정신 재교육을 실시 할 것이 아니라면 가만히 놔두는 것도 좋을 것이었다.
"흑...."
'어라?'
등을 돌리는 순간 들려오는 나직한 울음소리.
'부모님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했지....'
우연치 않게 들었던 루셀의 원한.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원수를 갚겠다는 녀석의 피맺힌 의지가 떠올랐다.
'힘들면 도와달라고 하던가. 계집애도 아니고 질질 짜기는.'
마음 한구석이 안타까움으로 착잡해졌다.
스카이나이트가 되어야 할 절박한 상황에 처한 루셀.
방 밖으로 나가면서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어찼다.
저 울보 루셀을 와이번 위에 당당하게 서 있게 만들어주기 위한 방법들이....
★★★★★★★★★★★★★★★★★★★★★
'쩝, 발걸음이 이곳으로 와버렸네.'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섰다
키르포네 창공단에 찾아온 저녁의 그림자.
아이린의 등 뒤에서 맛본 비행의 첫 경험을 상기하였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도착한 한 장소.
산 곳곳에 밝혀 있는 초소의 마법 등불에 의하여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큼지막한 건물.
'베베토....'
와이번의 이단아이자 스카이나이트들에게 저주의 불행을 안겨다 주는 이종교배 베베토의 격납고였다.
'함께 하늘을 날고 싶다.'
다른 와이번들보다 더 큰 날개와 몸체를 소유한 베베토.
녀석과 새파란 공기로 가득 찬 하늘을 나누고 싶었다.
'반겨줄라나?'
하늘이 아니라 바깥출입을 해본 지가 언제인지도 모를 녀석.
무단 침입자인 나를 반겨줄까 의문이 들었다.
끼이익.
그래도 좋았다.
어둠 속에서나마 놈과 대화를 시도해 보고 싶었다.
번쩍.
작은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베베토의 커다란 눈동자.
세상을 향한 분노를 품고 있는 금빛 눈동자.
어둠 속에서 베베토가 눈동자가 유령처럼 허공에 떠 있었다.
"하이~!"
손을 들어 인사를 시도했다.
"....."
'인사성이 없는 놈이군.'
침묵으로 자신의 불쾌한 심정을 전하는 베베토.
"저녁 먹었냐?"
다시 한 번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일체의 행동 없이 눈동자만이 나를 응시하였다.
"오늘 처음으로 와이번을 타봤다. 정말 죽이더라."
듣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과정된 표현으로 이야기해 갔다.
"대단하더라. 전투기도 아닌 녀석들이 그렇게 높이 날아서 자유자재로 비행을 하다니.... 튼튼한 줄은 알았지만 용가리 통뼈인 줄은 몰랐다."
손을 펼쳐 와이번 날개를 흉내 내며 나는 모습을 취했다.
파앗.
'흐흐, 그래야지.'
하늘을 나는 손짓에 번쩍이는 베베토.
지가 아무리 튕겨봐야 철장 안의 덩치 좋은 닭일 뿐이었다.
"너, 바람 먹어봤냐? 캬아, 지상하고 완전 공기가 달라. 뭐라 할까? 순수한 물빛 영혼의 맛이랄까? 시원하면서도 상쾌한 그 맛! 완전 환상이야."
베베토가 내 말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
그러나 놈의 눈빛이 흔들리는 모습으로 보아 대충 무슨 말인 줄은 아는 것 같았다.
'정말 마음에 드는 놈인데....'
문제는 모든 와이번들과 스카이나이트들의 표적이 되는 저주받은 생명체라는 것.
이곳에서 도망친다 하더라도 세상에서 반겨줄 곳이 별로 없을 것이다.
"룰루, 루루루~? 베베토! 형님이 오셨다."
'형님?'
베베토의 미래에 대해 고심하고 있을 때, 밖에서 들려오는 당찬 목소리.
스윽.
벽면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끼이익.
"배고프지?"'
진짜 형이라도 되는 양 목소리에 정을 듬뿍 담고 등장하는 남자.
'누구야?'
창공단에 근무하는 일반 행정병들의 옷을 걸치고 있는 자.
제법 무거워 보이는 고깃덩어리 몇 개를 들고 있었다.
철퍽.
"먹어라. 오늘은 다들 배불러서 그런지 쓸 만한 것들이 제법 있을 것이야."
남자는 와이번들의 식사를 위해서 사용되는 커다란 나무판 위에 고기를 던져 놓았다.
'찌꺼기?'
어둠 속에서도 훤히 보이는 고기의 종류.
돼지의 가죽, 양의 고기도, 소의 다리도 보였다.
아마도 다른 와이번들이 먹다 남긴 고기의 부산물인 것 같았다.
꾸우우우.
"고맙다고? 너나 나나 같은 처지인데 뭐가 고마워."
'한쪽 팔이 없네?'
부자연스러운 남자의 왼팔.
팔꿈치부터 잘려 나가 있었다.
스윽스윽.
베베토의 다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남자.
와작.
베베토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더니 고기를 덥석 물었다.
'불쌍한 녀석.'
갇혀 있는 것만으로도 형벌이건만 먹는 것도 부실한 베베토.
안쓰러운 마음이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올라 왔다.
"베베토.... 나 곧 떠난다."
베베토의 먹는 모습을 보고 있던 남자의 입에서 이별을 예고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
순간 말을 알아듣는 듯 베베토가 먹는 걸 멈췄다.
"어쩔 수가 없다. 힘없는 병신 행정요원을 돈 주고 고용할 고용주는 없어. 더욱이 난 찍혔잖아."
'짤리는 건가?'
"빌어먹을 세상.... 내 꿈은 고작 이런 게 아니었는데.... 제국 행정학교를 졸업할 때만 해도 이게 아니었는데. 크윽...."
억울할 듯 얼움 섞인 탄식으로 세상에 한을 풀어놓는 남자.
'제국 행정학교? 나름대로 엘리트잖아.'
기사와 귀족을 육성하는 제국 기사학교와 달리 제국의 행정 실무나 영지의 행정관을 배출하는 제국의 교육기관.
듣기로, 평민들 중에서도 뛰어난 머리를 소유한 자들만 입학할 수 있는 곳이라 하였다.
쿠으으으으으으.
베베토가 위로하는 듯 긴 부리로 남자의 허리에 비볐다.
'싸가지가 있네.'
새 주제에 인간의 감정을 위로할 수 있는 베베토의 모습.
호감도 10점을 더해주었다.
"미안하다... 너도 힘들 텐데. 이 형아가 못난 모습을 보여서...."
어떤 이유로 팔이 잘렸는지 모르지만 포부가 제법 큰 것 같은 행정병.
베베토의 온기를 느끼는가 싶더니 곧 몸을 떼었다.
"걱정이다. 내가 아니면 너를 돌봐줄 사람이 없을 텐데.... 바보 같은 귀족 새끼들이 보물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팔이 잘려 나갔건만 자신의 운명보다 베베토를 걱정하는 사내.
도와주고 싶었다.
'행정병은 정식 와이번을 소유해야 부릴 수 있다 했는데.'
하지만 내 주제는 아직 그를 어찌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간다. 잘 자라...."
말에 여운을 두는 남자.
어둠 속에 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밖으로 사라져 갔다.
스윽.
남자가 사라지자 베베토가 어둠 속에 있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나오라는 듯.
"너, 그래도 복받은 줄 알아라. 황녀에 이어 저런 사내까지 형으로 둘 정도면 나름대로 축복받은 것이야."
쿠우우, 쿠우우.
'뭐라고 그래?'
무언가 대화를 시도하는 베베토.
문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고 의사를 전달했다.
"방금 나간 남자를 도와주라고?"
쿠우우우우우우.
내 말에 부리를 끄덕이는 베베토.
'헐! 이놈이 이렇게나 똑똑했어?'
와이번이 지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종교배종이라 더 똑똑한가?'
"네가 원한다면 힘 좀 써보겠는데, 그리 기대는 하지 마라."
쿠우, 쿠쿠.
내 말에 눈빛을 따스하게 바꾸는 베베토.
이제야 내 말이 먹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이만 간다. 내일 또 보자."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다.
그것도 이것저것 주어온 고깃덩어리를 먹는 베베토.
'너를 고기가 뛰어노록 젖이 흐르는 천국으로 인도해 주마!'
그리고 마음 먹었다.
저 가련한 와이번을 파라다이스로 인도해 주기로.
★★★★★★★★★★★★★★★★★★★★★
"이것은 제군들도 이깋 알고 있는 블레스트 스피어다. 최대 사정거리 2킬로미터, 무게는 2킬로그램. 마정석을 내장한 상태로 마나를 불어넣으면 빛을 발하면서 발사 체제로 전환이 된다."
파앗.
창끝이 미스릴 코팅이 되어 있는 블레스트 스피어.
추적 마법과 강화 마법진이 새겨져 있는 마법창.
한 발에 최소 천 골드 이상씩 나가는 고가의 물품이었다.
마법담당 교관인 베힌 자작이 마나를 불어넣자 창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마정석과 마법진을 교체한다면 사정거리가 더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2킬로미터 이상의 거리에서 발사한 블레스트 스피어는 어지간한 느림보 와이번이 아니면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무의미하다."
'현대의 미사일 개념이군.'
전투기와 전투기가 전투를 벌일 때 사용되는 공대공 미사일.
블레스트 스피어는 이곳의 공대공 미사일이었다.
"지상 공격에 사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발에 천 골드 이상씩 나가는 놈을 지상의 기사들을 잡기 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웃기는 일일 것이다. 물론 회수가 가능하다면 사용해도 될 것이다."
과거 한 차례 맛을 본 적이 있는 블레스트 스피어.
어지간한 돌덩이도 꿰뚫을 수 있는 마법창은 지상의 기사들에게는 저주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각자에게 한 개씩 블레스트 스피어를 지급하겠다. 마나를 불어넣어 보며 발사 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단, 동료에게 던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십여 개의 마법 상자에 보관되어 있는 블레스트 스피어 마법창.
와이번들이 훈련과 순찰을 위하여 수시로 비상하는 창공단의 연무장에서 수업을 받았다.
'한 발에 천 골드? 저놈을 출격할 때마다 열 발 이상씩 지급받는다 했지.'
돈으로 시작해서 돈으로 마무리가 되는 스카이나이트.
그중에서 내 눈에 돈으로 보이는 블레스트 스피어.
앞으로 내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가볍잖아?'
줄을 서서 집어 든 블레스트 스피어.
오른손에 잡히는 마법창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여기에 마나를 불어넣으라 이거지.'
손잡이 부근에 새겨 있는 마법 문양.
가볍게 마나를 불어넣었다.
피슷.
'이걸 잡고 던지면 2킬로까지 나간다는 거군.'
하늘에서 2킬로면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지상에서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응?'
그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기운 하나.
휘이익.
본능적으로 허리를 숙이며 들고 있던 마법창으로 후려갈겼다.
쩌저정!
손에 느껴지는 강력한 충격.
"헛!"
"뭐, 뭐야?"
놀라는 수련생들의 목소리.
'저 새끼가!'
그 와중에 인상을 쓰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한놈.
불멸의 가문이라는 테르몬 백작가의 로드인 쥬세인이라는 자였다.
"무슨 일인가!"
베힌 자작이 황급히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마나를 불어넣고 살짝 던지는 시늉만 했건만...."
고개를 숙이며 베힌 자작에게 사과를 하는 쥬세인.
'살짝? 참나, 어이가 없네.'
내가 후려친 창에 맞아 바닥에 박혀 있는 블레스트 스피어.
저 창에 몸이 뚫리면 최소한 사망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도 아닌 베힌 자작에게 고개를 숙이는 쥬세인이라는 자.
'이것들이 개겨본다 이거지?'
기사학교에 있을 당시에는 기도 못 피던 것들이 창공단에 와서 다시 이빨을 들이대고 있었다.
이래서 형님들(?) 격언이 틀린 말이 없었다.
한 번 밟을 때 뭣 나게 밟아버리라는.
"조심하도록 하게."
아무리 교관이라 해도 어느 한계 이상은 관여치 못하는 것 같았다.
물론 아투안 자작처럼 모른 척하는 이도 있었지만 제국 백작가 이상의 고위 귀족 자제들에게 저자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다. 스피어는 반납하도록."
경고도 아닌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수업을 마치는 베힌 자작.
'황태자를 믿는다 이건가?'
창공단에 와서 확연히 느껴지는 놈들의 반항.
공작가의 아들내미인 테드란 주변에 뭉쳐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으아! 성격 많이 죽었다.'
예전 같았다면 대놓고 발라 버렸을 놈들이건만 숨을 들이켜며 참았다.
석유가 마르지 않는 한 보일러는 돌아가는 법.
시간은 아직 널리고 널렸다.
놈들에게 잊지 못할 뜨거운 맛을 보여줄 기회는 말이다.
★★★★★★★★★★★★★★★★★★★★★
"우웩.... 웩."
"이만 포기하게. 고소공포증은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루셀.'
스카이나이트의 필수적인 조건인 비행 능력.
아무리 대마법사라 하더라도 비행을 할 수 없다면 그는 스카이나이트가 될 수 없었다.
'2차 비행까지 탈락이라니. 이제 한 번 남은 것인가.'
실습답게 비행 교육과 함께 와이번 조정법, 무기 사용법 같은 기초 지식을 습득해 갔다.
그런 와중에 아직도 비행 자격을 얻지 못한 몇몇 수련생들.
루셀도 그런 탈락 예정 수련생들에 속해 있었다.
"바람을 두려워한다면 스카이나이트 자격이 없지."
와이번의 머리를 쓰다듬던 아이린이 냉정한 한마디를 뱉어냈다.
바닥을 기며 토하고 있는 수련생들을 바라보면서.
'바람의 정령사가 어찌 바람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다른 수련생과 달리 바람을 확실히 이해하는 바람의 정령사들.
친화력이 있어야만 바람의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나 같은 예외도 있지만.
'무언가 있다. 루셀이 저렇게 힘들어하는....'
고소공포증과 차원을 달리하는 루셀의 하얗게 질린 얼굴.
악몽이라도 꾸는 듯 얼굴이 잔뜩 찡그러져 있었다.
고개를 돌려 아이린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
대답 대신 보는 이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요정같은 순수한 눈동자를 빛내는 아이린.
'왜 그러는 거야? 가슴 뛰게.'
투구를 벗고 에어 플레이트 위에 살포시 내려앉아 있는 긴 은빛 생머리.
그리고 하늘의 별빛 같은 은은한 푸른 눈동자.
가금씩 꿈속에서도 생각나는 아이린이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언제 식사 한번 하지."
'엥? 식사?'
창공단에서 도도하고 차갑다고 소문난 아이린 백작의 식사 제안.
"저야 고맙죠."
씨익.
흔쾌히 대답하고 밝은 미소를 지었다.
"보기 좋아.... 그 웃음."
고개를 돌리며 스치듯 읆조리는 아이린의 칭찬.
'당신도 보기 좋습니다. 맑은 하늘을 품고 있는 그 모습이.'
와이번을 타고 창공을 가를 때 보여주는 아이린의 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
남자라면 목숨 걸고 도전해 보고 싶은 매력덩어리 그 자체였다.
'그나저나 저 녀석을 어찌하지?'
구토를 멈추고 멍하니 바닥을 보고 있는 루셀.
녀석의 의기소침한 모습에 고민이 팍 들어갔다.
저러다 인생 하나 망가질 것 같았다.
★★★★★★★★★★★★★★★★★★★★★
"데르발, 이 바보 같은 놈아! 찌꺼기를 흘리면 어떻게 해!"
퍼억!
"컥!"
루셀의 고소공포증 치료를 위하여 고심에 빠져 있을 때, 들려오는 욕설과 경쾌한 타격음.
'어! 저자는.'
자칭 베베토의 형이라 불리던 남자.
"병신 주제에 밥값이라도 똑바로 해야지!"
"케엑! 퉤!"
제국 행정학교까지 나온 엘리트가 가래침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넘어진 그 옆으로 음식물 찌꺼기가 가득 담겨 있는 나무통이 쓰러져 있었다.
"놔둬, 며칠 후면 쫓겨날 건데 불쌍하잖아."
"흥! 불쌍은! 저놈이 황태자 전하께 말실수를 하는 바람에 우리까지 곤욕을 치렀잖아. 감히 일개 행정요원이 전하께 창공단 개선 방안을 논하다니! 주제 파악도 못하고!!"
넘어져 있는 데르발.
자신을 둘러싼 동료들의 냉혹한 욕설에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그 대가로 팔이 잘려 나갔잖아. 우리야 월급이 깎여 나갔지만 데르발은...."
"시끄러! 저놈 편을 들면 너도 황태자 전하와 귀족들에게 찍힐 수 있어!"
"가자! 괜히 저놈 옆에 있으면 재수없으니까."
데르발을 변호해 주던 행정요원이 안타까운 시선을 보이며 동료들에게 끌려가다시피 했다.
"크, 크크큭.... 크크크크크크크."
그들이 사라지자 메마른 웃음이 사방을 울렸다.
'왜 내 주변에는 불쌍한 존재들만 있는 거야?'
왕따 와이번과 은따 행정요원, 그리고 비행을 못하는 루셀, 황실의 음모에 노출된 꼬맹이 황잒자ㅣ.
인연이라고 만난 이들이 모두 힘들어하고 있었다.
"괜찮아?"
나이는 나보다 몇 살 많은 것 같았지만 준기사급 대우를 받는 나였기에 하대를 하였다.
찌리릿.
'눈빛만으로 드래곤도 잡겠네.'
독기로 무장한 데르발의 눈빛.
보는 이의 심장을 쪼그라들게 만들 정도였다.
"신경 끄십쇼, 기사 나으리."
인생을 포기한 자들처럼 날카로운 한마디를 뱉어내는 데르발.
"싫어."
"....."
분노 대신 싫다는 가벼운 한마디를 던졌다.
그러자 눈동자가 짧게 흔들리는 데르발.
"일어나. 다리는 멀쩡한 것 같은데 계속 바닥에 앉아 있을거야? 그렇게 평생 있고 싶다면 부러뜨려 줄까?"
아무 감정도 없이 지나가는 말투로 툭툭 던졌다.
"지금 나를 모욕하는 것인가.... 알량한 수련생 신분 주제에."
"아니, 이건 모욕이 아니라 개무시라는 거야."
"이, 이놈이!"
자포자기한 것이 틀림없었다.
베베토의 부탁이 없었다면 나조차 참지 못할 막나가는 언행.
"병신."
"으아아아!"
얼굴이 달아올라 있던 데르발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밖에 없는 오른팔을 날려 왔다.
퍽!
하지만 그 대가는 배에 작렬하는 강력한 오른 발차기 한방.
"허...헉!"
태권도로 단련된 오른발에 정통으로 가격당한 데르발은 얼굴이 하얗게 변하여 숨을 허억 하고 들이켰다.
"일어서. 그런다고 봐줄 놈 하나 없으니까."
배를 잡고 허리를 숙이고 있는 데르발에게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
"왜? 아파? 아플 리가 없을 텐데. 딱 보아하니 지금 인생이 힘든 것 같은데 그냥 포기하지? 동료들에게조차도 버림받은 놈이 살아서 뭐 해. 팔도 하나 없는데 말이야."
아픈 곳을 툭툭 찔렀다.
"크크...."
'자존심 하나는 끝장이군.'
다른 놈들 같으면 발차기 한 방에 바닥을 기어야 하건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상태로 허리를 천천히 펴는 데르발.
정신력 하나는 쓸 만한 자였다.
"죽여! 죽이란 말이야! 이 잘난 기사 새끼야!"
"죽여? 그럼 죽여주지."
쉬이익.
퍽! 퍼버벅.
"크윽! 컥!"
두 발과 주먹이 아픈 곳만을 골라 날아갔다.
철퍼덕.
그리고 그렇게 십여 대를 맞던 데르발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데 어떡하냐? 난 잘난 기사가 아닌 너 같은 평범한 평민인데. 흐흐."
쓰러져 몸을 부르르 떠는 데르발.
"와이번에게도 동정을 받는 놈이 살아서 뭐 해? 죽고 싶으면 그냥 죽어. 여러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크으윽.... 흑."
냉정하고 차가운 말에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참는 데르발.
한참을 흐느끼는 데르발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안 죽어봐서 잘은 모르는데. 죽는 거 그거 쉬운 게 아니다. 차라리 나 같으면 더럽고 치사해도 목숨 연명해서 보란 듯이 잘살겠다. 혹시 알아? 살다 보면 언젠가는 해 뜰 날이올지."
'힘들어도 이겨내라. 세상 원래 혼자야.'
팔이 잘려 나간 것이 안타깝지만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구원해 줄 수 없는 세상.
스스로 이겨내야 살아갈 자격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죽는 건 아니겠지?'
더 이상 어떻게 해줄 수 없는 현실.
입맛을 다시며 널따란 창공단의 길을 목적없이 걸었다.
병아리가 자신을 보호해 주던 껍질을 깨고 나와야만 세상을 살 자격이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