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대마법사-21화 (21/221)

제21장 그녀의 이름은 하이네스

"영 찝찝한데...."

하이네스가 사라지고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 나온 후작들.

그들 앞에서 마나스톤에 마나를 대충 불어넣고, 이스타인 후작이라는 작자의 부하들인 근위기사와 가볍게 몇 검을 나누고 합격 통보를 받았다.

나에게는 생각보다 너무나 쉬웠던 스카이나이트 압학시험.

30세 이하, 4서클 이상의 마법사나 블레이드 나이트 급 이상이어야만 치를 수 있는 자격.

분명 쉬운 조건은 아닐 것이다.

검밥만 먹고 산 근위기사 정도는 되어야 블레이드 나이트급 수준일 것이다.

내가 여행 중에 만난 수많은 용병들 중 블레이드 유저는 제법 있었어도 나이트 급은 한 명밖에 없었다.

'스카이나이트 선발에 대한 다른 무언가가 있어.'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 나도 스카이나이트 기사학교 생도인가?'

양면으로 117이라는 숫자와 이름, 와이번이 그려진 주먹만한 마법 증명패.

합격과 동시에 할당받은 생도패였다.

믿기지 않는 합격의 여운.

'움하하하하! 그래, 난 하늘이 내린 희대의 천재였던 것이야~!'

그리고 내린 결론은 오직 하나.

더 이상 생각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나보다 더 못한 것들도 합격하는 판에 내가 떨어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되었다.

'2년은 너무 길다. 더 짧은 시간 안에 와이번을 먹어야 한다!'

이제 문제는 2년이라는 긴긴 시간 동안의 스카이나이트 교육.

살다 보면 예외라는 존재가 있었다.

나는 그 예외적 인간으로 살고 싶었다.

'이 패를 들고 기숙사로 가라 이거지?'

스카이나이트생들과 기사학교, 그리고 마법이나 정령학교 학생들이 머물고 있다는 황성 내성 안의 기숙사.

'말로만 듣던 대학교 캠퍼스 생활이 따로 없군.'

정확한 건물 명칭은 아직 숙지하지 못했지만 거대한 공간에 자리 잡은 수많은 건축물.

모두 바즈란 제국의 인재를 육성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들이 분명했다.

"루루루~"

근위기사들과 병사들로부터 철저히 보호되는 또 다른 세상.

인간 강혁의 또 다른 인생이 펼쳐질 희망의 대지였다.

★★★★★★★★★★★★★★★★★★★★★

"이곳이 카이어 경께서 머무실 곳입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난생처음 듣게 된 경이라는 호칭.

기숙사 앞에서 생도 증명패를 내밀자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시종이 내가 머물 곳으로 안내했다.

"기숙사는 2인 1실로, 로페로니 궁이라 불리는 이곳은 남자 기숙사생들이 머물며, 옆 건물인 달티안은 여성 기숙사생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식사는 아침과 점심, 저녁 모두 아무 시간 때나 이용하실 수 있으며, 수련생 정복 이외에는 착용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물품은 방 안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역시 제국이란 말인가.'

아직 한 번도 귀족가의 집 안을 구경한 적은 없었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수준 정도라 생각했다.

방과 방 사이, 벽 사이에 걸려 있는 신들과 전쟁과 역사에 관한 명화들.

그리고 은은한 마법등이 켜져 있는 복도.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는 기숙사는 제국이 얼마나 인재양성을 중요시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손바닥 전체를 사용해서 손잡이를 잡으십시오."

덜컹.

현대의 고급 호텔에 비교할 수 있는 럭셔리한 기숙사.

512호실이라 쓰여 있는 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법 자물쇠?'

"제국 기숙사의 모든 시설은 지하에 있는 중앙 마법진에서 마나를 공급받습니다. 마법등부터 시작해서 온수 및 냉수, 그리고 이와 같은 자물쇠 인식 마법까지 세세히 부족함 없이 공급해 주고 있습니다."

자랑스럽게 설명하는 이름도 모르는 시종.

"이 정도면... 3등급 이상의 마정석."

"그렇습니다. 3급 마정석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는 마정석.

마법진을 완성하려면 마정석 가루가 필요하였고, 마나 스태프나 마법에 관련된 시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마정석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마법만으로 이 정도 편리성을 갖춘다면 21세기가 부럽지 않겠어.'

문제는 이런 편리성을 일반 평민들은 절대 맛볼 수 없다는 것.

마정석이 길 가다 만나는 돌멩이도 아니고, 또 마정석을 마법으로 가공하여 쓸 만한 마법 물품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우후! 좋아!'

시종과 대화를 나누며 들어선 방.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머물렀던 여관의 특실 못지않은 넓은 방.

5층에 위치한 까닭에 따뜻한 태양이 창문을 통하여 방으로 스며들어 왔고, 양쪽으로 놓인 널따란 하얀 침대와 침상.

그리고 티 테이블 같은 갖가지 편의시설.

내가 살던 현대의 방보다 더 좋았다.

"식당은 기숙사 앞 할포네스 관에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하신 물품이 있으면 언제나 1층 홀에 있는 시종들을 불러주시면 됩니다."

깍듯한 안내를 잊지 않는 시종.

"이름이 뭡니까?"

시종이지만 나이가 많기에 말을 놓을 수 없었다.

"아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편하게 하대를 해주십시오. 수련생부터 준기사 대우를 받는 것이 제국법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고, 고맙네. 아키."

신분 사회임을 확실히 보여주는 아키 형님의 깍듯한 존대.

어색하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정식 수업은 앞으로 보름 정도 있어야 시작될 것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는 아키.

"하아, 좋다~!"

아직 룸메이트는 정해져 있지 않은 듯 방 안은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키가 나가고 하얀 침대보가 깔려 있는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보름 동안 황실 구경이나 해볼까?'

팔베개를 하고 누워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구경하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

푹신한 침대가 나른하게 몸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나는 기분 좋은 잠에 빠져들어 갔다.

칼리얀 대륙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안정감이 느껴지는 평안한 휴식이었다.

★★★★★★★★★★★★★★★★★★★★★

차자장!

"타앗!"

얼마쯤 꿈나라를 헤맸을까?

날카로운 기합과 검이 부딪치는 소음에 의식이 확 깨어났다.

'헉! 이, 이게 뭐야?'

침대에 눕던 마지막 기억의 햇살 자락은 오후의 나른함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창밖으로 떠오르는 태양은 이른 아침의 팔팔한 놈이었다.

'반나절 이상을 잔 거야?'

얼마나 피곤했던지 기사들과 병사들이 수호해 주는 내성안의 기숙사에서 깊은 잠에 빠져 버린 것 같았다.

"으갸갸!"

길게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아무리 5서클 마법사라 해도 잠은 자야 하는 법.

늘어지게 잔 잠 덕분인지 온몸에 상쾌한 기운이 짜르르 흘러 넘쳤다.

"이얍!"

휘윅! 휙휙!

'아침 수련인가?'

기숙사는 스카이나이트 말고도 일반 기사 수련생, 수련 마법사, 정령사들이 같이 기거하는 공통된 공간.

창밖 연무장에서 들리는 기합 소리가 수련하며 내지르는 소음임을 알 수 있었다.

꼬로로로.

"이런! 밥 때를 놓쳤잖아!"

한 끼를 굶으면 한 끼만 굻는 것이 아니라 평생 찾아 먹을 수 없는 한순간을 놓친다는 명언을 남겨주신 시골 할아버지.

어제저녁부터 한 끼도 먹지 못한 나는 위장이 지르는 협박성 경고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식당이 앞 건물에 있다 했지?"

방 안에 딸린 욕실에 들어가 간단히 세수를 하였다.

"클리어!"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고 클리어 마법을 펼쳤다.

휘리리리리리리리링.

수많은 입자로 나누어진 마나가 전신을 한 바퀴 휘돌았다.

그리고 느껴지는 깨끗한 기분.

클리어 마법도 마나와 서클에 비례하여 강력해진 효과를 발휘하기에 단 한 번의 마법 시전으로 온몸에 붙은 불순물이 사라짐을 느꼈다.

"수련생 정복을 착용하라고 했지?"

방 안에 놓여 있는 옷장을 열었다.

"풀 사이즈인가?

두 개의 옷장 중 한곳에 들어 있는 정복.

쫄쫄이바지 스타일의 하얀색 브리치스라는 바지와 후드티와 같은 슈퍼튜닉이라 불리는 상의, 그리고 검은빛의 망토와 와이번 조각된 은빛 허리 벨트.

"의외로 따뜻하단 말이야?"

무슨 직물로 만들었는지 몰라도 내복을 입지 않고도 추위를 견딜 수 있는 이곳의 옷감.

가슴팍에 블랙 와이번이 수놓아져 있는 옷을 걸치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도서관도 있겠지?"

마법사도 양성하는 곳이기에 틀림없이 도서관이 있을 것.

대륙의 지식 습득을 위하여 도서관만 한 곳은 없을 것이다.

끼이익.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조용한 복도를 걸어 식당으로 향했다.

아직 친구 하나 없는 이곳.

지구에 두고 온 중현이 같은 착한 친구 하나 정도는 만들고 싶었다.

★★★★★★★★★★★★★★★★★★★★★

'뷔페!'

할포네스라 불리는 기숙사 앞 1층 식당.

수백 명이 동시에 착석할 수 있는 학교 급식실보다 더 넓은 공간에 차려진 음식은 놀랍게도 뷔페.

음식 종류는 메인 요리부터 시작해서 과일까지 합해 30여 가지.

그리 많은 종류는 아니었지만 칼리안 대륙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식단이었다.

'두툼한 이 고기!'

시종들의 시중을 받는 귀족가의 식사는 아니었지만 온도 보전 마법진 위에서 따뜻한 김을 뿜어내는 스테이크와 닭튀김, 생선요리, 야채샐러드.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접시에 음식을 퍼 담으며 나는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김치만 있다면 완벽한데! 아깝다.'

배추와 비슷한 식물도 있고, 고추와 마늘 같은 양념도 있다는 것을 정보 수집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가하게 김치를 담가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없는 것이 문제.

언젠가 내 영지를 소유한다면 반드시 김장독을 만들어 김치를 담가 먹을 거싱다.

'그런데 이 시선은 뭐야?'

해가 뜨고 있는 이른 아침이건만 수십 명이 식사를 하고 있는 공간.

음식을 담다 말고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자 마주치는 수십 쌍의 눈동자.

'사람 처음 봐?'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나를 훔쳐보는 시선들.

'얼라? 망토 색깔이 다 다르네?'

나와 같은 검정색 망토를 두른 자는 딱 한 명.

나머지는 푸른 망토와 하얀 망토를 걸친 자들이었다.

'으헛!'

다른 이들 속에서 눈에 확 띄는 검은 망토를 한 번 바라본 나는 기겁을 하였다.

별나라에서 온 여주인공 만화 캐릭터인 하이네스.

인형 같은 입술도 오물거리며 사과를 포크로 찍어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찌릿.

그리고 마주치는 눈동자.

꾸벅.

참한 캐릭터 아니랄까 봐 바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오는 요조숙녀 하이네스.

'이상하단 말이야. 내가 보기에는 지극히 멀쩡, 아니, 최고의 현모양처감인데.'

그런데 왜 후작 씩이나 되는 귀족들이 공포에 젖었는지 알수 없었고, 내 몸에서 위험 신호를 보내는 까닭도 이상하였다.

'그래, 이것도 인연인데....'

커다란 눈동자가 얼굴의 반절 정도는 되어 보이는 하이네스에게 다가갔다.

"하하, 좋은 아침입니다."

백작가의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라지만 이제는 같은 학교의 학생.

대한민국에서 하던 버릇처럼 스스럼없이 다가갔다.

"네. 조, 좋은 아침이에요."

얼굴을 사르르 붉히며 고개를 살포시 숙이는 하이네스의 센스.

'고것, 귀엽네.'

사십대 변태 아저씨도 아니건만 마음속에 이는 늑대 같은 생각 하나.

털썩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전 카이어라고 합니다."

나이프와 포크를 잡으며 자연스럽게 이름을 알렸다.

"하, 하이네스 드 페트린입니다."

깨작깨작 포크로 사과 한 조각을 자르며 대답하는 하이네스의 귀여운 표정.

'즐거운 아침이야. 흐흐.'

귀여우면서도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하는 아침.

오늘은 느낌이 좋았다.

'그런데 자식들, 사람 먹는 거 처음 봐?'

대부분 남자로 구성되어 있는 푸른 망토를 두른 이들.

나와 하이네스를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뭐라 소곤거렸다.

"혹시, 오늘 시간 있습니까?"

"네? 시, 시간이요?"

말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하이네스.

21세기의 억센 여자 아이들과는 달리 다소곳하고 부끄러움 많은 그녀의 모습에 호감이 급상승했다.

'어쩜 저렇게 귀엽냐? 흐흐.'

남자용과 달리 조금은 헐렁한 여성용 수련생 복장.

작은 얼굴 때문에 옷에 파묻혀 보이는 하이네스의 모습은 남자의 보호본능을 은근히 자극하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의 신 로메로님의 은혜인 것 같은데 같이 기사학교 지리라도 파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로메로님의 은혜요....?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신의 이름을 들먹이자 고개를 조그맣게 끄덕이는 하이네스.

'음식 맛도 죽음이네!'

부드럽게 잘려 나간 두툼한 스테이크의 맛을 음미하며 하이네스를 반찬 삼아 한 번 보았다.

자린고비가 밥상 위에 놓인 굴비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것처럼.

★★★★★★★★★★★★★★★★★★★★★

사박사박.

'크으, 캠퍼스의 로망이 이런 것이던가!'

시작하자마자 펼쳐지는 귀여운 소녀와의 데이트.

밥을 먹고 느긋하게 차까지 한 잔 마시고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대학교 선배들에게 말로만 들었던 캠퍼스의 낭만을 절절히 음미할 수 있었다.

키 160을 조금 넘는 깜찍하고 귀여운 하이네스.

천생 여자인 그녀가 왜 스카이나이트를 지망했는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저곳에 화원이 있어요. 어제 가보았는데 루미레스 꽃이 피어 있었어요."

겨울에 꽃을 꽂고 나타난 하이네스가 이상하였는데, 그 이유를 알아냈다.

'기온 유지 마법으로 겨울에도 화원을 유지하다니 역시 제국이야.'

상당히 괜찮은 마정석을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상황.

북부의 패자 바즈란 제국다웠다.

"꽃 좋아하세요?"

꿈의 캠퍼스라 나에게 명명된 제국 기사학교.

천천히 하이네스와 걸으며 상쾌한 아침을 만끽하였다.

"네...."

물어서 뭘 하랴.

딱 보면 꽃, 시, 상냥함 같은 단어들과 친구 먹을 하이네스의 모습.

"시도 좋아하세요?"

자연스럽게 다음 코스로 넘어갔다.

"시요? 네. 음유시인들이 즐겨 부르는 영웅들의 대서사시도 좋아하고 대시인 아뮤란트님의 꽃밭에서라는 시도 좋아하고. 호호! 부드럽고 감미로운 시는 다 좋아한답니다."

처음으로 밝게 웃음 짓는 하이네스.

청초한 한 송이 백합이 하이네스의 얼굴에 피어나는 착각이 들었다.

"그럼 제가 하이네스를 보고 문뜩 시가 하나 생각났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네? 저, 저를 위해서요?"

투명하고 영롱한 커다란 눈동자를 껌뻑이며 하이네스는 놀란 표정이었다.

'정말 나 선수 맞는 거야?'

언젠가 예린이가 나에게 무심코 던졌던 말.

어제 만난 것이 전부인 대제국 백작가의 외동딸 하이네스.

다른 평민들은 상상도 못할 짓을 나는 서슴없이 벌이고 있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겨울이건만 가을처럼 맑고 깨끗한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히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읆기 시작했다.

'몰입 좋고!'

내가 들어도 듣기 좋은 내 목소리.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하이네스 곁을 휘돌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애잔한 그리움이 녹아 있는 꽃이라는 시.

한 번쯤 좋아하는 여인을 위하여 불러주고 싶었던 나의 애송 시였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클라이맥스 구절.

목소리를 다듬으며 감정을 깊이 몰입시켜 갔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하이네스.

그런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마지막 구절을 노래하듯 감미롭게 흘려보냈다.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아....!"

'오케이!'

저작권 가지고 시비를 걸 누가 없는 21세기 명시.

하이네스는 감동에 젖어 두 손을 잡고 큰 눈망울을 촉촉이 물기로 적셔갔다.

"너... 너무 감동적이에요.... 나는 나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제가 지금껏 들어본 그 어떤 시보다 아름답고 감미로운 시입니다."

완전 감동을 먹은 하이네스가 시 구절을 음미하며 나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나도 한번 대음유시인이 되어보는 거야.'

머릿속에 기록되어 있는 수많은 21세기 지구 문명.

피 튀기는 교육 덕분에 쓸 만한 시와 음악 같은 문학은 머릿속에 차곡차곡 쟁여져 있었다.

"고마워요, 카이어님...."

"하이네스님, 실례지만 올해 나이가...."

마음을 열었음이 분명한 하이네스에게 나이를 물었다.

"열일곱이에요. 그런 카이어님은...."'

'열일곱? 생각보다 많네?'

나보다는 어리다고 생각했건만 동갑인 하이네스.

"하하! 올해 저는 열여덟입니다."

"아, 저에게는 오빠가 되시는군요."

'바로 그거야! 크크.'

친구 먹기에는 아까운, 예쁘고 깜찍한 동생처럼 느껴지는 하이네스.

내가 던전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럼 오빠라고 부르십시오. 인연의 신 로메로님이 엮어주신 오늘의 인연, 앞으로도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의미가 되고 싶습니다."

"오, 오빠...요?"

나의 파격적인 제안에 큰 눈을 깜빡이며 고뇌에 빠진 어린양.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내가 언제 귀족 여동생을 맞이해 보겠니.'

이왕 살다 갈 거라면 폼 나고 멋진 인생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런 인생에 하이네스처럼 귀엽고 깜찍한 여동생 하나쯤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조, 좋아요. 카이어님을 이제부터 오빠라 부르겠습니다."

'굿! 탁월한 선택이야.'

알아두면 쓸모가 많은 나.

"그래, 하이네스. 이제 너와 나는 서로 잊혀지지 않는 의미가 된 것이야. 로메로님이 엮어주신 오빠와 동생 사이로 말이야."

"네. 호호! 카이어 오라버니!"

기분이 나만큼이나 좋은 하이네스.

싸가지에 밥 말아 먹은 루이에라 계집년하고는 차원이 다른 귀족 자제였다.

'흐흐, 귀여운 것.'

해맑게 웃는 하이네스의 순수한 모습.

왠지 모를 뿌듯함이 가슴 밑바닥에서 솟아올랐다.

'기다려라, 제국 사교계여! 이 카이어님이 가신다! 하하하하하!'

소문으로 듣기만 했던 귀족들 간의 모임.

사나이 강혁님이 빠진다면 말이 안 되었다.

"오빠, 우리 화원에 꽃구경 가요?"

"응? 꼬, 꽃?"

"동생의 소원인데 들어주실 거죠?"

안 들어주면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하이네스의 표정.

"그, 그래야지. 하하! 하나뿐인 여동생의 소원인데 그깟 화원이 문제겠느냐. 저 하늘의 달도 따다 줄 수 있지."

"정말요? 와아! 그럼 오늘 밤에는 달도 따주세요. 우리 아빠는 못 따던데.... 호호! 역시 오빠는 다르다니까."

'뭐, 뭐냐. 이 유치원적인 사고방식은?'

나의 과장된 언어 사용을 철석같이 믿어버리는 하이네스.

갑자기 식은땀이 등에서 살짝 느껴졌다.

'설마 내가 당한 거야?'

미끼를 문 것은 하이네스가 아닌 나일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 하나.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저 연약하고 꽃을 좋아하는 청순가련형 미인이 나에게 손해를 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남자들만의 명언집에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예쁘면 살인 빼고 모든 게 다 용서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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