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장 스카이나이트와의 대결
"가는 건가?"
"얀, 얀스."
아르미스와 자메르가 떠나고 이틀 후.
상단이 싣고 온 갖가지 물품의 분배가 끝난 마을은 활기가 넘쳤다.
그리고 나는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할 일이 모두 끝난 마을.
바람처럼 왔던 것처럼 소리없이 사라지려 했건만 얀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느냐고 물었다.
"하하! 이제 여행을 떠나볼까 합니다."
애써 아무렇지 않는 듯 밝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누군가와 스스로 이별해 본 적이 없기에 어색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그래야지. 젊은 때는 떠나야지....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 마을은 영원히 잊혀졌을 것이야."
평소에는 말없이 순박하기만 하던 얀스가 오늘따라 현자처럼 보였다.
"여, 여기, 빵이에요."
'세실까지....'
"어떻게 알았습니까, 제가 떠날 줄을?"
"그렇게 좋아하는 먹을 것도 마다하고 멍하니 생각에 집중해 있는데 누가 모르겠는가. 마음 없는 통나무도 눈치 챌 정도였어."
'크으! 밥 때문에!'
조용히 떠나려 했건만 밥 때문에 걸려 버렸다.
"아직 날씨가 따뜻하니 빵은 오늘을 넘기기 전에 드세요. 달걀을 넣어서 쉽게 상할 수 있어요."
매일 먹던 딱딱한 보리빵이 아니라 달걀을 넣고 부드럽고 하얀 밀가루 빵.
세실은 어느새 작은 가방에 빵을 가득 챙겨두고 있었다.
'쳇.'
얀스의 넉넉한 웃음과 아쉬워하는 모습, 빵을 챙기면서도 얼굴이 굳어 있는 세실의 슬픈 얼굴.
철모르는 데론만이 쿨쿨 아침잠을 즐길 뿐이었다.
'이래서... 이별을 사람들이 슬퍼했구나.'
막상 떠나려 했던 때와 떠나는 순간의 마음이 달랐다.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
코가 시큰거리며 눈시울이 붉어지려 했다.
"카이어, 자네의 이름밖에 모르지만 마을 사람들 모두 자네를 남이라 생각한 적 없네. 어디에 가서든지 외롭고 지치면 찾아오게. 이곳을 자네 고향처럼 생각하고."
얀스가 길 떠나는 아들을 배웅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행이 끝나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얀스도 건강하십시오."
"그래, 자네도 건강하게. 끼니 거르지 말고...."
"조, 조심히 가세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얀스가 목소리를 축축하게 물들이며 마지막 당부를 하였고, 세실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꾸벅 인사를 해왔다.
"제가 고마웠습니다. 세실, 다음에 올 때 선물 사올 테니까 꼭 맛있는 음ㅅ믹 해줘요?"
"네, 언제라도... 차, 찾아오세요. 흐윽."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세실.
"데론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형이 돌아올 때까지 멋진 사내가 되어 있으라고 말입니다."
"알았네. 변태 형아가 안부 전해줬다고 꼭 얘기해 줌세."
"....."
얀스의 농담에 갑자기 싸해지는 분위기.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마중 나가지 않음세. 그리고 말 한 필이 방책 문 옆에 있을 것이야."
'마을 사람들도 알고 있었군.'
아무도 모르게 떠나려 했건만 사람들이 눈치를 채고 있었던 것이다.
덜컹.
더 이상 이별을 지체하다가는 나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아 힘차게 문을 열었다.
휘리리링.
어제까지 느낄 수 없었던 가을바람이 열린 문 사이로 휑하니 불어왔다.
'다들 안녕히 계십시오.'
짧았지만 길었던 루나 마을에서의 추억.
대륙을 여행하더라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이제 시작이다!'
한 발 니디뎌 집을 나섰다.
그 순간 떠오르고 있던 붉은 태양의 햇살.
꿈과 모험을 위하여 떠나는 나를 위한 신의 작은 축복 같았다.
★★★★★★★★★★★★★★★★★★★★★
따가닥따가닥!
"으윽!"
만만하게 보았던 말이라는 동물.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들이 멋지게 말을 타고 총을 쏘거나 검을 들고 돌격하였건만, 안장에 부딪칠 때마다 느껴지는 따끔한 살점의 느낌.
"멈춰, 이 밥통아!"
주인의 고통도 모르고 한가로이 초원을 거니는 말.
'으으, 이러다 치질 걸리는 거 아냐?'
마을을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얼마나 행복했던가.
대한민국에서는 말을 타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여유있는 집안 자식들이나 승마를 배우지 나와 같은 평민은 말을 타볼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초보건만 말을 몰아 대지를 달렸다.
쉭쉭 지나쳐 가는 풍경과 대지를 내딛는 말발굽의 진동을 느끼며 그렇게 타기를 얼마.
갑자기 허벅지와 엉덩이 살이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크으, 그래서 면허증이 필요한 거야.'
운전면허증도 없이 차를 몰고 나갔다가 낭패를 본 심정 그대로 나는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바람을 가르는 자유를 느끼다가 그만 허벅지 살이 대부분 벗겨진 것이다.
히이이잉!
고삐를 잡아채자 좋다고 울음소리는 내며 멈춰 서는 갈색의 덩치 큰 말.
"으... 으으으. 오늘 도대체 몇 번째야."
마나가 다른 마법사보다 몇 배나 많고 채워지는 속도도 빠르기에 망정이지, 힐 마법을 펼치다가 마나 고갈이 되었을 것이다.
"힐!"
오른손을 뒤로 빼 엉덩이 부근에 가져다 대고 살포시 힐 마법을 펼쳤다.
파아앗!
고개를 돌렸지만 나는 목이 긴 기린이 아니었기에 상처난 엉덩이를 볼 수 없었고, 마법의 불빛만 구경할 수 있었다.
"아! 시원하다."
마법을 배워서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엉덩이에 굳은살 박힐 뻔했다.
'역시! 마법사가 짱이야!'
엉덩이와 허벅지 부근에서 느껴지는 시원하고 상쾌한 감촉.
등골을 타고 묘한 쾌감이 쫘르르 흘렀다.
"배도 고픈데 빵이나 먹을까나."
이른 아침 마을을 떠나 무작정 길을 나섰다.
뭐, 길이라고 해봐야 풀 덮인 들길을 그냥 가면 그게 길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일단 성에 들러야겠지?'
사람이 예습만 하고 복습, 즉 마무리를 깔끔하게 못하면 화장실 가서 볼일 보고 밑을 닦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할아버지가 몇 개 안 되는 교훈으로 가르쳐 주셨다.
'행정관이라는 놈을 족쳐야 해. 그래야 마을이 괴롭힘을 안 당하지.'
자메르에게 마을의 안전과 경제적 발전을 맡겼다면, 그 외의 것은 내가 처리해야 했다.
우적우적.
말안장에 매어 있는 가방에서 빵을 꺼내 씹었다.
"딸기잼이나 땅콩 크림이 아쉽군."
딱딱한 보리빵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부드러워서 좋네."
자메르가 가져온 소 중에 젖이 나오는 놈이 있어 우유에 달걀까지 넣고 반죽한 빵은 나름대로 고소했다.
하지만 설탕이나 소금, 그리고 각종 첨가물에 길들여진 내입은 아직 이 세계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했다.
"캬아, 하늘 좋다!"
빵으로 허기를 달래며 나무 물통에서 물 한 잔 마시며 바라본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전형적인 가을 하늘에 가슴이 시원해졌다.
"구름 한 점 없는 저 하늘, 오고 가는 이 하나 없네. 그런데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내는 새 한 마리, 바삐도 날아오는구나. 오잉? 새, 저게 새야?"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뭉클 가슴에 치솟는 시상에 시 한 수 읆는 순간에 저 멀리 하늘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새 한 마리.
아니, 새가 아니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거대한 존재.
"시, 시조새!"
놀라 소리쳤다.
공룡 그림이나 쥐라기 공원에서나 보았던 시조새가 분명한 거대한 새 한 마리.
하늘을 빙 돌더니 나를 향해 그대로 지상으로 꽂혀왔다.
"엄마야!"
빵이 소화되기도 전에 찾아온 갑작스러운 위기.
'무슨 마법을 사용해야 해! 이거! 으아아아!'
4서클 마법 중에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를 상대할 수 있는 마법을 재빨리 생각해 보았다.
세상에 멋지게 한 발을 내딛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새 밥이 된다면 가문의 망신이었다.
"윈드 실드!"
재빨리 마나를 몽땅 끄집어내어 두터운 방어막을 머리 5미터 상공에 펼쳤다.
아무리 시조새라 하더라도 한 방에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마나를 풀가동했다.
"아이스 스피어!"
앉은 자리에서 죽을 수는 없는 법.
복잡한 더블 캐스팅을 펼치며 굵직한 얼음 창을 소환해 내었다.
'와라, 이 씨방새야!'
어느새 백여 미터까지 다가온 시조새.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톱니처럼 날카로운 주둥이를 내밀고 나를 향해 낙하해 왔다.
꿀꺽.
마른하늘에 날벼락, 아니, 시조새 한 마리 때문에 기분이 천국에서 지옥으로 급 추락했다.
침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리고 공격을 집중하기 위하여 눈에 힘을 팍 주었다.
"허억! 저, 저건 또 뭐야?"
시조새처럼 생겨먹은 새를 노려보는 와중에 발견한 한 가지 물건.
"빤, 빤스? 아니, 갑옷이야?"
야생인 줄 알았건만 인간들이 만든 것이 분명한 문장이 그려진 천과 은빛 갑옷이 놈의 몸뚱이에 매달려 있었다.
"헉! 사람이다!"
그리고 보였다.
내려오던 시조새가 몸뚱이를 살짝 돌리는 순간 놈의 목 부근에 말고삐 같은 것을 잡고 오연히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휘이이이이이이익!
갑자기 나타난 갑옷 걸친 시조새와 사람.
지상에 거의 근접해 오던 시조새가 머리 위 10미터 정도에서 휙하니 방향을 틀더니 왔던 방향으로 다시 날아갔다.
"지금 나 물먹인 거야?"
새벽 1시에 공동묘지를 찾아간 것처럼 긴장감이 극도로 치밀어 올랐건만, 나를 희롱하고 휙하니 사라지는 시조새.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속도로 어느새 하늘 높이 올라가 버렸다.
"가, 가만, 설마 저게... 스카이나이트? 그럼 저 새는 시조새가 아니라 와이번?"
사제 아르미스가 어릴 적 꿈꿨다는 스카이나이트.
그제야 이해가 갔다.
"와아! 이 시대에 공군이 다 있네!"
와이번이라는 존재는 알았지만 그것을 활용해서 공군까지 창설할 줄은 몰랐다.
"휘이~! 죽인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어릴 적 내 꿈 중에 한때 공군 조종사가 포함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상당히 까다로운 신체 조건과 항상 비행 대기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꿈을 접었다.
그런 내 꿈을 갑자기 생각나게 만들어 버린 스카이나이트라는 존재.
스카이나이트가 와이번을 타고 왜 나를 위협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반드시 와이번을 조종하는 스카이나이트가 되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남는 게 시간. 결정했어! 새 한 마리 키워보는 거야!'
민증 검사도 없고 국가 자격증도 필요치 않는 이 세상.
마음이 내키는 대로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두두두두두두두!
'어라? 저건 또 뭐야?'
스카이나이트를 꿈꾸며 멋지게 하늘을 나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와중에 들리는 급박한 말발굽 소리.
"어딜 가나?"
1킬로 정도에 있는 산모퉁이를 돌면서 나타나는 일단의 기마.
선두에 깃발을 들고 달려오는 약 오십여 기의 기마.
무엇이 그리 바쁜지 초원을 질주하고 있었다.
"엥? 저것들은 또 왜 나에게 달려오는 것이야!"
와이번에 이어 새로이 등장한 기마병.
"저, 저놈, 또 오네!"
기마병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저 멀리 산등성이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와이번과 스카이나이트.
"아, 아니겠지, 설마 나 하나 때문에 저놈들이 몰려오는 것은."
이유가 없기에 아니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하는 것이 운명이 가진 못된 취미 중의 하나이다.
히이이이이이이잉!
힘차게 달려와 순식간에 100미터 정도의 거리를 남겨놓고 멈춰 선 기마대.
전투에라도 나가는 듯 전신 갑주로 무장한 기마대는 묵직한 기운을 토해내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한번 해보겠다는 거야?'
왜 저들이 몰려왔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분위기로 봐서는 맞장을 뜨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이거 너무하는 거 아냐?'
아무리 잘나가는 마검사라지만 놈들의 대가리 수는 무시할 수 없었다.
더욱이 풍기는 기도로 봐서는 얼마 전에 만났던 어중이떠중이 기마병이 아니라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기사들 같았다.
'혹시 그때 그 일 때문에....!'
번뜩 스치고 가는 또 하나의 불길한 예감.
얼마 전 나와 얀스를 공격했던 행정관이 보낸 기마병들 모습이 무성영화처럼 스르륵 스쳐 지나갔다.
'영주가 알았다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겠지.'
분명 없는 얘기 있는 얘기 다 만들어서 바보 같은 영주 놈을 구워삶았을 행정관.
아마도 지금 저들 머릿속에는 내가 영주를 무시한 겁대가리 상실한 마법사로 보일 것이다.
'맞네. 썩을.'
기마병들이 들고 있는 깃발.
영주성에서 보았던 자작가의 상징인 검은 방패 안에 그려져 있는 백마 두 마리와 똑같았다.
쉬이이이이이익.
1대 50, 아니, 새 한 마리까지 포함된 대결 구도.
해병대 출신도 아니건만 이건 너무한 숫자였다.
그리고 골치 아픈 현실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스카이나이트를 태운 와이번이 천천히 기사단과 내 중간 지점에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앉았다.
'크, 크다!'
하늘에 떠 있을 당시에도 좀 크다 싶었건만 눈으로 직접 본 와이번의 모습은 엄청난 크기였다.
길게 뻗은 두터운 뼈와 그 뼈를 지탱하고 있는 회색빛 두터운 가죽.
한쪽 날개 길이가 대충 보아도 10미터는 될 것 같았다, 몸통은 황소 십여 마리를 한데 엮어놓은 것처럼 두툼했다.
거기에 축구공만 한 빨간 눈동자와 톱니처럼 날카롭게 맞물린 이빨, 무쇠처럼 단단한 부리, 어지간한 것은 다 부숴 버릴 것 같은 검은 발톱.
보는 것만으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으아아! 이 난국을 어찌해야 하오리까!'
일반적인 기사라면 플라이 마법을 사용해서 하늘로 튀면 그만이었지만 와이번이 커다란 눈동자로 끔뻑끔뻑 바라보는 와중이라 몸을 날릴 수가 없었다.
'다 죽여?'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마나가 썩어나도 일반 병사도 아니고 전신 갑주로 무장한 기사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아직 무리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또 와이번이 문제였다.
"네놈이 그 겁없다는 흑마법사더냐!"
'흑, 흑마법사? 내가?'
일반적인 갑옷이 아니라 가죽과 은빛 쇠가 묘하게 조합된 갑옷이라 부르기 뭐한 것을 착용한 놈이 투구에 박힌 유리알 같은 것으로 나를 바라보며 준엄하게 꾸짖었다.
'영주다!'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라 생각하였건만 투구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피요르 자작령의 영주가 분명했다.
"제가 마법사는 맞습니다. 그러나 흑마법사가 아니라 정의와 진리를 탐구하는 백마법사입니다. 하하하!"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며 대화의 물꼬를 텄다.
"웃기는 소리! 네놈이 감히 내 영지의 기사와 병사들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기지 않았더냐! 아무리 마탑 소속 마법사라 해도 내 영지에서는 나의 법을 따라야 하거늘! 군마와 갑옷을 약탈하고 기사와 병사들의 명예를 더럽히다니! 그 죄, 내가 심판할 것이다!"
'단단히 뿔났군.'
짐작했던 대로 전후 사정도 모르고 행정관이 나에게 당해 거지꼴로 도망쳤던 놈들의 말을 믿는 영주.
괘씸했다.
모든 일이 영주가 영지를 잘못 다스려서 발생한 일이었건만 자신의 잘못은 모르고 나를 꾸짖고, 아니, 죽이려 하였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다는 것이오?"
아직 와이번과 스카이나이트의 위력을 모르지만 이대로 기죽은 채로 병신처럼 꾸중을 듣고 싶지 않았다.
천상천하 유아똥배짱!
죽을지라도 나는 내 마음대로 살 것이다.
"무엄하다! 마법사라지만 작위도 없는 자가 영주님께 망발을 뱉다니!"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다는 것을 모르는지 일장 훈계를 하는 기사 놈.,
놈이 들고 있는 두툼하고 긴 검에서 파란 오러 블레이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움하하하하하하하! 정말 웃기는 놈들이네. 똥 묻은 개가 밥풀 묻은 개한테 뭐라 한다더니 딱 그 꼴이야."
이 정도면 대화고 뭐고 필요없는 상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또, 똥 묻은 개? 이노오옴!!"
커다란 호통을 터뜨리는 기사.
놈의 몸뚱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일어나는 환상이 보였다.
'한번 붙어보지, 까짓!'
숫자에서 밀리고 와이번이라는 변수가 있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파파바바바바바박!
한바탕 드잡이를 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와이번이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로 떠올랐다.
'선방 때려?'
지금이 공격하기에는 최적의 기회.
그러나 나는 추접스러운 놈이 아니었다.
쉬이이익.
바람을 펄럭이는 것도 잠시, 몸이 떠오르자 와이번은 상당히 빠르게 허공으로 상승했다.
'일단 눈엣가시부터!'
와이번도 걱정이었지만 기사 50명이 마음에 걸렸다.
"공격하라!"
두두두두두두두두!
영주가 손을 쓰기 전에 전과를 올리고 싶었던지 기사들이 공격해 들어왔다.
'오늘 딱 걸렸어!'
대책없는 자신감이 뭉클뭉클 가슴에서 새싹처럼 피어올랐다.
"아이스 포그!"
어지간한 4서클 마법은 매일매일 쉬지 않고 메모라이즈해둔 상태.
다른 마법보다 마나 드레인 시간을 길게 잡고 대기의 마나를 차가운 안개로 바꾸어 버렸다.
'나 잡으면 용치~!'
내 주변에서 시작해서 순식간에 10미터에서 20미터까지 짙은 안개로 뒤덮여 가는 대지.
창!
탁!
'멀리 가서 놀다 오니라.'
히이잉.
말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내가 말 타고 기사들과 상대할 수는 없었다.
힘껏 말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쫓아냈다.
두두둑! 두두둑! 두두두두두두!
그사이 거리를 상당히 좁혀온 기사단.
짙은 안개 속에서도 놈들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러 블레이드가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흐흐, 맛 좀 봐라!'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사단.
마법사가 있었다면 이렇게 무식하게 공격해 오지는 않을 것이다.
축축한 습기로 물들어 있는 아이스 포그.
두 손을 들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라이트닝 웨이브!"
전격 마법 중 집중성이 아닌 확장성을 위하여 만들어진 공격 마법 라이트닝 웨이브.
찌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딕! 에어 실드!"
고기를 잡기 위하여 호수 안에 전기 고압선을 던져 놓는 기분이 이런 것이던가.
전격 마법을 던져 놓고 마법으로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안녕~!'
손을 흔들 사이도 없이 연속 펼쳐진 딕 마법.
몸이 쑤욱 땅 밑으로 사라졌다.
"크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히이이이이이이이이잉!
그 와중에 들려오는 기사들과 말의 처절한 비명.
아무리 오러 블레이드를 다루는 기사면 뭐 하겠는가.
무식하면 용감한 것이 아니라 멍청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을 것이다.
★★★★★★★★★★★★★★★★★★★★★
철퍼덕! 철퍼덕!
'대충 끝난 것인가?'
상당히 넓은 공간을 의식하며 펼친 전격 마법이었기에 죽을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갑옷을 타고 짜릿한 전기 고문 맛을 보았을 기사들과 말들.
대지 위로 육중한 말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파도처럼 들려왔다.
'문제는 와이번이라는 소리인데....'
만약 기사 놈들이 말이 아니라 검을 들고 십여 명씩 달려들었다면 상당히 고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맙게도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는 전우애로 똘똘 뭉친 밥통 기사단.
내가 펼친 마법 그물에 걸려 전격의 파도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충격을 맛보았을 것이다.
'마나가 충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딕 마법으로 땅속으로 파고들어 에어 실드로 공간을 확보하였지만 연속된 4서클 마법에 마나는 반 토막 난 상태.
마법이 활용성 면에서는 우수했지만 마나가 떨어지면 바로 개털이 되었다.
"놈을 찾아라!"
"이 근방에 있을 것이다! 샅샅이 찾아라!"
'어라? 움직이는 놈들도 있네?'
마나를 다룰 줄 아는 기사를 우습게 생각했던 내 잘못인가, 땅 위에서 발자국 소리 십여 개가 들려왔다.
"여기 땅이 수상합니다!"
"마나가 떨어졌을 것이다! 오러 블레이드로 땅을 찔러라!"
벌판에서 펼치는 아이스 포그 마법이 오래갈 수는 없었다.
더욱이 전격 마법에 의하여 차가운 속성이 사라져 버렸을 아이스 마법.
땅으로 파고든 자국을 발견한 기사들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제법이네.'
어떻게 마법을 벗어났는지 모르지만 기사들의 빠른 몸놀림이 놀라웠다.
"락 월!"
그대로 뛰어갔다가는 고슴도치가 될 것.
대지 계열 마법을 머리 위에 펼쳤다.
우르르르르르르!
머리 위를 덮고 있던 흙이 바위처럼 단단하게 변하며 사방 2미터 공간을 빙 둘러싸며 튀어 올랐다.
"헛!"
"이, 이게 뭐야!"
머리 위에서 공격을 준비하던 기사들의 놀란 목소리.
"타앗!"
순간 흙이 바위로 변해 사라진 공간으로 빛이 스며들어 왔다.
검을 들고 힘차게 땅을 박차며 락 월 마법으로 만들어진 장벽 위로 치솟았다.
"하하하! 이놈들아, 여기 있다!"
허공으로 치솟은 순간 보이는 광경.
시커멓게 그을린 갑옷을 입은 채 쓰러진 대부분의 기사, 말들과 달리 약 10여 명의 기사가 약하게 그울음이 묻은 갑옷을 걸치고 멀쩡히 서 있었다.
'마법 갑옷!'
이제야 상황이 이해가 갔다.
갑옷 위로 그려지는 선명한 마법진의 그림자들.
힘이 분산된 전격 마법을 방어할 정도의 마법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5서클 체인 라이트닝이었다면 모두 죽었겠지.'
생각할수록 아쉬운 5서클 마법.
입맛을 다시며 바닥에 착지를 하였다.
"거, 검까지 사용할 수 있단 말이더냐!"
나를 포위한 십여 명의 기사 중 한 명이 놀라 물었다.
"마법이 전공이고 검술은 부전공이거든."
"...마검사!"
누군가의 입에서 마검사란 말이 흘러나왔고, 그 순간 포위하던 기사들의 몸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크크, 이제야 알겠더냐? 그런데 어쩌지? 오늘 나 기분이 무지 안 좋거든."
구라를 깔 때는 확실히 까야 하는 법.
마나가 부족해 내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지만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기사들을 압박했다.
'아씨, 마법 갑옷 때문에 3서클 마법 따위는 통하지도 않을텐데.'
속으로는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남아 있는 마나를 끄집어내 오러 블레이드를 크고 화려하게 만들었다.
"음...."
몸이 굳어버린 기사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기사면 뭐 하겠는가.
기사라고 목숨이 두 개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쉭!
'헛!'
기사들이 전의가 꺾여 있던 그 순간, 갑자기 귀청을 파고드는 세밀한 소음 하나와 온몸의 털이 바짝 서게 하는 느낌.
터억!
급히 락 월로 만들어진 바위를 박찼다.
퍼어억!
'저, 저건 또 뭐야!'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분명한 어린아이 팔뚝 같은 2미터 길이의 은빛 창.
마법으로 만들어진 단단한 바위를 두부 꿰뚫듯 깊숙이 박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영주!'
스카이나이트라는 존재를 잊고 있었다.
급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헉!"
"모든 기사는 뒤로 물러서라!"
마나가 잔뜩 담긴 영주의 명령.
파바바박!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포위하고 있던 기사들이 뒤도 안돌아보고 몸을 뺐다.
"어, 어?"
'이게 아닌데....'
도망치는 기사들을 부를 수도 없는 상황.
쉬이이익!
'으아아아! 저 썩을 놈의 씨방새가!'
퍼버벅!
고개를 들어 쳐다볼 사이도 없었다.
무식한 창들이 바닥에 푹푹 박히는 굉음.
기사들이 도망친 방향을 향해 나도 달렸다.
'야! 같이 가!'
하다 하다 안 되면 도망치는 방법.
손자병법에서 말하던 최상의 계책이 아니던가.
★★★★★★★★★★★★★★★★★★★★★
"헉헉!"
'조낸 빠르다!'
마나를 발에 응집해서 달려나갔건만 나 못지않게 달리기를 잘하는 기사들.
매일 검을 들고 수련한 것이 아니라 도망치는 법부터 배운 것 같았다.
'이러다가는 도망치다 죽는다.'
약 7, 800미터 전방에 얕은 구룽 같은 숲이 있었지만 그 정도로는 도움이 안 될 것이 분명했다.
'저 잡놈의 새대가리가!'
하늘에서 말처럼 고삐를 움직이며 와이번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는 영주라는 자.
그리고 덩치 값 못하고 인간에게 조종당하는 커다란 통닭.
마음 같아서는 파이어 볼로 화끈하게 구워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어디로 도망가야 하나? 아나....'
뛰어다니느라 남아 있던 마나도 거의 다 사용한 상태.
다른 4서클 마법사였다면 진작 대자로 누워 '나 잡아 주쇼' 했을 것이다.
쇄애애액!
내가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이 은빛 창을 날리는 영주.
'마법 아이템이다!'
도망치는 와중에는 보지 못했던 은빛 창의 정체.
반짝이며 마나를 머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놈이!'
가슴속에서 부글거리며 치솟는 분노.
아무 죄도 없는 나를 이리 핍박하는 새와 그 주인 놈에게 살의가 물씬 일었다.
'와라! 이 개새끼야!'
검을 고쳐 잡고 날아오는 창을 노려보았다.
쉬이이익!
하늘에서 마나를 담아 날리는 창의 속도.
빛살이라 해도 무방했다.
그런 창을 향해 검을 들었다.
'지금!'
던지는 순간 몇 초 되지도 않았건만 공간을 압축해서 날아오는 마법 창.
남아 있는 마나를 긁어모아 힘껏 허공을 향해 후려쳤다.
쾅!
"커억!"
검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고, 내 몸은 후려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울컥.
먹먹하던 가슴을 뚫고 뿜어지는 붉은 핏덩이.
그 와중에도 분노와 객기가 섞인 반항심에 피가 끓어올랐다.
'죽여 버리겠어. 모두 다.'
자신들의 잘못은 생각하지도 않고 무작정 공격하는 영주라는 작자와 기사들.
겨우 마법사 한 명 상대하려고 집단 공격을 가해온 파렴치 한 자들.
난생처음 살기라는 것이 온 정신을 지배했다.
"후우!"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어느새 텅텅 비어버린 마나 홀.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을 유통하며 허리 부근에 만들어져 있던 마나 홀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확연히 줄어 있는 느낌.
'나 혼자만 안 죽는다! 네놈을....!'
호흡을 다듬으며 대자연의 기를 빨아들였다.
마나 홀이 비어버린 상태였기에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은 마나 호흡법을 펼쳐야 하는 순간!
자칫 여기서 더 무리를 했다가는 서클 붕괴까지 맞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죽인다....'
약 올리듯 내 앞 허공 50미터 상공에서 표표히 날개를 흔들며 정지 비행을 하고 있는 와이번과 영주.
머릿속에서 나에게 금지된 서클 공식을 끄집어내었다.
'바람의 마나여, 그대의 냉정한 입김을 원하오니 여기 임하여 나의 뜻을 따라주오! 거역할 수 없는 바람의 칼날! 분노의 냉정한 폭풍이여!'
손을 모으며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을 개방하고 자연의 대기를 모조리 끌어 모아 서클에 밀어 넣었다.
'크으....'
갈가리 찢겨지는 고통이 이런 맛이던가.
정수리에서 시작해서 발밑까지 정화되지 않은 마나가 휘돌며 마나 통로를 난도질하였다.
'늦, 늦었다! 이놈!'
나의 모습에서 이제야 이상함을 알아챘는지 와이번이 날개를 퍼덕이며 도망치려 하였다.
"크, 크크, 가라! 윈드 토네이도!"
5서클 풍계 마법 중 가장 강력한 마법.
4서클 윈드 커터보다 몇 배나 강력한 바람 칼날의 폭풍.
버언쩍!
두 손을 힘껏 뻗어 서클에 모인 마나와 의지를 놈에게 향하였다.
휘이이잉!
의지와 결합한 마나.
파란 마법의 빛으로 향하여 작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하지만 그것도 잠깐.
허공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며 바람 칼날의 폭풍은 와이번과 영주라는 작자를 덮쳐 갔다.
쿠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처음으로 들어보는 와이번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
퍼버버벙!
'시, 실드 마법!'
놀랍게도 와이번의 몸에서 거대한 실드 마법이 펼쳐지며 윈드 토네이도 마법을 막아냈다.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적!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실드를 박살 낸 분노의 마법이 와이번을 덮쳤다.
빙글빙글.
실드 때문에 상당히 반감된 공격력이지만 5서클 마법은 강력하기 그지없는 위력.
와이번은 날개에 상처를 입었는지 휘청거리며 상공을 빙글빙글 돌더니 중심을 잡지 못하고 지상으로 추락했다.
"헉, 헉헉!"
거친 숨이 몰아쉬어졌다.
서클 법칙을 무시한 마법의 사용.
방금 전까지 갈가리 찢겨질 것 같던 마나 통로들의 고통이 거짓말처럼 멈춰 있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서클의 묵직한 느낌.
'5, 5서클?'
놀랍게도 네 줄이 아닌 다섯 줄의 서클이 허리 부근을 휘돌고 있었다.
'썩을, 진작 오를 것이지.'
목숨을 버릴 정도의 극한 상황에 이르러서야 얻어지는 깨달음.
벌써 두 번째였다.
쿠웅!
5서클에 놀란 충격에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사이, 와이번이 거대한 동체를 땅바닥에 착지시키며 파닥거리고 있었다.
스윽.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기사들의 검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저벅저벅.
그리고 눈빛을 빛내며 약 1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와이번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자, 자이...건! 자이건! 정신 차려, 자이건!"
다피스 왕국의 피요르 영지의 영주이자 자작의 작위를 소유한 다니안.
자신의 와이번인 자이건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평범한 기사였던 그를 오늘에 있게 만들어준 일등 공신 와이번.
자이건이 있었기에 자작의 작위와 함께 영지도 하사받았으며, 오늘날에는 왕실 근위 스카이나이트 기사단의 단원까지 될 수 있었다.
그런 자신의 사랑하는 와이번이 흑마법사의 강력한 마법에 맞아 상처를 입어 퍼덕이고 있었다.
단단하여 어지간한 무기로는 상처도 낼 수 없는 날개가 수십여 조각으로 찢겨져 너덜거렸으며, 자동 실드 마법진이 새겨져 있는 갑옷도 군데군데 상처가 난 와이번.
고통에 찬 구슬픈 눈동자로 자신의 주인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크윽, 자이건...."
가족보다 더 사랑하며 애지중지했던 와이번.
처음 스카이나이트 기사 학교를 졸업할 때 자이건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영광도 없었을 터.
다니안 자작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자이건과 함께 한 15년의 세월.
이런 패배와 상처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프더냐? 고작 그깟 와이번 한 마리 때문에 영주라는 작자가 눈물을 흘릴 정도더냐."
어느새 다가왔는지 마검사가 분명한 검은 머리의 흑마법사가 비아냥거렸다.
"죽여 버리겠어!"
차앙!
스카이나이트에게 허락된 가벼운 롱 소드를 빼어 든 다니안 자작.
마나를 끌어올려 오러 블레이드를 펼쳐 놈의 몸을 베어갔다.
캉!
"컥!"
하지만 감정의 기복에 빠져 있는 다이안의 검을 단 한 수에 날려 버리는 흑마법사.
"웃기는 놈일세. 네놈이 죽인다고 내가 죽어줄 것 같나?"
차갑고 분노에 차 있는 흑마법사.
"어, 어떻게 할 것이더냐!"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입가에 살소를 머금은 흑마법사의 모습 속에서 불길함을 느낀 다이안 자작.
와이번을 향해 검을 치켜드는 놈의 모습에 심장이 얼어붙는 충격을 받았다.
"왜? 쉽게 죽일까 봐? 걱정하지 마. 그리 안 해도 궁금했거든. 와이번 가죽이 얼마나 단단한지, 저 몸통 속에 오늘 먹은 고기가 몇 덩어리인가 말이야."
잔혹한 말을 서슴없이 뱉어내는 흑마법사.
"차, 차라리 날 죽여라!"
"그것도 걱정하지 마. 영주라는 작자가 자기 영지민들이 굶는지, 몬스터에게 뒈지는지 신경도 안 쓰는 놈인데 살아서 뭐 하게."
까칠한 흑마법사의 말이 비수가 되어 다니안 자작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 그게 무슨 말이더냐! 내 영지는 다른 영지보다 살기 좋은 곳이다! 세금도 낮고 영지민들도 다들 만족하고 살고 있는데 무슨 헛소리더냐!"
기사일 당시부터 악독 귀족이 되지 말자고 다짐했던 다니안 자작이었기에 흑마법사의 말에 발끈했다.
죽어도 잃어버릴 수 없는 명예와 자존심.
다니안은 자신의 양심에 떳떳했다.
★★★★★★★★★★★★★★★★★★★★★
'어라, 이놈 보게?'
거짓말 탐지기를 들이대도 진실로 판명될 것 같은 영주라는 작자의 말.
사실 처음 인상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아, 고민되네.'
건전한 21세기 문명 교육을 받고 자란 내가 살인을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디 몇 군데 작살을 내 병신 정도는 만들 각오는 되어 있었다.
"후후, 그 거짓말을 믿으란 말이더냐? 자르 산맥과 가까운 대부분의 마을은 기사나 영지 병사들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농사지을 손으로 검을 들고 스스로 목숨을 구하거나 죽어가거늘, 영주라는 작자가 뭐 잘났다고 그러는 것이더냐!"
"그 점은 내가 할 말이 없다. 얼마 되지도 않는 기사와 병사들로는 넓은 영지를 구할 수 없다."
순순히 인정하는 영주.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고뇌의 표정에 고민은 깊어갔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어차피 평민으로 태어난 죄니까. 하지만 그런 마을들에서 세금은 왜 이리 많이 걷는 것이더냐? 네가 나를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루나 마을의 세금을 내러 갔던 사람이 바로 나다."
"알고 있다. 흑마법사... 너의 검은 머리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래? 그럼 말이 쉽게 끝나겠네. 당시 루나 마을이 낸 세금은 네가 알고 있는 30골드가 아니다."
"뭐, 뭐라고? 30골드가 아니라고?"
내 말에 놀라 묻는 영주.
'이 자식, 순진한 거야, 바보야?'
"영주가 그것도 몰랐더냐? 뭐, 작은 마을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똑독히 들어라. 네놈이 수도에 가서 놀고 자빠졌을 때, 네 영지민들은 돼지 같은 행정관 놈과 상인, 기사들에게 피고름을 털리고 있었다. 네놈이 알고 있던 루나 마을이 30골드가 아닌 50골드였고, 다른 마을도 다들 그런다고 그러더라, 이 바보 같은 영주 놈아!"
"허억! 5, 50골드? 30골드가 아니란 말이더냐!"
"후후, 몰랐겠지. 그러니까 오늘 여기까지 쫓아와 망신을 당하고 있는 진짜 이유도 모르는 것이지."
"....."
나의 빈정거림에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영주라는 작자.
"네가 한 말이 진실이더냐?"
나직한 목소리로 진실을 물어왔다.
"정 궁금하면 저 잘난 새대가리를 타고 각 마을을 돌며 물어보거라. 아니지. 네놈 옆에 서 있는 기사 놈들에게 묻는 것이 더 빠르겠다."
영주의 명에 도망쳤던 기사들이 어느새 주군 옆으로 다가와 검을 빼 들고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꼴에 기사라고 자신들의 주군을 보호하였다.
"루베스 경!"
"주, 주군, 하명하시옵소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기사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여기 있는 마법사의 말이 사실이더냐? 행정관이 나 몰래 세금을 더 거둬들였단 말이더냐?"
"그, 그것이...."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는 루베스라는 기사.
"루, 루베스, 나의 친구여. 너에게 영지를 맡기고 떠난 내가... 잘못이더냐."
"....."
흐느끼는 듯한 영주의 목소리.
루베스라 불리는 기사는 그런 영주의 친구인 것 같았다.
"모두 알고 있었단 말이더냐. 크으, 영지가 젊은 날 너와 내가 그리 경멸하던 가혹한 귀족의 수탈의 장이 된 것을 모두 알고 있었던 말이더냐!"
"주, 주군, 저희를 죽여주시옵소서!"
"크윽!"
철컹.
영주의 분노에 찬 물음에 기사들 모두 무릎을 꿇었다.
"아, 신이시여....!"
하늘을 바라보는 영주.
투구가 벗겨진 그의 눈에서 뜨거운 사나이의 눈물이 주루루 빗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나....'
분위기가 요상하게 돌아갔다.
들어보니 루베스라는 친구에게 영지를 맡기고 다른 곳으로 떠나 있었던 영주.
영주가 없는 동안 행정관을 비롯한 기사들 모두 제대로 한탕 해먹은 것 같았다.
'아쉽지만 이쯤에서 끝내야겠군.'
마음 같아서는 저 새대가리와 영주에게 뜨거운 파이어 볼 마법을 보여주고 싶었건만 영주 놈이 불쌍한 맘이 들었다.
믿었던 자의 배신.
딱 죽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남자란 모름지기 집안을 다스리고, 그다음 국가와 나라를 위하여 일해야 하는 법. 어찌 제 집안도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국왕을 보필하고 나아가 왕국을 위해 검을 들어 천할흘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딱 어울리는 한문 시간에 배운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라는 구절.
준엄하게 영주를 꾸짖었다.
"마법사,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눈물을 멈추고 내 이름을 묻는 영주.
"카이어."
짧은 대답.
"카이어, 기억하겠소. 오늘 받았던 모든 것을 잊지 않겠소."
'이거 좋은 일이야, 나쁜 일이야?'
귀족과 생사의 댁뎔을 벌이고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애마, 아니, 애조(?)를 때려잡은 마법사.
거기에다 자신의 치부까지 까발린 나에게 어떤 감정을 품을지 사뭇 기대가 되었다.
'까짓것, 마음대로 하라고 해. 이제 두려울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사실 나도 영주라는 작자가 고마웠다.
죽을 고비를 당해서야 이룰 수 있었던 5서클의 벽.
'이제는 빠져줘야겠군.'
5서클에 이루었지만 너무 극한 상황에서 얻은 것이라 서클과 마나가 불완전하였다.
일단 안전한 곳에 가서 서클과 마나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볼일 없으면 이만 가보겠소."
볼일이 있을 턱이 없었다.
자신들 눈앞에서 제법 레벨이 높아 보이는 와이번을 때려잡은 나.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을 것이다.
'뭘 봐! 썅! 눈깔을 쪽 빨아버릴라!'
영주와 기사들에게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몸뚱이에 흠집이 가득한 와이번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런 와이번의 눈두덩을 살의를 담아 바라보았다.
꾸구구구!
'자식, 까불고 있어. 닭대가리 주제에.'
새는 곧 닭이라 생각하는 나에게 덩치 큰 프라이드치킨 이상의 의미가 없는 와이번.
만물의 영장 인간에게 도전하는 족속들은 패서라도 교육을 단단히 시켜야 한다는 주의였다.
"아! 그리고 이 검은 내가 가져가겠소. 내 검보다는 못하지만 어쩌겠소. 사람 좋은 내가 손해를 감수해야지."
'흐흐, 손에 딱 맞네.'
촌장 어르신의 애검은 영주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맛이 가버렸다.
그리고 조금 전 와이번을 가죽을 벗기려 들었던 기사들의 크고 두툼한 검을 챙겼다.
스윽스윽.
사람들이 보고 있는 와중에 이제야 마법 충격에서 깨어나고 있는 기사들에게서 질 좋은 검집을 풀어냈다.
'길이는 1미터 30 정도, 무게는 대출 4킬로? 딱 좋네.'
날이 잘 서 있는 예검은 아니지만 검신이 단단하고 손에 묵직하게 와 닿는 검의 감촉.
마음에 쏙 들었다.
"하아, 날 좋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하늘 한 번 바라보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내 말에게 다가갔다.
초장부터 드잡이를 했던 내 첫 여행길.
앞으로 그리 평탄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문뜩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