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수습사제 아르미스
"크으!"
"으으!"
'흐윽! 바로 이 맛이야!'
자메르가 묵고 있는 숲의 휴식터라 불리는 여관에 들어가 바로 주문한 시원한 맥주와 여러 가지 안주.
어떻게 처리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직 더운 날이건만 입 안이 얼얼할 정도로 차가운 맥주가 대령되었고, 나는 맥주 한잔을 시원하게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짜릿하고 강렬한 향취의 그 맛.
홀짝거리며 아버지 몰래 마셨던 대한민국 맥주하고는 차원이 다른, 깊숙한 풍미가 제대로 발효된 맥주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 잔 더 마셔도 될까?"
'언제 마신 거야?'
내가 두 모금을 마시는 사이 커다란 나무잔에 담겨 있는 맥주를 모두 마셔 버린 얀스가 입맛을 다셨다.
"하하, 그러십시오. 주인장, 여기 맥주 한 잔 더!"
나를 보고 물었건만 자메르가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주문 해 주었다.
'좋다~!'
맥주 한 잔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온 기분이 새로웠다.
어느 정도 실력을 배양했다면 다음 목표는 더 넓은 세상.
이왕 건달프 사부의 고향에 온 김에 제대로 유람하고 싶었다.
"8골드면 거금인데 왜 사시려는 것입니까?"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자메르에게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대충 4골드 이상이면 대박이라 생각했건만 8골드를 제시한 자메르.
대형 상단에 근무하는 자가 손해볼 짓은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식으로 인사하지. 자메르 바인스. 루비스 상단의 열두지배상인 중 한 명일세."
'지배상인?'
"다음 달은 풍요의 여신 세피르님의 달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세피르님은 풍요의 여신도 되지만 축제의 여신도 되시네."
'알긴 뭘 알아. 개뿔.'
마을 사람들이야 매일매일 먹고살기 바빴기에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나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마법과 검술에 시간을 투자하느라 칼리얀 대륙에 대하여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또한 이달부터 다음 달까지 귀족들은 정규 세금을 거둬들이는 시기이네."
"아!"
이제야 이해가 갔다.
'결론은, 신들은 놀라고 만들어놓은 정식 휴가일에 귀족들이 세금까지 거둬들이니 쓸 만한 물건들이 높은 값에 거래된다 이거지?'
"이해가 갔나?"
"뭐, 대충 감은 잡았습니다."
"자네는 빨리 이해할 줄 알았네."
이제 갓 30대를 넘은 나이에 말투는 오십대의 중후한 아저씨 필이 나는 자메르.
'마나 냄사가 난다. 호오, 마법사?'
마나 스캔을 해보지 않았지만 확연히 느껴지는 마나의 냄새.
상인임에도 무언가 비밀이 많은 자였다.
"방금 전, 사람들 말을 듣자 하니 본래 이런 시골 영지까지는 오지 않는 것 같던데...."
말을 줄이며 자메르를 떠봤다.
"본래는 그랬지. 각 영지에 파견된 소상인들이 구입한 물거을 지정한 장소에서 구매하여 필요한 귀족들에게 팔면 그만이었지. 그런데 올해는 유난히 쓸 만한 특산품을 구하기가 힘들었네. 특히 이곳 다피스 왕국에서 주로 생산되는 마디르와 샤리프 버섯, 루디 버섯, 리콤 차의 수매가 지지부진했네. 영주들이 몬스터와 마수 토벌에 힘을 집중하지 않고 국왕 선출 문제로 파벌을 형성하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었네."
필요 이상의 많은 정보를 말해주는 자메르였다.
'국왕 선출? 그럼 내전이라도 일어난다는 거야?'
소설에서 많이 읽었던 이야기의 구조.
"내전이 일어날까요?"
"음... 아마 그 정도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야. 다피스 왕국은 소국인데다가 주변에 강대국도 많기에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지는 않을 것이야."
'머리 아프다. 내가 걱정할 일도 아닌데 뭐. 그런데 마디르라고 했지?'
구입하기가 어렵다는 마디르.
내가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어 잡아봤으니 그 수확의 어려움이야 말할 것도 없다.
워낙 힘이 좋은 놈이라 어지간한 배는 뒤집어 버릴 것이고, 마법사나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기사가 천한 어부질을 할 것도 아닐 테니 평민들만의 힘으로는 잡기 어려울 것이다.
"휴우, 처음 본 자네에게 별 이야기를 다 하는군. 오늘 고마웠네. 자네 덕분에 최상품 샤리프 버섯이라도 얻게 되어 이곳에 온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었네."
냉철한 상인의 모습이었건만 그 속마음은 다른 일반 사람들처럼 걱정이 많은 것 같았다.
'대기업 회장이나 거지나 하루 세 끼 먹고사는 게 힘들기는 마찬가지라더니.'
시골에 계시는 할아버지가 항상 하시는 말씀.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밥 먹고 똥 싸는 것은 다 똑같다고 하셨다.
다만 노력 여하에 따라 좋은 밥 먹고 황금 똥을 싸느냐, 거친 밥 먹고 변비 똥을 싸느냐의 문제만 있다 하셨다.
"마디르를 잡아도 그 유통 방법이 문제가 아닙니까? 겨울이 아닌지라 쉽게 상하기도 할 텐데...."
다시 궁금한 것을 낚시질하며 던졌다.
"과거부터 마디르가 이곳 타일만 해역을 지나가는 석 달동안의 이 시기에는 마디르를 잡을 수 있는 각 어촌에 마법 냉동고와 함께 상인들을 상주시켰네. 그런데 올해는 갑자기 바다 몬스터들이 극렬하게 활동하는 바람에 바다에 나갈 수 있는 날이 별로 없다는 것이야. 아무리 바다에 죽고 사는 어부들일지라도 눈 뜨고 목숨을 잃고 싶지 않은 건 다 똑같은 마음일 것이네."
"맞아. 십 년 전만 해도 우리 마을에도 이 시기에는 상인들이 마법 냉동고를 가지고 와서 죽치고 있었지. 위험해서 몇 마리 잡지도 못했지만 마디르를 잡는 날은 마을 축제일이 되었지."
맥주를 홀짝이던 얀스가 한마디 거들었다.
'마법 냉동고. 그래, 이곳에는 마법이 있었지?'
21세기에 전기냉장고가 있다면 이곳 세계에는 마법이 있었다.
'흐흐, 그리고 나는 천재 마법사고.'
갑자기 만나게 된 루비스 상단의 자메르 상인.
신이 주신 인연임이 분명했다.
"그럼 올해는 가격이 제법 비싸겠네요?"
"100킬로 이상 나가는 특품은 한 마리에 35골드까지 받을 수 있지. 바다가 접하지 않는 내륙지방의 귀족들은 특히 연회에 마디르 요리를 준비하는 것이 필수이니 말이야."
'오오오오오! 35골드!'
마을 앞바다에 펄떡펄떡 집 나온 병아리처럼 뛰어노는 참치가 30골드 이상이라는 말에 입이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몇 골듣가 아니라 3, 35골드요?"
나에게 몇 골드라는 잘못된 정보를 알려주었던 얀스도 놀랐다.
"그렇습니다. 워낙 물건이 달리다 보니 부르는 게 값인 상황입니다."
대상단의 제법 지위가 있는 자이건만 시골 농부인 얀스에게도 경어를 사용하는 자메르.
배포도 크고 성품도 쓸 만하였다.
"며칠 안에 그 마법 냉동고라는 것을 몇 개나 구할 수 있습니까?"
"마법 냉동고? 마디르를 구할 수만 있다면 수백 개도 바로 대령할 수 있지. 그런데 그건 왜 묻나?"
'묻긴 왜 물어, 한밑천 당기려고 그러지.'
"잘하면 마디르를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속마음과 달리 맥주를 홀짝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정, 정말인가?"
여태 침착함을 유지하던 자메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큰 소리로 물었다.
"100킬로짜리 이상으로 한 마리당 40골드. 물론 상처도 별로 없는 최상품으로. 어떻습니까?"
"45, 아니, 그 정도 물건이라면 50골드를 쳐주겠네! 정말 구해줄 수 있는가?"
'와우! 화끈하시네!'
생각지도 못한 대박 신화였다.
일개 참치 한 마리 가격이 마을 세금과 맞먹는 현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귀족들 영지에 루나 마을 같은 곳은 수백 곳도 더 있을 것이고, 돈보다는 명예를 중요시할 것이니 돈이 돈이 아닐 것이다.
'나도 영주 한번 해봐?'
내 꿈인 파라다이스의 이상향과 비슷한 영주라는 작위.
'그래, 왜 여태 그걸 생각 못했을까!'
지구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최소 사부와 같은 경지인 8서클에 이르러야 가능할 것이 분명한 현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깨달음을 무의미하게 기다리느니 이곳 대륙에 파라다이스, 나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갑자기 가슴이 뭉클거리며 희망이 수돗물처럼 콸콸 샘솟았다.
"장담은 못하겠지만 한번 구해보겠습니다. 그것보다 먼저 샤리프 버섯 값을 주시겠습니까? 세금도 내야 하고 이것저것 살 것도 많은데...."
"하하, 물론이지! 테리슨, 돈을 가져와라."
"네, 지배상인님!"
여관 안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상인들 중 한 명이 큰소리로 대답하며 다가왔다.
"총 59개. 골드씩 계산에, 자잘한 물건도 많으니 한 개 더 구입한 셈치고 480골드로 하시죠?"
"그러도록 하지. 물건은 확인됐으니 480골드 지불해라."
"알겠습니다."
철그렁.
자메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묵직한 주머니를 품에서 꺼내는 테리슨이라는 자.
주머니를 열고 정확히 황금빛 동전을 꺼내어 세기 시작했다.
'돈, 돈이다! 그것도 골드! 움하하하하하하하!'
전생에 돈에 환장해서 죽은 기억이 없건만 누런빛을 발하는 황금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곱다고.
★★★★★★★★★★★★★★★★★★★★★
"카, 카이어, 꿈인가, 생시인가?"
난생처음 만져 보는 거금을 품에 껴안고 사방을 경계하며 벌벌 떠는 얀스.
'이 정도를 가지고 놀라시기는.'
내 목숨 값으로는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였다.
어찌 세상에 하나뿐인 내 생명 값이 골드 몇 푼이겠는가.
"저곳이 행정관 건물이죠?"
"맞는 것 같네."
'영주라는 작자는 왕성 저택에 가서 몇 년째 코빼기도 안 보인다 이거지? 그리고 행정관이라는 놈이 마음대로 영지를 해 처먹고 말이야.'
샤리프 가격을 계산 받은 후, 이 영지에 대한 정보를 자메르를 비롯한 여관 주인에게 습득했다.
'썩을 놈, 행정관이면 공무원에 불과하거늘 다론 상단과 짜고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다 이거지?'
더 열받는 것은 이 행정관이라는 자가 영지민들의 목숨에는 관심없고 다론이라는 상단과 짜고 영지민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멈춰라! 어디서 오는 누구더냐?!"
'기, 기사! 드디어 기사를 보는구나!'
성 중심부에 자리 잡은 담장이 높게 둘러쳐진 영주의 저택 앞에 존재하는 행정관 건물.
2층 건물 앞의 입구는 탄탄한 은빛 갑옷을 착용한 기사와 병사 십여 명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카이어, 무조건 고개를 숙이게. 기사 나리께 잘못 보이면 바로 죽음이야."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경고를 날리는 얀스.
'007 살인면허도 아니고....'
두려움에 떠는 얀스의 모습에서 거짓이 아님을 확인하고 나도 고개를 숙였다.
"저, 저희들은 세금을 내러 온 루나 마을 사람들입니다요."
"루나 마을? 그 마을이 아직도 남아 있나?"
성문의 병사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기사의 반응.
"들어가라."
"감사합니다요, 나리."
'에계, 뭐야? 기사라는 작자의 마나가.'
행정관을 수비하는 기사의 몸에서 발산되는 쥐꼬리만 한 마나량.
스캔을 해볼 것도 없이 마나량이 적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런 기사라면 눈감고도 상대하겠다.'
자만심이 아니라 기사라고 해도 감흥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얀스를 따라 행정관이라 불리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루나 마을에서 왔다고?"
"그, 그렇습니다요."
'저 작자가 행정관?'
배 나오고 쥐눈의 간신배를 상상했건만 눈에 보이는 행정관이라는 자는 사십대 중반의 기사였다.
'마나가 제법이다.'
밖에 서 있는 기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기운을 풍겨내는 행정관.
집무실에서조차도 허리에 검을 찬 채 사각턱에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전형적인 기사의 모습이었다.
"음, 영지에 힘이 모자라 보살피지 못하였건만 아직까지 마을을 유지하고 있다니 다행이군."
'얼라리요? 행정관 맞아?'
생각지도 못한 착한 말을 뱉어내는 행정관.
말투에 정말 루나 마을을 걱정하는 진심이 배어 있었다.
"아닙니다요. 자랑스러운 피요르 영지 주민이라는 것만으로도 신께 감사드릴 뿐입니다요."
걱정과 달리 아부도 곁들이며 말을 잘 이어가는 얀스.
촌장님이 골라 보낸 이유가 이것이었나 보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올해 책정된 세금이... 여기 있군."
행정관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말하는 품새가 기품있고 행동 하나하나에 귀족다운 무게감이 있는 남자.
"총 30골드로 적혀 있는데, 맞는가?"
"네? 3, 30골드요?"
서류 한 장을 집어 세금이 30골드라 말하는 행정관.
당연히 얀스는 당황하였다.
"아닌가? 마을 주민이 200여 명 정도에 소출은 얼마 되지도 않고... 독립 마을이라 세율을 30%로 잡았건만 너무 많은가?"
'저 자식이 사람 놀리나.'
올봄에 병사들을 보내어 50골드의 세금을 내라 명령하였다는 행정관.
얀스와 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희 마을은...."
덜컹.
얀스가 막 50골드라는 말을 꺼내려는 순간, 우리가 들어섰던 문이 활짝 열렸다.
"헉! 영, 영주님! 언제 오셨습니까!"
'뭐, 뭐! 영주?!'
문을 열고 들어서던, 배가 씰룩 나오고 쥐눈에 욕심이 온몸에서 줄줄 흐르는 자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영주라는 이름.
"뭣들 하느냐!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있느냐! 네놈들은 영주님 모습도 모른단 말이더냐!"
방귀 뀐 놈이 성 낸다고, 서 있는 우리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간신배 같은 놈.
"하하! 트리모 행정관, 괜찮네. 오랫동안 수도에 머문 내 잘못이지."
"영주님을 뵈옵니다!"
얀스가 무릎을 꿇고 왕을 대하듯 고개를 바닥에 대었다.
구깃구깃.
동시에 오른손으로 내 바지를 잡고 끌어내렸다.
"여, 영주님을 뵈옵니다."
'으아아! 자존심 상해.'
설날에 세뱃돈을 받기 위하여 큰절 올린 것 빼고는 태어나 고개를 이리 숙여본 적이 없는 나.
영주라는 자에게 고개를 숙이며 최대한의 예를 표해야 했다.
'씨이! 영주, 반드시 먹고야 말리라!'
영주가 되기 위한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겼다.
평민 레벨로는 어디 가서 고개만 숙이고 다녀야 함이 분명한 상황.
절대 아스팔트 껌딱지처럼 바짝 엎드려 비굴하게 살 수는 없었다.
"그런데 트리모 행정관, 루나 마을에 올해 책정된 세금이 30골드가 아닌가?"
두툼한 서류를 들고 세금에 대하여 묻는 영주.
"맞, 맞습니다요. 자비로우신 영주님의 은혜로 독립 마을임에도 세율을 30%로 책정하였습니다요."
잠시 당황하더니 손을 비비며 뻔뻔하게 대답하는 트리모라는 자.
'확 불어버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영주 몰래 엄청난 세금을 삥땅치고 있음이 확실했다.
"자네들, 영주님 앞에서 무슨 말을 했는가?"
고개 숙인 얀스와 나를 향해 힘이 잔뜩 들어간 채 꾸중을 하는 트리모.
"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네."
"그렇습니까요. 헤헤. 무지렁이 같은 자들이 가끔씩 헛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말입니다."
'무지렁이?!'
천하의 강혁을 일개 지렁이 사촌으로 만들어 버리는 개 잡종 같은 행정관 놈.
놈의 두툼하게 살찐 얼굴을 기억 속에 깊숙이 짱박아두었다.
"세금은 30골드가 맞네. 여기 트리모 행정관에게 납부하게."
"영주님, 저택으로 가시려는 것입니까?"
"그래야지. 자이건 녀석이 밥을 먹을 시간인데 하인들이 놀랄 수도 있으니 그래야지."
"그럼 잠시 후에 찾아뵙겠습니다요."
"그럼 수고하게."
"안녕히 가십시오, 영주님."
어떤 놈인지 몰라도 영주가 밥을 챙겨줘야 할 놈이 있는 것 같았다.
뚜벅뚜벅.
영주는 그렇게 열린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루나 마을에서 왔다고?"
"네, 네, 영주, 아니, 행정관님."
영주 때문에 혼이 반쯤 나간 얀스가 황급히 대답했다.
"자네들이 방금 전 들었던 말은 어디 가서 발설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야. 그리고 세금은 50골드라네. 자비로우신 영주님이, 있어도 도움도 안 되는 자네들 때문에 세금을 적게 거둬서 영지 운영이 힘들어. 그래서 내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으니 그리 알게."
'와아! 이렇게 뻔뻔하다니!'
얼굴에 강철판을 용접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20골드라는 세금을 더 거둬들이는 행정관 트리모.
듣기로 영지에 수백 개의 마을이 있다 했으니 착복하는 돈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놈, 기다려라. 내가 이몽룡은 아니더라도 네놈은 꼭 골로 보내 버릴 것이야!'
어디 할 짓이 없어서 불쌍한 평민들 등골을 빼먹는단 말인가.
"여기 있습니다요, 나리."
준비한 50골드를 내미는 얀스.
나에게는 몇 푼 안 되는 금액이지만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마을 사람들의 피땀이 저기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네들이 애써 찾아간 라이안을 내쳤는가?"
"라이안이라 하심은...."
"이런, 기억을 못하고 있군. 내가 여기까지 올 수고를 덜어주기 위하여 다론 상단의 라이안을 보냈건만 매정히 거절했다고 하던데... 지켜보겠네."
'썩을 놈. 대놓고 강탈에 협박까지. 넌 죽었다고 복창해라.'
오성그룹 황태자 황성택보다 더 싸가지없는 놈을 처음으로 발견한 기쁨(?)에 온몸의 살이 떨렸다.
'웃어? 그래, 그 웃음, 어디까지 가는가 보자.'
돈을 세면서 흐뭇한 미소를 머금는 트리모 행정관.
그 모습이 나에게 수모를 당한 다론 상단의 라이안이라는 놈과 똑같이 생겨먹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이 물품을 모두 구입해 주십시오."
"이 물품을 다?"'
영주와 행정관을 만난 뒤, 바로 자메르가 머물고 있는 숲의 휴식터로 돌아왔다.
그리고 종이와 펜을 빌려 내가 생각하고 있던 물품들을 빼곡히 적어서 내밀었다.
"마차 다섯 대를 포함한 말이 열 마리에 곱게 빻은 밀가루가 400포대, 암수가 적당히 섞여 있는 소와 양, 돼지가 각각 20마리, 닭이 100여 마리, 튼튼한 가죽 갑옷이 50벌, 활과 창, 검이 100여 개, 옷감이 여러 색감으로 300인분, 못과 같은 각종 자재에 농기구에 씨앗들까지.... 마지막으로 차가운 맥주를 만들어내는 마법 저장고.... 자네, 마을이라도 건설하나?"
쭉 읽어 내려가던 자메르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하하, 가격은 잘 부탁드립니다. 혼자 구입하려 했더니 시간도 많이 걸릴 것 같고...."
얀스를 데리고 저 물건을 사려면 하루로는 어림없고 며칠이 걸릴지도 몰랐다.
거기에 상인들에게 눈두덩을 맞을 것은 뻔한 이치.
얼굴 좀 팔리고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속편했다.
"처음 볼 때부터 평범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대단하군. 어떤가, 상인이 될 생각은 없는가?"
'엥? 또 스카우트야? 좌우지간 이놈의 인기란.'
"싫습니다."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최소 영주다. 나머지는 다 필요없어.'
잃어버린 파라다이스를 찾는 것이 내 일차 목표.
다른 하잘것없는 직업들은 눈에 차지 않았다.
"내 밑으로 들어온다면 빠른 시간 안에 자네를 지배상인까지 키워주겠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헉! 지, 지배상인!"
자메르의 말에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테리슨이라는 자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제법 괜찮은 자리인 것 같았다.
"그래도 싫습니다."
"왜 싫다는 것인가? 자네 인생에 다시없을 기회인 것을."
자메르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 꿈은 따로 있으니까요."
"꿈이 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
똑똑한 상인인지라 내 뜻을 알아챘다.
"대신 이번 나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주게."
"저희 집 가훈이 정직입니다!"
"정직이 가훈이라.... 하하! 상인의 흐르는 집안일세그려."
나이도 얼마 먹지 않았건만 애늙은이 같은 말투를 사용하는 자메르.
"그럼 모레 아침에 출발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레 아침까지?"
"아! 그리고 마디르를 얻고 싶다면 그 시간에 여기서 출발 하셔야 할 것입니다."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 했다.
질질 끌어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알았네. 자네를 믿고 한번 투자해 보지."
"자메르님... 하지만...."
"루비스 상단 지배상인의 결정이네. 즉시 이 영지와 이 근방에 있는 모든 마법 냉동고를 준비하게."
"네, 지배상인님!"
토를 달던 테리슨이라는 자가 지배상인의 명령이라는 말에 고개를 숙였다.
저리 규율이 엄하기에 대륙오대상단에 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포션인가?'
하나에 몇 골드씩 한다는 포션.
촌장은 최소 열 개를 말했지만 나는 그 이상의 것을 생각했다.
배고픈 사람에게 고기를 잡아주면 하루는 행복할 수 있지만,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 평생 굶지 않는다 하였다.
'신전이라.... 쩝.'
가장 오늘의 난코스라 할 수 있는 신전.
일단 부딪쳐 봐야 할 것 같았다.
★★★★★★★★★★★★★★★★★★★★★
'오! 제법인데?'
피요르 자작성에 자리 잡은 신전은 자비의 여신 네르안님의 나와바리라 하였다.
그리고 내 눈에 보이는, 아치형 기둥 십여 개가 받치고 있는 신전.
고대 그리스의 신전처럼 예쁘장하고 웅장한 것이 봐줄 만하였다.
'신전 포션이라 함은 신의 성력을 소유한 신관의 축복을 담은 성수로, 치유력과 항마력을 소유한 만병통치약이라 이거지.'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마법사용 포션 제조 방법보다 원가가 훨씬 저렴한 신전 포션.
마법사용 포션은 트롤의 피가 주가 되는 고급 재료가 들어가는 고가의 창조물인데다 가끔씩 부작용도 발생하는 비추천 품목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어지간하면 힐 마법으로 대신하였다.
'따지고 보면 성기사도 괜찮은 직업 중 하나야. 잘만 배워서 지구로 돌아가면 교주로 등극할 수도 있겠지.'
사부가 지구에서 돈을 갈퀴로 쓸어 담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다.
엄청난 마법적 지식을 소유한 사부.
돈이 옷 벗고 달려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형제여. 자비의 여신 네르안님은 언제나 형제를 사랑하십니다."
신전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서자 때마침 착한 신부님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신관이 하얀 성복을 걸치고 나타났다.
"전 이곳 신전을 책임지고 있는 신관 헤도르라고 합니다. 어찌 찾아오셨습니까? 혹시 신의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난 인 믿는다, 저 하얀 수염을.'
신선 저리 가라는 외모를 자랑하는 건달프 사부도 저렇게 낚시질용 미끼인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선하게 웃고 있는 신관도 그러했다.
"포션을 구입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저희 마을에서 이번에...."
"헤도르 신관님!"
막 신관에게 찾아온 목적을 말하려는 순간, 귀에 익숙한 놈의 말투가 들렸다.
'얼라리요?'
촌장에게 물먹고 나에게 엿 먹은 다론 상단의 라이안이라는 상인 놈.
엄청나게 투실한 몸뚱이를 흔들며 신관을 불렀다.
"신실한 신의 종인 라이안님이 아니십니까? 무슨 일인데 이리 급히 달려오셨습니까"
"저, 저기,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안으로 드시지요. 형제는 잠깐 기다리고 계십시오."
잘 아는 사이인 듯 라이안을 반색하며 맞이하는 헤도르 신관.
'설마 저놈이....!'
신관을 따라가며 고개를 돌리는 라이안 놈이 사독한 눈빛을 나에게 날렸다.
'그래, 너도 재롱 한번 부려봐라.'
척살 목록에 올라가 있는 놈들 중 한 놈.
어차피 뜨거운 인생의 참맛을 보여줄 작정이었기에 놈이 부릴 재롱을 기다렸다.
'응? 오오오!'
신전 안은 제벌 널따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성스러움을 과장하기 위하여 황금과 은으로 만든 각종 성물들이 촛불을 받아 광채를 자랑하고 있었고, 아름다운 여신의 반라 조각상이 신전 중앙에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놓여 있었다.
그런 신전 내부에서 확하고 눈동자에 빨려 들어오는 한 존재.
'기도하는 천사!'
아무런 장식 없는 하얀 법복 위에 가지런히 긴 파란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두 손 모아 무릎 꿇고 기도하는 한 여인.
신관과 비슷한 법복을 착용한 모습이 평범한 여인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앞모습은 어덜까?'
뒷모습만으로는 10점 만점에 11점을 주고 싶은 완벽한 모습.
간절히 신께 간하는 성스러움이 여인의 등 뒤를 후광처럼 비추고 있었고, 가냘파 보이는 뒷모습은 남성의 보호 본능을 뜨겁게 자극하였다.
"큼, 형제여...."
여인에 대한 궁긍함이 극에 달할 때, 헤도르라는 늙은 신관이 나타났다.
"네, 신관님. 말씀하십시오."
"포션을 구입하고 싶다 하셨습니까?"
"네. 저희 마을이 포션이 효능을 다해 새로운 포션이 필요합니다. 한 열 개 정도 필요합니다."
"안타깝지만 본 신전은 그대에게 포션을 팔 수 없습니다."
"네에?"
갑작스러운 신관의 안면 바꾸기.
포션을 팔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신관의 얼굴에는 불쾌한 빛이 역력했다.
"그대가 네르안님의 신실한 종이 운영하는 상단에 피해를 끼쳤다 들었습니다."
"아, 아니, 그것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자비의 여신 네르안님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 신의 일을 방해하는 이들에게는 절대 신의 능력을 줄 수 없습니다."
"신, 신관님, 그게 아니라...."
"그럼 바빠서 이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관이랍시고 성호를 그으며 사라지는 헤도르.
제대로 약을(?) 받아 처먹었음이 분명하였다.
"아나...."
"흐흐, 애송이 녀석. 어디 한번 버텨봐라. 그 촌구석에서 포션 없이 얼마나 버티는지 정말 궁금하구나."
헤도르가 사라지고 잠시 후, 신전의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다론 상단의 돼지상인 라이안이 비웃음을 흘리며 지나쳐 갔다.
"라이안이라고 했지?"
"어린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내 반말에 기분이 진작부터 나빴는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라이안.
"왜, 한번 붙어볼래? 그 포동포동한 살점을 잘게 다져 줄테니까."
마나를 살짝 일으켜 놈의 작은 눈을 째려보았다.
"이, 이놈이.... 흐흐. 그래, 마음껏 해봐라. 곧 네놈 마을은 마수의 손길에 갈가리 찢겨질 테니까."
자신의 불리함을 깨달은 돼지는 뒤로 물러서며 마지막까지 악독한 저주를 잊지 않았다.
"기억해라. 곧 벼락이 네놈들에게 임할 터이니."
"벼락? 푸하하! 마음대로 해봐라, 이 어린놈의 새끼야!"
신전 밖으로 도망치며 비웃는 돼지 라이안.
'참나, 어디를 가도 저런 놈이 꼭 있어요.'
자신이 가진 쥐꼬리만 한 능력으로 없는 자들을 괴롭히는 자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는 날까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
도망친 돼지를 따라 막 신전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환청처럼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 하나.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렸다.
"헛!"
그리고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안젤리나 졸리? 아니야. 도대체 저 미모는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나!'
어림잡아 167 정도 되는 적당한 키.
태어나 태양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같은 어린 아기 같은 투명한 피부, 깊숙이 가라앉은 커다란 갈색 눈동자, 실리콘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오뚝하게 선 콧날, 작지만 붉은 입술.
그리고 가장 여인을 빛나게 하는 은은한 후광.
고결하여 감히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운 성스러운 아름다움이 여인의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신의 사랑을 전하지 못함을 네르안님의 이름으로 사과드립니다."
헤도르와의 대화를 엿들은 듯한 여인은 눈물을 뚝뚝 흘릴것 같은 촉촉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손으로 법복의 앞가슴을 살포시 누르는 여인의 우아한 동작.
짜르르한 기운이 가슴속에서 휘몰아쳤다.
"실례하지만... 누구신지요."
상대의 정체를 알아야 사과를 받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네르안님을 모시는 수습사제 아르미스라 합니다."
'수습사제? 겨우?'
보는 것만으로도 신의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수습사제 아르미스.
이곳 신전의 대장인 헤도르라는 자보다 더 신앙심이 느껴지는 여인이 자신을 겨우 수습사제라 칭했다.
'정말 예쁘다....'
성당의 수녀 급인 여사제이건만 그 순수한 아름다움에 혼자 감동을 먹었다.
학교에서 조신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 예린이가 있었지만, 눈앞의 여사제는 미의 화신이라 불려도 좋을 정도였다.
"아르미스님, 신의 인간들을 바라보는 진실한 마음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네?"
"저 하늘의 태양같이 모든 만물을 사랑으로 비추시는 신의 마음을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손길로 매만지며 신의 사랑을 자신들의 욕심으로 재단하려는 신관님들의 모습에 심히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종교인들에 대해 예전부터 품었던 생각을 아르미스에게 토해냈다.
"아르미스님은 느껴지지 않습니까? 저기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계시는 네르안님이 겉으로는 웃고 계시지만 마음으로는 자신들의 종이라 칭하는 신관들 때문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으며 눈물을 흘리고 계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
신랄한 비판에 아르미스는 작은 신음을 흘려내었다.
'이곳만 신전이더냐.'
아르미스가 내 말을 안 받아들여도 상관없었다.
루비스 상단이라면 포션 따위는 넘치도록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치고 스윽 몸을 돌렸다.
괜히 아무 힘도 없는 수습사제에게 화풀이를 한 것 같은 맘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자, 잠깐만요."
어느새 촉촉이 울먹이는 아르미스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아니,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흐윽."
'어?'
털썩 자리에 주저앉는 소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는 아르미스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21세기 종교인과 다름없는 이곳 신관들의 작태에 내뱉은 몇 마디에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아르미스.
갑자기 내가 정말 못된 놈이 된 것 같았다.
"신의 사랑을 팔아... 헛되이 재물을 취한 죄, 종의 이름으로 신이 사랑하시는 인간들을 재단한 죄, 아픈 이들과 가난한이들을 끌어안지 못하고 내친 죄 모두 다 참회합니다."
'.....'
참회할 대상이 내가 아니건만 흐느끼며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아르미스 사제.
"그러나 어찌해야 합니까. 제 연약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안고 싶어도 이 갸날픈 두 팔로 껴안을 수 있는 이는 한 사람도 버거우며, 마음은 있지만 종들이 만든 제약으로 신의 사랑을 함부로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신의 사자여, 제가 나아갈 바를...."
'신의 사자? 에궁.'
이러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건만 아르미스는 내게 답을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어찌 신의 마음을 알겠는가.
"모든 것은 마음속의 형상입니다. 당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세상이 뒤바뀌어도 이룰 수 없는 장애이지만, 할 수 있다는 의지만 품는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당신의 뒤에는 신이신 네르안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무엇이 두렵습니까?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신이 당신 뒤에 있거늘."
청산유수라는 말처럼 술술 뱉어지는 말들.
정말로 신의 사자가 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마, 마음속의 형상...."
내가 한 말도 아니고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원효 대사님의 멋진 깨달음 한마디.
'역시 대한민국의 교육은 세계적 수준이라니까.'
새삼 교육의 위대성을 깨달으며 발길을 돌렸다.
더 이상 아르미스에게 해줄 말은 없었다.
촌장님이 포션을 구해오라 신신당부하셨지만 어쩌겠는가. 신의 장사꾼들이 팔지 않겠다는데.
'향기 좋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코로 파고드는 낯선 향기.
박하 향기보다 청량하고 봄 들꽃 내음 같은 향기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아르미스....'
아직도 흐느끼고 있는 아르미스의 체취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