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대마법사-8화 (8/221)

제8장 낯선 곳에서 살아가는 법

"끄응...."

'여기는 어디야....'

귓가로 들려오는 내 신음 소리에 정신이 하나둘씩 돌아왔다.

'천국인가, 지옥인가? 아아, 눈 뜨기 싫네.'

과거에 내가 벌인 여러 행돌들을 종합해 보건대 천국보다는 지옥일 확률이 0.1% 정도 더 많았기에 확인하기 싫었다.

태어나서 부모에게 효도라고 한 것은 이번에 보내준 1억짜리 크루즈 여행밖에 없었다.

그 이외에는 유치원 가출 사건, 초등학교 패싸움 사건, 중학교 야동 사건, 고등학교 들어와서는 수학여행 실종에 이은 객사까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것뿐이겠는가.

수많은 여인들에게 품었던 못된 생각과 마지막에 사부님께 먹인 엿까지, 곤장 100대에 무한 지옥 365일 코스는 필수일 것이다.

'뭐가 이리 푹신하지? 향긋한 풀 냄새는?'

눈을 뜨면 야차들이 달려들 것 같았기에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을 때 머릿속에 몰려드는 여러 공감각적인 느낌.

유황불이 일 년 내내 난방이 걱정 없이 타오르는 지옥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문제가 좀 있었다.

'설마 천국?'

뱃가죽에서 아직도 느껴지는 뜨거운 첫 칼침.

지옥이 아닌 천국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직도 안 일어나네?"

"쉿, 아픈 아저씨야."

"아프기는! 흥! 마을 사람들의 생명인 포션까지 먹었는데!"

"데론, 그러지 마. 아빠가 그러셨잖아. 우리보다 불쌍한 사람들을 가엾게 여겨야 죽어서 자비의 여신 네르안님 품에 안길 수 있다고."

"싫어! 죽어서 행복한 것보다 데론은 오늘 배불리 먹고 놀고 싶다고!"

'이, 이게 무슨 소리더냐?'

감각을 회복하고 있는 와중에 선명하게 들리는 낯선 언어들.

지구에서는 한 번도 듣지 못한 단어들이었건만 머릿속에서는 자동번역기를 가동하는 것처럼 완벽하게 해석되었다.

"데론, 아빠와 누나가 그렇게 가르쳤니? 너만 그러는 게 아니라 다들 고생하고 있잖아! 그런데 어떻게... 네가...."

맑고 고운 목소리를 소유한 여인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였다.

"세, 세실 누나, 미안해. 난 그냥... 흑흑."

세실이란 불린 여자가 말을 잇지 못하자 버릇 못된 것 같은 사내아이 놈이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했다.

'자식, 싸가지는 쬐금 없지만 교육은 잘 받았군. 어, 가만 그런데 지금 내 얘기 아니었어?'

얼떨결에 듣고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이 아끼는 포션이라는 것을 먹은 자신들보다 불쌍한 존재로 지칭되는 자.

번쩍 눈이 뜨였다.

"헉!"

그리고 터져 나오는 비명.

"악!"

"으아악!"

나만 지른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지른 지명에 놀란 두 사람의 비명이 낯선 오두막집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여기는 어디야! 으아아아! 왜 내가 이런 곳에 누워 있는 거야!'

정갈하지만 한눈에 보아도 가난이 좔좔 흐르는 집 안.

열 평도 안 되는 통나무 오두막집은 담을 것도 없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화덕과 몇 개의 커다란 솥, 나무 식탁이 존재해 부엌이라 불리는 곳과 각종 짐승 가죽과 몇 점이 걸려 있는 사방 벽.

그리고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 아이와 열 살 정도의 꼬맹이 하나.

우리는 비명을 지른 채 그 모습 그대로 서로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으아아아! 일, 일어났다! 변태 빤쓰 형아가 일어났어!"

덜컹.

내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변태 빤쓰를 외치며 나무 문을 박차고 나가는 꼬맹이.

"하, 하이...."

그 와중에도 정신을 수습하고 제법 귀여운 금발의 여자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하지만 돌아온 것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경악스러운 표정.

덜컹!

입을 벌리고 놀라고 있는 사이 거칠게 통나무 문이 열렸다.

"허억!"

"세, 세상에 일어났네."

"포션이 효과가 좋긴 좋은가 봐."

갑자기 좁은 방 안으로 몰려드는 몇몇 서양인 남녀들.

중세 영화에서나 봄 직한 거친 옷을 걸친 이들이 나를 보고 자기들끼리 쑥덕였다.

"안, 안녕하세요?"

무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내 목숨과 연관이 있음이 분명한 상황.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였다.

주루룩.

"어어!"

"어, 어머! 어머!"

'으악!'

하지만 아줌마들의 비명 속에 나는 다시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놀랍게도 이불 속에 감춰진 내 몸은 생전 처음 보는 요상한 천조가리로 만든 속옷 한 장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어머니! 아버지!!!!'

이불을 끝까지 목에 두르고 간절히 부모님을 불렀다.

군대에 가야 효자가 된다는 말처럼, 나는 낯선 곳에서는 언제나 효자가 되었다.

★★★★★★★★★★★★★★★★★★★★★

"그러니까... 여기가 다피스 왕국 피요르 자작 영지의 루나 마을이라는... 건가요....?"

나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재차 확인하였다.

"허어, 젊은 친구가 심하게 다치더니 정신이 없군. 다시 한번 말하네만 자네가 어디 출신인지는 모르지만 해변에 쓰러져 있는 것을 여기 얀스가 발견해서 데려왔고, 이곳은 남대륙 다피스 왕국의 피요르 자작령의 루나 마을이라네. 그리고 난 마을 촌장 아베스고 말이야. 에휴!"

"....."

이제 갓 입학한 초등학교 신입생을 가르치듯 한자 한자 천천히 설명하는 아베스 촌장님.

앞니가 빠진 촌장님은 몇 번을 설명하고 나선 지친 듯 숨을 길게 들이켰다.

'세, 세상에! 내가 왜 여기에! 으아아아!'

차마 비명을 지르지는 못했지만 이 황당한 광경에 정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WHY, WHAT, WHERE....'

가슴속을 치고 가는 수많은 의문들.

사부의 제자라는 삼합회 깡패에게 칼침 맞은 것까지는 생각이 났다.

하지만 그 이후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은 나에게 왕국이니 자작령이니 하는 말들은 낯선 언어들이었다.

'사, 사부 당신이!! 크으으!!'

그리고 수 많은 의문들의 종착점은 단 한 사람.

나를 이상한 나라 앨리스를 만들어 버린 원흉.

이백 살 먹은 마법사 아이달밖에 없었다.

'썩을, 이 팔찌가 그럼 차원 이동하는 열쇠였던 말이야?'

쌀이 밥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다시 쌀로 변신해 달라고 빌어도 쌀은 밥이 될 수 없는 것이 냉정한 현실.

얼떨떨한 상황에서도 왼 팔목에 자리 잡은 은빛 팔찌가 사부의 끄나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연결자' 라는 문구가 이제야 해석이 된 것이다.

"얀스."

"네, 촌장님."

"아직 이 친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으니 자네가 잘 좀 돌봐주게. 세금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에휴!"

"죄, 죄송합니다, 촌장님. 괜히 저 때문에...."

얀스라 불리는 사십대 후반의 털보 장한.

머리를 긁적이며 촌장님에게 고개를 연신 숙였다.

"아니야. 언제부터 우리 루나 마을의 인심이 박정했던가. 포션이 사라져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있나. 다 이것도 신의 뜻이겠지."

성자처럼 아베스 촌장은 신의 뜻을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세나."

"네?"

가자는 말과 함께 내 어깨를 잡아 세우는 얀스 아저씨.

촌장의 말로는 이 얀스라는 사십대 후반의 아저씨가 나를 살려준 생명의 은인이라 하였다.

"저녁 시간도 되었으니 가서 밥 먹어야지."

"밥, 밥이요."

꼬로록.

밥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뱃속은 심하게 요동을 치며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려왔다.

'보내주려면 잘 보내주어야지, 하필 바닷가야! 그것도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었다니! 크아아아!'

평소 아무 대책 없이 살아가는 사부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무책임한 인간인 줄은 정말 몰랐다.

'기필코 돌아가고 말 거야! 나의 파라다이스! 내 고향 대한민국으로! 크아아!'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는 울븐.

나는 얀스의 굵은 팔에 질질 끌려 촌장님 집 밖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다짐했다.

반드시 이 말도 안 되는 세계에서 지구로 돌아갈 것을!

그리고 오늘의 이 원수는 반드시 갚아줄 것이라고 말이다.

★★★★★★★★★★★★★★★★★★★★★

'이, 이게 밥이야?'

내 앞으로 배당된 투박한 나무 그릇 안에 담겨져 있는 조그만 감자 몇 개가 둥둥 떠다니는 멀건 수프.

그리고 텅 소리를 내며 빵인지 돌덩어리인지 구분이 안 가는 보리 냄새 나는 검은 빵 한 조각이 식탁 위에 놓여졌다.

"와아! 오늘은 감자가 왜 이리 많아?"

'뭐, 뭐야, 이 말도 안 되는 처절한 가난의 냄새는?'

데론이라는 꼬마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이 거짓이 아님이 느껴지자 쿵 하고 충격이 몰려왔다.

깨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일류 요리사들이 만든 최고급 해산물 요리와 정찬을 먹었건만,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낯선 궁상의 냄새.

"많이 먹게나. 차린 게 변변치 않지만...."

얼굴은 산적도 한 수 접을 정도로 털보인 얀스 아저씨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닙니다. 하하! 평소 집에서 먹던 감자보다 더 실한 것이 먹음직스럽겠습니다."

사부의 무책임 속에서 나를 살려준 고마운 은인들이었다.

반찬 투정을 한다면 그런 사람 새끼가 아니라 멍멍이 친구일 것이다.

'한번 먹어볼까.'

뱃속에서 아우성을 쳤기에 미친 척하고 큼지막하게 감자를 떠서 입에 집어넣었다.

"호오! 맛있다!"

'어떻게 이런 맛이!'

보기에는 감자 몇 알 둥둥 떠 있는 멀건 수프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입 안에 착 감기는 묘한 맛이 우러났다.

"맛, 맛있어요?"

세실이라 불리는 금발의 소녀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맛있냐고 물었다.

"하하, 저희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음식 맛과 똑같습니다. 정말 맛있습니다!"

'일류 요리사가 될 소지가 다분해.'

그릇 안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그러나 역시 눈에 띄는 것은 감자와 야채 몇 조각이 전부인 수프.

"헤헤, 변태 형아도 우리 누나 입맛에 반했구나? 세실 누나는 우리 루나 마을 사람들 전부 인정하는 요리사야."

자기 누나 칭찬에 헤헤거리는 꼬마 녀석.

'그런데 왜 자꾸 변태, 변태 하는 거야?'

"얀스, 그런데 왜 자꾸 데론이 저를 변태라고 부르는 겁니까? 혹시 제가 깨어나기 전에 무슨 실수라도 했는지요?"

"어, 그... 그게... 허허."'

물음에 시원하게 답하기보다는 말을 더듬는 얀스.

'세실 얼굴은 왜 이렇게 붉어져?'

얀스가 대답을 못하자 세실에게 묻고자 눈길을 돌렸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벌겋게 얼굴이 달아올라 있는 세실의 모습이 보였다.

"와아! 정말 형아 뻔뻔하다!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물을 수 있어?"

'뭘?'

이제 솔직하게 대답해 줄 사람은 데론밖에 없었다.

"생각 안 나? 형이 입고 있던 그 빤쓰?"

"빤, 빤쓰?"

속옷이라는 단어였지만 자동번역기가 가동된 머리에서는 빤쓰라는 말로 해석이 되었다.

'내가 입고 있던 옷이라면... 헉! 설마 꽃무늬 반바지를?'

"흥! 어떻게 남자가 여자도 아니면서 그렇게 야한 꽃무늬 빤쓰를 입을 수 있어? 형아가 아빠에게 업혀서 들어올 때, 피에 젖은 그 꽃무늬 빤쓰 때문에 마을에 못 들어올 뻔했어! 분명 변태 해적이 난파당해서 쓸려온 거라고 말이야!"

'피, 피에 젖은 꽃무늬 빤쓰....'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21세기에서는 모든 이들이 반바지라 부르는 짧은 바지가 여기서는 빤쓰로 오인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실도 제법 날씨가 덥건만 긴 치미랄 입고 있었다.

'변태... 맞네. 휴우!'

아이들 눈은 정확한 것. 데론이 변태로 판단했다면 마을 사람들 모두 나를 변태로 오인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세실이 모두 봤단 말이야?'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얀스가 나를 업고 들어왔던 집은 바로 이 집.

그리고 이 집에서 활동하는 이는 얀스와 세실, 그리고 꼬맹이 데론.

거기에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거친 천으로 만든 속옷과 얀스가 입었음이 분명한 큼지막한 옷 한 벌이 전부.

'으헉!'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속에서 비명이 터졌다.

"큼, 수, 수프가 식겠구나. 어서 먹자꾸나."

갑자기 어색해진 식탁.

얀스가 빵을 수프에 적셔가며 밥을 먹으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너무한 거 아냐? 여기는 바닷가인데 왜 멸치 한 마리 안 보여?'

흉년이 들어도 바닷가 사람들은 살이 찐다는 말이 있건만, 그 흔한 멸치 대가리 같은 생선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식탁.

딱딱한 보리 빵을 씹어 먹으며 얀스가 스크루지 급 구두쇠가 아닌가 생각하였다.

'그나저나 오늘 여기서 자야 해?'

아직도 고개를 숙이며 묵묵히 밥을 먹고 있는 세실.

그녀의 적당히 태양에 그을린 피부가 자꾸 눈에 밟혔다.

★★★★★★★★★★★★★★★★★★★★★

으드득.

"으으...."

'아이고, 삭신이야.'

침대는 과학이라 선전하는 네이스 사의 푹신한 매트리스에서만 생활했던 나다.

그런 내가 세실과 데론이 자고 있는 침대 밑 딱딱한 바닥에서 모포 한 장 깔고 잤다.

그리고 밤새 끙끙거리다 일어난 아침.

온몸의 뼈가 적응 못하고 우두둑거리며 상쾌한 비명을 질러대었다.

'다들 왜 이리 일찍 나가는 거지?'

열린 나무 창밖으로 보이는 어슴푸레한 빛이 이제야 동이 틈을 말해주고 있건만, 내가 일어나기 전 조심스럽게 세실과 얀스는 방을 빠져나갔다.

나를 깨우지 않기 위함임은 알겠지만 예민한 내 귀에 안 들릴 수가 없었다.

"엄, 엄마~ 엄마!"

그때, 긴 밤 동안 부럽게 세실 품에 안겨 잤던 데론 녀석이 엄마를 찾으며 벌떡 일어났다.

"으아아앙! 엄마아아아아!"

그리고 서럽게 우는 꼬마 녀석.

'칫.....'

애절하게 부르는 엄마라는 말에 갑자기 생각나는 어릴 적 기억.

기억도 희미한 어린 시절, 자다가 일어났을 때 언제나 내 곁에 있던 엄마가 없던 그 기분.

세상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저 녀석처럼 나도 울었다.

그리고 엉금엉금 기어서 온 집을 뒤져서 엄마를 찾을 수 있었다.

비겁하게 그새를 못 참고 아빠 품에 안겨 콜콜 주무시는 엄마를 말이다.

"데론, 일어나. 형이다. 카이어 형이야."

어제 밥을 다 먹고 그제야 이름을 묻는 얀스에게 걍혁이라 말하자, 얀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이어라 발음했다.

그리고 내 이름은 강혁이 아닌 카이어가 되었다.

"형? 으앙! 형아! 엄마 좀 찾아줘! 엄마! 응!"

품에 안아주자 서럽게 엄마를 찾으며 우는 녀석.

'그런데 아주머니가 없네.'

"데론, 그런데 엄마가 어디 있니? 있는 곳을 알아야 찾아주지."

"정, 정말? 형아가 엄마를 찾아줄 거야?"

쬐끔 싸가지없는 것 말고는 귀여운 금발의 꼬마 아이였다.

"그럼! 형아가 이래 봬도 무지 센 사람이야!"

"와아! 형아가 그럼 기사야?"

"아, 아니, 기사는 아니고...."

"기사가 아니면 마법사?"'

언제 엄마를 찾았냐는 듯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마법사냐고 묻는 데론.

"그, 그렇지. 형아가 마법사야. 형아만 믿어. 내가 마법으로 엄마를 찾아줄 테니까."

'자식, 눈치가 제법이야.'

마법사인 내 정체를 정확히 꿰뚫은(?) 데론이 대견하게 보였다.

그리고 곧 마법사인 나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볼 데론을 상상하였다.

"피이, 됐어. 내가 그런 거짓말에 속는 어린앤 줄 알아. 이제 됐으니까. 풀어줘 형 몸에서 땀 냄새 나."

하지만 귓가에 들려오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단어들의 행진.

"엉?'

갑작스럽게 돌변한 데론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아, 개운하다. 히히. 오늘은 뭐 하고 놀까?'

품에서 벗어나 쪼르르 밖으로 나가려는 데론.

방금 전까지 엄마를 찾던 그 어리고 순진한 어린 양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사악하기 그지없는 동네 악동으로 변신해 있었다.

'비, 빌어먹을! 크아아!'

"카이어 형아!"

밖으로 나가다 말고 나를 부르는 꼬마 악마 데론.

"왜!"

"고마워. 헤헤."

부름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던 내 눈에 보이는 꼬맹이의 미소.

눈가로 흘러내리던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데론은 보는 것만으로 기분 좋은 미소를 남기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

"햐아, 좋다!"

대한민국에서는 9월 어느 아침으로 느껴지는 상쾌한 공기가 밖으로 나오자 폐부에 가득 들어찼다.

'완전 그림이 따로 없군.'

어제는 저녁 무렵이었고 정신이 없었기에 마을 전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먼 아침이 되어 보이는 광경은 내가 그림에서나 보던 평화로운 목가적 풍경 그 자체였다.

하늘의 솜털 구름은 두둥실 떠서 바다로 노를 저어갔고, 저 멀리 마을 밖으로 보이는 바다의 푸른 물결은 병자의 숨통에 산소를 풀로 공금해 주는 것 같은 기분을 만들어주었음여, 마을 뒤쪽에 자리 잡은 제법 커다란 산봉우리들은 호연지기를 가득 품게 만들어주었다.

'배산임수! 명당이로군.'

통나무로 지어진 가옥 백여 채가 빼곡히 들어찬 마을.

얀스의 집이 다른 집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하였기에 한눈에 마을 전경이 들어왔다.

'작은 요새가 따로 없네.'

바다와 산, 그리고 제법 널찍한 밭을 소유한 마을은 나무와 진흙, 돌 같읕 것으로 빙 둘러싸여 보호되고 있었다.

높이는 어림잡아 3미터 정도로 어지간한 공격은 막아낼 수 있는 구조였다.

'어라? 그런데 저 사람들, 뭐하는 거야?'

일찍 일어난 참새가 방앗간을 털 수 있다는 격언처럼 이제 해가 뜨기 시작한 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마을 사람들.

'힘 좋은 남자들이 하지 않고 왜 연약한 여인들이 밭일을 하지? 말도 없나? 사람이 밭을 가네.'

21세기 최첨단 기계화 문명에 살던 내 눈에 보이는 이해할 수 없는 농업방식.

사람들이 제법 많이 사는 마을임에도 소나 말 같은 가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소나 말이 해야 할 거친 밭일을 사람들이 하고 있었고, 남자들은 대부분 활을 메고 창을 들고 서서 주변을 경계 하고 있었다.

'이거 밥값은 해야지. 괜히 미안하네.'

포션이라는 것을 사용해 나를 치료해 준 순박한 마을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그래도 하늘과 바꿔도 아까운 내 목숨 값이었다.

'다행히 작은 흉터 말고는 아무 이상이 없다.'

숨을 들이켜며 마나 홀의 이상 유무를 살폈지만 서클이 마나가 제법 비어 있는 것 빼고는 이상이 없었다.

'사부 말대로 지구와 비교할 수 없는 마나 밀도다.'

4서클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다 같은 4서클 마법사가 아니었다.

소유한 서클 크기와 축적된 마나 양, 집중력과 의지력에 의거한 대기 마나와의 조화력, 마나 공식의 차이 등등 마법사의 능력은 여러 가지 기준에 의하여 상하로 나뉘는 것이다.

'유비무환의 생활화! 언제 짱깨 칼잡이 같은 놈을 다시 만날지 모른다!'

몸으로 아프게 배운 뼈저린 교훈에 치를 떨었다.

'그런데 왜 멀쩡한 바다를 놔두고 밭을 갈지? 어촌 같은데 배는 한 척도 없고 말이야.'

가까이 보이는 바다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물고기 뿐만 아니라 조개 같은 여러 가지 부산물도 풍부할 듯 보였다.

그러나 바닷가 근처를 얼씬거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어디 일손이나 도와줄까나.'

어릴 적 시골 할아버지 집에 가서 몇 번 밭일하는 것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을 되살려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밭으로 향하였다.

★★★★★★★★★★★★★★★★★★★★★

"안녕하십니까!"

언제 어디서나 씩씩한 나였기에 큰 목소리로 열심히 일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던졌다.

"카이어, 일어났는가!"

"어머, 검정 머리 총각이네."

"아직도 그 속옷 입고 있으려나?"

말 대신 쟁기를 끄는 얀스가 아는 체를 해 왔고, 동네 아낙들이 나를 보더니 소곤거리며 웃었다.

'에휴, 그게 속옷이면 티 팬티를 보면 뭐라 하려나.'

21세기에 유행하는 속옷을 본다면 뭐라고 할지 정말 궁금했다.

"다들 바쁘십니다."

"바쁘지. 세금 낼 때가 가까워오는데 수확이 영 그러네."

"자! 놀지 말고 빨리빨리 움직여들! 며칠 후면 루에나의 달이 뜨는데 그전에 수확을 마무리 지어야지!"

누군가의 대꾸에 밭에 서서 감독하고 있던 아베스 촌장이 재촉을 하였다.

'루에나의 달? 달이 뜨는데 수확하고 무슨 상관이야?'

언어와 마법적 지식 말고는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나저나 얀스가 힘들어하는군. 다른 남자들은 도와줄 생각도 안 하고.'

어젯밤에 설핏 보았던 삼엄한 경계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해가 질 무렵 촌장 댁을 향할 때, 횃불을 피워놓고 10여 명의 마을 남자들이 무장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대략 수십여 명이 넘어가는 숫자.

건장하고 쓸 만한 남자들은 대부분 힘들게 일하는 여자들을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가까운 숲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전투를 치르는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서 말이다.

'몬스터라도 있나?'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몬스터라는 존재.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등장했던 미지의 괴물이 궁금했다.

"카이어, 거기 서 있지 말고 좀 도와주게."

"네? 네에, 촌장님!"

다른 이들이 바쁘게 감자를 수확하였기에 멍하니 서 있는 나를 책망하는 촌장님이었다.

"얀스,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얼굴과 몸에 땀이 범벅된 얀스를 불러 세웠다.

"음, 자네가? 아직 무리일 텐데...."

"제가 이래 봬도 힘 좀 씁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럼 잠시만 부탁하네."

"그래요, 아빠. 좀 쉬세요."

얀스가 끄는 쟁기를 잡고 있던 세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마음 씀씀이가 제법 착하단 말이야.'

나보다 한 살 어린 열여섯 살의 세실.

서양 여인들의 특성답게 성인 여성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착용해 보게."

모습은 산적이지만 착하기 그지없는 얀스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에 쟁기를 메어주었다.

'헉! 무, 무겁다!'

우습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제법 무거운 쟁기의 느낌에 얀스가 새삼 존경스러워졌다.

'어쩔 수 없군.'

그냥 이대로 쟁기를 끌다가는 저질 체력으로 소문나 이곳에서 남자도 아니라는 말을 들을지도 ㅁ로랐다.

그리 안 해도 변태 빤쓰 사건 때문에 나에 대한 첫인상이 그리 좋지 않을 마을 사람들.

얀스의 쟁기를 짊어지자. 마을 사람들이 일손을 멈추고 나를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경량화 마법 주문이... 이거였지?'

3서클 경량화 라이트 마법의 주문이 떠올랐고, 조용히 수식을 완성하고 영창을 외웠다.

"라이트."

"응? 뭐라고 했나?"

"아닙니다. 하하! 생각보다 가벼워서 놀랐을 뿐입니다."

"가벼워? 허어, 보기보다 체력이 좋은가 보네?"

'보기보다....'

키 185에 몸무게 75의 나름대로 건장한 체격이건만 얀스의 눈에는 닭 한 마리 잡지 못할 약골로 보이는 것 같았다.

'다리에도 마나를 돌려볼까.'

이세계로 넘어와 제일 먼저 펼친 마법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생명을 구해준 이들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먹은 포션이 이들에게는 상당히 귀한 것일 것이기에 그 본전에 몇 배는 뽑아줘야 양심에 걸리지 않았다.

"세실!"

"네?"

내 부름에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세실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꽉 잡아요! 이럇!"

제법 강하게 걸린 라이트 마법 덕분에 운동화 무게만큼밖에 나가지 않는 인간 쟁기.

말이라도 된 듯 힘차게 이럇 소리를 내며 달렸다.

파바바바바밧.

"어멋!"

'히야, 루돌프가 이래서 한없이 달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로군.'

난생처음 말이 되어 거칠게 밭을 갈아엎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질주 본능.

발밑에 밟히는 땅의 푹신한 느낌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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