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대마법사-4화 (4/221)

제4장 이 죽일 놈의 사랑

'비행기?'

눈을 뜨자 보이는 낯선 광경.

꼭 비행기 내부처럼 보이는 공간의 푹신한 좌석에 내 몸은 누어져 있었다.

거기에다가 은은히 느껴지는 엔진 소음과 가끔씩 기류를 타느라 덜컹더리는 느낌에 몽롱했던 정신이 확 깨었다.

"미스터 혁, 잘 주무셨나요?"

"헉! 누, 누구세요?"

푹식하기 그지없는 침대 같은 널따란 좌석.

정신을 차릴 틈도 없는 사이, 어느새 금발의 긴 생머리에 인상적인 엄청난 미모의 여성이 스튜어디스 복장을 한 채로 친절하게 인사를 해왔다.

"제 이름은 마르소라고 합니다."

생글생글 웃는 모양이 전지현과 비슷한 미모의 여인.

놀라는 와중에도 눈을 파고드는 늘씬한 다리.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한 시간 후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네? 인, 인천국제공항이요?"

여인의 친절 속에서 확확 귀에 꽂혀 들려오는 인천국제공학이라는 단어.

"호호, 무려 열다섯 시간 동안 주무셨습니다."

"열다섯 시간이요?"

'뭐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왜 여기에 누워 있어?'

마지막 남은 의식까지 나는 사부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마법진 위에 있었다.

그리고 머릿속을 관통하는 수많은 빛의 그림자.

뒤죽박죽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머릿속에 파고들었다는 것만 생각났지, 그것이 무엇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가만, 그런데 지금 나 불어로 말하고 있는 거야?'

영어라면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했지만 불어는 나와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마르소라는 여인은 분명 불어로 말하고 있었다.

거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불어로 능숙하게 대답하는 나.

마치 태어날 때부터 불어를 배운 거처럼 자연스럽게 그지 없었다.

"여기 미스터 혁에게 전달되어야 할 물건이 있습니다."

믿기지 않는 일들의 연속에 당황하는 나에게 내밀어진 하얀 서류 봉투.

금박으로 봉인된 서류 봉투는 가벼웠다.

'편지?'

봉인을 뜯어 봉투를 열었다.

예상대로 나타나는 편지와 백금빛의 카드 한 장.

'룬 어?'

놀랍게도 편지는 마법사들만 알 수 있는 룬 어로 의미가 만들어져 있었다.

'내가 어떻게 읽을 수 있지?'

2서클 마법을 배우는 동안 학습한 룬 어의 숫자는 약 300여 개.

점 하나에 의미가 달라지는 룬 어는 한자처럼 저마다 고유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사부에게 듣기로 고 서클로 올라갈수록 배워야 할 룬 어의 숫자는 무려 만 자에 달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뛰어난 머리를 소유한 나조차도 300자밖에 알지 못하거늘, 내가 과거에는 알지 못하였던 룬 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해석되었다.

'벼락이라도 맞았나?'

영화에서 가끔씩 등장하는 엉뚱한 기연이라는 것.

벼락이라도 맞아 머리가 돌지 않고서야 어떻게 불어와 룬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상상력을 동원하며 짐작해 보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

고개를 돌려 사부가 쓴 것이 분명한 편지를 읽어나갔다.

사랑하는 제자 혁 보거라.

'우엑!'

첫 줄부터 느껴지는 파격적인 문장에 갑자기 오바이트가 확 쏠렸다.

너와 함께했던 석 달의 시간이 왜 이리 아쉬운지 이 사부는 너를 보내면서도 짧은 추억을 선사한 네가 너무도 그립구나.

'이 양반이 미쳤나?'

거의 프로포즈에 버금가는 닭살 만땅의 구절구절.

확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가슴에 사정없이 몰아쳤다.

운명의 여신 파라안님이 허락하신 인연에 의하여 너를 만난 이 사부는 정말 행복하였다.

200년이라는 세월 동안 느껴보지 못한 짜릿한 쾌감(?)의 연속 너도 너중에 너 같은 제자룰 둔다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변태 할방이!'

보이지도 않건만 생생이 그려지는 사악한 건달프 사부의 얼굴.

법으로도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사부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얼음 몇 덩어리를 갈아 마셔야 잠이 올 것 같았다.

혁아. 그러나 신은 우리의 영원한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두고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쓸 만한 마법사를 만들고 싶었건만, 운명의 수레바퀴는 너와 나를 이리 갈라놓는구나.

덜덜 손이 떨렸다.

'이 순결한 숫총각 영혼에게 영원한 사랑이라니! 크아아아! 이 변태 말미잘, 오크 사촌 같은 건달 마법사! 크아아아아아!'

저쪽에서 상큼하게 미소 짓고 있는 마르소 때문에 비명을 못 질러서 그렇지 만약 소리치면 이 비행기는 폭파되고 말 것이었다.

그 정도로 사부에 대한 적개심은 어릴 적 나를 물어 원수 사이가 된 이웃집 똥개보다 더하였다.

신 때문에 떨어지는 우리 사이, 그 괴로움을 참으며 이 편지를 적는다.

혁아, 사랑하는 나의 제자야. 언제 볼지 모르는 운명의 가혹함 속에서 이 사부가 선물 몇 가지를 남겼다. 네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카드는

한도 무제한의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카드이다. 어느 은행에서도 이것을 제출하면 네가 원하는 만큼의 돈을 인출할 수 있을 것이다.

'헉! 한, 한도 무제한?'

말로만 들었던 한도 무제한 카드. 더군다나 세상 모든 은행에서 통용된다는 말도 안 되는 카드.

'사부,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돈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무식하게 많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지금 타고 가는 자가용 비행기는 너를 위하여 준비한 약소한 선물이다. 언제나 타고 갈 곳이 있다면 편히 이용하거라.

'비, 비행기까지? 헐!'

상상을 초월하는 사부의 무지막지한 선물. 갑자기 사부를 미워하고 증오하던 시베리아 벌판 같은 마음에 훈훈한 훈풍이 불어왔다.

'그래, 사부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닐 거야. 200년 동안 얼마나 외로웠으면 나 같은 사람을 납치해서 제자로 삼았을까. 까짓 석 달간 똥 밟은 셈치지 뭐.'

우리 집 가훈인 정직, 그러한 정직이라는 가훈 뒤로는 남이 알 수 없는 우리 집 사람들만 볼 수 있도록 128가지의 세부 규칙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오직 성인이 되어야만 볼 수 있따는 정직의 규칙.

얼마 전 부모님이 가출한 사이에 먼지나 닦을 심산ㄴ으로 자랑스러운(?) 가훈을 닦다가 발견하였다.

그중 한 구절이 문뜩 떠올랐다.

'공짜를 마다하는 자는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배반하는 위선자다. 공짜를 보고 마다하지 않으며 공짜를 준 이를 가슴 깊이 사랑하는 자, 그자가 바로 진정 정직한 마음을 소유한 무량 강 씨의 후손이다.'

그 이외에도 여자를 황금같이 보라, 네 이웃의 것을 능력껏 탐하라, 아부는 성공을 위한 필요악이니 이를 정직(?) 하게 사용하라 등등.

세상을 살아가면서 배워야 할 삶의 지혜가 정직이라는 한 마디에 온통 녹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정직한 남자였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부를 용서하는 이 마음. 천사도 나를 보면 무릎 꿇고 한 수 가르침을 청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사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거나.

이 모든 것은 너를 위한 사부의 갸륵한 사랑의 마음일 뿐이니 말이다.

"옛썰!"

사부가 옆에 있다면 그동안 쌓인 오해를 풀고 뜨겁게(?) 포옹해 줄 수도 있었다.

인간 강혁, 그렇게 쪼잔하지 않은 대한의 남아였다.

'다음에 만나면 재산 목록을 넘겨달라고 해야지. 하나뿐인 제자가 스승이 살아생전 남긴 유품(?)들을 관리하는 것이 뼈대있는 마법사의 전통이지 암!'

"크흐흐흐흐...."

참으려 했지만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줄줄 새어 나왔다.

세상에 이 나이 때 자가용 비행기를 소유하고 한도 무제한의 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남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드디어 내 꿈이 이루어지는구나! 파라다이스, 영원한 나의 로망!'

어릴 적 신화 속에 나오는 파라다이스 이상향이 나의 꿈이었다.

배부르고 등 따시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무릉도원의 삶.

돈만 있다면 이 시대에 불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운명의 여신이라는 이계의 여신 파라안이 내 편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언제 소주라도 한잔 올려야지. 크크.'

스승님의 마지막 사랑을 영혼 깊이 각인하며 나는 편안하게 좌석에 누웠다.

"레이디 마르소."

"네, 미스터 혁."

나의 부름에 활짝 핀 금잔화 같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서는 금발의 미인.

나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하하! 알고 보니 이 비행기가 제 것이었군요. 그런데 기종이 뭡니까? 제법 큰 것이 쓸 만해 보입니다."

쓸 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무슨 가죽으로 만들었는지 몰라도 엄청나게 부드러운 촉감을 제공하는 갈색 톤의 좌석과 최첨단 설비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곳곳에 눈에 띄는 비행기 내부.

저 멀리 대형 소파들과 술을 마실 수 있는 바 같은 것도 눈에 띄는 것이 작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에어버스 사에서 특별기로 생산한 A380입니다."

생긋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항공기 명을 읆어대는 마르소.

"컥! 캑캑!"

마르소가 오면서 건네준 차가운 생과일주스가 목에 그대로 걸렸다.

'A, A380! 최대 800명까지 태울 수 있다는 그 공포의 점보 여객기?'

대당 가격이 4,000억 원이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희대의 운송 수단.

나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사부를 생각했다.

'사, 사부!'

가슴팍을 팍 뚫고 들어오는 이 죽일 놈의 사랑.

나도 모르게 어느새 사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았다.

"A380이 갑자기 착륙하다니? 우리 공항에는 정식 취항한적이 없는데 어디 항공사야?"

"몰라. 정식 취항한 것이 아니라 자가용이래."

"뭐, 뭐야? A380을 자가용으로?"

대한민국의 관문인 인천국제공항 관제탑과 내부 직원들은 갑자기 날아온 A380 때문에 한바탕 소동을 겪어야 했다.

얼마 전 인천공항에도 시범 비행으로 한 번 착륙한 적이 있는 에어버스 사의 차세대 여객기.

최대 승객 800명 이상을 태우고 논스톱으로 전 세계를 운행할 수 있는 움직이는 5성 호텔이라 불리는 여객기가 지금 예정도 없이 착륙하고 있었다.

그런데 통보된 내용은 자가용 목적.

대통령이나 외국 원수, 헌법재판소장 등등 고위 공직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공항 귀빈 통로가 사전 예약되었다.

"왔다!"

쿠르르르르르르르르.

귀빈실을 담당하는 공항공사 의전 팀 여직원 10여 명은 9번 통로로 이동해 오는 거대한 동체의 비행기에 바짝 긴장하였다.

4,000억짜리 자가용을 타고 의전을 받으며 도착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정말 궁금했던 것이다.

뚜벅뚜벅.

그리고 비행기가 계류가 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발걸음이 조금씩 울려 퍼졌다.

발걸음이 가까워지자 꽃단장을 한 의전 팀 여직원들은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앗!"

"어머!"

누구라 할 것 없이 결례인 줄 알면서도 여직원들 입에서 터져 나온 나직한 비명.

"하하! 안녕들 하십니까!"

아랍의 돈이 썩어나는 왕족이거나 최소 유명 외국 연예인을 상상했던 의전 팀 직원들은 유창한 한국말을 뱉어내는 건장한 청년, 아니, 아직 어린 티가 나는 학생을 보는 순간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대한민국 그 어떤 부자도 이용하지 못하는 개인용 거대 여객기 A380.

그 여객기를 타고 이제 얼굴이 보기 좋게 그을린 고등학생 하나가 내리고 있었다.

"어, 어서 오십시오."

손을 들고 뭐가 그리 좋은지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학생을 향해 상담 매뉴얼대로 고개를 살포시 숙이는 의전 직원들.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남학생의 당황한 목소리가 큼지막하게 울려왔다.

"여, 여권 검사는 어디에서 합니까?"

귀빈실 이용 방법도 모르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어리버리한 고등학생.

고개를 숙인 직원들의 얼굴은 당혹함으로 살포시 굳어버렸다.

★★★★★★★★★★★★★★★★★★★★★

촤라라라라라라락.

'저, 정말이었어!'

치밀하게 여권도 재발금받아 무사히 한국 땅에 올 수 있게 만들어준 건달프 사부.

난생처음 본 화려하고 품격있는 의전실에서 나왔지만 나는 정작 네 발 달린 자가용이 없었다.

그렇기에 밖에까지 따라온 의전 팀 직원들에게 물어 현금 지급기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뽑기 시작한 현금.

저 0이 그 0이었어?'

카드의 비밀번호는 단순한 사부답게 1111, 그리고 카드를 넣자마자 보이는 0이라는 끝없는 수자.

처음에는 돈이 하나도 없는 뻥 카드인 줄 알았다.

그러나 현금을 찾자 아무렇지도 않게 줄줄줄 나오는 백여 개의 만 원짜리 지폐.

난생처음 쥐어보는 목돈에 나의 입은 닫히지 않았다.

'크크크크크크크크크! 크하하하하!'

생각했던 현실이 이루어지자 심장이 터질 듯 미칠 것 같았다.

마르소가 준비해 준 명품 청바지와 하얀 남방, 그에 걸맞은 선글라스와 여러 가지 소품.

말로만 듣던 럭셔리 삶이 이런 것임을 피부로 생생히 맛볼 수 있었다.

'가자! 집으로!'

바뀐 계절은 어느새 여름의 끝자락.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나는 걸음도 당당하게 공항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눈부시게 들어오는 8월의 햇살.

고생 끝, 행복 시작을 알리는 희망의 광명이 힘차게 나를 비추고 있었다.

★★★★★★★★★★★★★★★★★★★★★

'설마 죽었다고 호적 판 것은 아니겠지?'

리무진 택시를 타고 도착한 나의 집.

사파리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아들을 키우는 부모님이 내가 없는 동안 어찌 지냈을지 궁금하였다.

둘도 아니고 달랑 하나뿐인 아들이 없어졌다고 그분들이 체코까지 날아와 울고불고 했을지, 아니면 내가 살아서 돌아올 것을 믿고 집에서 평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지 정말 궁금하였다.

'흠....'

잘나가는 아버지와 어머니 덕분에 강남에서 제법 괜찮은 축에 드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707호.

지금 시각은 토요일 오후 5시. 부모님이 계실 시간이었다.

딩동.

심호흡을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나 아무런 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어디 가셨나?'

아들이 없다고 생활을 내팽개치실 부모님은 아니었다.

'열쇠도 없는데.'

전자 도어와 함께 설치된 집 안의 이중 키.

"누구세요?"

그때 익숙하지만 힘이 실려 있지 않은 엄마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엄마....'

갑자기 가슴 한편이 찡해졌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무럭무럭 자랐던 나. 수학여행을 갔다 잃어버린 이 아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들리는 목소리에서 짐작되었다.

"누구십니까?"

어머니에 이어서 묵직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관 비디오로 다 보일 텐데 왜 그러시나?'

"헉!"

그리고 이내 나의 예상대로 현관 비디오 창으로 나를 확인하신 엄마의 격한 놀람이 스피커에서 들려왔다.

"다녀왔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 뱉는, 언제나 씩씩한 목소리로 내가 왔음을 외쳤다.

딸깍.

문이 열렸다.

"하하! 아버지! 어머니! 이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혹시라도 걱정하실 부모님을 생각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안으로 들어섰다.

"....."

입구에 우두커니 부모님이 서 있었다.

믿기지 않는 얼굴로 들어서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부모님.

'쳇, 왜 이렇게 늙으신 거야?'

몇 달 못 보는 사이에 눈가에 몇 줄 는 어머니의 주름과 새치인지 흰머리인지 눈에 확연히 보이는 아버지의 머리카락.

가슴이 아려오며 눈동자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솟으려 하였다.

"아들, 늦었네? 호호! 수학여행은 즐거웠어?"

"네? 네에! 아주아주 유익한 여행이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처럼 아들이라 부르며 반겨주는 어머니.

슥슥.

엄마는 자신보다 한참 큰 내 머리카락을 슥슥 손으로 헝클어뜨렸다.

"못 보는 사이에 많이 컸네? 그동안 뭐 하느라 연락도 없었어?"

수학여행 중에 실종된 것을 아실 분들이건만 멀리 놀러 갔다 온 것처럼 대하셨다.

"헤헤, 오랜만에 가출 한번 해봤습니다. 수학여행 아니면 언제 제가 유럽 여행을 해보겠습니까."

"가, 가출?"

차마 미친 대마법사 건달프 사부 밑에서 마법을 배웠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아마 정신병원에 보낼지도 몰랐다.

"농담입니다. 황금소로에서 이상한 할아버지가 준 음료수를 마셨는데 눈을 떠보니 유럽의 어느 시골 마을이더라고요 거기서 성격 안 좋은 납치법 할아버지 밑에서 일 좀 도와주다 왔습니다."

"음, 그랬구나. 역시 아버지가 강하게 키운 보람이 있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덕분이라 말하시는 아버지.

"뭐, 그... 그렇지요."

아버지 말도 일리가 있었다.

자식 강하게 만들기 101가지 비법을 실천하신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건달프 사부 밑에서 진작 자살했을지도 몰랐다.

"아들, 고마워. 돌아와 줘서."

살포시 엄마가 나를 안ㄴ았다. 아니, 내 품에 안겨 눈물을 또르르 흘리시는 엄마.

'아, 찡하네.'

가슴이 아릿한 것이, 사나이 피 같은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품에 안긴 엄마가 귓가에 들려주는 한마디만 아니었더라면, 분명 나는 엄마 품에 오랜만에 안겨 펑펑 울었을 것이다.

"혹시 엄마 선물 안 사온 것은 아니지?"

"....."

따스하고 가슴 찡한 가족 간의 해후.

갑자기 에어컨보다 더 차가운 냉매가 가슴을 휑하니 쓸고 지나갔다.

"오! 선글라스 좋은데? 이거 페라가모 아니야?"

"어머, 정말 그러네? 역시 우리 아들이야. 아무리 바빠도 선물은 잊지 않는다니까. 호호!"

"하하! 이게 다 자식을 엄하게 키운 보람이 아니겠소."

잠시간의 진한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어느새 마르소가 안겨준 내 선물 보따리는 아버지와 엄마 손에서 착실히 분배되어 갔다.

'쩝....'

그리고 나는 석 달 만에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천하의 벼락부자도 부럽지 않은 얼치기 떼부자 마법사가 되엇.

★★★★★★★★★★★★★★★★★★★★★

"룰루, 루루루...."

학교에 등교하는 기분이 이렇게 좋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건달프 사부 때문에 세상 소중한 것들이 참으로 많아졌다.

끼이익.

"다녀오십시오, 도련님."

"김 기사닌ㅁ, 학원 시간 늦지 않게 와주세요."

대한민국 최고의 사립 명문 고등학교 대한.

독립문을 따서 만든 거대한 교문 앞에는 오늘도 잘나가시는 자제 분들이 차를 타고 내리기에 바빴다.

'자식들, 걷는 게 얼마나 행복한 운동인데 잡스럽게 자가용이나 타고 다녀.'

세계에서 가장 큰 자가용을 소유한 나였기에 예전에는 제법 부러웠던 자가용 등교가 전혀 느낌이 오지 않았다.

'오! 드디어 돌아왔다! 학교여! 이 강혁이 왔노라!'

개선장순처럼 두 팔을 벌리며 교문을 통과했다.

아침잠 많은 나에게 학교는 한때의 인내의 시험장이었다.

"어머! 쟤, 걔 아냐?"

"맞아. 학교 신문에 났던 1학년 걔 맞네."

"수업 시간에 왕 선생님이 그러셨잖아. 정신 줄 놓은 자기 반 학생이 지금쯤 집시에게 끌려 다니면서 유럽에서 앵벌이 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하던데...."

"세상에!"

마나를 축적하면서 예민해진 귓가로 들려오는 뭇 여인들의 속삭임. 팔을 든 자세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비, 빌어먹을! 집시? 앵벌이?'

집에 도착하고 뜨거우면서도 냉정했떤 가족과의 해후 다음날, 부모님과 학교를 찾아갔다.

그리고 내가 부모님께 말했던 사실을 왕 선생님을 비롯해 급히 도착한 교장선생님께 알렸다.

이상한 할아버지가 준 공짜 음료수를 먹고 끌려 다녔다는 처절하고 슬픈 이야기.

그런데 어느새 나의 인생 역경의 고난사가 앵벌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추잡스럽게 앵벌이가 뭐야! 콱!'

당시 현장에서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 눈물까지 흘렸던 가증스러운 담임선생님.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아직 사제의 정은 살아 있다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배신.

'왕 선생님, 당신이 내 가슴에 비수를 꽂다니.'

서른다섯 살 노처녀 영어 선생 왕선녀.

시집가지 못한 노처녀의 한을 시도 때도 없이 입으로 푼다하여 공포의 백설공주라 불리는 여선생.

백만 인이 설설 기는 공포의 주둥아리가 나를 비참하고 초라한 앵벌이 소년으로 만들어 버렸다.

'가만두지 않겠어. 이 복수는 언젠가는....'

이글거리는 마음으로 비수를 품었다.

입을 함부로 연 죄, 더하여 없는 사실을 유포한 허위 사실 유포 죄.

마법 천재 강혁의 활화산 같은 분노를 피똥 싸며 느끼게 만들어줄 것이다.

'어, 그런데 피똥 싸게 만드는 마법 시약의 공식이 왜 머리에 떠오르지?'

건달프 사부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돌아온 집.

밤이면 밤마다 꿈속에서 나는 미치도록 마법을 수련하였다.

배우지도 않은 룬 어들과 마법 공식, 수많은 기초 마법 이론과 연금술, 고 서클 공식 등등.

무얼 하나 생각하면 연상 작용으로 공식이나 마법이 떠올랐다.

'몸이 허해서 그래. 백 년 묵은 산삼 좀 달여 먹어야겠어.'

넘쳐 나는 돈.

쓸 곳은 무궁무진했다.

"강혁?"

복수를 다짐하며 교실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들려오는 감미롭고 부드러운 목소리.

자연스럽게 내 이름을 불러주는 이에게 고개가 돌려졌다.

'서, 서예린!'

남색 체크무늬의 교복 치마 위로 보이는 한 송이 백합 꽃.

하얀 블라우스에 작게 달린 푸른 리본 넥타이가 보였다.

그리고 블라우스보다 더 창백해 보이는 그녀의 고운 피부가 이른 아침의 태양에 눈부시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사, 살아온 거야?"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내가 죽은 유령으로 보이는지 확인을 하는 서예린.

"당근이지. 잠시 무전취식으로 유럽 여행 좀 하고 왔지."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예린이 앞에서 태연히 여행을 했다고 구라를 깠다.

"다행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기쁨의 눈동자를 보이는 서예린.

'헐? 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부모님도 저렇게까지 나를 아끼는 눈빛으로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귀한 선물을 아침부터 선사해 주는 천사 서예린.

날개만 달면 바로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이다ㅣ.

"들어가자 중현이가 혁이를 무척 기다리고 있어."

"어? 어, 그래. 들어가야지. 자식, 이 형님을 그렇게 사모하고 있다니. 큼, 그래서 사람은 있을 때 잘해야 하는 것이야."

생긋 미소 짓는 예린과 함께 교정을 걸어 교실로 향했다.

"저, 혁아...."

그때, 조심스럽게 나를 부르는 천사의 목소리.

'크으, 애간장을 팍팍 태우는구나.'

"왜?"

따스한 시선으로 눈동자를 반짝이는 예린의 붉은 입술을 바라보았다.

저 섹시하고 귀여운 입술로 또 어떤 기쁨을 선사할지 한없는 기대를 담고서.

"앵벌이... 할 만했어?"

"컥!"

예린이의 결정타 한 방.

격한 신음이 목젖을 사정없이 울렸다.

'와, 왕 선생! 가만두지 않겠어!'

그리고 복수의 씨앗은 잭과 콩나물(?) 처럼 무럭무럭 자라 하늘을 향해 자라났다.

★★★★★★★★★★★★★★★★★★★★★

"혀, 혁아!"

들어서는 나를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변강쇠가 옹녀를 부르듯 힘차게 내 이름을 부르는 중현이.

동시에 교실에 있던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하였다.

"하이, 에브리원!"

유럽 앵벌이라는 몹쓸 소문이 돌았지만 나 자신은 떳떳하였다.

'자식들, 놀라기는.'

예전에도 기죽지 않는 나만의 삶을 살아온 나였기에 놀람과 당황의 시선을 보내는 아이들 앞에서도 씩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클클, 집시에게 끌려 다니며 앵벌이를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용케 살아서 돌아왔군."

'어라? 저것 봐라?'

삐딱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나를 열렬히 주둥이로 환영해 주는 한 놈.

제 할아비 잘난 맛에 사는 왕재수 황성택이었다.

"하하! 소문은 소문일 뿐이지.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믿는 놈이 바보 아냐?"

경직된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들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는 없었다.

하다못해 나와 피 같은 호빵을 나눠 먹을 정도로 절친한 친구인 중현이조차 내 눈길을 피해 버렸다.

'요것들 봐라? 파이어 볼 마법 한번 보여줘?'

거두절미하고 마법 한 방이면 해결된 오해 상황.

하지만 왠지 하기 싫었다.

예전과 달리 넉넉해진 주머니. 그 주머니의 크기에 따라 내 마음도 우주로 확장하고 있었다.

"병신 새끼, 네놈 때문에 마지막 날까지 호텔에 처박혀 있었던 우리에게 어떻게 보상할래? 멍청하면 차 속에서 잠이나 퍼 잘 것이지 돈도 없는 놈이 무슨 구경은 구경이야?"

화르르! 내장을 활활 태우는 황성택의 2차 공격.

파르르 떨리는 입가에 뜨거운 미소가 지어졌다.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딱 한 놈에게는 전혀 그런 마음이 없다."

나 때문에 망쳤을 수학여행에 대해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아이들에게 피해를 끼쳤을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딱 한 놈, 아니, 그놈 주변에 충성스러운 똥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두 놈을 포함한 세 놈에게는 전혀 미안한 맘이 생기지 않았다."

"황성택, 하늘 조심해라. 길 가다 날벼락 맞지 말고."

"날벼락? 푸하하하! 고작 한다는 협박이 벼락이냐? 유치한 새끼."

날벼락에 대한 뜨거운 고찰을 해보지 못한 황성택.

'넌 뒈졌어! 씨방새.'

날벼락을 생각하자 3서클 공격 마법의 최후 버전인 라이트닝 마법 공식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그리고 날벼력으로 놈에 대한 나의 진심 어린 수학여행 선물을 선사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호호! 혁아, 아이들과 인사하고 있었어?"

황성택과의 살벌한 대화 때문에 조용해진 교실에 울리는 듣기 거북한 여인의 웃음.

'왕선녀 선생님!'

열린 교실 문을 통해 들어오던 화장으로 변장을 한 노처녀 왕 선생.

나를 일개 앵벌이로 전락시킨 왕 선생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친한 척 제스처를 취하였다.

"인사는 다 했습니다. 자리에 가서 앉겠습니다."

굳이 그 말에 더 대꾸할 필요가 없었다.

'음? 그렇군. 힘을 조절해서 포이즌 마법을 사용하면 피똥을 쌀 수 있겠군.'

자리로 걸어가며 부수적으로 생각나는 피똥을 싸게 만드는 스물한 가지 방법.

왜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유용한 지식들임에는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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