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대마법사 간달프를 만나다
"황금소로는 본래 프라하 성을 수비하는 경비병과 문지기들의 숙소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 상업이 발달한 16세기경 금 세공사와 연금술사들이 살기 시작하면서 지금과 같은 황금소로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럼 다들 들어가서 자유 구경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은 한 시간! 꼭 제시간에 맞춰서 이곳에 다시 모이세요!"
학생들을 인솔하고 있는 가이드가 이미 정신을 놓고 있는 아이들에게 고함을 치듯 악을 썼다.
'흐흐흐, 이런 호사가 어디 있노. 역시 남자는 큰물에서 놀아야 해. 움하하하하!'
경기고를 제치고 대한민국 최고 명문으로 알려진 대한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딱 두 달 만에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잘나가는 펀드 매니저인 아버지와 음대 교수이신 어머니였건만, 지독한 자린고비였던 두 분.
일 년에 한두 달은 꼭 세계 여행을 가시는 분들이 하나뿐인 무량 강 씨 45대 장손인 이 아들에게는 무지 박정하게 굴었다.
왜 나를 주워온 자식 취급하느냐는, 질풍노도의 사춘기 때 나의 반발에 부모님은 아주 간단하게 웃으면서 나의 분노를 꺾어버렸다.
'수컷은 강하게 커야 살아남는다' 는 말도 안 되는 아버지의 지론.
그 뒤를 잇는 엄마의 한마디.
'네가 지금 쓰고 있는 모든 경비는 모두 아빠와 엄마의 피와 땀이다. 그런 피와 땀을 함부로 낭비하는 이 시대의 불효자식이 되고 싶으냐' 는 한마디.
사파리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도 아니고, 하나뿐인 자식을 너무나 강하게 키운 부모님.
그 이후로 나는 세상에는 믿을 분(?)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알고 매일매일 코피 터지며 공부했다.
그리고 선택한 대한고등학교.
대한민국 최고, 아니 세계 일류 초대형 우량 기업인 대한그룹의 회장님이 이사장인 고등학교.
들어가는 순간부터 졸업할 때까지 학교생활에 필요한 일체의 경비와 용돈을 대한그룹에서 지원하였다.
그렇기에 서울대보다 더 어렵다는 대한고등학교에 떡하니 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파라다이스 같은 동부 유럽 10박 11일짜리 수학여행을 그 혜택으로 즐길 수 있었다.
"혁아, 구경 가자. 헤헤."
잠시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옆집 아저씨 같은 편안한 인상의 중현이가 두툼한 엉덩이를 흔들며 나를 이끌었다.
"그래. 흐흐흐."
아무리 부모님이 자린고비 사촌쯤 된다 하더라도 명색이 하나뿐인 아들의 수학여행.
적어도 부모님을 위한 기념품 하나 정도는 살 수 있는 아량이 나에게는 있었다.
'연금술사? 정말 그런 자들이 있긴 있었던 거야?'
황금소로로 들어가자 보이는 아기자기한 건물과 윈도우 너머로 보이는 갖가지 볼만한 수제품들.
금 세공사와 연금술사들을 조상으로 둔 덕분인지 대충 보이는 여러 가지 장식품들은 발걸음을 붙잡기에 충분하였다.
"와아, 예뻐!"
"금 세공품인가 봐."
"호호, 내가 하면 딱 어울릴 건데."
중현이와 이것저것 구경하며 이동하는 중에 들리는 맑은 여인들의 교성.
서예린.
대한고등학교 1학년을 대표하는 미의 화신.
키 167, 긴 생머리, 큼지막한 눈, 투명하고 백옥 같은 피부에 차분하면서 단아한 성품을 소유한 여신.
남자라면 누구라도 소유하고 싶어하는 초 레어템.
오늘도 조잘거리는 뭇 잡꽃 틈에서 유난히 빛을 발하는 한송이 청초한 백합으로 피어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푸른색 머리띠로 긴 생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오월의 달빛보다 더고운 미소를 짓는 여인.
몇몇 무수리와 함께 작은 유리창 너머의 머리핀을 구경하고 있었다.
특유의 창백해 보이는 하얀 피부에 어울리는 새카만 눈동자를 빛내며.
"뭐 좋은 거 있어? 헤헤."
넉살이 좋아 남학생보다 여학생들과 더 친한 중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여학생들 틈으로 나를 이끌었다.
파박.
그 순간 여인들이 고개를 돌렸고, 우연처럼 예린이와 눈이 마주쳤다.
사라락.
내가 나타나자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지어주는 서예린.
'헐? 지금 나를 보고 웃는 거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성을 한창 갈구할 나이에 뭇 새끼 사자들이 살벌하게 자라는 남중을 졸업한 나였다.
대한고등학교를 들어오기 위하여 여인을 멀리했던 나에게 대한고등학교는 꿈의 고등학교 그 자체였다.
어떻게 공부 잘하면 메주 사촌쯤 된다는 공식을 깨고 제법 어여쁜 여인들이 학교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개천에 용 난다는 구라는 다 옛날 그 자체였다.
요즘은 워낙 환경이 오염돼서 일급수로 수질을 관리해야만 용들도 자리를 잡는 것이다.
각박해지고 전문화된 세상.
용들이 자랄 수 있는 물은 그렇게 관리되는 것이었다.
"와! 예쁘다!"
어느새 여인들 틈에 끼어 푸른색 보석이 알알이 박혀 있는 백금 머리핀을 구굥하는 중현.
'잘 만들었네.'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보석 머리핀 컬렉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고풍스러운 머리핀.
기다란 조개 문양의 머리핀은 남자인 내가 보아도 탐이 날만했다.
"헛!"
하지만 자연스럽게 이어진 가격표에 나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10,000불.... 세상에!'
천만 원이 넘는 거액의 머리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혁아, 예쁘지?"
그렇게 다물어지지 않는 입으로 놀라고 있을 때, 귓가에 들리는 환청.
신비한 은방울이 구르는 듯한 여인의 목소리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고 있었다.
"응?"
이제 갓 피기 시작한 청초한 백합 같은 서예린.
요즘 잘나가는 처녀시대나 투더걸스의 그 어떤 멤버를 데려다 놓아도 비교할 수 없는 미모와 지적 미를 갖춘 생명체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봐줄 만하네 뭐."
하지만 튀어나온 대답은 내가 들어도 놀랄 정도의 시큰둥한 목소리.
"그래? 난 예쁘기만 한데...."
백합이 나의 말에 상처를 받았는지 고민에 빠져 들었다.
'캬아, 네가 하면 미의 여신이 따로 없을 거야.'
예린처럼 미모와 지혜를 갖춘 재원들은 국가적으로 보호를 해야 했다.
'만 불이라.... 쩝.'
마음 같아서는 하나쯤 선물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 숫사자는 돈을 생산할 수 있을 정도의 레벨로 육성되어 있지 않았다.
"서예린, 기념으로 하나 사줄까?"
'뭐야, 이 재수없는 목소리는?'
예린과 처음으로 대화를 하고 있는 신성한 접촉의 장소에 들려오는 오만하고 건방진 목소리.
두 마리의 늑대새끼를 끼고 한 마리 못된 사자새끼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황성택.'
같은 1학년 주제에 황태자라 불리는 오성그룹 총수의 손자라는 계급으로 군림하려 드는 재수탱이.
세상 얼마 살지도 않은 놈이 얼굴에 권태로운 기가 다분하였다.
그리고 하이에나 같은 놈의 눈동자는 나의 백합의 육신을 음탕하게 더듬고 있었다.
"아니 됐어."
황성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시를 돋우며 장미로 돌변한 서예린. 차가운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피해 버렸다.
"하하! 언제든지 말만 해. 너를 위해 내 널찍한 가슴은 항상 비어 있으니까."
황성택이 등을 돌리며 사라지는 서예린을 향해 촌티나는 대사를 뱉어냈다.
'아깝다.'
예린이와 친해질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이국땅에서 펼쳐지는 서예린과의 야릇한 감정 교류.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고춧가루가 등장했다.
"가자, 중현아."
"응? 그, 그래."
굳이 황성택과 그의 똘마니들과 같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강혁, 충고 하나 할까"
중현이와 그렇게 자리를 옮기려는 순간, 차가운 황성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키 185에 태권도 공인 4단, 검도 3단의 내가 쫄 필요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170이 갓 넘은 찌질이 황성택을 내려다보았다.
"서예린은 내가 찜했다. 학교생활 온전히 하고 싶으면 내눈에 띄지 마라."
옆에 끼고 있는 두 마리 늑대새끼를 믿고 까부는 황성택.
아직 나에 대해서 쥐꼬리만큼도 모르고 있었다.
하늘 아래 두려운 것이라고는 '정직' 이라는 가훈과 부모님밖에 없는 나를 말이다.
씨익 웃음을 지으며 황성택의 어깰르 툭툭 가볍게 손으로 두드렸다.
"황성택. 너, 누구 덕택으로 이리 잘살고 있는 줄 알아?"
"....."
갑작스러운 내 말에 잠시 당황하는 황성택.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대오성전자의 주식을 무려 10주나 소유하고 있는 대주주야. 감히 그런 주인의 은덕으로 먹고사는 네가 그리 막살면 안 되지."
내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황성택.
"앞으로 이렇게 돈지랄하면 주주의 권리로 잘나신 네 할아버지...."
스윽.
말 대신 손으로 목을 그었다.
"잘해라, 잘해."
툭툭.
다시 한 번 황성택의 빈약한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머, 멈춰, 이 겁대가리 상실한 개새끼야!"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겁대가리를 상실할 정도로 세상 막산 인생이 아니었기에.
쇄애애액!
뒤에서 날아오는 주먹의 기운.
팟!
본능적으로 휘돌려 차는 다리.
"허억!"
그리고 자신의 턱주가리 앞에서 멈춘 발을 보고 숨도 못 쉬고 굳어버린 늑대새끼 한 마리.
감히 세상을 포효하는 사자 앞에서 하룻강아지들이 개폼을 잡고 있었다.
"경고는 한 번뿐이야. 다음에는.... 개 값 문다."
긴말은 필요치 않았다.
양아치에도 못 미치는 놈들에게는 주먹도 아까웠다.
"쳇."
수백 명의 아이들이 풀려 나간 황금소로.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오며 아이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중현이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평소 지극한 효자인 놈은 어머니에게 줄 선물을 고르러 간 것이다.
'이 골목은 왜 이리 조용해?'
부모님이 주신 넉넉한 용돈으로 현질하는 아이들에게서 벗어나 이것저것 구경을 하는 내 눈에 들어오는 작은 골목 안.
다른 골목과 별 차이도 없건만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다른 아이들은 골목이 보이지도 않는지 무심코 지나쳐 가기에 바빴다.
'흐흐, 괜찮은 물건은 이런 데 있지. 멍청한 것들.'
아무리 나에게 박정하신 부모님이라 해도 세상에 둘도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분들을 위해 선물 하나쯤은 이제 장만할 때가 되었다.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오늘이 마지막 쇼핑 찬스였다.
"참나, 이제 이런 곳에서도 한글 구경을 다 하네."
골목으로 들어가기 전에 보이는 가게들 앞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익숙한 세종대왕님의 창조물.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다녀갔는지 영어, 일본어 다음에 한국어가 가게 문 앞에 적혀 있었다.
'싸요. 구경하세요. 단, 깎지 마세요' 라는 문구.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히 쪽팔리는 기분은 뭐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레이트 매지션? 대마법사?"
화끈거리는 얼굴을 들고 썰렁한 골목을 살피는 중에 보이는 작은 가게.
푸른색 선팅이 짙게 되어 있어 안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문 앞에 쓰여 있는 대마법사라는 영어 문구.
'뭐야? 연금술사 후손인가?'
왠지 모를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들어가 봐?'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이렇게 사람이 들락거리지 않는 곳에 있는 이런 작은 상점이 무언가 건질 것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래야만 했다.
현재 나의 호주머니 사정은 불면 먼지가 날 정도로 무척 가벼운 상태였다.
딸랑.
두툼한 나무 문이 열리며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오~예!'
절로 터져 나오는 탄성.
겉보기에는 기대할 것 없는 조그만 가게로 보였지만, 막상 들어선 곳은 한눈에 보아도 대단한 명작 수공예품으로 가득했다.
보석함부터 시작해서 귀걸이, 목걸이, 머리핀 등등 온갖 잡다한 장신구를 비롯해 한눈에 보아도 고풍스러워 보이는 도자기를 포함하여 중세 귀족들이 사용했을 법한 온갖 잡동사니.
꿀꺽.
마른침이 목으로 넘어갔다.
'심봤다.'
더욱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마음씨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
정말 영화에 나오는 간달프처럼 하얀 수염이 배 밑까지 자라 있었고, 아이보리 색 로브 같은 걸 멋지게 걸치고 계셨다.
'잘하면 대박이다.'
인터넷 뉴스에도 나오는 것처럼 이런 골동품 가게에서 인생 역전할 수 있는 보물들이 발견된다 하였다.
왠지 모를 짜릿한 기대감이 나를 들뜨게 하였다.
'크크, 완전 밥이군.'
한눈에 보아도 착하게 보이는 마대인 체코산 할아버지. 큼지막한 수정 구슬을 앞에 두고 꾸벅꾸벅 인사를 하고 있었다.
"큼! 크음!"
일단 헛기침으로 할아버지를 깨웠다.
싸가지있는 동방예의지국에서 자란 나인지라 먼저 손님이 왔음을 알리고자 했다.
'오잉?'
하지만 나의 헛기침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간달프.
뭔 개가 짖느냐는 표정으로 눈도 뜨지 않고 귀를 후비며 졸기를 멈추지 않았다.
'고, 고수?'
상인의 절정 경지에 이르면 들어오는 손님의 냄새만 맡아도 부자를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분명 내가 들어왔음을 알고 있음에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빈티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믄 이렇게 물러날 내가 아니었다.
상점 안에 있는 물건 하나라도 건진다면 부모님으로부터 싸가지없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 하이!"
손을 들어 서양식의 친절한 미소를 한껏 날렸다.
돈이 없으면 친절이라도 해야 뭔가 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번쩍.
그때, 졸고 있던 간달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떠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충격적인 대사 한마디.
"어디서 싸가없지 하이야? 어른을 봤으면 냉큼 고개를 수그려야지. 쯧쯧, 요즘 것들은...."
귓가에 들려오는 너무나 익숙하고 모자람없는 한국어.
간달프의 얼굴만 아니라면 동네 호랑이 할아버지라 해도 믿을 만큼 노인의 한국어 구사 실력은 뛰어났다.
"너, 돈 없지?"
연속해서 크리티컬 공격을 가해오는 간달프.
내 몸뚱이는 흠칫 놀란 채로 굳어버렸다.
낯선 동유럽의 하늘 아래서 만난 무늬만 체코산 할아버지.
겁날 것 없는 나조차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에 과부하가 걸렸다.
'어, 어떻게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았지? 그리고 저 유창한 원어민 발음은 무엇이더냐!'
기가 차다는 말의 뜻을 난생처음 경험했다. 아니, 우리 부모님의 육성 시뮬레이션 발언 이후로 두 번째.
멍한 표정으로 간달프의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크크. 내가 어떻게 네놈이 한국 사람인 줄 알았는지 궁금 하지? 그리고 내가 한국어를 이리 잘하는지도 궁금할 거고? 그렇지?"
'혹시 서양 무당?'
신내림을 받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내 마음을 알 수 있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 정신을 번쩍 차렸다.
'저, 정말 마법사? 에이, 설마....'
간판에 적혀 있던 대마법사라는 상호가 머릿속을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달나라에 무덤도 만드는 이런 세기에 마법사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 나 마법사다."
"헉!"
'이런... 말도 안 되는!'
세상에 생각까지 읽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눈속임인 마술도 아니고 뻔뻔스럽게 자신을 마법사라 말하는 외국산 무당.
제대로 작두 타고 장군 신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누구십니까?"
입 안에 도는 마른침을 삼키며 정체를 추궁하였다. 정규교육을 판타지로 받지 않고서야 제정신으로 마법사라 말할 이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것도 살날보다 갈 날이 훨씬 가까워 보이는 사람이 말이다.
"쯧쯧. 요즘 것들은 어른이 말하면 믿지를 않아요. 비싼 밥처먹고 이 나이에 헛소리할까.'
입에서 줄줄 새어 나오는 지극히 토속적인 언어 구사력.
이곳이 체코가 아니라 한국의 어느 상점처럼 느껴졌다.
'내가 귀신에 홀린 게야. 며칠 김치를 먹지 못해서 그런 걸거야.'
아무리 들어도 적응 안 되는 간달프의 모국어.
'위험해.'
등골을 스치고 가는 경고가 온몸을 짜르르 타고 흘렀다.
자칭 마법사라 칭하는 체코산 작두대신에게서 풍겨져 오는 요상한 기운, 그리고 이제야 보이는 가게 안의 여러 알 수 없는 문자들과 도형.
판타지 소설에서 말하던 룬 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춤주춤 문 쪽으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왜, 그냥 가게? 돈이 없으면 그냥 줄 수도 있는데...."
그냥이라는 말에 뒷걸음치던 발걸음이 주인의 의지를 무시하고 그대로 멈췄다.
'공짜!'
위험을 상쇄하고도 남을 보상 퀘스트.
'그래,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외국어 좀 할 수 있지. 그리고 사람 마음 좀 읽을 수도 있지. 저 나이 드셨으니 독심술이라도 배웠나 보지.'
갑작스럽게 마음에 이는 자기 위안.
알 수 없는 묘한 눈동자로 나를 훑어보고 있는 간달프에게 사심없는 혁이표 미소를 날렸다.
"하, 하하! 정말 한국어 실력이 유창하십니다."
말을 건네면서도 눈동자는 열심히 사방을 훑었다.
저 나이 먹고 거짓말하지는 않을 것.
최대한 값나가는 물건을 찾았다.
'오늘 일진 한번 좋다.'
예린과의 대화를 필두로 해서 우연찮게 들른 대마법사 간판이 붙은 가게. 주인장이 오타쿠 판타지 마니아여서 문제지 다른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인심이다. 여기 있는 물건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으로 하나 골라봐 내 선물할 테니까."
반지의 제왕 영화의 간달프처럼 사람 좋아 보이는 마법사 할아버지. 그 파격적인 제안에 내 입은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크하하! 심봤다!'
각박한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굳이 안 그려서도 되는데. 어른이 그리 말씀하시니 염치 불구하고 하나 고르겠습니다."
두말 나오기 전에 나는 처음 보는 순간 영혼을 팍 당겼던 은빛 팔찌를 집어 들었다.
'큼지막한 것이 짝퉁이라도 돈 좀 될 거 같은데. 흐흐, 대박이다!'
알 수 없는 문양과 글자로 음각된 은빛 팔찌. 은과 백금 중간쯤의 빛깔을 풍겨내는 팔찌는 한눈에 보아도 극상의 레어템이었다.
더욱이 은빛 팔찌 안쪽 곳곳에 박혀 있는 다이아몬드 비슷한 반짝이는 돌들.
짝퉁이라도 값어치가 제법 나갈 것 같았다.
'묘하게 당기네.'
황금으로 만들어진 다른 장식품이나 물건들도 제법 있었지만 특이하게 마음에 들어오는 은빛 팔찌.
헛것처럼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팔찌에서 은은이 풍겨 나옴이 느껴졌다.
"크크크. 그래, 그랬어. 그럼 그렇지."
내가 팔찌를 들자 고개를 끄덕이며 알 수 없는 말을 뱉어내는 간달프 할방.
'튀자!'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듯, 간달프 할방이 취소할 수도 있는 상황.
튀자는 생각과 함께 고개가 직각으로 수그려졌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싸가지있는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나였기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했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푸하하! 이게 웬 떡이냐!'
정말 마음에 드는 팔찌.
들고 있는 자체만으로 부자가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덜컹.
'엥?'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열어도 열리지 않는 가게 문. 한 완력 소유한 나이건만 문의 손잡이는 일제 강력 본드를 바른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흐흐...."
그리고 들려오는 음흉한 웃음.
온몸에 털이 쫘악 일어섰다.
'쪼, 쪼잔하게. 다시 달라고는 하지 않겠지.'
어차피 힘으로 한다면 나에게 댈 수 없는 간달프 할방.
그러나 그런 일 없다고 잡아떼면 돌려줘야 할 판이었다.
아무리 탐이 나도 도둑으로 몰려 체코 교도소에서 제공하는 콩밥은 사양하고 싶었다.
"선물도 받았으니 이제 가자꾸나."
"네?"
갑자기 가자는 말을 뱉는 간달프 할방의 발언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헛!"
나는 그 자리에서 다시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파스스스스.
어느새 간달프 할방의 손에 들린 요상한 막대기.
파란색의 강렬한 빛을 방 안에 쏟아내고 있었다.
"왜, 왜 그러세요? 이거 공짜 아닌가요?"
입술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바르르 떨렸다.
"공짜? 물론 공짜지. 단, 네가 살아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야. 크하하하하하하!"
이번엔 부들부들 손이 떨렸다.
갑자기 사람이 변한 간달프 할방.
그의 몸에서는 정말 대마법사처럼 광채가 흘러나왔다.
'시파! 뭐야, 이런 김밥 옆구리 터지는 액션은?'
간달프가 뿜어내는 강력한 포스에 말문이 막혔다.
다만 귓가에 들리는 친근한 한마디.
"슬립!"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오는 마법 영창.
온몸이 엄청난 에너지의 파장에 휩싸여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도 공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은빛 팔찌를 꽉 움켜쥐고서.
'엿 됐다....'
알 수 없는 공포에 한숨을 짧게 토하며 그렇게 나는 긴 잠에 빠져들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 따위는 난생처음 맛본 마법의 황홀한 맛(?) 에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