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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무도회 (16/18)

15장 무도회

2002년 5월

최고로 끝내주는 열흘이었다. 앨리와 나는 다시 불이 붙어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온갖 방식으로 토깽이처럼 박아댔다. 앨리의 아담한 몸은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다. 나는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고도 앨리를 벽으로 들어 올리고 박아 줄 수 있었고 팔에서 기운이 떨어지지 않고도 수레처럼 다리를 들고 박아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버티지 않고 서서 박을 때에는 다리가 젤리처럼 풀리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었다.

앨리는 “휴가”를 알차게 보내고 싶다며 하루라도 건너뛰는 날이 없도록 신경을 썼다. 그래서 우리는 다소 모험적인 섹스를 시도해보기도 했다. 한 번은 방과 후에 학교 화장실에서 해보기도 했는데, 앨리는 한 술 더 떠 무도회에서도 몰래 섹스를 하자는 것이었다.

무도회 이야기가 나왔느니 말인데, 나, 케니, 성준은 셋이 작당해서 애비, 스테파니, 앨리를 모실 리무진을 대절하기로 했고 다니엘, 케이토, 캐머런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리무진을 빌리기로 했다고 한다.

치어리더 친구들을 말하자면, 헤더하고 린은 무도회 짝을 구했다고 했고 에이드리안도 카일 맥긴리하고 동행하기로 했다고 한다. 카일은 드루-마르코 사건 때 우리를 옹호해 주었는데, 에이드리안은 그 이후로 종종 카일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고 결국에는 무도회에 함께 가자는 청을 받게 되었다. 에이드리안은 승낙했다. 나는 그 둘이 다시 사귀거나 하지는 않을지라도 재미삼아 가끔 섹스를 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둘은 꽤 가까워진 것처럼 보이는데다가 이미 데이트를 한 적도 있었다. 게다가 에이드리안은 더는 섹스와 믿음에 관한 심리적인 장애에 시달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무도회가 열리는 토요일까지는 겨우 3일만 남았을 뿐이라서 다들 젊은 날의 가장 큰 이벤트를 걱정 반 기대 반이 섞인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낭만적인 밤과 무도회라는 마법적인 순간을 고대하며 꽤 들떠 있었다.

그러나 곧 닥쳐올 메가톤급 폭탄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짐작지 못하고 있었다.

수요일 오후 4시가 되었을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평소대로 에이드리안을 맞아주러 문을 열어주었다.

“헤이, 타이거.” 에이드리안은 밝은 오후의 빛을 맞으며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아직 수평선 위에 높게 떠있는 태양은 온누리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매혹적인 내 친구를 대면할 때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헤이, 에이디. 카일은 어때?”

“좀 초조해하더라구.” 에이드리안은 안으로 들어서서 나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왔다.

“헤이, 에이디.” 브룩이 어슬렁거리며 우리를 지나치고 거실로 들어가 리모콘을 잡았다. 더 나은 여흥 거리가 생긴 만큼 상관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응접실 소파에 자리 잡았다. “카일이 초조해한다구?”

“응, 덩치가 산만하고 남자다운 것치고는 성격이 예민한 것 같아. 예전에 데이트할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어.”

“겉모양만 보아서는 알 수 없어, 그치?”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걔랑 다시 데이트를 하는 데에 그런 예민한 성격이 보탬이 되는 건가?”

에이드리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데이트? 벤, 한 달만 있으면 졸업이라구!”

“아하,” 나는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하기 전까지 그냥 즐기자는 거구먼.”

“벤!” 에이드리안은 네 팔을 때리고 씩 미소를 지었다. “쌍둥이들은 집에 있어?”

내가 고개를 내젓자 에이드리안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사실,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 확실치 않아.”

“뭐? 요 한 달 내내 자지 타령을 했잖아?”

에이드리안은 내 아랫도리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싫다는 건 아니지만, 단지... 너 진짜 그래도 괜찮겠어?”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당연하지. 친구로서 네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구.”

에이드리안은 미소를 지었다. “다정도 하셔라, 하지만, 아직은 카일하고 잘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

“걔 호텔방 잡을 거지, 그치?” 나는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은근하게 떠보았다.

“사실은, 아니. 방을 잡지는 않을 거래. 우린 사귀는 것도 아닌데다가 걔도 설레발을 떠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나 봐. 단지 무도회 짝이 돼줘서 고마워하기만 하던걸. 뭐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게 뻔해. 존심이 없는 남자가 아닌 이상 그런 황금 같은 기회를 잘도 날려버리겠다.”

에이드리안은 얼굴을 붉혔다. “글쎄.”

“뭐, 내가 제안을 할게. 난 호텔방을 하나 잡아두었는데, 앨리가 나가떨어지고 나면 나한테 와도 돼.” 내가 대놓고 젖가슴을 쳐다보자 에이드리안은 짜증이 난 척을 하며 눈을 굴리고는 내 얼굴에 젖가슴을 들이댔다. 우리는 육체적인 끌림을 묻어두고 겉으로 플라토닉한 관계를 가장하기 위해 그런 유치한 장난으로 성적 긴장을 해소하곤 했다.

에이드리안은 잠시 킥킥대다가 뒤로 물러서서 한숨을 내쉬고 무척 심각한 투로 말했다. “알다시피, 그런 농담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 얼굴을 찌푸렸다. “뭐?”

에이드리안의 헤이즐 눈에서는 아련한 빛이 감돌았다. “난 한동안 우리가 무도회의 짝이 될 줄 알았어. 네가 도온하고 헤어졌다고 했을 때 말이야. 난, 그러니깐... 우리가 함께하는 게 아니라고 했을 때에도 결국에는 우리가 함께하게 될 줄로 알고 있었어. 알겠어?”

나는 길게 숨을 내쉬고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한동안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

“내가 잘못한 거야.” 에이드리안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다 내가 대범하지 못해서 그래.”

“헤이, 헤이.” 나는 에이드리안을 끌어안았다. “자책하지 마.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내가 늘 곁에 있어줄게. 카일 맥긴리하고 하룻밤을 보내는 것만큼 값어치 있는 우정이지?” 나는 가볍게 농담을 했다.

에이드리안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 그래, 우정...”

마치 시간이 느려지듯 에이드리안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사방이 적막해지고 벽과 바닥이 희미해졌다. 세상에는 우리 둘과 소파만 남아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내 가슴에 기대며 크고 빛나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의 얼굴은 억만금을 준대도 구할 수 없는 완벽한 미의 걸작이었다. 그리고 음악같이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목소리. “토요일에 너와 함께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는데”

입안이 마르고 온 세상이 에이드리안으로 응축됐다. 내 가슴이 나를 대신했다. “아직도 그럴 수 있어.”

에이드리안은 내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 뒤로는 자동으로 일이 벌어졌다. 나는 고개를 기울였고 에이드리안도 고개를 들고 내 입술과 만났다. 에이드리안이 전매특허를 낸 핵폭탄 키스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키스를 하자마자 에이드리안이 화들짝 고개를 치워버렸다. “안 돼, 안 돼.”

나도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들었다. “오, 젠장. 미안해. 에이드리안.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어.” 다시 세상이 나타났다. 벽, 바닥. 창.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꼭 무도회 짝이 되어주겠다고 앨리한테 한 약속도. “아, 제길.”

“안 돼. 벤. 우린 그럴 수 없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더라도. 무도회를 3일 앞두고 카일과 한 약속을 깰 수는 없어. 앨리한테도 몹쓸 짓을 하게 되는 셈이야.”

“맞아. 맞아.” 나는 머리를 움켜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수를 했어. 내 실수야. 미안해, 에이드리안.”

“아니, 내가 미안해, 벤. 시작한 건 나였어.”

“아니, 내가 시작했어.”

“내가 먼저 키스했잖아.”

“유도한 건 나였어.”

에이드리안은 깊숙이 숨을 들이켜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우린 잘 될 수 없어, 벤. 난 널 원해. 시팔! 널 무진장 원한다구! 하지만, 넌 도온 거야. 넌 여름이 오면 걔랑 재결합해서 내 마음은 찢어놓을 거야. 그런 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에이드리안.” 나는 손을 내밀어 에이드리안을 잡았다. 에이드리안을 잃을 순 없었다. 절대로 또다시. 나는 무겁게 숨을 들이켰다. “만약에... 만약에 내가 대학에서 도온하고 재결합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야? 내가 뭘 알 수 있겠어? 난 도온과 1년에 한 달만 같이 지냈을 뿐이야. 우린 이제 어린 아이가 아냐. 우린 이제 다 커서 완전히 딴 사람이 됐어. 우리가 얼마나 변했는지 누가 알 수 있겠어?

“넌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냐.”

“하지만... 진짜로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건데?”

에이드리안은 눈물이 글썽해진 눈을 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러지 마, 벤. 확신이 서지 않는 이상은 괜히 헛바람 집어넣지 마.”

“난 아직도 널 사랑해, 에이드리안. 너 나랑 함께하고 싶지 않아?’

에이드리안은 훌쩍이며 물었다. “그럼 진짜로 너 도온 대신 날 선택할 수 있어?”

거친 숨이 쏟아졌다. 그럴 수 있을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게 인지상정 아니던가? 나는 도온을 사랑한다고 우겼다. 그러나 도온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던 적이 언제였더라? 게다가 다 자란 도온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여름 캠프 도온’은 사랑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만의 작은 세계 속에서 함께할 수 있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마법적인 휴양지에. 그러나 현실에서도 도온을 사랑할 수 있을까? 제길, 도온이 컨츄리 음악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도온은 환상 속의 여자애였다. 환상 속의 여자애를 사랑하는 건 늘 손쉬운 일이었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함께했고 이젠 잠시 이별을 겪고 나서 다시 합치기로 되어 있었다. 동화에나 어울릴 듯한 낭만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현실은 동화가 아니다. 에이드리안은 현실이었다. 에이드리안은 현재 여기에서 나와 함께하고 있었다. 비록 거친 감정의 소용돌이를 거쳐왔지만. 에이드리안은 나를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아직도 이곳에서 같이 머물고 있었다. 아직 함께할 가능성이 남은 채.

나는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열여덟 살이 되었고 실질적으로는 성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이 바로 동화 같은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면해야 할 때일 수도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여기 이곳에서, 내 삶의 한가운데에서, 먼 기억 속에만 남은 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육신을 갖춘 모습으로 나와 함께하고 있었다. 나는 넋이 달아날 만큼 예쁜 젊은 여자애를 골똘히 응시했다. “에이드리안, 날 사랑해?”

에이드리안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로 훌쩍였다. “응.”

나는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어쩌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는 말이었다. 나는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그렇다면, 나도 도온보다 널 선택할게.”

에이드리안은 그 즉시 울음을 터트렸다. 두려움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자기를 위해 인생을 바꿀만한 결정을 내린 나로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반응이었다.

내가 손을 내밀자, 에이드리안은 손바닥으로 내 손을 밀쳐냈다. 나는 내가 이기적이었음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히 나만 관련된 문제가 아니었다. 도온을 포기하고 에이드리안을 선택한 그런 단순한 결정만은 아니었다. 에이드리안과 나한테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이 딸려 있었고 에이드리안도 진정으로 나와 함께하고 싶은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쩌면 나와 카일 사이에서 한 명을 결정해야 하는 문제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에이드리안한테는 어떤 이유에서건 나와 완전히 갈라서게 될 수도 있는 불안전한 미래를 무릅쓰는 것과 안전하게 친구로만 남는 것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문제가 던져진 셈이었다.

솔직히 말해, 나도 어떤 선택을 반겨야 할지 확신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나는 에이드리안이 내 것이 되길 바랐다. 나는 진정으로 에이드리안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도 두려웠다. 우리는 아직 너무 어렸고 불상사는 늘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진정으로 우리가 갈라설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길 원하는 걸까? 내가 일을 그르치기라도 해서 에이드리안이 나를 떠난다면 버틸 수나 있는 걸까?

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나는 무시하려고 했다. 핸드폰을 받기에는 우리 둘한테 너무나 중대한 순간이었다. 나는 다시 에이드리안한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자꾸만 울려 퍼지는 핸드폰 소리에 짜증이 났다. 그래서 핸드폰을 꺼내 벨소리를 죽이려는 순간 발신자의 아이디가 눈에 띄었다.

도온이었다.

숨이 멎는 듯했다. 몇 주 전 생일축하 전화가 마지막 통화였다. 그런데 언제든지 걸 수 있는데 하필 지금?

에이드리안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누구야?”

“도온.” 목이 멨다.

에이드리안은 내 표정을 꼼꼼히 읽으려 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실제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순간. 나는 도온을 사랑했다. 우리는 아기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고 자라면서는 놀이 상대, 그리고 사춘기 때는 성적인 탐험을 함께한 사이였다. 우리는 연인이자 친구였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자라서 같은 대학에 다니며 관계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우리는 단순히 어렸을 적 친구라고만 할 수 없는 그런 사이였다.

나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버튼을 눌러 벨소리를 죽이고 핸드폰을 커피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벤... 난...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어. 너무나 갑작스러운데다가 무도회는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앨리나 카일은 어떻게 하구? 난... 난... 아직도 두려워.”

어깨가 축 늘어지고 한숨이 나왔다. 이처럼 짧은 시간에는 소화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나도 생각지 못한 문제였다. 앨리한테 너무나 몹쓸 짓을 하게 되는 게 아닐까? 나는 약속을 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에이드리안.”

“벤, 미안해.”

“아니, 괜찮아, 에이드리안. 절대로 강요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적이 있잖아. 지금은 그러지 않을게. 내키는 않는 관계를 억지로 맺어봤자 길게 가지 않을 게 뻔하잖아.

“난 진짜로 널 사랑해. 그리고... 실제로 네가 도온 대신 날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에 너무나 놀랐어. 하지만,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어.”

“괜찮아, 이해해.”

에이드리안은 나한테 몸을 던졌다. 그리고 키스를 해오지는 않았지만, 무척 긴 시간 동안 나를 온 힘을 다해 힘껏 부둥켜안았다. “난 널 절대로 잃고 싶지 않아, 벤.”

“그렇고말고.” 나는 에이드리안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 “그렇고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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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안은 한참 뒤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가슴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한바탕 눈물을 쏟았으니만큼 감정적으로 탈진했을 것이다. 나는 에이드리안이 친밀하고 로맨틱한 관계를 주저하는 이유를 되새겨보았다. 에이드리안은 연인보다는 가족처럼 자기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절실했다. 아마도 에이드리안은 나를 미래의 남편감을 본 게 아니라 자기의 아빠나 오빠가 되어줄 수 없었던 가족 같은 일면을 보았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에이드리안은 몸을 추스르고 똑바로 앉아 코를 풀고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또다시 훌쩍이며 나를 가리켰다. “너도 셔츠를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아.”

내 흰색 셔츠를 내려다보니 알록달록한 색깔이 곳곳에 번져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부모님과 쌍둥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얼굴을 씻고 화장도 고칠 겸 복도 화장실로 향했다.

나는 느릿하게 숨을 내쉬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감정의 격랑을 겪어서인지 굉장히 피곤했다.

그러나 그 순간 번뜩 떠오르는 게 있어 커피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핸드폰에서 불빛이 점멸하는 게 도온이 메시지를 남긴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뻐근한 목을 풀 겸 기지개를 켜면서 핸드폰을 들어 올리고 1번 버튼을 눌렀다. 그 즉시 음성 메시지가 들렸다.

착 가라앉은 도온의 목소리는 다소 침울하게 들렸다. 도온은 더 일찍 연락하지 않아서 미안하다며 생각할 게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몇 번 더 무겁게 숨을 몰아쉬고 내 심장을 싸늘하게 얼려버리는 말을 쏟아냈다.

“벤, 미안해. 여름이 되면 다시 합치기로 약속한 걸 알지만, 나랑 라이언 상황이 좀 변하게 됐어.”

마지막 말을 듣고선 내 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온으로서는 이 메세지를 남기기 전에 숙고할 시간이 무한정 있었을 것이다. 도온은 짧고 간략하게 요점만 말했다. 내 심장은 그런 도온의 말을 들으며 가라앉고 가라앉고 또 가라앉았다. 나는 도온의 메시지를 다 듣고 나서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기묘한 상황이었다. 머리로는 내가 이미 도온으로 대변되는 환상 대신 현실을 표상하는 에이드리안을 선택한 걸 알고는 있었지만, 도온도 나하고 마찬가지인 선택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마치 심장이 도려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조용히 일어서서 층계로 향했다.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가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묵묵히 책상으로 다가가 도온의 사진이 든 액자를 덮어버렸다.

에이드리안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내 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고 단번에 분위기를 간파했다. “벤? 무슨 일이 생겼어?”

나는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멈춰버렸다. 나는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온은 라이언하고 함께할 거래. 라이언은 올해 진짜 열심히 공부해서 버클리로 편입할 수 있게 되었대. 도온은 나를 한없이 좋아하고 평생 친구로 소중히 생각하지만, 자기와 라이언이 지금껏 이룩한 관계를 버리고 싶지는 않다고 했어.”

나는 꾹 입을 다물고 벽만 쳐다보았다.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느껴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화를 내야 할까 슬퍼해야 할까. 따지고 보면 도온과 끝을 내려고 한 건 내가 먼저였다.

에이드리안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내 곁에 앉아 나한테 팔을 둘렀다.

“정말 안됐어, 벤.” 진실한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감고 숨 쉬는 것에 집중하려고 했다. 내일은 나한테 남은 인생을 시작하는 첫날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부모님이 귀가하고 나서도 내 곁을 지켜주었다. 마침 수요일이기도 해서 저녁때까지 머무를 작정인 것 같았다. 에이드리안은 잔인한 세상을 무시하며 혼자 청승을 떨고 있는 나를 식탁에는 앉힐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먹는 둥 마는 둥 몇 술 뜨지 않고 “나 건들지 마”라는 신호를 발산하며 꾹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부모님은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닫고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었고 동생들도 평소처럼 까불어대지 않았다. 대신에 부모님은 에이드리안한테 물어보았고 에이드리안은 저녁 식사가 끝나자 두 분을 부엌으로 끌고 가 도온이 라이언과 함께할 거라며 나하고는 재결합하지 않을 거라는 음성 메시지를 남긴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분명히 엄마는 나중에 디애나 에벤스한테 전화를 걸어 자세한 사정을 들으려 할게 뻔했다.

저녁을 먹고 나자 다들 나를 혼자 내버려주었다. 에이드리안은 포옹을 하며 내일 보자고 했다. 아마도 에이드리안은 키스사건과 그 후에 벌어진 감정적인 아수라장이 없었더라면 내 곁에 머무르려고 했을 것이다.

쌍둥이들이 하루나 이틀 뒤에는 어련히 기분을 풀겠지 하며 나를 무시한 것에 비해 브룩은 마치 개인적인 임무라도 되는 양 내 기분을 풀려고 갖은 애를 썼다. 브룩이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며 내 기분을 돌리려 할 때부터 뭔가 계획이 있는 걸 눈치챘어야 했다. 브룩은 이미 두 번이나 그런 전력이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침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내 팔자를 곰곰이 되새기고 있었다. 도온이 없는 미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미래를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나 간혹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늘 내 곁에는 도온이 함께하고 있었다. 우리가 반백이 되었을 때 함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뭔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조용한 노크 소리를 듣고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초가 지나자 스르르 문이 열렸다. “벤?” 브룩은 수건만 걸친 모습으로 방으로 들어왔다. 그새 굴곡이 뚜렷해진 몸매가 눈에 들어왔다. 내 동생은 어엿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이번에 브룩은 내 얼굴에 대고 손을 흔드는 짓을 하지 않았다. 브룩은 섹스야말로 내 기분을 돌릴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브룩은 문을 꼭 닫아두고 수건을 내려뜨려 알몸을 드러냈다.

황금빛으로 선탠을 한 피부는 방금 샤워를 해서 보기 좋게 광택을 발하고 있었고 짙은 머리카락은 촉촉이 젖어 두피에 달라붙어 있었다. 젖가슴도 또래 얘들보다 더 크고 당돌하게 보이는 게 어쩌면 이미 브랜디보다도 더 커졌을 수도 있었다. 짐작하건대 브룩은 우리 가족 중에서 최초로 C컵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브룩은 섹스야 말로 나를 치유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나를 꾀려고 했다. 브룩이 내 자지를 찾은 건 일주일 전쯤이었다. 그래서 오르가즘의 바다 속에 고뇌를 떨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 은근히 마음이 동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도온 문제였다. 우리는 함께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나도 요 몇 달간 도온을 잊고 지냈던 게 사실이었다. 아마도 마음 한구석으로 도온과 라이언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사이 에이드리안과 찍어야 했던 드라마가 도온을 잊고 지낸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마음속 깊숙이 도온이 언제까지나 나를 기다릴 줄로 믿고 있었다. 내가 어떤 위기에 처하더라도 여름이 되고 대학에 들어가면 만사가 잘 풀릴 거라는 생각이 늘 남아 있었다. 나는 별다른 의심 없이 도온이 숨겨둔 조커가 되어주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도온이 나를 떠나버렸다.

브룩과 섹스를 한들 그런 뻔한 사실이 사라질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벽만 쳐다보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브룩 옷 입어.”

브룩은 내 말을 무시하고 침대로 올라와 내 무릎 옆에 앉았다.

“브룩, 그럴 기분이 아냐.”

브룩은 내 말을 무시하고 허리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마음이 동해 단단해진 자지를 끌어냈다. “이건 그럴 기분이라는데.”

“자기가 혼자서 지랄하는 거야. 그렇지만, 섹스를 한다고 기분이 풀리진 않아.”

브룩은 자지를 놓지 않고 눈만 깜박였다. “5초밖에 안 되는 행복이라도 꼭 해주고 싶어. 오빠.” 그리고는 꿀꺽하고 내 자지를 삼켜버렸다. 아직도 목구멍 깊숙이 삼키는 것엔 서툴렀지만, 따듯한 느낌과 깔짝거리는 혓바닥, 강력하게 빨아대는 입술 덕에 그 순간만은 울적한 심사를 잊을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베개에 고개를 눕혔다. 쾌락과 고뇌가 교차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 여동생의 입술이 내 자지 밑동을 덮었다.

호울리 싯! 드뎌 완성했잖아!

브룩은 갑자기 뒤로 목을 당기고 자지 끝을 문 채 숨을 헐떡였다. 그 순간 불알이 바짝 쪼그라들면서 내용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5초보다는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행복할 수 있었고 새삼 브룩이 고마웠다.

그러나 영원히 행복할 순 없었다. 나는 브룩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어둠 속에 누워 긴 시간 동안 도온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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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는 당연하게도 나한테 뭔가 잘못된 게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감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귀여운 여자친구는 5초 만에 나를 달래려 애를 썼다. “자기야? 뭐가 잘못됐어?”

“말하고 싶지 않아.”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앨리는 쉬는 시간마다 나를 달래려 했고 점심시간이 되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친구들 앞에서는 호들갑을 떨고 싶지 않아 의연하게 굴려고 했지만, 다들 내가 좋은 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에이드리안도 별 도움이 되어주지 않았다. 에이드리안은 자기만의 멜랑콜리한 감상에 빠져 나하고 거리를 두고 헤더랑 린하고만 붙어 지냈다. 사실 에이드리안의 부재(不在)는 내 기분을 더 어둡게만 했다. 어쩌면 아무런 결실을 볼 수 없었던 키스 사건을 영영 후회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앨리는, 착하고 알뜰한 앨리는 포기할 줄을 몰랐다. 심지어는 메간과 캐시디를 동원하기도 했다. 별로 효과를 보지는 못했지만.

앨리는 수업이 끝나고 나서는 에이드리안을 끌고 오기까지 했다. 에이드리안은 나를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고는 앨리한테 말했다. “도온이 얘랑 헤어졌어.”

앨리는 눈썹을 찌푸렸다. “허?”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맞아, 함께하는 건 아니지. 그건 얘들이 멀리 떨어져 살아서 그런 거야. 얘들은 여름이 되고 대학에 들어가서 다시 합칠 계획이었어. 그런데 도온이 현재 남자친구랑 함께하고 싶다고 했대.

앨리는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았고 나는 에이드리안을 보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게 다가 아니잖아.” 사실 에이드리안이 나를 거부한 일도 내 울적한 심사에 한몫을 하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얼굴을 찌푸리고 나한테서 얼굴을 돌렸다.

“다가 아니라구?” 앨리는 나를 쳐다보고는 자리를 뜨려는 키 큰 치어리더를 붙잡았다.

“암것도 아냐.” 에이드리안은 나를 외면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얠 고치고 싶어? 그럼 얠 죽도록 박아주라구. 얜 벤이야. 얜 원래 그래.”

그러나 앨리는 그 정도에서 끝내지 않았다. 앨리는 에이드리안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랑 같이 가자.”

“뭐?”

“뻔하잖아. 에이드리안, 넌 얠 원하고 얜 널 원해. 어서 따라와.”

“얜 네 남자친구라구, 앨리.”

앨리는 열을 냈다. “신경 쓰지 않는다고 누누이 말했잖아. 시팔, 에이드리안! 너희 그냥 일찌감치 박아버리면 안 되겠니? 왜 이렇게 복잡하게 구는 거야? 얜 더 이상 도온한테 매인 것도 아니잖아!”

에이드리안은 일순 망설이는 눈치를 보이다가 끝내 고개를 내젓고 앨리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를 떴다.

앨리는 나를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앨리의 참견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예전부터 친한 친구였고 최근에는 남자친구/여자친구가 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한 달만 있으면 끝나게 되는 시한부 관계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다. 우리는 심각한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그저 서로 즐기자는 게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나 앨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앨리는 나를 우리집으로 데려가 브룩한테 나를 혼쭐나게 박아주겠다고 단단히 일러두고는 내 방으로 나를 끌고 올라갔다. 그리고는 그 말대로 나를 혼쭐나게 박아주었다. 그리고 브룩하고는 다르게 나를 끝까지 행복하게 해주었다. 에이드리안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나는 원래 이런 놈이었다. 아무튼, 아담한 여자애의 조여드는 보지를 박아대면서 행복하지 않을 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앨리는 한 차례 일을 치르고 나서 더는 청승 떨지 말라면서 내 품에 안겼다. “너만큼 멋진 삶은 드물어, 벤. 널 부러워하는 애들이 한둘인지 알아?”

나는 평온한 오르가즘의 후희를 느끼며 다정한 여자친구한테 키스했다. “고마워, 앨리.”

“뭐, 한 번으로 부족하다면 두 번째는 어떨지 확인해 볼까? 내가 좋아하는 벤으로 돌아올지.”

두 번째도 좋았고 세 번째는 거의 평소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에는 브룩이 또 내 방으로 숨어들어왔다. 브룩은 전날 밤에 블로우잡만 해주고 내가 그럴 기분이 아니라는 걸 알고 박아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꺼운 마음이었고 그래서 브룩은 내 좆물을 받고 나서 기쁘게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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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는 금요일 밤에도 울적한 심사를 잊을 수 있을 만큼 몸보시를 해주었다.

나는 끄떡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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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으로, 숙녀분들.” 케니는 절을 하며 우아하게 팔을 저어 우리 학교가 무도회 장소로 쓰는 호텔 입구를 가리켰다. 그러고 나서는 정중히 무게를 잡고 애비한테 팔을 내밀었다.

귀여운 브루넷은 킥킥대며 정중히 절을 하고 케니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둘은 호텔 입구로 향했다.

성준은 웃음을 참지 못했지만, 방정맞은 것과는 거리가 먼 성미라서 그냥 팔만 들어 올리고 스테파니를 기다렸다. 눈부시게 예쁜 스테파니는 미소를 짓고 성준의 팔을 붙잡고 입구로 향했다.

나는 리무진 기사와 잡일을 처리하고 호텔 사환한테 짐을 우리 방으로 옮기게 했다. 그리고 앨리한테 돌아와 케니보다는 덜 과장된 폼으로 절을 하고 팔을 내밀었다. 앨리는 내 비루한 안목으로 보건대, 쌍둥이 언니보다 훨씬 예쁘게 보였다. 하늘거리는 파란 드레스는 맨살을 드러낸 어깨와 날씬한 몸매를 강조해서 평소보다 키가 커 보이게 했다. 물론 3인치 힐도 보탬이 되었겠지만.

앨리는 내 팔에 손을 얹었고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앨리의 손등에 키스했다. “너 오늘 무진장 예뻐, 앨리슨 샌더스.”

“입에 바른 소리를 하는 거 보니 음흉한 꿍꿍이가 있는가 보네.” 앨리가 미소했고

나도 미소했다. “암 그렇고말고.”

하루 이틀 만에 기분이 바뀐 것에는 나 자신이 놀랄 지경이었다. 나는 이틀 동안 내 기분을 돌이키려 몸과 마음을 다 바쳤던 앨리한테 고마움을 표시하려 맹렬한 키스를 심었다.

앨리는 키스를 마치고 그 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뜻이야?”

“고마워서. 요 며칠 동안하고 요 몇 달 동안 말이야. 너보다 더 나은 여자친구는 없었을 거야.”

앨리는 눈을 깜박이다가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왠지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뭐가 잘못됐어?”

앨리는 나를 올려다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암 것도 아냐.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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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저녁이었다. 우리 일행은 커플 사진을 찍고 나서 다 함께 모여 단체 사진을 찍었다. 순진했던 열 명의 신입생들은 친구가 되어 학창 생활을 함께했고 이제는 다섯 쌍의 커플이 되어 있었다. 다니엘과 일레인부터 시작해서 케이토와 메간, 성준과 스테파니, 케니와 애비, 그리고 제일 느지막하게 나와 앨리. 캐머런을 데리고 온 캐시디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며 새삼 놀라워했다.

우리는 각자 짝을 데려온 에이드리안, 헤더, 린을 마주쳤다. 남자애들은 평소처럼 ‘너무 예뻐서 자꾸 쳐다보다간 눈이 멀지도 몰라’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에이드리안을 훔쳐보기에 바빴고 헤더도 에이드리안 못지않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린은 깨물어주고 싶은 만큼 귀여웠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가며 갈라서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에이드리안한테 저절로 눈길이 쏠리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요 이틀 동안 나를 피하고 다닌 에이드리안이 몹시도 그리웠다. 우리는 스무 발짝쯤 멀어졌을 무렵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나는 강한 전류가 뇌리를 때리는 것을 느끼며 실제로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영문을 몰라 거친 숨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 순간 앨리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저녁 식사도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호텔 음식이야 거기서 거기지 뭘 더 바래? 게다가 저녁을 먹자고 온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우리는 별다른 일 없이 춤을 추는 곳으로 이동했다. 나는 작년보다 훨씬 나아진 춤 솜씨를 뽐낼 작정이었다.

나는 춤추는 꼴만 보고도 잠자리를 알 수 있다는 말을 라틴 남자들이 퍼트린 허풍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춤을 추는 것과 박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라구, 섹스를 할 째는 두 다리로 균형을 잡을 필요가 없잖아. 두 다리로 섹스하냐? 엉덩이하고 두 팔로 섹스하지.

그러나 한 가지 일맥상통한 점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섹스를 할 때와 춤을 춤 때는 둘 다 파트너한테 집중을 해야 한다. 파트너가 움직이면 나도 움직여야 한다, 완벽하게 보조를 맞춰서. 나는 스스로 그런 점이 나아졌다고 느끼고 있었다.

단체로 춤을 추는 빠른 곡이 나올 때는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는 아무 이성 친구한테 다가가 마구잡이로 어울렸다. 맞아, 아직은 졸업하기까지 한 달이라는 기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차피 졸업을 하게 되어 있었고 이런 때가 아니면 더는 섹시한 이성친구한테 대답하게 굴 기회가 남아 있지 않았다.

메간은 다니엘한테 다가가 엉덩이를 부딪치며 귀엽게 웃음을 터트렸다. 4년 동안 늘 일레인하고 사귀느라 한 번도 터치해 볼 수 없었던 남자애를 마지막으로 건드려보겠다는 듯. 애비와 앨리는 평야설넷면 말을 걸 수조차 없었던 귀여운 야구부 남자애한테 다가가 꼬리를 치며 춤을 추었다. 심지어 일레인은 나한테 다가와 짓궂은 미소를 짓고 엉덩이를 돌려댔다.

케니도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처음에 케니는 메간과 캐시디 사이에 끼어들어 들 떨어진 미소를 짓고 여자애들 쪽으로 박는 시늉을 하며 허리를 돌려대다가 스테파니한테 돌아서서 엉덩이를 들이댔고 결국에는 스테파니한테 엉덩이를 얻어맞았다. 그리고 에이드리안이 일행이 스치는 걸 보고는 부끄럼 없이 키 큰 블론드한테 바짝 다가서서 침을 줄줄 흘리며 젖가슴을 내려다보고 춤을 추기도 했다. 마치 고이 묵혀 두었던 왕년의 변태왕 케니의 본성이 잠시나마 마각을 드러낸 것처럼.

나는 느린 음악이 흘러나왔을 때는 재빨리 앨리를 찾아서 내 품에 앉고 무대를 돌아가며 춤을 추었다. 그러나 빠른 춤을 추어대느라 마구 용솟음쳤던 아드레날린이 잦아들 무렵에는 앨리를 더욱 바짝 끌어안고 황갈색 눈을 정답게 바라보며 느린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댔다.

나를 골똘히 올려다보는 앨리의 눈에서는 마치 마지막이라는 듯한 체념의 빛이 어려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앨리의 눈에 빨려 들어가듯 더욱 앨리를 끌어안았고 춤곡이 끝났을 때는 앨리의 입술에 키스를 심었다. 왠지 아름다우면서고 달콤쌉싸름한 느낌이 드는 키스였다.

우리는 둘 다 울적한 심사를 느꼈다. 나는 눈을 깜박이고 나직이 물었다. “앨리, 무슨 일이야?”

“암 것도 아냐.” 앨리는 눈물을 참는 듯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느낌이 그래.”

“뭐가?”

앨리는 마치 순간적인 고통이 스친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 자리에는 고요한 미소를 지은 에이드리안이 서 있었다. “헤이, 얘들아!” 살며시 걱정스러워하는 기미가 담긴 목소리였다. ‘잠깐 끼어들어도 될까?”

내 여자친구는 내가 에이드리안과 말을 하고 싶은 것만큼이나 뭔가 속이 상한 모습이었다. “사실은, 에이드리안, 우린-”

앨리가 내 말을 끊었다. “그렇게 해.” 앨리는 내 손을 에이드리안한테 건넸다. 내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앨리가 자리를 뜨려고 돌아섰다.

“앨리, 기다려!”

앨리는 케니와 춤을 추고 있는 애비를 끌어당겼다. “난 화장실에 가야 해.” 샌더스 쌍둥이들은 급히 자리를 떴다.

에이드리안은 내 뒤에 서서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뭐가 잘못됐어?”

나는 뭔가 찜찜함을 느끼며 앨리의 꽁무니를 쫓았다. “어...” 나는 뭔가 말하려 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니, 별일 아냐.” 그리고는 팔을 벌리고 키 크고 당당한 에이드리안을 내 품으로 끌어당겼다.

에이드리안은 4인치 힐을 신어서 나보다 키가 컸다. 사실 좀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나는 미소를 짓고 에이드리안의 감촉을 즐겼다. “요 사흘 동안 무진장 그리웠어,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은 아련히 미소를 지었다. “나도, 하지만 이제 결심이 섰어. 난 수요일에 벌어진 일을 심사숙고했고 이제는 너랑 떨어지지 않을 거야. 우리는 친구로 남기에는 너무 아쉬운 관계야. 맞지?”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나는 진실로 에이드리안이 그리웠다. 여자친구는 둘째치고 절친만으로서도. 단지 에이드리안을 곁에 둔 것만으로도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근데, 무도회는 맘에 들어?”

“너랑 있어서 훨씬 좋아졌어.” 에이드리안은 내 기대보다 조금은 더 감정적인 모습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눈썹을 들어 올렸다. 에이드리안은 친구로만 지내는 것에 익숙해질 찰나에 커브볼을 던져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농담으로 대꾸했다. “뭐야, 카일은 춤이 젬병인가 봐?”

“그래. 맞아. 좀 그런 편이야.” 그리고는 나한테 눈을 고정하며 내 품속으로 녹아들었다.

에이드리안이 나한테 몸을 무너뜨렸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에이드리안이 움직임이 마치 내 수족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내가 왼쪽으로 돌면, 에이드리안의 전존재는 완벽하게 일치된 조화 속에서 나한테 딸려오는 것이었다. 심지어 오르고 내리고 옆으로 움직일 때도 함께였고 그러면서도 나한테서 절대로 눈을 떼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사라지면서 오직 에이드리안과 나만 우리의 우주 속에 남게 되었다.

우리는 몇 초가 흐르고 나서야 빠른 곡이 시작된 걸 깨달았다. 에이드리안과 나는 자넷 잭슨의 올포유(All for you)에 맞춰 느릿한 춤을 추었던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휘둥그레 뜬 눈으로 놀라워했다. 그리고 나는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눈물을 터트리려고 하는 두 번째 여자애를 보게 되었다. 에이드리안은 갑자기 내 품에서 벗어나서 서둘러 멀어져 갔다.

“무슨 일이래?” 오른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서 보니 헬렌 맥그레고리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예쁜 모습으로 안 르와 춤을 추고 있었다. 두 여자애는 같이 추자며 손짓을 했고 나는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둘한테 끼어들고 리듬에 몸을 맡겼다.

헬렌은 나한테 노래기사를 읊조렸다. “꽤 실한 물건이라며, 그차? / 오늘 밤 함 태워 줄텨?” 나는 얼굴을 붉히고 우리한테 합류하는 마리나 산토스와 타라 애봇을 지켜보며 몸을 흔들어댔다.

남몰래 섹스를 했던 네 여자애와 모여 춤을 추는 건 조금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곧 케니와 성준이 달려들어 네 여자애한테 수작을 걸며 춤을 추어대기 시작했고 덕분에 부담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 나는 여유를 찾고 내 여자애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앨리나... 에이드리안... 적어도 둘 중 하나를.

나는 “올포원”이 끝나자 헬렌 일행들한테서 벗어나서 내 여자친구나 절친을 찾을까 싶어 아이들을 헤치고 내 친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둘 대신 스테파니 보와 부딪히게 되었다.

“헤이이이, 벤.” 스테파니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헤이, 스텝.”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다시 스테파니한테 주위를 돌렸다. 분명히 나하고 춤을 추고 싶은 모습이었다. “재밌어?”

“재밌고말고.” 스테파니는 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 목에 팔을 둘렀다. “알다시피, 난 아직도 내 동생이 부러워. 이제 조금만 있으면 졸업을 하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됐는데, 빅벤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하게 되는 셈이 되잖아.”

나는 그 즉시 춤을 멈췄다. “스텝...”

“아니, 나도 알아. 넌 지금 앨리와 에이드리안 사이에서 작은 드라마를 찍고 있어. 나한테는 성준이 있고.” 스테파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준은 훌륭한 남자친구야. 걔하고 사귀었던 한 해 동안 무척 행복했어. 하지만, 우리는 다른 학교로 진학하게 되어서 곧 갈라설 수밖에 없어. 솔직히 인정할게. 난 늘 궁금했어.

“스텝, 난-”

스테파니는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막고 주위를 힐끔 둘러보고는 바짝 다가서서 맹렬한 키스를 심어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지만, 타고난 본능이 발동해서 짧지만 굳센 키스로 대꾸하고 고개를 들었다.

스테파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영영 알 길이 없겠지. 쎄라비(주-C’est la vie; 삶이란 건 원래 그래.)”

그리고는 내가 뭔가를 말하기도 전에 뒤돌아서서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나는 멋지게 틀어올린 칠흑 같은 머리를 눈으로 쫓았다. 스테파니는 곧장 성준한테 다가가서 나한테 한 것과 같은 맹렬한 키스를 심었다.

나는 절대로 여자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다시 주위를 돌러 보았지만, 앨리나 에이드리안을 둘 다 찾을 수도 없었고 왜 나를 내팽개쳐둔 채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10분 동안 춤을 추며 어울리다가 조력자를 구해 나서기로 작정하고 무도장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별다른 수확 없이 킨리 맥긴리와 부딪치게 되었다. 킨리는 선수를 쳐서 물었다. “에이드리안 못 봤어?”

나는 고개를 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헤더하고 린은 어디에 있지?”

카일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찾아봤는데 보이지 않더러구.”

“수확이 있길 빌게.” 나는 에이드리안의 무도회 짝한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케니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애비나 앨리 못 봤어?”

“어, 아니.” 케니는 예쁜 여자애들한테 수작을 거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나는 케니가 알아서 하도록 남겨 두고 주위를 서성거렸다. 당황할 것까지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본격적으로 찾아 나서기보다는 친구들과 춤을 추면서 나한테 소중한 여자애 중에서 한 명이라도 눈에 띌까 봐 주위를 둘러보기만 했다.

소중한 여자애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그 와중에도 메간하고 캐시디랑 옛정을 생각해서 빠르고 느린 곡에 맞춰 춤을 추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춤추는 시늉을 때려치우고 본격적인 수색작전을 펼 작정을 했다. 이미 인내심이 동할 만큼 시간이 흐른데다가 그냥 본체만체 내버려두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생길 성싶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또한, 사람들도 그리 북적댄다고도 할 수 없었고 기껏 호텔 무도장이니만큼 눈에 띄지 않게 숨을 만한 장소도 드물었다. 그새 한 번도 눈에 띄지 않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막 주위를 둘러보려는 순간 누군가가 내 어깨를 돌려세우고 느닷없이 깊고 열정적인, 마치 영혼을 찾아 헤매는 듯한 키스를 심어왔다. 나는 핵폭발을 느끼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미 알고 있는 키스였다.

에이드리안이 나를 찾은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숨찬 목소리로 외쳤다. “에이드리안!”

“오, 벤. 너무너무 엉망진창이야. 하지만, 참을 수 없었어.” 에이드리안은 아직도 내 어깨를 굳세게 껴안고 있었다. “사랑해! 너무너무 사랑해!”

“잠깐, 뭐-?” 나는 갑작스러웠던 키스로 아직 제정신이 아니었다.

“변덕을 부려서 미안해. 특히 이런 때에. 난... 난 단지 참을 수 없었어. 난 늘 널 사랑했던 것 같아, 벤. 작년 봄방학 이후로 쭉.” 에이드리안은 눈물을 글썽이며 내 꼭 내 손을 잡았다. “맞아, 너랑 헤어졌을 때는 무척 속이 상했어. 하지만, 그때에도 널 사랑하는 걸 멈추지 않았어. 너도 단점이 있는 그런 남자애였어. 하지만, 넌 나를 끝까지 아끼고 보호하라고 했어.”

너무나 빠르게 쏟아내서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였다. 그러나 에이드리안은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두려웠어. 그래서 걸핏하면 친구로만 지내자고 했던 거야. 단지 친구로만. 하지만, 다 개소리였어. 진심으로는 그 이상을 원했어. 난 너랑 함께하고 싶었어. 네가 없는 삶이 두려웠어. 하지만, 널 잃는 것도 두려웠어. 우리가 함께한 다음에 헤어지게 될까 봐 두려웠어. 그리고 난 특히 도온이 두려웠어.”

나는 이마를 찌푸리고 눈을 깜박였다. 한 번에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벅찬 일이었다.

“넌 이미 걔 때문에 날 버린 적이 있어, 벤. 기억나? 난 너한테 알몸을 내던지며 날 사랑해달라고 빌었어. 너한테 여자친구가 있는 걸 알면서도. 난 그때 무척 깨지기 쉬운 상태였어. 타이슨하고 겪은 일로 자신감을 잃고 감정적으로도 엉망진창이었어. 난 그림자만 보고도 깜짝깜짝 놀랐고 데이트하는 남자애도 다 겁이 났어. 내가 믿을 수 있는 남자애는 오직 너뿐이었어. 그러나 내가 옳지 않은 방식으로 몰아붙이자 넌 그냥 날 내버려두고 떠나버렸어. 넌 옳은 짓을 했어. 난 그때 불안정했고 넌 네 여자친구한테 충실했어. 하지만, 네가 나 대신 네 여자친구를 선택한 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일이었어.”

“에이드리안...” 나는 도온이 강간을 당해 전화를 한 그 운명적인 밤을 떠올리며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아니, 괜찮아, 괜찮아. 넌 옳은 일을 했어, 벤. 하지만, 넌 며칠 전에 걔 대신 나를 선택했어. 넌 ‘걔’보다 ‘나’를 선택했다구.”

에이드리안은 속사포처럼 쏘아대느라 숨을 헐떡였다. 나는 듣기만 했는데도 숨이 벅찼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진짜로 에이드리안이 나랑 함께하고 싶다고 했단 말인가?

“수요일에는 생각을 정리할 수 없었고 목요일에는 마주하기 겁이 났어. 앨리가 널 도와달라고 했는데도. 하지만, 금요일 밤에는 쭉 그 생각을 했어. 위험을 무릅쓰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한 사람과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위험을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다면 날 용서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 사람은 바로 너야, 벤. 난 네가 필요해. 난 너를 사랑해.”

에이드리안은 손가락을 으스러트리겠다는 듯이 힘껏 내 손을 잡았다. 그러나 나를 사랑한다고 말을 듣고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앨리가 네 무도회 짝이었어. 그리고 오, 제길! 어떻게 걔한테 이런 짓을 할 수 있지? 걔한테 이러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는데 말이야. 어쩌면 다음 주쯤이나 앨리한테 말해서 용서를 구하려고 했는데. 난 전에도 남자친구를 빼앗은 적이 있어.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 순 없어.”

“괜찮아.” 에이드리안은 새롭게 끼어든 목소리에 갑자기 얼어붙었다.

에이드리안과 내가 동시에 옆으로 돌아보니 앨리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우리 옆에 서 있었고 애비와 케니도 앨리 곁에 바짝 붙어 있었다. 카일 맥긴리도 가까운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헤더와 린도 각자의 짝을 데리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메간, 케이토, 캐시디, 캐머런 심지어 헬렌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에이드리안과 나는 동시에 아래턱을 내려트렸다. 앨리는 입구 쪽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어쩌면 우리 셋 조용한 곳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일찍 올라올 줄은 미처 몰랐는걸.” 나는 가볍게 농담을 하며 키카드로 객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앨리와 에이드리안도 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앨리는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고 에이드리안은 여태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앨리는 더욱 안으로 들어서서 드레스를 고이 훑어 내리고 킹사이즈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껴안는 듯한 시늉을 하듯 손을 들어 올리고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무도회가 끝나고 벤하고 함께 호텔 방으로 들어오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어.”

나는 앨리의 목소리에서 서글픔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내 상상 대로는 되지 않을 것 같지?”

“아니, 아직도 네 상상대로 될 수 있어.” 에이드리안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꼭 그래야 해. 오늘 밤엔 네가 주인공이어야 해, 앨리.”

귀여운 브루넷은 서글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무렴 어때, 내심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걸 알고 있었어.”

“앨리...”

“아니, 아니.” 앨리는 두 손을 들었다. “원래 이렇게 돼야 해.”

나는 앨리와 에이드리안을 번갈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얘들은 내 이해력을 훨씬 능가하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앨리는 한숨을 내쉬었고 에이드리안은 걱정스레 입술을 깨물었다. 앨리는 회한이 서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곳이 우리가 헤어지는 곳이야, 벤.”

“허?”

앨리는 손바닥을 들어 에이드리안을 가리켰다. “원래 주인이 널 돌려받고 싶대잖아. 난 얘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널 돌봐준 것뿐이었어.”

나는 눈만 깜박였다. “허?”

앨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난 이렇게 될 줄 진작에 알고 있었어. 넌 에이드리안을 사랑하고 있었어. 넌 작년부터 쭉 에이드리안을 사랑하고 있었어. 여자들끼리는 일레인의 겨울 파티 때부터 그런 줄 눈치채고 있었어. 난 그 파티가 똑똑히 기억나. 케니하고 애비가 처음으로 엮인 곳이거든. 그리고 여기 에이드리안도 쭉 널 사랑했어. 아마 할로윈이었나?”

매혹적인 블론드는 얼굴을 붉히고 자기의 마천루처럼 높은 힐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런데도 너희는 몇 달 동안이나 서로 맴돌기만 하고 ‘사귀는 게 아니라거나 그냥 친구일 뿐이야.’라며 같잖은 소리만 해댔어. 너희가 왜 함께하지 않는지 나로서는 알 턱이 없었지. 얠 잃을 게 두려워서 그랬다고? 나한테는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아. 아무튼,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었어. 단지 이렇게 오랫동안 뜸을 들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어.”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데 넌 그런 걸 알면서 왜 나하고 데이트한 거야?”

앨리는 미소를 지었다. “왜냐면 네가 좋아서. 너랑 에이드리안이 2월에 야단법석... 아무튼, 얘가 널 없는 사람 취급할 때, 난 이때구나 싶었어. 왜 내가 너하고 있고 싶어 하는지는 너도 잘 알 거야. 넌 무척 잘 챙겨주는 남자친구였어. 하지만, 내심 오래갈 수 없는 걸 알고 있었어. 우리가 쭉 친구일 뿐이라고 우긴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

나는 앨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마치 마지막이라는 투로 말하는 것을 듣고는 자동으로 팔을 벌려 안아주려고 했다. 그러나 앨리는 손을 들어 나를 저지했다. “아니, 아니, 괜찮아, 벤. 이런 순간이 올 줄 알고 있었어. 요 몇 주 동안 내가 발정이 난 것처럼 대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야. 우리가 오래가지 않을 줄 알고 그전에 최대한 많이 섹스도 하고 행복도 느끼고 싶었거든.”

푹 고개가 꺾였다. “미안해.”

“미안해하지 마. 솔직히, 서글프긴 해도 이해는 하니깐.” 앨리는 실소를 터트렸다. “사실, 난 한 주전쯤에 이럴 줄 알았어. 너희가 정학기간에 제정신을 차리고 일찌감치 박아버렸다면 훨씬 편했을 같아.”

앨리는 눈을 깜박여 굵은 눈방울 하나를 뺨으로 떨궈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 포옹을 막지 않았다. 나는 손가락으로 앨리의 뺨에 구르는 눈물을 쓸어주었다. 앨리는 울컥 울음을 터트렸다.

“앨리, 미안해.”

“괜찮다고 했잖아, 벤. 난 요 몇 주를 보너스로 생각해. 좀 달콤쌉싸름하기는 했지만. 네가 말했듯이, 휴가라고 했잖아.”

“하지만, 너한테 몹쓸 짓을 하는 셈이잖아.”

“당연히 몹쓸 짓이지. 넌 훌륭한 남자친구였어, 벤. 우리 둘 다 네가 에이드리안을 사랑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넌 날 알뜰하게 챙겨주고 내가 정치 같은 것에 대해 헛소리를 해도 열심히 들어줬어. 그리고 넌 사랑을 할 때도 전력을 다해 나한테 신경을 써줬어. 난 그런 점이 너무너무 좋았어,” 앨리는 코를 훌쩍였다. “단지, 단지...이젠 다 끝나버렸지만.”

“앨리, 오늘 밤은 네가 주인공이어야 해.” 에이드리안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넌 내가 진심으로 오늘 밤을 벤하고 지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드디어 제정신을 차리고 벤한테 사랑 고백을 한 마당에? 네가 얠 간절히 바란다는 걸 알게 된 마당에?” 에이드리안은 누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앨리는 훌쩍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아니. 난 여기에 머물지도 않을 거구 너희랑 쓰리섬도 하지 않을 거야.”

“내가 언제-”

“그런 생각을 하긴 했잖아.” 앨리는 나를 꾸짖더니 웃음을 터트렸고 에이드리안도 따라서 웃었다. 내 속이 뻔히 보인단 말인가?

앨리는 마지막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나 진짜 괜찮으니깐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더는 내 여자친구가 아닌 귀여운 브루넷은 나를 힘차게 포옹했다. “친구지, 그치?”

나는 앨리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내가 진정으로 에이드리안을 바라는 걸 피차 아는 이상 더는 여자친구로 남아달란 소리를 낼 수 없었지만, 죄책감을 뿌리칠 순 없었다. “영원히.”

“암 그래야지.” 앨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포옹을 풀었다. “너 그거 알아? 애초에 난 하룻밤 일이거니 하고 생각했어,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더 얻은 게 많아. 너도 그런 식으로 생각했으면 해. 알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의 관점을 듣고보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앨리는 에이드리안을 돌아보았다. “너흰 진짜 연분이야. 너도 알지?”

에이드리안은 밝은 미소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에이드리안의 헤이즐 빛 응시를 마주 보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정말 그럴까? 에이드리안과 내가 하늘이 점지해준 연분일까?

나는 앨리를 돌아보았다. “넌 어떻게 할 거야?”

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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