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장 안정(安定) (14/18)

13장 안정(安定)

2002년 3월 상급생

“헤이, 벤!”

나는 뒤돌아서서 기운 없는 미소를 지었다. “오, 헤이, 앨리.”

앨리슨 샌더스는 턱 팔짱을 끼고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내가 반갑지 않단 거야?”

“미안, 미안. 어젯밤에 잠을 설쳤어.”

“오늘 밤에 데이트 있는 거 까먹은 건 아니지?” 다소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아니, 아니. 당연히 아니지. 요 며칠간 복잡한 일로 골치가 아팠어.”

앨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짝 다가와 내 팔을 만졌다. “수요일 점심시간에 ‘강간’이라고 고함을 친 어떤 여자애 일이구나?”

한숨이 나왔다. “그런 것 같아.”

“영 내키지 않으면 취소해도 괜찮아.” 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아니. 할게. 할 거야.” 나는 풀죽은 앨리의 얼굴을 보고 황급히 덧붙였다. “진짜야, 나도 너 못지않게 오늘 밤 데이트를 학수고대했었다구.”

앨리는 헬렌 맥그레고리가 달아올랐을 때 짓는 표정과 비슷한 살짝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왠지, 의심스러워.”

나는 미소를 지었다. “진짜야, 지난 몇 주 동안은 난리도 아니었어. 그래서 너처럼 다정한 친구랑 호젓한 시간을 보내길 무척 기대했어.”

“난 친구 이상이길 바라는데.” 앨리는 내 가슴을 쓰다듬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귀여운 브루넷의 부드러운 황갈색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아랫도리에 슬며시 열기가 치솟았다. 나는 요 며칠 동안 꼴린 적이 없었다. 수요일 캔디의 아파트에서 작은 회합이 있은 뒤로는 영 기분이 나지 않아 마리나 산토스의 초대도 거절해야 했다.

그러나 앨리랑은 상황이 달랐다. 앨리한테는 최근 헬렌과 그 친구들한테 한 것처럼 엎드리게 해놓고 사경을 헤매도록 박아주고픈 충동이 일지는 않았다. 대신, 포근히 안아주고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앨리를 끌어안고 엉덩이를 토닥여주었다.

앨리는 킥킥대며 뒤로 물러섰다. “오늘 밤 만나는 거야?”

“그래.”

나는 또박또박 걸어가는 앨리를 느긋하게 바라보며 잠시 엉큼한 상상에 잠겼다. 그리고 수업을 들어가려고 돌아선 순간...

...느닷없이 우뚝 멈춰서야 했다. 열 발짝쯤 앞쪽에서 에이드리안이 냉랭한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이 내가 돌아서자 마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대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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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의 데이트를 소홀히 여기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 약속시간보다 2분쯤 이르게 쌍둥이네에 도착했다. 까무러칠 만큼 놀랍게도, 케니 도일이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어쩐 일이당가, 형씨.” 케니는 늘 하던 대로 고개부터 까닥이고 주먹을 들이댔다. (주-주먹끼리 부딪치는 인사를 하자고)

“헤이... 너야말로 웬일로 여기에?”

케니는 씩 미소를 지었다. “앨리도 나갈 거고 부모님도 안 계시니깐, 마침내 나랑 애비만 남아서 쌍둥이들 침실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됐잖아!” 아, 케니. 아직도 섹스라면 사족을 못쓰는 철딱서니 없는 친구 같으니라구.

쩝, 나라고 다르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섰다. 때마침 애비가 계단을 내려왔다. “하이, 벤!”

“헤이, 애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혹시라도 앨리가 아닐까 싶어 애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애비는 환한 미소를 짓고 계단 위를 올려다보았다. “조금만 있으면 내려올 거야. 예쁘게 단장을 하느라 바쁘거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애비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 서로 담소를 나눌 때는 서로 몸을 기대고 앉은 케니와 애비가 내심 부러웠다. 다행히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나는 휘둥그레 눈을 뜨고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린 케니를 보고 앨리가 준비를 마친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도 뒤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와우...”

앨리는 얼굴을 붉히고 계단을 마저 내려왔다. 앨리는 지난 한 해 동안 젖살이 빠진 얼굴에, 화장을 하고 머리를 새로 꾸며 평소의 귀엽지만, 다소 평범한 열일곱 살 브루넷에서 너끈히 20대 초반의 성인여성으로 보일만한 침착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변신해 있었다.

그리고 그 드레스, 무척 낯이 익은 그 검정 칵테일 드레스... “그거 혹시 그때...”

앨리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로는 한 번도 입어보지 않았어.”

나는 또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일 년 전 첫 데이트 때 입었던 드레스는 아직도 몸에 꼭 맞았다... 대부분은. 앨리는 그 이후 젖가슴과 엉덩이가 불었고 한때는 적당히 귀여웠던 옷차림새는 이제 몸매의 굴곡을 과감하게 뽐내는 도발적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케니가 애비의 옆구리를 찔렀다. “왜 나는 저런 옷차림을 한 번도 구경해보지 못한 거지?”

“조용히 해. 안 그러면 오늘 밤에도 영영 구경하지 못할 테니깐.”

케니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앨리한테 다가가 손을 잡았다. “너 진짜 예뻐.”

“늘 키 큰 퀸카들하고만 사귀었으면서도?”

나는 앨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진심으로 되뇌었다. “너 진짜 예뻐.”

나는 늘 거짓말이 서툴렀다. 만천하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앨리는 내 눈을 들여다보고 진심인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행복에 겨운 눈물을 글썽이며 아래턱을 떨어댔다.

“오, 이런!” 애비는 득달같이 달려와 앨리의 눈에 손부채질을 했다. “얘가 화장 망가지면 어쩌려고!”

앨리는 코를 훌쩍이고 진주같이 귀여운 웃음을 터트리며 더욱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내 팔에 팔짱을 끼워왔다.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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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는 진짜 진짜 근사했다. 에, 음식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나는 메간이 추천해준 레스토랑을 골랐는데, 오렌지 카운티의 인공 호숫가에 위치한 장야설넷서 저녁 경치가 끝내주게 좋았다. 애석한 점은 메간의 식성이 나와 다르다는 걸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튼, 대화도 술술 막힘이 없었다. 마치 데이트를 나온 게 아니라 평소처럼 점심 테이블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나는 남자다운 허세를 부릴 필요가 없었고 앨리도 여자애다운 쓰잘데기없는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에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욱 내밀한 사적인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앨리는 고작 2분 늦게 태어난 죄로 평생 쌍둥이 자매의 동생이라는 타이틀을 짊어지게 된 것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앨리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아래쪽에 누워 있었더라면 자기가 언니가 되었을 거라며 농담을 해주었다. 아직도 온 가족이 자기를 애지중지하는데, 처음에는 가족의 특별 대우가 싫지 않았지만, 점점 자라면서는 늘 막내둥이 취급을 받는 것에 질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애비도 자기를 막내둥이로 대한다는 것이었다.

앨리는 내가 진심으로 이해를 보이자,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이 흔치 않았다며 무척 반가워했다. 그래서 나는 쌍둥이 동생인 에덴과 엠마를 둔 덕분에 그와 같은 가족들의 역학관계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앨리는 내가 도온이나 에이드리안이랑 드라마를 찍느라 바빴던 지난 한 해 동안, 이전보다 자기주장을 내세울 수 있게 되었고 의지하는 습관도 버렸다고 한다. 나는 앨리의 말을 들으며 언젠가 키이라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키이라는 내가 샌더스 쌍둥이들을 각각 독립된 개인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둘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한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직 나와 앨리만 남아서 개인적인 이해가 깊어지고 있었고 또한 앨리와 애비의 커다란 차이점도 깨달아 가고 있었다. 마치 에덴과 엠마의 차이점과 브랜디와 브룩의 차이점을 알게 된 것과 같이.

내 얘기는 그다지 말할 틈이 없었다. 대신 앨리가 웃고 킥킥대며 자기 얘기를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는 가끔 맞장구를 쳐주기는 했지만, 앨리가 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어하는 걸 느꼈기에 될 수 있으면 끼어들지 않고 경청하기만 했다.

심지어는 레스토랑을 나오고 나서도 호숫가를 거닐며 앨리의 이야기를 들었다. 앨리는 호숫가를 반쯤 거닐었을 무렵 자기만 수다를 떨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수다를 듣느라 무지 지겨웠지? 별로 섹시하지는 않았을 거야.”

나는 미소를 지었다. “별걱정을. 남자들은 그리 복잡하지 않아. ‘박을래?’하고 한마디만 하면 그것만큼 섹시한 게 없다구.”

“박을래?” 앨리는 킥킥대며 웃었다.

“글쎄, 여기선 말고.” 나는 앨리의 손을 꼭 잡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호수를 다 돌고 나서도 이야깃거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치가 주제였다. 나는 정치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가까운 미래에 누군가를 떡칠 수만 있다면 정치에 대해서는 쥐똥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앨리는 불법 이민, 고수익과 경제부양을 위해 값싼 노동력에 기대는 캘리포니아 주의 행태 그리고 일반 시민의 기본적인 인권에 대해 열띤 주장을 폈다. 나는 앨리가 말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앨리의 열정에 대해서는 감명을 받았다. 앨리는 진짜 무언가를 믿고 있었다. 게다가 수박 겉핥기식이 아니라 깊이가 엿보였다.

그래서 나는 앨리를 말을 끊지 않고 열심히 듣기만 했다. 앨리는 호수를 세 바퀴나 돌고 나서야 열광에서 깨어났다. “오, 미안. 나 때문에 늦겠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나는 따듯하게 대꾸했다. “무척 듣기 좋았어.”

“진짜? 애비는 듣기 싫다며 진저리를 치는데.”

“진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국가 경제에 이득이 되건 되지 않건 간에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국경선을 더 엄격하게 관리해야 하지 않을까? 불법이민은 법을 무시하는 거잖아. 논쟁거리도 안 돼. 불법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세금도 내지 않는다고 들었어. 맞아?”

앨리는 얼굴을 붉혔다. “맞아, 내지 않아. 하지만, 너한테 반문하고 싶은 건, 너 진짜 원칙만 고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궁극적으로 더 높은 가격을 치르게 되거나 같은 가격에도 재화의 질이 더 낮아지는데도? 어떤 게 더 낫겠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걸까?”

“글쎄... 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나는 얼버무리려 했다.

앨리는 달빛을 무색하게 하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설명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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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를 얼마나 오랫동안 거닐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둘 다 따듯한 코트를 입고서도 추위를 느낄 만큼 오랫동안 거닌 건 분명했다. 마침내 우리는 차로 되돌아가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나는 여성스런 거절을 무시하고 코트를 벗어 앨리를 덮어주었다.

우리는 차에 앉고 나서도 한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누다가 애비한테서 꾸중에 가까운 전화를 받고 나서야 귀가를 서두르게 되었다.

우리는 현관 앞에 도착하고서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제야 앨리는 데이트의 본래 목적을 깨달았다는 듯이 허둥댔다. “벤, 난, 어... 너한테 데이트를 하자고 한 이유를 알지만, 어...”

“이젠 막상 뭘 원하는지 모르겠단 거야?”

“오, 아니, 아니! 당연히 아니지!” 앨리는 새롭게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난...” 마치 자기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모습이었다.

나는 앨리를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앨리는 몸서리를 치고는 기쁜 신음을 토하며 내 품에 녹아들었다. 나는 앨리의 키스에서 행복감과 포근함을 느꼈다. 작은 흥분도 함께.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우리는 굳이 섹스를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키스만큼이나 느닷없이 얼굴을 들었다. 나는 앨리의 어깨를 잡고 눈을 들여다보았다. “진짜 끝내주는 저녁이었어. 앨리슨 샌더스.”

“나도.”

“우리 또 데이트하는 거다. 나중에.”

.

“그래.” 앨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언제, 다음 주 금요일?”

“오, 못 기다릴 것 같아.”

“학교에서 볼 수 있잖아.”

“그럼 알았어.”

“안녕, 앨리슨.”

“안녕, 벤.” 앨리는 고개를 끄덕여 우리의 저녁이 끝났음을 알렸다. 비록 애초에 계획한 대로는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앨리의 환한 미소를 보건대, 나름대로 성공한 데이트가 틀림없었다.

나는 앨리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앨리는 문을 단기전에 나한테 귀엽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한숨이 나왔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 딸 잡을 일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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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는 월요일이 되어서도 붕붕 떠다녔다. 앨리는 락커 앞에서 나를 마주치고는 내 뺨에 귀여운 뽀뽀를 해주었다. “헤이이이, 벤.”

“하이, 앨리.” 나는 반갑게 인사했다.

앨리는 뭔가를 찾는 듯이, 내 눈을 살펴보았다. “조금도 후회하지 않아?”

“우리 데이트? 아니, 당연히 아니지.”

“그걸 못 했는데도...?” 앨리는 말끝을 끌며 자기의 의도를 분명히 밝히려 눈썹을 쫑긋거렸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난 데이트를 했다고 무조건 자는 건 아니라구.”

“진짜?” 앨리는 미소를 지으며 혀를 메롱 하며 내밀었다. “데이트하고 나서 자지 않은 적이 언제데?”

“어... 그게...”

“기억이 나지 않아?”

“글쎄,”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메간이었나?”

앨리는 킥킥대며 웃었다. “대견스럽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딱하다고 해야 하나?”

“뭐, 다음번 데이트를 기대할게.”

“어렵지 않아.” 앨리는 연극조로 팔을 벌리며 무도장에서 춤을 추듯이 몸을 비틀었다. “날 공주님처럼 모시면 나도 널 왕자님처럼 대접해줄게.”

우리는 1교시 예비종이 울릴 때까지 몇 분을 더 시시덕거렸다. 그리고 앨리가 1교시 수업을 들으러 가는 걸 지켜보며 나도 1교시 수업을 향해 돌아선 순간,

얼씨구. 아니나 다를까 한 스무 발짝쯤 떨어진 곳에서 에이드리안이 벽에 기대고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 바로 등 뒤에서 린이 뭔가를 말하자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또 끄덕였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빙그르르 돌아서서 또박또박 걸어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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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안은 점심을 먹고 나서 한바탕 소동을 벌인 적이 있는 락커 근처로 나를 찾아왔다. 마침 우리 주위의 학생들은 에이드리안이 다가오는 걸 보고 쉬쉬하며 말소리를 죽이고는 앞으로 펼쳐질 드라마를 기대하며 우리를 쳐다봤다.

나직이, 에이드리안이 물었다. “저번 주 금요일에 앨리 샌더스랑 데이트했다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떠들어 대지는 않았지만, 가까운 친구들은 다 알고 있었고 우리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은 일이었다.

에이드리안은 안절부절못하며 잠시 내 눈길을 피하다가 도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걜 쭉 지켜봤어.” 왠지 말하는 투가 좀 소름이 끼쳤다.

나는 기분이 상하려는 걸 애써 참으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

에이드리안은 내 말을 무시했다. “걔하고 잤어?”

나는 고개를 쳐들고 솔직히 대답했다. “아니.”

에이드리안은 두 발짝을 더 다가오고서는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헤이즐 눈동자는 진실을 찾아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날카로운 회색빛으로 변했다.

나는 에이드리안이 물러날 때까지 그 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침을 삼키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걘 너랑 자지 않았어. 아, 하지만, 그 애 표정은, 뭔가 남달랐어...”

에이드리안은 볼일을 다 마쳤다는 듯 돌아서서 떠나려 했다. 나는 왠지 분명히 밝히고 싶은 충동이 일어 목소리를 높였다. “오래가지는 않을 거야, 에이드리안. 또 데이트가 있거든.”

에이드리안은 순간적으로 멈칫하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또 데이트를 한다고?”

“그래.”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왜 문제 될 거라도 있는 거야?” 이런 팔푼이! 뭐야? 에이드리안의 허락을 받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 아니. 아무 문제 없어.” 에이드리안은 재빨리 대답하며 나를 쳐다봤다. 일순 에이드리안의 얼굴에서 미소를 본 듯했다. “잘 되길 빌게.”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서 제 갈 길을 걸어갔다.

뭐가 뭔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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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여자애들이 앨리에 대해 물어왔다. 그 애들은 앨리가 내가 시시때때로 다정하게 구는 모습을 보고 뭔가가 있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그래.” 나는 안정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나는 아무 여자애나 따먹는 약탈자가 아니란 걸 에이드리안한테 보여 줄 것이다. 내 목소리가 워낙 딱 부러지게 들렸던지 두 여자애는 즉각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을 짓고 뒤로 물러섰다.

나는 쇠뿔도 단김에 뺄 양으로 헬렌 맥그레고리를 찾아 나섰다. 마침 안 르하고 함께하고 있던 헬렌은 내가 학내에서 자기한테 접근하는 걸 보고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두 여자애는 반갑게 나를 맞아주고 오후에 만날 것을 내비쳤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이제 그만두겠다고 말하려는 참이었어. 좀 진지해지고 싶은 여자애가 생겼거든.”

헬렌은 마치 내 이마에서 콩줄기가 자라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뭐? 에이드리안이랑 다시 합치는 거야?”

“아니, 아니.”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앨리슨 샌더스. 우린 아주 오래전부터 친구였는데 지금은... 뭐랄까... 아무튼, 그렇게 됐어.”

“진짜?” 안은 너무나 뜻밖이라는 듯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은 앨리를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안과 앨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헬렌은 아쉬운 한숨을 내쉬며 귀엽게 인상을 썼다. “뭐, 솔직히 말해, 반가운 소식은 아냐. 아직도 바라는 게 남아 있었거든. 하지만, 이해할 수 있어.”

“앨리랑 잘 되길 빌게.” 안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 헬렌은 느닷없이 내 얼굴을 붙잡고 맹렬한 키스를 심고 나서 고개를 들고 입맛을 다셨다. “미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고 싶었어.”

헬렌은 강렬하고 농후한 키스에서 헤어나지 못한 나를 지나가며 내 뺨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럼 이만 안녕, 대학가지 전에 마음이 바꾸면 꼭 전화해줘야 해.”

안도 킥킥대며 나를 지나쳐갔다.

나는 앨리가 보지 않도록 헬렌의 립스틱이 묻은 뺨을 문질렀다. 그리고 헬렌과 안의 뒷모습을 바라볼 참으로 돌아섰을 때는 뜰 저편에서 나를 지켜보는 에이드리안을 발견하게 되었다. 에구머니나, 간 떨어질 뻔했네. 대체 쟤는 어딜가든 없는 곳이 없네?

에이드리안은 반대편으로 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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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점심시간에 누가 시작했는지 모를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여자애들은 남자애들을 코앞에 두고 열띠게 자기 남자친구 자랑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갖가지 설왕설래가 있고 나서, 결국은...

“야! 다니엘은 여기서 젤 똑똑하다구!” 일레인 후쿠하라가 외쳤다.

“그건 캐머런이 우리 학교에 다니지 않아서 그래” 캐시디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그래? 그럼 왜 그렇게 똑똑한 애를 넉 달 사이에 두 번이나 차버렸던 거야?” 스테파니가 웃음을 터트리자 캐시디가 인상을 쓰고 째려봤다.

“사실, 제일 똑똑한 사람은 A.P. 코스를 세 과목이나 수강하면서도 만점 학점을 딴 제임스라고 할 수 있지.” 케이토는 메간이 하는 말에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고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려고 했다.

“똑똑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스테파니가 대뜸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성준이는 케이토를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다구.”

“오, 진짜?” 메간은 웃으며 남자친구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서, 제임스. 성준이랑 한 판 붙어봐.” 케이토는 난감해 하며 점점 의자로 쪼그라들었다.

“네 남자친구는 입도 벙긋 못하잖아.” 애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여기서 케니한테 말로 당해낼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오, 진짜?” 앨리는 언니 옆구리를 찔렀다. “헤이, 벤? 케니한테 불법 이민자와 국가 경제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 좀 해 줄래?”

“취소! 취소!” 애비는 웃음을 터트리며 바삐 손을 내저었다.

“헤이!” 캐시디가 끼어들었다. “앨리, 너 무슨 권리로 벤을 내세우는 거야? 우리한테 말해 주지 않은 뭐라도 있는 거야? 으음?”

이번에는 앨리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힐 차례였다.

메간이 내 등을 두드렸다. “앨리가 널 찜해 놓은 것처럼 말하는데, 가만있을 거야?”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우와!” 서너 명이 야유를 하며 짓궂은 눈빛을 교환했다.

“그럼... 데이트 한 번 나가더니 이젠 커플이라 이거지?”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가 우리 생각보단 그쪽 방면에 소질이 있는가 보네!” 캐시디는 키득대며 메간의 어깨를 때렸다.

“우리 아직 하지 않았어, 주근깨.” 나는 캐시디를 째려보며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앨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삼갔으면 고맙겠어.”

내 어조에 놀란 일행들은 그 즉시 입을 다물고는 속삭이는 대신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메간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앨리, 이 짐승을 길들인 비결은 뭐야?”

앨리는 돌연한 상황변화에 놀라 동그랗게 눈을 뜨고 얼굴을 붉혔다. “어, 아무것도.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나는 왼팔을 뻗어 앨리의 허리를 두르며 미소를 지었다. “넌 아무 짓도 할 필요 없어.”

다들 묘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 좀 더 하찮은 주제로 대화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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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박하는 사이에 금요일 밤이 다가왔다. 실제로 그랬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텔레비전 앞에 늘어진 순간 이내 약속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옷을 차려입어야 했던 것이다.

앨리가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뭐야? 데이트 한 번 하더니 손가락이라도 빨며 널 기다려줄 줄 알았어? 넌 10분이나 늦었어. 케니랑 애비는 벌써 출발했다구.”

막 사과를 하려는 순간 앨리의 얼굴에 미소가 일었다. “미안, 뭐로 보상해 줄까?”

앨리는 문지방에 손을 짚고 귀엽게 어깨를 쫑긋했다. “키스해주면 기분이 풀릴 것 같아.”

나는 키스를 하며 앨리의 엉덩이를 받쳐 들었고 앨리는 두 다리로 내 허리를 감았다. 그러나 문이 열려 있어 밖이 환하게 보이는지라 억지로 욕정을 참아야 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심하게 꼴렸던 것은 꼭 내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나는 화요일 이후로는 싼 적이 없었다.

그것도 브룩하고만. 케이디는 브룩을 우리 집에 내려주고는 내 엉덩이를 토닥이며 사과를 했다. 새로움이 가셔서 나하고는 영원히 박지 않을 거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일단 호기심이 채워졌다는 거였다.

그래서 앨리의 팬티에 대고 사흘 묶은 발기를 문질러 대는 순간, 앨리의 눈에서도 진정으로 원한다면 자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쳐버리고 그 자리에서 박아달란 열기를 느낄 수 있었지만, 꾹 참고 앨리의 코에 뽀뽀를 해주고는 바닥에 내려놓아 주었다.

앨리는 살며시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정(正) 코스를 밟자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신사처럼 팔을 내밀었다. “갈래?” 앨리는 내 팔에 손을 걸쳤다.

나는 앨리한테 저번에 들렸던 고급 레스토랑 같은 곳보다는 우리 학교 학생들도 많이 들르는 패스트푸드점 같은 곳에 가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향을 내비쳤다. 앨리는 내 말을 듣자마자 호기심과 흥분이 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뻔한 의도였다. 소문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이 마당에, 금요일 밤에 데이트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러한 소문에 기름을 끼앉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래, 우리 ‘커플’이다.

“굳이 이러는 이유라도 있는 거야?” 앨리가 조수석에서 물었다.

“싫어?”

“아니,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단지... 우리 친구 맞지? 그치?”

“맞아.”

“단지 친구?”

“뭐... 인정할게. 우정을 넘어선 뭔가가 있기를 바란다는 걸... 혹은 네가 그런 걸 더 좋게 생각하기를.”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난 너도 우리가 친구 이상이 되길 바라는 줄 알았어. 애초에는 어쩌려고 한 건데?”

“맞아,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나랑 섹스할 수 있어.” 앨리는 손을 내저었다. “사실 넌 나랑 데이트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난 데이트하고 싶은걸.”

“왜? 난 네가 좋아하는 타입도 아닌데?”

“난 좋아하는 타입 같은 거 없어.”

앨리는 콧방귀를 뀌었다. “아니, 넌 좋아하는 타입이 있어. 키 크고 예쁘고 큰 가슴. 넌 메간만 빼놓고는 늘 그런 타입하고만 어울렸어.”

“메간이 얼마나 예쁜데.”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키가 162밖에 안 되고 고작 A컵밖에 안 돼.”

“난 좋아하는 타입 없어.”

“진짜? 그럼 전에 사귀어본 여자애 중에서 키가 170이 안 되고 C컵보다 작은 여자애를 한 명만 대봐.”

짜증이 일었다. “내가 여자애 이름을 들먹이지 않는 건 너도 알잖아. 내가 언제 네 이름을 지껄이는 본 적 있어? 우리 친한 친구들 말고는 나, 너, 네 언니가 뭔 일을 저지른 건 아무도 모를걸.”

“글쎄.” 앨리는 씩 미소를 지었다. “일레인의 종강 파티 때 말인데, 우리가 손님방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다라구.”

“헤이, 그 일은 내가 하자고 한 게 아니었다구. 그리고 손님방에 들른 게 우리뿐이었는지 알아?”

앨리는 재차 콧방귀를 뀌었다. “그땐 다들 어렸다구. 하지만, 지금은 상급생이 되었고. 맞아, 손님방에 들르는 이유는 다들 알고 있었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건데? 넌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라구? 맞아, 아마도.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난 너랑 함께하는 게 좋아. 알겠어? 무슨 책략 같은 게 있어서 널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구. 우리가 한 데이트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동안 내가 해왔던 데이트하고 달랐어. 최근에는 사는 게 아주 엉망진창이라 왠지 마음이 겉돌기만 하고 안정을 하지 못했어. 하지만, 너하고 있을 때는 그런 번잡함이 느껴지지 않아. 알겠어?”

앨리는 내가 주절거리는 말을 이해하려는 듯 살짝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았어.” 그리고는 윗몸을 기울이고 내 뺨에 뽀뽀를 했다.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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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룩은 토요일 아침에 내 방으로 들어와 이불 아래로 기어들어오고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잠에서 깨고는 브룩의 등을 힘껏 끌어안았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였다.

“오빠 늦잠 잤어.” 브룩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목을 빼고 물었다. “잠을 설쳤어.”

“금요일 밤에는 늘 잘 자지 않았어?”

한숨이 나왔다. “그건 금요일 밤마다 섹스를 해서 그랬던 거야. 한바탕 하고 나면 잠이 잘 온다구.”

“에이, 앨리가 아직도 허락 안 했구나?”

“그런 게 아냐. 걔도 그럴 맘이 있었어. 근데 너무 분위기가 좋아서 괜히 섹스로 망치고 싶지 않았어. 앨리를 훨씬 잘 알게 됐거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좀 만족스럽지 못한 게 사실이기는 하지만.”

“딱해라.” 브룩은 내 이마를 쓸어주고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내 아랫도리로 내려가 허리춤에 손을 댔다. “내가 풀어줄게.”

“브룩...” 나는 시간대를 떠올리며 경고를 했다.

“걱정 마.” 윗분들께선 쌍둥이들을 데리고 놀러 나갔으니깐. 우리만 남았다구. 어젯밤에 힘을 아껴두었으니깐 적어도 네 판은 해줘야 해. 알았지?” 내 여동생은 고개를 숙여 내 좆을 물었다. 브룩은 그동안 목구멍으로 삼키기를 실습해오고 있었는데 아직은 2인치가 모자라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눕히고 휘황찬란한 아침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브룩이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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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같이 안 잤구나?”

너무나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나는 락커에서 돌아서서 에이드리안을 쳐다봤다. 에이드리안은 가슴 위로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책으로 젖가슴을 꽁꽁 가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은 내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럼 안 잤다는 거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구.” 나는 화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에이드리안은 손을 내저으며 뒤돌아섰다. 그러나 우뚝 걸음을 멈추고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왜 이러는 거야, 벤?”

“뭘?”

“뭘 증명하려는 거냐구? 넌 앨리는 갖고 놀고 있어. 그 애는 네가 벌여놓은 게임의 졸(pawn)로 대접 받아선 안 돼.”

“뭐가 게임이라는 거야? 난 걔를 좋아해.”

에이드리안은 대들듯이 바짝 얼굴을 들이댔다. “나 때문은 아니라고 말해줘, 벤.”

“너 때문이라니?” 처음에는 ‘별 미친 소리 다 듣겠네’라며 대꾸를 했지만, 이내 개운치 못한 의심이 일었다. 내가 진짜 에이드리안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혹은 무의식적으로 내가 어린 여자애들을 따먹기나 하는 괴물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는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에이드리안은 내 눈을 들여다보며 자기의 판단을 곱씹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넌 늘 거짓말에 서툴렀어.”

그리고는 나한테서 몸을 돌려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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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이 5교시와 6교시 사이에 나한테 엉덩이를 부딪쳐왔다. “헤이, 벤.”

“헤이, 린.”

“희소식이 있어. 에이드리안이 좀 누그러진 것 같아. 오늘은 나랑 헤더한테 네 얘기를 하더라구. 인정은 안 하지만, 널 무척 그리워하는 것 같았어.

“진짜?”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와우, 린. 너희 진짜 대단하다.”

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린 별로 공이 없어. 에이드리안 아빠한테 에이드리안이 다시 심리치료를 받도록 권한 건 캔디였어. 에이드리안이 어릴 적 트라우마가 재발한 것 같다고 하니깐 바로 심리치료를 받게 하셨더라구. 내 생각엔 에이드리안은 아빠가 자기한테 신경 써주는 게 반가워서 냉큼 치료를 받으러 갔던 것 같아.”

“아우.”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앨리 샌더스하고는 진짜야?”

나는 모든 동작을 멈추고 내 친구를 돌아보며 굳게 대답했다. “그래, 왜 다들 내 진심을 의심하는 거야?”

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 단지 네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닌 것 같아서.”

“난 좋아하는 타입 같은 거 없어.” 슬쩍 짜증이 일었다.

린은 실소를 터트렸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이야...“

나는 눈을 굴렸다. “진짜라구. 알았어?”

“알았어, 알았어.” 린은 못 당하겠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진짜라면, 쭉 그렇게 하길 바래.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에이드리안하고 관계를 복원하려면 앨리랑 진짜로 사귀는 게 바람직할 것 같아. 에이드리안은 널 친구로 필요로 해, 벤. 당장은 남자친구가 아니라. 걔는 널 다시 믿는 것부터 시작해야 해. 그리고 지금은 널 그리워하기 시작했어.”

나는 한숨을 쉬고 스스로 담을 쌓아둔 마음 한구석의 빈자리를 떠올렸다. “나도 걔가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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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우리 언제 같이 잘 거야?”

앨리가 내 품에 기대며 물어왔다. 3월의 마지막 금요일, 우리는 태평양을 내려다보는 언덕으로 우리만의 소풍을 갔다. 오래전 메간과 처음으로 발견한 그 동산으로.

앨리는 대답을 기다리며 내 손가락을 걱정스럽게 만지작거렸다.

나는 느닷없는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이내 생각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네가 원하면 언제라도.”

앨리는 내 품에 녹아들며 오른손으로 내 팔을 문질렀다. “내가 안 그랬으면 하는구나?”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앨리를 더욱 힘껏 안아주었다. “아니, 당연히 원하지.”

“그러면 왜 먼저 행동을 해오지 않은 거야? 우린 벌써 세 번이나 데이트를 했어. 난 네가 일부러 끄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난...”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묶은 죄책감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내가 먼저 행동할 순 없었어, 앨리. 이번에는 말이야. 너랑은 아무 상관없어, 나 때문에 그래.”

“그게 무슨 말이야?”

한숨이 나왔다. “나는 관계를 맺어다 싶으면 늘 섹스가 중심이 되곤 했어. 줄여서 말하면, 여자친구로 삼은 애는 넷밖에 없었어. 메간, 캐시디, 에이드리안, 도온. 하지만, 그 넷 이외에도 허다한 여자애랑 섹스를 해봤어. 단지 섹스만. 다른 의미는 없이...” 나는 적절한 말을 떠올리려 말끝을 흐렸다.

앨리는 묵묵히 듣고만 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켜고 물었다. “우리 아직 친구지, 그치?”

“당연하지.”

“난 우리 우정을 소중하게 생각해. 절대 잃고 싶지 않을 만큼. 그래서 섹스가 중심이 된 관계로 변할까 봐 걱정돼.”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벤.” 앨리가 굳게 대답했다.

“왜?”

“내가 용납하지 않을 테니깐.” 앨리는 바다 너머로 지는 해를 완전히 무시하고 나와 얼굴을 맞댔다. “그냥 입 다물고 내가 널 박게 해줘.”

그리고는 내가 반응도 하기 전에 내 머리를 붙들고 키스를 심어왔다. 우리의 키스가 깊어지고 깊어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산소를 들이켜는 콧구멍도 넓어졌다. 그리고 예전에는 경험해본 적인 강렬한 키스란 걸 깨달은 순간 앨리가 나를 올라탔다.

앨리가 바람막이로 사용하고 있던 두꺼운 담요를 들추고 내 셔츠를 벗기려는 순간 차가운 바람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내가 재빨리 셔츠를 벗고 나자 앨리가 또다시 키스를 해오며 내 바지를 벗기려 들었다. 담요 아래에서 몇 차례 몸을 꼼지락거리고 나서는 바지와 팬티가 발목에 걸리게 되었고 앨리도 자기 옷을 벗으려 낑낑대며 애를 쓰고 있었다.

“시팔 이렇게 멍청할 수가,” 앨리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하필 청바지를 입고 나올 게 뭐람?”

나는 웃으며 앨리의 셔츠 아래로 손을 집어넣고 브라의 매듭을 만지작거렸다. 그동안 앨리는 바지와 팬티를 벗어 버리고 명령을 내렸다. “브라를 벗겨줘.” 거사를 주도하는 것도 앨리였고 먼저 행동을 개시한 것도 앨리였다.

나는 죄책감을 떨쳐내고는 순간의 흥분에 몸을 떠맡기고 앨리의 셔츠와 브라를 벗겨 냈다. 그리고 우리는 환하게 사방이 트인 언덕 위의 담요 아래에서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태양은 거의 저물었고 급속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입술을 찾아 키스를 하고 고대에서부터 전승된 욕정의 춤을 추며 상대의 몸에 사지를 두르는 데에는 아무런 빛도 필요치 않았다.

나는 언제 앨리의 몸속으로 들어갔는지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앨리가 먼저 들이댔는지 우연히 삽입이 되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 자지를 쥐어짜는 질벽의 수축과 거의 일 년 만에 자지를 접한 앨리가 탄성을 토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우리의 몸이 합쳐진 걸 알게 되었다. 앨리는 본능적으로 더욱 깊숙이 엉덩이를 들이댔고 나도 아담한 브루넷의 힘껏 붙잡아 주었다.

우리는 숨을 참고 있었던 것처럼 골반이 맞닿은 걸 느낀 순간 동시에 긴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앨리는 내 얼굴에 뺨을 비벼대며 들뜬 신음을 뱉었다. “들어왔어! 나한테 들어왔다고!”

나는 아련한 추억에 젖어 앨리의 등과 가느다란 허리, 그리고 엉덩이를 쓰다듬어 내리고는 볼기짝을 움켜잡았다.

“엉, 오오...” 앨리는 내 자지를 올라탄 채 엉덩이를 이리저리 씰룩거려 질벽을 넓히고는 또다시 내 머리를 붙들어 잡고 내 입술을 게걸스럽게 공격해왔다.

나는 한동안 앨리가 주도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임신사건 이후 처음으로 두툼한 자지를 맛봤으니만큼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내 막대기를 올라타고 몸을 굴러 대는 앨리의 얼굴에서도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걸 볼 수 있었다. 앨리는 바랐던 대로 나를 강하고 빠르고 깊숙하게 박아댔다. 그리고 엉덩이를 받쳐준 내 손의 도움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이내 아주 오랫동안 참아왔던 오르가즘에 오르기 시작했다.

“오마이갓, 오마이갓, 오마이갓,” 앨리는 절정으로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난 싼다! 거의 다 왔어! 다 왔다구! 다- 아아아!!!”

앨리는 자그마한 보지로 내 자지를 옥죄며 내 자지 끝이 보지 속 벽에 닿을 만큼 깊숙이 가라앉았다. 그리고는 온몸을 떨어대며 귀여운 젖가슴을 내 얼굴에 뭉개고 건전지라도 심어 놓은 것 마냥 엉덩이를 꿈틀거렸다.

앨리는 오르가즘이 지나가고 나자, 번쩍 눈을 뜨고 황갈색 응시로 내 눈을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이젠 날 위에서 박아줘, 벤!” 앨리의 명령이었다. “날 위에서 박아달라구!”

나는 재빨리 앨리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받치고 담요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몸을 굴렸다. 다행히 자지도 빠지지 않았고 담요 아래에서 자세를 잡을 수 있었다. 앨리는 일단 자세가 갖춰지자 내 머리를 붙들고 그르렁거렸다. “날 박아서 안에다 싸줘.”

나는 앨리의 명을 따라 몇 주 만에 처음으로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기꺼워하는 보지를 거침없이 박아주었다. 나는 린한테서 안정을 하라는 권유를 들은 이후로 늘 내 안에 숨어 있는 섹스에 환장한 괴물이 풀려나와 자제력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이전보다 여자애들과 시시덕거리는 걸 삼갔고 앨리와 섹스하고픈 욕망도 억눌렀다. 심지어는 브룩을 박아 줄 때도 때때로 나나 브룩이 원하는 방식인 마구 박아대는 것도 자제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 걱정 없이 그냥 마구 박아댔다.

“날 박아줘!” 앨리는 밤하늘에 대고 울부짖었다.

“날 박아줘!”

그리고 나는 앨리의 아담한 보지를 무자비하게 마구 박아주었다.

내가 막 싸려는 순간 앨리가 몸을 굳히는 걸 느껴졌다. 내가 워낙 토끼처럼 열나게 박아대서 금방 두 번째 오르가즘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내 욕심을 채우는 것에 혈안이 되어 앨리의 상태에 대해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그 순간 갑자기 불알이 수축하고 수백만이 넘는 살아있는 정자들이 앨리의 자궁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저질러버린 것이다. 나는 첫 섹스로 앨리를 임신시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걱정도 없었다. 앨리는 자기가 안전하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늘 친구일 거라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내 귀에 대고 행복한 신음을 토해냈다. “넌 나한테 싸고 있어! 뜨거운 주스가 느껴져, 밴! 너무 좋아! 너무너무 좋다구!”

나는 불알의 내용물이 몽땅 비워진 순간 그대로 무너져 내려 앨리의 옆으로 처박혔고 마지막으로 대롱을 타고 쏟아져 나온 정액이 앨리의 허벅지에 흩뿌려졌다. 나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뭔가를 깨달았다.

나는 지난 몇 주 동안, 싸고 나서는 늘 마음을 비울 수 있었다. 헬렌, 안, 브룩, 케이디 누가 됐든지 간에. 나는 각각의 오르가즘 때마다 늘 마음이 비울 수 있었고 그런 평온한 상태에 조금은 중독되기까지 했다. 텅 빈 마음이 괴로운 마음보다 훨씬 나았다. 적어도 에이드리안을 잊을 수 있어 번뇌고 뭐고 남아있질 않게 해줬으니깐. 나는 에이드리안을 떠올리는 게 몹시 괴로웠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을 비울 수 없었다. 지금은 이 작고 다정한 여자애를 향한 감사와 따듯한 정이 텅 빈 마음을 대신하고 있었다. 나는 앨리와 함께 누워있는 게 너무나도 고마웠다. 그래서 앨리한테 부드럽게 키스를 하게 된 것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랑은 아니었다. 적어도 도온이나 에이드리안한테 느껴보았던 절실한 갈망 같은 건 아니었다. 단지 메간과 캐시디한테 느껴본 적이 있는 따듯하고 포근한 정에 더욱 가까웠다. 언뜻 이해가 가는 일이기도 했다. 애초에 우리는 친구 사이였다. 나는 그 애들과 함께하면서 평온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리고 또한, 앨리가 고마웠다. 앨리는 내가 외롭지 않도록 나와 함께 있어주었다.

“고마워.”

“음, 아니. 내가 더 고마워.” 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기억보다 훨씬 좋았어.”

나는 섹스를 고마워한 게 아니었다. 앨리는 그렇게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전혀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대신에 나는 앨리와 이마를 맞대고 만족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차가운 밤 공기가 우리의 과열된 몸을 식히기 전까지 그렇게 누워 있었다. 앨리는 고개를 들어 언덕을 완전하게 잠식한 어둠을 둘러보았다. 오직 흐릿한 달빛만이 차까지 가는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앨리는 나를 돌아보았다. “지금쯤이면 케니가 애비를 데리러 왔을 거야. 내 침대에서 또 해보고 싶지 않아?”

2002년 4월 상급생

월요일 오후, 벌컥 현관문이 열리고 브룩이 들이닥쳤다. “나 상급생 무도회에 간다!!!” 당장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게임기 버튼만 꾹꾹 눌러대다가 불쑥 와 닿는 게 있어 벌떡 일어서야만 했다. “잠깐, 뭐라구?” 나는 부엌 쪽으로 길게 고개를 빼고 소리를 질렀다.

브룩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켜며 케이디를 거느리고 부엌에서 나왔다. 그리고 물병을 내려놓고 한숨을 돌리고는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나 상급생 무도회에 간다구!!!”

순간적으로는 내 여동생이 무도회까지 나를 따라와 성가시게 할 거란 생각에 더럭 겁이 났다. 상급생 무도회로 말하자면 누가 뭐래도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행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중대한 행사가 여동생 때문에 망치게 되다니! “잠깐, 뭐라구?”

“오마이갓! 상급생 무도회에 나가는 2학년은 나 하나뿐이라구!” 브룩은 방방 뛰어대며 치어리더 동작인 발차기를 했다. 조금만 더 방향이 틀어졌다면 테이블 램프가 아작이 났을 것이다.

케이디는 눈썹을 들어 올리고 재미있다는 듯이 우리를 쳐다봤다.

“뭐? 누구랑?” 나는 벌떡 고개를 추켜세웠다.

“드루 워커!” 브룩은 신이 나서 외쳐댔다. “드루는 무진장 인기 있고 또 무진장 잘생겼어! 나한테 무도회 짝이 되어달라고 하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아!”

싸늘한 냉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뭐? 어떻게?” 나는 바늘을 넘길 수 없는 부러진 레코드가 된 기분이 들었다. 저번 파티에서 브룩한테 집적대던 드루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인기 많은 4학년 운동부 남자애가 2학년 여자애한테 진지하게 관심을 둘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드루하고 킨리는 헤어졌대!”

“잠깐, 누가 누구랑 헤어졌다고?”

“알 게 뭐야! 아무려면 어때! 상급생 무도회에 가게 된 마당에!”

“오늘 만우절 맞지?”

“아니!”

오, 이거 참.

그러나 브룩은 붙잡고 타이르기도 전에 얼른 자리를 떴다. “어서, 케이디! 내가 신나면 잔뜩 달아오르는 걸 너도 알잖아!”

케이디는 씩 웃으며 테이블 위에 물병을 내려놓고 이미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브룩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보란 듯이 그 당돌한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것이었다. “우릴 엿들으면서 딸을 잡는 건 말리지 않겠지만, 지저분하게 흘리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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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말라고 아무리 말려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드루는 4학년에다가 농구부 주장이었고 브룩과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꽤 주가가 높은 편이었다. 심지어 나는 그리 심하게 말리지도 못했다.

드루를 말하자면 애초에는 캐시디를 두고 벌어진 일로 껄끄러운 사이였지만 최근에는 제법 괜찮은 놈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우리는 복도 같은 데서 마주칠 때마다 서로 고개를 까닥이는 목례를 했고 지금은 서로 적당히 존중하는 사이였다. 물론, 드루는 여자애들을 좀 조악하게 다루는 면이 있었지만, 원체 남자다운 매력이 남달랐기 때문에 4학년 여자애들 사이에도 대체로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나도 드루를 그리 심하게 싫어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드루가 브룩과 섹스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피가 끓어 올랐다.

그렇기는 해도 현재로서는 딱히 브룩을 간섭해야 할 처지도 되지 못했다. 단지 좋은 오빠로 남아서 파수꾼 노릇을 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놈이 무도회를 마치고 브룩을 호텔 같은 곳으로 끌고 가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놈을 때려눕힐 작정을 했다.

한편, 브룩의 외침을 듣고 나자 나도 다음 달 오월 초순에 열리는 무도회에 대해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 무도회 짝을 구하지 못한 걸 깨닫게 되었다.

일단은 앨리가 최우선 순위였다. 우리는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었고 남들도 우리를 남자친구/여자친구로 여기고 있었다. 나는 그런 말을 입에 담지도 않았고 앨리와 그런 관계에 대해 상의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현재의 관계를 봤을 때 앨리한테 무도회 짝이 되어 달라고 하는 게 당연한 순리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무도회 짝은 앨리가 아니었다. 사실 무도회라는 말을 들은 순간 그리게 된 장면은 턱시도를 쫙 빼입고 에이드리안과 동행하는 내 모습이었다.

맘 속으로는 에이드리안을 데려가고 싶으면서 앨리를 데려가는 게 옳은 일일까? 현재 우리 관계를 고려해봤을 때, 앨리를 데려가지 않는 게 옳은 일일까?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내가 앨리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앨리를 사랑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우리는 꽤 죽이 맞는 편에다가 함께하는 게 무척 편안했다. 그리고 물론, 섹스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앨리한테 사랑을 느낄 수는 없었다.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현재로선 에이드리안은 나한테 말을 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느닷없이 심문을 해오는 걸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결국 에이드리안이 무도회짝이 될 수 없다면 오직 앨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화요일 아침 앨리랑 마주치게 되었을 때, 인사차 따듯한 포옹과 키스를 해주고 나서 물어보았다. “앨리슨 샌더스, 나랑 무도회에 갈래?”

앨리는 휘둥그레 눈을 뜨고 쩍 입을 벌렸다. 그리고 얼른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가 천천히 손을 내리며 외치는 것이었다. “오마이갓!”

나는 앨리가 충격을 받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동안 10초쯤 기다리다가 또다시 물었다. “어, 가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앨리는 환하게 얼굴을 밝히고 펄쩍 뛰어올랐다. “갈게! 가고말고, 당연히 갈게!” 그리고는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와우, 신이 날 줄이야 알았지만, 청혼을 받은 것처럼 기뻐할 줄은 미처 몰랐었다. 몇몇 학생들이 작은 소동에 발길을 멈추고 우리를 구경했다. 앨리는 내 머리를 붙들고 키스를 해왔다.

나는 잠시 앨리의 키스를 즐기다가 고개를 들고 걱정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은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앨리는 나한테 팔을 끼우고 우리 친구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믿기지가 않아...” 앨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누군가 일 년 전에... 혹은 한 달 전에라도 내가 빅벤하고 무도회에 갈 거라고 말해줬다면 절대로 믿지 못했을 거야.”

“한 달이 조금 넘게 남았을 뿐이니깐, 조만간 알게 될 거야.” 나는 미소를 지었다.

“오,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야.” 앨리는 한숨을 내쉬고 느닷없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깐, 우린 데이트를 한 지 한 달이 채 되지도 않았어, 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 수 있겠어?”

앨리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껴안았다. 160쯤 키로 머리가 내 가슴을 때렸다. “알아? 난 주말 내내 겁이 났어, 벤. 우리가 일단 섹스를 하고 나면 네가 의무를 마쳤다는 듯이 날 버릴 줄 알고.”

“널 버려? 그게 무슨 말이야?”

앨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랄까, 사랑이 아닌 것 분명하잖아. 단지 우정과... 나도 잘 모르겠어. 난 너한테 끌리지만 널 사랑하지는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내 주변 여자애들이 다 날 사랑하는 걸 바라는 건 아니니깐.”

앨리는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되는 걸까? 난 우리가 심각해지지 않기로 동의한 줄 알았어. 난 이번 가을에 스크립스(Scripps College)로 갈 테고 넌 버클리로 갈 텐데 말이야. 내 말은, 당장은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무척 행복해. 하지만, 몇 주안에 상황이 변할 수도 있어.”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나랑 무도회 가고 싶은 게 맞아? 다른 남자애하고 가고 싶으면-”

“아니, 아니. 너랑 갈 거야, 벤. 네가 1순위야.”

“그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지 꼭 너하고 갈 거야. 내 약속해.”

앨리는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내 머리를 붙잡고 또다시 키스를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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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앨리와 나는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 함께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농구를 하는 아이들을 마주쳤다. 그리고 몇몇 여자애들도. 특히, 농구를 하는 얘를 남자친구로 둔 여자애들을.

농구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드루 워커와 그 친구들 몇몇이 우리 쪽으로 나있는 복도 출구 앞에서 놀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굳히고 드루 쪽을 바라보았다. 드루하고는 딱히 문제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내 여동생을 보호할 참으로 분명히 밝혀두고 싶은 게 있었다.

“잠깐만.” 나는 드루 쪽으로 걸어갔다. “헤이, 드루.”

“헤이, 벤.” 드루는 고개를 까닥이고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나한테 앞서 가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브룩한테 무도회에 가자고 신청을 한 이후로 처음으로 대면한 것이었다. 보아하니 드루도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내 여동생한테 무도회에 가자고 했다며?” 목청을 돋우지는 않았지만, 그리 우호적인 목소리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드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걘 예쁜 애야.”

나는 드루의 말을 무시했다. “잘 보살펴 줄 거지?”

“그래.” 드루는 고개를 끄덕이고 얼굴을 폈다. 나는 드루의 얼굴에서 우리 남자애들이 여자애를 따먹게 되었을 때 짓게 되는 이죽이는 미소를 찾으려 했다.

“걜 다치게 할 거야?”

“아니, 아니. 그런 짓 안 해.” 꽤 확고한 목소리였다.

나는 드루를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드루는 마음만 먹으면 어느 여자애라도 후릴 만한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예전의 첫인상과 캐시디가 해준 썩 좋다고 볼 수 없는 평가를 들은 이상, 브룩을 따먹으려는 드루의 의도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키지 않다고 해도 최종 결정은 브룩이 내리는 이상 무턱대고 참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별문제 없는 거지?” 드루가 물었다.

“그래.”

“알았어. 하지만, 가기 전에 일러둘 게 있어. 목요일 밤에 파티를 열어. 일종의 봄방학 맞이 파티라고 할까.”

“목요일?” 애매한 날이라서 확인을 해야 했다.

“그래. 금요일에는 많이들 마을을 떠나게 될 테니깐 미리 목요일에 여는 거야. 다들 오기로 했어. 팀도 오고 치어리더도 오기로. 네가 동생을 지켜주고 싶을까 봐, 브룩도 오기로 했거든.”

암 가야지 가고말고. “어, 알았어. 괜찮은 생각 같네.” 불쑥 딴생각이 떠올랐다. “에이드리안도 온대?”

“어, 그런 것 같아. 온다고 했거든. 감당할 수 있겠어?” 살짝 도전적인 목소리였다.

“그래.” 나는 앨리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래, 감당할 수 있어.”

“그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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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천천히...맞아, 그렇게...으음...”

“오, 앨리.”

우리는 내 방에서 일을 치르고 있었다. 쌍둥이들은 수요일 오후를 친구네 집에서 보내고 있었고 브룩은 학교에 남아서 치어리더 연습을 하고 있어서 텅 빈 집에는 우리뿐이었다.

“너 너무 긴장한 것 아냐? 진정하고 맘껏 싸. 네 걸 느끼고 싶어.”

“어응.” 나는 끙끙대며 대답했다. “일분만 더.”

“난 벌써 두 번이나 쌌다구. 그러니깐 맘 놓고 싸도 돼.” 앨리는 킥킥대며 내 등을 문질러 주었다.

“한 번만 더.” 나는 절구질을 해대며 앨리의 목에서 어깨까지 스치듯 키스를 했고 앨리가 다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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