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라이언
2001년 11월 추수감사절 주말
“벤!”
도온이 워낙 힘껏 달려들었기에 온몸이 휘청거렸다. 나는 두 다리로 내 허리를 감고 화산폭발 키스를 해오는 도온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무릎을 후들거리며 진땀을 흘러야 했지만, 우선은 마음이 놓였다.
처음에는 제트 브리지(jet bridge)를 내려왔는데도 내 여자친구가 보이지 않아 실망하고 있었다. 도온이 라이언이나 딴 남자애한테 박히느라 바빠서 나를 잊은 줄 알고 심장이 덜컥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들이 줄을 지어 출구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911사태 이후에 강화된 보안조치로 더 이상은 출구 앞까지 마중나올 수 없게 된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짐을 찾고 대기 장소로 향했고 마중나온 도온을 발견하고 터질듯한 기쁨을 느꼈다.
순식간에 비참한 슬픔에서 행복한 환희를 느끼게 되어 도온과의 재회가 더욱 달콤하게 느껴졌다. 또한, 있는 줄도 모르고 있던 긴장감이 증발해버리는 것을 느끼며 내 존재의 깊숙한 곳에서 안도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음! 사랑해!” 나는 절박한 신음을 토해냈다.
“나도 사랑해!” 도온은 전에는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맹렬한 열정으로 키스를 퍼부었다. 나는 도온의 열정에 불을 당긴 자극에 대해서는 그리 확신이 서진 않았지만, 내 열정에 불을 단긴 존재를 뚜렷히 자각하며 지지 않고 도온의 열정에 맞섰다. - 나는 에이드리안한테 느낀 감정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누구하고 든지 섹스를 하게 된 이상은 감정적인 끌림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심지어 스테이시 화이트하우스 같은 경우처럼 100퍼센트 감정을 배제한 섹스라도 결국에는 호감이 남게 마련이었다. 만약에 길을 가다 스테이시를 마주치게 된다면 본능적으로 포옹을 하고 안부를 묻고 싶은 걸 참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지금이 꼭 그 꼴이었다. 실제로 나는 에이드리안과 성교를 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알몸이 되어 오르가즘을 주고받았다. 그 일은 에이드리안한테 느낀 은근한 애정의 발로(發露)였지 우연히 벌어진 일시적인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매혹적인 내 전-여자친구는 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 대부분은 도온의 차지였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 중 하나는 내 평생에서 가장 열정적인 감정을 담아 키스를 해주는 것이었다. 제길, 공공장소가 아니라면, 그 자리에서 도온을 바닥에 내던지고 내 존재의 모든 세포를 담아 내 사랑을 증명하는 사랑을 나눴을 것이다. 그리고 필사적인 키스로 나에 대한 애정을 증명하는 모습을 보건대 도온도 나하고 같은 마음인 것 같았다.
물론, 그런 모습을 대하고 보니 도온이 지난 3주 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지 호기심이 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경과 보고는 나중 일이었고 당장은 우리의 사랑을 음미하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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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츄리?”
도온은 나를 돌아보면 씩 하고 미소를 지었다. “응, 왜?”
나는 눈썹을 오므리고 라디오를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컨츄리 음악을 좋아하는지는 꿈에도 몰랐어.”
도온은 킥킥대며 웃었다. “진짜? 3주 전에도 이걸 틀은 적이 있는데?”
“우리는 한 차에 타본 적이 거의 없어. 내 차에는 잠깐 함께 타본 적이 있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게다가, 그때는 정신도 사나웠어.”
도온은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내 기분은 손에 쥔 것 마냥 읽을 수 있지만, 컨츄리를 좋아하는 건 꿈에도 몰랐다구?”
나는 웃음이 터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뭐, 우리는 캠프에 있을 때도 함께 음악을 듣지는 않았잖아. 하긴 캠프에서 컨츄리 음악을 꽤 많이 틀어주기는 했지만.” 나는 껄껄대며 웃었다. “쭉 함께했으면서도 이런 경우가 있네... 음, 또 뭘 모르고 있을지 궁금한데?”
“뭐, 내가 지금 얼마나 달아올랐는지는 짐작도 못 할걸.” 도온이 쉰 목소리로 나직이 속삭였다. “난 지난 3주 동안 한 번도 해보지 못했어.”
“나도.” 나는 눈치채지 못할 만큼 살짝 금이 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온은 고개를 저었다. “기껏 열린 관계를 하자고 해놓고선 우리도 참 대단한 것 같아.”
나는 그 말을 흘려듣고 좌석을 가로질러 도온의 어깨와 팔에 키스를 해주었다. “뭐 한가지는 틀렸어. 난 네가 얼마나 달아올랐는지 똑똑히 알 수 있거든. 난 네 기분을 손에 쥔 것처럼 읽을 수 있다구, 기억나지?”
“으음... 맞아, 넌 그럴 수 있어.” 도온은 들뜬 신음소리를 토했다.
“부모님은 집에 계셔?”
“응, 하지만 상관없어.” 도온은 느닷없이 깜빡이를 켜고 고속도로를 빠져가는 출구로 접어들었다. “갈만한 데를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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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엉! 어엉!” 도온은 잡고 버틸 것을 찾아 두 손을 휘저었고 결국 왼손으로는 좌석 머리받침을 붙잡을 수 있었지만, 오른손은 헛되이 뒷유리창을 긁어댈 뿐이었다.
고개를 낮추고 온 힘을 다해 엉덩이를 굴러대자 눈썹에 맺힌 땀이 도온의 어깨에 떨어졌다. 우리는 밀봉된 차 안에서 셔츠를 땀으로 흥건히 적셔가며 격렬하게 서로의 몸을 저어댔다. 도온의 중고 쉐비는 뒷좌석에서도 일을 치를 수 있을 만큼 내부공간이 넓었다.
“날 박아버려, 벤! 오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박아버려! 벤! 날 박아버리라구!”
나는 이를 악물고 도온의 엉덩이를 붙들었다. 그래서 상체의 무게가 고스란히 도온의 젖가슴으로 쏠리게 되었지만, 덕분에 엉덩이를 자유롭게 놀릴 수 있었다.
“오, 그래! 그렇게! 난 이게 너무너무 좋아! 시팔 너무너무 좋다구, 벤!”
“아아아!” 나는 오르가즘에 다다른 걸 느끼고 신음을 내뱉었다.
“그래!” 도온은 두 다리로 내 넓적다리를 옭아매고 더욱 힘껏 내 몸을 끌어안았다. “싸버려, 자기! 날 채워버려! 그래!”
도온은 뒤로 머리를 내던져 꽝 소리가 날만큼 험하게 차 문과 충돌했다. 그러나 그러한 충격도 엉덩이를 띄워 덜커덕거리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좌석으로 떨어진 순간 내 자지 대롱을 타고 쏟아져 나온 좆물이 내 여자친구의 포근하고 축축한 보지를 채우기 시작했다.
1분 후 나는 내 온몸의 무게가 도온을 깔아뭉개고 있음을 깨닫고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고 도온은 한동안 산소를 들이켜며 헐떡이기만 했다.
차 안을 둘러보니 밝은 대낮인데도 차창에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다. 나는 뒷유리에 찍힌 손자국을 보고는 슬그머니 웃음을 짓고 타이타닉에서 본 비슷한 장면을 떠올렸다.
나는 헐떡이며 도온을 내려다봤다. “알다시피, 이렇게 땀을 흘려가며 빤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광고를 할 바에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맞아, 그래야겠다.” 도온은 눈을 그대로 감은 채 읊조렸다. “얼른 내 방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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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애나 에번스는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가 막 2라운드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저번에는 마크 일로 경황이 없어 너희 맘대로 하라고 놔두었어. 하지만, 이번에는 너희가 딴 짓을 하리라고 기대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좀 낮춰 주었으면 좋겠구나. 아래층에 있는 사람은 네 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것 말고도 다른 할 일이 있으니깐.”
나는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고 심지어 도온은 나보다 더 심하게 얼굴을 붉혔다. “예. 엄마.”
“오케이,” 에번스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은밀하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그렇긴 해도, 밤에는 마음이 바뀔지도 몰라. 저번에 벤이 여기에 있었을 때는 실제로 네 아빠가 날 침실로 끌고갔지 뭐니.”
“??, 엄마!” 에번스 부인은 딸의 성화를 무시하고 껄껄대며 자리를 떴다.
내가 고개를 내젓고 있자 내 여자친구가 나한테 팔을 둘렀다. 우리는 에너지를 보충하러 부엌으로 향했다. “생각해 둔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 난 여기에 있는 2박3일 동안 네 뜻에 따를 참이야.”
“계획이라니? 무슨 계획? 집 밖으로 나가고 싶어?” 도온은 씩 하고 미소를 지었다. “난 방을 걸어 잠그고 너랑 토끼처럼 박아대다가 배고플 때만 밖으로 나올 생각이었어.”
“우, 나도 방문해도 돼?” 디제이가 냉장고로 다가서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디제이의 엉덩이를 감상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에번스 가의 막내는 지난 3주 동안 한층 더 엉덩이를 키우고 그새 도온의 열여섯 살 때 모습을 떠올리게 할 만큼 자라있었다.
“어쩌면... 말 잘 듣고 ... 휴식이 필요하다 싶으면.”
“한 시간 전에 들은 것처럼 박아대면, 내 장담하는데, 휴식이 꼭 필요할걸.” 디제이는 나한테 눈빛을 반짝이며 들뜬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도온은 눈을 굴렸다. “오늘 밤에 데이트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그러고 나서는 룰루랄라 부엌을 나갔다.
도온은 나를 돌아보았다. “아무튼, 진짜, 우린 대화를 해야 해.” 깊은숨을 들이키는 도온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저번에 규칙을 정해 놓았지만... 지금은... 현실이야. 그동안 사정도 달라졌고. 예상보다 훨씬 복잡해진 것 같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열린 관계를 취소하기라도 할 참인가? 도온을 사랑했지만, 남은 7개월을 버텨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열린 관계라는 게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건 전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나는 밖을 내다보았다. “밖으로 나갈래?”
도온은 빈 물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한테 팔을 끼웠다.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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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아래쪽에는 어렸을 적에 놀러 가곤 했던 작은 공원이 있었다. 우리가 타고 놀던 정글짐은 꽤 오래전에 새것으로 교체되었지만 그래도 예전의 추억이 소록소록 솟아났다. 우리는 잠시 주변을 거닐고 나란히 그네에 앉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뜸을 들이고 있자 도온이 불쑥 입을 열었다. “벤, 확실히 알고 싶어. 내가 라이언하고 자는 게 진짜 아무렇지 않아?”
나도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찔거렸고 도온은 그런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 봐! 네 얼굴에 다 드러나잖아! 그래서 내가 이걸 할 수 없었던 거야!”
“아니, 아니, 잠깐만,” 나는 그넷줄을 놓고 손을 내저었다. “그래, 맞아, 부인하지는 않을게. 열린 관계가 마음에 든다고는 말 못하겠어. 하지만, 해볼 만하다고 생각해. 네가 그러는 것도 당연한 거야, 도온. 난 널 위해서 여기에 있어 줄 수도 없고, 언젠가 우리가 결혼하게 되었을 때, 네가 경험해 보지 못한 일로 아쉬워하길 바라지 않아. 한 남자랑 한평생을 함께하는 게 진짜 이상적으로 들리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난 널 알아, 넌 호기심으로 속이 타들어갈 것이고, 결국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리라는 걸.”
도온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늘어트렸다. 그리고 다리로 땅을 짚고 살며시 그네를 탔다. “난 역설적인 상황에 갇힌 것 같아, 벤. 난 널 사랑해, 난 늘 너를 사랑했어. 그리고 네가 여기서 나랑 있어 줄 때는 딴 사람하고 함께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어. 라이언을 포함해서도 말이야. 내 말은, 지금 당장, 지금 여기여서는 걔랑 자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 네가 있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어?”
도온은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네가 여기에 없을 땐... 외로워서 미칠 지경이야. 그 애는 다정한데다가 날 몰아세우질 않아. 그리고 딴 남자애들 같았으면 이미 한 달 전에 포기했을 테지만, 그 애는 내 곁에 머물러줬어...” 도온은 느릿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마음이 놓여, 벤. 그리고 그런 순간에는... 진짜 하고 싶어져. 좋은 기분을 느끼고 싶어진다구. 하지만,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겁이 나서 도망을 치게 돼. 너랑 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열린 관계에 대해 약속을 했지만, 벤. 막상 그런 순간이 다가왔을 때는 도저히 못 할 것 같은 기분만 들어”
나는 한숨을 쉬고 도온 이외의 여자애들과 함께할 기회를 차버렸던 나 자신의 경우를 떠올렸다. ‘에이드리안은 제외하고,’ 문뜩 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안으로 접어버리고 기껏해야 “맞아, 너무너무 복잡해.”라는 말만 해줄 수 있었다.
“맞아.”
“그럼 우리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물었다.
“그러니깐...” 도온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이디어가 하나 있기는 한데... 네가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아.”
나는 눈썹을 오므리고 나의 도온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나는 도온을 사랑했다. “난 널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어.”
도온은 우뚝 그네를 멈췄다. “라이언이 나랑 섹스할 때 너도 그 자리에 있어줬으면 해.”
내가 정말 감당할 수나 있는 걸까? 나의 도온이 딴 남자애랑 섹스하는 모습을 진짜로 지켜볼 수 있을까? 나는 입술을 깨물고 깊이 생각에 잠겼다. 도온이 친구들을 만나러 쇼핑몰로 차를 모는 내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컨츄리 음악은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우리는 심각한 대화를 나눴다. 나는 다 괜찮다는 표시를 수시로 손을 내저었고 내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듯한 도온의 눈을 바라보며 내가 도온을 위해 스스로 거짓말을 강요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튼, 우리는 시험 삼아 도온이 말한 아이디어를 한 번 시도해보기로 합의했다. 비록 우리는 그런 상황에 대해 마음이 불편했지만, 도온이 장애물을 뛰어넘고 싶어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한 마음으로 동의를 한 것이었다. 나는 그와 같은 자리에 함께 있어야 하는 게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둘은 첫 섹스를 하는 것이니 만치 감흥이야 남다를 테지만 섹스 자체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형편없을 거로 확신이 들었다.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았다. 돈을 아낄 겸 대낮할인 영화를 본 다음 저녁을 먹고 좀 어물쩡거리다가 어찌어찌해서 라이언과 함께 그 애 집으로 가서 실제로 일을 치르는 것이었다. 라이언의 나머지 가족은 주말 동안 친척이 사는 새크라멘토에 놀러 갔다고 했다. 우리는 밤을 새워서라도 라이언을 꼬드길 방법을 찾아낼 작정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첫째로 잘못된 건, 190이 넘는 황금빛 블론드 아도니스는 나를 보자마자 덜컥 겁을 집어먹고는 어색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도온은 자기가 “열린 관계”중임을 밝혔다고 했다. 그리고 라이언으로선 도온한테 저항할 길이 없어서였겠지만, 그 둘은 지난 3주 동안 조금씩 조금씩 육체적으로 가까워졌고 현재 라이언은 도온한테 손으로 자위를 해주는 단계, 그리고 도온은 라이언을 손으로 딸 쳐주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했다. 비록 도온은 걸리는 게 있어 그 이상은 허락할 수 없었다고 나한테 말해주었지만.
현재의 라이언은 오렌지 카운티에 산다는 도온의 남자친구(나)가 그곳에 짱박혀서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도온과 친밀한 성적 접촉을 할 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는 해도 내가 실제로 나타난 것을 보고는 도온과 함부로 굴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도온은 라이언한테 다가가 포옹을 하며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라이언은 내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휘둥그레 뜬 눈으로 꼬리를 내리듯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내 앞에서는 도온과 포옹도 하지 못하는 마당에 섹스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나는 눈을 굴렸다.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었다. 오직 나하고 도온, 다른 보통의 커플들처럼 서로만 바라보는 관계. 맞지?
라이언은 한참 뒤에야 나한테 다가와 악수를 건넸고 나는 라이언을 안심시키려 애를 썼다. “내가 없을 때 내 여자친구를 보살펴줘서 고맙게 생각해.”
“어, 그래.” 라이언은 마치 야구방망이이라도 날라올 거로 생각했는지 경계하는 눈빛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하고 있을 때, 내 여자친구가 옆으로 다가와 라이언의 옆구리에 팔을 끼웠다.
“진정해, 라이언. 벤은 물지 않아.” 도온은 미소를 지으며 다소 걱정스레 덧붙였다. “보통은 말이야.”
농담을 하고자 한 말이었지만, 라이언한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도온은 다른 친구들한테도 인사를 시켜주려 나를 돌려세웠다. “트리샤랑 스테판, 그웬, 낸시와 트래비스, 그리고 로빈. 끝.”
나는 미소를 짓고 모두한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나와 아직 라이언과 팔을 끼고 있는 내 여자친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분명히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달은 것 같았다. 사실, 이 애들은 지난 몇 주 동안 도온과 라이언이 가까워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나의 무덤덤한 태도에 호기심이 생긴 것이었다. 아마 트리샤와 스테판은 도온과 나의 약속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얘기가 어디까지 퍼졌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아무튼, 우리는 일행들 사이로 살며시 긴장이 흐르는 걸 무시하고 영화관으로 가서 표를 끊었다. 나는 혼자서 표값을 물었다. 도온은 라이언한테 자기 표값을 물게 했다. 그 행위는 우리의 의도를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인 행위였다. 그리고 나는 영화관으로 들어가서도 일부러 도온과 떨어져 앉았다. 사실 나는 도온과 붙어앉고 영화가 상영되는 두 시간 내내 손을 붙잡고 주물러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나는 지난 3주 동안 도온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는데 두 시간이나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에 실제로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러나 내가 함께 하고 있을 때도 도온과 시시덕거리는 걸 용인한다는 것을 라이언한테 일깨워주려는 게 원래의 시나리오였다. 그래서 내가 바로 옆자리에 앉으면 라이언이 절대 긴장을 풀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일부러 멀리 떨어져서 앉은 것이었다. 제길, 내가 둘의 옆자리에 바짝 붙어앉았다면 나도 긴장을 풀 수 없었을 것이다. 좌석 통로를 내려다보니 도온과 라이언이 나란히 붙어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고 트리샤와 스테판도 단짝친구들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다행히 나는 도온의 친구인 그웬과 로빈 사이에 앉게 되었다. “근데, 벤?” 그웬이 발랄하게 운을 뗐다. “오늘 밤 우리의 짝이 되어 줄래?”
나는 예쁘게 생긴, 살짝 천박해 보이는 갈금발 여자애를 쳐다봤다. 저번 방문 때에는 거리낌 없이 꼬리를 치는 파티 광이라는 인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심지어는 도온한테 나를 빌려갈 수 있는지 묻기도 한 여자애였다. 나는 좌석 통로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도온과 라이언이 손가락으로 깍지를 끼고 손을 맞잡은 것을 발견하고는 확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꺼이 그럴게.”
그웬은 골빈년처럼 킥킥대며 팔걸이에 올려놓은 내 팔에 대고 젖가슴을 지극히 눌러왔다. 나는 억지로 긴장을 풀고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매력남처럼 보이려 애를 썼다.
한편, 다른 쪽에 앉아 있는 로빈은 다소 점잖은 편이었는데 시시덕거리는 것보다는 호기심이 많은 것 같았다. 매력적인 브루넷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벤. 너하고 도온은 아직 함께인 거지, 맞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로빈은 시선을 돌려 그웬과 스테판, 트리샤 쪽을 차례차례 훑어보고는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왜 쟤가 저기에서 라이언이랑 앉아 있는 거지?”
나는 한순간 멍해졌다. 도온과 나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상의해 본 적이 없었다.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 글쎄...” 나는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응시하는 로빈의 눈을 의식하며 다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척 봐도 뻥이 통하지 않는 똑똑한 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떨어져 있을 동안 도온과 라이언이... 어떻게 지냈는지 다 알고 있었다는 것만 말해줄게.”
로빈은 회의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재들이 ...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거야?” 로빈은 아무 방향으로 손을 내저으며 물었다.
“맞아, 그런 셈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난 재가 날 사랑하는 걸 알아, 그리고 우리는 오래지 않아 다시 함께할 수 있을 거야.”
“그런 쟤들이 서로 박아대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거야?” 로빈이 대놓고 물었다.
나는 목구멍 속에서부터 역정이 이는 걸 꾹 억눌렀다. “기본적으로는, 그래.”
“열린 관계 같은 걸 말하는 거구나?” 그웬이 반대쪽에서 끼어들었다.
나는 그웬의 말에 눈썹을 들어 올리고 심호흡을 하며 인정했다. “맞아, 그런 거.”
그 즉시 그웬은 내 팔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그리고 깊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혀를 굴렸다. “그럼... 둘다 그렇다는 거야? 벤... 너도... 열려 있어?”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나한테 미소를 짓는 그웬을 바라보며 머릿속에서 형광등이 켜졌다. 긴장 속에서 딴 남자애랑 몸을 비벼대는 나의 진정한 사랑, 나의 도온만 바라보느라 미처 그런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예쁜 여자애한테 자신을 잃어버리는 건 꽤 괜찮은 아이디어 같았다. “뭐, 사실은... 그래, 나도 열려 있어.”
그웬은 바짝 몸을 붙이고 젖가슴을 눌러오며 미소를 지었다. “알게 돼서 다행이야.”
로빈은 한숨을 쉬고 괴로운 신음을 토했다. “참 내, 그웬, 누가 걸레 아니랄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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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잘못된 일은, 블랙 나이트(Black Knight)라는 영화가 끔찍할 만큼 졸작이라는 사실이었다. 엉성한 세트에, 연기도 못 봐줄 정도였다. 게다가 구성 자체도 스팟(See Spot Run, 2001)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처럼 보일 만큼 형편없었다.
도대체 왜 이런 좆같은 걸 보러 온 걸까? 우리가 그저 우르르 몰려다니고 싶은 마음에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보는 10대도 아니잖은가?
아무튼...
다들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식었는지 하나둘씩 밖으로 나와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꽤 이른 시간에 밖으로 나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도온이 밖으로 나오는 걸 보게 되었다.
도온은 벽 옆에 서서 손으로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생각에 빠진 모습으로 눈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마음이 아려 도온을 안아주려 재빨리 로비를 가로질러 갔다.
도온은 내가 다가오는 걸 보고 몸을 돌려 내 팔에 안겼다. 그리고 콧노래를 흥얼대며 내 어깨에 고개를 눕혔다. “하이, 벤.” 도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아니, 사실은 괜찮지 않아. 모든 게 너무 어색하지 않아? 우리가 지금 뭘 하는 거지? 지금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게 섹스인데 말이야.”
“에이, 나 상처받았어.” 나는 일부러 속상한 척을 했다. “지금 내가 널 안아주었는데도 조금도 달아오르지 않았단 말이야?”
“뭐, 아마 조금은,” 도온은 미소를 짓고 그 크리스털처럼 파란 눈동자를 짜증이 났다는 듯이 굴리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난 요 3주 동안 네가 무척 그리웠어. 그걸 두 배로 하더라도 시원찮은 참이었다구.”
“나도 그래.” 나는 미소를 지으며 도온을 더욱 꼭 안아주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줘. 도온.”
“무엇이든지, 벤.”
“오늘 밤 무슨 일이 벌어지건,” 나는 도온을 눈을 응시하며 심각하게 말했다. “널 내 팔에 안고 잠들고 싶어.”
나의 진정한 사랑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하지.” 그리고는 화실폭발 키스를 해달라며 입술을 내밀었다.
우리는 함께하는 기쁨에 젖어 서로의 입술에 행복한 신음을 토했다. 그러나 그 순간 뒷목이 뜨끔해져 - 왜 다들 누군가한테서 눈총을 받다 보면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듯이-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라이언이 굉장히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짓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라이언은 이를 악물고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제길!” 도온은 황급히 나한테서 벗어나고는 잘생긴 남자애를 쫓아갔다. “라이언!”
도온이 나와 서른 발짝쯤 떨어진 곳에서 라이언을 따라잡는 게 보였다. 그 둘은 재빨리 팔을 휘저어가며 생기있게 대화를 나눴다. 라이언은 분명히 속이 상한 모습이었고 도온은 라이언을 진정시키려고 열과 성을 다해 애를 쓰고 있었다.
어느새 그웬이 내 옆에 붙어서 그 둘을 바라보았다. “쟤들이 다투는 모습은 처음 본 것 같아.”
“진짜?” 나는 내 옆의 예쁜 여자애를 돌아보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서는 로빈이 트리샤하고 낸시와 고개를 맞대고 활기차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셋이 도온과 나의 “열린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래, 쟤들은 지난 몇 주 동안 진짜 완벽한 한 쌍이었어.” 그웬은 아름다운 금발 커플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라이언은 도온을 무척 행복하게 해주었어.”
속으로 질투가 스멀거렸다. 아무도 내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권리가 없어, 나만 빼놓고 말이야, 맞지? 화가 치솟으며 팔에 긴장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꾹 참아야만 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온한테 7개월 동안 나한테만 충실하라고 요구를 한단 말인가? 나는 도온을 사랑했다. 나는 도온을 너무나 사랑해서 놔줄 수도 있었다. 왜냐면, 결국에는 우리가 함께할 수 있음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도온이 나만 바라고 거의 일 년이라는 시간을 혼자 외롭게 지내게 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우리의 시나리오대로 부드럽게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도온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들어줄 작정이었다.
“뭐, 그렇다면,” 나는 돌아서기 전에 바닥을 내려다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둘한텐 잘된 일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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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판다 익스프레스에서 먹게 되었다. 그리고 누가 미리 정해놓은 건지 혹은 무의식중에 저절로 그렇게 된 건지 알 길은 없었지만, 아무튼 모두 짝을 이뤄 앉게 되었다. 도온은 라이언, 트리샤는 스테판, 낸시는 트래비스, 그리고 그웬과 나. 로빈은 의자를 당겨 그웬 옆에 앉았다.
그웬은 마치 우리가 오래전부터 커플이었던 생각이 들게끔 행동했다. 그웬은 자기 친구들은 깡그리 무시하고 나한테만 말을 했고 그리 은근하지 않은 암시를 수시로 대화에 끼워 넣었다. 무슨 말이냐면, 한 여자애가 젓가락으로 댁의 2단 콤보를 가리키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날 포크(pork-돼지고기, fuck와 비슷)해 줄래”라고 말을 하면 더는 들어볼 것도 없지 않을까?
솔직히 말해, 그웬이 챙겨주는 게 그리 싫지는 않았다. 마음속 한구석으로는 내 여자친구가 나와 겨우 세 발짝 거리에서 딴 남자애를 엮어 보려고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을 보며 딴 여자애한테 관심을 받는 걸 정당화하려고 했다. 나는 그웬과 맞장구를 치며 대화를 나눴고 10분 후에는 서로 음식을 먹여 주기도 했다.
로빈의 도온과 나의 열린 관계를 누설했음을 시인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커플은 음식은 본체만체하고 나와 도온을 관찰하는 것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낸시와 트래비스는 익살이 섞인 놀라움으로 우리는 지켜봤다. 그 둘은 원래는 도온과 내가 커플 행세를 해야 하는데도 보란 듯이 딴 사람과 희롱을 해대는 것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던 것 같다.
도온은 스테판이 한 달 전쯤부터 자기를 넘보면서 엉큼한 수작을 걸어오곤 했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다. 아마도 스테판은 도온이 열린 관계 중인 것을 알고 나서 잘하면 자기한테도 도온을 따먹을 기회가 생길 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친한 친구들한테 스와핑 같은 걸 해보자고 한 말은 역풍을 맞게 되었다. 트리샤는 남자친구를 후려치고 꿈도 꾸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바람직한 현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라이언은 그날 밤 처음으로 보호본능이 발동한 것처럼 도온한테 팔을 두르고 마치 자기가 도온의 남자친구가 된 것 마냥 스테판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주차장을 어슬렁거리게 되었다. 우리는 스테판이 끌고 온 대형 픽업 트럭을 둘러싸고 다음에 무엇을 할지 상의했다.
“너희 집에 가는 게 어떨까, 라이언?” 도온은 덩치 큰 남자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다정히 라이언을 올려다보았다.
라이언은 원래 미소를 지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나를 가리키는 눈짓을 해보이는 것이었다. 내 딴에는 최대한 중립적인 마음으로 라이언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있잖아, 어, 도온. 별로 좋은 아이디어가 아닌 것 같아.”
“그러지 말고, 몇 시간만 더 놀고 싶어서 그래. 맞아, 맥주도 몇 잔 마시면서 좀 느슨하게 기분을 풀게.” 도온이 상냥하게 부추겼다.
라이언은 어정쩡하게 도온의 손을 밀어냈다. 그리고 어깨를 펴고 나를 향해 굳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나 혼자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아.”
“라이어어언...” 도온이 떼를 썼다.
그러나 라이언은 두 손을 들고 예쁜 블론드를 꾸짖었다. “도온, 그만 해.” 그리고는 당당한 자세로 나한테 똑바로 걸어오더니 내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고 엄숙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웬은 그때까지도 내 팔에 매달려 있었는데 라이언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도망치듯 뒤로 물러났다. 나도 어깨를 펴고 꼿꼿이 몸을 세웠지만 그래도 라이언보다는 몇 인치쯤 키가 모자랐다. 나는 팔에 긴장이 흐르는 걸 느끼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러나 라이언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우뚝 멈춰 서서 나한테 손바닥을 펴보였다. 긴장을 풀 수밖에 없는 허심탄회한 태도였다. “봐봐, 벤. 다 내 잘못이야. 난 도온한테 남자친구가 있는 걸 알았고 도온을 쫓지 말아야 하는 내 나름의 규칙도 있었어. 하지만, 난 어쩔 수 없었어. 도온은 예쁘고 똑똑해. 도온은... 도온은 말로는 설명이 안 돼. 하지만, 도온은 내 여자친구가 아니었어. 난 그 사실을 알고도 도온을 쫓아다녔어.” 라이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기의 말을 설명하듯이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내 잘못인 걸 알아. 너희가 어떤 관계인지는 상관없어. 열린 관계건 아니건 간에, 난 너희 관계를 존중해. 네가 여기에 없을 때, 난 스스로 눈이 멀어서 그 점을 보지 못했어. 왜냐면, 도온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에. 하지만, 더 이상은 장님이 될 순 없어. 도온은 네 여자친구야. 그리고 도온은 널 사랑해. 여기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어. 맞아, 오늘 밤에는 그 사실을 감추려고 했어. 하지만, 네가 도착한 즉시 도온은 딴 여자애가 되었어. 도온은 네 여자야.”
라이언은 길게 심호흡을 하고 악수를 바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내가 얼떨결에 손을 내밀자 내 손을 굳세게 잡고는 악수를 해왔다. “행복하길 빌게, 벤.”
나는 살짝 어리둥절했지만, 라이언의 솔직함에 감명을 받고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악수한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 나서 라이언은 도온을 힐끔 돌아보았다 - 도온은 아래턱을 바닥에 내려트리고 라이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졌다. 라이언의 뺨에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둘 다 최고로 행복하길 바래. 도온은 마땅히 그래야 해.”
나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믿기지 않아 천천히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라이언은 악수를 풀고 돌아섰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나를 되돌아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온을 잘 보살펴줘야 할 거야, 벤. 네가 그 일을 그르치기라도 하면, 내가 어떻게 할지 알고 있을 거야.”
자기의 존엄을 무너뜨리지 않으려 애를 쓰는 라이언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가 일었다. 라이언은 심지어 눈물을 훔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쓸쓸한 얼굴로 도온 쪽을 힐끔 쳐다보고는 자기 차를 향해 걸어갔다.
라이언이 차에 닿기 전에 스테판이 외쳤다. “헤이! 내일 너희 집에서 축구 시합 보는 거 맞지?”
라이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팔을 들어 보이기만 했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도대체 본다는 거야 만다는 거야?” 스테판은 라이언처럼 팔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트리샤는 남자친구한테 눈을 굴려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도온도 눈물을 글썽이며 두 팔로 자기 몸을 꼭 껴안고 있었다. 나는 도온을 안아주러 서둘러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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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온을 집으로 차를 몰고 오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우리는 각자 따로 샤워를 했고 꼭 필요한 말만 빼놓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마쳤다. 우리는 둘 다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내가 침대 등받이에 기대고 팔을 벌리자 나의 진정한 사랑, 나의 단짝친구, 나의 도온은 기꺼이 내 품에 파고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건 간에, 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보통 남자애가 아닌 것 같아.” 나는 나직이 속삭였다.
도온은 천천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도온의 푸른 응시는 내 오른쪽으로 살짝 비껴 고정되어 있었다.
“네가 그 애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 그 애는 널 존중해. 난 그 점이 마음에 들어.”
도온은 또다시 고개만 끄덕였다.
“그 애를 사랑하는 것 같아?” 나는 목소리를 낮춰 부드럽게 물었다.
도온은 몸서리를 치고 내 어깨에 뺨을 꼭 갖다댔다. 그리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벤, 난 절대로 널 잃고 싶지 않아.”
“그럴 거야, 절대로. 우리는 함께할 운명이야, 도온. 언젠가는 말이야. 하지만, 우린 아직 어려. 우린 열일곱 살밖에 안 됐다구.”
도온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내 품에 녹아들려고만 했다. 무척 좋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본능적으로 괴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또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 애를 사랑하는 것 같아?”
“모르겠어,” 도온은 내가 그 표정을 읽기도 전에 눈길을 피했다. “그 애를 좋아해. 그 애는 잘생겼어, 그 애는 사려 깊어. 하지만, 내가 널 사랑하는 건 똑똑히 알아. 뼛속으로 느낄 수 있어, 벤. 단지... 너 말고 딴 사람한테 마음을 내줄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어.”
“그럼 그 애한테 감정이 있다는 거네?”
도온은 눈물을 쏟아내며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선 안 되는 거였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도온은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도온이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등을 쓸어주면 달래주었다. “괜찮아, 도온. 괜찮다구.”
“아니!” 도온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벤. 알았지? 널 기다릴 거야. 겨우 일곱 달이잖아. 그쯤은 버틸 수 있어.”
“하지만, 넌 달아오르기만 하고 행복하지 않을 거야. 넌 지금껏 행복하지 않았다구.”
“상관없어. 어차피 라이언도 못 할 게 분명해. 네 말대로, 그 애는 날 존중해. 벤, 우린... 함께 한 적이... 무척 많아. 그 애는 열두 번도 더 날 박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날 박지 않았어. 심지어는 블로우잡도 못 하게 말렸어. 그리고 이렇게 오랫동안 끌고 온 걸 봤을 때, 앞으로도 못 할 게 분명해. 그처럼 잘생긴 열아홉짜리 남자애가 넉 달 동안 여자애를 쫓아다니기만 하고 한 번도 블로우잡을 못 하게 한 게 말이 되냐구.”
나는 도온을 외면했다. “사랑에 빠진 남자라면.”
도온은 몸을 움찔거리고 다시 훌쩍여댔다.
“그 애는 너와 사랑에 빠졌어, 도온.” 나는 나직이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에이드리안이 떠올랐다. 나도 도온과 비슷한 처지였다.
“그렇다면 지금부턴 라이언하고 거리를 둬야 할까 봐.”
나는 한숨을 쉬고 도온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리고는 나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질문을 떠올리고 도온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기 위해 고개를 기울였다. 도온은 눈을 깜박여 눈물을 털어내고 의아해하는 얼굴로 내 말을 기다렸다. “그 애와 만나는 걸 그만두고 싶어?”
도온은 눈가에 힘을 주고 몸을 움찔였다. 말로는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나에게는 그 이상 분명한 대답이 없었다. 아니, 도온은 라이언과 만나는 걸 그만두고 싶어 하지 않아.
나는 심호흡을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면 그만두지 않아도 돼.”
도온은 한층 더 눈썹을 오므렸다. “하지만, 벤...”
내 마음은 이미 내달리고 있었다. 내가 진정으로 이걸 고려하고 있단 말인가? 나는 미쳐야 했다. “도온, 난 널 맹렬한 열정으로 사랑해. 내가 널 사랑하는 걸 아는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야. 첫째는 마음으로 느껴서야. 우리는 아기였을 때부터 서로 연결되어 있었어. 둘째는 내가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야. 난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적이 있어. 적어도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난 제법 경험이 많아. 난 겨우 일 년이 조금 넘는 기간에, 남들이라면 평생이 걸려야 하는 로맨틱한 관계를 맺어봤어. 넌 어때?”
도온은 얼굴을 찌푸리고 다소 방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다른 남자친구를 둔 적이 있어.”
“하지만, 사랑에 빠졌다고 느낀 적은 없잖아. 그런 경험이 한 번도 없이 어떻게 내가 ‘진정한 짝’이라는 걸 알 수 있지?”
도온은 차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냐면, 알기 때문에, 난 어린애가 아냐. 난 내가 아는 걸 알고 내가 아는 것에 대해 확신하고 있어. 난 일곱 살 때부터 너와 결혼하는 걸 꿈꿔왔다구, 벤.”
“알았어, 알았어.” 나는 오른손을 들고 왼손으로는 도온의 등을 쓰다듬었다. “난 절대로 네가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게 하지는 않겠어. 내 말은, 애초에 네가 열린 관계를 해보자고 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거야. 단지 네가 욕구불만인 상태에서 라이언을 보면 몸이 달아오른다고 하면 나로선 괜찮아. 하지만...” 나는 다음에 할 말이 내 인생을 영원히 바꿔놓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그것 이상의 뭔가가 있다면... 어쩌면... 어쩌면, 우리가 잠시 헤어지는 게 최선일지도 몰라.”
도온은 나한테서 벌떡 몸을 일으키고 충격을 받은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도온, 난 널 사랑해. 난 영원히 널 사랑할 거야.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건, 혹은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건 간에 말이야. 우리는 전에도 11개월 동안 떨어져 있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늘 캠프에서 다시 합칠 수 있었어. 마치 떨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이건 경우가 달라.”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해봐. 이게 진정한 운명이라면, 우리가 함께하기로 되어 있는 게, 그렇다면, 결국에 우린 서로 찾을 수 있을 거야.”
도온은 시선을 돌리고 입술을 깨물며 다시금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너도 궁금하지, 그렇지?” 나는 부드럽게 물었다. “넌 라이언을 좋아하고 그 애의 여자친구가 되는 게 어떨는지 궁금해하고 있어.”
도온을 꼭 눈을 감고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찢어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해.”
나는 도온의 어깨를 붙잡아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한숨이 나왔다. “도온, 난 네가 행복하길 바래. 난 진심으로 네가 다음 일곱 달 동안 지난 넉 달 동안 그랬던 것처럼 불행해 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넌 외로웠어. 넌 욕구에 목말라했어. 그리고 난 그런 너하고 있어줄 수 없어. 널 위해 있어줄 수 없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 내 속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아. 그리고 넌 열린 관계를 한다고 하더라도 갈피를 못 잡고 헤맬 수 있어. 넌 나한테 묶여 있는 이상은 자유로워질 수 없을 거야.”
도온은 덜컥이며 몸을 떨어댔다. 그래서 나는 재빨리 도온을 꼭 껴안아 주었다. “사랑해, 도온. 영원히 널 사랑할 거야. 무엇도 그걸 바꿀 수 없어.”
도온은 내 말에 말로는 즉시 대꾸해주지 않았다. 단지 울고 떨어대며 또 울었을 뿐이다. 도온은 두세 차례 나한테서 몸을 떼어내고 크게 숨을 들이켜고 다시 내 품에 안겨왔다. 그러다가 지쳐서는 내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를 한 게 아닌지 수없이 되새기며 도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어느새 나도 잠에 굴복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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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도리를 간질이는 느낌에 잠에서 깨고 보니 사방이 어둡고 조용했다. 간지러운 느낌은 내 자지를 감싸 쥔 따듯한 손길로 변했고 내 자지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눈을 뜨지 않고 도온의 손길을 음미하기만 했다. 나는 도온이 부드럽게 헐떡이는 소리를 들으며 따듯한 숨결을 가슴으로 느꼈다. 몇 시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고 이 순간만을 생각하며 내 몸에 불을 댕기는 감각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내 자지의 쾌락은 높아져만 갔다. 그러나 절정이 아니라 안도와 만족을 향해.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이르렀을 때 내 몸이 살아나는 걸 실감하며 온몸의 줄기에서 쾌락의 불이 퍼져 나가는 걸 느꼈다.
그 순간 도온이 나를 올라탔다. 나는 팬티의 앞 트임 사이로 솟아 있던 자지 끝에서 면의 감촉이 느꼈다. 그러나 도온은 단지 팬티의 천을 옆으로 젖혀 내고 촉촉한 따듯함으로 내 자지를 감싸왔다. 그리고 나는 꾸준히 나의 진정한 사랑의 몸에 자지를 묻어갔다.
우리가 완전히 발동이 걸렸을 때, 도온의 입이 나의 입을 찾아냈고 나는 그대로 눈을 감은 채 꿈같은 열정으로 도온의 키스에 화답했다. 도온이 침대에 들기 전 입었던 면 티를 목 위로 벗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도온은 가볍게 몸을 굴러대며 바짝 선 젖꼭지를 내 가슴에 비벼댔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사랑을 나눴는지 알 수 없었다. 한 시간이 넘었을 수도 있었고 5분이 안 됐을 수도 있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도온과 함께하는 시간은 영원까지 늘어났다. 그리고 내 자지를 감싼 보지가 점점 흥건해지면서 도온의 입에서 흘러나온 쾌락의 흐느낌이 좀 더 크고 우렁찬 소리로 변해갔다. 나는 신음을 하고 평생의 사랑을 내 연인의 몸속 깊이 배설했다.
도온은 우리의 오르가즘이 잠잠해지고 나서도 오랫동안 내 입술에 신음했다. 도온은 숨을 돌릴 때까지 내 입술을 떠나지 않았다. 도온의 콧구멍을 거치며 나는 꾸준한 숨소리는 마치 해변을 때리는 대양의 파도소리처럼 나를 달래주었다. 그리고 도온은 모든 게 가라앉은 후에야 내 몸 위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도온은 내 뺨에 부드럽게 키스하며 아련하게 훌쩍였다. “사랑해.” 그 순간 나는 내 뺨에 떨어지는 도온의 첫 눈물을 느꼈다.
나는 농후한 오르가즘과 꿈같은 상태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해 단지 도온의 등을 토닥여주기만 했다. 그 순간 도온은 아직 내 자지를 자기의 몸속에 꽂아둔 채 내 목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우리는 평온한 단잠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토요일 아침에 평소처럼 미소와 키스를 주고받으며 잠에서 깼다. 디제이는 나를 유혹하듯 장난을 걸어왔고 아침은 도온의 부모님과 함께 먹었다. 잠시나마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어제는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나와, 내 여자친구, 정겨운 가족뿐이었다. 심지어 간밤에 나누었던 사랑도 희미한 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점심을 먹고 나자, 도온은 스탠퍼드 축구 시합을 보러 라이언의 집에서 친구들과 모이기로 했다며 예전부터 잡혀 있던 약속임을 알려주었다. 라이언은 베이 에어리어의 북부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카디널의 열성팬이었고 도온은 태생이 버클리의 빠순이었다. 그래서 도온과 라이언이 데이트가 아닌 데이트를 하며 가까워질 때, 베이 에어리어의 라이벌의식은 둘의 관계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고 한다. (주-캘리포니아의 명문 주립 버클리대와 명문 사립 스탠퍼드 사이의 라이벌의식, 당연히 학비는 스탠퍼드가 훨씬 비쌈. 도온과 벤의 부모님은 버클리 졸업생)
라이언을 언급하는 도온의 이야기는 어젯밤에 벌어졌던 일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했다. 나는 외출할 준비를 하러 방으로 올라갈 때 도온의 팔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아직도 내가 네 남자친구야?”
도온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심호흡을 하며 망연자실한 얼굴로 나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벤, 당연하지.”
나는 도온의 눈을 들여다보고 살짝 다른 질문을 했다. “월요일이 되어서도 내가 너의 남자친구일까?”
도온은 그 물음에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도온은 눈길을 깔고 내 가슴을 바라보다가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러길 바래?”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라고 말만 하면 도온도 ‘그래’라고 말할 나름의 이유를 생각해낼 거라는 걸. 도온은 그런 작은 말 한마디로 다시 예전의 비참한 고통 속으로 자기를 몰아넣을 것이다. 도온은 남자들의 이목을 끄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리고 그런 남자들은 도온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나는 도온이 걱정됐다. 내가 도온을 돌봐주지 못하는 이상 라이언 같은 남자애를 곁에 둘 수 없다면 결국 자기의 욕망에 굴복하고 뭔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왠지 나는 라이언이 미더웠다. 라이언이라면 안심하고 도온을 맡겨둘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대답했다. “난 네가 행복하길 바래. 네가 나만 바라보느라 불행해 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 일로 우리가 변하게 되면?” 도온은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난 널 영원히 사랑할 거야. 우리가 다시 함께하리라는 걸 믿어?” 나는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기를 썼다.
“믿어!” 도온은 나한테 몸을 던졌다.
나는 도온을 안아주고 등을 쓸어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지? “그럼, 행복해야 해. 내가 보이지 않으면 내 생각이 많이 나지는 않을 거야. 그러면 라이언이 해주는 모든 걸 그대로 받아들이면 돼.”
도온은 한숨을 쉬고 나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는 나를 놓아주고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나는 마치 몸에서 도온의 사랑이 빠져나가 늘 도온이 차지하고 있던 곳에 작은 구멍만이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는 또 물어봐야 하는지 망설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내 안으로 느껴지는 공허함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물어봐야 했다.
“월요일이 되어서도 내가 너의 남자친구일까?”
천천히 고개를 젓는 도온을 보며 가슴을 옥죄는 스산함을 느꼈다. 그 순간 도온은 갑자기 고개를 젓다 말고 입술을 깨물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모르겠어, 라이언이 결정해야 할 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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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이! 왔구나!” 트리샤가 반색하며 도온을 포옹했다. 예쁜 브루넷은 단짝친구를 흔들어버릴 만큼 범상치 않은 포옹을 해왔다. 그러나 도온은 괘념치 않고 친구의 스킨십을 기꺼이 즐겼다.
트리샤는 도온을 놓아 주고 나한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헤이, 벤.” 이도 저도 아닌 다소 밋밋한 목소리였다.
나는 트리샤한테 ‘헬로’하며 답례를 하고 스테판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고 나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나의 도온을 잘 모르는 남자애의 손에 넘길 걸 고려해 봤을 때, 아무래도 라이언의 성격이나 주변 상황을 파악해두어야겠단 생각이었다. 예를 들어, 라이언이 삐까번쩍한 S급 벤츠를 몰고 다니며 비싼 명품 옷을 입고 으리으리한 저택 같은 집에 산다면 조금은 더 걱정이 들었을 것이다. 나보다 잘 나간다거나 혹은 사생활이 난잡하다거나 혹은 이도 저도 아니더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 같다. 반대로 라이언이 벽에 총알 구멍이 나있는 험악한 빈민가 같은 장소에 산다면 당장 도온한테 짐을 싸라고 하고는 오렌지 카운티로 데리고 갔을 것이다.
보아하니 라이언은 딱 그 중간인 것 같았다. 나는 라이언이 중고 스바루를 몰고 다니고 현재 전문대 2학년인 걸 알고 있었다. 라이언의 집은 세 개의 침실이 갖추진 단층으로 된 규격형 주택(tract house)이었다. 이웃도 얼핏 본 바로는 비록 상류주택가는 아니더라도 제법 괜찮은 편인 것 같았다. 인테리어도 지나치게 깔끔하거나 사치스럽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라이언은 나와 도온이 들어서는 걸 보고는 조금은 걱정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키 크고 덩치가 산만한 젊은이한테는 걱정이라는 말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단지 평소보다 작아 보인다고나 할까. 그러나 나는 라이언의 그런 태도를 두려움 때문이기보다는 존중의 표시로 생각했다. 도온은 라이언을 보고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건너가 말을 걸려고 했지만 서먹서먹하게 구는 라이언의 태도를 보건대 우리가 나타난 게 무척 의외였던 것 같다.
나는, 가만히 서 있기도 뭐해서 적당히 앉을 곳을 찾아 주의를 둘러보았다. 다들 응원하는 팀이 확실히 나뉘어 있었다. 라이언, 스테판, 트리샤는 붉은 카디널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스테판과 트리샤는 심지어 스탠퍼드 축구부의 져지도 입고 있었다. 특히 트리샤는 져지의 하단을 묶어 배꼽을 내보이고 있었다. 도온과 그웬은 감청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웬은 골든 베어 져지를 입지 않고 허리에 둘러 묶어두고 있었다. 로빈은 녹색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그저 친구들과 어울릴 양으로 놀러 온 게 뻔해 보였다. 낸시와 트래비스는 따로 할 일이 있다며 오지 않았다고 한다.
스테판은 도온의 감청색 셔츠를 가리키고 트집을 잡았다. “뭐? 져지는 쪽팔려서 더는 못 입겠단 거야, 도온? 저번주에 스탠퍼드한테 개박살이 나서?”
“뭐가 개박살이야? 35대28이었는데.”
“아무튼, 요새 걔들 전적이 어떻게 되나? 한 0승10패쯤 되나?”
“헤이, 어제는 버클리가 이겼다구,” 그웬이 핏대를 세웠다. “룻거대랑 붙어서.”
“으이그. 룻거대 자식들.” 스테판이 빈정댔다. “그럼 이제 1승10패네, 아이구야, 라이언, 나 좀 거들어 주라.”
라이언은 묵묵히만 있다가 도온을 힐끔 쳐다보고는 불끈 주먹을 쥐고 일어서서 부엌으로 향했다.
“헤이, 라이? 어디가? 게임이 막 시작하려는 참인데!”
라이언은 스테판을 무시하고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복도로 사라졌다. 도온은 눈으로 라이언의 뒷모습을 쫓으며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라이언을 쫓는 도온의 눈길을 쭉 지켜보았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도온이 라이언한테 감정을 키워왔던 게 분명해 보였다. 도온을 탓할 수는 없었다. 라이언은 내가 있어줄 수 없는 곳에 있어주었다. 라이언은 도온이 친구들과 어울릴 때나 파티 같은 곳에 갈 때 든든한 동행이 되어 주었다. 라이언은 내가 전화하는 걸 귀찮아하고 있을 때 나 대신 도온의 넋두리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라이언은 호르몬이 발동한 도온을 키스와 애무로 달래주었다. 내 경우에는 여자애하고 딱 한 번만 자고 나도 감정이 생기는 마당에 넉 달 동안이나 그런 극진한 보살핌을 받은 도온이 무슨 수로 라이언을 떨쳐낼 수 있었겠는가?
도온은 행복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마실 것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향했다.
라이언은 따지 않은 맥주를 앞에 놓고 등을 웅크린 채 고개를 내리뜨려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뭐라도 손에 잡히며 아작을 내겠다는 듯 잔뜩 힘이 들어간 팔뚝이 보였다.
“헤이,” 내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외치자, 라이언이 화들짝 놀라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워, 워.” 나는 두 손을 들었다. “미안, 놀래려고 한 게 아닌데.”
“괜찮아,” 내 눈길을 외면하는 라이언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카운터로 다가가 엉덩이를 기대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쟤를 사랑해?”
라이언은 내 입에 나온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하고 그 크리스털처럼 푸른 눈으로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차갑다기보다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그래, 사랑해.”
“알았어.” 나는 카운터에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난 내일 집으로 돌아갈 때 도온하고 헤어질 거야. 쟨 이제 자유로운 여자가 될거구.”
나는 그렇게 고속으로 바닥을 치는 아래턱을 구경해본 적 없었다. “뭐라구?” 라이언의 눈깔이 튀어나왔다.
“난 도온을 위해 여기에 있어줄 수 없어. 도온은 나 없이는 외롭고 행복해하지 않아.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한테 충실하려고 했어. 우리는 서로 사랑해. 우린 늘 그래 왔어. 도온이 우리의 전력을 이야기해 준 적이 있을 거야. 우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함께해온 것을.”
라이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쟬 너무나 사랑해서 놔주는 거야. 쟨 널 좋아해, 라이언. 진짜, 진짜, 널 좋아해. 나만 아니라면 너흰 진작에 커플이 되었을 거야.” 나는 할로윈 때 벌어진 일이 떠올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다면 몇 가지 일은 생기지도 않았을 텐데.” 마음이 씁쓸했다. 진작에 라이언 같은 애가 도온을 돌봐줬더라면 마크는 도온한테 손을 대지 못했을 것이다.
라이언은 자세를 가다듬었다. “내가 가버렸을 때, 도온을 돌봐주었으면 해. 도온을 위해 있어주고 도온을 보호해줬으면 해.” 나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도온이 할로윈 때 생긴 일을 얘기해줬어? 너랑 있은 다음에 생긴 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