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에이드리안
2001년 11월 4학년
핸드폰으로 바뀐 일상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맞아, 힘들이지 않고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건 멋진 일이야. 하지만, 너무나 쉬워진 통신수단으로 묘한 일도 생기는 것 같아. 예를 들자면, 지난번 학교를 빼먹었을 때에는 안부를 묻는 유선전화가 딱 한 번만 왔었다. 그 전화는 당시 내 여자친구였던 메간한테서 온 것이었는데 나는 아파서 학교를 빼먹었다고 말해주었고 메간은 귀엽게 모성애적인 면을 보이며 방과 후 들려 보살펴주겠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그러나 도온한테 정신이 팔려 있던 이번 주에는 무려 열일곱 통이나 되는 음성 메일이 쌓여 있었다.
메간, 캐시디, 에이드리안은 목요일에 메시지를 남겨 놓았고 금요일에는 린과 에이드리안의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웃어넘길 일은 남자애들은 다들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뭐, 케니 정도가 토요일에 전화를 걸어 농구를 하러 올지 물어보기는 했지만, 학교를 결석한 것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나중에야 쾌차를 바란다며 다니엘이 메시지를 남기 걸 봤을 때, 다들 내가 아픈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게 처음의 일곱 개였고 에이드리안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다며 린한테서 온 메시지가 두 개 그리고 나머지 여덟 통은 대부분 자기한테 꼭 답신을 해달라고 하는 눈물 어린 호소가 담긴 에이드리안의 메시지였다. 게다가 엄마가 말하길, 에이드리안은 직접 우리집을 방문하는 게 무서웠던지 열두 번이 넘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나는 집으로 돌아온 일요일에 에이드리안이 보낸 메시지를 모두 들어보고는 자기를 박아달라며 애원을 하던 에이드리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에이드리안을 내팽개쳐 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도대체 에이드리안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
“도대체 요 며칠 간 어디에 있었던 거야?” 메간은 엉덩이를 부딪쳐오며 심문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팠어.”
메간은 얼굴을 찌푸리며 내 팔을 붙잡아 걸음을 멈춰 세웠다. “벤, 뻔한 거짓말은 하지도 마. 너희 집에 전화하니깐 너 동네에 없다고 네 엄마가 다 말해줬어.”
나는 눈을 굴렸다. “사적인 일이야, 알겠어?”
메간은 눈썹을 세우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별일 없는 거지?”
“그래, 그래. 지금은 다 괜찮아. 단지 사적인... 일이야.”
“알았어, 알았어.” 메간은 두 손을 들어 보이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는 팔짱을 끼고 다소 근심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번에는 내가 물어볼 차례였다. “별일 없는 거지?”
“그래, 그래.” 메간은 우물쭈물 둘러대다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내 팔을 붙잡고 으슥한 이끌었다. “어, 말할 게 있어. 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큰소리로 말할 필요가 없도록 메간한테 바짝 다가섰다.
메간도 근심 어린 얼굴로 바짝 다가섰다. “제임스하고 난 드디어 그 짓을 했어.”
나는 뭔 말인가 싶어 눈을 깜박이다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오, 아, 그래. 근데 굳이 그 얘길 해주는 이유가?”
메간은 얼굴을 붉히고 걱정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글쎄... 난, 어, 왠지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내 말은, 나도 우리가 더는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아니란 걸 알아. 하지만, 너한테 직접 얘기해주고 싶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아무튼, 나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하지만, 너와 케이토의 친구로서 축하해줄게.”
메간은 더욱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나는 슬쩍 궁금증이 일어 엉큼한 미소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축하할 일이 맞지? 혹은 위로를 해줘야 하나? 케이토가 별로였던 건 아니겠지?” 나는 두 손으로 박는 모양을 흉내 냈다.
“벤!” 메간은 내 가슴팍을 때렸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 비교하고 말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난 너하고만 자봤다구. 하지만... 케이토는 첫경험이었으니만큼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은 것도 사실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간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열심히 배우려고 노력하는 게 보여.”
나는 최고로 따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메간의 어께에 손을 얹었다. “메간, 진심으로 축하해줄게.”
메간은 마음이 놓인 듯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
그날 두 번째로 만난 여자애는 그리 달가워하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나는 미적분을 듣기 전에 린 애리언과 부딪혔는데, 아담한 브루넷은 나를 일견하더니 내 손을 잡아채고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갔다.
“벤, 대체 어딜 갔었던 거야?” 무척 정색을 하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뭐?”
“목요일, 금요일 이틀이나 학교를 빼먹은데다가 주말 내내 전화도 받지 않았잖아!”
“어, 아파서?” 내 귀에도 궁색하게 들렸다.
린은 눈을 굴리며 짜증을 냈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한숨이 나왔다. “린, 대수로울 것도 없잖아. 내가 까먹고 지키지 못한 약속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아니.” 귀여운 동급생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나 학교하고는 상관없고 에이드리안 때문에.”
나는 눈썹을 찌푸리고 몸을 똑바로 세웠다. 수요일 밤에 벌어졌던 일, 그리고 그 후 사흘 동안 집 전화를 포함해 22통이나 전화를 해온 것 등을 고려해볼 때, 진작에 에이드리안의 상태가 염려스러웠는데, 린의 말을 듣고는 한층 더 걱정이 가중됐다. 게다가 린의 어조 또한 심상치 않아서 에이드리안이 뭔가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일었다. “린, 무슨 일이 생겼어?” 나는 황급히 물어보았다.
“난 네가 말해주길 바랐는데? 에이드리안이 수요일마다 너희 집을 방문하는 건 알고 있었어. 걔는 그 시간이 제일 기다려진다고 했고. 그런데 지난주 목요일하고 금요일에는 학교에서 생기를 잃고 죽어지내지 뭐야. 게다가 치어리더 연습도 빼먹었어! 치어리더 연습을 빼먹었다구!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말이야. 캡틴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 그리고 주말에는 그 크고 텅 빈 집에 틀어박혀서는 나오려고 하질 않는 거야. 또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서 나랑 헤더가 집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렸는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지 뭐야.”
린은 질색한 표정이었지만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그래서, 오늘 아침에 에이드리안이 등교한 걸 보고는 헤더와 내가 구석으로 끌고 가서 심문했어. 아빠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혹은 남자친구랑 문제가 있는지 말이야. 우린 에이드리안이 학교와 관계된 일로 곤경에 처했거나, 술이나 약물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물어보기도 했어. 에이드리안은 퉁명스레 ‘아니’라는 대답으로 일관하다가 헤더가 너에 대해 물어보고 나서야 다르게 반응을 했어. 특히, 한동안 입을 꼭 다물고 정신이 나간듯한 모습이 되었는데 우리가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꼼짝도 하지 않지 뭐야. 하지만, 몇 분 후에 길게 숨을 들이켜더니 ‘괜찮아, 이젠 다 끝난 일이야.’라는 말을 하고는 자리를 뜨더라구.”
린은 내 손을 잡았다. “벤, 무슨 일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너 정말 거짓말이 형편없구나.” 린은 얼굴을 찌푸렸다. “수요일에 둘 사이 뭔 일이 있었던 거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둘 사이의 일일 뿐이야.”
“암튼, 넌 수수방관할 입장이 아냐.” 린은 불길이 치솟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넌 에이드리안을 망가트렸어, 벤. 그러니 고치는 것도 네 책임이야. 치어리더들은 캡틴이 필요하고 난 친구를 되찾고 싶어.”
나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방법을 찾아볼게.”
--------------------------------------------------------------------------------
린은 내가 미덥지 못했던지 수업이 끝나자마자 내 손을 꼭 잡아끌고 에이드리안을 찾아 나섰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여유가 있었는데 학내를 가로질러 식당에 도착해보니 늘 앉던 테이블로 다가서는 에이드리안이 보였다.
에이드리안은 내 모습을 보고는 우뚝 발걸음을 멈추고 빳빳이 굳어졌다. 그리고 뒤따르던 한 남자애는 미처 멈추지 못하고 에이드리안의 등에 부딪혔다. 장담하건대 그 남자애는 에이드리안의 엉덩이를 골똘히 바라보느라 걸음을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에이드리안은 걱정스레 입술을 깨물고 린과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려주었다. 그러나 막상 다가선 다음에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기에 린이 참다못해 에이드리안의 손을 잡아당겨 내 손에 쥐여주고는 후다닥 자리를 떴다.
우리는 자리를 비켜주는 친구들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다가 나와 손을 맞잡은 걸 깨달은 에이드리안이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떨쳐내고는 눈길을 깔고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오, 미안, 미안. 이럴 의도는 없었어.”
전에는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평소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학내를 유유자적하던 베이브는 군림하는 여왕벌이기보다는 겁먹은 신입생처럼 보였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고 나서 다시 에이드리안을 쳐다봤다. “어, 손을 잡는다고 곤란해질 것까지야.”
“아니, 아니...” 에이드리안의 창백한 피부는 장미꽃 같은 분홍색으로 달아올랐다. “난 단지...” 에이드리안은 입술을 깨물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봐봐, 할로윈 밤에 대해서는, 벤. 진짜 미안해. 내가 정신이 나갔던 것 같아. 모든 게 뒤죽박죽-”
“그만, 그만.” 나는 손을 들어 달래려 했지만, 에이드리안은 계속 주절대며 사과를 했다. 그리고 내가 손을 잡아주자 주절거리는 목소리가 훌쩍이는 목소리로 변했다. 나는 에이드리안의 예쁜 얼굴을 쳐다보고 곧 울음을 터트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에이드리안을 끌어당겨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게 했다. 그 순간 수문이 열리고 마른 훌쩍임이 꺼억꺼억 하는 대성통곡으로 변해 닭똥 같은 눈물이 내 셔츠로 떨어졌다. 에이드리안은 내 등에 손을 두르고 손톱이 파고들만큼 힘껏 매달렸다. 나를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거라고 해도 수긍이 갈만한 절실함이 느껴졌다.
“미안해!” 에이드리안은 목놓아 울어댔다. “미안해!”
“쉬... 괜찮아, 괜찮아.” 나는 에이드리안의 등을 토닥여주며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우리는 이때쯤 상당한 이목을 끌고 있었는데 몇몇 여자애들은 에이드리안을 울린 게 내 탓인 양 비난하는 투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실제로 여자애들의 태도가 터무니없다고는 할 수는 없었다. 수요일 밤에 에이드리안을 내동댕이치고 떠나온 것, 그리고 이번에는 단순히 내 모습에 반응하는 정도를 봤을 때, 에이드리안의 현재 마음 상태는 다분히 나한테 책임이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근처에 문이 열려 있는 교실로 떨어대는 치어리더를 유도했고, 에이드리안도 순순히 빈 교실로 따라 들어왔다. 뒤에서 교실 문을 닫자 외부의 소음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나는 프라이버시가 확보되자 긴장을 풀고 에이드리안을 달래는 데에 집중했다. 에이드리안은 서서히 진정을 하고는 내 어깨에서 얼굴을 들었지만 아직은 내 등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눈물로 얼룩진 눈으로 나를 골똘히 바라보더니 떨리는 입술을 내 입술에 겨냥하고 천천히 다가왔다.
“워, 워, 에이드리안.” 나는 뒤로 고개를 젖혔다. 아직도 할로윈 밤의 농밀한 감정이 남아있는 게 분명히 해보였지만, 마냥 들어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도온은 전적으로 내 판단에 맡기겠다고 말해주었지만, 아직은 이성이 눈곱만큼 아랫도리를 앞서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내 태도에 실망한 눈치였지만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고 다시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끝내 울음을 참고 천천히 뒤로 고개를 젖혔다. 아직은 내 등에서 손을 풀지 않았지만, 얼굴끼리 다소 거리가 생겼기 때문에 다시 키스를 해온다고 해도 그리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미안해, 벤.”
“괜찮아.”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주었다.
“키스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어.”
“괜찮아.”
“수요일에 널 유혹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어.”
“그 일은... 뭐, 중간에 그쳤으니깐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에이드리안은 손을 올려 내 어깨를 잡고 내 입을 골똘히 응시했다. 키스를 하려고 한다기보다는 내 말을 기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여자친구한테 얘기했어? 블로우잡을 해준 거랑 박으려고 했던 일을?”
“그래.”
에이드리안은 날카롭게 숨을 들이켜고 전보다 훨씬 기운 없는 목소리로 나직이 물어왔다. “큰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아니.”
에이드리안은 수차례 눈을 깜박이다가 다시 내 눈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조금은 기운을 차린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럼... 나 때문에 여자친구랑 헤어지거나 한 건 아니지?”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에이드리안은 몇 번 더 눈을 깜박이다가 있지도 않은 걸 찾겠다는 듯이 내 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놀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화난 게 아냐?”
“화?” 나는 눈썹을 오므렸다. “아니, 왜?”
에이드리안은 갈라진, 목멘 목소리로 훌쩍였다. “왜냐면, 내가 못된년이라서. 난 늘 못된년이었어. 난 원하는 게 보이면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무조건 손에 넣어야만 했어.” 에이드리안은 길게 숨을 내쉬고는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부의 분노로 떨어대기 시작했다. “난 메간과 캐시디한테서 널 강탈했어. 널 끔찍이 사랑하는 여자애들한테서 말이야. 벤. 그게 처음도 아니었어. 왜 도나 킨케이드가 날 그토록 증오하는지 알아? 2학년 때 걔 남자친구를 빼앗은 적이 있기 때문이야. 왜냐면, 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깐. 왜냐면, 내 스스로 어느 여자애라도 남자친구를 빼앗을 수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왜냐면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해서.”
입술을 꼭 깨문 모습이 다시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난 그런 짓을 또다시 저지를 뻔했어. 난 너무 외로웠어, 벤. 난 남자애들을 수시로 갈아치웠지만, 그 애들 중에서는 믿을만한 남자애가 한 명도 없었어. 모든 게 못마땅했고 속으론 공허함만 가득했어. 유일하게 행복을 느꼈던 건 너희 집에 놀러 가서 쌍둥이들하고 브룩과 놀아줄 때뿐이었어.” 에이드리안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혹은 소파에 앉아서 너랑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나.”
에이드리안은 내 어깨를 꼭 붙들어 잡았고 나는 단지 침묵만 지켰다. 에이드리안은 내가 도온한테 가있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해둔 게 분명해 보였고 지금은 그러한 생각을 봇물처럼 터트리고 있었다. “난 엉망진창이야, 벤. 그리고 난 궁금해졌어. 내가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말이야. 가끔 웃고 떠드는 것이나 수요일 밤을 이야기하는 게 아냐. 내 인생에서 진정으로 행복했던 때를 말하는 거야.”
에이드리안은 눈을 한두 번 깜박이다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건 너랑 함께했을 때였어. 벤. 봄방학이 직후부터 무도회까지 말이야. 난 너랑 함께했을 때가 가장 행복했어. 그런데 너랑 헤어지고 나서는 늘 외롭기만 했어. 아빠는 늘 일만 하고 집에는 돌아오지도 않으셔. 한 때 가족이 머물던 집은 이제 텅 빈 껍데기만 남았어.”
에이드리안한테 울컥 동정심이 치밀어올랐다. 단지 가족의 따듯함을 느껴보려고 수요일마다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부지런히 우리집에 놀러 온 것도 다 이해가 갔다.
“난 3년 동안 상급생들과 어울렸어. 내 친구들은 거의 다 졸업을 했어. 맞아, 아직 치어리더팀하고는 원만한 관계야. 하지만, 그 애들은 날 우상시하고 우러러보기만 해. 그 애들은 나한테 스스럼없이 말을 걸지도 못해. 우린 친한 친구 같은 게 아냐. 캔디는 여기에서 대학을 다녀서 같이 어울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대학일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느라 영 시간을 내지 못해. 난 때때로 린과 헤더하고 어울려 다니지만, 예전하고는 똑같지 않아.”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내쉬고 내 어깨에 이마를 짚었다. 이번에는 축축하지 않은 반대편 어깨였다. “게다가 남자애들은 어떻고! 다들 흑심만 품었지, 예전하고는 다르게 누구 하나도 미덥지가 않아. 넌 날 망쳐놨어, 벤. 난 너 때문에 사려 깊고 신사다운, 줏대를 지키면서도 조심스럽게 대우해 주는 그런 남자친구한테 익숙해졌어. 손가락만으로 날 오르가즘 덩어리로 만들어주곤 했던 걸 보태지 않으면 거짓이겠지. 하지만, 다른 남자애들도 그건 할 줄 알아. 하지만, 너하고는 방법이 다르더라구. 그래서 지금 난 섹스가 절실하지만, 날 올라타게 해줄 만큼 믿을만한 남자애를 한 명도 찾을 수가 없어. 설령 날 올라타게 해줘도 제대로 할 줄 알지 분명하지도 않고.”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에이드리안의 등만 천천히 쓰다듬어주기만 했다.
“난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남자친구도 없어. 내 인생이 어쩌다 이 꼴이 된 거지? 올해는 고등학교 졸업반이라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해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야, 아빠는 집에 돌아오지 않고 아빠가 되기를 포기해버렸어. 지난 7년 동안 그토록 애를 썼는데도 말이야. 옛날 친구들하고도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네 가족이 아니었다면,- 브랜디, 브룩, 쌍둥이, 부모님-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도 몰라. 그리고 난 네가 그리워, 벤. 우리가 사귀었을 때가 그리워.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기를 얼마나 빌었는지 몰라. 네가 옳았어. 난 너를 등한시했고 뻔질나게 딴 남자애들한테 꼬리를 쳤어. 그리고 수술 건도 하나도 알려주지 않고 널 무시했어. 캐시디하고 있었던 일은 이해했고 도나하고 있었던 일도 용서할 수 있는 일이었어. 우린 깨지지 말았어야 했어. 네가 널 죽도록 그리워하는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어. 넌 이미 임자가 있었어.”
에이드리안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에이드리안은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감정과 느낌을 폭포처럼 쏟아냈다. 나는 아직도 에이드리안의 말을 이해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은 침묵을 마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날 밤 자제력을 잃었어, 벤. 난 네 팔에 안기고 무너져버렸어. 너무너무 좋았어. 우리가 사랑하고 있을 때의 느낌을 기억났고 우리가 함께했을 때의 감정이 기억났어. 난 널 되찾아야만 했어. 난 늘 하던 대로 했어. 난 널 유혹하기로 작정했는데 네가 저항하는 걸 느끼고는 덥석 네 자지를 물고 일생일대의 블로우잡을 해주었던 거야. 난 네가 날 박아주기를 바랐어, 벤. 난 오랫동안 섹스를 해보지 못했어... 그래서 난 네가 절실히 필요했어. 벤.”
“미안.” 간만에 말을 해서 목멘 소리가 나왔다. “미안해, 원한 걸 해주지 못해서.”
“아니, 아니. 그 뜻이 아냐.” 내 눈을 농밀하게 응시하는 에이드리안의 헤이즐 눈동자에는 활활 화염이 일었다. “날 버려두고 간 건 옳은 일이었어. 당시에는 너무너무 싫었지만, 옳은 일이었어. 봄방학 때 네가 일리스를 뿌리친 것과 똑같이 옳은 일이었어. 난 일리스가 되어 널 유혹하려고 했어. 그러나 넌 네 여자친구를 배신하지 않았어.”
나는 눈썹을 들어 올리고 에이드리안의 비유를 이해하려 애를 썼다.
“모르겠니, 벤? 네가 날 뿌리치지 않았다면 우리가 데이트를 한 이후로도 조금도 성숙하지 못한 걸 증명하는 일이 되었을 거야. 그러나 넌 실제로 네 여자친구한테 충실했고 그래서 난...” 에이드리안은 한숨을 쉬었다. “널 더욱 믿을 수 있게 되었어, 벤. 내 삶에서는 무척 드문 일이야. 어쩌면 넌 이 세상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남자일지도 몰라.”
나는 몇 번 눈을 깜박이다 눈썹을 찌푸리고 걱정스레 대답했다. “어, 고마워.”
그 순간 에이드리안은 한마디 경고도 없이 나를 뒤에 벽으로 밀리게 할 만큼 맹렬한 기세로 내 품에 뛰어들었다. “난 널 잃을까 봐 너무너무 무서웠어! 너와 네 가족을 잃을까 봐! 난 어쩔 줄 몰랐어! 제길! 난 심지어 자살도 생각했어!”
나는 에이드리안을 꼭 안아주었다. 안될 말씀이고 말고. “잠깐, 뭐라구?”
에이드리안은 훌쩍이며 내 어깨에 새로 눈물을 떨궜다. “알아, 알아. 멍청하고 멜로드라마 같단 걸. 하지만, 난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어. 내 삶은 엉망진창이야, 벤.” 에이드리안은 내 뺨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너한테서 희망을 얻었어.”
나는 입을 다물고 에이드리안을 꼭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나처럼 감정적으로 발육이 덜 된 열일곱 살 소년한테는 다소 벅찬 상황이었다. 에이드리안이 겪어온 심리적인 분규를 이해했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에이드리안이 없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는 것을. 에이드리안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덜컥 겁이 났다. 단지 죽음 때문만이 아니라 에이드리안이 그 당사자일 수도 있었다는 것 때문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이 있듯이, 더는 에이드리안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 심장이 벌름거리고 식은땀이 솟아났다.
도온 말이 맞았다. 나는 아직도 에이드리안을 아끼고 있었다. 게다가 보통의 친구 이상으로. 그리고 이번에는 금빛으로 일렁이는 에이드리안의 촉촉한 눈을 내려다보고 예전처럼 키스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혔다. 그리 나쁘다고는 할 수 없을 거야. 그치? 도온도 허락한 일이고.
그러나 도온의 허락이 있었다고 해도 나와 에이드리안한테는 옳지 않은 일일 것이다. 지금은 옳지 않았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옳지 않을 수도 있고. 에이드리안은 나한테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한 남자를 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에이드리안의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를 해주었다. 에이드리안은 기쁨이 역력한 한숨을 내쉬며 더욱 힘껏 나를 끌어안았다.
“난 널 사랑해, 벤.”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행복한 콧노래였다.
나는 도온이 떠올라서 팔이 굳어졌다. 나는 도온을 사랑했다. 절대적인 확신으로. 그리고 지금은 일방적인 사랑 고백으로 생겨난 어색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제길. 어떻게 대꾸해야 하지? “에이드리안...”
“아니, 아니.” 에이드리안은 타오르는 눈으로 내 말을 황급히 가로막았다. “네 여자친구를 사랑하는 걸 알아. 그걸 바꾸려고 하지는 않을 거야. 단지 제발, 네 삶에서 날 쫓아내지는 말아 줘. 난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되어줄게. 단지 친구가 되어주길 바라면 친구가 되어줄게. 그래도 괜찮아.” 에이드리안은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기막힌 입장 전복이었다. 반년 전의 에이드리안은 남자애들 위에서 군림하던 여신 중의 여신이었다. 나는 그런 지위나 명성에 흔들리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가장 예쁜 여자인 걸 알고 있었으니만큼 한층 더 박아주고 싶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똑같은 여신이 내 팔에 매달려 간절히 애원하고 있었다. 절대로 권력을 양도하지 않고 늘 카리스마 넘치는 그런 여자애가 나한테 매달려 자기를 낮춰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나는 놀란 심정으로 눈만 깜박였다. 그렇다고 해서 에이드리안에 대한 생각이 바뀐 건 아니었다. 에이드리안은 내가 절실히 필요했다. 매정하게 뿌리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최고로 든든한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당연히 우린 친구야, 에이드리안.”
에이드리안은 또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내 목 뒤에 손을 두르고 기쁨에 겨운 눈물을 흘리면서. 그 순간 내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에이드리안은 킥킥대며 내 배를 내려다보았다. “오, 미안. 나 때문에 점심도 거르고.”
“괜찮아, 괜찮아.” 나는 미소를 짓고 눈물을 닦는 에이드리안을 골똘히 쳐다봤다. “그럼 이젠 다 괜찮은 거지?”
에이드리안은 입술을 깨물고 미소 짓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함께 할 수 있는 한...”
나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 단지 친구로서 말이야.” 그리고는 얼굴을 붉히고 눈길을 깔았다.
나는 눈만 깜박였을 뿐이다. 지금은 ‘단지 친구’라고 했지만, 이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오, 제길, 우린 이미 질리도록 헛돌고만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쪽으로 돌아섰다.
“벤, 어...” 그 순간 에이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 테이블에서 같이 점심을 먹어도 될까?”
나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분명히 내 친구들은 낯설어할 것이고 메간과 캐시디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남자친구가 있었고 에이드리안과도 다소 친해진 것 같아서 별다른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에이드리안의 기분을 고려해보건대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에이드리안의 손을 꼭 잡아주며 따듯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지, 뭐.”
--------------------------------------------------------------------------------
나는 화장도 고치고 몸을 추스르려 잠깐 화장실에 들른 에이드리안을 기다려준 다음에 평소보다 20분쯤 늦게 점심테이블로 다가갔다. 우리가 바짝 붙어서 걸어오는 걸 처음으로 본 일레인 후쿠하라는 깜짝 놀라서 팔을 움찔거렸고 메간은 일레인의 모습에 고개를 들고 우리를 쳐다봤다.
나는 에이드리안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는 메간한테 마음 놓으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고 메간은 팔꿈치로 캐시디를 찔렀다. 귀여운 빨간머리도 메간처럼 눈썹을 들고 나와 점심 짝꿍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에이드리안을 끼워줘도 될까?” 몇몇은 우물쭈물 승낙을 했고 몇몇은 놀라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성준 옆의 긴 의자에 다가가자 성준은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고 스테파니 보는 명랑한 목소리로 반겨주었다. “헤이, 에이드리안.”
“하이, 스텝.” 에이드리안은 밝게 대답하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샌더스 쌍둥이들은 처음에는 주저하며 서로 눈짓을 교환하다가 결국 인사를 했다.
일분도 지나지 않아 린과 헤더가 반쯤 먹은 점심을 들고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린은 미소를 짓고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아도 되는지 물어보았고 일행들이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나와 에이드리안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린은 자리에 앉자마자 짐짓 쾌활한 척을 하며 물었다. “그런데 에이드리안... 어떻게 됐어?”
넋이 달아날 만큼 예쁜 블론드는 나를 넌지시 건너다보고 어깨를 부딪쳐왔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벤은 진짜 훌륭한 친구야. 지금은 다 괜찮아졌어.”
--------------------------------------------------------------------------------
케니 도일이 내 얼굴 앞에서 얼쩡거렸다. “그럼, 너희 다시 사귀는 거냐?”
“아니.”
“아하.” 케니는 현명한 척을 하며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떡만 쳐주겠단 거구먼.”
“아니.”
“그럼 도대체 뭔데?”
“걘 친구일 뿐이야.” 나는 짜증을 내며 한숨을 쉬었다. “그게 다야.”
“그게 다라구? 걘 너한테 심각하게 빠져 있는데? 한 달 전부터 너랑 합치고 싶어하는 기미가 보이더라구. 진짜 인마, 에이드리안이 널 어떻게 쳐다보는지 알고는 있냐?”
2번 타자는 메간이었다. 나는 마지막 수업을 마친 직후 락커 앞 구석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너랑 에이드리안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내 전-여자친구가 심문하는 얼굴로 물었다.
“우린 친구일 뿐이야.”
“친구라구, 진짜?” 의심이 풀리지 않은 심각한 목소리였다.
“그래, 친구.” 나는 우리 사이를 오고 가는 손짓을 해보였다. “나한테 전-여자친구하고 친구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건 너도 알잖아.”
“아마도...” 메간은 의심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난 너랑 깨지고 나서는 그 애처럼 널 상사병에 걸린 강아지 같은 눈으로는 바라보진 않았어.”
케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어디 한번 그것 좀 설명해봐.’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숨이 나왔다. “헤이, 에이드리안은 힘든 시기를 겪고 있어. 왜 그런지 말해줄 수는 없지만, 아무튼, 우린 친구일 뿐이라고. 그러니 이제부턴 자기 할 일이나 신경 쓰라고, 알겠어?”
“알았어.” 메간과 케니는 브룩이 일이 안 풀렸을 내는 소리보다 더 심하게 볼멘소리를 냈다.
그때 마침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 에이드리안이 복도에 나타났다. 그리고 나를 발견하고는 생기있는 눈빛을 발하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전에는 정신이 팔려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E컵 젖가슴이 아무런 이유없이 단추를 푼 핑크빛 탱크탑 천으로 팽팽하게 가두어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 팬티 속도 팽팽해졌다.
메간과 케니는 내 눈을 따라 예쁜 블론드한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내 버릇을 똑같이 흉내 낸 모습으로 눈썹을 들어 올리고는 나를 다시 되돌아보고 나서 또다시 에이드리안한테 시선을 돌려다가 마지막으로 나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둘은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를 비켜주고 복도를 내려갔다.
“무슨 일이래?” 에이드리안이 가까이 다가오고 물었다. 분명히 메간과 케니의 과장된 몸짓을 본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냐.” 나는 손을 내저었다. “괜히 까부는 거지 뭐.”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암튼, 치어리더 연습이 끝나고 전화해도 돼? 그냥 이야기만 하려고. 그래도 괜찮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하지.”
에이드리안은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잽싸게 내 뺨에 뽀뽀를 했다. “고마워, 벤. 알다시피, 진짜 재미날 것 같아. 우린 친구로서 성적 긴장으로 방해되는 것 없이 서로 속속들이 알게 될 것 같아.” 에이드리안은 킥킥대며 상체를 비틀어댔고 내 눈길은 저절로 젖 무더기로 쏠렸다.
나는 걱정스레 침을 삼켰다.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도온한테서 내 예쁜 전-여자친구랑 성적인 관계를 맺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놓은데다가 그 장본인인 에이드리안은 나를 사랑한다고까지 했지만, 결국 묘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에이드리안이 단지 섹시한 몸뚱이였다면 이것저것 재보지 않고 내 욕정을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굳어진 이상은 에이드리안의 우월한 관능(에이드리안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겠지만)을 구경만 해야 할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작별인사를 고하고 복도를 내려가는 에이드리안의 엉덩이를 바라보자 바지 속이 불편해졌다. 제길 이놈의 발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으음... 으음... 으음...” 브룩은 뒤틀린 얼굴로 나직이 읊조렸다.
내가 발가벗은 엉덩이를 후려갈기자 브룩은 즉각 앓는 소리를 내다가 “어엉!” 연달아 달아오른 신음소리를 냈다.
“또 때려줘!” 거의 오르가즘에 다다른 목소리였다.
“싫어.” 나는 브룩의 청을 거절하고 홍수가 난 보지를 천천히 절구질했다.
“으응, 제에발...” 브룩은 오르가즘의 언저리에서 흐느껴댔다. “벤, 해달라는 건 뭐든지 해줄- 어엉!” 브룩은 예상치 않은 순간에 반대쪽 볼기짝을 얻어맞고 온몸을 덜컥였다.
“어! 어! 으응!!!”
브룩은 두 번을 더 볼기짝을 얻어맞고 엉덩이를 씰룩댔고 세 번째 가격에는 등골을 굳히고 소리를 참으려 애를 썼다. 이를 악물고 오르가즘 소리를 죽이지 않았다면 쌍둥이들 방에서도 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브룩의 입을 틀어막은 것도 소리를 죽이는데 한몫을 한 게 분명했다.
물론, 브룩의 입을 틀어막은 손은 직전까지도 클리토리스를 구슬리느라 브룩의 분비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여동생은 오르가즘으로 아랫도리를 떨어대는 와중에서도 내 손가락을 핥아댔다.
나는 브룩이 진정한 걸 느끼고는 허리를 잡아 똑바로 눕혔다. 브룩은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양손으로 다리를 붙잡아 활짝 양옆으로 벌리고는 내 자지에 맞춰 엉덩이를 치켜들었다. 나는 브룩과 함께 쾌락의 아리아를 부르면서 절정에 오를 때까지 조여대는 보지를 마구 절구질해주었다.
“으음...” 브룩은 보지 벽이 정액으로 젖는 걸 느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어.” 나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내려트렸다. 브룩의 아담한 몸을 깔아뭉개지 않으려 매트리스를 짚고 있던 팔이 흔들렸다. 나는 남아 있던 정액을 마저 짜내고는 자지를 빼내 매트리스에 등을 대고 누워버렸다.
우리는 나란히 누워 산소를 들이켜며 섹스의 여운을 음미했다. 나는 한숨을 돌리고 기분 좋게 웃었다. “꽤 좋았지?”
“응.” 브룩은 환하게 웃으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늘 하던 대로 손가락으로 보지를 휘젓고 있었다. 브룩은 오른팔로 머리를 괴고 나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내가 미소를 지어주자 브룩도 미소로 대꾸했다. 그러나 브룩은 이내 입술을 깨물고 살며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브룩의 표정변화를 보고 부드럽게 물어보았다. “무슨 일인데?”
“곧 생리가 시작해.” 브룩은 얼굴을 찌푸렸다.
“달력을 보고 알고 있었어. 그리고 너 월요일에 생리통 심했지?”
“데비가 못되게 굴어서. 오빠가 에이드리안과 다시 친해져서 천만다행이야. 데비를 통제할 사람은 에이드리안밖에 없거든. 아무튼...”
브룩은 슬쩍 미소를 지으려다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나, 어, 누굴 만났어, 벤. 정확히는 만난 게 아니라 1년 전부터 쭉 알고 지내던 얘인데, 아무튼, 데이트 비슷한 걸 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잘됐다!”
“정말?” 브룩은 마음을 놓은 것 같았다. “내 말은, 오빠가 나한테서 등한시 당하는 기분일 것 같아서...”
“괜찮아, 브룩. 앤드루 헤밍웨이 때도 다 겪어 본 일이잖아. 기억나지?” 나는 달래주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리 좋은 반응은 아니었어.
“뭐, 지금은 그때랑 다르니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그 운 좋은 애는 누구야?”
“켄타 니시오카.”
“켄타...니시오카...” 낯익은 이름이라고 느낀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미즈호 니시오카의 남동생?” 나는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장발을 한 비쩍 마른 몸매의 일본계 소년을 떠올렸다. 켄타는 누나인 미즈호처럼 아시아인의 특징적인 외모가 두드러진 편이었다. 잘생기긴 잘생겼지만은.
“맞아. 오빠 미즈호 알지?” 브룩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오, 맞다. 에이드리안의 친구였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브룩은 얄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벤, 어, 그러니깐, 미즈호를 잘 알아?”
나는 얼굴을 붉히고 씩 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브룩은 눈을 굴렸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제발 페리 앤더슨 누나인 에밀리는 손대지 않았다고 말해줘.”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 애는 아냐.”
“흐음.” 브룩은 길게 숨을 들이켰다. “아무튼, 진짜로, 벤. 도온이 곁에 없어서 외로운 걸 알아. 그래서 난 오빠를 완전히 내버려두거나 하지는 않을-”
“진정해, 브룩.” 나는 브룩의 얼굴을 어루만져주었다. “괜찮을 거야. 도온하고 난... 어떤 약속을 정했어. 그러니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너한테도 짝이 있어야 하는 게 당연하고. 데이트는 재밌는 거야. 어차피 너하고 난 공공연히 데이트할 수는 없잖아. 진작에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있었어. 넌 안에만 가둬두기엔 너무 예쁘거든.”
브룩은 간신히 미소를 짓고 나한테 키스를 해왔다. “사랑해, 오빠.”
“나도 사랑해.”
--------------------------------------------------------------------------------
나는 무릎에 컨트롤러를 내려놓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GTA3로도 꽉 찬 머릿속을 비울 수 없었다.
수요일 아침에는 첼시 레니스가 또다시 작업을 걸어왔다.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와 초롱초롱한 녹색 눈을 한 귀여운 2학년 여자애는 올여름 동안 부쩍 자라더니 그러한 몸매를 시험해보고 싶었던지 호르몬과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대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다지 아는 게 없는 여자애였다. 맞아. 꽤 박아줄 만했고 굳이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섹스를 위한 섹스를 해도 좋다는 도온의 허락에도 단계를 진척시킬 만큼 흥미가 일지는 않았다. 작년, 도나 킨케이드, 스테이시 화이트하우스, 맨디 린하고 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잘 모르는 여자애하고는 자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첼시에 대해 생각하고 있노라니 헤더 윌킨슨도 떠올랐다. 매혹적인 검은 머리와 밝은 바다 빛 눈을 한 여자애는 학교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섹시녀였고 분명히 자지를 발딱 세우게 할만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헤더는 한 달 전에 나한테 꽤 강력하게 대시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는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고 은근하게 꼬리를 쳐대는 것이었다. 로맨스가 아니라 섹스를 구하는 게 뻔해 보였고 나로서도 완벽한 상대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우리는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여서 낯선 여자애와 엮이는 것보다는 훨씬 적절한 섹스 파트너가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번에 헤더를 만나게 되면 동침을 할 목적으로 정지작업에 들어갈 작정을 했다. 뜻대로 잘 풀린다면 도온을 향해 변치않는 마음을 지키면서 욕정을 풀 만한 새 파트너가 생길 듯싶었다.
그러나 헤더는 수업이 엇갈리는 시간에 나를 마주치자 별안간 긴장을 하고 평소와 다르게 수작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쌀쌀맞게 군 것도 아니었다. “헤이, 벤. 잘 지냈니?”
“그럭저럭.” 나는 잘 보이려는 미소를 짓고 의중을 숨기지 않았다. “새 홀터 탑인가 봐? 맘에 들어.” 나는 헤더의 D컵 젖가슴을 노골적으로 쳐다봤다.
헤더는 미소를 짓고 어깨끈에 손을 얹으며 얼굴을 붉혔다. “맞아, 알아봐 줘서 고마워.” 순간적으로 바다 빛 눈이 반짝였다. 마치 내 수작에 맞장구를 쳐주고 싶어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헤더는 걱정스레 주의를 둘러보고 고개를 돌렸다. “어, 가야겠다, 그럼 나중에 보자.” 그리고는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사이 마치 역병을 피하겠다는 듯이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눈으로 헤더의 엉덩이를 쫓다가 고개를 저으며 교실로 들어갔다.
그래서 나는 소파에 기대어 곰곰이 따져보는 중이었다. 도온과 나는 섹스와 호르몬 때문에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열린 관계를 해보기로 했다. 도온과 라이언 사이에 뭔가가 움트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조만간 라이언은 도온의 섹스 파트너가 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난?
작년에는 단지 박기만 하려고 마음먹자 절로 허다한 기회가 찾아왔다. 도나는 꽤 자주 섹스 파트너가 되어주었고 스테이시와 맨디는 아무런 제약이 따르지 않는 섹스 파트너를 구하고 있있다. 샌더스 쌍둥이들은 막 움트기 시작한 성적 호기심을 탐험하고 싶어했다. 심지어 섬머하고는 짧지만, 강렬하게 연결되기도 했다. 졸업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재미를 보려고 달려든 상급생들은 쳐주지도 않겠다. 섹스가 가장 쉬웠던 시절이었다. 단지 귀여운 여자애들과 놀아주기만 하면 만사형통이었다.
그런 관계가 최고로 바람직할 것이다. 만족스러운 섹스. 만족스러운 오르가즘. 서로 얽매일 것도 없고. 도온을 향한 사랑에도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은. 열린 관계의 한가운데서 욕정을 채울 수 있는 단순한 섹스 파트너가 되는 것이. 그러나 좆같은 게 막상 맘 놓고 놀아도 되는 처지가 되었건만 딱히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도온만큼 내 모터를 달달 돌려 줄 수 있는 여자애가 눈에 띄지 않았다.
에이드리안만 제외하고... 나는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전-여자친구하고 자도 된다는 허락이 있었지만, 게다가 내 자지도 열렬히 바라는 일이고. 아무튼 어디서 시작을 해야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에이드리안을 무척 아끼고 있었다. 그래서 에이드리안하고는 감정이 배제된 섹스를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아직도 에이드리안한테 미련이 남아있었다. 에이드리안은 보살펴줘야 할 여자애였다. 오빠인 아담 같은 악당으로부터 에이드리안을 지키는 빛나는 투구로 무장한 기사가 되어주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경우였다. 위험을 무릅쓰기에는 너무 강렬한 감정이었다.
에이드리안과 뭔가를 시작하게 되면 도온을 향한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걱정해주는 친구에서 작년 봄처럼 연인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래서 나는 에이드리안하고는 절대로 섹스하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첼시 같은 여자애는 그리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헤더는 나한테 관심을 끊은 것처럼 보였다. 에이드리안하고는 함부로 굴 수 없을 만큼 얽히고설킨 관계였다. 기껏 그 좋다는 열린 관계를 해보기로 약속해 놓고도 좆같이 써먹을 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진짜로, 부담없이 섹스만 할 수 있는 여자애를 어디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
한창 비디오 게임에 몰입하고 있을 때 현관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고 보니 땀에 전 여자애들 셋이 시끌벅적대며 부엌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짧은 주름치마에 둘러싸인 단단한 엉덩이들을 쫓아 길게 고개를 뺐다. 브룩의 다이너마이트 엉덩이는 익히 알고 있었고 제니퍼 보도 나름대로 귀여운 엉덩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케이디 제이컵슨의 엉덩이에 눈길이 쏠릴 때마다 내 아랫도리가 동요를 일으켰다는 걸 까놓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섹시한 빨간머리한테는 내 피를 끓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케이디는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성에가 서린 물병을 들고 부엌을 나왔다. 예쁜 빨간머리는 땀으로 젖은 셔츠가 달라붙은 모습으로 가볍게 헐떡이며 거실로 들어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비록 종류가 다른 헐떡임이었지만 엄청나게 섹시하게 보여 내 자지가 고속으로 딱딱해졌다.
“헤이, 케이디.” 나는 가볍게 아는 체를 했다. 치어리더 연습을 하고 온 여자애들이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우리집에 들렀기에 종종 케이디와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벤에엔...” 케이디는 신비하고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깊고 푸른 눈이 레이저가 되어 내 두개골을 꿰뚫었다.
나는 케이디의 심상치않은 목소리에 눈썹을 들어 올리고 컨트롤러를 내려놓았다. 아마 처음일 테지만, 케이디의 목소리에는 유혹이라기 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웠다. 웬일인지 살며서 걱정이 들었다. “왜?”
“오, 아무것도 아냐.” 케이디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소파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포갰다.
비단처럼 매끈한 다리에 절로 눈길이 갔다. 크림처럼 예쁜 빛깔을 띤 길쭉한 다리는 모델이 울고 갈 만큼 완벽하게 균형 잡힌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얼른 눈길을 들고 케이디의 얼굴을 쳐다봤다. 눈웃음을 치는 걸 보습을 보건대, 자기를 살펴본 걸 눈치챈듯했다.
그러나 케이디의 태도가 순식간에 변했다.
“궁금해서 그래, 벤.” 케이디는 눈을 부라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에이드리안하고는 대체 무슨 사정인 거야?”
“뭐라구?” 나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난데없는 질문에 따귀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인기척이 들려 옆을 쳐다보니 브룩과 제니퍼도 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에이드리안의 남자친구는 아니지?” 케이디가 심문했다. 부릅뜬 진청색 눈동자에는 짙은 호기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니.”
“하지만, 작년에는 남자친구였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몇 달 동안은.”
“하지만, 지금은 에이드리안을 박아주고 있지?”
나는 케이디의 대범함에 놀라 눈썹을 들어 올렸다. 원래의 의도하고는 딴판으로 격앙된 분위기였다. 나는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확고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럼 너한테 접근하지 말라고 치어리더 전부한테 명령을 내린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케이디는 내 버릇을 똑같이 흉내 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웃음을 참는 모습이 역력했다.
내 눈썹이 로켓처럼 치솟았다. “진짜?” 브룩과 제니퍼를 건너다보자 고개를 끄덕여 확인을 해주었다. “왜?”
“난 네가 설명해주기를 바랐는데.” 케이디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두운 푸른 눈이 춤을 추고 있었다. “난 소문을 믿지 않는 편이야. 어쨌든 대부분 사실이 아니니깐. 하지만, 가끔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걸 피할 수도 없는 데다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게. 너에 대해서 돌고 있는 소문이라는 게 꽤 거창한 내용이거든. 그중에서 반만 맞는다고 해도 꽤 대단한 바람둥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나는 다소 짜증이 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대체 지금은 나에 대해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 걸까? 올해에는 특별히 한 것도 없잖아.
“하지만...” 예쁜 빨간머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소문을 듣고 널 유심히 지켜봤지만, 꽤 많은 여자애들과 시시덕대기는 해도 누구를 박아주고 있는 특징 같은 걸 발견하지는 못했어. 그래서 역시 소문은 소문인가 보다 하는 식으로 생각이 굳어지고 있는 참이야.”
그 말에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럼, 에이드리안의 접근금지령은 도대체 뭐란 말이야?” 케이디는 나를 계속 재어보는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에이드리안이 동료 치어리더를 생각해서 명성이 자자한 바람둥이 벤을 멀리하라고 경고해주는 줄 알았어. 하지만, 너랑 에이드리안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니깐 꼭 그런 경우는 아닌 것 같은 의심이 들어. 그래서 말인데 에이드리안이 너와 다시 사귀고 싶어하는 거 맞지?”
나는 눈을 굴렸다. “아니, 우린 친구일 뿐이야.” 진지하게 테이프 레코더에 녹음을 해서 필요할 때마다 틀어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케이디는 곧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나를 빤히 지켜볼 뿐이었다. 나는 마치 현미경으로 면밀하게 관찰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케이디는 한동안 나를 꼼꼼히 뜯어보고는 씩 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명히 달아오른 눈빛이었다. “음... 흥미가 생기는데, 알다시피, 넌 내 타입이 아냐, 벤.” 그리고는 브룩을 돌아보고 윙크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가 알겠어? 에이드리안이 어떻게 반응하는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너랑 박아야 할까 봐.”
조금은 내 턱이 내려갔을 게다. 몇 달 동안은 나한테 눈곱만큼도 관심을 두지 않다가 느닷없이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서도 예상하지 못했다.
케이디는 내가 반응도 하기 전에 벌떡 일어서서 크게 기지개를 켰다. 부자연스러울 만큼 늘씬한 몸매가 내 코앞에서 유연성을 뽐냈다. 또한, 나한테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듯이 젖가슴을 내밀고는 셔츠에 텐트를 치게 한 바짝 선 젖꼭지를 내 눈앞에 바짝 들이대는 것이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아랫도리가 발딱 일어섰다. 나는 절실하게 섹스가 고팠고 케이디는 성질이 날만큼 화끈해 보였다.
케이디는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짓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브룩한테 돌아서서 빈 물병을 건넸다. 브룩은 놀란 얼굴로 물병을 건네받았다. 케이디는 두 여자애를 쳐다보며 자기의 팽팽한 배를 두드렸다. “연습하느라고 배가 고파졌어. 나랑 부리토 먹으러 갈래?”
여린 여자애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서로 마주보았다.
케이디는 미소를 지었다. “혹은 버거를 먹으러 가던지. 난 아무래도 좋아.”
그 말에 제니퍼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지 뭐.”
그러나 브룩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생각 없어.”
“알았어.” 케이디는 딱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튀기고 카운터를 가리켰다. “키를 놔둔 걸 또 깜박했네.”
케이디는 킥킥대며 부엌으로 들어가 키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제니퍼와 함께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중간쯤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고 우아한 동작으로 돌아서서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도... 아마도...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네가 그렇게 클 리가 없어.” 그 말을 하고는 제니퍼와 문을 빠져나갔다.
나는 턱을 내려트리고 브룩을 쳐다봤다. 브룩은 자기가 어떤 허리케인을 몰고 왔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
오후 4시 직후에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늘 하던 대로 현관으로 문을 열어주러 갔다.
“헤이, 벤!” 에이드리안이 오후의 밝은 햇살 아래 눈부신 모습으로 서 있었다. 지평선에서 올라온 햇빛이 온누리를 오렌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에이드리안을 본 것만으로 케이디와 나눈 대화가 떠올라 부화만 치밀었다.
“흠.” 나는 퉁명스러운 소리를 내뱉고는 아름다운 이웃을 문 앞에 내버려둔 채 집안으로 돌아섰다.
“벤?” 에이드리안은 집안으로 들어와 현관문을 닫으며 걱정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는 막 친구가 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완전히 굳어지지는 않은 상태였고 언제든지 깨질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넋이 달아날 만큼 예쁜 블론드는 내 퉁명스런 태도에 당황한 것 같았다.
내가 거실로 들어가 소파에 주저앉자 에이드리안도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따라 앉고는 숨도 쉬지 않고 물었다. “뭐가 잘못됐어?”
“치어리더들 전부한테 나한테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며?” 나는 눈썹을 들어 올리고 콧김을 쏟아냈다.
에이드리안은 깜짝 놀라 뒤로 몸을 움츠리고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뭐, 접근하지 말라고 한 건 아냐. 널 꼬시려고 애를 쓰지 말라고만 했지. 헤더가 널 노리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거든. 매디 정하고 나딘 버틀러는 누가 먼저 너랑 잘 수 있는지 내기를 걸었어. 그리고 소문 을 밝히는 몇몇도 참가했고. 작년에 미즈호와 캔디가 네 얘기를 너무 많이 해 준 게 아닌가 싶어.”
“아무튼, 왜 그런 명령을 내린 건데?”
에이드리안은 미간을 좁혔다. “너한테 도움이 될까 싶어서. 네가 여자친구한테 충실히 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았거든. 그래서 내 휘하에 있는 애들을 관리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았어.”
나는 눈을 굴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 잘됐다. 잘됐어.” 괴로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뭐? 그걸 바라는 게 아니었어?”
“사실은 아냐.” 나는 한숨을 쉬고 이마를 짚었다. 에이드리안한테 화를 내고 싶었다. 엄밀히 말해 늘 꼴려 있는 한 남자로서 누구라도 내 자지를 가로막는다면 상당히 짜증이 날 만했다. 게다가 학교에서 최고로 화끈한 여자애들한테서 말이다. 그러나 나를 위한답시고 선의로 한 일이니만큼 무턱대고 탓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감정적으로는 영 못마땅했다.
“여자애들한테 무더기로 유혹을 받고 싶다는 거야?”
나는 에이드리안을 째려봤다. “나도 남자라구. 어떨 것 같아?”
“오... 그러니깐...” 에이드리안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할 말을 궁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네 여자친구는?”
한숨이 나왔다. 말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까짓것 될 대로 돼라지. “잘 들어. 지난주에 내가 어딜 다녀왔는지 궁금했을 거야. 난 베이 에이리어로 도온을 만나러 갔었어.”
에이드리안은 놀라서 번쩍 고개를 세웠다. “오, 그렇구나...” 그러나 아직은 자기 질문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는 모습이었다.
“아무튼, 도온과 난 ‘열린 관계’를 해보기로 약속했어.” 나는 대수로울 게 없다는 식으로 토로했지만, 에이드리안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란 얼굴을 해보였다. “우린 서로한테 충실히 하려 노력하느라 거의 미칠 지경이었어. 그래서 섹스는 섹스일 뿐이라는 데에 동의했어. 난 아직 걔를 사랑하고 걔도 나를 사랑해. 하지만, 우리가 떨어져 있을 동안에도 서로 육체적인 충동과 욕구가 있을 거라는 걸 이해했어.”
“그렇구나...” 에이드리안은 눈깔을 좌우로 굴려대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하건대, 머리를 굴려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마지막으로 투정을 부렸다. “넌 내가 기대하고 있는 여자애들 중에서 반이나 되는 여자애들을 빼앗은 셈이 되는 거야.”
에이드리안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붉혔다. “미안, 벤. 나도 참 대단한 친구지. 네 자지를 방해나 하고 말이야. 그치?”
슬그머니 미소가 일었다. 짜증이 나건 말건, 에이드리안이 스스로 자지를 방해했다고 말하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맞아, 딱 들어맞아.”
“근데 네 여자친구는 진짜 그래도 괜찮대?”
나는 한숨을 쉬고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팔뚝으로 이마를 가리고 달갑지 않은 신음소리를 토했다. “그래, 걔도 거의 회까닥할 지경까지 이르렀었거든. 걔가 날 사랑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린 그 방법이 최선일 거라고 결론을 내렸어.” 나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난 섹스를 못하게 됐으니만큼 다 소용없어졌어.”
“글쎄, 너한텐 아직 다른 옵션이 남아 있어...” 에이드리안은 나로서는 더욱 익숙하다고 할 수 있는 끈적끈적 목소리를 내며 내 옆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나는 에이드리안의 의중을 눈치채고 바짝 고개를 세웠다. “잠깐, 에이드리안.”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