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0)「돌아간다」후일담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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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은 후 바다로 나왔다. 폭죽도 사왔으니 해변에다가 깊게 박아넣고 불 붙여서 팡팡 터뜨리면 된다.
아직 해가 완전히 저물지는 않은 오후 여섯 시 정도. 괜찮겠다 싶어 애들을 데리고 해변가로 갔다. 역시 아직 사람이 남아 있었다. 이 사람들이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게 바다에 들어가도 된다는 걸 증명했다.
바람에 바다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오르가니아의 부둣가에서는 이런 냄새 맡을 수 없었다. 거긴 바람이 잘 부는 곳도 아니고, 애초에 우리는 부둣가 위에 조금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해가 점점 저물어가는 새빨간 노을에 물들어가는 하늘이 지평선과 밀접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내 시야를 기준으로 정확하게 반반 갈라진 바다와 하늘은 깊은 감동을 주기에 제격이었다. 바다는 그 자체로도 그림이 되었다.
해변은 넓었고, 거기서 노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노나 구경하면서 바닷물로 발을 적셨다. 굉장히 차가웠다.
"그렇게 막 들어가도 돼요?"
"아, 너희는 아예 바다에 들어와본 적 자체가 없나?"
"네."
"괜찮아. 소금물이라서 씻을 때 찝찝한 거 빼고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우린 애초에 발만 담글 거고."
내 말에 아이들도 신발을 벗어 바다에 발을 담갔다. 파도가 쏴아아 울며 종아리까지 넘실거려 발목 위를 적셨다. 기분 좋은 스산함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은 모래바닥 안으로 점점 침투해갔다. 가만히 있는데도, 뻘이 아닌데도 발이 땅 밑으로 가라앉는 감각은 생소해서, 나는 자꾸만 발을 움직여 위로 들어올렸다. 그럴 때마다 모래가 바닷물을 탁하게 물들였다.
"폭죽을 발사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고……낚시라도 할까. 저기 뒤에 파는 데 있던데."
"낚시……요?"
어째서인지 성현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뭐가 문제인지 잠깐 고민해본 결과, 저건 PTSD라는 판단을 했다.
오르가니아에서 낚시할 때 내가 쟤한테 얼마나 모질게 굴었는데. 그걸 생각하면 사실 당연한 수순이긴 하다. 근데 나는 고려를 못 해서 마음대로 내뱉었군. 미안하게시리.
"백성현 새파랗게 질렸네."
"조용히 해 백소유……그날의 부둣가는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나는 언니 등 밀어주면서 담담하게 대화했는데, 너는 거기서 차였지? 이게 바로 진짜 배려라는 거야."
"누나, 얘 한 대 쳐도 돼요?"
나는 쓰게 웃었다. 될 리가 없잖아 미친 놈아.
그래도 미안하긴 해서, '앨버트'의 손을 꽉 쥐었다.
"미안해요, 앨버트."
"……네?"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싶어서. 그냥. 나도 그때 생각만 하면 쪽이 팔려서 밤에 잠 못 자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얼마나 당돌했던가. 아무리 몸을 버림패로 사용하려고 했어도 그렇지 섹……아무튼 시발 그걸 해서 관계를 확립하려고 했다니. 그때는 술도 안 마셨으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참 심란할 때였지.
"……괜찮아요. 옛날 일이니까요."
"그럼 다행이고."
아무리 그래도 반응을 보니 낚시는 좀 아니다 싶어서 대충 바닷가를 산책했다. 박성철은 묵묵히 따라왔다. 방해해도 되는 시간, 방해하면 안 되는 시간을 철저하게 나눠서 생각하는 듯했다. 괜히 실장 단 게 아니네.
이런저런 바다에 대한 잡담을 나누며 걷고 있을 때였다. 무심코 바다를 바라보니, 한눈에 딱 봐도 아름다운 절경이 펼쳐졌다.
"화아……."
해변은 일자가 아니라 살짝 휘어진 곡선 모양이다. 지금 우리는 해변의 한쪽 끝에 거의 다다랐다. 그 상태에서 지금까지 걸어온 곳을 보면, 휘어져 있는 땅과 맞물려 있는 바다에 노을이 비쳐 예뻤다. 이런 건 사진으로 남겨야 되겠다 싶어서 얼른 찍었다.
"아, 소유야. 저기 서봐. 성현이 너도."
"얘랑 같이요?"
"뭘 그렇게 튕겨. 어차피 같은 침대에서 자는 사이인데."
"……."
소유가 나를 표독스럽게 노려본다. 맞는 말이긴 한데 저따구로 말을 하니까 좀 어이가 없겠지.
"언니 이따 두고봐요. 못 자게 할 거야."
"……."
좆됐군.
나는 평생 소유는 이기지 못할 운명인 듯했다.
애들 사진 찍어주고, 각자 보내줬다. 애들이 내 사진도 찍고 싶다길래 찍었다. 유일하게 박성철만 지금까지 사진을 못 찍어서 불쌍한 마음에 한 장 찍어줬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본인은 극구 반대했지만 내 강압에 의해 찍혔다. 나는 사진을 박재현에게 보냈다.
- [사진]
- 성철 씨 화보 어때요.
그러자 곧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이 사람은 하루 종일 폰만 보나.
- 화보 그거 좋은 아이디어네요. 최대한 유민 씨 사진 많이 찍어오세요. 굿즈 같은 느낌으로 팔면 되겠네요.
- 아니 제가 아니라 성철 씨요.
- 성철이에게도 말해놓겠습니다. 못해도 백 장 정도는 찍어오세요.
- 아니 님아.
마지막 메세지에서 1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박성철이 전화를 받았다.
"예, 도련님. ……사진을 말입니까? 굿즈요? 모델 화보집으로 쓰기에는 너무 저희 연출 실력이 처참합니다만."
"아니 처참하다니."
"예. 차라리 브이로그 감성으로, 블로그에 글 쓰는 느낌으로 만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박성철이 나를 돌아보았다.
"아이들도 굿즈에 출연해도 되겠습니까?"
"보수는요?"
"그건 도련님께 따지십쇼."
"……지금 통화 중인 거 아니에요?"
"맞습니다. 괜찮습니다. 저희는 친형제라."
"……."
뭐가 뭔지 모르겠군. 어지럽다. 어지러워.
"얘들아, 너희 책에 실릴 생각 있어?"
"책……이요?"
"응. 화보 굿즈……간단하게 말하자면 아타나시아 연대기 있지? 그거를 우리 여행한 사진으로 대체한다고 보면 돼."
아이들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된대요."
"가능하답니다. 예. 최대한 다양하게 해서 찍어가겠습니다."
그래봤자 시간은 이제 한 48시간 정도 남았을까 싶은데. 자는 시간까지 빼면 30시간밖에 없다.
"그런 고로, 지금부터 애들이랑 아가씨 따라다니면서 사진 좀 찍겠습니다. 하던 대로 편하게 하세요. 이건 그런 굿즈니까요."
불행 중 다행이었으므로,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이따금 들리는 찰칵, 하는 소리가 사진을 찍는 소리겠지.
날이 어두워지고, 사람들이 슬슬 바다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해변 한가운데까지 가서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 바닥에 폭죽을 꽂았다.
"언니, 근데 이거 불 어떻게 붙여요?"
"푸에고……아."
라이터라도 사올걸.
"저기, 성철 씨. 라이터 있어요?"
"담배 안 핍니다."
"이참에 피세요……는 농담이고, 가서 라이터 좀 사와주세요. 이거 불을 붙일 게 없어요."
"직접 안 가십니까?"
"혹시라도 저 알아보는 사람 있으면 이미지에 타격 좀 갈걸요. 보통 여자가 담배 피는 거 싫어하잖아요."
박성철은 납득했는지 순순히 편의점에서 라이터를 사왔다.
"……지포라이터? 이건 또 어디서 구했어요?"
"편의점에 있었습니다."
"그건 뭐 하는 편의점이래……."
나는 톱니바퀴를 굴려 폭죽에 불을 붙였다. 도화선이 타들어가던 폭죽은 이내 한두 개씩 몸통에서 무언가를 발사했다. 저 멀리 하늘까지 올라가던 몸통은 이윽고 펑, 하고 터져 형형색색의 불꽃이 되었다. 밤하늘에 유성이 펼쳐졌다. 먹색과 대비되는 반짝이는 빛들이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불꽃놀이의 감성이란 불꽃을 감상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얘들아, 소원 빌어."
"소원이요?"
"응. 난 불꽃놀이 할 때마다 소원을 빌었어."
물론 소원을 들어주는 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나만의 낭설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소원을 빌어 이루어진 전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빌었다. 지난 번 소원은 성취하기까지의 과정이 조금 험난했지만,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도록 빌었다.
달보다 환하게 빛나던 불꽃은 이윽고 사그라들어, 재가 흩날리듯이 천천히 추락했다. 결국에는 지평선에 집어삼켜졌다. 바다에 떨어지는 잿더미를 보며 나는 새삼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왔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구나, 하고 느꼈다.
"예쁘지? 오르가니아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 예쁘네요."
"앞으로는 예쁜 거 자주 보자."
나는 아이들을 보며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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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을 모두 마치고 복귀하기 위해 다시 KTX에 올랐다. 빠뜨린 짐이 없나 확인하고, KTX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아이들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 순간 잠들었다.
"잠들었네요."
"어쩔 수 없었어요. 밤새 놀았거든요. 안 재운다는 게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짜 안 재울 줄이야."
마나로 신체강화하는 게 효과를 조금이나마 보긴 보겠지만, 그래도 이틀 연속으로 밤을 새는 건 힘들었겠지. 밤에 가만히 자는 것으로는 시간이 아깝다며 나와 진심을 교류하길 원했다. 최대한 이 아이들에게 맞춰주기로 결심했던지라 나는 아이들의 질문을 전부 받아주었다.
"사진은 괜찮게 찍혔어요?"
"100장은 못 채웠지만……워낙 이곳저곳 돌아다녀서 그런지 나쁘진 않습니다. 어차피 브이로그 감성이니까 크게 신경을 쓸 것도 아니고. 사진이 적으면 그만큼 책을 얇게 하고 가격을 싸게 하면 되는 문제니까요."
"그거 말고요, 애들이랑 저 예쁘게 찍혔어요?"
박성철은 잠시 나를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예.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다행이다. 첫 번째 추억을 의미없게 보내긴 싫었거든요."
"첫 번째 추억 말입니까?"
"적어도 저희에게 있어서는 첫 번째에요. 그게 하필이면 바다가 될 줄은 몰랐지만……충동적으로 온 것 치고는 나쁘지 않았네요."
물론 아예 좋은 일만 있던 건 아니었다. 나쁘다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게 볼 수만은 없는 일도 하나 발생했다.
바로 이것.
[ 티백녀 해운대에서 폭죽으로 노는중 ]
─ 애들이랑 남자랑 같이 온것같은데 니들이 말하는 백발이 저거구나?
└ 남자? 남자친구임?
└ 남친이겠냐? 니들같은 놈들때문에 혼자 어디 다니기 무서워서 경호원으로 붙여놓은 거겠지
└ 근데 애들은 누구임?
└ 떡밥 돌았던거 종합해보자면 친남매까지는 아니고 의남매라는데
└ 의리로 형제나 남매 맺는게 ㄹㅇ 현실에서 가능한거였나
그새 나를 알아본 놈들이 커뮤니티에다가 글을 쓴 거다. 이미 나는 백발로 상당히 유명해진 상태였기에 아예 고려를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박성철을 갖고 이상한 추문을 만들어내기에 조금 그랬다.
그래서 나도 글을 썼다.
[ 본인 해운대 놀러옴 ]
─ 내가 사랑하는건 내 애들밖에 없으니까 안심할 것.
└ 내가 니 남친도 아닌데 왜 안심함?
└ 모델같은건 애인유무여부도 영향력이 좀 있을걸
└ 놀려고 간거일텐데 니도 고생 많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정상인들이 많아진 느낌이라 다행이었다. 이것 말고도 나를 수족관에서 봤다느니, 식당에서 봤다느니, 카페에서 봤다느니, 방탈출 카페에서 봤다느니……뭐 이런저런 글들이 써졌지만 아무리 그래도 과하다고 생각했는지 올라온 것들마다 욕을 먹고 있더라.
"친남매는 아니라고 했죠?"
"네."
"그럼 뭐 어디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데……애들을 사랑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특별한 이유라……."
나는 멋쩍게 미소지었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거죠. 친남매가 아니니까, 아니니까 오히려 더 사랑할 수 있는 거에요."
"……."
"제가 얘네를 데려왔던 날, 저 자살을 시도했었어요."
박성철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주위를 이리저리 살폈다. 다행히 이 근처 사람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그냥, 사는 게 싫증이 나서……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확 죽어버리려고 했어요."
"……120억이 있는데도 말입니까?"
"저도 돈이 있으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돈이 있어도 안 되는 게 있더래요."
나는 내 어깨에 기댄 소유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제는 안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요. 전 이 아이들이랑 백년해로로 늙어죽을 때까지 살 거에요. 물론 그런 사랑이 아니기에 결혼은 안 할 거지만."
"……이 아이들이, 아가씨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입니까."
"없으면 죽어버릴 존재, 이제 나에게 남아버린 마지막 희망, 그건 이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겠죠. 모든 것을 버리고 나 하나만을 뒤쫓아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저는 이 아이들이 버린 것들에 대한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라도 이 아이들을 잘 대해줘야 할 의무가 있어요. 꼭 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다 해주고 싶은 거죠. 그게 뭐든. 충동적인 여행이든, 맛집 탐방이든……그게 뭐든. 이 아이들을 건드리는 게 있으면 제가 직접 복수할 거에요. 제가 갖고 있는 돈과 당신네들과의 연줄을 이용해서. 편의를 봐준다고 했으니 그런 거까지 포함이라고 생각할게요."
"……법은 어기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의 선에서만 그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설마 뭐 사람을 죽이겠어요?"
박성철의 눈빛이 살짝 일그러졌다. 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아이들, 평생 사랑해주십쇼. 퓨어 러브이든, 뭐든……이렇게 진심을 내보이는 사랑은 또 난생 처음이라 잠깐 당황했습니다. 아가씨가 얼마나 얘네를 사랑하는지는 눈빛만 봐도 압니다. 그게 신기했습니다."
"뭐가요?"
"사람이 피도 이어지지 않은 다른 사람을 저 정도로도 사랑할 수 있구나."
아하, 그 소리인가.
나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우리라면 가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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