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억을 위해 아카데미 교수가 되었다-230화 (230/247)

(EP.230)ED No.2 「돌아간다」 ─ 004

씨발.

"아, 너무 그렇게 험상궂게 노려보진 마시고요. 제가 뭐 정말 그렇게 만들겠다는 건 아니고, 제안을 드리러 온 겁니다."

"……제안?"

"예에. 저희 회사에서 모델일을 해주시면 가짜신분까지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정부쪽에도 커넥션이 있다, 이 말입니다."

나는 떡대를 흘낏거렸다. 몸이 어찌나 큰지 골목길 전체를 틀어막고 있었다. 차라리 바닥을 도약해서 뛰어넘어가면 될 것 같다.

"아니, 왜 자꾸 도망가려고 그러세요."

"……."

"진짜라니까요? 모델일만 해주세요. 그러면 가짜신분이고 이것저것 다 만들어드릴 수 있다니까요? 아가씨께서 120억 갖고 계신 건 아는데, 이거라도 해야 목숨 부지하지 않겠어요? 120억만으로는 가짜신분 못 만들어요. 정부랑 커넥션이 있어야지 가능하다, 이겁니다."

남자가 저 뒷편을 가리켰다.

"정 그래도 내키지 않으시면야 뭐, 가셔도 됩니다. 근데 뒷일은 제가 안전을 보장해드리진 못하겠네요."

"너희들 다 죽이고 도망가면?"

"어차피 저희야 다 버림패니까 상관없습니다. 사람 하나 납치하는 거나 진배없는데 높으신 분들께서 자기 직속 부하를 부리시겠어요? 그나저나 아가씨 참 자신감이 넘쳐나시네. 아가씨가 어떻게 이 두 명을 쓰러뜨린다는──"

나는 다리를 한계치까지 강화해 뒷발로 내 뒤에 서 있는 떡대를 쳤다. 떡대는 뒤로 날아갔다.

"가능한데?"

"……이거어, 참. 신기합니다. 그래도 정부를 적으로 돌리실 수는 없죠?"

그건 그랬다.

이 새끼들이 진짜 정부랑 연줄이 있는 거면 나는 끝장이었다.

"……진짜 모델일만 하면 되는 거지? 막 이상한 거 아니지?"

"건전하고 노출없는 피팅모델이니까 걱정 마십쇼. 저도 사실 그만큼 강한 약점을 쥐고 왜 그런 거나 맡겨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니까요. 일단 가십시다?"

"하아……."

나는 반쯤 체념하는 심정으로 떡대와 남자를 따라갔다. 내가 날려버렸던 떡대는 아까 그 스토커를 저 멀리 내다버리고 있었다. 얘네도 참 떳떳한 기업은 아닌 것 같은데. 나한테 피팅모델 같은 거 시켜서 뭐 하려고? 말만 저렇게 하는 거지 성접대 시키려는 거 아니야?

진짜 그런 거면 바로 그냥 죽여버리고 도망갈 자신이 있다.

나는 검은 밴에 올라탔다. 내 양옆을 두 떡대가 채웠다. 못 도망가게 하려는 것 같은데 이래도 나는 도망칠 능력이 되어서 딱히 걱정이 되진 않았다.

조수석에 앉은 업무실장……아니 실장이라며? 직급 높네? 씨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아무튼 저 남자는 룸미러로 자꾸 나를 흘낏거렸다.

"뭘 그렇게 봐요?"

"아, 백발이 참 신기해서요. 그렇게 깔끔한 백발은 난생 처음 봅니다. 유전이랬나요?"

"……대충 비슷해요."

"토종 대한민국 핏줄에 백발도 있구나. 거 참 신기하네요."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밴은 한참을 더 달려 커다란, 진짜 존나 커다란 빌딩 앞에 도착했다.

"후드 쓰세요."

"……."

후드를 뒤집어쓰고 떡대들이랑 같이 내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업무실장이 자기 신분을 증명하더니 엘레베이터에 타래서 탔다. 다른 건 몰라도 떡대 몸집이 너무 커서 숨이 막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이런저런 통로를 따라서 한 방에 노크했다.

"도련님, 박성철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방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뭐가 일어날지 몰라 일단 몸에 마나를 잔뜩 순환시키며 따라들어갔다.

그냥, 단아하게 생긴, 하지만 체격은 좋은 그런 남자가 와이셔츠 차림으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나는 대놓고 싫은 기색을 풀풀 풍기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댁이 나 불렀다죠?"

뒤에서 박성철이랑 떡대가 경악해서는 나를 말리려고 하지만, 남자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예, 제가 불렀습니다. 박재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백유민 군."

"……왜 불렀는데요?"

"못 들으셨습니까? 피팅 모델을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얼이 빠졌다.

"뭐 이상한 게 아니라……진짜 피팅 모델이요? 건전하고 노출없는, 수영복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정상적인 옷들만 입는?"

"네. 당연하죠."

뭐지.

"고작 그런 걸로 내 신분을 보장해준다고요?"

"고작 그런 거라뇨!"

갑자기 박재현이 크게 외쳤다. 나는 깜짝 놀라 살짝 뒤로 물러났다.

"고객이 옷을 구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옷이 예쁜지?"

"그것도 맞지만, 정말 저 옷을 입으면 멋지고 예쁘게 보일지, 입니다. 옷이 예쁜 것과는 다른 개념이죠. 옷이 예뻐도 사람이 입었을 때 예쁘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요?"

"어느 정도 눈이 높은 소비자들은 정말 눈이 돌아갈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가 아니면 구매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의류를 다루는 업체 입장에서는 그만큼 피곤한 게 따로 없죠. 따라서 저희는 최대한 아름답고 핏이 좋은 모델을 엄선해 대여해줍니다. 여기서 당신이 진가를 발휘할 겁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나를 모델로 써서 돈을 벌고 싶다 그거에요?"

"그렇습니다. 물론 말씀하신 것처럼 수영복 같은 게 아예 없진 않겠지만, 그런 건 저희 차원에서 빼드리겠습니다. 남성이 여성 수영복을 입는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잠깐 생각해봐도 알 것 같으니까요."

"일단……어떻게 고작 모델 좀 대여해주는 기업이 정부과 연이 있다는 건데요?"

박재현의 입가가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혹시 이펙트 엔터테이먼트를 모르십니까?"

"네. 모르는데. 제가 원래 시사상식 같은 거에도 관심이 없고 나라 돌아가는 거에도 관심이 없어서요."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엔터테이먼트 부문에서는 저희가 업계 1등입니다."

"아……."

저렇게 말해줘도 뭔가 체감이 되질 않는다.

"믿지 못하실까봐 일단 신분은 마련해드렸습니다. 주민등록번호도 뒷자리 첫번호가 2로 바뀌셨고, 은행 같은 곳의 데이터베이스도 이미 수정이 되었습니다."

"예……?"

"정 믿기지 않으면 아무 사이트에서 본인인증 한 번 해보실래요?"

나는 박재현을 흘낏거리며 대충 아무 사이트에나 들어가서 회원가입한 다음, 본인인증을 눌렀다. 박재현의 말대로 내 모든 신상에서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첫번호만 2로 바꾸고 시도해봤다.

"어떻습니까?"

뭐야 시발 진짜네.

"아니, 그래도……이런 약점으로 고작 그런 거밖에 안 해요?"

"고작 그런 거라뇨!"

"아이씨 깜짝이야."

홧김에 로우킥을 날릴 뻔했다.

"백유민 군만 있으면 의류 업계에 엄청난 폭풍이 일어날 겁니다! 솔직히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온몸이 창백할 정도로 새하얗고 머리까지 백발이니 이처럼 조화로운 사람이 또 있을까요. 체구는 아담한 게 흠이긴 합니다만……키를 제외한 핏이 해결해줄 테니 문제는 없습니다."

"아, 예……."

잘은 모르겠지만 얘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인생에 회한이 드는군.

"아, 근데 저 흉터가 있는데요?"

"네. 목이랑 손목에 좀……."

이럴 줄 알았으면 바리에이션으로 치료를 해버리고 올걸.

"괜찮습니다. 인공피부 같은 것도 있으니까요. 덧칠하면 됩니다."

"……그렇다면야 뭐……."

"그것 말고도, 다른 필요하신 것도 전적으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120억이라는 자산을 보유하고 계신 건 알지만 세상사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것도……맞죠?"

"좋습니다!"

박재현이 뭔가 서류를 잔뜩 들고 내게로 다가왔다.

"오늘 하실 업무입니다."

"헤?"

"총 다섯 군데를 돌고 오시면 됩니다. 일주일에 두 번만 부를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

시발.

"성철아! 모셔가!"

"예, 도련님."

나는 박성철을 따라 건물에서 나왔다. 이번에는 떡대 없이 검은밴에 탑승하고, 박성철이 내 옆에 앉았다.

"저기, 저 박재현이라는 사람 뭐 하는 사람이에요?"

"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상위 10등 안에는 무조건 드는 사람입니다. 거, 진짜 세상에 관심이 하나도 없으시네요."

"……."

나를 딱하게 내려다보는 박성철. 이대로 벌떡 일어나 턱을 머리로 가격할까 싶었지만, 그래도 내 신분을 해결해준 장본인 중 하나라서 참았다.

검은 밴이 한참을 이동해서 멈춘 곳은 한 스튜디오.

"여긴……."

"여성 평상복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입니다."

"서류를 다 외워요?"

"일인데 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런가…….

여기부터는 박성철이 따라갈 수 없다고 해서, 나는 조심히 스튜디오 안으로 향했다. 조금 규모가 큰 곳이라 사람이 있는 곳까지 들어가는 데 시간이 걸렸다. 아직 조명이나 이런저런 게 세팅이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 스탭으로 보이는 사람이 내게로 다가왔다.

"마음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아니, 저, 모델일 하러 왔는데요……."

"……아."

스탭은 다른 스탭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다짜고짜 옷을 넘겨주고 탈의실에서 갈아입으라고 시켰다. 혹시 몰라 탈의실 이것저곳을 훑었지만 카메라 같은 건 없었다.

그렇게 지옥이 시작됐다.

** ** **

"씨바알……."

집에 돌아오니까 새벽 한 시였다. 그냥 사진만 찍는 거라고 해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냥 사진이 아니라 매우 전문적인 사진이었다. 자세부터 표정까지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수정에 수정을 거쳐 어떻게든 하나씩 찍었다. 문제는 다섯 군데를 돌아야 했고, 한 군데에 적어도 스무 벌은 있었다는 거지.

"삭신이야……."

나는 선물로 받은 옷들이 담긴 쇼핑백을 대충 아무데나 던져놓고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씻기도 귀찮았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그냥 자야 할 것 같았다. 애초에 나갈 일이 없으니 씻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닐까.

……더러운 건 참을 수 없으니 일어나자마자 씻어야겠다.

대신 바로 자기는 좀 심심해서 스마트폰으로 커뮤니티를 또 이리저리 뒤졌다. 아까 그 커뮤니티에서 가장 추천을 많이 받은 글이 있었다.

[ 존나 쳐맞고 왔다. ]

─ 그 백발녀한테 싸인좀받을라고 따라갔는데 웬 존나 떡대 커다란 아저씨들 둘이랑 건들거리는 아저씨 한명 오더니 나 존나패고 티백녀 데려갔다. 씨발 고소 못하냐?

└ 병신새끼 또또 굳이 기어가서 존나처맞지? 120억이나 있는데 경호원 하나 없겠냐?

└ 맞을짓 해놓고선 쳐맞았다고 억울하다 고소하겠다 이지랄하고있네 ㅋㅋ 너같은 새끼들때문에 여기가 안좋은 시선을 받는거야

└ 병먹금

└ 나가죽어

└ 스토커새끼가 뭘 잘한게있다고 여기까지와서 똥글을 싸지름?

└ 추천 박아라 박제하자

추천으로 박제한 거였구나. 그래도 뭐가 잘못되고 뭐가 옳은 건지 판별할 능력은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글을 썼다.

[ 저새끼가 나 도촬함 ]

─ 폰 뺏어서 확인해보니까 내 사진 여러장 있길래 뭐라고 했더니 나 덮쳐서 깔아뭉개더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존나 벌벌떨고있었는데 갑자기 멋진 사람들이 와서 구해줌 나 모델 제안받아서 오늘 사진 여러장 찍고 왔다

└ 스토커가 아니라 도촬범새끼였네 ㅋㅋ

└ 덮쳐서 깔아뭉갠거면 성추행까지 포함아님? 진짜 인간말종 쓰레기새끼였네 저딴새끼가 고소니 뭐니 지랄한거? 진짜 나가죽었으면 좋겠다 왜 산소를 낭비하지?

└ 씨발련아 아까 끝난 떡밥 또 끌고오지마라

└ 내가 씨발 언제 덮쳤어 씨발련아

마지막은 아까 그 도촬범 새끼였다. 나는 피식 웃고선 녹음본과 함께 글을 올렸다. 아무렴 내가 얼마나 철두철미한테 거기 그냥 갔을까. 증거 잡으려고 녹음 다 하고 있었단다.

[ 증거 ]

─ 경찰서 가도 됨? [ ▶ ──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씨발 짐승 새끼였네

└ 바로 고소 가버리시자!

└ 이런 떡밥이면 환영한다 남 좆되는게 가장 재미있지 ㅋㅋ

나는 쿡쿡 웃으며 눈을 감았다. 경찰서까지 갈 생각은 없지만, 또 지랄하면 진짜 가야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