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8)2부 115
"……에레브를 죽이려고?"
알파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그 아이를 지금 당장 죽이는 건 반대란다. 악마가 어떻게 될지 장담을 못하겠으니."
물론 에레브가 죽으면 악마는 자신에게 종속된다. 하지만 알파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말을 아꼈다.
"우선 에레브를 잡는 게 먼저, 그리고 그 아이를 어떻게 할지는 그 후에 의논하지 않으련?"
"……날 어떻게 도와줄 건데?"
"내가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이 조금 많단다."
정확하게는 데이지를 통해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민간인들이었다.
"그 인간들과 서약을 맺을 테니, 네가 그 인간들을 잘 활용해보렴."
"……좋아. 대신 빨리 보내. 광신도들로는 부족해. 이러다간 나 진짜 죽을지도 몰라."
"죽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하렴? 그래도 동생인데 죽으면 슬프단다."
"퍽이나 그러겠다. 언니는 역시 또라이야."
"그래도 언니라고는 해주는구나?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츤데레?"
베타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알파는 아쉬워하며 정신세계에서 나왔다.
알파는 다시 아티팩트로 데이지를 불러들였다. 다행히 데이지는 아케즈에 사람을 파견한 후였다.
"내가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니?"
"오르가니아에서는 사람들이 조금 더 광적으로 삼성교를 믿어요. 아마 알파 님께서 권능을 보여주시면 그게 누구든 알파 님을 따를 거에요."
"수백 명 정도를 채울 수 있니?"
"안 될 건 없겠지만……뭘 하시려고요?"
데이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베타를 도와 에레브를 공격할 거란다. 인간들과 서약을 맺으려고 해. 입이 무거운 인간들로 데려올 수 있겠니?"
데이지는 맡겨달라며 저택에서 빠져나갔다. 정확하게 한나절 정도가 흐른 어두운 밤, 데이지는 못해도 이백 명은 되는 사람들을 저택 앞으로 데려왔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니?"
"이 사람들 모두 애매한 광신도들이에요. 진짜 광신도들처럼 적극적이진 않지만, 삼성교 자체에는 신실한 자들이요."
"내가 진짜 여신이라는 걸 입증하면 나를 따르겠구나?"
데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파는 저택 바깥으로 나와 인간들을 마주했다.
"반갑단다, 인간들아. 나는 너희들이 받들어 모셔야 할 유일무이한 여신, 알파란다."
교주가 여신이라는 건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었다. 숨기는 건 간단했다.
"당신이 여신님이라는 건 어떻게 믿는다는 말입니까?"
한 남자의 물음에, 알파는 서약지를 공중에 만들어냈다.
"나는 서약을 관장한단다. 너와 내가 서약을 맺고, 그 서약을 내가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린다면 내가 여신임을 입증하는 게 될까?"
알파는 즉시 남자와 서약을 진행했다. 알파가 남자의 말을 듣지 않을 시 칼로 자신의 심장을 꿰뚫는다는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뭐든 명령해보렴?"
"……두 팔을 들으세요."
알파는 가만히 미소지을 뿐이었다. 남자가 당황하고 사람들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알파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두 팔을 들으렴, 인간아."
"네?"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남자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어? 어어?"
"서약의 갑과 을을 바꿔보았단다? 내가 갑, 네가 을. 너는 내 말에 따르지 않았으니 칼로 심장을 뚫어 자결하게 될 거야."
"자, 잠깐, 잠깐만요!"
남자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손에 거꾸로 쥐었다. 사람들이 헛숨을 들이키고 알파는 여유롭게 미소지었다. 남자는 어떻게든 반항해보았지만 결국 자신의 가슴을 단검으로 꿰뚫었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무리 내 능력이 보고 싶었어도 그렇지……인간 주제에 그렇게 건방지게 구니까 죽는 거란다. 네 성격을 원망하렴."
"으, 으아아악!"
몇몇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알파가 데이지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데이지 휘하의 호위병들이 그 사람들에게 일제히 칼을 겨누었다. 앞뒤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사람들이 머뭇거리자, 알파는 차갑게 말했다.
"나에게 죽을 거니? 아니면 다른 사람을 죽여 너희의 목숨을 챙길 테니?"
"……."
결국 사람들은 알파와 서약을 맺었다. 아케즈에서 천사 혹은 설녀로 불리는, 전 레블의 아카데미의 여교수 에레브와 그 동료들을 발견하면 죽이는 것으로. 불응할 시에는 마찬가지로 심장을 칼로 꿰뚫어 자결하는 것으로.
"아케즈로 넘어가서 교주의 말에 잘 따라야 한단다? 아니면 진짜 광신도들이 너희를 죽일지 몰라."
섬뜩한 알파의 경고에, 사람들은 몸을 떨었다.
모든 인간들을 데이지에 맡겨 돌려보낸 이후, 알파는 다시 베르노바를 살려내는 일에 집중했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9서클이라 그런지 반년이 한참 넘었는데도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베르노바를 구할오푼 정도 살려냈을 때, 데이지가 급보를 전해왔다.
"베타가 죽었다고 해요."
"……광신도들은?"
"대부분이 함께 죽었다고 해요."
알파는 턱을 쓰다듬었다.
"서약을 맺은 인간들이 왜 다 죽어나가나 했는데……베타가 아예 실패를 해버렸구나. 에레브가 혹시 베타의 정체를 알렸니?"
"아니요. 민간에 공개된 정보는 광신도들의 죄를 교주에게 묻는다는 거였어요. 무려 세 개국의 정부가 합심했고요."
"오르가니아도 포함이니?"
"그럴 리가요."
알파는 하아, 하고 한숨쉬었다.
"적어도 베르노바를 살려낼 때까지는 버텨줄 줄 알았는데……이러면 조금 불안하구나."
"얼마나 살리셨어요?"
"구할오푼 정도? 일주일 정도만 있으면 된단다."
"……일단 에레브의 애제자에게 에레브의 위치를 알려놓았어요. 아마 애제자와의 만남을 갖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될 거에요."
"고맙단다."
그리고, 하고 데이지가 말했다.
"에레브의 서클 개수가 의심돼요."
"의심?"
"첩보에 따르면 서클 여덟 개로는 불가능한 재주라고 해요. 아마 아홉 개가 아닐까 싶어요."
"……."
이렇게 된다면 베르노바가 살아나도 승기를 온전히 거뭐질 수 있을지 불투명했다. 아무리 9서클 최강인 베르노바라고 한들 마찬가지로 9서클인 에레브를 포함해 여러 명의 마법사가 달려들면 위험했다.
"악마를 되찾아와야겠는걸……."
악마.
악마만 되찾아온다면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린다.
에레브만 죽인다면 모든 일이 안정된다. 에레브를 따라다니던 일행들도 전부 멈춰서겠지.
"아직 부릴 수 있는 인간들이 남아 있니?"
"네……대충 이백 명 정도."
"그 인간들을 데려오렴. 다시 서약을 맺어야겠어."
데이지에게서 에레브에 대한 설명을 잠깐 들은 다음, 간밤에 사람들을 다시 불러모으고, 이번에는 서약의 내용을 조금 바꿔서 맺었다.
"이 인간들을 최대한 대륙 멀리 퍼뜨려놓으렴."
"지금 퍼뜨리면……내일 아침쯤에는 탁큰까지는 가 있겠네요."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모든 것을 동원할 때였다. 알파는 현재 자신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태인지 알았다. 마법도 쓸 수 없는 평범한 일반인, 그나마 죽은 생물을 되살리는 능력으로 베르노바를 살리고 있고, 황녀의 도움을 받아 몸을 숨기고 있다지만 오로지 그뿐이었다.
에레브의 성격은 새차게 타오르는 불처럼 드세고, 무엇보다 자주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걸 좋아한다. 알파는 이것을 이용하고자 했다.
우선 사람들을 대륙 넓게 산개해 민간인을 공격하도록 만든다. 에레브의 동료들은 기껏해야 오십이 좀 안 된다고 했으니 최대한 넓게 펼치면 각자 산개할 수밖에 없다. '광신도'들의 수가 가장 많은 곳으로 에레브가 올 테니……에레브를 오르가니아까지 끌어들여 죽이는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다.
저들에게도 정보력이 있다면 민간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그 사실을 전해받을 터. 그렇다면 베타와의 싸움이 끝난 직후인 지금이 적기였다.
알파와 인간들이 맺은 서약의 내용 중 일부는 이러했다.
'해가 떠오르고 그 이후부터 보인 민간인은 무조건 공격한다.'
따라서 해가 뜬 이후 서약과 연결된 인간들이 죽기 시작했을 때가 에레브 일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아케즈에서 차근차근 올라올 테니, 페토라르나 탁큰부터 정리하고 올라오리라.
거리가 멀수록 텔레포트의 효율이 떨어진다. 따라서 오르가니아에는 에레브가 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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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탁큰에서 잡은 사람들을 신문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빠르게 올라온 것이었기에 광신도들을 잡아서 족치는 거에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광신도 한 명을 붙잡아 손가락을 하나씩 분질러버리니 광신도는 쉽게 입을 열었다.
"우, 우리는, 교주님의 죽음에 항의하고 있을 뿐이다!"
교주님의 죽음에 항의하고 있을 뿐이라.
그렇다기에는 사상자가 너무 많았다. 일단 내가 탁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인과 펠이 아침 댓바람부터 광신도들을 잡으러 뛰어다니고 있었다. 수십에서 수백까지 활개치고 있어 잡는 데 애를 좀 먹었다던가.
그나마 약해서 다행이라고 나인은 말했다. 사상자는 총 백오십이 넘었다. 사망자는 적으나 일단 무력집단, 혹은 폭도가 백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일이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질렀냐는 물음에 광신도는 '교주의 죽음에 항의하기 위해'라고 대답했다. 나는 결박되어 벌벌 떠는 광신도를 앞에 두고 고민에 빠졌다.
'일단 알파가 저지른 짓인 건 확실할 텐데…….'
알파와 베타가 힘을 합쳤던 이유는 나라는 공동의 적이 있기 때문일 터. 베타가 죽었는데도 알파가 교주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을 부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여신들이 그토록 정이 깊었으면 애초에 이 지랄을 하지 않았겠지.
'알파가 아직도 베타를 도와줄 이유가 있나? 진짜 언니로서 동생의 복수를 한다는 건가? 이건 아닐 텐데.'
그토록 대립하고 있던, 심지어는 서로 목숨까지 노리던 년들이었다. 이제 와서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한다고? 이것도 말이 안 되었다.
그렇다면…….
'그냥 명분으로 세워둔 건가?'
간단한 해답이었지만, 이것 말고는 답이 보이질 않았다. 이 광신도는 아마도 오르가니아 사람. 데이지와 알파가 협력하고 있을 테니 데이지가 질타받는 일이 없도록 광신도의 신분을 세탁할 필요가 있었겠지.
오르가니아 국민으로서 활동한 게 아니라, 삼성교의 광신도로서 활동했다면, 아예 사라지지는 않을지언정 질타의 목소리가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이게 정말이라면, 알파가 데이지의 도움을 받아 베르노바를 살리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 데이지에게 무한한 지원을 받고 있으니, 이번에도 인간이라는 소모품을 이용해 우리의 발을 묶어둘 생각이겠지.
하지만 알파는 착각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광신도들을 상대하게 내버려두고, 나 혼자 오르가니아로 향해 알파만 잡으면 승리다. 서약이 사라지면 그 사람들도 더 이상 행동이 강제되지 않을 테니.
나는 붙잡아놓은 광신도는 전부 사지를 결박해 절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해놓으라고 일러둔 다음, 챙겨온 마나수정을 들이키며 텔레포트했다. 이것 말고도 가져온 건 여러가지 있다. 최대한 패배하지 않도록 노력할 심산이다.
내가 죽으면 전부 다 끝이다.
나도 끝이고, 로부르크, 카웅, 아타나시아, 다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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