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1)2부 108
꽤 오랜만에 사용하는 마법이라 감이 녹슬거나 좌표를 헷갈린 것일까? 아니었다. 적어도 아타나시아는 아케즈 내에서는 자유롭게 어디든 오갈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실패했는가.
아타나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부턴 달려가요. 인카르너."
무려 쉰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자동차를 만들어내고, 달렸다. 속도를 빠르게 해 자동차가 돌부리 따위에 걸려 덜컹거리지만, 자동차보다는 에레브가 더욱 소중했다.
마침내 마차대기소에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타나시아를 바라보고 얼굴을 구겼지만, 아타나시아 뒤에 대열을 맞추고 서 있는, 갑옷을 챙겨입은 무인들을 보니 기가 죽었다. 이들은 곧 달리기 시작했다. 자그마치 쉰 명이 대열을 유지하며 길거리 한복판을 달리는 광경이란 굉장히 비현실적이라서, 이따금 마주치는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피해갔다.
한참을 달리던 아타나시아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잡혔다.
"교회가 이상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니까! 광신도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어!"
"이보게, 설명을 해도 제대로 해야지. 무슨 일이길래 그래?"
"저 뒤에 산등성이에서 세브레를 상대로 싸움이 일어났어, 비명소리가 막 들려온다네!"
아타나시아는 바르게 판단했다.
'세브레, 교회를 치러 온 건가? 그렇다기에는 소문이 너무 멀리 퍼져 있는데. 여기는 산과는 완전히 반대편이야. 전투가 시작한지는 꽤 오래 됐고, 세브레가 얻을 수 있는 게 없는데도 산에서 싸운다는 건……교회를 함락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야.'
아타나시아는 최대한 생각을 복기했다.
'시간을 끄는 게 목적, 무엇을 위해? 시간을 끌어봤자 광신도들이 그쪽으로 집중될 뿐……광신도의 시선을 끄는 게 목적? 광신도의 시선이 산쪽으로 끌리면, 허술해지는 곳은 교회. 하지만 세브레 단원 혼자서 교회를 치는 건 불가능해……아니, 에레브 양과 아저씨가 있으니, 둘 중 하나가 교회로 온 걸까. 하지만 그래도 교회를 뚫기는 무리라는 것을 알 텐데?'
한참을 생각하던 아타나시아는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나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건가?'
이게 가장 합리적이었다. 얻을 수 있는 게 없는데도 산에서 농성을 벌이는 세브레, 교주가 교회에 없음에도 무작정 들어온 델라즈, 혹은 에레브. 그들이 향한 곳은 교회가 아니라 성대였다!
"──성대로 가요! 광신도들 상대하지 말고! 최대한 빨리!"
이들은 속도에 박차를 더했다. 이윽고 하나의 군집이 되어 거리를 돌파했다. 마침내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을 때. 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타나시아가 바라보는 세계가 느려졌다. 아타나시아가 의도한 게 아니었다. 본능, 혹은 다른 어떤 무언가가 아타나시아로 하여금 사고를 가속하게끔 시켰다. 아타나시아는 사고 가속을 유지시킨 채로 최대한 시선을 넓혀 상황을 파악했다.
에레브의 심장으로 질주하는 광신도의 칼.
"──안 돼!"
아타나시아는 마지막으로 남은 마나 전체를 다리에 집중시켜 빠르게 달렸다. 못해도 30m는 되는 거리를 1초도 안 되어 주파했다. 다리에만 적용시킨 탓에 분명히 근육이 파열됐을 테지만, 지금 그런 것이 문제이던가? 아니었다!
'칼을 막아? 안 돼. 막을 게 없어. 몸을 버릴까──이것도 지금 당장은 안 돼. 아케즈를 할양시키려면 통령인 나의 승인을 거친 서류가 필요해.'
아타나시아는 에레브에게 닿기 직전, 몸을 던져서 에레브를 품에 안고 굴렀다. 광신도의 칼은 바닥에 부딪혀 깨졌다. 아타나시아는 마나 가속을 풀고 바로 에레브의 몸에 실드를 둘렀다.
"아타나, 시아."
"에레브 양, 이게, 이게 무슨 일이에요. 왜 성대에까지."
"후아……다행이다. 진짜 목숨 건 보람이 있네. 일단 나 말고 저기 뒤에 있는 마타샤 좀 챙겨줄래요? 마나가 완전히 바닥나서 실드까지 풀린 것 같은데."
아타나시아는 뒷편을 곁눈질했다. 이미 쫓아온 정예군들이 마타샤의 안전을 확보한 뒤였다.
"당신이 저 좀 도와줄 게 있어서 데려오려고 왔는데, 아……저 새끼들이 눈깔이 뒤집혀서는 저한테 달려들더래요."
"왜, 그런 무모한 짓을."
"실마리가 보였어요. 제가 이길 수 있는 실마리가. 나 따라서 요관 좀 같이 가줄래요?"
에레브는 누운 상태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타나시아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선 뒤로 물러났다. 이미 자신의 마나도 거의 다 빠진 상태였다. 지금부터는 정예군들에게 맡길 때였다.
"아타나시아, 저 사람들은 누구에요?"
"……교회를 엎어버릴 거에요. 아예 모든 나라가 합심해서 파문령을 내리려고 해요."
"오르가니아는 아마 안 도와줄 텐데."
"네……오르가니아로부터는 도움을 얻지 못했어요. 로렌스도 제외에요."
"페토라르, 탁큰, 아케즈……세 나라가 성명문을 내서 교회를, 더욱 나아가 교주를 단죄한다……명분은요?"
아타나시아는 눈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대륙에 돌아다니며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광신도들의 죄를 교주에게 물을 거에요."
"오……나쁘지 않네요. 저도 그거 하려고 했는데 아, 거 참 저희는 그럴 자격이 안 되잖아요. 그냥 아타나시아 빼와서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잘 됐네."
둘의 대화는 이따금 소음에 묻혔다. 광신도들이 내지르는 비명이나 쇠가 부서지는 소리 따위가 잡음이 되어 흩날렸다. 하지만 둘의 시선은 확고해서,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타나시아는 에레브를 데리고 더욱 물러났다. 마타샤가 있는 근처까지 물러난 후에야 아타나시아는 에레브를 바닥에 뉘었다.
"아, 아타나시아. 저기 뒤에 산 있죠. 거기로도 몇 명 보내줘요. 아저씨랑 세브레 단원들이 광신도들 상대하고 있을 거에요. 이제 한 20분은 지났을려나 싶긴 한데……아저씨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불안해서요."
아타나시아는 즉시 다섯 명을 차출해내 산쪽으로 보냈다. 갑옷을 챙겨입고 날이 잘 서 있는 검으로 무장한 무인들은 광신도들을 쉽게 도륙낼 것이었다.
5분 정도가 지났을 때,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공원에 흩뿌려진 피들이 꽃이나 잡초 따위를 새빨갛게 물들었다. 이곳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사람들 중 핏물을 안 뒤집어쓴 사람이 없었다.
로부르크가 에레브에게 다가왔다.
"살아 있나?"
"예……어떻게든."
"네 몸 좀 아껴라. 왜 자꾸 네 몸 버려서 무언가를 쟁취해내려고 하는 거냐."
"하하……."
에레브는 멋쩍게 웃었다. 로부르크가 뒷편을 가리켰다.
"너 하나 살리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이 좀 많으니까, 나중에 인사라도 해라."
"……누구누구 있나요?"
"내 아들놈이랑 네 제자, 그리고 탁큰의 왕실 집사장과 시녀장들."
"……."
에레브는 표정이 굳더니, 침묵했다. 로부르크는 망설임없이 등을 돌렸다. 전해준 것만으로도 의리를 다했다.
"아타나시아. 같이 요관 좀 가줄래요?"
"첫 번째 요관을 뚫기는 무리에요. 에레브 양이랑 저, 아저씨가 힘을 합쳐도 그건 무리에요."
"아……그게 아니라, 아타나시아가 만나줘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아타나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만나줘야 하는 사람이요?"
"네. 놀라지 말고 들어요."
에레브는 한 번 심호흡하더니,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신 중 한 명인 델타가 노바의 몸에 깃들어 있어요."
"……네?"
"우리는 델타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했지만, 아타나시아 당신을 데려오는 게 조건이래서 당신을 데려가려고 해요."
아타나시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게 무슨……."
"세 번째 요관에 있었어요. 나 참, 그렇게 높은 곳에 있으니까 못 찾지."
"……정말, 제 어머니가 맞나요?"
"맞아요."
에레브의 말이 거짓인 것 같지는 않았다. 아타나시아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고 상황을 파악했다.
"교회에서 누구 나오는 사람은 없었나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교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주가 빠져나오지 않게끔, 이곳에서 방어하세요. 교주가 빠져나오는 게 확인되면 죽여도 좋아요."
"예."
이대로 교회를 뚫어내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무력을 쉽사리 사용할 수도 없었고, 사용한다 하더라도 교주가 작정하고 도망가면 잡을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교회 근처를 감시하며 도망가는 교주만 잡아내면 피해 없이 편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저희는 복귀할게요? 각하."
나인이 기웃거리며 물어왔다.
"저희는 정보망 돌려서 광신도들 죄들 정리해서 교회 탓으로 돌리는……그냥 선동을 해야 해서요. 지금이라도 복귀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더군다나 저희는 탁큰이잖아요?"
"……데려다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뭘요. 상부상조죠."
나중에 도움을 청하게 된다면 힘을 실어주길 약속해달라는 말에, 아타나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인이 물러가니 이번에는 로부르크가 찾아왔다.
"내 아들놈도 돌아가려고 한다."
"……전하께서도 돌아가시게요?"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이곳을 지켜야지."
로부르크의 의도가 훤히 보였기에, 아타나시아는 수긍했다.
"저는 세 번째 요관으로 향할 거에요."
"거긴 또 왜?"
"거기에 제 어머니가 있어요."
로부르크가 멈칫했다.
"……노바?"
"네."
"믿을 수 있는 정보냐?"
"에레브 양이 말해준 거에요."
로부르크가 이마를 짚었다. 요즘들어 이마에 손을 갖다 대는 일이 참 많다고 생각하며, 로부르크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간다. 카웅도 가겠지. 여기를 수비하는 병력만 남겨두고, 전부 간다."
"네? 굳이 그럴 필요는……."
"노바의 존재가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몰라. 꼭 이 두 눈으로 확인해봐야 한다."
아타나시아가 고민하는 사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비틀거리며 다가온 에레브가 말했다.
"갈 거면, 일단 산으로 돌아갑시다. 거기에 스승님이랑 세브레 단원들 있거든요. 그 사람들 죽으면 나 좀 슬플 것 같은데."
"무슨 소리냐 에레브. 세브레라면 악마 숭배 단체 아니냐."
"네……좀, 네……어떻게 되었는지 참 설명하기 어렵지만 지금은 같은 편이에요."
로부르크는 결국 다시 한 번 이마를 짚었다.
"스승님 모습이 좀 바뀌었으니까, 보더라도 놀라지 마요 다들."
산쪽으로, 정확하게는 요관으로 향할 사람들만 일부 차출해내 산으로 향했다. 이미 광신도들 대부분이 도망친 것인지 산속에서 더 이상 고함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산을 타며 올라가니, 핏물이 군데군데 보였다. 에레브는 등골이 오싹했다.
'……이거 다 광신도들 피겠지?'
그럴 것이고, 그래야만 했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니, 나무에 기대 쉬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델라즈도 예외는 아니라, 에레브는 그에게 다가갔다.
"아재. 우리 왔어요."
"……아타나시아는."
"저 뒤에 봐요. 다 우리 돕겠다는 사람들이에요."
델라즈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확인하고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지랄을 한 보람이 있구나."
"세브레 단원들은 멀쩡해요?"
"네가 얼마나 독하게 길러놓았는지 한 명도 안 죽었다. 대신 중상이 몇 명 있길래 치료했다."
"고마워요."
에레브와 아타나시아를 포함한 모든 마법사들이 마나 수정을 복용했다. 마나가 채워지는 것을 확인한 에레브 또한 나무에 기댔다. 아케즈에 들어온지 고작 30분은 됐을까 싶은데 힘이란 힘은 죄다 빠져나간 후였다.
"이년아, 사람들 데려와라. 요관 가자."
"네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