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5)2부 102
다음날 아침이 빠르게도 찾아왔다. 나는 이전과 똑같이 사람들에게 복습을 시켰고, 해가 어느 정도 떠올라 세상이 밝아지자 요관을 찾았다.
성흔 세 개.
"이번에는 저희도 안에 데려가주시면 안 될까요?"
"……여긴 저랑 아저씨도 죽을 수 있는 곳인데요?"
"아니면 저만이라도."
세피르는 막무가내였다.
"제가 세피르까지 지킬 수는 없어요."
"지켜주지 않으셔도 돼요."
"……여기서 죽으려고요?"
"아니요,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려는 거죠."
세피르가 저 뒷편, 사람들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돔에 갇혀서 열두 시간 가까이 멍때리는 것보단 위험해도 들어가보는 게 나아요. 저를 지켜주시지 않으신다고 해도, 결국에는 마물을 잡고 함정을 돌파하실 거잖아요? 그럼 별로 상관이 없는 게 아닐까요."
"땅이 꺼지거나 그러면 어떡할래요."
"……살려주세요?"
나는 세피르를 삐딱하게 노려보았다.
"솔직하게 말해요. 여기 뭐 있죠. 안에 들어가서 찾으려고 하는 거죠."
"으음……."
세피르는 시치미를 뗐으나, 델라즈가 만들었던 봉을 똑같이 만들어내 들이밀자 새하얗게 질려선 대답했다.
"사람, 들끼리 어제 대화를 해봤는데요……."
"네."
"그 홀이라는 걸 저희도 써볼 수는 없을까, 싶어서……."
안 될 건 없겠지만, 이 사람들의 욕망이 뭔 줄 알고?
사람의 욕망은 자기 자신마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사람의 자아보다 훨씬 밑바닥에 깔려 있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뭘 욕망할 건데요?"
"강해지고 싶다?"
"……역시 안 돼요."
세피르가 울상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첫 번째, 정말 내가 생각하는 욕망이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욕망인지 확신할 수 없다. 우선 내 경우에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홀에 부딪혔지만 생뚱맞게 여자가 되어버렸다. 첫 번째 요관의 홀 말고는 전이 능력이 없는 것 같아서, 그 욕망 바로 다음으로 내가 갖고 있는 욕망을 들어준 것 같은데…….
요컨대, 나 자신의 욕망을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두 번째, 홀이 욕망을 들어주는 방식이 괴팍하다. 델라즈의 경우에는 강해지고 싶다고 빌었지만 여자가 되어버렸다. 홀의 작동 매커니즘은 아마도 홀의 능력이 되는 대로 사용자의 욕망을 어떠한 결과로 실현시켜주는 것.
달리 말해, 결과를 위해서라면 과정이 어떻든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으음…….
'악마, 이 사람들한테 힘을 나눠줄 수 있어?'
'안 돼. 마법사들이면 모를까 무인들은 불가능하다.'
얘도 마나에서 서클을 뽑아내는 재주는 없는 모양이었다. 인체 연성은 가능하면서 그런 건 안 돼? 얘도 참 이상한 놈이다.
'네 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야?'
'모른다.'
시발.
'왜 그걸 몰라?'
'……너는 네가 얼마나 빠르게 달릴 수 있는지 수치를 알 수 있냐?'
'너도 그럼 테스트를 해보면 되잖아.'
'무슨 방법으로?'
'주술을 마구 써본다든지?'
어째서인지 악마의 한숨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주술이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다. 이게 만능이었으면 그냥 이계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소환해 역으로 이 세계를 침공했겠지.'
'음……그것도 그런가?'
'불가능한 것에 매달리지 마라.'
악마는 깔끔하게 거리를 유지했다. 더 말을 걸었다가는 뭔가 욕이라도 얻어먹을 것 같아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세피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안 돼요. 방금 악마랑 대화해봤는데 별로 내키지를 않네요."
"그럼……그냥 구경만 하는 건 될까요?"
"될 리가요. 위험하다니까요?"
이 아가씨는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개소리 좀 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려는 그때.
"저를 정신세계에 초대해주세요."
"……."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해왔다.
"……정신세계?"
"네. 에레브 님이 악마랑 멀쩡히 대화할 수 있다는 건, 저도 악마를 통해서 에레브 님 머릿속에서 바깥을 볼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뭔가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악마, 가능해?'
'네 동의만 있다면 가능하다. 하지만 마나 운용의 효율이 조금 떨어진다. 연산 속도가 느려진다는 거다.'
'그거 마나량으로 커버가 돼?'
'사고를 가속하면 되긴 된다.'
어차피 수십 개씩 챙겨온 마나수정이니까…….
"알겠어요. 머리 이쪽으로 대요."
"와아,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저 잔다고 해놓을게요."
"그래요……."
세피르의 정신을 내 머릿속으로 흡수했다. 옆에서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델라즈가 툭 물어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냐?"
"……그냥?"
감정이랑 이성은 구분해야겠지만……아직까지도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나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사람이지만 이성만을 사용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
이번에도 결국 그런 것이겠지.
사람들에게 세피르가 촉수 괴물에게 당할 뻔했던 트라우마가 재발돼서 쓰러졌으니 잘 보살펴달라고 일러둔 후, 중문으로 들어갔다.
이 중문 역시 네 번째 요관보단 넓었다. 순번이 높아질수록 요관의 크기가 커지는 건가? 대처하기는 쉽겠지만 시야를 넓게 챙겨야 해서 조금 별로인데…….
중문을 지났는데.
"……."
"……."
나와 델라즈는 둘 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요관 내부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마물은 다 어디로 갔는지 없고 함정의 자국도 없고, 무엇보다 방이 여기서도 보일 만큼 가까웠다.
"……함정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지. 저 방 자체가 속임수일 가능성도 있고."
"하지만 저 방 말고는 다른 길이 안 보이는데?"
"아니면……원래 이런 곳이라든가."
마나를 조금 앞으로 흘려보냈다. 딱히 느껴지는 건 없었다.
"원로원은 여기 들어와본 적이 아예 없어요?"
"베르노바가 돌파하지 못할 정도면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 발도 안 들였다."
"베르노바가 돌파하지 못할 정도면……아."
그때 베르노바는 8서클이었겠지만, 지금 세 번째 요관은 걸어다닐 수만 있다면 돌파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해보인다. 그렇다면 요관 안에 있는 것들이 사라진 게 아닐까.
천물토벌.
"아직 살아나지 못했네요. 여기 애들은 서클이 엄청 높나보다. 그래서 베르노바가 통과하지 못했던 거고."
"넌 대체 몇 번째 요관에 도전해왔던 거냐?"
"그러게요. 요관은 여섯 개인데 어째 내가 도전한 건 몇 개 없어보이네……."
6서클인 오크와 7서클인 오룡이 이미 리젠이 됐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애들은 8서클 내지는 9서클…….
끔찍하군.
일단 조금이라도 빨리 마물이 생기기 전에 돌파하는 게 옳았기에, 와즈로 빠르게 날아서 방 입구까지 도착했다. 방 안으로 마나를 흘려보냈는데.
"──무기 만들어요, 아재. 누구 있다."
"……."
베르노바와는 정반대로, 매우 순백한 마나가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또 마법사는 아닌 것 같은데…….
나 또한 무기를 꼬나쥐고 방으로 들어갔다. 석단 앞에 누군가가 쭈그리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
"……."
나는 델라즈에게 고개를 끄덕여 괜찮다는 의사를 전한 후, 조심히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온통 몸이 새하얀 여자.
아마도 노바.
베타도 그랬지만, 온몸이 새하얀 건 여신들 종특인 것 같다. 내 머리가 하얗게 물든 것도 여신의 영향을 받은 걸까.
"노바."
"……."
"아니, 델타."
그제야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는 것이, 방금 전까지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델타, 맞지?"
"……."
여자가 손을 가볍게 휘저으니, 갑자기 방 구석에서 수룡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함정임을 깨닫고 나가려고 했지만, 이미 벽으로 가로막힌 후였다. 못 부술 정도는 아니지만, 이걸 부수려고 마나를 쏟아부으면 나한테도 영향이 온다.
"에레브, 네가 해라. 난 물난리를 막아보마."
델라즈는 우직하게 마나를 쑤셔넣어 수룡들을 그냥 물로 만들었다. 나는 노바에게로 다가가 쭈그리고 앉아 시선을 맞추었다.
"델타. 너는 인간들을 사랑하지?"
"……."
"인간들은 현재 미증유의 위기에 봉착해 있어. 알파는 베르노바를 살려서 베타를 죽이려 들고, 베타는 교회의 광신도들을 이용해 우리를 죽이려고 하지.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거라는 건 알 거야. 우린 그걸 막으려고 해."
델타의 눈빛은 아직도 흐리멍텅했다.
"너 말고 다른 여신들을 모두 죽이려고 해. 작정하고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문제는 여신들을 죽이면 세계가 붕괴한다는 거야. 그럴 일이 없도록 세계를 받쳐줄 신이 필요해. 그게 너야."
"……."
"어차피 베타한테 휘둘릴 뿐이잖아? 베타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 거지 딱히 천물토벌을 일으켜 사람들을 학살하고 싶은 건 아니잖아. 우리를 도와줄 수 있겠어?"
델타가 다시 손을 휘저었다. 벽으로 막혔던 입구가 열리고, 종아리까지 차올랐던 물이 빠져나갔다.
"……내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말해보렴."
"셋 째가 되기 싫어한다고 들었어. 알파와 베타를 죽이면 네가 첫 번째가 되고, 너 혼자 평화스럽게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거야."
"인간으로 현현한 시점에서, 그건 불가능하단다……."
델타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우리는 신이지만, 결국 지금은 인간에 불과하단다. 다시 여신으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해. 언니들고 그걸 아니까 어떤 수를 써서든 서로를 견제하고 너희를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닐까……."
"차선책으로 인간이 대량으로 학살되는 건 막을 수 있어. 아타나시아와 함께 국정을 다스리면서 광신도들을 몰아내면, 적어도 아케즈는 평화로워."
델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타나시아가 살아 있니?"
"살아 있지."
"베르노바가 죽었을 때 같이 죽은 줄 알았는데……."
얘도 어지간히 인간 세상에 관심이 없나보군. 몇 년 동안 요관에 짱박혀 있었으니 당연한 건가.
"……도와주겠지만, 조건이 있단다."
"조건?"
"그래, 언니들을 배신하는 건 위험부담이 크단다."
델타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우선, 너희가 언니들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단다. 앞으로의 계획이 뭔지 말해보렴."
"에레브, 기다려라."
대충 구상 중이었던 계획을 입에 담으려고 하자, 델라즈가 막아섰다.
"왜요?"
"네가 말하는 그 계획을 베타한테 갖다 바치면 어떡하냐."
"……."
나는 델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델타는 대화를 가만히 듣더니, 피식 웃었다.
"너희를 죽이려면 진즉에 죽였단다……. 요관을 들쑤시고 다니는 걸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니?"
"……."
"다른 요관의 마물은 내버려두고 높은 순번의 요관의 마물들만 살려서 너희를 죽일 수도 있었단다. 나는 너희와 동료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가 되고 싶은 거니 그냥 말해주렴."
델타의 눈동자는 아까보다는 선명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베타한테 있는 건 광신도들밖에 없어. 그것도 베타의 무능력함이 입증되면 쉽게 부릴 수 없게 될 거야."
"그때까지 그냥 기다리지, 뭘 굳이 이러니?"
"베타가 알파를 견제해줘야 하니까."
베타가 없으면 알파는 곧바로 베르노바를 살려내는 데 집중해 아케즈로 향할 거다. 그걸 막기 위해 우리는 베타가 수적 열세에 몰릴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베타의 자리를 메꿔야 한다.
"광신도들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지만, 문제는 그놈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거지. 나와 아저씨라면 쉽게 정리할 수 있겠지만, 그럼 나라가 망가져버려. 그건 너도 원하지 않잖아."
"협박하는 거니?"
"사실을 말할 뿐이야. 네 도움을 받아서, 마물들을 이용할 생각이야. 마물들을 이용해서 광신도들만 처리해줘.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
델타가 고민에 빠졌다.
"너는 이계를 침공하는 게 목적이 아니잖아. 이계를 침공하는 게 목적이면 원로원에게 명예를 수여해줄 이유가 없었어."
"……좋아, 대신 조건이 있단다?"
또 조건이 있어? 나는 인상을 썼다.
"무슨 조건?"
"아타나시아와 만나게 해주렴. 내가 요구하고 싶은 건 그거 하나란다."
"……뭐?"
아타나시아가 갑자기 왜 나와?
"베르노바를 죽인 것에 대한 복수……?"
"그럴 리가 있겠니?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으니 괜한 추측 말렴. 그래서, 어떻게 할 거니?"
"……우리가 그걸 거절해도, 요관 바깥으로 내보내주는 건가?"
"그럴 리가."
델타가 희미하게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나는 너희를 적대할 뿐이란다."
"너를 죽인다면?"
"그럼 너희는 영영 못 빠져나가게 되겠지? 또한 통제를 잃은 마물들은 미쳐 날뛰어서 너희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찢어발길 거란다."
아니 시발 무슨 여신이라는 새끼들이 자꾸 인간을 갖고 협박해 씨발.
"……인간을 사랑하는 거 아니었어?"
"인간을 사랑한단다."
"근데 그렇게 협박해도 돼?"
"착각하지 말렴. 나는 인간들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델타가 잘만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타나시아를 데려오렴."
"……알겠어. 대신 부탁을 하나 더 들어줘."
델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탁? 무슨 부탁 말하는 거니?"
"사람 하나 좀 살려줘."
"……아타나시아가 혹시 죽었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고, 개인적으로 볼일이 좀 있어서. 서클도 4서클이야. 금방 살릴 수 있지 않아?"
"……뼈를 가져오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깥으로 나왔다. 아직 마물들은 살아나지 않았는지 역시 깨끗했다. 나는 와즈로 빠르게 빠져나왔다.
왜 이렇게 빨리 나왔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을 제치고, 세피르는 아직도 깨어나지 않았냐고 물으며 머리에 갖다 대니, 세피르가 가늘게 눈을 떴다. 조금 더 누워 있으라고 눈짓한 후 요관 바깥으로 나왔다.
'악마. 공격이나 고문에 관한 주술, 당장 쓸 수 있는 거 있어?'
'감각을 교란시킬 수 있다. 통각을 증폭시키거나, 환각을 보게 만들 수도 있지.'
'사고 가속처럼 느끼는 시간을 엄청 느리게 만들 수도 있나?'
'마나 때려박으면 불가능하진 않다. 다 내 도움을 받아서 네가 직접 하는 거다.'
그렇단 말이지.
"에레브."
"……."
"……설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걸 할 생각이냐?"
나는 방긋 웃었다.
"네. 아마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