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6)2부 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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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날 훈련이 끝났다. 정확하게는 몸이 버티질 못하길래 도중에 중단했다. 몸을 막 우락부락하게 키울 필요는 없고,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만 성장하면 되니까. 광신도라고 해서 존나 강하고 그런 건 아니다. 그들은 여신에게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이고 사람도 거리낌없이 죽일 수 있다는 마인드를 갖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건 마인드였다.
'내일부터는 정신교육도 시켜야겠네.'
영 비실비실해서 못 쓰겠네. 어째서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고 적들을 죽여야 하는지 머릿속에 때려박을 필요가 있어보였다.
델라즈가 돌아온 건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다.
"어디 다녀왔어요?"
"페토라르."
"뭐래요?"
"협력은 불가능하다. 대신 물자는 제공해주겠다."
델라즈가 들고 온 바구니를 가리켰다.
"며칠은 먹을 수 있을 거다. 잠은……너랑 내가 인카르너로 고생 좀 해야지."
"그래야지……."
마나 수정은 충분히 챙겨왔으니, 문제 될 건 없다. 게다가 물자라고 함은 마나 수정도 어느 정도 포함은 되어 있을 거고.
밤이 찾아왔다.
어둠은 인간에게 본능적인 공포를 초래한다. 혹시나 사람들에게 패닉이 오거나 그런 상황은 막기 위해 풀을 밀어버리고 흙바닥에 모닥불을 뗐다. 야영지가 완성되었다. 혹시 몰라 나랑 델라즈가 교대로 막까지 넓게 펼쳐 둘렀다.
나는 화톳불에 의지해 책을 읽었다. 옆에서 얌전히 고기를 뜯어먹던 델라즈가 나를 툭 쳤다.
"웬 책이냐?"
"아타나시아한테 부탁한 거에요. 내 마나를 이 세계에 남길 수 있나 싶어서."
"그건 왜?"
"애들이 나를 그리워하지 않겠어요? 마나라도 남겨줘야지."
사실은 전혀 다른 이유이지만.
악마가 듣고 있을 테니 말할 수 없다. 사실 방금 발언도 꽤나 아슬아슬했지만, 다행히 악마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은 듯했다.
"……내가 쓴 건 아니군."
"저자가 아예 안 적혀 있어요."
"어디서 구한 책인지도 모르냐?"
"뭐, 그렇죠."
아타나시아가 적어놓은 메모에는 사랑한다는 말 말고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후회, 하지는 않냐?"
"……."
나는 델라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도 델라즈가 원판은 괜찮게 생긴 덕분인지 여자가 된 지금도 충분히 예뻤다.
"나는 늘 후회해요."
"……."
"그런 내가 싫어서, 후회를 하더라도 무를 수 없게끔 일을 벌여요."
델라즈가 털썩 드러누웠다.
"그게 네 방식이었군."
"이미 지난 일 후회해봤자 뭐 해요? 미련 남겨봤자 좋을 거 없어서 이렇게라도 하는 거죠. 조금 과격하지만 효과는 좋아요."
"이번에 한해서는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이번에 실패하면 너는 영원히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나는 곁눈질로 주위를 살폈다.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대화하며 밥을 먹고 있었다. 이쪽의 대화가 새어나가진 않을 듯했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했냐?"
"돌아가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니까요."
델라즈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뭐?"
"아저씨가 생각하기에도 어이없죠?"
나는 피식 웃었다.
"근데, 난 진심이에요. 돌아갈 수 있으면 좋고, 못 돌아가더라도……납득은 할 수 있고."
"그럼 이 지랄을 하고 있는 의미는 뭐냐."
"발악은 해봐야죠. 돌아가려고."
"네가 지면 네 힘은 고스란히 빼앗긴다. 여신이 빡침을 거두지 않으면 넌 그냥 죽어버릴 수도 있어."
"여신이 자비롭기를 빌어야죠."
델라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너……미련이 남아 있구나."
"……."
"애들이랑 대화는 하고 온 거냐?"
나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칫했다.
"앨버트랑은 못 했네."
"나랑도 안 하려고 했잖냐."
"아, 그건 까먹은 거에요. 죄송."
"망할 년……."
나는 쿡쿡 웃었다.
"네가 돌아갈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해보마. 여신이라고 한들 현재는 인간의 몸을 갖고 있다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다. 오히려 조금 쉬울 수도 있지."
"왜요?"
"네 말대로라면 베타는 아예 힘을 잃었고, 알파는 베르노바한테 판돈을 전부 걸었고, 델타는 요관 마물들 아까 우리가 밀어버렸잖냐."
그건 그렇긴 하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게 교회라서 이렇게 피신했을 뿐이다.
"베타만 먼저 잡으면 일은 수월하게 풀린다."
"그렇죠. 하지만 무슨 수로?"
"두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교회에 대한 신실감을 없애거나, 아니면 교회의 움직임을 막아버리거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둘 다 잘 모르겠는데."
"첫 번째는 베타가 힘을 잃은 걸 이용하는 거다. 더 이상 여신이 아니라 일반인이니 교회를 이전처럼 주무를 수는 없겠지. 베타의 무능함을 증명하면 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는요?"
"광신도들이 저지른 죄를 전부 교회에 떠넘기는 거다. 교회 자체를 범죄 단체로 규정해서 단죄하는 거지."
델라즈가 어깨를 으쓱였다.
"두 번째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러네. 불가능하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종교 단체를 악으로 규정하고 단죄하면, 그 신도들은 어떻게 되냐. 불가능하다.
"일단은 걱정 마요, 아재. 우리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세브레 사람들 어느 정도 교육하고, 그리고 생각해요."
"……너무 대책이 없는 거 아니냐?"
"어차피 그거 안 하면 아무것도 못 해요. 그리고……베타를 암살하는 것 자체는 의외로 간단할지도 몰라요."
"어떻게?"
나는 나를 가리켰다.
"우리, 텔레포트 쓸 수 있잖아요. 좌표만 알아내면 가서 죽일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게 그렇게 쉽게 되겠냐? 교회가 아니라 다른 데 피신해 있겠지."
"시도해볼 가치는 충분하지 않나?"
그때, 악마가 말을 걸어왔다.
'불가능하다.'
'왜?'
'아마 만들어놓은 아티팩트들을 활용할 거다. 그중에는 네가 전혀 상상하기 어려운 것도 있을 거고. 예를 들면……텔레포트 좌표를 교란시킨다던가. 아까 느끼지 않았냐?'
'…….'
그러고 보니, 아까 아케즈 안에서 텔레포트가 제대로 안 되긴 했는데.
'쉬운 게 없구나……. 너는 뭐 할 수 있는 거 없어?'
'여신의 정신을 죽일 수 있다. 나 또한 신이니까. 그년들을 네 정신세계로 들여보내라. 내가 죽이겠다.'
그건 다행이군.
"……뭐 하냐?"
"아, 악마랑 대화했어요."
"그런 게 돼?"
"네 뭐, 되더라고요? 아직 익숙하지는 않긴 하지만. 우리 아케즈 안으로 자유자재로 텔레포트 안 된대요. 무슨 아티팩트를 쓰고 있을 거라는데."
델라즈가 한숨을 쉬었다.
"쉬운 게 하나도 없군."
"그러게나 말이에요."
"모르겠다. 최선을 다해보면 알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말고, 이제 좀 알려다오. 너에 대한 것들을."
"나에 대한 것?"
"그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내가 돌아가기 직전에 알려준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 거 참 깐깐한 놈일세. 그냥 좀 알려주면 어디 덧나냐?"
"그런 건 아닌데……."
"그럼 알려다오."
델라즈는 묘하게 막무가내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책을 아예 덮어버렸다.
나는 모닥불을 응시했다. 이따금 불똥이 튀며 흙바닥을 까맣게 물들였다. 따뜻했다.
"……일단, 정말 나라는 사람에 대한 것부터 알려줄게요."
무슨 이야기부터 하면 좋을까.
나의 인생?
"나는……좀 불행한 삶을 살았어요."
"……원래 세계에서도?"
"네. 원래 세계에서도."
나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나는 강간 피해자의 자식이었어요. 게다가 태어난 이후로는 다른 사람의 자식과 실수로 바뀌었어요."
"……."
"그걸 스물두 살이 되어서야 알게 됐고, 부모님은 날 쫓아냈죠."
"그래서 아타나시아를 그렇게 모질게 대했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반대에요. 오히려 나는 아타나시아에게 공감해서 아타나시아를 용서한 거에요."
"용서?"
"네. 아무리 썩어빠진 부모라고 한들, 나를 버렸다고 한들……수십 년간 키워준 은혜는 남아 있어서, 미련이 남으니까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날 버린 부모가 아직 보고 싶긴 해요."
"널 키운 부모가 아니라, 네 진짜 부모는?"
내 진짜 부모.
강간 피해자인 모친과, 성범죄자 부친.
"둘 다 밉죠. 엄마는 날 화장실에다가 버렸고, 아빠는 성범죄자인데.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어요."
"……."
"키워준 은혜는 잊지 못해요. 낳아준 은혜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하고 나는 말을 끊었다.
"부모님은 그래도 날 한 푼도 없이 쫓아내기는 조금 그랬는지 돈은 조금 쥐어줬어요."
"얼마?"
"레블로……몇천 레블 정도?"
"얼마 쥐어주지도 않았군."
"아무튼……우리 세계에는 코인이라는 게 있거든요?"
델라즈가 고개를 갸웃하는 게 보였다.
"코인?"
"네. 그러니까……가격이 계속 달라지는 화폐에요. 그 코인 한 개가 어제는 1000레블이었는데, 오늘은 10000레블이고 그럴 수가 있다는 거죠."
"뭐 그딴 게 다 있냐."
"물론 하루 단위로 그러진 않고요. 저는 그 코인이 등장한지 얼마 안 됐을 때 투자를 했고, 성공했어요. 레블로 1200만 레블을 벌었고요."
델라즈는 침묵했다. 그만한 돈은 잘 실감이 안 되겠지.
"그렇게, 이 세계로 따지면 신분증에 돈이 들어오는 걸 보고 만세를 삼창했는데……갑자기 동굴에 떨어졌어요. 그게 첫 번째 요관이죠."
"……."
"베타가 말하는데, 그때 제 세계에서 그 시간에 가장 행복한 사람을 소환했는데, 그게 저라더래요? 미친 년들."
"미친 거 맞군."
나는 열없이 웃음을 토해냈다.
"맨 처음 떨어졌을 때는 돌아가려고 바로 요관을 공략해보려고 했는데……될 리가 없죠. 나는 결국 현실이랑 타협해서 모험가 길드에 등록하고, 돈을 벌면서 요관에 도전하기 시작했어요."
"서클은 혼자 올린 거냐?"
"그렇긴 한데, 이것도 베타한테 버프를 받아서 7서클을 빨리 단 건지, 아니면 그냥 내 재능이었던 건지 잘은 모르겠네요."
나는 서클 아홉 개를 공중에 띄웠다. 델라즈가 그걸 보더니 중얼거렸다.
"9위계, 10위계 술식지도 구해봐야겠군."
"왜요?"
"여신을 죽일 마법이 있을지도 모르잖냐. 서클 접기 아직 되냐?"
서클을 접어보았다.
"네, 문제 없네요."
"그래……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하자. 그래서, 네 얘기 좀 이어서 해봐라."
"끝이에요. 5년 동안 요관에 끊임없이 도전했어요. 7서클을 달고는 있어도 마나량이 원체 적은지라 요관 돌파는 꿈도 꿀 수 없었고, 아저씨도 알다시피 나라의 지원을 받으려면 레블에서 못 나가잖아요."
"그렇지."
"그러다가 이제, 돌파를 성공해서 홀을 딱 만졌는데, 눈 앞에서 사라지더라고요. 멘탈이 나가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는데……아저씨 저택이었죠."
이제는 추억이다.
"네 욕망이 여자가 되는 거였냐?"
"……아예 틀린 말은 아니긴 해요? 몸 팔고 사는 여자들이 잠깐 부러웠을 때가 있어서."
"이놈아, 그런 걸 부러워하면 쓰냐."
"하지만 그땐 정말 힘들었는걸요."
델라즈가 쯧, 하고 혀를 찼다. 하지만 저런 모습으로 혀를 차니 그냥 귀엽게 보였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아저씨 기억해요? 나 고기 정신없이 뜯어먹던 거."
"기억한다."
"그때 너무 배고파서 그랬어요. 5년 동안 먹은 게 돌빵이나 물처럼 묽은 수프밖에 없어서."
"네가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것도, 그거 때문이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5년 동안 거지 같은 것들만 먹다가 제대로 된 밥을 먹기 시작하니까 푹 빠진 거죠. 이건 원래 세계 돌아가서도 비슷할 것 같아요."
"……."
"아저씨 덕분에 아카데미 교수직까지 맡아보고……이건 아저씨 때문은 아니지만 강간도 당할 뻔했고, 뭐 이제 와서는 그냥 한여름의 추억이지만요."
비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게 끝이에요. 이 뒤에는 아저씨도 아는 거."
"……그럼, 네가 원래 살던 세계는 어떠냐."
"원래 살던 세계?"
"그래. 너는 여기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돈을 위해 돌아가려는 거잖냐. 대체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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