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0)2부 087
저런 치졸한 새끼. 나는 눈을 꼭 감았다.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별안간 굉장히 어지러워졌다. 세계가 미쳐서 디스코팡팡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헛구역질이 일었지만 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손이 안 움직인다. 아마 목이 잘린 것 같다. 결국 이것저것 전부 게워내다가, 어느 순간 딱 멈췄다.
"다 됐니?"
"어……네."
"악마가 또 너 죽였니?"
"아마도요……? 목이 잘린 것 같아요."
베타가 한숨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걔는 너무 야만적이야. 나랑은 안 어울려."
"그런가요……."
"그럼 이제, 악마를 나에게 종속시켜주렴."
"……어떻게 하는 건가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악마한테 물어보렴."
"아……그럼 그 전에, 뭐 하나만 실험해봐도 될까요?"
"뭐?"
"서클이 복구되었으니까, 마법을 정상적으로 쓸 수 있는지 확인 좀 해보고 싶어서요."
베타는 흔쾌히 수락했고, 나는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던 지식들을 끌어올렸다. 가장 간단한 것부터.
"……푸에고."
화르륵, 하고 손에 불이 붙었다. 하지만 전혀 뜨겁지 않았다. 이 느낌도 진짜 오랜만이네…….
"으음……아쿠아, 일레트로닉."
5원소 전체가 제 힘을 발휘했다. 일단 문제는 없는 듯했다.
"와즈."
무언가가 내 옷 너머에 자라났다. 리젤까지 쓴 다음에 날개를 퍼덕이니 날아오를 수 있었다. 이 이질적인 느낌이 진짜 너무 그리웠다.
"와, 와……씨발. 와……."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았다. 8서클을 달고서는 아무것도 못 해봤으니 사실상 7서클에서 바로 9서클이 된 건데, 와즈가 이렇게 편하게 써지는 거였나. 진짜 씨발. 베르노바 씨발 좆 같은 개새끼. 그 새끼는 죽일 수 있으면 한 번 더 죽일 거다.
나는 가져온 배낭을 열어 마나수정을 복용했다. 느낌이 아무래도 악마가 말한 것처럼 마나량이 줄어든 모양이었다. 몇 개 먹으니 배불렀다.
"그건 뭐니?"
"마나수정이요."
"그런 건 왜 가져왔니?"
"마법 엄청 쓰고 실험해봐야 하니까요. 달라진 게 있는지."
"이상한 면에서 철두철미하구나. 마음대로 하렴."
베타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나는 마음 편히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을 하나하나 실천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우선 마나를 운용한 신체 강화와 얇은 장막을 두르는 것부터, 낮은 서클부터 높은 서클까지의 마법 사용까지.
확인하며 나는 베타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졌다.
"뭐 좀 여쭤봐도 되나요?"
"응?"
"몇 년 전에 아카데미에서 테러가 일어났다고 하는데, 베타 님과 연관이 있나요?"
베타가 고개를 갸웃했다.
"식당에서 몇 명 죽은 거?"
"네……알고 계셨네요."
"모를 리가. 덕분에 나도 고생 좀 했는걸. 원래 있던 교주를 내쫓고 내가 그 자리를 차지했으니, 나를 받들지 않겠다는 놈들이 나에게 대항하는 수단으로 아카데미에 테러를 저지른 거지."
알고 있었다는 건가.
후…….
"왜 막지 않으셨나요?"
"응? 내가 그걸 왜 막아야 해?"
"……."
방금 질문의 대답으로 확신했다.
얘는 안 된다.
"그럼 혹시, 플룻래빗에 대해 아는 게 있으신가요?"
"마물에 대한 건 나중에 델타 만나면 물어보렴."
아쉽게도 정보를 얻지는 못하는 건가……. 끝까지 플룻래빗의 의문은 풀리지 않을 듯하다.
"아, 그리고. 베르노바 시체는 어떻게 했니?"
"네?"
"시체는 어떻게 처리했니?"
"불태운 다음에 땅에 묻었어요."
베타의 표정이 굳었다.
"뼈는? 뼈는 어떻게 했니?"
"같이 묻었겠죠?"
"……어디에?"
베타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나까지 덩달아 심각해졌다.
"성대에요."
"저런……."
베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로 사람 시켜서 확인해보렴. 거기에 아직도 뼈가 있는지."
"네?"
"우리는 뼈가 있으면 죽은 것도 되살릴 수 있단다."
뭐?
"요관의 마물들이 되살아나는 거,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니? 어째서 죽여도, 죽여도 다시 재생되는지."
"……."
"우리는 죽음을 관장하지는 않지만 되살릴 힘 정도는 갖추고 있단다. 서클이 높을수록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베르노바가 살아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건가요?"
"그런 거지. 내게 종속시키고 바로 가서 확인하렴. 중요한 문제니까."
"후……."
씨발.
"인카르너."
나는 장검을 만들어냈다. 내 손에 익은, 지금까지 수십 번, 혹은 수백 번은 만들어봤을 법한 장검.
그리고 베타에게 겨누었다.
"뭐 하는 거니?"
"제가 만약에……여기서 베타 님을 죽이고 델타 님에게로 간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베타가 코웃음쳤다.
"해보려무나, 오만방자한 꼬마 인간아. 장담컨대 너는 물론이고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델타가 죄다 죽여버릴 거란다."
오히려 베타는 칼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란다. 너도 알겠지만 일부 개체는 번식욕구가 상당해서, 인간 여자를 씨받이로 삼는 경우도 많지. 네가 소중히 여기는 여자들은 그 아이들의 성적 노리개가 될 거고, 네가 소중히 여기는 남자들은 그 아이들의 먹이가 될 거란다."
"……."
"한 번은 봐줄게. 네 마음이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좀 치우렴?"
아예 죽이기에는 아무래도 이것저것 걸리는 게 많다. 예를 들어 자기가 죽는 것을 트리거로 어떠한 장치를 마련해놓았다든지……여신인 만큼 인간인 내가 따져볼 수 없는 게 너무 많다.
그러니, 당장 죽이는 건 포기한다. 죽이는 건 죽여도 된다는 확인 후에.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쳐 배낭을 들었다.
"……뭐 하니?"
"베타."
나는 씨익 미소지었다.
"엿 먹어."
그리고 크게 소리쳤다.
"노바, 텔레포트!"
마나가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전경이 바뀌었다. 첫 번째 요관으로 향할 심산이었지만 마나가 모잘라 중간에 끊긴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마나수정을 복용하고 다시 첫 번째 요관 쪽으로 텔레포트했다. 두세 번쯤 반복하니까 성흔이 한 개 나 있는 요관 입구에 도착했다.
"노바, 인카르너."
명예를 사용해 반투명한 푸른 칼을 만들어냈다.
내 계획은 이렇다.
베타를 통수치고, 그냥 첫 번째 요관으로 냅다 달려가서 홀을 이용해 전이한다. 그럼 그냥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물론 개빡친 베타가 델타에게 나에게 새긴 표식을 지우라고 하겠으나──그러니 그 이전에 내가 요관을 통과하면 된다.
"와즈."
입구로 들어갔다. 눈에 익은 모습의 동굴이 나를 반겼다. 내가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마주한 동굴. 그때는 요관이 아니라 일반적인 동굴이었지. 아마 델타가 마물을 다 빼놓았을 거고.
- 키아아아악!
"──읏!?"
나는 날아가다가──황급히 방향을 틀었다.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문제가 없는 듯해서, 몸을 가까이 붙여서 마물을 죽여버린 후 다시 날았다.
생전 처음 보는 마물들도 산재했다. 아무래도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내가 첫 번째 요관에 들어온 건 처음인 모양이었다. 마물의 약점이고 나발이고 하나도 모르겠지만──어차피 이 마물들은 나를 죽이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기에 강경돌파했다.
- 크라플라!
"후."
과연 첫 번째 요관. 아직 중문을 지나기도 전인데 오크 군락이 존재한다니. 하필이면 점점 동굴의 천장이 좁아지고 있던 시점이라, 나는 마나를 끌어올려 읊조렸다.
"──푸에고."
새빨갛다 못해 검붉은 화마(火魔)가 오크들을 덮쳤다. 순식간에 졸개들이 새하얀 백골이 되어버리자 오크 킹이 벌떡 일어나서 나를 향해 달려왔다.
- 크아아아!
하지만 기껏해봤자 6서클. 전혀 내 상대는 아니었다. 날개에 힘을 실어 빠르게 날아들어 목을 베어냈다. 칼에서 피냄새가 물씬 풍겨오지만 오히려 그래서 즐거웠다. 지금까지 당하고만 살면서, 보호받으며 살면서 얼마나 억울했던가.
강함은 스스로 증명해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쌓아올린 강함이었다. 비록 베타의 힘으로 버프를 받았다고는 해도──결국에는 내 힘인 것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마물을 베어내는 감각! 풍겨오는 혈향! 빠르게 바뀌는 풍경! 이 모든 것이 내가 사랑했던 광경이었으며──지난 1년간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갑작스런 상황 변화에 놀랄 법도 하지만 내 신체 곳곳은 오히려 강렬한 자극에 환희하며 마나를 몸 곳곳에 퍼뜨렸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여서!
결국에는 수십 수백 구의 시체 위에 오롯이 서 있는 자가 나 혼자가 되었을 때──나는 비로소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시간이 생명이라 비록 그러지는 못해도 날아가면서 베어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바람이 시원했다.
진짜 바람이 부는 게 아니라, 내가 빠르게 나아가며 공기와 부딪히는 것이었다. 앞머리가 나풀거리고 눈이 텁텁해진다. 천장이 한없이 낮아지고 벽이 한없이 좁아져 중문(中門)에 도착했다.
"……."
푸른색이었던 칼이 붉은 색이 되어 있었다.
"노바, 인카르너."
칼을 없애고 다시 만들어보았지만, 푸른색은 여전히 없었다.
"후우……존나 빠르네."
명예가 사라졌다.
노바──델타가 없앤 모양이다.
달리 말해──마물들도 본격적으로 나를 죽이려 들 거라는 소리지. 이대로 중문 안으로 들어가봤자 개죽음이다. 나는 미련을 털어버리고 다시 날아올랐다. 괜찮았다. 혹시 몰라서 한 번 해본 거였다. 이렇게 잘 풀릴 거라고는 애초에 생각도 안 했다.
요관 안에서는 텔레포트가 말을 듣지 않았기에 나는 마물들이 다시 살아나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빠져나왔다.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야 이 개새끼야! 난세를 선물해준다며!'
'아, 그냥 한 번 해본 거야. 걱정 마. 해줄게.'
'너도 알파랑 똑같은 년이다!'
'아니, 진짜 해줄게. 미안해. 화내지 마. 너 무섭단 말이야.'
사실 좆도 무섭지 않았지만 악마를 잠재우기 위해 서비스 한 번 해줬다. 예상대로 악마는 만족했는지 닥쳤다.
우선……내가 뭘 보고 듣는지까지는 확인할 수 있는 모양이네? 그럼에도 내 계획에 따라주고 있다는 건 내 생각까지는 읽지 못하는 듯하고.
나는 요관 입구에서 좀 떨어진 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
쉰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몸이 곤한 탓이었다. 지금 보니 땀까지 흐르고 있었다. 나는 기대감을 한껏 갖고 영창했다.
"세쉬!"
노폐물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푸에고!"
그리고 그걸 전부 불사르니, 몸이 깨끗해졌다. 와……대박이다. 진짜 씨발 이거 획기적이야.
아예 침대까지 만들어내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앞으로의 계획을 검토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모든 여신들을 적대하게 됐으니 꽤나 골치가 아파질 거다. 하지만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 내가 아끼는 사람들과 한 번씩 독대를 하고 왔다.
……델라즈랑 안 한 것 같긴 한데,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한 숨 돌리며 느긋하게 쉬고 있는데, 천천히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삐죽 내밀어 진동의 진원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표정이 확 썩었다.
"와……진짜 미친 년이네."
천물토벌, 발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