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억을 위해 아카데미 교수가 되었다-188화 (188/247)

(EP.188)2부 085

네튼과의 이야기를 끝마치고 나는 성대로 향했다. 1층 문을 열자마자 카우치에 앉아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세피르가 있었다. 꼬질꼬질한 게 어제랑 상태가 똑같았다. 입고 있는 옷이라던가, 머리 모양이라던가.

아예 집에도 못 돌아간 모양이다. 나는 한숨이 그득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세피르에게 다가갔다.

"세피르."

"……에레브 님?"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요?"

세피르가 고개를 푹 떨궜다.

"통령이 저 밖에 못 나가게 하던데요……."

"제 이름 대봤어요?"

"에레브 님이 오면 의논할 문제라고 일축시켰습니다……."

말끝마다 길게 늘어지는 걸 보니 잠도 제대로 못 잔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세피르를 톡 밀쳐 카우치에 눕혔다. 세피르는 눈을 천천히 감더니 이내 잠들었다.

나는 층계를 올라 아타나시아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아타나시아는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

"에레브 양……."

나는 페일리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타나시아 또한 다가가서 꼭 껴안았다. 아타나시아는 히잇, 하고 놀라더니 이내 나를 마주안았다. 아타나시아의 팔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에, 에레브 양……?"

"응……미안해요. 그냥 한 번 안아보고 싶었어요."

미안하다고 말은 하지만 몸은 떨어뜨려놓지 않은 상태로 대화했다.

"무슨 일 있어요?"

"그런 건 아니고……."

너도 한동안 못 볼 것 같으니까요,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아타나시아는 나와의 이별이 아직 시간이 좀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기에 포옹 같은 것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것일 테고. 요컨대 마음의 준비를 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거다.

나는 지금부터 교회를 적대한다.

아타나시아는 일국의 통령인 만큼 나에게 우호적일 수 없다. 달리 말해……내가 모든 계획을 성공시키고 복귀하기 전까진, 아타나시아와 만날 수 없다는 거지. 그러니까 이건 이별포옹이다.

물론 아직 볼일이 남아 있긴 하니 시간은 조금 필요하겠지만.

그럼 체온도 다 나눴으니 이제부터 본론이다.

"아타나시아, 세브레 좀 써도 될까요?"

"……어디에 쓰려고요?"

"마나수정을 대거 구매해야 해요. 아티팩트랑."

아타나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에레브 양이라면 국가 예산도 넘겨줄 수 있어요."

"……재산이 걸리는 게 아니라 사는 사람이 문제에요. 이건 아타나시아를 포함한 원로원이나 나, 그리고 네튼 님이 행동하기 어려워요."

나는 베타를 배신할 계획이다.

악마와 힘을 합치기로 했으니 배신하는 건 일단 정해진 일인데, 문제는 여신인 베타를 적대하는 게 마냥 좋게 작용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다.

우선 나와 베타의 약속을 따져보자면 '베타가 에레브의 서클을 고쳐준다.' -> '에레브가 악마와 계약해서 악마를 베타에게 종속시킨다.' -> '알파를 몰아낼 방법을 모색한다.' 이렇게인데, 여기서 첫 번째 항목 후에 내가 베타를 배신해버리면, 베타는 힘을 잃은 채로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린다.

힘을 잃은 베타는 크게 무섭지 않지만……문제는 베타가 가진 교주라는 지위이다. 몇몇 광신도들이 베타의 말을 안 듣기는 해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 따라서 나는 베타에게 의심받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을 시켜 마나수정과 아티팩트들을 쟁여놓아야 한다.

베타는 세브레를 적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자기 힘이면 얼마든지 쓸어버릴 수 있으니 마법수정을 얼마나 챙겨가든 딱히 대응하진 않을 거다.

그나저나 국가 예산도 넘겨줄 수 있다니, 얘도 정상이 아니로군. 내 주변에는 어째서 정상인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냐?

……마음 속 양심이 애초에 너부터가 정상이 아니니까 그런 거 아니냐고 묻는데, 유구무언이다.

"하지만 에레브 양, 이미 세브레는 공연히 범죄단체가 되어버렸어요. 지금 당장은 제가 관리해서 재량껏 처리하겠다는 말로 여기에라도 가두어놓고 있지만……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란 어려워요."

"아직 세브레 단원 전부가 신상이 공유된 건 아니지 않아요?"

"……그건 그렇죠?"

"그럼 세피르만 어떻게 몰래 활용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타나시아는 미간을 좁히고 뭔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아마도 통령으로서 그런 일을 해도 되는 건가──에레브 양을 위해서 해야지──가 둘이 충돌한 것 같은데, 뭘 이제 와서.

"……굳이 세브레를 활용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민간인에게 부탁해도 될 텐데."

"그건 안 돼요."

나에게 협력했다는 게 알려지만 분명 교회를 적대하게 된다. 그런 책임을 민간인에게 전가해버릴 수는 없다. 나는 물론 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차선책이 있다면 활용하고 싶다.

아타나시아는 침음을 흘리다가, 결국에는 수락했다. 다만 조건을 붙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세브레를 더 이상 이용해먹지 않기로. 그 약속은 아마도 지키지 못할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었으므로 수용했다.

1층으로 내려가 세피르를 깨웠다. 세피르는 침까지 흘려가면서 자고 있었다.

"으, 으으……지금, 몇 시……?"

"점심이에요."

"제가 잔지 얼마나 됐죠……?"

"이제 한 20분?"

세피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지만, 나는 철면피를 유지했다. 할 일이 있으면 그러니까 알아서 잘 하셨어야지. 안 하시니까 이렇게 불상사가 발생하는 거 아니냐.

"세브레 아지트가 어디에요?"

"……그건 왜요?"

"제가 부탁한 걸 세피르가 안 하니까 제가 세브레 단원들 부려서 하게요."

세피르가 표정을 종잇장처럼 구겼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해요. 할 수 있어요?"

난 지금 당장이라도 베타에게 가고 싶다는 말이다. 솔직히 지금까지 꾹 참아온 게 스스로도 대견해서 입에다가 마타샤의 화락조를 만들어주고 싶을 정도다.

……마나수정 사면, 화락조 좀 먹고 가자. 생각했더니 먹고 싶군.

"통령이 허락만 하면요."

"허락했으니까, 갑시다. 솔직히 세피르는 필요가 없긴 한데 세브레 단원들이 제 말을 듣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세피르가 필요해요."

나는 아타나시아에게 받은 두건을 세피르에게 건넸다.

"이거 둘러요."

"……이게 뭐죠?"

"뭐긴요. 저는 범죄자랑 같이 다니면 안 되니까 세피르는 얼굴을 가려야죠."

"……."

그건 전적으로 너 때문이 아닌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무시했다. 결국 세피르는 밖에서 절대로 두건을 벗지 않겠다고 약속한 후 성대에서 씻고 아타나시아에게 옷까지 빌려입었다. 가슴이 좀 남긴 하는데 저 정도면 괜찮겠지 뭐……. 세피르 본인은 세상을 저주하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나는 얌전히 다과나 먹다가 세피르와 성대를 나왔다.

"아지트는 어디에 있어요?"

"……혹시 약도 한 번도 안 보셨나요?"

그러고 보니 약도를 내게 줬었지?

"봤는데 기억이 안 나요. 제가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라."

"……교회 근처에 건물을 하나 마련했습니다."

"좀 비쌀 텐데?"

"제가 어디서 자금을 마련했게요?"

로렌스 황실 물건을 팔았겠지. 얘는 여전히 또라이였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그럼 로렌스 황실에서 세브레를 처단하려고 들지는 않아요?"

"그 물건들이 사라진 줄도 모를걸요? 관리가 오죽 허술했으면 저희 같은 사람들이 훔쳤겠어요."

"……그걸 본인 입으로 말해도 돼요?"

"사실인걸요."

세피르의 눈은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에레브 님은 저에게 악마를 꼭 보여주셔야 해요. 꼭. 꼬옥. 꼬오옥."

"곧바로는 안 되고, 이번 일 끝나고 한 두세 시간 후에 보여줄 수 있어요. 얌전히 성대에 가 있어요."

"……."

솔직히 말하면, 베타가 개빡쳐서 나를 공공의 적으로 선언해버리면 두세 시간으로는 안 될 것 같은데. 내가 아예 아케즈에서 쫓겨날 가능성도 있으니 며칠, 혹은 몇 주로 길게 잡아야 하지만…….

"……."

세피르의 표정이 너무 험악하면서도 밝은지라 차마 말을 못 하겠다. 나는 묵묵히 걸었다.

교회 근처 하나의 건물 앞에 당도했다. 세브레 같은 자그마한 단체가 쓰기에는 좀 컸다. 같이 들어갔다간 무슨 시선을 받을지 몰라 나는 이 근처에서 대기했다.

"아, 세피르."

"네?"

"이번에 세 명이나 죽은 원인, 세브레 단원들이 알아요?"

"대충 알고는 있지만……정확하게는 몰라요. 저는 그냥 악마를 볼 수 있다고만 해놓았어요."

그럼 문제는 없겠군. 혹시나 동료가 죽은 것으로 나에게 책임을 물어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어떡하나 해서 물어봤다.

세피르가 건물로 올라갔을 때, 나는 기다리면서 교회를 구경했다. 다른 건물들보다도 비정상적으로 큰 교회 건물은 어딜 가도 눈에 띄었다. 현대의 대성당 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감이 오려나.

저런 으리으리한 건물의 소유자이자 단체의 장인 베타를 적대하게 된다라……솔직히 무섭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런 무서움을 두려워해서 움츠리면 되레 그게 문제다. 나는 언제나 목숨을 버려가면서 싸웠다. 내 목숨이 위협을 받는 거야, 120억을 되찾을 확률이 있다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으니까.

세브레는 곧 두 명의 남자를 대동하고 내려왔다. 그래도 생각은 있는지 둘 다 두건을 두르고 있었다. 얘네랑 다니면 이목이 조금 끌리긴 하겠는데 뭐…….

"에레브 님, 근데 저희가 돈이 그렇게 넘치지는 않는데요?"

"돈 되는 데까지 전부 사요. 그리고 소모한 재산은 아타나시아가 충당해줄 거에요."

"수고비도 포함되어 있나요?"

세브레 단원들 앞에서 악마를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세피르에게 활짝 웃어보였다. 개소리하지 말라고. 세피르도 머쓱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교회 앞에 도착했는데, 타이밍 좋게도 재고가 바로 수레에 실려 나가고 있었다. 나는 세피르에게 배낭 모양의 아티팩트를 건넸다. 대충 설명하자면 경량화마법이 걸려 있다. 그동안 나는 골목길에서 대기했다.

한참이 지나자, 큼지막한 보따리를 세피르가 가져왔다. 나는 미리 가져온 또다른 커다란 배낭에 마나수정을 전부 옮겨담았다.

"잘 했어요. 성대에 가 있으세요."

"꼭입니다? 꼭이에요?"

"아 거 참. 알았어요, 알았어."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는 게,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목덜미라도 물어뜯을 법한 기세라,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피르를 돌려보내고, 나는 교회로 향했다. 마음은 이제 서클을 고친다는 생각에 매우 들떠 있지만 발걸음은 무거웠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짓을 벌이려고 하니 긴장이 되었다. 여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심지어는 그들보다 높은 격의 악마도 전지전능하지 않다. 따라서 이들은 온전한 절대적인 신이라고 불리울 수 없다.

그들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 이 하나만을 근거 삼아 나는 여신을 적대하려고 한다. 모든 일이 잘 풀릴 수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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