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억을 위해 아카데미 교수가 되었다-173화 (173/247)

(EP.173)2부 070

"……."

아예.

아예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양자택일의 구도에서 전자를 선택할 가능성도 물론 있었다. 차라리 나를 죽여서라도 내가 돌아가지 못하게 하리라는 가능성 또한 나는 염두에 뒀다.

하지만.

그래도 하지만, 설마하니 아타나시아가 이런 선택을 할 줄은 몰랐다. 나를 위해서 여덟 개의 서클까지 모조리 내치려고 했던 게 아타나시아였다. 그렇게까지 나를 위해주던 아타나시아는 온데간데 없고, 나의 존재 자체에 집착하는 한 명의 여자가 나를 깔고 있었다.

"아타나시아."

아타나시아의 눈은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어서,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눈물이 주렁주렁 매달릴 듯해서, 나는 오히려 아타나시아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의 '무언가'를 눈에 담으며 떠나보내기 싫어하는 그녀의 눈을 나는 바라보았다.

"정말 나를 보내지 못하겠다면……차라리 죽여요."

손목에 힘을 주자 결박은 쉽게 풀렸다. 나는 풀린 손으로 아타나시아의 손을 내 목에 가져갔다.

"나를 죽여서라도 나를 막겠다면, 그렇게 해요. 아타나시아에게는 그럴 힘이 있어요. 아타나시아는 대륙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고, 그런 당신이 조금이라도 힘을 쓰면 나 따위는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하겠죠. 영원토록 당신 옆에 남아 있는 거에요. 차라리 데보타를 써서 나를 세뇌하세요. 내가 아타나시아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절대로 떨어질 일이 없게끔."

아타나시아는 자신의 힘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힘을 갖고 있어도 정작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었다. 그런 아타나시아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는 용도로 마법을 사용하라고 그러면, 아타나시아는 어떤 생각을 품을까.

설령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가능성의 포문을 열어젖힌 이상 아타나시아는 그걸 실천으로 옮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여전히 아타나시아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보단 나의 의사를 존중해주고 있기 때문에.

그 증거로, 아타나시아는 나를 핍박하지 않고 있다. 내게 자기를 선택하라며 강요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강요가 아니라 발악, 이미 굳은 내 결정을 회유시킬 마지막 발악.

정말 아타나시아가 나를 구속하려고 들었다면 나는 지금 이렇게 있지 못한다. 아타나시아는 극한의 얀데레가 되어 나를 옆에 두는 인형처럼 부렸겠지. 하지만 아타나시아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아타나시아는 에레브라는 '인간'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에레브'라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형으로 전락해버린 에레브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아타나시아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이윽고 내 얼굴에 작은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타나시아의 자세는 점점 허물어져서, 결국에는 내 몸 위에 밀착해 포개어졌다. 아타나시아의 고동이 나의 고동과 맞물려 진동한다. 아타나시아는 내 어깨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안 가면, 안 돼요……?"

"……네."

아타나시아는 심성이 고운 사람이다.

나를 보내기 싫다면 내가 알아채지 못할 이런 저런 방법을 동원해 내가 마법을 연구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진심을 부딪혀오지 않는가. 힘과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심장을 건넨 아타나시아가 착해빠진 거였고, 나는 그런 아타나시아를 이용해 사익을 취할 뿐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정말 돌아갈 생각이라면."

아타나시아가 내 귀에 속삭였다.

"차라리, 저도 데려가요."

나는 아타나시아의 등을 토닥였다.

"안 돼요."

"왜……!"

"아타나시아가 제일 잘 알잖아요. 이 나라가 지금 누구 덕분에 유지되고 있는데요. 매일 서류업무에 시달리며 밑에서 받쳐주는 아타나시아가 있기에 그나마 나라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있는 거잖아요. 그런 아타나시아가 사라지면, 이 나라는 망해요."

허언이 아니다. 내가 알기론 아타나시아와 원로원은 분업을 이루고 있다. 아타나시아는 국정을 돌보고 요관 탐색에 힘을 보태주고, 원로원은 노바를 수색하는 데 열중하고. 나라의 대중소사를 전부 아타나시아 혼자 처리하는 거였다. 아타나시아는 덕분에 바쁜 나날을 살고 있었다.

아타나시아가 없으면 이 나라는 끝장이다.

마법 강대국으로 남을지언정, 나라의 근본 자체가 뒤틀리게 된다. 델라즈가 어떻게든 보조하려고 시도하겠지만 역부족이겠지.

노바의 수색을 명령한 것이 아타나시아이기에, 아타나시아가 사라지면 원로원은 직무를 유기하고 또 다시 마법을 연구하는 데에만 집중할지 몰랐다. 물론 지금도 대부분이 수색에 불참하며 그렇게 행동하고 있지만……있는 듯 없는 듯 지금처럼 몰래 행동하는 게 아니라, 대놓고 그럴 거다.

무엇보다.

'에레브가 돌아가는 건 막지 못하니 자기를 위해 자기도 데려가달라고 요구'하는 시점에서, 이미 아타나시아는 모순을 저질렀다.

아타나시아의 요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타나시아를 위한 것이다.

모든 인민을 저버리고 도망가겠다는 거다.

내가 행하려는 것과 비슷한 짓거리.

그리고 아타나시아는 결코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한다.

내가 그걸 알고 있다.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는 헤어질 수밖에 없어요."

"……."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요."

"대체."

아타나시아가 물기를 토해냈다.

"에레브 양이 없는데, 어떻게, 어떻게 행복하게 살라는 거에요……. 내가 위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는데!"

"걱정 마요. 적어도 내가 돌아가기 전에 노바는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정말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건, 첫 번째 요관을 돌파했다는 거다. 여섯 번째부터 첫 번째까지 모두 뒤졌으니 노바도 찾을 수 있겠지.

"나 말고, 어머니와 지내요. 어머니를 사랑하세요."

"……."

"아타나시아를 사랑할 수 있고, 아타나시아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어깨는 이미 흥건했다.

"그러니까……날 보내줘요."

하지만, 이것 역시 기만이었다.

노바는 내게 이계가 궁금하다고 말했다. 이계가 궁금해서 딸과 남편을 버리고 요관으로 도망쳐버린 사람이다. 아타나시아가 노바를 찾아낸다고 한들 노바는 아타나시아를 똑바로 바라봐주지 않겠지.

아타나시아가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내 몸을 짓누르고 있던 무게가 사라졌다. 시야가 가로막히지 않아 천장이 훤히 보였다.

천장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멀어서, 손을 뻗었다. 손끝은 결코 천장에 다다르지 못했다. 내가 쫓는 건 과연 저 천장처럼 허황된 것일까.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 ** **

한숨 자고 일어나서, 기숙사로 복귀했다. 어째서인지 기숙사에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았다.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기숙사에서 나가지도 않을 심산이다. 교회든 세브레든 전혀 만나고 싶지 않다.

심지어는 델라즈도.

심지어는 페일리도.

심지어는 앨버트도.

그 누구도 지금의 나에게는 방해가 될 뿐이다. 나는 의도적으로 외부와 내부를 단절시켰다. 커튼까지 전부 쳐 창문도 막아버렸다.

이건 연습이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이 내가 돌아가버리는 것을 못 참는 만큼, 나도 이곳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견디기 힘들어하겠지. 미리 떨어져 있는 연습을 해둘 필요가 있었다.

침대에 몇 시간을 누워 있었을까, 문득 정신을 차리니 방 안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케즈에서 아카데미 기숙사에 사용되는 조명은 오로지 마광석뿐이다. 마광석은 마나만 흘리면 빛을 밝히고, 아카데미 학생은 적든 많든 마나가 몸에 흐를 테니까. 나 또한 이곳을 환하게 밝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내 눈에 담는 모든 것을 짙은 먹색으로 칠해버리고 싶었다. 이 세상이 납빛에 물들어 색을 전부 빼앗겨버렸으면 좋겠다. 실수로라도 머리에 저장된 기억들은 전부 블랙홀에 빨려들어가 소멸했으면 좋겠다.

나를 심란하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이.

"……."

어떻게든 보지 않으려고 애써도, 결국에는 눈이 어둠에 적응해 방 안 물건들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각탁이, 천장에 달려 있는 마광석을 가공해 만든 조명이, 책들이, 문이. 눈을 뜬 상태에서 아무것도 보기 싫어하는 건 내 욕심인 걸까.

내 불찰이었다.

이곳은 쉬어가는 곳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5년 동안 달려오느라 지친 심신들을 달래주기 위해 차선책으로 델라즈와 엮이는 것을 선택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내가 돌아가는 데 내가 이 세계에 미련을 갖게 될 줄은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연정이 아니었다. 그 사람들의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

이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면 초조하다. 누군가 이 사람들을 해치면 분노한다. 아껴주고 아무에게도 내어주고 싶지 않다는 원초적인 욕망부터 결코 내 곁에서 떨어뜨리고 싶지 않다는 불온한 욕망까지 산재했다.

하지만 이 사랑은 내게 방해만 된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목표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게 할 장해물이다. 나는 부드럽지만 차갑게 이들과의 관계를 모두 끊어버리고 싶지만──그게 어디 쉽게 되겠는가.

내쪽에서 포기하지 못해 들러붙을 가능성이 있었다. 앨버트와 페일리를 내치고, 델라즈의 진의를 파악하고, 아타나시아를 밀어낸 이유는 바로 그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설령 내가 다시 돌아가고 싶어졌서도, 다시 돌아올 수 없게끔. 결국에는 돌아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지게끔.

서클을 되찾기 전까지 나는 아직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였으며, 따라서 이것이 최선책이었다.

후회.

후회는 많다.

사무친 회한이 남는다.

하지만 이 미련들에 질 수는 없었다.

나는 지금 내 목숨이 걸린 전쟁을 치르고 있다. 미련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나는 나를 위해 사람들을 희생시켰으며──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

생각이 지나치게 깊어졌다. 어두운 곳에 있으면 이래서 문제다.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기에 체념을 유보하는 행위가 불가능했다.

설령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도 내 머리만은 시간을 따라잡지 못하게 막아버릴 필요가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겨우 희미하게 비치는 윤곽에 의지해 술을 꺼냈다.

악세발트가 아니었다. 툼벨른이었다. 정신을 망가뜨리고 싶어서 마시는 술에 숙취가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나는 먹고 죽을 심산으로 술을 들이켰다. 당장 내일 점심이면 애들이 처들어올지도 몰랐지만 그게 내가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얼마나 마셨을까.

움직이면 배가 출렁거릴 정도로 술을 들이켰다. 눈물로 빠져나간 몸속의 수분을 알코올로 보충한 느낌이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몽롱했다. 내가 지금 보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머리와 알코올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허상인지 분간이 안 됐다.

끊임없이 들이켰다. 보이지 않으니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고,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으니 술은 잘 들어갔다. 안주 하나 없이 위장에 때려박고 있지만 속이 아프지는 않았다. 쓸데없이 건강한 내 위장이 미웠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니, 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이쬐고 있었다. 밤이 지나 아침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키자, 과연 툼벨른을 들이킨 효과가 있었는지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아직.

아직 부족했다.

나는 멍청했다. 더욱 멍청해지기 위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나를 망가뜨려야 했다.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선반을 열어 또 다시 술을 꺼내왔다. 선반 앞에 서서 그 자리에서 한 병을 전부 비웠다. 술에서는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대체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인가. 끊임없이 자문한 끝에 나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

여기는 병동이 아니었다. 점심마다 애들이 찾아오던 시기는 이미 한참 지났다. 심지어는 애들더러 나에게서 멀어지라 강요한 게 나였다. 그런 주제에 아이들을 기다렸다는 말인가.

"……."

기다려서 뭐하게.

정말 아이들이 찾아온다고 한들, 이 꼬라지로 맞이할 수는 있냐.

──똑똑, 하고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습관처럼 재빨리 비어버린 술병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웠다. 그리고 최대한 몸을 똑바로 일으켜 문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누구세요."

"저에요, 교수님."

페일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좆됐다.

나는 문을 열어주고, 숨을 참았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

"……왜 숨을 참고 계세요?"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후우, 하고 숨 좀 불어보실래요?"

"……."

"아니면 방 좀 뒤져봐도 될까요?"

안 된다.

어림잡아 여섯 병은 마신 것 같은데, 그걸 들키면 진짜 페일리한테 거하게 혼날지도 모른다. 나는 결국 작게 숨을 쉬었다. 페일리가 잔뜩 표정을 찌푸렸다.

"술 냄새……몇 병 마시셨어요?"

"……한 병이요."

"바른 대로 솔직히 말씀하실래요, 아니면 제가 방을 뒤져볼까요?"

"두 병……."

"뒤져볼게요."

"아, 아아!"

나는 페일리의 옷길을 잡아끌었지만, 페일리는 막무가내로 방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프라이버시를 지켜야 하는 은밀한 물건 따위는 없어서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내가 소녀라는 것을 좀 알아주면 좋겠다.

결국, 페일리는 침대와 벽 사이에 나란히 끼워 열거된 술병 여섯 개를 찾아냈다.

"교수님?"

페일리가 싱긋 미소지었다.

존나 무서웠다.

지금의 페일리라면 내 사지를 결박해 강간하는 것도 가능했다. 머리가 좋은 만큼 얘가 삐뚤어지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짓거리를 실천으로 옮기겠지. 교수님이 먼저 약속을 깨셨으니, 저도 깨버릴게요──라면서.

"저어, 그게……."

"네. 해명하실 게 있나요?"

"미안함다……."

결국 나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언제부터 마시셨어요?"

"어제……오후? 저녁?"

"제대로 된 시간도 모를 정도로 퍼마시셨다는 거네요."

나는 페일리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화가 난 듯하면서도 경칭은 철저하게 지키는 게 너무 페일리다웠다.

"하아, 다음부터는 차라리 마실 때 저를 부르세요."

"너네 미성년자인데……."

"마실 수 있는걸요."

맞다, 그랬지…….

"그리고 교수님, 이제는 '너네'가 아니에요."

무슨 소리일까. 나는 축 처진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어서 갸웃했다.

"앨버트는 이제 없어요."

"응……?"

"앨버트는 탁큰으로 떠났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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