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2)2부 069
앨버트와 페일리를 데리고 윗층으로 올라왔다. 슬쩍 바라보니 둘의 얼굴은 꽤나 침울했다. 모르긴 몰라도 잘 안 풀린 모양인데, 그래도 무사히 돌아왔으니 괜찮다. 어차피 그 짐승 새끼랑 대화가 통하는 것부터가 기적이다.
"자, 거기 앉고."
"……내 저택인데."
"아, 그렇군요. 스승님, 허락해주실래요?"
뒤지기 싫으면 당장 수락하세요, 아저씨.
하는 얼굴로 방긋 미소지어 델라즈를 바라보았다. 델라즈는 세기의 난제를 눈앞에 마주한 수학자처럼 난해한 표정을 짓더니 떨떠름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선……얘기를 나누기 전에 결과부터 들어봅시다. 어떻게 됐어요?"
"……실패했습니다."
드물게도 앨버트는 잔뜩 침울해진 얼굴이었다.
"그 새끼가 뭐래요?"
"책은 절대로 넘겨줄 수 없다고 합니다. 책 내용을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든 운을 띄워서 얘기를 해봤겠지만……교수님께서 그것까지는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고서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안 해놓은 것 같다. 괜히 긁어부스럼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하자.
"그리고, 델라즈 교수님. 그 사람 이름, 개명했다고 합니다."
"……뭐?"
"델리오에서 베리오로 개명했다고 합니다. 교수님께서 베리오 님이 아니라 책을 우위로 보고 있는 이상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델라즈는 말문을 잇지 못했다. 개명했다는 게 어지간히 충격스러운 모양이었다.
"스승님, 얘네 지키기 위해 방비해두셨다는 건 뭐에요?"
"……내 제자로 들여주겠다고 제안하라고 했다. 실패한 것 같지만."
"……그, 베리오? 걔가 스승님 밑으로 들어가는 걸 거절한 거에요?"
왜?
처음 만났을 때는 델라즈에게 그렇게까지 집착한 모습을 보였으면서.
"뭔가 이상하게 꼬이는 느낌인데……."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델라즈의 반응을 보건대 개명했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 듯한데.
"책 내용을 알고 있는 걸까요?"
"내용 자체는 알고 있을 거다. 그놈은 활자 중독에 가까운 상태라 갖고 있는 책은 모조리 읽어버리는 놈이니."
"……혹시 걔 주변에 누구 죽은 사람 있어요?"
"부모님이 없긴 하다."
델라즈보단 부모님을 우선해서, 부모님을 되살리기 위해 책을 넘겨줄 수 없다는 건가……합리적인 추론인가? 뭔가 께름칙하다.
"일단……수고했어요, 둘 다."
"교수님……."
나는 두 사람을 엄하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무모했어요. 그 사람은 보통 또라이가 아니에요. 나도 한 번 만나본 적이 있는데, 나랑 만났을 때는 말보다 칼을 먼저 던지는 놈이었어요.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고요."
"……저희는."
"그리고, 너희의 착각을 바로잡아줄게요. 나는 죽을 생각 없어요."
대체 뭘 근거로 해서 내가 죽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죽을 생각이 추호도 없다. 내가 지금까지 목숨을 거는 짓들을 많이 했다고는 해도, 그건 언제까지나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었다. 서클만 살릴 수 있다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면 목숨 한 번 걸어보는 거야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마 페일리인가? 페일리겠지. 앨버트는 내게서 거리를 아예 벌리기로 작정한 것 같으니 나에 대한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을 터.
"……정말요?"
"그럼요. 내가 왜 죽고 싶어하겠어요. 나는 서클 복구하기 전에는 못 죽어요."
"복구하고 나면요?"
나는 멈칫했다.
복구하고 나면?
요관을 공략해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겠지.
"……그래도 안 죽어요. 서클이 복구됐는데 왜 죽겠어요. 서클 여덟 개로 할 수 있는 건 무궁무진해요. 잘만 하면 다시 교수직을 맡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걸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렇게 연막을 치는 수밖에.
두 사람은 눈에 띄게 안색이 밝아졌다. 아직까지도 마학 교수는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마학을 배우는 것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는 학생들도 있을 테니, 내가 복귀하면 만세를 삼창하며 나를 환대하겠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요."
** ** **
"에레브 양?"
"어서 와요, 아타나시아. 잠깐 저랑 얘기 좀 할래요?"
나는 아타나시아에게 손짓했다.
"저……아직 처리해야 할 서류가 남아 있어서요."
"지금 당장 안 하면 안 되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요."
"그럼 저한테 한 시간만 할애해주세요."
마음 같아서는 그 후에 아타나시아를 돕고 싶지만, 아마 이야기가 모두 끝나 있을 때는 아타나시아와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는 상태이겠지.
결국 수긍한 아타나시아를 나는 응접실로 데려갔다. 성대의 응접실은 온갖 차나 술, 그리고 과자가 구비되어 있어 이야기를 나누는 데 제격이다.
앞으로 나눌 이야기가 무거우니 몸이라도 편해져야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선택이었다.
아타나시아가 자리에 앉고, 나는 그 옆에 앉았다.
"에레브 양?"
"같이 앉아요."
아타나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거부하진 않았다. 애초에 나랑 스킨쉽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럼 이제, 뭐라고 운을 떼면 좋은 거냐.
내가 아타나시아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것. 내가 돌아간 이후에 아타나시아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아타나시아."
"네."
"내가 저번에 했던 이야기 기억해요? 나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말."
"기억……은 해요."
반응을 보니 확실하게 믿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만약에 서클 전부 되찾고, 요관 공략해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버리면 어떻게 할 거에요?"
아타나시아는 모든 혈육을 잃었다. 노바는 몇 년을 수색해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며, 베르노바는 죽었다. 이제는 의자매를 맺은 나까지 사라져버린다면, 아타나시아는 어떻게 될까.
이미 나에게 심하게 집착하는 아타나시아다. 아타나시아의 정신상태는 과연 온전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겠지.
따라서 나는 아타나시아의 돌발행동을 막고자 아타나시아와 이야기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내가 이 세계에서 사라진다는 소리를 듣고, 내가 돌아가지 못하게 나를 감금이라도 할까봐.
아예 굳이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면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그래서야 아타나시아를 속이게 된다. 확실하게 설득을 해내는 편이 훨씬 낫다. 성공한다는 가정 하에 말이지만.
"……에레브 양은, 이 세계에 미련이 없나요?"
"왜 없겠어요. 아타나시아 당신도 좋아하고, 델라즈 아저씨도 좋아하고, 만날 쫄레쫄레 귀엽게 나 따라다니는 애들도 좋아하고."
미련이 없을 리가 없다. 다만 미련을 이길 정도로 큰 무언가가 있을 뿐이다.
"아케즈라는 나라도 좋아하고,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몸도 뭐, 나쁘진 않고. 여기 있으면 아타나시아랑 아저씨가 나 평생 편하게 살게 해줄 거 아니까, 당연히 미련은 있죠."
"그럼, 왜……."
"하지만 그래서야 의미가 없는걸요."
나는 아타나시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타나시아의 눈은 보석이라도 박힌 것처럼 예쁘게 빛난다. 보고 있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나라는 인간의 존재 이유가 뭐일 것 같아요?"
"……돈이요?"
"맞아요. 정확하게는 이 세계에서의 존재 이유가 돈인 거죠. 나는 항상 원래 세계로 돌아가 손에 쥘 돈을 위해 행동했어요."
델라즈의 짬처리로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친 것도.
전쟁을 일으켜 로렌스를 괴멸시킨 것도.
원로원을 동원해 베르노바를 죽여버린 것도.
이제 와서는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빚을 지게끔 하는 것도.
모두 120억을 위해서였다.
"……그래서야."
아타나시아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느낌이었다.
"저희 모두보다, 돈이 소중하다는 건가요?"
"아니요. 물론 돈 따위보다는 여러분이 훨씬 소중하죠. 어떻게 인간을 돈에 비교하겠어요."
나는 물론 너희를 좋아한다. 내가 정말 돈에만 미쳐 있었으면 델라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다. 아카데미에서 시간을 낭비하기보단 요관에서 더 굴러다니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 생각했겠지.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인정(人情)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5년 동안 사회랑은 거의 단절되어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나는 반쯤 쉬어가자는 목적으로 델라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돌아가려는 이유는.
"돈보다는 여러분이 소중하지만, 그래도 그것보다 더욱 소중한 건 나에요."
"……."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그 누구를 사랑해도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진 않아요."
온갖 죄책감과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나는 내 몸뚱어리라는 배를 타고 나아갈 항로를 바꾸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나는 나를 사랑하니까, 내 목적을 이루려고 해요."
외통수다.
돈이 너희보다 소중하다고 말하면 너희는 반발하겠지. 어떻게 인간관계를 한낱 돈에 비교할 수 있냐면서. 심지어 돈은 아케즈에도 썩어넘친다. 나는 노사(老死)할 때까지 금전적인 걱정 따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너희는 더욱 반발할 거다.
하지만 그건 너희 사정이다.
너희야 원래부터 이 세계 사람이었으니 레블이라는 화폐가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나는 아직도 레블을 원화로 바꾸어 계산하는 버릇을 갖고 있다. 나는 아직 내가 원래 살던 세계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아타나시아가 차마 부정할 수 없는 부분을 찔렀다.
돈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면.
나 자신을 너희보다 더욱 사랑해서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한다면.
너는 뭐라고 대답할까.
"……그럼."
아타나시아는 그 이상으로 말꼬리를 잇지 못했다.
아타나시아는 나를 존중한다. 말이 안 되는 이유가 아니고서야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줄 의사가 있다. 그렇기에 내가 돌아가려고 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돈과 비교되는 것에는 기가 찰지 몰라도, 나와 비교되는 것에는 할 말이 없겠지.
"……저는요."
아타나시아가 입을 연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였다.
"가족애라는 걸 지금껏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어요. 어머니도, 아버지도……어릴 때는 저를 사랑해주셨겠지만, 어릴 때는 거의 기억이 안 나니까요. 적어도 제 기억이 차지하는 부분에서, 제가 받은 사랑이란 거의 없었어요."
"……."
"하지만 저는 그럼에도 아버지를 총으로 쏘는 걸 주저했어요. 심지어는 실패해서 에레브 양에게 상처를 입히고 말았어요. 느끼지 못하더라도 결국에는 미련과 흔적으로 남아 곁에서 맴도는 것이 결국 혈육의 존재였어요."
알고 있다. 아타나시아는 거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났다는 거.
그렇기에 베르노바를 처단하는 데 실패했을 때 아타나시아를 원망했다. 받은 사랑이 없는데, 왜 없는 것에 정신이 팔려 나를 이런 꼴로 만들었냐고 욕했지.
하지만 아타나시아를 향한 나의 원망은 점점 옅어져갔다. 머리가 차갑게 식어갈수록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존재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자식에게 영향을 준다. 버림당했지만 나도 가끔은 부모님이 그립다. 그렇기에 아타나시아가 내게 진심을 부딪혀왔을 때, 나는 아타나시아를 용서했다.
"하지만 주위를 맴돈다고 한들 결국에는 실체가 없는 것……보이지 않는 것을 잡기 위해 팔을 휘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
"그런 저에게, 뚜렷하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생겼어요."
아타나시아가 나를 초연히 내려다본다.
"그게 에레브 양이에요."
"……."
"저는 예전부터 여동생을 갖고 싶었어요.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부터 사랑을 갈구할 수 있다면 형제자매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제가 그 사람을 품어줌으로써 사랑을 얻길 바랐고, 이왕이면 공감대를 형성하기 쉽게 동성이길 바랐죠."
그렇기에 여동생이었다.
"에레브 양에게 매달렸던 이유 중 하나가, 에레브 양이 여동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
"저는 인간관계에 영 꽝이라서요. 친하게 지내는 사람 한 명 없었어요. 통령의 딸이자 원로원의 베르노바라는 간판은 오히려 사람들이 제게 다가오기 어렵게 만들었죠."
그래서 아타나시아와 델라즈는 서로에게 의지했다. 배척받고 외로운 사람들끼리 뭉쳤다.
"아저씨는 물론 좋아하는 사람이지만……제가 원하는 건 여동생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에레브 양은 그런 저에게 진짜 여동생으로 비추어졌어요. 아저씨가 믿고 아카데미 교수직을 떠넘길 수 있다면, 실력이나 인격이나 입증된 사람일 테니 오히려 제가 먼저 다가가고 싶었어요."
서클을 잃기 전의 나는 아타나시아에게 실망스러운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타나시아는 끝까지 내 곁에 남았다. 단순히 델라즈가 내 옆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그런 게 아니었던 건가.
"저는 에레브 양을 사랑해요. 가족애를 느끼고 있어요. 죄책감과 사랑을 동시에 느끼기에 저는 에레브 양에게 매달렸어요. 관계를 회복해 나라는 인간에게 빛을 내려줄 수 있다면 서클 따위는 희생할 수 있다고 마음먹을 정도로요."
"……."
"저는 에레브 양을 위해 서클까지 버리려고 했어요. 하지만, 에레브 양은 자기 자신을 위해 우리를 버리려고 하는 건가요."
나는 이기주의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행하는 행위 중에서 나의 이기심에서 비롯되지 않은 행위가 없다.
나는 너에게 이만큼이나 해줬는데 너는 왜, 이런 말들은 그렇기에 무섭다. 이기적인 사람은 항상 그 논리에서 이타적인 사람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구체적일수록 상처가 크고, 모호할수록 묻어두기 좋다. 아타나시아는 방금 자신의 서클을 언급함으로써 내가 도망갈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것에 연연할 정도로 이타적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았겠지.
그렇기에 나는 망설임없이 대답한다.
"네. 저를 위해서."
"……."
"아타나시아가 진정으로 나를 위한다면, 이번에도 나를 위해주세요."
얼마나 가혹한 말인가. 가혹하다는 걸 알면서도 강요하는 나라는 인간은 또 어떠한가.
모두가 상처를 받는다. 이곳에는 이제 거칠게 할퀴어진 흉터밖에 없다. 나나 아타나시아나 심장에 대못이 박혔다.
"가지, 마세요."
아타나시아가 나를 품에 안았다. 숨이 막혀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지만 정작 내 머리는 어느때보다 차가웠다.
"가야 해요."
"……왜, 어째서. 여기는 에레브 양, 당신을 위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어요. 당신에게 구해져 당신을 추앙해줄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해줄 학생들이, 당신의 뒷바라지를 해줄 저나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이 모든것을 간단하게 포기해버릴 정도로 당신이 추구하는 목표가 당신에게 중요한 거에요?"
"그게 내가 살아가는 목표에요."
없으면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것.
너희가 나를 사랑해서 내가 너희 곁에 존재하길 원한다면──역설적으로 나를 보내줘야만 한다.
내가 죽는 것과 살아서 나의 목적을 이루는 것, 둘 중 하나에서 양자택일해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맞기 때문에.
아타나시아의 이가 까드득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 돼."
아타나시아가 내 두 손목을 잡아 나를 밀쳐 넘어뜨렸다. 나는 카우치에 누운 채로 아타나시아 밑에 깔렸다.
"아타나, 시아?"
"못 가요. 절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