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1)2부 068
"……네?"
"진정하고. 다칠 일은 없으니 안심해라."
"프로바이오라면, 그 짐승새끼한테 보낸 거에요?"
델라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체 왜?"
"애들은 네가 죽으려고 한다고 오해를 하고 있더구나. 네 목숨 한 번 살려보겠다고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걸 알려달라 해서 알려줬지. 고서를 가져오는 것 말이다."
나는 인상을 팍 구겼다.
"왜 그랬어요? 애들 이제 3서클인가 그렇고 그 새끼는 5서클인데."
"걱정 마라. 다칠 일은 없어. 방비를 해놓았으니 아무런 문제 없이 복귀할 거다."
"……뭘 했는데요?"
"그놈이 건드릴 수 없는 말을 전달할 거다. 원체 세상 살이에 관심이 없는 놈이니……속을 수밖에 없겠지."
** ** **
"앨버트, 준비 됐어?"
"……하아."
앨버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델라즈의 도움으로 델라즈의 옛 제자를 만나서 프로바이오까지 온 건 좋았는데, 페일리까지 이 여정에 동참할 줄은 몰랐다. 이 앞은 너무나도 험난했다. 아무리 에레브를 위해서라지만, 꺼림칙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델라즈가 신신당부한 것은 이러했다. 절대로 에레브의 이야기를 꺼내지 말 것, 델라즈를 아카데미의 교수님이라 칭할 것, 델라즈가 쓴 책의 이야기가 나오면 맞장구치며 좋게 회답할 것.
"여긴 진짜 위험해. 5서클이래. 너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어때."
"여기까지 와놓고서? 문만 두드리면 들어갈 수 있는데?"
"잘못하면 죽는다니까."
"교수님이 죽는 걸 막을 수 있다면 내 목숨 하나는 내놓을 수 있어. 난 이미 한 번 실패해서 만회할 기회가 필요해."
앨버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전해듣기로는 페일리는 에레브의 부탁을 받아들여 플룻래빗을 먹었지만, 에레브가 환호하는 광경은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침울해진 얼굴로 페일리를 돌려보냈다던가. 명백한 실패였다.
"……후회하지 마."
"여기 안 들어가면, 더 후회할 것 같아."
앨버트는 큼지막한 문을 두드렸다. 이 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가문은 보통 가문이 아닌 듯 규모가 커다랬다. 비교적 약소가문에 해당하는 페일리와 앨버트였기에 살짝 주눅이 들었다.
곧이어 작은 여자아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델리오 님을 찾아뵙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실례지만, 만나게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앨버트는 극진하게 예를 차렸다.
"죄송하지만 오빠는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있어요."
"델라즈 교수님의 부탁으로 온 것인데……어떻게 안 될까요?"
여자아이는 흠칫하더니, 잠깐 기다려달라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저 애가 델리오의 동생이겠지?"
"아마도."
문이 빼꼼 열리더니, 여자아이가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앨버트는 주위를 경계하며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오빠는 곧 나올 거에요."
앨버트와 페일리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곳이 적진 한복판인 것을 알았기에 잡담을 나누는 등의 경솔한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방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델라즈 교수님의 책…….'
델라즈의 책은 아카데미 곳곳에도 퍼져 있는 것들이었다. 레블이나 프로바이오 같은 도시에서 산다면 델라즈의 존재를 모를 수 없을 정도로.
'델리오, 라고 했지. 이름이.'
이 저택의 주인은 델라즈의 옛 제자인 델리오라고 했다. 델라즈와 이름이 비슷해 물어보니, 옛 제자가 델라즈를 존경해 멋대로 개명한 것이라고 한다. 얼마나 델라즈에게 진심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곧이어 건장한 체구의 남성이 들어왔다. 남자는 성큼 들어와 상석에 앉았다.
"그래, 교수님이 부탁해서 왔다지. 무슨 일이지?"
앨버트는 일이 뭔가 꼬였음을 직감했다. 델라즈의 말대로라면 델리오는 델라즈를 '스승님'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호칭이 스승님에서 교수님으로 한 단계 격하되었다. 이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아니, 그것보다 우선 이걸 확인해야겠군. 너희는 교수님과 어떤 관계이지?"
하지만 일이 아예 틀어진 건 아닌 듯했다. 델리오는 앨버트와 페일리의 정체를 모르는 듯했다.
"저희는 아카데미 학생입니다. 델라즈 교수님께 마학을 배웠던 학생들입니다."
"마학이라……교수님은 참, 의미가 없는 짓거리들만 골라서 하시는군. 됐다, 왜 왔지?"
"교수님의 말씀을 전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앨버트는 운을 띄운 후, 잠깐 심호흡을 했다가 입을 열었다.
"교수님은 델리오 님을 찾고 계십니다."
"나를 찾아? 왜지?"
"델리오 님을 다시 제자로 들이고 싶다고 하십니다."
"……뭐?"
델리오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게 정말이냐?"
"네. 대신 델리오 님이 갖고 계신 책들 중 하나를 넘겨줄 수는 없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책 쪽이 진실을 말하고 있군. 무슨 책이지?"
"역적 베르노바가 갖고 있던 책이라고 말씀드리면 알아들으실 거라고……."
델리오가 앨버트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너희는, 그 책이 무슨 책인지 알고 있나?"
"저희는 모릅니다. 그저 말씀을 전달해주는 역할입니다."
"전령인가……아카데미 학생을 전령으로 부려먹으시는 건가. 귀찮은 거 싫어하시는 성격은 여전하시군."
델리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됐다. 돌아가라."
"네?"
"그 책은 넘겨줄 수 없다. 돌아가서 교수님께 전해라. 나는 더 이상 교수님의 제자가 아니니 그분을 스승님이라 부를 이유도 없으며, 이제는 독립하겠다고."
"델리오 님."
페일리가 차가운 음색으로 말했다.
"델라즈 교수님은 델리오 님을 애타게 찾고 계세요. 델리오 님이 필요하시다면서요."
"그렇다면 더더욱 불가능하다."
델리오가 페일리를 바라보았다.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대가'로 나를 제자로 들이려고 하신다는 건, 내가 목적이 아니라 책이 목적이신 거겠지. 나는 더 이상 그 같은 감언이설에 홀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리고, 내 이름은 더 이상 델리오가 아니다. 얼마 전에 개명했으니 교수님께도 그리 전해라. 내 이름은 베리오라고. 내가 목적이 아니라 책을 목적으로 두고 계신 이상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델리오──베리오는 그렇게 말한 후 페일리와 앨버트를 쫓아냈다. 베리오가 확고한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기에 둘은 어쩔 수 없이 도망치듯이 나왔다.
"……."
둘 사이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침묵이 감돌았다. 에레브의 죽음을 막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왔지만, 이번에도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헤맸지만, 자신들의 능력은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보잘것 없었다.
앨버트는 상황을 정리했다.
델라즈의 말에 따르면 델리오──베리오는 델라즈에게 미련을 품고 있으며, 다시 델라즈의 제자가 될 수 있다면 그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든 내어줄 터였지만, 어째서인지 델리오는 그것을 거부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델리오는 이름을 베리오로 개명해버렸다. 델라즈를 존경해 이름에 델 자를 붙여 개명했는데, 거기서 델을 빼버린 것이었다. 이미 베리오는 델라즈에게서 미련을 버렸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우선, 돌아가자. 여기는 위험해."
페일리는 대답하는 것 대신 잔뜩 흘러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정말 애들 안전한 거 맞죠?"
"아,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하냐."
"아저씨를 제대로 믿을 수가 있어야지……."
"너무하는구나. 그래도 내 네가 아끼는 애들 사지로 몰아넣겠냐?"
그건 그렇지만, 느낌이 쎄하다는 말이지. 내가 찾아갔을 때도 다짜고짜 칼빵부터 날린 놈이었다.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당장은 델라즈를 믿으니까 참고 기다리겠다만,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자꾸만 문 쪽을 곁눈질하게 된다. 당장이라도 저 문을 박차고 나가서 프로바이오로 향하고 싶은 욕구를 최대한 꼬깃꼬깃 접어서 어딘가에 멀리 던져버렸다.
"그리고 너, 교회는 안 가보냐?"
"……거긴 좀, 그런데. 지금은 일단 기다려보려고요."
"뭘?"
"교회랑 세브레 뒤 좀 캐볼까 싶은데."
델라즈에게는 이미 세브레의 이야기를 해놓았다. 처음에는 뭐 그런 미친 놈들이 다 있냐며 혀를 차던 델라즈였지만, 나를 이용해 교회를 적대할 계획인 것 같다고 말하니 썩은 얼굴로 절대로 그러지 말라며 내게 충고했다.
"……세브레 포기하라니까?"
"아니, 뭐. 정말 세브레가 교회 이길 수 있으면 세브레한테 붙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요."
"그게 퍽이나 가능하겠다. 광신도 새끼들은 어떻게 행동할 지 몰라. 네가 조금이라도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면 당장이라도 교주가 광신도들에게 명령해 네놈을 범할 거다."
"이런 시발 미친 아저씨가 이제는 성희롱을 대놓고 하네."
"그러니까 섣불리 행동하지 말라는 거다, 이 화상아. 너 하나 살리고 만족시켜주려고 몇 명이 발벗고 뛰어다니고 있는데, 정작 네가 트롤짓해서 다 말아먹으면 되냐."
맞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어서 좀 빡쳤다. 나를 위해서 이것저것 해주는 건 고맙긴 한데, 내가 죽을 생각이라고 착각해서 멋대로 제자놈에 대한 것을 앨버트와 페일리에게 알려준 당사자가 저리 말하니 짜증이 났다.
"서클보단 목숨을 우선시해라. 너한테는 아니꼽게 들리는 말이겠지만, 반대로 목숨이 붙어 있어야 서클도 회복할 수 있는 거 아니겠냐. 넌 지금 주객이 전도되어 있어."
"하아……."
"교회에 가서 눈도장이라도 찍어둬라. 나는 교회랑 척질 생각 없습니다, 하고 못을 박아두라고."
"예, 예……."
대답은 해도 귀찮으니까 안 갈 거다. 세피르도 기숙사까지 찾아오진 않을 테니 기숙사에서 안 나가면 되는 거겠지. 우선은 나오는 신문으로 교회의 동태를 감시하던가 해야겠다.
……아닌가? 신문부는 이미 교회에 매수되어 있던가? 옘병. 잘 모르겠다. 내가 이제 무엇을 하면 좋은지.
일단 애들이 돌아오고 무사한 걸 확인하면, 아타나시아와도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아재."
"왜."
"애들 간지 얼마나 됐어요?"
"아침에 나갔으니, 곧 올 거다."
"언제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이 아저씨도 대답해주기 여간 귀찮았는지 점점 말이 짧아지고 있다. 나쁜 새끼. 누군 지금 불안해 죽겠는데. 그나마 델라즈가 저렇게 말하니까 참는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당장 아타나시아 데리고 거기 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인내심이 한계치에 다다랐을 무렵, 누군가가 1층의 현관문을 두드렸다. 델라즈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빠르게 문을 박차고 나가 1층으로 내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교수님?"
그곳에는 페일리와 앨버트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의 손을 잡았다.
"……일단 들어와요. 우리 얘기 좀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