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9)2부 056
** ** **
"일이 밀려 멀리까지 배웅해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나인 씨가 죄송할 게 뭐 있나요, 지금까지 제가 나인 씨의 시간을 빼앗은 게 문제죠."
탁큰의 마차대기소. 예정대로 우리는 탁큰에서 아케즈로 향하는 상행에 몸을 맡겼다.
카웅은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와서는 인사를 건넨 것으로 마무리했고, 마차대기소까지 배웅하러 나온 사람은 펠과 나인. 사실 마차대기소 이상으로 마중나올 곳이 없으니 사실상 최대한의 예의였지만, 굳이 그런 걸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페일리 또한 나인에게 인사하고, 앨버트 또한 펠에게 인사했다. 근데 어째 앨버트의 경우에는 그냥 선생님이 아니라……스승님을 대하는 느낌으로 펠에게 극진히 예를 차려서, 뭔가 기분이 좀 그랬다.
…….
왜 내 기분이 별로지? 잘 모르겠다.
탁큰까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태운 마차는 정부에 고용된 마차였다. 정확하게는, 탁큰에 올 때 우리를 태워줬던 그 마부와 마차였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두 달 동안 뭘 했냐고 마부에게 물으니.
"두 달 동안 휴가를 보냈습니다."
"……."
"다 설녀님 덕분입니다."
이 마부, 올 때는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나. 호칭이 에레브 님에서 설녀님으로 바뀌었다…….
마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아이들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곯아떨어졌다. 각자 양쪽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고로롱거리는 게 귀여웠다. 피곤해도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겠지. 다음에 갈 곳은 정말 쉴 곳이라 다행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손에 깍지를 쥐고 마찬가지로 잠을 청했다. 어느 순간 잠에서 깨어났을 때, 페일리와 시선이 맞닿았다.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짓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깍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두 사람 다.
그러다가, 마차가 덜컹 멈춰섰다. 이따금 바퀴가 돌뿌리를 넘으며 덜컹거리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이번처럼 마차 자체가 요동치는 건 처음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으나──
"저희가 먼저 나가볼게요."
……라는 페일리의 말에 마차에서 대기하게 되었다. 제자들에게 보호를 받는 교수라……나는 쓸모가 없는 존재였다. 씁쓸하군.
수 분이 흐르고, 페일리가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별 거 아니었어요, 교수님. 고블린 떼가 나타났대요.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페일리, 한 마리만 구해오세요."
페일리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상행을 습격하는 고블린 떼는 무척이나 잦다. 하지만 내가 몸을 담근 상행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신뢰도가 높은 곳이니 별 문제는 없겠지만, 갑자기 시험해보고 싶은 게 생겼다.
"어째서요?"
"저 한 번 싸워보게요."
나는 배낭에서 단검을 꺼내들어 마차에서 내렸다. 조금 어두웠다. 곧 있으면 밤이 찾아오겠지. 어차피 멈춘 거 오늘 야영은 여기서 할 확률이 높았다. 불침번들이 고생 좀 하겠지만 내 알 바 아니고.
마침 호위대장이 아케즈 사람이었다. 나는 호위대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고블린 한 마리를 얻어왔다. 고블린은 굵은 나무막대기에 묶인 채로 사납게 으르렁대고 있었다. 나는 고블린을 적당히 넓은 바닥에 모닥불을 키워 빛을 밝히고 내려놓았다.
"페일리, 실드 두르고 쟤 구속 좀 풀어주세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정 위험하겠다 싶으면 나한테 실드 둘러줘요."
내 강권에 결국 고블린의 구속이 풀렸다. 나와 고블린의 대치 상태가 이루어졌다. 요 근처 사람들의 이목이 죄다 이쪽으로 몰렸다. 고블린은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것인지 이곳저곳 노려보며 케르륵거린다. 나는 앞발을 쾅 바닥에 찍어 고블린의 시선을 내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역수로 쥐는 게 베어낼 때는 더 편해.
단검을 쥐고 있는 손을 앞으로 뻗어 자세를 잡았다. 나인에게 배운 건데, 휘두르기에도, 찍어내기에도, 베어내기에도 써먹을 수 있는 자세라고 한다.
고블린은 한참을 케르륵거리다가, 내게로 돌진해온다. 내가 가장 약한 인간이라는 걸 파악한 듯했다.
고블린은 지구력이 강한 마물이다. 낮은 키 덕분에 넘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무게중심도 잘 잡혀 있어서 떼로 몰려다니는 걸 토벌하기란 쉽지 않다.
그에 반해 내 앞에 있는 건 한 마리. 그것도, 내가 지금껏 수백 수천 마리는 상대해왔던 고블린.
경험에 의거한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딱히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안전불감증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이 상황이 실전이 아니라 장난처럼 여겨진다.
시선을 흘낏 돌리니 페일리와 앨버트가 당장이라도 나설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내가 위험에 처하면 달려나와서 이 고블린을 고블린이었던 무언가로 만들어버리겠지.
나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고정시키고, 허리를 살짝 굽혔다. 마침내 고블린이 내 지척에까지 다가와 내게 달려들었을 때──
"교수님!"
나는 단검을 쥐고 있는 팔을 휘둘러 단검을 고블린의 입속에 박아넣었다.
- 크라악!
"……후우."
페일리가 했던 것처럼 최대한 동체시력을 활용해본 건데, 되긴 되네. 이렇게 단련을 해야겠다.
고블린은 아직 절명하지 않았기에, 나는 검지로 코등이를 왼쪽으로 살짝 돌렸다. 불길이 일며 고블린의 몸에 불이 붙었다.
- 케르라이악!
하도 버둥거리길래 아예 바닥에다가 꽂아넣었다. 목 뒷부분이 뚫려 바닥에 고정된 고블린을 한참을 더 케르륵거리다가, 어느 순간 움직임이 멈췄다. 혹시 몰라 단검을 아래로 부욱 움직여 고블린의 몸을 헤집었다. 이래도 안죽었으면 진짜 네크로맨서 같은 게 얘를 살렸다고 봐야겠지. 좀비가 됐거나.
아케즈로 돌아오는 도중의 큰 해프닝은 이걸로 끝이었다. 이틀째 오후, 마차는 예정대로 아케즈의 국경에 도착했다.
"……응?"
그런데, 다른 마차들은 원래 경로로 가는데, 우리가 타 있는 마차만 다른 곳으로 향했다. 나는 마차 앞부분을 두드려 마부에게 물었다.
"저는 의뢰받은 일을 해낼 뿐입니다."
달리 말해, 이것도 아타나시아의 의도라는 것이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몇 시간을 더 나아가니 마차가 멈췄다.
"내리십시오."
마부가 지극히 정중하게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마차에서 내린 나는 말문이 막혔다.
"……."
여기 델라즈 저택 바로 앞이잖아?
델라즈를 먼저 찾아오려고 했던 건 맞는데……여기까지 마차를 끌고 들어오다니, 아무리 통령이라고 한들 이래도 되는 건가.
나는 애들을 먼저 돌려보내고 델라즈 저택으로 들어갔다. 아케즈의 신분증, 이건 또 오랜만이군.
"아재?"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확인한 결과, 델라즈는 정말 놀랍게도 침실에서 자고 있었다. 이 시간에, 델라즈가 책을 쓰지 않고 잠을 자고 있다고. 지금 오후다. 이 책에 미친 사람이 책을 안 쓰고 있다니까? 지금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내 어휘력이 부족한 관계로 생략하겠다.
자는 사람 깨우긴 좀 미안하긴 한데, 좀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해서 그냥 흔들어서 깨웠다. 몇 번 눈동자를 깜빡이던 델라즈는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오랜만이에요, 아재. 두 달만이네?"
"그래, 오랜만이다……."
델라즈가 목을 이리저리 꺾어 스트레칭한다.
"……근데 여긴 또 왜 왔냐? 곱게 기숙사 가서 여독이나 풀 것이지. 탁큰에서 별로 안 힘들었나보군."
"그건 아니고, 아재한테 맡길 게 있어서요."
나는 배낭에서 탁큰에서 챙겨온 마도구를 꺼내들었다.
"이게 뭐냐."
"마나의 흐름을 강제로 억제해서 사람의 움직임을 멈추는 마도구."
"……이런 건 어디서 얻었냐?"
"으음, 일단 카웅 전하께는 허락을 받았어요."
델라즈가 내게서 마도구를 건네받더니 이리저리 살핀다.
"설치형에, 일정한 구역을 정해놓고……멈추는 건 수동으로 하는 거군."
"그걸 보면 알아요?"
"……나는 원로원의 베르노바다."
그건 그렇지.
"그래서, 이걸 왜 나한테 맡겨?"
"내가 갖고 있긴 좀 그렇고, 그렇다고 마법연구동에 갖다놓기도 좀 그렇잖아요. 빼앗길까봐. 아저씨가 맡아줘요."
"이걸 쓸 데가 어디 있다고. 높은 서클의 마법사는 못 멈춰."
"에이, 그래도 유비무환이지. 마물의 움직임도 멈출 수 있으니 어떻게든 쓸모가 있지 않을까요?"
델라즈가 책상 위에 마도구를 올려놓았다.
"일단 그건 알겠고……다음은 어디로 가냐?"
"오르가니아. 가서 낚시하게요."
"바로 가게?"
"그건 아니고……아타나시아한테 말은 해놔야죠? 이번에도 애들 데려갈 거라."
"기다려라."
델라즈는 몸을 일으켜서 마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정도 흐르자, 아타나시아가 공중에 뿅 나타났다.
"오랜만이에요, 에레브 양."
아타나시아는 날 보자마자 다짜고짜 껴안았다. 가슴에 고개가 파묻혀 질식해 죽는 줄 알았다.
"……미안해요."
"……아니에요. 진귀한 경험이었으니 됐어요."
아타나시아는 이해하지 못한 듯했지만, 아타나시아 같은 미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을 일이 얼마나 된다고.
"여행은 어땠어요?"
"아마 탁큰 정부에서 조만간 연락이 올 거에요."
맥락에 맞지 않는 말. 하지만 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거 연락 받자마자 저한테 알려줘요."
"어떤 연락인데요?"
"앨버트가 칼에 찔렸어요. 그 찌른 새끼들 재판에 넘길 건데, 재판 결과를 보내준다고 해요."
아타나시아는 물론이고 델라즈마저 깜짝 놀라 무슨 일이 있었냐고 추궁했고, 결국 나는 아는대로 전부 대답했다. 그러자 아타나시아와 델라즈의 표정이 팍 썩었다.
"……일단 잘 참았다. 국제적인 분쟁을 조장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니."
"그건 그렇다고 해도……국빈의 애제자를 칼로 찌른다니, 보통 또라이들이 아니네요……"
둘 다 고개를 푹 숙이고 고민을 하는 것이, 뭔가 좀 달갑게 보이진 않아서 박수를 쳐 시선을 모았다.
"여행은 그것만 빼면 괜찮았어요. 이제 고블린 하나 정도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잡을 수 있고. 그래서, 재판 결과만 나오면 바로 애들 데리고 이번에는 오르가니아로 갈 생각인데. 문제될 거 없죠?"
아타나시아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에도 부탁해요, 아타나시아. 덕분에 여행 즐거웠어요. 역시 아타나시아가 최고에요."
뻔한 입발린 말이지만, 아타나시아는 그것도 기꺼웠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맡겨달라고 말했다.
나는 결과에 만족하며 기숙사로 돌아왔다. 도중에 아케즈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역시 탁큰과는 확연히 달라.
그리고, 침대에 엎어졌다. 최근까지 잘 못 잤으니, 전부 몰아서 지금 자주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