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8)2부 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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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모양새는 잡혔네요."
"……내일모레가 복귀인데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일모레면 아케즈로 복귀하는데, 이제 겨우 모양새가 잡혔다니.
나는 단검을 휘두르던 것을 멈추고, 나인을 쏘아보았다.
"이게 어느 정도 모양새가 잡힌 거에요? 폼이 좋은 게 아니라?"
나는 싸움의 이론에 관해서는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었다. 사람은 물론이고 각종 마물들의 약점이 어디인지 훤히 꿰뚫고 있으며, 마나를 어떻게 운용해야 효율적인지도 알았고, 체술을 어떻게 활용해야 잘 죽일 수 있는지도 알았다.
호신술은 그중 하나를 사용했다. 체술. 아무리 내 몸이 허약해빠졌다지만 지금까지 몸에 익은 체술이 있기에 괜찮을 줄 알았는데.
"에레브 님이 갖고 계신 '잘한다'의 기준은 마법사 아닌가요?"
"그건 그렇죠."
"무인 입장에서는 다르게 책정해야죠. 에레브 님은 이제 실드를 쓸 수 없는걸요. '죽인다'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막는다'와 '흘린다'와 '피한다'에 더욱 집중해야 해요. 근육도 조금 생기셨으니, 피하는 건 어렵지 않게 하시겠네요."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부분을 찌르는군…….
"……가만, 그럼 페일리가 썼던 마도구 저도 써도 됐던 거 아니에요?"
"안 돼요. 페일리 양은 근육이 어느 정도 잡혀 있었고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쓴 거지, 에레브 님이 쓰시면 다칠 확률이 매우 높답니다."
약한 게 죄다.
걷기 운동만 할 게 아니라 뜀박질이나 윗몸일으키기, 플랭크나 스쿼트 같은 것도 좀 할걸 그랬군.
"나인 씨가 봤을 땐, 제가 고블린이랑 싸우면 이길까요?"
"음……."
나인이 멀찍이서 내 몸을 위아래로 훑는다.
"잘만 하면요? 피하는 것만 제대로 하시면 죽이는 건 어렵지 않게 하실 테니까."
"나쁘진 않네……."
내가 쥐고 있는 단검. 푸에고와 접목시킨 마도구. 검신에서 불길을 일으키는 능력까지 사용한다면 승률은 더욱 높아지겠지. 고블린이라도 이길 수 있는 게 어디냐. 바이코 같은 곳은 그래도 좀 쉽게 가겠군. 거기 가장 많이 사는 마물이 슬라임인데, 슬라임 정도는 쉬울 테니까.
……아닌가? 어쩌면 내가 실습을 데리고 나갔던 학생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나는 내 학생들의 실수를 답습하고 있는 것일까……모르겠군.
"자아,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입니다. 사실 수업이라고 할 것도 아니지만요."
"벌써요? 이제 점심 조금 넘은 것 같은데. 먹은 거 소화도 안 됐어요."
"저희가 준비한 걸 아직 못 해서 말이에요."
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해가 저문 밤이 되자 나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환영한다!"
나인이 우리를 안내한 곳은 왕궁의 큰 방이었다. 방 안에는 진풍경이 벌어져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술자리이고, 조금 복잡하게 말하자면 이게 당최 뭐인지 모를 술자리다.
우선, 탁큰의 국왕인 카웅이 카페트가 깔린 바닥에 앉아 있다. 주위를 살피니 원래 있어야 할 의자나 각탁의 경우에는 아예 구석에 밀어놓은 모양이었다. 카웅의 앞에는 술잔과 술병, 음료와 음식 등이 마찬가지로 바닥에 깔려 있다.
흡사, 한강에 가면 볼 수 있는 풍경. 예의고 위엄이고 나발이고 죄다 갖다 버린 듯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편했다.
뭐라고 말을 하든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나도 그냥 카웅의 반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인도 싱글벙글 미소짓고 앉고, 페일리와 앨버트는 한참 동안 정신을 못 차리다가 조심히 앉았다.
카웅이 내게 잔을 들이밀었다. 모양새만 보면 여자에게 술을 따르라 요구하는 아저씨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마치 오랜 친우에게 술 한 잔 따라달라 요청하는 몸짓이었다. 나는 조심히 술병을 두 손으로 들어올려 술을 따랐다. 잔이 거의 뭐 맥주잔 수준이었는데, 카웅은 아예 원샷을 때려버렸다.
"크으, 에레브. 네가 탁큰에 처음 온 날 기억하냐?"
"기억이야 하죠."
그동안 카웅과도 많이 대화했던 영향일까, 어느새 내 말투도 평어(平語)가 되어 있었다. 카웅도 나무라지 않는 걸 봐서 문제는 없었다.
"나는 너를 환대할 목적으로 술자리를 준비했다. 네가 술을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고 말이지."
"……아타나시아가 허락을 했어요?"
"본격적으로 단련에 임하기 전에 술 한 잔 하는 건 나쁘지 않지."
역시, 카웅은 대인배다. 똑똑하고 현명하다. 술──주도(酒道)란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정확하게는 네 쾌차를 기원하며 '첫 번째 해외여행'을 기리는 목적에서 준비한 것이었지만……."
"……아."
"페토라르에 먼저 다녀온 걸 확인하고 일단은 취소했다."
카웅은 소인배다. 멍청하고 속이 좁다.
"원래는 기간이 끝나면 그냥 보낼 계획이었지만, 네 제자가 피습을 당한 것에 대해 사과라도 할 겸 조촐하게나마 준비해봤다. 내일은 시험이 있어서 시간이 안 되고, 내일모레에는 네가 돌아가버리니 오늘이 제격이었지."
……대인배다.
"특별히 탁큰의 특산물로 내왔다. 술을 좋아하는 너라면 한 번쯤은 마셔본 적 있겠지. 악세발트다."
"사랑합니다."
악세발트고 포도주고 뭐고,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된 이후로는 전부 압수당했다. 페일리와 한 방을 쓰기에 몰래 마실 수도 없었다. 누구보다 술을 사랑하는 나라에서 술을 못 마신다니, 절망에 빠져 한동안 처참한 기분이었지만, 방금 카웅의 말로 모두 해결되었다.
악세발트, 숙취가 없지만 강한 술!
아타나시아에게 들키지 말라는 심산으로 마시게 해주는 거겠지.
"……거, 그런 말은 좀 하지 마라. 나도 가정이 있는 몸이니."
"네!"
"왜 아타나시아가 널 어려워했는지 알겠군……."
미안한데 뭐라는 건지 귀에 하나도 안 들어온다. 나는 악세발트를 병째로 들어올려 나발을 불려다가──
"……."
뭔가 찔끔해서 카웅을 바라보았다. 카웅은 그런 날 생전 처음 보는 생물을 보는 것처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역시 악세발트를 병째로 들어올려 나발을 불려다가──
"……."
이번에는 페일리, 앨버트와 눈이 마주쳤다. 둘 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차마 여기서 언성을 높일 수는 없으니 표정으로 나를 압박하는 듯했다.
"……너희, 다음에도 나 따라올래요?"
두 사람이 눈을 껌뻑였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눈치.
"내일모레 복귀해서, 이번에는 오르가니아로 갈 거에요. 거기서는 진짜 휴가를 즐기고 낚시를 할 건데……여기에서처럼 오래 있진 않고, 일주일 정도? 따라올래요?"
"따라가도 되나요?"
앨버트가 어딘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조심히 물어왔다.
"사람 많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너희랑 바닷가에서 낚시하면서 만담이라도 나누며 술이라도 마시면 행복할 것 같고."
"갈게요."
페일리가 대답했다. 얘는 깨작깨작 과자를 집어먹고 있었다.
"앨버트, 너는요?"
"당연히 가겠습니다."
"조오아요. 그럼 둘 다 데려갈 테니 오늘 술 마시는 걸 허락하세요."
두 사람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지만, 결국에는 수락했다. 나는 안주도 먹지 않고 우선 악세발트 한 병을 모두 비웠다. 당연히 원샷으로.
"프후아……."
사실 요 두 달간 금단증상으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었는데, 알코올이 머리에 좀 돌기 시작하니 살 것 같군.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올리니, 모든 사람들이 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요?"
"그걸 한 번에 원샷을 때려버리다니……에레브 님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뭐가요오?"
"보통 모험가들도 그거 다는 안 마셔요."
나는 보통 모험가가 아니라 대단한 여자니까 상관이 없다.
나인의 말을 대충 무시하고 과자를 집어먹으니, 그제야 이상한 점이 눈에 잡혔다.
"저기이, 나인 씨."
"네?"
"펠 씨는요오?"
앨버트의 선생님인 대머리 마초 펠은 어디에 있냐. 시녀장이자 페일리의 선생님인 나인이 여기 있으면 집사장이나 앨버트의 선생님인 펠도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인은 흠칫하더니, 카웅을 바라보았다. 둘이 잠시 시선을 교환하더니, 나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걔는 지금 체단실에 있어요."
"체단시일?"
"네, 뭐……일종의 복수죠? 앨버트 군을 찌른 놈들, 아직 재판에 넘기진 못했거든요. 재판에 집중하려면 저와 펠이 동원되어야 하는데, 에레브 님이 탁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그게 불가능하니까요."
"……으으음, 그래서요오?"
나인이 슬쩍 앨버트에게 눈짓했다.
"단련을 명목으로 앨버트를 찌르는 데 일조한 애들을 고문하는 거죠."
"네?"
앨버트가 눈에 띄게 당혹스러워한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재판에 넘겨지기 전까지는 아직 학생의 신분으로 있는 건데, 그럼 너무 괘씸하잖아요? 그러니까 사적으로 복수하는 거에요. 앨버트 군을 위해서. 펠이 앨버트 군에게 뭐라고 하면서 여기 불참했나요?"
"오늘 밀린 업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만……."
"흥, 아카데미 업무는 거의 저 혼자서만 하는걸요. 다 거짓말이에요."
나는 나인의 무릎을 툭툭 쳐 나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나인 씨, 걔네 재판 결과는 꼭, 꼬옥 아케즈에 보내주셔야 해요. 알겠지요오?"
"명심할게요."
솜방망이 처벌이라면 내가 직접 지랄해서라도 그 새끼들에게 실형을 내릴 거다. 내 사랑스러운 애새끼를 건드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지…….
술판이 길게 이어졌다. 어느새 카웅과 나인도 악세발트를 입에 대기 시작해 얼굴이 벌갰고, 페일리와 앨버트는 음료를 마시고 있다. 저게 뭔지 넌지시 카웅에게 물어보니 포도쥬스란다. 뭔가 수상쩍어서 가로채 마셔보니 포도주였다.
"……."
이런 날도 있는 거지, 그래…….
저녁을 이미 먹고 온 거라 그런지 다들 안주를 많이 먹지는 못했다. 기껏해야 위장에 쌓인 음식물들 의 틈새 사이를 술로 메우는 정도. 그것도 들이킨 악세발트가 세 병이 넘어가니 슬슬 어지러웠다. 내가 입밖으로 내는 말도 더 이상 인간의 언어라고 부르기 민망하게 뭉개졌다. 굳이 그나마 가까운 것에 빗대자면 아기의 옹알이 정도가 아닐까…….
"에레브 님, 들어가서 주무셔요."
어느새인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뒤로 벌렁 엎어져 있었다. 눈에 보이는 건 사람들의 얼굴이 아니라 새하얀 천장이었다. 이 이상 마셨다간 아무리 숙취가 없는 악세발트이더라도 혈중알코올 농도가 너무 높아 객사해버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나는 나인의 요구를 수용했다.
페일리의 도움을 받아 비틀비틀 걸어가다──힘이 다해 풀썩 주저앉으니 페일리가 아예 날 업어들었다.
"……고마워요오……."
"……교수님 엄청 가볍네요."
그야, 그럴 수밖에. 모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됐으니 이런 체형과 외모는 유지하고 싶어서 어느 정도는 관리를 했다. 그게 지금의 나다.
왕궁에서 나오니 시원한 바람에 앞머리가 나풀거린다. 뜨겁게 달궈졌던 이마가 식혀지면서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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