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2)2부 049
거구는 힘없이 쓰러졌다. 앨버트는 그대로 도끼를 쥐고 있는 상대방의 손목을 내리찍었다. 마찬가지로 손목에 검이 닿기 직전에 근육이 일제히 정지했다. 경직은 곧장 풀리고, 곧이어 사람 몇 명이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거구를 싣고 사라졌다.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야. 출력을 조절했으니.'
일부러 코등이를 왼쪽으로 살짝만 돌렸다. 죽진 않겠지.
앨버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직접적인 상처를 입히는 게 불가능한 시험'에서 상대방을 실려나가게 만든 앨버트는 그야말로 요주의 대상이었으며, 관중석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앨버트를 향하고 있었다.
'……최대한 숨기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꺼냈네.'
이 단검들은 스승인 펠이 몰래 구해다준 것이었다. 기본 5원소와 접목시킨 단검이었으며, 코등이를 왼쪽으로 돌리면 발현시킬 수 있었다. 앨버트는 그때 상황을 회상했다.
'이거 받아라, 앨버트.'
'이게 뭡니까?'
'마법이 깃들어 있는 단검.'
앨버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걸 써도 되는 겁니까?'
'무기에 제한은 딱히 없어. 그것도 무기니까 별 상관은 없다. 남학생 중 수석이었던 내가 잘 알아.'
그리고, 하고 펠은 말했다.
'형평성이 안 맞거든. 형평성이.'
'형평성……말입니까?'
'그래. 나인 그년은 이미 여자애한테 마도구를 쥐어준 모양이야. 그러니까 너도 이걸 써라.'
앨버트는 순순히 검을 받아들고, 등에 멨다. 이러면 위치상 상대방에게 들킬 일이 없었다. 어차피 이 앞에서 대결 상대가 계속 나오는 거라면, 뒷모습을 보여주지만 않는다면 은밀히 감춰둘 수 있었다.
'최대한 활용해서, 당당히 합격하고 소원을 비는 거야.'
앨버트는 다짐을 굳히고 단검을 집어넣은 다음, 장검을 집어들었다. 아직 주변에서는 경기가 한창 진행되는 도중이었다. 조금은 쉴 수 있으리라.
'2승.'
시간이 흐르고, 다음 시합이 시작되었다. 앨버트는 지금까지 배워왔던 모든 기술과 지식을 동원해 어렵지 않게 적들을 쓰러뜨려나갔다. 아예 지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패배와 승리를 반복한 결과 현재 성적은──
'10승, 4패.'
도합 여섯 경기가 남아 있었으며, 그중 다섯 경기를 이겨야만 했다.
'할 수 있을까.'
승률을 점치던 앨버트는 고개를 강하게 내저었다.
'해야만 하는 거다. 교수님은 안 보이시는 걸 보니 페일리한테 가신 모양이네.'
이미 많은 유형의 사람들과 대결했다. 활을 사용하는 궁수, 자신의 힘을 믿고 도끼를 내려찍는 사람, 창의 긴 사정거리를 이용해 깊숙이 찔러오는 사람, 자신과 같은 장검을 사용하는 사람, 거기에 더해 대검을 사용하는 사람까지. 사실상 앨버트가 알고 있는 무기란 무기는 모두 상대했다.
앨버트에게 무인의 재능이 있다던 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앨버트는 승리를 쌓아갔다.
'무인이 되지는 않을 거지만……교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익혀서 나쁠 건 없다고 하니까.'
다음 상대가 구역에 들어왔다. 장검을 쥐고 있는 평범한 남성이었다. 특출나게 몸집이 커다랗지도, 근육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지도 않았다. 아카데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일단, 1승 추가.'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사람에게 질 것 같진 않았지만, 앨버트는 검파를 손에 쥐었다.
호루라기가 울리고, 시합이 시작됐다.
장검과 장검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대와 나의 사정거리를 잘 파악하고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상대방이 먼저 빠르게 돌격해왔다. 검을 가슴 아래에 두고 찌르는 것처럼 베어내기 위한 준비자세였다. 이에 대응하는 방법은, 검을 일자로 세워 흘려보낸 다음 곧바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흐웁!"
예상한 경로로 검격이 들어왔다. 앨버트는 차분히 검을 세워 긁어낸 다음 목을 향해 수평으로 휘둘렀다. 장검은 길이가 길기에 손을 보다 아래에 두어야 하고, 따라서 검 윗부분을 타격하면 웬만큼 힘이 좋은 사람이 아니면 자세가 무너질 확률이 높았다.
상대방도 곧바로 자신의 복부를 향해 칼을 찔러오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속도를 보건대 필승이었다.
마침내 검이 상대방의 목에 닿기 직전 몸이 멈췄다. 근육이 강제로 정지하는 고통에 잠깐 신음하며 묵묵히 전적에 1승을 더하는 그때.
'어?'
상대방의 몸이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앨버트는 마치 주마등을 겪듯이 칼이 자신의 복부로 찔려오는 것을 눈으로 목도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몸이, 멈추지 않았어?'
푸욱, 장검이 앨버트의 복부를 헤집었다.
** ** **
"앨버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저 새끼 죽여버려요! 내가 다 해결해줄게!"
앨버트를 향해서 크게 소리질렀다. 여기서 목청이 떠나가라 부르짖는 새끼들보다 내 목소리가 더 컸다. 덕분에 목이 칼칼한 게 당분간 쉰 상태로 지내야 할 것 같지만, 앨버트에게 개수작을 걸려던 새끼가 나가떨어졌으니 후회는 없었다.
"……깜짝이야. 에레브 님, 소리도 지를 줄 알아요?"
"저도, 켈륵, 인간인걸요."
"물 마셔요, 물."
나인이 건네준 수통으로 목을 적시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이따 페일리 응원해야 되는데, 큰일이군.
나는 앨버트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앨버트가 들고 있는 무기도, 그거죠? 제가 갖고 있는 거."
"네. 그런 걸 만드는 곳은 거기밖에 없으니 분명해요. 펠, 이 산돼지 같은 새끼가 눈치를 챘나보네요."
"뭘요?"
"페일리 양에게도 마도구를 줬거든요."
아, 그럼 앨버트에게도 마도구를 쥐여줘야지. 어느 한쪽에만 주는 것은 불공평하다.
나인이 페일리에게만 마도구를 준 건, 아마 그 대머리 마초와 경쟁을 하는 게 아닐까. 내가 키워낸 학생이 더 성적이 좋다, 뭐 그런 거로. 결과적으로 좋게 풀렸으니 참견은 안 하겠다만, 내 애새끼들 갖고 이상한 경쟁은 안 해줬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정말 목이 베이는 줄 알고 식겁했단 말이다. 안전장치가 있다고 한들 만에 하나의 확률을 염두에 둬야 하는 게 아닐까. 아무래도 불안하다.
그래도 앨버트는 승승장구했다. 정확하게 9승 1패하는 걸 보고 일어났다.
"페일리 양 보러 가시게요?"
"네. 위치 좀 알려주세요."
"여기랑은 건물이 달라서……일단 나가요."
본래 마법사였던 앨버트가 무기를 꼬나쥐고 승률을 높게 유지하는 게 물론 대단하긴 한데, 내 눈에는 결코 쉽지 않게 보인다. 뭐가 어찌 됐든 많은 사람들과 연속으로 싸우는 거다. 지치겠지. 근육이 저리고 땡겨오겠지. 판단력이 흐려지겠지. 아마 이 이후로는 패배가 조금 더 쌓이지 않을까 싶다.
앞으로 6승만 더하면 합격이지만, 글쎄.
나는 나인의 안내를 받아 다른 건물로 진입했다. 지금 보니 이런 건물만 세 개가 있다. 원래 있던 건물이 너무 큰 탓에 그 뒤에 위치한 다른 건물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관중석으로 쭉 들어가 둘러보니, 여기도 전 건물과 딱히 다를 건 없었다. 최대한 시야를 넓히니, 마침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는 페일리가 보였다.
"최대한 저 근처에서만 싸울 수 있게 조를 짜놓았어요. 한 곳에 앉아서 구경하시면 돼요."
"고마워요."
나인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손님의 니즈를 파악하고 알아서 처리하고 담담히 보고하는 게, 솔직히 너무 멋지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었지.
자리를 잡고, 페일리 쪽을 내려다보았다. 페일리는 앨버트와 다르게 장검보다 길이가 살짝 짧은 검을 쥐고 있었다. 저건 장검도 아니고 단검도 아니다. 중검(中劍)이라고 불러야 하나?
뭔가 이상한 게 눈에 잡혔다.
"페일리가 갖고 있는 건 마도구가 아니네요?"
"네. 저건 그냥 가벼운 재질의 단검이에요."
"……페일리한테 줬다는 마도구는 뭐에요?"
무기가 아니라면 형평성이 맞지 않을 텐데.
"페일리 양은 앨버트 군처럼 근력과 체력을 믿고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요. 몸이 호리호리했죠."
"그거야 뭐……마법사이니까요."
"네. 하지만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그런 몸을 갖고 있으면서도 결투에서 승리해야만 해요."
뭐 당연한 소리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즉, 페일리 양은 힘싸움을 하기보단 기동력을 살려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공격을 회피하는 연습을 시켰어요."
"회피요?"
"네. 회피하고, 틈을 노려 기습하는 전술로 갈 거에요. 한 달 동안 지켜본 바로는……페일리 양은 쉽게 감정적이게 되긴 해도 머리는 좋아요. 어떻게 해야 승리로 향하는 길을 걸을 수 있는지 잘 알 거에요."
그래도 시험에서 통과하진 못하겠지만.
나는 나인의 시선에서 뒷말을 읽어냈고, 납득이 갔기에 침묵했다.
페일리의 전략에서 요체가 되는 부분은 회피가 아니라 기습이다. 기습은 즉,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해 허점을 보일 때 공격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 시험장은 사방이 뻥 뚫려 있어 다른 학생들이 시험을 보는 모습을 눈에 담기 쉽지.
페일리의 경기를 단 한 번이라도 눈에 담는 이상, 기습을 확실하게 경계할 것임이 분명했다.
운 좋게도 페일리는 고정위치가 아니라 계속 옮겨다녀야 해서, 굳이 페일리의 뒤를 시선으로 쫓는 경우가 아닌 이상에야 그런 일은 없겠지만……그래도 저건 앨버트 못지 않게 정신력과 체력을 소모한다. 페일리가 집중력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그리고 지난 한 달간 키워낸 체력과 근력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가 관건이군.
호루라기가 휘익 울렸다.
페일리의 상대는 방패와 장검을 들고 있다. 나무 방패라 그렇게 튼튼해보이지는 않지만, 무게가 가볍고 경도가 약한 페일리의 검으로 뚫을 수 있을 정도로 약하진 않을 것 같다. 방어구도 나쁘지 않게 갖추고 있는 것 같군.
사슬갑옷이 아니라 웬 중갑옷을 입고 있다. 저걸 페일리의 검이 뚫어낼 수 있으려나……. 안 될 것 같은데, 다치지만 않았으면.
상대방이 큼지막한 방패를 앞세운 채로 천천히 페일리에게 다가간다. 공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아예 구석으로 몬 다음 장검으로 깔끔하게 처리할 생각인 것 같다.
페일리는 굳게 유지하고 있던 자세를 느슨하게 풀었다. 상대방이 수동적으로 나오는 걸 확인하고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방패는 착실히 다가오고 있었다.
페일리는 검을 역수로 쥐고 방패로 몸을 던졌다. 덕분에 방패가 상대방에게 밀착되고, 상대방은 장검을 휘두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덕분에 방어 또한 굳건해졌지만.
방패를 사이에 두고 힘겨루기를 하는 두 사람. 페일리가 방패와 함께 상대방을 밀어내 넘어뜨린다면 승기를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페일리가 밀려넘어지면 확실한 페일리의 패배로 끝난다.
'어떻게 할래, 페일리.'
모험가를 실제로 업으로 삼았던 나의 눈에는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이 보인다. 방패는 공격을 막아주는 요새와 같지만 기동력 또한 현저히 낮춘다. 방패 무게도 그렇게 가벼운 게 아니겠지. 그렇다면 이야기가 간단해진다. 방패로 가릴 수 없는 뒤로 돌아버리면 된다.
물론 상대방도 그에 대응해 검을 휘두르던가 하겠지만, 달리 말하면 그 일격만 피하면 허점을 노릴 수 있다.
'방패로 몸을 가려 방어력을 챙긴다'는 사고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방패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그것이 승리로 향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혹은 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기에. 지금 상황만 봐도 명백하다.
저 사람은 그냥 방패를 놓고 옆으로 슬쩍 비키기만 하면, 페일리가 제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넘어질 거다. 그때를 이용해 처리하면 쉽겠지. 물론 이건 반대로 페일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지만……오히려 그래서 안타깝다. 페일리가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
"……."
페일리가 힘겨루기에서 밀렸다. 페일리의 상체가 뒤로 기우뚱 기울어진다. 이대로 가면 뒤로 넘어지고 만다. 바닥이 딱딱하진 않아서 큰 충격은 없겠지만, 누운 상태에서는 공격을 쉽게 피할 수 없다. 나는 페일리의 패배를 예감했다.
"어?"
──이변이 일어났다.
페일리는 뒤로 엎어지면서 방패의 밑부분을 발로 쳐올렸다. 방패를 손에 쥐고 있던 상대방은 그 충격에 뒤로 밀려 허우적대다가 마찬가지로 뒤로 엎어졌다. 두 사람 모두 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동시에 몸을 일으키며 각자 무기를 꼬나쥐었다. 상대방은 들어올리는 데 시간이 든다고 생각했는지 방패는 버렸다. 중검과 장검의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에레브 님, 이래도 페일리 양이 질 것 같아요?"
"……여기까지는, 정말 잘했지만, 리치를 극복하고 중갑옷을 이길 수는……."
"중갑옷이라고 해서 약점이 없는 건 아니에요. 만약 그렇다면 그것만 입으면 무적이겠죠. 중갑옷에도 약점이 있습니다."
나인이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중갑옷은 사슬갑옷과는 다르게 단단한 철판을 이어놓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사람의 관절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틈새는 남겨두고요. 특히 겨드랑이의 경우에는 틈새가 조금 커요."
"……그렇다면, 페일리는."
"맞아요! 페일리 양은 판단한 거에요. 걸리적거리는 방패만 치우면, 겨드랑이를 노려서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고! 리치든 뭐든 상관없이, 그게 가능하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