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1)2부 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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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준비는 됐냐."
시험 대기실, 앨버트는 전방을 응시했다. 살짝 들이치는 햇살 너머로 관중석이 엿보였다. 단언컨대 지금까지 살아오며 발을 들였던 곳 중 가장 컸다.
앨버트는 몸 상태를 점검했다. 오감 중 이상한 부분이라던가, 미처 챙기지 못한 무기라던가, 그런 건 없었다. 지난 한 달간 손에 익힌 무기──장검이 칼집에 꽂힌 채로 허리춤에 걸려 있었다.
"된 것 같습니다."
"흠."
앨버트가 지난 한 달간 스승으로 모셨던 대머리 마초──펠이 앨버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목표가 시험에서 통과하는 거라고 했지."
"예."
"그러기 위해서는 총 스무 번의 시합 중 열다섯 번 이상을 이겨야 한다. 가능하겠냐?"
앨버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능하게 해야 하는 겁니다."
"좋은 기백이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것도 참 웃기지만, 난 처음 너를 맡게 되었을 때 재수도 없게 옴팡진 것을 뒤집어썼다고 생각했다."
마법사가 환영받지 못하는 탁큰이었으며, 더군다나 앨버트는 공익을 위한 마법사가 아니라 견학을 온 마법사였다. 아카데미 졸업생 중 남성 최고의 무인 펠이 앨버트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법사에게 무예를 가르친다니. 무인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해서 대충 가르치려고 했지."
"……."
"하지만 첫날 밤에, 네가 날 찾아와서 한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첫날 밤, 앨버트는 잠을 자기 직전까지 단련했으며, 기숙사로 복귀하기 직전 펠을 찾아가 진심을 전달했다.
"한 명의 여자를 위해 분골쇄신의 각오로 내게 너의 진심을 설파한 게,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여색에 홀려 일을 그르치는 건 모험가가 해선 안 될 멍청한 행동 중 가장 제일인 행동이지만……네게서 느껴지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감이다. 전사로서의 감."
펠이 앨버트의 등을 툭 쳤다. 앨버트는 저 바깥으로 걸음을 뗐다.
"꼭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난 네 재능에 반했다. 가서 보여주고 와라. 마법사라고 해도 무인들을 무예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라. 네가 좋아하는 그 여자한테도 멋있게 보이라고."
"하하……감사합니다."
"또, 내가 말한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앨버트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페일리는 꼭 이기겠습니다."
"그래. 그 껌딱지 년한테 본때를 보여주자고!"
어두운 그림자와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경계 바깥으로, 발을 내밀었다.
천장이 뚫린 원통 모양의 건물──앨버트는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관중석은 시험에 응시하길 거부한 학생들로 채워져 있었다. 아직까지는 쥐죽은 듯 조용하지만, 시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 끌어모았던 열기가 펑 터지겠지.
에레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앨버트는 에레브가 자신을 보러 왔을 것임을 확신했다. 에레브 성격에 페일리를 먼저 쫓아다니는 귀찮은 짓을 하진 않을 것이기에. 하지만 페일리 역시 앨버트 다음으로 찾으러 갈 것이고, 그것이 에레브였으며, 앨버트가 좋아하는 여자였다.
반대편에서 사람이 한 명 들어왔다.
몸집이 거대하지 않았으며, 어깨도 좁았다. 냉장병기 따위를 휘두르는 무인이 아니라, 뒤에서 활로 저격하는 궁수였다.
앨버트는 대인전투에서 궁수를 상대할 때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지에 대한 수업을 떠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호루라기가 울렸다.
관중들은 지금껏 언제 침묵했냐는 듯이 함성을 크게 지르기 시작했다. 로움, 아이린, 로벨리아, 크룬──자신의 친구의 이름을 연호하며 응원했다. 앨버트의 이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다른 외침보단 한참 못할 정도로 미약했다.
앨버트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을 응원해주는 사람은 오로지 두 명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 두 명 전부 크게 소리를 질러 자신을 응원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앨버트는 삐익 하는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앞으로 빠르게 전진했다. 아직 검을 뽑기에는 일렀다. 상대방 또한 뒤로 도약하며 화살통에 손을 가져간다. 조금이라도 계산한 시간이 엇나간다면 몸 어딘가에 화살이 박힐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앨버트는 장검의 사정거리까지 전진했다.
활의 약점은 근거리에 취약하다는 것이었다. 이따금 활을 근접무기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화살을 쏠 틈도 주지 않고 거리를 좁혀 검을 뽑으면 자신의 승리였다.
'지금!'
발도(拔刀). 한 달간 끊임없이 머릿속에 각인시켜온 행동을 그대로 재현했다. 빠르지만 결코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어디까지나 기본에 충실해서 오른손을 휘둘렀다. 검날은 정확하게 상대방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상대방은 이제 막 활시위에 화살을 걸쳤다. 속도 면에서 비교가 되질 않았다.
날카로운 칼날이 목을 베어버리기 직전──앨버트의 몸이 정지했다. 상대방도 별반 다른 건 없는 듯 몸이 굳어 있었다.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근육이 강제로 움직임을 정지당하며 약간의 근육통이 느껴졌다.
'이게 안전장치인가?'
시험이라고 한들 상대방을 직접 죽이는 경기는 아니라던 펠의 말이 떠올랐다. 마도구를 덕지덕지 바르고 마법사까지 투입시켰다는데 원리는 알지 못했다.
"마법사, 따위가……!"
"……."
경직이 풀리고, 앨버트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마법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별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답장까지 해줄 이유는 없었다.
스무 경기 중 한 경기가 끝났고, 가져가야 하는 열다섯 번의 경기 중 한 번을 가져왔다. 방금 건 그렇게 경건하다고 부를 수 있는 경기가 아니었다. 스스로를 단련하지 아니하고 활에게 모든 운명을 맡기는 사람에게 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어서, 한 명이 또 다시 들어왔다. 이번 남자는 사람 머리통 만한 도끼를 손에 쥐고 있었다. 몸집이 커다랬고 근육 또한 상당했다. 사슬갑옷까지 꼼꼼하게 챙겨입은 것을 보아하니, 실력자였다.
"어이, 마법사."
"……."
"내기가 걸려서 말이지, 넌 떨어져줘야겠다."
앨버트는 눈가를 찌푸렸다.
"내기?"
"그래. 네가 언제 처참하게 패배하고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지 말이야. 대부분이 나에게 걸었거든. 네가 여기서 떨어져줘야 내가 쏠쏠히 번다는 말이지."
앨버트는 잠시 상대방을 노려보다가, 입가를 이죽거렸다.
"그게 너희가 말하는 전사로서의 긍지야?"
"뭐?"
"나는 물론 마법사이지만 한 달 동안 무인으로 살았어. 마법은 물론이고 마나조차 사용하지 않고 단련하는 데 집중했지. 너희가 차별하고 멸시하는 나 같은 마법사조차 시험에 진지하게 응하는데, 너희는 모험가가 되기 위한 필수 과정인 이 시험에서 돈으로 노름을 하다니, 좋은 배짱이네."
상대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너는 돈이 걸려 있지? 이쪽은 인생이 걸려 있거든. 네가 떨어져줘야겠다."
"……그렇게 잘난 듯 떠들 수 있는 것도 지금뿐. 죽여버리겠다."
이 시험에서 생명을 잃는 것, 그리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 기껏해야 허용되는 건 공격을 막거나 흘리는 도중 발생한 찰과상이나 타박상, 혹은 얕은 자상 정도일까. 상대방의 말은 허세였다.
슬슬 다른 구역에서의 시합이 끝나가고 있었다. 앨버트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자세를 잡았다.
'도끼는 따로 검집이 존재하지 않아. 발도 과정을 거쳐야 하는 나보다 살짝 유리해. 내 칼은 찌르고 베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지. 흘리는 거라면 모를까 막는 건……저 도끼를 막으면 칼이 부러진다고 봐야 해.'
앨버트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펠에게서 배운 모든 정보를 총집합했다.
'아마 도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녀석이겠지. 몸집이 커다란 걸 보면 확실해. 근육도 팔근육이 눈에 띄게 도드라져 있고. 완전한 지근거리가 되면 오히려 불리하다. 적당히 거리를 벌리면서 어떻게든 치명타를 유도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것.'
두 번째 시합부터 강한 상대를 만나서 불행하다느니, 그런 볼멘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거니와, 그냥 쓰러뜨리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였다.
선생님──펠은 앨버트에게 압도적인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왜 마법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곳 아카데미에서 몇 년 지내며 실력을 키워 자신이 속한 모험대에 들어오겠냐는 말까지 들었지만 앨버트는 단호히 거절했다.
이미 앨버트가 닿고 싶어하는 목표는 존재했기에.
호루라기가 울렸다. 앨버트는 검파를 꼬나쥐었다. 무턱대고 돌진했다간 도끼에 머리가 쪼개질 뿐이었다. 상대방의 팔 길이와 자신이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사정거리가 엇비슷해 쉽게 판가름할 수 없었다.
"안 오냐?"
"……."
"쫄보 새끼. 활쟁이 상대로는 아주 멋진 척이란 멋진 척은 다 하더니만."
무어라 도발하든 앨버트의 발은 요지부동했다.
상대방이 천천히 앨버트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일부러 빠르게 접근하지 않음으로써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고, 앨버트를 구석으로 몰아 지리적으로 우월함을 가져가기 위한 행동이었다.
반면에, 앨버트는 그것을 간파했다.
'저 덩치는 몸이 커다랗기에 내가 찌를 수 있는 곳도 많아. 죽이는 것도 좋지만 전투가 불가능할 정도의 상처만 입혀도 내 승리로 인정되겠지. 그렇다면…….'
앨버트의 시선이 도끼를 쥐고 있는 상대방의 손목으로 향했다.
'손목을 자른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목을 노려봤자 도끼에 막힐 뿐이었다. 그리고 도끼와 부딪힌 칼날은 산산조각이 나버려 앨버트의 패배로 마무리되겠지. 상대방은 앨버트를 얕보고 있으며──따라서 앨버트가 시도할 것은 목을 자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판단이 끝났다면 이제는 행동으로 옮길 차례였다. 앨버트는 짧게 도약해 검의 사정거리까지 전진해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칼날은 정확하게 상대방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도끼는 검날보단 투박하지만 무게가 상당해 '찍어누르는' 것으로 베어내며 으깨버리는 무기였다. 따라서, 상대방이 자신의 두개골을 부수기 위해서는 도끼를 '들어올리는' 준비동작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상대방이 그에 할애하는 시간 동안 앨버트가 갖고 있는 시간은 비교적 널널했다.
"하!"
하지만 상대방은 사슬갑옷으로 보호받고 있는 팔을 들어올려 칼날을 가볍게 막아냈다. 앨버트는 곧바로 검날을 회수한 후 다음 일격을 가하려고 했지만──
"어이쿠."
상대방은 앨버트의 칼날을 손으로 잡았다.
"……."
"이거, 어쩌지? 너 같은 마법사 나부랭이는 어차피 잘 모르겠지만, 시험에서 무기나 방어구의 제한은 없어서 말이야. 돈으로 밀어버리든, 뭘 어떻게 하든 실전에 빗대면 딱히 문제될 게 없다는 거지."
상대방은 방검장갑을 끼고 있었다.
"이런 게 바로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는 거다. 새끼야."
앨버트는 검을 당겨보았지만, 덩치의 괴력은 상당한 듯 쉽게 빠지지 않았다.
상대방이 갑작스레 크게 뛰어 칼을 꼬나쥐고 있는 앨버트의 손목을 향해 내리쳤다. 앨버트는 어쩔 수 없이 칼을 버리고 뒤로 물러났다.
"흥."
상대방은 재미가 없다는 듯 코웃음치더니, 앨버트의 칼을 저 뒤로 던져버렸다.
"이제 어쩔 거지? 응? 마법이라도 쓸 거냐?"
"……."
"마법사는 마법이나 쓰라고. 칼 같은 거 잡지 말고."
상대방이 씨익 웃더니, 앨버트에게 달려들어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날은 정확하게 앨버트의 어깨를 향하고 있었다.
"팔이 썰리는 고통을 맛보게 해주지!"
도끼날이 앨버트의 어깨에 닿는 그 순간──
"응?"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도끼날은 앨버트가 들어올린 단검에 막혔다. 앨버트는 곧바로 거리를 벌렸다.
"뭐야, 보조무기를 따로 준비한 거냐?"
"……."
"멍청하기 그지없군. 보조무기를 단단한 걸 사서 뭐 어쩌자는 거냐? 주무기를 단단하게 맞췄어야지. 이러니까 마법사가 안 된다는 거야. 뭐든지 재능에 의존하는 마법사와는 달리, 우리 전사들은 뼈를 깎는 노력 끝에 한 명의 모험가로 인정받는다. 네가 그걸 알기나 해?"
상대방이 조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어디, 그 쪼매난 칼로 내 도끼를 얼마나 막을 수 있는지 볼까."
사정거리로도, 무기의 상성으로도 최악인 상황. 하지만 앨버트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대치상황을 유지했다.
그때였다.
"앨버트!"
앨버트는 상대방이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유의하며,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소리가 들려온 관중석으로 향했다. 웬 백발의 키 작은 꼬맹이가 앨버트를 강렬히 노려보고 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저 새끼 죽여버려요! 내가 다 해결해줄게!"
"……뭐야, 저 꼬맹이는?"
앨버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여동생이라도 데려온 거냐? 못 볼 꼴 보여주게 생겼군. 쪽팔려서 어째?"
"시끄러워, 돼지 새끼야. 거 되게 나불대네."
"……뭐?"
앨버트는 의도적으로 씨익 미소지었다.
"네가 말하는 전사는 입으로 싸우는 얌체 새끼밖에 해당되지 않나봐?"
"……죽여주마."
상대방이 이를 악물고, 앨버트에게로 돌진해왔다. 앨버트는 더 이상 물러날 공간적 여유가 없었기에──오히려 상대방이 도끼를 치켜드는 그 순간에 앞으로 도약했다.
"어림도 없……!?"
앨버트는 쥐고 있는 단검의 코등이를 왼쪽으로 돌렸다. 칼날이 푸르게 빛나며 물줄기가 뿜어져나왔다. 세찬 물줄기가 상대방의 온몸을 흠뻑 적셨다. 상대방이 정신을 못 차리는 틈을 타, 앨버트는 무기를 교환했다.
"프후아, 너 이 새끼, 그건 뭐냐!"
"무기 제한 없다며."
"비겁하게……! 그딴 무기에 의존하다니! 넌 전사가 될 수 없다!"
"그딴 거 될 생각도 없어. 난 단 한 명의 기사님이 되면 충분해."
상대방은 잠시 침묵하다가, 앨버트를 비웃었다.
"그래서, 그걸로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내 옷에 물이라도 먹여서 움직임을 느리게 하게? 그것 참 대단한 전략이로군. 그래봤자 그 짧은 단검으로는 아무것도 못 해."
앨버트는 대답하는 대신, 앞으로 뛰었다. 칼날을 상대방의 복부로 향해 전진했다. 상대방은 그를 보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사슬갑옷에 막힐 거라는 생각이겠지.'
앨버트는──코등이를 또 다시 왼쪽으로 돌렸다. 칼날에서 노란 전격이 치솟았다.
"뭐……!"
상대방은 뒤늦게나마 도끼를 들어올려 칼날을 막았으나──이번에 한해서는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손잡이가 나무로 되어 있다고 한들 이미 물이 흥건히 흐르고 있었다. 노란 전격은 그대로 도끼날을 타고, 손잡이를 타고 흘러가 몸에 직격했다.
"으, 아, 아……!"
상대방이 경련하는 것을 보며, 앨버트는 숨을 가다듬었다. 마침내 탄내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을 때, 앨버트는 단검을 거뒀다.
"무기 제한, 없다고 했다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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