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0)2부 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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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을 내리 놀았다.
…….
잠깐, 기다려라. 나도 변명을 하나 하고 싶다. 나는 한 달이 아니라 일주일쯤 쉬면 몸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정말 혼과 진심을 다해 놀았다.
우선 미식가 컨셉도 잡았겠다, 하루 세끼가 강제되겠다, 이때다 싶어 탁큰의 식당들을 휩쓸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내가 방문한 가게만 간식을 포함해서 약 백 군데. 사실상 훔빌이라는 도시 하나를 털어먹은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놀았는데.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정말로.
…….
그래, 조금 솔직히 말하자면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좀 밍기적거렸다. 쉴 땐 확실하게 쉬고, 일할 땐 확실하게 쉬는 게 내 철칙인데 합법적으로 쉴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으니 쉴 수밖에. 이건 사실 내 의지가 아니라 어떠한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린 무언가다.
내 잘못이 아니다.
…….
"자살 마렵네……."
침대에 누워서, 허심탄회하게 중얼거렸다. 어느새 나는 또 다시 내 할 일을 내팽개치고 띵가띵가 놀고 있었다. 나의 추악한 일면을 직시하니 눈이 더럽군.
사실대로 말하자면 방금 전까지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페일리가 방에서 나가면서 내게 한 말이 있었다.
'오늘 시험 본대요, 교수님. 보러 오실래요?'
시험.
아, 그런 게 있었지 싶었다.
그 단어를 들으니 벌써 30일이 지났다는 게 체감이 되었다.
체감이 되니까 자살이 마려웠다.
"……."
좋아, 에레브. 네가 여기 왜 왔는지 생각해보자.
무예라는 취미를 익히기 위해서, 거기에 더해 다른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 나는 탁큰에 방문했다. 하지만 먹을 거 맛있게 처먹으면서 관광을 다녔더니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미쳤구나, 미쳤어. 아무리 정신상태가 피폐하다고 한들 이렇게 대책없이 굴면 어떡하니.
"……술 마시지 말걸."
아예 안 마실 수는 없었던지라, 살짝, 살짝 꼼수를 썼다.
나인이라고 해서 내 옆에 항상 붙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인과 며칠을 함께하며 나인의 일상을 파악해서──나인이 언제 나와 동행할 수 없는지 계산해낸 다음──그 시간에만 밖에 나갔다.
왜 그랬을까. 자괴감이 밀려오는군. 내 행동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꽤나 자주 있는 일이다. 특히나 술에 미쳐 있을 때면 더욱 그랬지. 알코올이 머리에서 빠지니까 정상적인 사고회로가 동작하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야. 한 달, 이제 한 달이니까.'
탁큰에서 머무르는 시간은 두 달. 이제 한 달이 흘렀으니 남은 시간은 한 달. 이 한 달 안에 뭐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뭐든 안 하는 것보단 낫겠다 싶어서, 나는 곧바로 옷을 정갈히 차려입고 본관으로 달려갔다. 나인은 왕실의 시녀장인 동시에 아카데미 총장의 비서였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집무실에서 할애했다.
참고로, 아카데미의 총장은 이 나라의 국왕인 카웅이다. 하지만 위치가 위치인 만큼 아카데미에 신경을 많이 쓰진 못하니, 사실상 나인이 아카데미의 1인자라는 소리다.
집무실 문에 똑똑 노크하니,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조심히 열어젖혔다.
"에레브 님?"
무언가 열심히 서류를 다루는 나인의 모습. 옷차림은 여전히 편해보인다. 시녀장이라고 한들 정말 시녀처럼 보이진 않는다. 이건 처음부터 그랬지.
"무슨 일 있으세요?"
"오늘 시험이죠?"
"네……그렇긴 한데."
나인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걸 왜 나갈 자격도 없는 네가 묻냐는 표정인데, 할 말이 없다.
"저 그럼 시험 구경 좀 해도 될까요?"
"시험 자체는 공개적으로 치러지니까 편하게 보실 수 있어요……라고 다른 분이라면 이렇게 말씀을 드리겠지만, 에레브 님이 원하시는 건 애제자들이 활약하는 걸 보는 거죠?"
역시 나인. 괜히 왕실의 시녀장인 게 아니었다. 눈치도 이 정도면 밥을 빌어먹고 살 수 있을 정도가 아닐까.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일단, 시험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알려드릴게요."
나인에게 전해들은 훔빌의 아카데미에서 한 달마다 치러지는 시험이란 바로 이것.
그냥 다른 설명 없이 랜덤으로 맺어진 상대와 싸워서 승률을 획득하는 것.
대부분이 승률 50에서 머무른다고 하고, 75% 이상이면 졸업할 자격이 생기며, 15% 미만이면 아카데미에서 퇴출이라고 한다. 밸런스가 꽤 괜찮은 것 같다. 총 스무 명과 겨루게 된다고 한다.
뭔가 이상해서 딴지를 걸었다.
"뭔가 기준이 조금 이상한 거 아니에요? 모험가를 목표로 한다는 건, 대인전투에만 익숙해진다고 되는 게 아닌데……. 그리고 이건 너무 운이 개입할 요소가 많아요."
"에레브 님."
나인이 싱긋 미소지었다.
"동족인 사람을 거리낌없이 공격하고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사람은, 마물도 보다 쉽게 죽일 수 있어요. '생명을 죽인다'는 개념 자체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니까요. 승률이 75% 이상이면 급이 낮은 마물들은 쉽게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아이들이죠."
"아니 그건 알겠는데요. 그래도 왜 대인전투죠?"
"모험가가 되면 무엇과 싸울 일이 가장 많을까요?"
나는 마물이라고 대답을 하려다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나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가 됐다.
"……사람이요."
마물을 때려죽여서 돈을 벌려고 모험가를 하는 거지만, 역설적으로 모험가가 되면 사람과 싸울 일이 가장 많다. 길드에 들어오는 의뢰는 한정적이고, 대륙에 존재하는 마물들의 수도 한정적이다. 따라서 모험가들은 자연스레 반목하고 경쟁하며 다툴 수밖에 없다.
모험가는 그래도 '싸움'에 꽤나 적응이 된 사람들. 말보단 주먹을 먼저 휘두르는 게 모험가다. 물론 모든 모험가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내가 있던 루디에서는 그랬다.
"사람과 가장 싸울 일이 많으니까, 대인전투를 연습시키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래도, 운이 너무 크게 작용하는 건 역시 문제 아닌가요."
"모험가로서 살아가며 가장 필요로 하는 건 운이에요, 에레브 님."
의뢰를 다른 모험자들보다 빨리 낚아챌 행운, 내 실력에 맞는 의뢰를 고를 행운, 의뢰를 해결하는 데 있어 다른 부정적인 요소가 나오지 않을 행운. 이외에도 운이 작용하는 부분은 여러가지라고, 나인은 말했다.
"아카데미에서 운을 확인하는 건 말이죠, 아카데미에서 내보내기 전에 나갈 준비가 되었나 확인을 하는 마지막 절차에요."
"……."
"강한 사람을 상대로 만났는데도 승률이 75% 이상이면 정말로 실력이 강한 것이니 문제가 없고, 약한 상대만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만큼 운이 좋은 것이니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별 일은 없지 않을까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나랑은 관련이 없는 일이기도 하고.
"아카데미 학생 수는 수백 명이랍니다. 당연히 구역을 나뉘어서 배정해줍니다.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한 자리에 고정되고, 성적이 나쁜 아이들은 장소를 계속해서 교체해주지요. 일종의 편의라고 할까요. 앨버트 군은 우수한 성적을 지키고 있고, 따라서 오늘 어디서 시험을 보게 될 것인지 정해져 있어요. 물론 제가 그걸 알고 있죠."
"역시!"
"하지만, 에레브 님. 앨버트 군만 지켜보시게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내가 앨버트만 보지 누구를 봐?
"페일리 양은요?"
"……."
페일리도 시험을 봐?
아니, 그러고 보니 아침에 기숙사에서 나갈 때 했던 말, 자기가 싸우는 걸 보러 와달라는 거였나.
조금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둘을 믿기로 했다.
일단 앨버트의 경기 먼저 보기로 했다. 앨버트는 고정위치니까 가서 열 판을 보고, 페일리 쫓아다니면서 나머지 열 판을 보고. 방금 막 알았는데, 농구코트 크기의 구역이 수십 개가 붙어 있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거기에서 앨버트의 경기가 진행되었다.
안 그래도 내가 걸어놓은 소원권 때문에 심란할 텐데 굳이 방해하진 않고, 나는 여기 관중석에서 구경하고 있다. 방금 막 앨버트가 구역으로 나왔다. 한 달만에 보는 앨버트로군.
참고로 혼자 나오긴 뭣해서 나인까지 끌고 나왔다.
"……저는 업무를 봐야 하는데."
"가끔씩 쉬고 좋죠 뭘."
나인이 땅이 꺼지도록 한숨쉬지만 무시하고.
"근데, 쟤네 안 다쳐요? 쓰는 무기가 엄청 무서워보이는데요. 당장 앨버트만 하더라도 긴 장검인데."
"……하아. 아카데미에 마법사도 있긴 있어요. 정확하게는 힐러가."
"마법사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공익에 도움이 되는 마법사라면 환영한답니다."
다 지멋대로군. 그것보다…….
"……앨버트랑 페일리가 딱히 좋은 상황에 놓이지는 않겠네요?"
"아마 그럴 확률이 높죠."
이미 앨버트와 페일리가 외지인이라는, 그것도 마법사라는 소문은 널리 퍼졌을 테니, 절대로 호의적으로 나오진 않을 거다. 아무런 일도 없었으면 좋겠는데…….
묵묵하게 제자리에서 몸을 푸는 앨버트의 구역에, 다른 한 명이 들어왔다. 앨버트는 장검이지만 얘는…….
"……활?"
근딜이랑 원딜 싸우게 하면 당연히 원딜이 이기는 거 아니냐? 나는 곧바로 나인을 맹렬히 쏘아보았지만, 나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것도 운을 시험하는 일에 포함돼요."
"활 든 놈을 어떻게 이겨요?"
"보통 활과 검의 싸움이라고 하면, 일정 거리가 있는 이상 활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점치는데, 그건 틀린 소리랍니다. 검에게 원거리에서 공격할 방법이 없다는 제약이 있는 것처럼 활에게도 강력한 제약이 걸려 있어요."
호루라기가 울리고, 시합이 시작됐다.
순식간에 군중들은 뜨겁게 달아올라 함성을 외치기 시작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누군가를 응원하는 모양이었다. 앨버트의 이름을 목청높여 부르짖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와 동시에──앨버트는 달렸다.
"바로 혼자 사용할 수 없다는 것. 활이 있어도 화살이 없으면 장식에 불과하죠. 화살을 장전하는 시간 동안에는, 완벽하게 무방비해요."
상대방도 뒤로 도약하며 곧바로 등에 메고 있는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 장전하지만──
"그리고 시합이 시작되기 전, 호루라기가 울리기 전에는 준비 태세를 갖추는 것만이 허락돼요. '화살의 장전'은 준비 태세가 아니라 '공격'으로 간주되어 활을 미리 장전하는 건 불가능하죠. 이건 당연한 거에요. 모험가가 돼서도 하루 종일 화살을 장전시킨 채로 행동하진 않을 거 아니에요?"
그것보다 앨버트가 훨씬 빨랐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앨버트는 상대방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이 목에 닿기 직전, 둘의 움직임이 멈췄다.
나는 시선을 돌려 나인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뭐냐는 의문을 담은 시선을 보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뭘 어떻게 했길래 애가 사람 목에 칼을 들이미는 걸 자연스럽게 실천으로 옮겨?
"아무리 뛰어난 힐러라고는 해도 잘린 목을 붙이기는 어려워서요. 상처입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지만, 그것도 결국엔 목숨이 붙어 있어야 가능하니까요. 마도구를 이것저것 쓴 결과에요."
호루라기가 또 다시 한 번 울렸다.
"……활 쏘는 사람들이 되레 불공평하게 여기겠는데요?"
"무(武)를 익힌다는 사람이 쪽팔리게 활 잡고 멀리서 구경만 하고 있으면 돼요? 활로 대가리를 후려쳐서라도 이겨내려는 기백을 보여야죠."
"……."
마법사들 못지 않게 활잡이들 또한 차별을 받는 것 같다.
어느 정도 예상은 갔다. 애초에 아케즈와 로렌스를 견제하기 위해 세 개의 나라가 한데 뭉쳐 협력을 이룬다는 점에서, 얘네도 딱히 뛰어나거나 정상적인 나라는 아니었으니까.
로렌스는 마물들을 양성하고 있으며 아케즈를 집어삼키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오르가니아, 페토라르, 탁큰까지 해서 이 세 나라는 견제만 할 뿐 직접적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 얘네도 아케즈의 원로원이랑 크게 다를 바 없다. 내가 명분을 만들어주고 판을 벌려주니까 참여했지.
델라즈에게 이런 저런 정보를 전해들으면서 깨달은 거지만, 이 세계에서의 군주들은 하나같이 다 망가져 있다.
페토라르──로부르크의 경우에는 아들바보다. 페디넌트는 스무 살이 넘은 성인이지만, 나에게 무리수를 던지면서까지 아들의 바람을 들어주고자 하는, 그런 아버지. 기껏 내 약점을 잡았으면 조금 더 괜찮은 곳에 사용할 것이지 그런 데에나 쓰고 있으니 정상이 아니다.
오르가니아──데이지의 경우에는 얘는 아직 황녀이지 황제가 아니다. 아케즈와 비슷한 경우로, 군주인 황제가 병신이라고 들었다. 어쩔 수 없이 국정을 맡게 된 케이스라고나 할까. 결국 얘도 정상이 아니다.
탁큰──카웅의 경우에도, 이 아카데미가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자니 딱히 정상이라는 생각은 안 든다.
로렌스나 아케즈야 뭐 언급하지 않아도 다 알 만한 것들이고…….
나는 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아직 다른 구역의 시합이 끝날 때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기에, 앨버트 또한 바로 다음 시합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 같다. 활 쏘는 놈이야 쉽게 해치웠다고는 해도, 다른 놈들은 어떻게 할래, 앨버트.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아니, 이런저런 걱정이 많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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