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7)2부 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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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더니, 모르는 천장이 보였다.
"……."
이 느낌, 오랜만이네. 내가 지금까지 눈에 담아온 천장이 대체 몇 개지? 궁금하니까 한 번 나열해보자.
현세에서의 집, 델라즈의 저택, 레블의 아카데미의 기숙사, 로렌스의 손님방, 페토라르의 손님방, 훔빌의 아카데미의 기숙사 그리고 여기는…….
…….
여기는 어디냐.
벌떡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느낌 자체는 레블의 아카데미에 있는 수면실과 비슷한 것 같다. 온통 새하얗고, 침대가 있고, 무엇보다 따뜻하다. ……아니, 애초에 병원이라고 생각하면 이런 느낌이 정상인가? 모든 수면실의 느낌이 다 같을 가능성이 높겠군.
나 말고 누워 있는 사람은 없다. 수면실 같은 데 실려올 정도로 나약한 학생은 없다는 건가. 새삼스레 내가 얼마나 나약하고 허약한지 와닿는 부분이다.
"……."
결코 좋지 못한 사실을 발견했다. 보통 땀에 젖은 상태로 누워 있다가 일어나면 등이 흥건하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 뽀송뽀송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얼굴과 팔, 다리도 뽀송하다. 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전혀 없다.
누가 내 몸을 닦아주기라도 했단 말인가? 생각이 있다면 물론 이름모를 여자에게 시켰을 테지만, 전혀 달갑지 않았다.
"……하아."
모르겠다. 진위확인은 나중에 해보도록 하고, 침대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게 너스콜이 아닌 다른 무엇일 확률은 없어서.
수십 초가 지나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공용 수면실이면 노크 따위 필요없는 거 아닌가 싶긴 한데.
"들어오세요."
그렇게 들어온 사람은 나인. 나인은 나를 보더니 눈에 띄게 환하게 미소지었다.
"에레브 님, 무사하셨군요."
"……그냥 뛰다가 지쳐서 기절한 건데 위험할 리는 없죠."
"그거에 관해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나인이 싱긋 미소지었다. 같은 미소이지만 방금 전의 미소와는 결이 다르다. 꼴깍 침이 넘어간다.
"저는 분명 쉬고 계시라 말씀을 드렸는데요? 역시 말씀을 들어보니 달음박질하다가 지쳐서 쓰러지셨군요?"
"어……."
"운동을 할 때는 언제 운동하고 언제 쉬는지 명확하게 정해서 구분을 하는 게 중요해요. 그건 아시죠?"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해주세요. 세상에, 견학을 오신지 이틀만에 탈수 탈진으로 쓰러지신다니, 저희 입장도 조금 생각을 해달라구요."
"아……그것도 그러네요."
나는 엄밀히 따지면 국빈이다. 그런 국빈에게 체력단련을 시키다가 기절시킨 거다. 아타나시아가 빡돌지 않으면 오히려 다행이겠지.
조금이라도 체력을 빨리 늘려서 남은 시간에 놀아야겠다는 조급함에 무턱대고 뛰었는데, 아주 멍청한 행동이었군.
그렇게 생각하니, 불현듯 뇌리에 스치는 게 하나 있었다.
"앨버트랑 페일리는요?"
"앨버트 군은 에레브 님이 쓰러진지도 몰라요. 페일리 양은……."
나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지.
"……일단 단련 중이에요."
"정말요?"
"네."
놀랄 노 자로군. 서클을 잃었을 때는 자그마치 왕복 한 시간 거리를 매일 찾아왔던 페일리다. 내가 쓰러졌다는 말에 또 난리를 쳤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페일리도 그 사이에 성숙해진 모양이었다.
"아, 근데요, 나인 씨."
"네?"
"제 몸, 혹시 누가 닦아줬나요?"
꼭 확인해야만 하는 부분이다.
"아니요, 아카데미에는 마법사도 있어요. 세쉬를 썼답니다."
"아……."
그렇다면 굳이 옷을 벗기거나 직접 몸을 만지지 않아도 된다. 다행이군.
"일단 멀쩡하시다는 건 확인을 했지만, 당분간은 요양해주세요. 탈수 탈진 상태에서 무리하게 운동하면 안 돼요."
"감사합니다."
"네?"
나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지만, 나는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요양하라는 건 즉, 쉬라는 거잖아? 쉰다는 건 즉, 놀아도 된다는 말이잖아? 무리한 운동만 하지 말라고 했으니 길거리를 쏘다니며 먹고 즐기며 노는 건 딱히 상관이 없을 거다. 지금까지 구상해두었던 '탁큰에서 놀기 계획'을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겠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검토하고 있으니, 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나를 보러 온 사람일 텐데, 대체 누가?
"에레브."
"……예?"
카웅.
"상태는 괜찮냐?"
뭐랄까, 로부르크가 아타나시아를 대하는 듯한 태도로군. 나는 오히려 이쪽이 호쾌해서 좋다만.
"괜찮습니다."
"그래, 괜찮아야만 해. 네게 문제라도 생기면 아타나시아를 볼 면목이 없다."
카웅이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인은 그 뒤에 서 있고.
"이건 단순히 네가 이곳으로 견학을 온 것만이 아니다. 아케즈와 탁큰의 거래야."
"거래……요?"
"그래. 탁큰에서 수고로움을 한 번 견뎌주겠으니, 탁큰 또한 아케즈에 한 가지 요구하는 거지."
대가를 치를 거라는 생각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지만, 뭔가 본격적인 이야기가 오간 것 같다.
"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대륙의 모든 나라는 자질이 있는 마법사를 아케즈로 유학을 보내는 일이 잦다. 탁큰 또한 그러하지. 대부분의 나라는 아케즈에 얼마나 많은 마법사를 유학보내느냐로 경쟁을 하고 있다. 이젠 정말 높은 서클의 마법사의 수가 국력을 의미하니까."
"탁큰은 모험가만 있는 게 아니었나요?"
"무인들만으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 애초에 나 같은 천성 무인들에게도 마나는 있으니까 이렇게 말이 번역이 되는 거지."
그건 그랬다. 마법사는 마나로 사념을 번역하니까.
"네가 탁큰으로 옴에 따라 이미 탁큰에서는 아케즈로 학생들을 보냈다. 아케즈에서 각국마다 수용하는 최대인원은 열 명인데, 우리는 삼십 명을 보냈지. 너를 감당하는 조건으로. 그런데 네가 쓰러져버리면 어떡하냐."
음.
나는 나라를 경영해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몰랐던 부분이지만,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거래가 오가는 것을 보아하니 나는 생각없이 행동하면 안 되는 위치에 있는 것 같다.
나는 정말이지 귀찮은 게 정말 싫다. 깊게 생각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아무튼, 푹 쉬어라. 적어도 일주일은 물 많이 마시고, 밥 잘 먹으면서 쉬는 게 낫다."
"저, 카웅 전하. 그럼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음?"
나는 카웅에게 '탁큰에서 놀기 계획'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얘가 방금 내 말을 들은 게 맞나?' 하는 표정을 짓던 카웅이었지만, 내가 열심히 설파하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허락은 해주겠는데, 절대로 무리하는 일이 없게 해라. 네 몸상태를 스스로 자각하라는 말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나갈 때면 나인을 대동해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인 씨는 페일리를 가르치는 게 아니었나요?"
"일주일 정도면 상관없다. 스스로 뭔가 하는 게 있는 모양이니."
그런가.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제와서 새로운 사람을 붙여주는 것도 달갑지 않고.
나는 카웅과 나인의 양해를 구하고 앨버트와 페일리가 어떻게 수련하고 있는지 구경하러 밖으로 나왔다.
"근데 저 얼마나 기절해 있던 거에요?"
"다섯 시간이요."
또 저번처럼 일주일 정도 누워 있던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애초에 그때는 비어버린 마나 때문에 회복하기 위해 몸져누운 거였지.
내가 쓰러져 있던 모래밭을 지나, 나인이 나를 데려간 곳은 큼지막한 건물 안이었다. 현세와 비교하자면 큰 체육관이랑 비스무리한 것 같은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기합소리가 크게 울려왔다.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가. 못해도 스무 개는 넘어보이는군.
더욱 깊숙이 들어와 나인이 가리킨 곳을 보니, 앨버트가 있었다. 다만 평소의 앨버트와 다른 점이라면 스태프가 아니라 검을 쥐고 있다는 걸까.
검.
아무리 봐도 목검이나 죽도, 가검이 아니라 진검인데.
"나인 씨, 쟤 벌써 진검 잡아도 되는 거에요?"
"……예?"
반응이 뭔가 묘해서 나인을 올려다보니, 얘도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너도 몰랐던 거냐?
나인은 살짝 빡쳐 있는 표정을 유지하고 앨버트에게로 다가갔다. 나도 쫄래쫄래 따라갔다. 어째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몰려 있는데, 제발 착각이길 빈다.
나인과 웬 대머리 마초가 설전을 벌이는 동안, 앨버트에게로 다가갔다. 앨버트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척 봐도 몸에 땀이 흥건한 게, 아주 빡세게 운동을 하는 듯싶었다.
"……교수님?"
"너는 마법사 관두고 무인 하는 게 낫겠는데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못할 말이라는 건 알지만, 얘 하는 꼬라지를 보니까 이게 적성이 맞는 것 같은데.
"……저는 마법사가 되고 싶습니다."
"열심히 해요."
"교수님이 옆에서 지켜봐주시면, 저는 할 수 있어요."
앨버트 옆에 털썩 주저앉아서, 앨버트를 올려다보았다.
"앨버트."
"예, 네?"
"나 좋아해요?"
앨버트의 몸이 굳었다. 얼굴을 부채질하던 손부터, 들숨과 날숨을 거칠게 반복하느라 심하게 움직였던 가슴에, 심지어는 얼굴 표정까지.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
앨버트는 몇 번이고 입을 열었다 닫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거긴 하다. 얼마 전에 아카데미에서 인생 강의하며 아예 여자를 좋아한다고 못을 박아버렸으니, 이 이상으로 대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사실 지금까지 했던 것도 대쉬라고 부르기도 애매하고.
나는 슬쩍 나인 쪽을 곁눈질했다. 아직도 대머리와 설전 중. 군데군데 들려오는 말을 종합해보면 이제 이틀째인데 왜 진검을 쥐어주냐, 미쳤냐? 대머리라 그런지 생각 같은 걸 하지 못하는 건가? 등의 말이 들려온다. 다른 건 몰라도 밤에 암살 안 당하게 조심하세요, 나인 씨. 시대와 차원을 막론하고도 대머리를 놀리는 건 중범죄다.
하지만, 앨버트.
대부분의 침묵은 긍정을 의미해.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시점에서, 이미 너는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열심히 해요. 그게 뭐든."
나는 이 말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손을 뻗어 앨버트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다음 몸을 일으켜 나인에게로 다가갔다.
"쟤는 된다고! 대검이든 한손검이든 니들이든 뭐든, 쟤는 재능이 있다니까?"
"재능이고 나발이고 위험하다고 몇 번을 말해? 저 남학생은 국빈의 애제자야. 혹시나 다치기라도 하면 카웅 전하께 폐가 된다고. 네가 집사장인 주제에 하는 꼬라지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거 나도 아는데, 생각 좀 하고 살아, 모자란 새끼야."
"모자란……뭐? 너 지금 나 대머리라고 욕했냐?"
"뭐 귀에는 뭐만 들린다더니, 그게 딱 네 꼴이다."
"하아……이 만년 빈유년이."
나도 모르게 나인의 가슴으로 시선이 향했다.
에레브 1승.
"애초에 쟤 한 달 후에 시험까지 볼 거잖아. 진검에 조금이라도 빨리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고. 다치는 일 없게 주의한다니까?"
"만약이라는 걸 생각하라고. 만약을. 만에 하나라도 다치면 어떡할 건데?"
"그렇게 보수적인 생각만 하면서 답답하게 굴면 될 것도 못해. 마법사를 굳이 왜 탁큰에 데려왔나 싶었는데, 쟤는 마법사보단 무인이 어울려. 에레브 그 사람도 그걸 알고 데려온 거겠지. 나는 그 사람이 바라는 걸 들어주는 거라고."
"하, 제대로 확인도 안 했으면서 넘겨짚은 거잖아."
나는 나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런──히약!?"
나인이 새된 소리를 지르고,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미 시선은 이쪽을 향해 있었다. 저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싸우는데 시선이 안 가면 그게 되레 이상하다.
"에, 에레브 님?"
"가요. 앨버트랑 대화 다 했어요. 그리고, 앨버트 가르치는 선생님."
손가락으로 마초를 가리켰다.
"얘 다치게 만들면, 큰일 나요."
"……."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 복수할 거야."
나는 진심이었다. 그게 누구든 앨버트와 페일리를 다치게 만든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베르노바의 제자이자, 아케즈의 영웅이자, 노바의 명예 보유자이자, 국빈인 나를 화나게 만들면 어떻게 되는지, 저 마초도 대머리지만 알 수 있겠지.
벙쪄 있는 나인을 툭툭 건드리니,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움찔했다. 앨버트 쪽으로 시선을 한 번 던진 다음 앞장서서 건물을 나왔다.
"저, 에레브 님?"
"네?"
"방금 건 좀 잊어주셨으면……."
카웅한테 저런 걸 들키면 안 되겠지. 저 대머리가 집사장이라면 아마 나인이 시녀장 아닐까. 보통 집사장이나 시녀장이라고 하면 갖고 있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적어도 이런 가볍고 헤픈 여자와 근육질의 마초 남자는 아니다. 결코.
"둘이 잘 어울려요."
"……농담이시죠?"
"출발합시다!"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인을 뒤로하고, 일단 정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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