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8)2부 035
"에레브."
델라즈의 저택, 응접실.
델라즈는 각탁 너머에 있는 에레브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물론, 델라즈도 이를 감안하고 에레브를 부른 것이었다.
대륙에서 가장 독하다고 여겨지는 툼벨른을 안주도 없이 연거푸 들이켰으니 저 꼴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에레브는 현재 각탁 위에 상반신을 늘여뜨리고 있었다.
델라즈는 에레브의 모습을 보고 고양이를 떠올렸다.
델라즈는 지금까지 고양이──액체설을 믿지 않았지만, 지금만큼은 그 가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에레브의 자세는 파격적이었으며, 자세가 파격적임에도 불구하고 에레브의 상체와 하체는 허리를 통해 이어져 있었다.
에레브는 사실 고양이었고, 고양이가 인간으로 둔갑한 것인가?
'…실없는 소리를.'
델라즈는 저도 모르게 머리가 멍해져 헛된 생각을 품는 것을 스스로 경계시켰다.
델라즈도 에레브만큼은 아니지만 악세발트를 들이켜 얼추 취한 상태.
자신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 상상하기도 무서웠다.
"에레브. 이야기 끝까지 해라."
"흐부아…?"
"돌아버리겠군."
델라즈는 하늘을 저주하고 싶었다.
무언가 무거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긴장하고 있었는데, 에레브는 제대로 이야기도 해주지 않은 채로 술을 위장에 들이붓다가, 어느 순간.
'브엑.'
하고 쓰러졌다.
델라즈는 데자뷰를 느꼈다.
여섯 번째 요관에서 에레브를 구출했을 때와 비슷한 맥락이지 않은가?
그때도 에레브는 정신을 잃고 델라즈의 도움을 받았다.
'…이젠 추억인가.'
돌이켜보면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아직 그때의 기억은 미화된 채로 델라즈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난처로운 상황이라는 것 또한 한몫했다.
'난감하군.'
에레브를 지금 당장 일으키는 것은 매우 쉬웠다.
바리에이션을 영창해 에레브의 몸 상태를 약 두 시간 정도 전으로 돌리면 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까닭은.
'아까 한 이야기를 잊으려고 술을 마셨는데, 그걸 깨워도 되는가?'
에레브의 성격은 지랄맞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드셌다.
또한 뻔뻔하기까지 했는데, 이와 같은 에레브의 성격을 토대로 미래를 예측했을 때, 결코 에레브를 맨정신으로 만드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그냥 없던 셈 치는 게 이로운가.'
아예 오늘 있었던 일을 없던 일로 치부하는 방법도 존재했지만, 그것 역시 내키지 않았다.
말을 편하게 하기로는 막말 수준인 에레브가 술까지 들이키며 하기 망설였던 말이 무엇인지, 괜히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깨우면 되는가.'
깨우기를 결정했어도, 그 방법에 대해서는 재고해봐야만 했다.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남자였다고 해도 지금은 여자였다.
술에 취해 꽐라가 된 여자를 어떻게 신체접촉 없이 깨우면 되는가?
델라즈는 깊게 고민했지만, 정답이랄 게 떠오르질 않았다.
델라즈는 머릿속에 상주하고 있는 여든아홉 개의 자아들과 뜻깊은 회의를 장장 30분에 걸쳐서 나눈 결과, 에레브를 깨울 방법을 드디어 한 가지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소리와 진동이었다.
"에레브!"
델라즈는 과거 자신의 제자를 나무랐을 때와 비슷하게 호통을 쳤다.
말을 하는 경우 자체가 적은 델라즈에게 있어 매우 파격적인 행동이었지만, 에레브는 어깨를 한 번 움찔거릴 뿐 일어나지 않았다.
델라즈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에레브가 엎어져 상반신을 기대고 있는 각탁을 붙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에레브의 옷가지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밀리며 점점 못 볼 꼴이 되어간다.
델라즈는 결국 눈을 감았다.
얼마나 흔들었을까, 각탁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이 한층 덜어졌다.
분명 에레브가 몸을 일으킨 것이리라.
델라즈는 다시 감았던 눈을 떴다.
델라즈의 바람대로 에레브는 몸을 일으킨 후였다.
다만.
"에레브, 정신이 드나?"
"…후으."
에레브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제야 델라즈는 제 잘못을 깨달았다.
'정신을 차리게 해주세요', 같은 애매모호한 내용이 아니라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정신을 되돌려주세요' 하고 구체적으로 빌었어야 했거늘.
"아저씨이."
하늘을 저주하던 델라즈에게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에레브는 자그마치 '아저씨'라고 정확하게, 아니, 다소 불안정하지만 어쨌든 발음할 수 있을 정도로, 요컨대 상당히 제정신이었다.
델라즈가 반색했다.
"그래, 말해라.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냐?"
"아저씨 고자에요오?"
빠직. 델라즈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델라즈는 방금 들린 소리가 아마도 혈관이 터져서 난 소리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당황도 하지 않고 화부터 났을까, 델라즈는 성기능을 의심받은 스스로를 달래며 최대한 인상을 폈다.
"아니다. 멀쩡히 달려 있으니 걱정 마라. 그것보다 원래 하려던 얘기를──"
"근데 왜, 여자친구가 없어요오…?"
델라즈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참자, 참아. 얜 지금 술에 취해 꽐라가 되었다.'
먹구름에서 비가 쏟아져내리려는 것을, 델라즈가 필사적으로 막았다.
"요리대회 때의 대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야기냐?"
"우움, 네에."
"여자친구가 없을 수도 있지. 있어야만 하나?"
"하지마안, 우으윽."
에레브가 고개를 숙이는 것과 거의 동시에, 델라즈는 에레브의 턱 바로 아래 상자를 하나 만들어내었다.
이로써 자신의 집은 사수되었다.
하지만 에레브는 여러 번 앓는 소리를 낼 뿐, 입에서 뭔가를 게워내지는 않았다.
에레브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서른넷이면, 결혼적정기는, 이미 한참에 지났을 텐데에─?"
"독신으로 살다가 죽을 생각이니 걱정 안 해도 된다."
델라즈는 아예 체념해버렸다.
에레브는 아무래도 하고 싶은 말이 한두 마디가 아닌 모양이었다.
다른 말들을 전부 내뱉고 할 말이 없어졌을 때, 원래 하려던 말을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델라즈의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델라즈는 주정뱅이들을 상대로는 매우 잘 먹히는 태도를 취했다.
그것은 바로──맞장구쳐주기.
"내가아, 우리 스승님…. 반려는 찾아드리고 돌아가야 하는데─"
"아니, 필요가 없다니까?"
"그럴──리가 없어요! 사람으은 혼자 있으면 외롭다구요…."
델라즈의 반려는 다름 아니라 종이와 깃펜이었다.
이제 와서 델라즈에게 여자를 소개시켜준다 하더라도 종이와 펜 입장에서는 애인을 강탈당하는 기분 아니겠는가?
델라즈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너 외롭냐?"
"당연한 거 아니에요?!"
에레브가 갑자기 각탁을 손바닥으로 팡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드센 기세에 델라즈가 움찔했다.
"…왜 외로운데?"
"아저씨가 생각했을 때에느은, 으으? 난 남자에요, 여자에요오?"
이건 또 대답이 어려운 질문이로군.
델라즈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흘렀다.
"…정신은 남자고, 몸은 여자다."
"하나만!"
"모르겠구나."
에레브가 다시 축 늘어졌다.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것 봐요오…. 나는 사람을 사귄다고 하며언, 남자랑? 여자랑? 뭐가 맞는 걸까요…."
"이미 여자가 좋다고 말했잖아."
"그거야 페디넌트랑 안 엮이려고 일단 던진 건데에…."
이젠 왕세자라는 호칭도 생략하는 건가.
델라즈가 피식 웃었다.
"어차피 너 좋다는 애들은 많지 않냐? 아예 여러 명이랑 사귀든가."
"스승님은 고자가 아니라 쓰레기였구나아…."
"나더러 뭐 어쩌라는 건지, 원."
에레브가 툼벨른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병에 닿기 전에, 델라즈가 중간에서 낚아챘다.
에레브가 잔뜩 울상을 지었다.
"내 술…."
"내 술이다. 마시려거든 돈 내고 마셔라."
"으우, 여기요."
에레브가 품에서 제 신분증을 꺼내 델라즈에게 내밀었다.
델라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내 돈이지 네 돈이 아니잖냐."
"에에, 그러면 돈이 없는데…."
"그럼 못 마시는 거지 뭐."
"오빠라고 해줄까요?!"
이건 또 무슨 의식의 흐름일까.
델라즈가 깊게 탄식했다.
그는 정말로 돈이 고팠던 게 아니라 에레브가 이 이상 술을 마시는 것을 막으려고 했을 뿐이었다.
"필요 없고, 맨 처음에 하려던 얘기, 그거나 하지 않을래?"
델라즈가 한층 상냥하게 말했다.
그는 최대한 좋은 사람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처음에 하려던 얘기…?"
"그래."
"…나, 쓰레기 아닐까요."
갑자기 에레브의 어조에서 색채가 사라졌다.
델라즈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냐?"
"페디넌트랑 아타나시아한테 너무 미안해서어…."
이건 또 의외로군.
델라즈가 감탄했다.
에레브는 지금까지 자기중심적인 면모만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기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남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은 충분히 엿보였다.
그런 에레브가 속으로는 주변을 신경쓰고 있었다는 것일까.
'아마도 이게 원래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겠지.'
이것은 갑자기 튀어나온 본심에 가깝다고 델라즈는 판단했다.
그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구체적으로 말해봐라."
"나, 너무…. 돌아가려고 내 멋대로만 하는 것 같아서…."
"돌아가기 전에 은혜를 다 갚고 돌아가면 되지 않냐. 설령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다시 올 수도 있는 노릇이고."
"다시 못 오는데에…."
옳거니.
델라즈는 바로 지금이 지난 몇 개월 동안 묵혀두었던 궁금증을 풀 기회라는 것을 직감했다.
에레브는 홀을 이용해서 어디로 떠나려고 하는가?
그는 여러가지 가설을 세웠지만 모두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들뿐이었다.
"왜 다시 못 온다는 거냐?"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여기 다시 올 방법이 없는데요…."
"원래 세계?"
"…아아! 이거 말하면 안 되는데!"
에레브가 화들짝 놀라더니,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제대로 말해봐라."
"…."
델라즈가 에레브를 재촉해보았지만, 에레브는 입을 꾹 닫고 열지 않았다.
하지만 델라즈에게는 저 한 마디로도 충분했다.
그는 빠르게 에레브의 말을 토대로 가설을 성립시켰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건가? 국가의 지원을 마다하고 돌아가려고 악을 쓰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그럴 듯한데.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건, 자의로 넘어온 게 아니군. 원래 세계에 두고 온 소중한 무언가가 있기에 돌아가려고 발버둥친다, 그건가.'
델라즈는 정답에 가깝게 유추해내었다.
그는 여기까지 생각을 마치고 각탁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
두 손으로 제 입을 막고 표독스럽게 델라즈를 째려보는 에레브가 거기 있었다.
비밀을 말해버린 것을 델라즈 탓으로 돌리는 듯한 모습이 우스워서, 델라즈는 피식 웃어버렸다.
"괜찮다. 나 입 무겁다."
"…."
"오히려 나한테 말을 안 했다는 게 놀랍구나. 왜 안 했냐?"
에레브의 손이 내려갔다.
그녀의 손이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리는 것을 보고, 델라즈는 에레브의 속내를 짐작했다.
"아저씨가 알면…."
"알면?"
"나 못 가게 할까봐…."
"왜 그렇게 생각했냐?"
"내가 도망가면…. 아저씨 다시 막내잖아요…."
자신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델라즈가 다시 막내가 된다.
요컨대 에레브는 델라즈가 자신에게 짬처리를 맡기진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며.
'어이가… 아니, 할 말이 없군.'
실제로도 에레브에게 짬처리를 맡긴 전적이 있는 델라즈였기에, 할 말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변명하는 대신 확언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걱정하지 마라. 네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정말요…?"
"그래."
에레브가 조심히 고개를 들어 델라즈의 얼굴을 훑었다.
마치 델라즈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너무나도 조심스러운 모습에 델라즈는 무심코 웃어버렸다.
에레브가 그것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왜, 왜 웃어요!"
"뭐 그런 걸로 걱정을 하고 있었냐?"
"…내가 사라지면,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게 아저씨일 테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라면 에레브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델라즈였다.
에레브가 자취를 감췄을 때 사람들의 눈길이 향하는 곳은 분명히 델라즈이겠지.
하지만, 에레브가 간과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내가 그걸 막을 생각이었으면, 아예 원로원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겠지."
"으응…?"
"홀을 이용하겠다는 것은 어쨌든 어딘가로 전송되겠다는 거다. 그리고 난 너로부터 어디로 전송될 것인지도 듣지 못했지. 내가 정말로 너가 떠나간 이후의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면, 최소한 네게 어디로 갈 생각이냐고 물어보기라도 하지 않았을까."
에레브가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넌 참 애가 이상하군."
"…내가, 이상해요…?"
"타인을 신경을 써줄 거면 써주고, 쓰지 않을 거면 쓰지 마라. 어중간하게 중간에 껴서 이도저도 못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힘든 거 아니냐."
"으으…?"
"미안하면 미안할 짓을 하지 마라. 그래도 해야만 한다면 사과라도 확실히 하던가. 뭐, 이렇게 말해도 아마도 너는 내일이 되면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델라즈가 툼벨른을 내밀었다.
에레브가 조심이 받아들었다.
"마실 거면 마셔라. 괜히 머리 돌리지 말고. 죽기 직전까지 마셔서 기억을 날려버리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겠군."
애초에 델라즈의 말은 에레브더러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표리부동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건지에 대해 감탄해 무심코 내뱉은 독백에 가까웠다.
"따라주리?"
"어, 네에…."
에레브의 술잔이 채워진다.
에레브는 그것을 멀뚱히 내려다보더니, 한꺼번에 입 안에 털어넣었다.
"…후으."
에레브는 오한에 몸을 떨더니 다시금 각탁에 엎어졌다.
고른 숨소리까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잠든 것이 분명했다.
아까와 별 다를 거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번에는 에레브를 깨우지 않겠다고 델라즈는 다짐했다.
'결국 하려던 얘기는 무엇이었는가.'
그런 의문만 남았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