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9)2부 026
결과적으로 그로부터 약 이십 분이 흘러 있었을 때, 앨버트와 페일리는 마학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마학 학생들은 아직까지도 교수가 내정되지 않아 수업이 진행되지 않고 있었지만, 그 대신 강의실에서 자습을 진행하라는 총장명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페일리와 앨버트가 에레브를 우선시하고 연모한다 하더라도, 성적까지 말아먹어가면서 집착할 여유는 없었다.
결국 그들은 아카데미 바깥으로 몇 걸음 나아가다가, 도로 돌아왔다.
둘은 강의실에서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약속이라도 한 듯 바로 옆에 앉았다.
그들은 멍하니 강의실 앞을 바라보더니, 책을 꺼냈다.
얼마 전에 새로 보급이 된 「마학(魔學), 어렵지 않다!」 2권이었다.
본래라면 한참 전에 접해 진도를 떼어야 했을 책이건만, 교수의 부재로 인해 자습으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
그들의 책은 이것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마물도감 개정판」, 「마물도감(진)」 등 그들이 마법과 관련된 지식을 익히고 실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많은 책들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책에 집중하던 페일리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240 개의 의자 중 불과 스무 개 정도만이 제 주인을 앉히고 있는 것을 본 그녀가 눈쌀을 찌푸렸다.
자습 자체를 총장이 명령한 것이었고, 성적에도 반영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마학 학생들은 출석하지 않았다.
에레브가 직접 실습을 데리고 다니던 여덟 명과 나머지 소수의 학생들만이 오늘도 자리를 지켰다.
페일리가 조용히 앨버트에게 귓속말했다.
"앨버트."
책에 집중하던 앨버트가 페일리를 곁눈질하더니, 그 또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이거, 뭐였지? 타인의 마나를 받아들였을 때의 부작용."
"소량은 괜찮은데 대량을 흡수할 경우에는 서클의 근원인 심장이 겨우 버티다가 결국에는 서클이 모조리 끊어지는 거였지, 아마. 덕분에 강제로 주입시키는 것은 강력범죄로 취급하고 있고."
페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앨버트는 굉장히 단순할 것만 같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꽤나 지적인 편에 속했다.
언젠가 페일리가 앨버트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공부, 어떻게 하면 잘 해?'
'…목표가 있으면 좀 편해.'
'넌 목표가 뭔데?'
'교수님께 은혜를 갚는 것.'
앨버트는 정말 눈 하나도 깜빡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저게 얼마나 낯부끄럽고 비정상적인 말인지 앨버트는 모르리라.
페일리는 앨버트의 가문이 '헤토'라는 가문이며, 원래는 앨버트가 노예였다는 사실을 전해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헤토 가문의 가주는 나이가 어린 노예들을 거둬들여 사람답게 살게 해주는, 정말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요컨대, 앨버트는 자신의 인생을 바꿔준 사람이 아니라, 에레브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 셈이었다.
앨버트가 에레브에게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페일리가 속으로 혀를 차며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침묵이 두 사람의 사이를 메웠다.
페일리는 묵묵히 앞으로 수 시간 후에 행동으로 옮길 계획을 검토했다.
시간이 흐르고, 정적만이 흐르던 강의실 내부에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마학 하나만 수강하는 마학 학생들의 자습은 정오까지였다.
페일리와 앨버트가 책과 필기도구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앨버트, 이따 훈련실에서 봐?"
"그래."
기숙사로 들어가는 갈림길 앞에서, 둘은 각자 흩어져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배낭을 방에 내려놓은 둘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시작.
페일리가 기숙사에서 나와 후문으로 향했다.
향하는 도중 보인 아카데미 본관에 박혀 있는 커다란 시계의 분침은 숫자 10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후 12시 10분.
페일리는 걸음을 빨리했다.
에레브에게 검붉은색 로브를 두르게 하기 위해서는 앨버트보다 병동에 빨리 도착해야만 했다.
그저 빨리 도착하는 것만으로는 또 부족했다.
아카데미로 에레브를 데려올 때까지 에레브가 앨버트와 마주치지 못하게 해야만 했다.
에레브가 어떤 로브를 두르느냐로 다투는 모습을 에레브가 보게 된다면, 아마도 에레브는 강경하게 대응하겠지.
그 대응에는 총 세 가지 경우의 수가 존재했다.
첫 번째, 아무런 로브도 두르지 않는다.
노출에 별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 않는 에레브였다.
이는 에레브가 이제 막 교수직에 취임했을 당시, 에레브가 수업 도중 스스로 배를 드러냈던 것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맨 살결을 240명 앞에서 드러내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데, 로브에 집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두 번째, 모든 로브를 전부 두른다.
이 또한 전례가 있었다.
페일리가 검붉은 로브를 선물했을 때, 에레브는 잠깐의 고민 끝에 모든 로브를 걸친 적이 있었다.
페일리와 앨버트 둘이 다투는 상황을 바라지 않기에 저질렀던 만행이리라.
로브 여러 개를 동시에 걸친 에레브는 귀여웠지만, 그 색조합까지 귀여울 리는 만무했다.
세 번째, 화를 낸다.
에레브는 사차원적이며 엉뚱한 면이 있어도 절대로 학생들에게 해가 되는 행동은 자의로 하지 않았다.
안 그러는 척 챙겨주는 에레브의 성격을 미루어 보건대 앨버트와 페일리, 둘 중 어느 하나가 마음에 상처를 입기라도 하면 그녀의 머리에 뿔이 나리라.
그리고 앨버트와 페일리가 지금 하는 짓은 서로를 상처입힐 수도 있는 짓거리였다.
그리고, 대망의 네 번째 경우.
에레브가 운다.
정확하게는, 슬픔에 빠진다.
에레브의 정신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페일리는 에레브의 상처를 통해 파악하고 있었다.
자칫하다간 에레브가 마음에 상처를 입어 슬픔에 빠질 확률이, 분명히 있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앨버트와 경쟁하는 것이 꺼려지는 페일리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앨버트에게 선수를 빼앗기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에레브가 앨버트와는 얼굴을 마주할 새도 없게 만들어버린다.
이것이 페일리의 목표였다.
페일리가 후문으로 나온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미 어제 아카데미의 지도를 훑어 후문이 병동으로 갈 수 있는 조금 더 빠른 길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에레브에게 지친 모습을 보여주면 의심받을 수도 있으므로, 그녀는 빠르게 걸었다.
**
페일리가 후문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한 앨버트가 정문으로 나왔다.
앨버트가 속으로 미소지었다.
'넌 틀렸어, 페일리.'
아마도 페일리는 후문이 병동에 조금 더 가깝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먼저 후문으로 나간 것이리라.
애초에 인적이 드문 후문이기에 앨버트가 설마 후문을 사용하진 않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앨버트는, 페일리가 후문을 택한 이유를 알면서도 방관했다.
이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바로 페일리는 절대로 달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페일리의 성격은 시간적인 효율을 따지기보다는 느긋하고 진득한 편에 속했다.
아마도 에레브가 페일리가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을 본다면 전말을 눈치챌 가능성이 조금은 있었다.
에레브 관련해서는 상당히 광적이게 되는 페일리가 에레브를 얕볼 리는 없으니, 앨버트는 자신의 추측을 믿었다.
앨버트도 원래는 페일리와 성격이 비슷했지만, 앨버트 본인이 지적인 쪽으로 고쳐나가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에레브를 위해.
앨버트가 에레브를 쭉 지켜본 결과, 앨버트는 에레브가 지적인 사람에게 호감을 품는다는 사실을 유추해냈다.
몇 가지 근거가 있었다.
첫 번째, 그녀가 목표로 하는 것이 원로원이었다.
원로원이 무엇인가?
아케즈에서, 혹은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마법사 집단이다.
단순히 서클의 개수가 많은 것만으로 원로원이 높게 평가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마법에 대해 누구보다 해박하며, 박식했다.
예컨대, 현재 에레브의 스승인 델라즈. 그는 원로원에서 가장 말단임에도 불구하고 교수직을 맡을 정도로 마법에 조예가 깊었다.
그런 사람 밑에서 배웠다면, 평범한 사람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공산이 컸다.
두 번째, 그녀는 마법에 열정이 깊다.
앨버트는 페일리와 언젠가 실습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잠깐의 대화 끝에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에레브는 수업에 열정적인 학생을 좋아한다고.
이는 당장 그녀의 행실만 따져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대체 어떤 마법사가 마법의 기초를 가르치기 위해 맨살을 드러내고 맞으면서까지 가르치던가?
이는 에레브라는 사람의 성격을 유추하기에는 꽤나 적나라한 단서였다.
실습을 나갔을 때, 앨버트에게 화를 냈던 것만 따져보더라도 그러했다.
강의실에서 수업할 때는 조는 학생이 있더라도 건드리지 않던 반면에, 앨버트가 살짝 잘못된 길로 빠지려고 하자 엄하게 다스렸다.
앨버트는 이를 '에레브가 실습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알게모르게 편애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에레브는 이미 앨버트를 편애해주고 싶다고 직접 말로 전한 적이 있지 않았는가?
이 같은 몇 가지의 근거들을 바탕으로, 앨버트는 지적인 남자가 되자고 결심했다.
전투도 마법에 의존하지 않고 깊게 생각하며, 마법을 보다 심층적이게 공부하며 에레브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지금 노력의 결실을 보이려고 한다.
앨버트는 마법만을 공부하지 않았다.
직접 책까지 찾아보며 다른 분야도 공부했으며, 그중에는 아케즈의 지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분명 후문은 병동에 가까웠지만, 정문으로 나가면 하나의 이점이 존재했다.
강을 건널 수 있다.
앨버트도 최근에서야 알게 된 정보였다.
레블에는 도시를 가르지르는 강줄기가 하나 있었는데, 이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를 경우 후문보다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젯밤에 직접 나가 확인하기까지 했다.
페일리의 '빠르게 걷는' 정도로는 자신의 속도를 넘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체력까지 넘쳐났다.
에레브에게 지친 모습을 보여주어선 안 된다는 것까지는 동일하지만, 고된 노동과 운동으로 다져진 자신의 몸은 고작 15분 정도 달린다고 해서 쉽게 지칠 몸이 아니었다.
앨버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냥 가는 건 좀 그러니까.'
병동에 가서 에레브를 바로 데려올 것을 생각하면, 에레브는 점심을 먹지 못하는 셈이었다.
'마타샤 아주머니 가게에 들릴 수는 없지만, 길가에서 파는 꼬치 정도라면.'
기껏해야 1분에서 2분이 더 모소될 뿐이었다.
앨버트는 발걸음을 돌렸다.
**
'체력으로 앨버트를 이기진 못해.'
아마도 앨버트는 우월한 체력으로 먼 거리를 빠르게 주파하리라.
정문을 통한 길은 후문보다 멀지만, 앨버트의 체력을 생각하면 아슬아슬했다.
그렇기에, 페일리는 최대한 변수를 줄이고자 자금을 투입했다.
"아, 오셨습니까."
"바로 출발해주세요."
페일리는, 마부를 한 명 고용했다!
레블이라고 해도 사람이 모든 곳에 넘쳐나는 것은 아니었다.
인적 드문 곳으로 빠져 마차로 달리면 시간을 더욱 절약할 수 있었다.
이 또한 어제 마차대기소까지 찾아가 거금을 주고 부탁한 결과였다.
비록 페일리의 용돈 대부분이 마부의 신분증으로 빠져나갔지만, 이 정도 투자는 페일리에게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돈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에레브와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고 생각하면 아깝지도 않았다.
크기가 굉장히 작은 마차가 인적 드문 길을 빠르게 달렸다.
처음에는 로판부르크에 들려 마타샤에게 도시락을 받아가는 것까지 목표로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에레브가 편히 밥을 먹을 시간이 남아나질 않았다.
차라리 아카데미로 데려와 식당에서 밥을 먹이는 게 이로우리라.
이제 남은 것은 정말로 기도뿐이었다.
페일리는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했다.
**
하얀색 이불이 꿈틀거린다.
처음에는 수십 초에 한 번 꼴로 꿈틀거리던 이불은, 이윽고 몇 초에 한 번 들썩거릴 정도로 움직임이 잦아졌다.
이불이 갑작스럽게 움직임을 멈추고, 이불 위로 에레브의 얼굴이 뿅 튀어나왔다.
"…으."
열린 창문의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떨던 에레브가 눈을 뜨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
그녀는 하품을 길게 늘여뜨리고선, 스트레칭을 몇 번 한 후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의 시침은 11과 12 사이에, 분침은 숫자 9 위에 올라가 있었다.
"…아!"
그녀는 오늘의 약속을 떠올리며 황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용변을 보고, 몸을 씻는 것까지 20분 만에 모두 마치고 나왔다.
어느새 시침은 숫자 12를 넘어갔고, 분침은 숫자 1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녀가 옷을 전부 다 입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 아타나시아가 나타났다.
"아, 왔어요?"
"미안해요, 조금 늦었네요."
"괜찮아요. 어차피 수업은 두 시인데요 뭐."
에레브가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세 가지 색의 로브가 들어 있었다.
에레브는 잠시 고민하다, 하나의 로브를 집어들어 걸쳤다.
"밥은, 가서 먹어요?"
"네. 어차피 애들도 지금쯤이면 아카데미에 있을 테니까, 가서 같이 먹어야죠 뭐. 근데 이런 거에 텔레포트 써도 되는 거에요?"
"뭐 어때요, 제가 통령인데."
아타나시아가 어깨를 으쓱이고, 에레브가 작게 웃었다.
아타나시아가 에레브의 두 손을 맞잡는 것과 동시에, 두 사람은 병실에서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