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9)2부 006
천장이 새하얬다.
대부분의 집이 천장이 새하얗지만, 느끼기에는 병실의 천장은 그것보다 더 새하얬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면 순간 내가 죽고 천국으로 올라온 건가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
"으응…."
찌뿌둥해 기지개를 키니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댄다.
마른 세수를 하니 그제야 생각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머릿속에 좀 돌기 시작했다.
아까, 무슨 일이 있었더라.
"…."
창문은 또 열려 있었다.
나는 항상 서늘해 창문을 닫아두는데, 내가 닫을 때마다 어김없이 열어재끼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의사나 델라즈가 아니었다. 아타나시아였다.
아타나시아가 왔다 갔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아까 델라즈와 나누었던 모든 대화들이 머리에 부상했다.
아타나시아와의 관계 회복, 플룻래빗, 원로원.
"…하아."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한숨을 내쉬고 바닥을 딛고 섰다.
화장실에서 세수만 간단하게 하고 옷을 챙겨입었다.
환자복은 잘 때만 입는다.
일어나면 나는 어김없이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이제야 깨달았는데, 밖은 어두웠다.
그야 당연했다.
오전에 잠들었으니까.
시계는 오후 10시를 나타내고 있었다.
질리게도 오래 잤구나.
"…아."
로렌스 통치 관련 문서는 델라즈가 잘 전달했겠지?
문제는 없을 거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서클들을 꺼내보았다.
여전히 완전한 원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여덟 개의 서클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서클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대로 부서져 있는 걸 볼 때마다 마음이 깎여나가는 것 또한 매일 동일하게 느낀다.
우울했다.
침대에 도로 누워 눈을 감았다.
방금 꾼 꿈을 기억해내기 위함이었다.
새까만 흑지에 내 기억을 토대로 전경이 그려진다.
베르노바를 죽였을 때의 기억이다.
더욱 정확하게는, 총을 발사한 직후, 서클이 꼬이며 온몸이 비명을 질러댈 때 느꼈던 고통들이 떠오른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고통.
이 고통에 대해서는 몇 번인가 진지하게 고찰을 해본 적이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본 유형의 고통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왜 그러한 고통이 날 덮쳤는지도 의문이었으니까.
곧바로 서클이 부서진 것이 원인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싱거운 결론이지만, 딱히 이렇다 할 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서클이 부서질 때의 기억과 고통을 꿈을 통해 다시금 느꼈다는 소리였다.
자조하며 찬장의 선반을 열었다.
검붉은색의 포도주병이 나를 반긴다.
나는 잔에다가 포도주를 따른 다음, 조금씩 들이켰다.
이 또한 오르가니아 산 포도주였다.
쓴 맛보다 달짝지근한 맛이 더 강했기에 부담없이 마실 수 있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반대했다.
환자가 술을 마신다니, 어불성설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의사에게만 몰래 내 상처를 보여주자, 결국 그는 술을 허락했다.
두 번을 더 따라서 마시니까,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예 유리잔은 내려놓고 병나발을 불었다.
꽤나 무거웠기에 두 손으로 받치면서 마셔야만 했다.
"…크으."
술을 입에 댄 건, 베개를 눈물로 적셨던 그날부터였다.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목적이 달성 불가능하게 된 이상, 할 게 아무것도 없었기에 나는 술을 마시기로 결정했다.
술에 취한 채로 있을 때는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었으니까.
시간조차 느리게 흘러가는 나만의 세상에 술이라는 극약을 처방해야만 기분이 좀 나아졌다.
배를 문질렀다.
속이 뜨거웠다.
신기한 일이었다.
날은 추웠고, 창문은 열려 있었으며, 병 또한 서늘했다.
헌데도 술을 마시면 몸이 달아올랐다.
썩 나쁜 느낌이 아니었다.
지독한 무력감과 허무감이 찾아왔다.
별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이런 감정이 드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대신이라고 할까, 이런 감정이 들 때마다 추가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게 하나 더 있었다.
자살충동이었다.
사실 이게 자살충동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렬히 들었을 뿐이다.
살고 싶지 않은 것과 죽고 싶은 것은 엄밀히 따지면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딱히 이것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살충동이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음에도 더욱 강렬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다시 침대에 엎어져 잠들고 싶었다.
정신을 차리고 있기가 싫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아직까지는 희망이 있으니까.
품어도 소용이 있을까 말까 한 희망.
병실을 나왔다.
마광석(魔光石)이라 함은, 마나를 주입했을 때 빛을 내뿜는 돌을 뜻했다.
이 세계에서는 가공해서 전구처럼 쓰는 게 일상이 되어 있다.
샹들리에와도 같은 장식에 꽂아놓고 필요할 때마다 마나를 주입하는 방식이었는데, 지금은 어두웠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은 밤이었으니까.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인데, 여기 상주하는 직원들은 모두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단순한 병동이 아니라 나를 위해 개조된 일인병동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조잡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으나 나는 넘어가기로 했다.
나를 보살피는 게 저들의 의무가 아닐 뿐더러, 나도 딱히 원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병동에서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술도 동날 때마다 챙겨와주는 사람이 있고, 심심하지 않도록 서재를 만들어주기도 했으며, 밥도 하루 세 끼 꼬박꼬박 제공해주었다.
정작 나는 주로 하루에 점심 한 끼만, 그것도 페일리와 앨버트가 가져온 마타샤의 도시락으로 떼우고 있지만.
나만 먹는 것도 아니고, 저들이 조리하는 만큼 저들끼리도 먹기도 하니 굳이 내가 먹어줄 필요는 없었다.
지금 내가 향하는 곳은 서재다.
서재를 방문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서재에는 내 요청에 따라 마법과 관련된 수많은 서적들을 배치해놓았는데,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서재를 방문해 서클을 수복하기 위한 방법들을 찾았다.
물론, 지금까지는 어떠한 수확도 없었다.
부서진 서클을 다시 조립하는 방법 같은 게 적혀 있는 책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에 델라즈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통해 또 다른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플룻래빗.
베르노바가 갖고 있던 고서에는 마물뿐만이 아니라 사람도 강화할 수 있는 마물이라고 적혀 있다던가.
지금까지는 마법과 관련된 책들만 뒤져봤지, 마물에 관련된 책을 찾아보지는 않았다.
서재라고는 하지만, 작은 도서관 같은 느낌이다.
앉아서 편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자그마한 공간을 제외하면, 조금 큰 규모의 이 방 전체가 책으로 매워져 있다.
책장을 더듬다가, 책 한 권을 빼들었다.
「마물도감 개정판」.
얼마 전에 발견했던 책이다.
불과 두 달 전에 집필되었다고 새겨져 있는 책이다.
저자는 물론 델라즈.
이 양반은 대체 원로원에 왜 들어간 걸까?
이렇게 책 쓰는 걸 좋아하면 그냥 이걸 업으로 삼지.
책을 펼쳐 넘기니, 내가 찾고 있던 마물의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플룻래빗에 관한 정보들.
「플룻래빗.
전대륙의 숲속에서 살아가는 무해한 마물로, 토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일반적인 토끼와 마찬가지로 체구가 작으며, 걸음이 빠르다.
플룻래빗을 마물로 취급해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일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마물로 합의되었다.
최다 서식지는 아케즈의 바이코, 불과 4개월 전 플룻래빗의 효능이 밝혀졌다.
플룻래빗을 마물에게 섭취시킬 시, 해당 마물은 빠른 속도로 진화한다.
현재는 양식과 마물을 키우는 용도로의 사용을 법적으로 엄격히 금하고 있다.」
이 외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종족 습성을 비롯한 여러가지 정보들이 서술되어 있다.
사람까지 강화할 수 있다는 사실은 철저하게 숨기는 모양이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아케즈는 최소 2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다.
어느날 갑자기 플룻래빗이라는 마물이 짠, 하고 등장한 것은 아닐 것이기에, 적어도 200년 동안 플룻래빗이 방치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왜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는가?
델라즈의 말이 사실이라면, 베르노바가 갖고 있는 고서에 적힌 내용이 진실이라면, 플룻래빗을 모종의 방법으로 섭취하면 인간 또한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클이 늘어난다.
서클의 개수에 따라 차별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아케즈다.
어째서 이 같은 사실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을 수 있었나.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숨긴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비록 일시적이라고는 해도 서클 10개도 우습게 찍을 수 있다는 거다.
어떤 경로로든 알 수밖에 없다.
또한, 베르노바가 9서클이었다는 것 또한 그것을 방증한다.
베르노바의 목적은 노바를 찾는 것.
달리 말해 요관들을 모두 뒤지는 것이다.
베르노바가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 서클을 열 개든 열한 개든 만들어내서 첫 번째 요관까지 뚫었겠지.
하지만 그도 몰랐다.
도대체 어떻게?
왜 2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무도 몰랐는가?
더욱이, 베르노바는 그 고서를 갖고 있음에도 어째서 알아낼 수 없었는가?
"…하아."
머리가 울린다. 술은 다 좋은데 이게 문제다.
가벼운 마음으로 있을 때는 얼마든지 들이켜도 좋으나,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하려고만 하면 어지럽다.
나는 「마물도감 개정판」을 다시 꽂아넣고, 다른 책을 찾았다.
악마와 관련된 책.
악마와의 계약 같은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제는 써먹을 차례이다.
물론 악마의 계약이라는 게, 큰 대가를 요구하겠지.
하지만 대가라고 해봤자 목숨을 요구하진 않을 것 아닌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 세계에서의 모든 것을 버려도 좋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
책장 전체를 흝고 나서야, 딱 한 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법의 기원, 악마」.
책이 상당히 얇았다.
학술서라기보단 차라리 얇은 문제집 정도의 두께다.
책을 펼치니, 첫장부터 이런 문구가 나를 반긴다.
「마나를 빌리는 모든 자들이여, 너희는 모두 악마의 아이다. 너희가 믿어야 하는 것을 헷갈리지 마라.」
뭔가 멋들어진 문구라고 생각해서 대체 무슨 책인가 하고 살펴보니, 또 이렇게 적혀 있다.
「저자, 세브레.」
사람 이름인가 싶었는데, 그 뒤로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추가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걸 보아하니 단체명인 것 같기도 하고.
다음장으로 넘어갔다.
「우리는 마나가 무엇인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마법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연료, 그것이 곧 마나이다.
그런 마나와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들이 신봉하는 것은 삼성교의 세 여신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들은 세 여신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통치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
진실로 세 여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어째서 삼성교에는 고위 마법사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가?
진실이란 이렇다.
세 여신은 전지전능하지 않거나, 최소한 마나, 혹은 마법과는 관련이 없다.
그들이 완벽한 신이었다면 그들을 믿는 충실한 신도들에게 더욱 높은 힘을 주는 것이 합당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 하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여기까지가 책을 소개하는 글이었다.
반교회세력이 집필한 책인가?
근데, 삼성교가 전대륙에 뻗쳐 있는데 얘네를 상대로 싸움을 거네.
어지간히 깡이 좋은 사람들인 것 같다.
아니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거나.
높은 확률로 후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책 내용을 굳이 확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소개문에서부터 대놓고 싸움을 유도하는데 제대로 된 내용을 담고 있을 리 없지.
미련없이 책을 꽂아넣고, 서재를 나왔다.
복도에 불이 들어와 있다.
'…누가 왔나?'
이 밤에 의사나 직원이 나를 찾아올 리는 없고, 누구지.
병실에도 불이 들어와 있었다.
문 사이 틈으로 빛이 보였다.
문을 벌컥 열어재꼈다.
"…교수님!"
페일리가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나를 반겼다.
나는 살짝 어이가 없었다.
나는 교수직을 그만두었다지만, 페일리는 여전히 학생이었다.
당장 내일 새벽에 일어나야 되는데 여긴 왜 온 거야.
"왜 왔어요?"
"오늘은 교수님 얼굴 못 봤잖아요."
내 몸이 멈칫했다.
불의의 일격을 직격으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페일리는 별 생각 안 하며 한 말이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조금 감동했다.
매일 누군가가 내 얼굴을 보러 찾아와주는 건 생각보다 더 행복한 일이었다.
페일리를 꼭 한 번 안아주려다가, 멈췄다.
얘도 나더러 술을 마시지 말라고 압박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내 입가에서 도는 포도주 냄새를 맡으면 대체 뭐라고 잔소리를 할지 무서웠다.
페일리가 표정을 찌푸렸다.
"…교수님, 술 마시지 말라니까요."
"예? 아니, 어떻게."
"병을 손에 들고 계신데요."
그 말에 시선을 아래로 향하니, 큼지막한 포도주 병을 한 손으로 쥐고 있는 내 손이 보였다.
아, 나 취했구나.
항복한다는 의미에서 술병을 선반에 다시 돌려놓고, 침대에 몸을 날렸다.
"…아, 페일리. 나 옷 갈아입을 테니까, 잠깐만 나가 있어요."
"도와드릴게요."
"아니, 괜찮─"
"술."
페일리는 빙긋 미소짓고 있었지만, 그게 섬뜩하게 보이는 건 비단 내 기분 탓일까.
"마셨잖아요?"
나는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침묵을 긍정으로 이해한 페일리가 내게로 다가와 옷을 벗겼다.
나는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누군가가 내 옷을 갈아입혀준다는 감각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맨정신으로 감내하기엔 쪽팔리기도 했고.
"…교수님."
"응?"
상의를 벗겨낸 페일리가 움직임을 멈췄다.
뭔가 싶어서 눈을 떠보니, 페일리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왜요?"
"…."
말없는 페일리의 시선을 좇으니──
"아."
나는 곧바로 환자복을 빠르게 챙겨입고,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내 멍청함을 탓하고 싶었다.
아니, 이건 내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술 때문이었다.
술이 웬수였다.
"…앨버트랑 제가 선물을 드릴 게 있어요."
"선물이요?"
한 소리 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딴 소리가 들려왔다.
선물이라니?
무슨 선물?
"아직 확정은 아니라서…. 저희가 학생인 만큼 제약도 있고. 그냥, 교수님이 확실하게 좋아하실 만한 거에요. 기대해주세요."
고개만 삐죽 내밀어서 확인한 페일리의 표정은, 오묘했다.
잘 모르겠다.
내가 기대를 해도 되는 것인지, 아닌지.
다만 페일리의 눈이 생각보다 깊었다.
적어도 페일리 기준에서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진 않았다.
묘한 기대감.
페일리를 한 번 믿어보기로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