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억을 위해 아카데미 교수가 되었다-108화 (108/247)

(EP.108)2부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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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잘 했나."

이튿날 오전, 델라즈와 나는 아케즈로 돌아가기 위한 채비를 했다.

청혼을 거절하는 데에도 성공했으며, 유사 시에 쓸 만한 패도 하나 얻었다.

어떻게 봐도 호재였다.

떠나기 직전 로부르크가 우리를 배웅했다.

실상은 로렌스의 통치권을 아케즈의 통령, 아타나시아에게 넘긴다는 문서를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이 양반이 주겠다는 문서는 안 주고 생뚱맞게 저렇게 물어왔다.

페디넌트 없이 홀로 나온 걸 보면 애초에 유도한 듯하다.

이쯤에서 우리는 로부르크의 입장을 다시금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로렌스와의 전쟁 당시, 나는 로렌스를 아케즈에서 통치하겠다고 발언했다.

다만 그때 당시에는 베르노바를 처단해야 한다는 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로부르크에게 잠깐 맡겼다.

나는 잠깐이면 된다고 말했지만 결국에는 6개월,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로부르크가 통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황상 일부러 나한테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아타나시아에게도 알리지 않고 감당했던 것 같은데, 이건 내 실수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 넘어가고.

로부르크가 그렇게까지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의 아들, 페토라르의 왕자 페디넌트를 내게 소개시켜주기 위함이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로부르크가 페디넌트를 얼마나 아끼는지, 하다못해 얼마나 챙겨주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다.

처음 로부르크가 내게 제안했던 것은 선을 보는 것이었지만, 내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한 번 대면이라도 해주는 것으로 말을 바꿨다.

내가 실수해서 로부르크에게 빚을 진 건 맞지만, 반대로 로부르크가 혼자서 감당한 것도 어떻게 보면 떳떳한 행동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색적인 비난은 불가능하겠지만, 일개 교수와 국가의 대사를 정한 부주의한 행실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겠지.

그렇기에 나도 무조건적으로 알겠다고 대답하지 않은 거고.

다시 돌아와서, 이 모든 정보를 종합해보았을 때 결론은, 로부르크는 페디넌트를 꽤 아끼지만 자신의 행동반경을 명확하게 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고민할 수밖에 없다.

로부르크는 진심으로 내가 페디넌트와 내가 이어지길 바라는 건가?

아니면 그저 '페디넌트와 에레브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라는 결과만 남겨 페디넌트를 만족시킬 요량인가?

로부르크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그의 표정을 흝었지만, 과연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이런 사람한테는 숨겨서 좋을 게 없다.

숨겨도 로부르크가 페디넌트에게 어제의 일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알 수밖에 없을 거고.

"거래를 했습니다."

"거래?"

로부르크가 흥미가 인다는 듯이 반문했다.

"페디넌트 님이 저를 도와주시는 것을 조건으로 데이트를 해드리기로 했습니다."

로부르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눈치였다.

"의외군. 명백히 꺼려하지 않았나?"

"데이트 한 번 한다고 제 몸이 닳는 것도 아닌걸요."

난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로부르크는 불편해하는 기색이었다.

방금 내 발언은 조금 애매했으니까.

"…뭐, 좋겠지. 둘 사이에서 맺은 약속을 과인이 끼어들어 멋대로 다루는 것도 좋지 않고 말이다."

로부르크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문서를 건넸다.

"조심히 돌아가라. 나중에 또 보지."

"환대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로부르크가 돌아가는 것을 확인하고, 델라즈가 자동차를 만들어냈다.

운전석에 올라타 핸들을 잡으니, 내 손가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반지."

반지를 돌려주는 것을 깜빡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들어가는 것도 그렇고, 거절의 의사는 확실히 전달했으니 문제는 없나.

왼손 약지에만 안 끼면 되는 문제겠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자동차가 부드럽게 출발한다.

이상하게도 내가 만들어낸 자동차를 탈 때보다 더욱 부드러웠다.

이건 내가 미숙한 것일까, 델라즈가 천재인 것일까?

…아무리 우호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둘 다인 것 같다.

그래도 나는 과학이 발달한 원래 세계에서 살다 온 사람인데, 자존심 상한다.

공대라도 나올 걸 그랬나.

바람을 맞으며 서행할 때였다.

로부르크가 배웅해줄 때마저도 침묵하던 델라즈가 입을 열었다.

"아타나시아가 밉냐."

정말로 갑작스러웠다.

델라즈가 무엇을 목적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대답은 확실하게 할 수 있었다.

"…당연하죠."

밉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 아타나시아의 품에 안겨 있었던 때가 떠올랐지만 무시했다.

질질 끌리던 침묵 끝을 델라즈의 말소리가 또 한 번 채웠다.

"이해하라는 말까지는 안 한다. 서클을 잃은 상심이 얼마나 클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 너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없겠지. 서클 여덟 개를 모조리 희생시켜 나라를 구한 영웅담은 그 어느 나라에도 이제껏 없었으니까."

나는 그저 경청했다.

나는 델라즈에게 눈짓 한 번 주지 않았는데, 이것이 내가 델라즈에게 전하는 무언의 항의라는 사실을 델라즈도 알 터였다.

델라즈가 한숨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물은 이미 엎질러졌어. 더 이상 주워담을 수 없다는 거다. 너가 아타나시아에게 적대감을 보여도 너에게 좋을 게 없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거다. 적대하고 기피할 바에야 차라리 너가 바라는 바를 요구하고, 그것에 순응하게 만들어라."

델라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어렴풋이 전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델라즈 또한 나를 이해해서 하는 소리가 아닐 터다.

모든 일이 끝나 평화가 찾아왔는데 나와 아타나시아 사이가 아예 뒤집어졌으니 이 아저씨도 속이 좀 타겠지.

하지만, 여전히 델라즈조차 모르는 게 하나 있다.

"말처럼 쉽게 되는 게 아니에요. 아저씨는 모르잖아요. 내가 왜 이렇게까지 서클에 매달리는지."

내가 이세계에서 왔다는 것.

나는 내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면 이 세계에서의 모든 것을 포기할 생각마저 품고 있다는 것.

"그래, 모른다.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소리야. 이참에 좀 물어보자. 너는 비록 서클을 잃었다고 한들 나라를 구한 영웅이다. 로렌스가 엇나가는 걸 바로잡은 장본인이기도 하지. 적어도 페토라르, 탁큰, 오르가니아, 아케즈에서는 네 입김이 굉장히 강하다는 거다. 너가 홀을 이용해 어디로 전이되고 싶어하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너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나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아무도 나를 내가 원하는 곳에 데려다주지 못해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에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이건 이 세계의 사람들이 개입해도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오로지 나만이 이해할 수 있고 나만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였다.

무거운 침묵이 공기를 눌렀다.

아까와는 확실하게 차내의 분위기가 달랐다.

일변했다고 표현해도 좋겠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기분이 점점 시궁창으로 빠지는 중이었다.

"…아타나시아로부터 들었다. 노브를 고문했다면서."

"보나마나 루나가 알려줬겠죠? 뭐."

어느 정도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노브의 존재는 내가 전쟁을 일으키는 데 명분으로 사용했다.

꽤나 진중히 다루어져야 할 문제라는 거다.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아는데, 입막음까지 해버리려다가 참았어요. 그렇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숨겼고. 근데 그건 왜요?"

"생각을 잘 해보니까, 노브가 아무리 멍청하더라도 고작 서클 네 개 가지고 너한테 덤비진 않았을 것 같아서."

동의하는 부분이다.

"서클 여섯 개 달고 있었어요. 방법은 모르겠지만."

사실 여섯 개인지도 확실치 않다.

텔레포트를 사용하는 걸 보아선 6서클 이상인 건 확실한데, 노바의 멍청함을 따져보니 일곱 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이 대충 짐작은 간다."

나도 모르게 발에 힘이 들어갔다.

천만다행히 엑셀이나 브레이크를 깊숙이 누르거나 하진 않았다.

대신 내 머리는 방금 델라즈가 내게 무슨 말을 한 것인지 되짚어보았다.

델라즈는 서클을 불리는 방법이 대충 짐작이 간다고 말했다.

"…말해봐요."

목소리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서클을 늘리는 것과 서클을 수복하는 것은 확연히 다른 일이지만, 그래도 큰 희망임에는 변함이 없다.

저 말은 서클을 잃은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내 신경을 뒤집어버리기에 충분했다.

"베르노바가 갖고 있던 고서에 적혀 있던 내용이다. 플룻래빗은 마물뿐만이 아니라 인간 또한 강화시킬 수 있다. 정확한 방법은 서술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게 뭐에요. 결국에는 쓸모가 없잖아."

김이 빠졌다.

피어오르던 고양감에 환희하던 신경이 다시 축 늘어진다.

"아타나시아랑 잘 지내보라는 거다. 플룻래빗의 최다 서식지는 아케즈의 바이코다. 너가 부탁하면 플룻래빗으로 연구를 해줄지도 모르지. 너는 잘 모르겠지만, 베르노바가 죽고 나서도 법이 크게 바뀌진 않았다. 여전히 양식은 불법이지. 하지만 통령 권한으로는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

"그걸 중재랍시고 하는 거에요?"

어이가 없었다.

이 아저씨는 어떻게든 나와 아타나시아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은 모양인데,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나와 아타나시아는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지만, 결과론적으로는 불해(不解)를 고집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감정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친부를 죽이는 것을 어려워한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가슴으로는 인정하지, 납득하지 못한다.

아타나시아 또한 서클을 잃은 나를 이해하고 있을 거다.

내게 죄책감을 품고 있으니까 대화라도 시도해보려고 내 병실에 계속 찾아왔겠지.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거절했다.

어쩌다가 말을 섞는 경우는 있어도 결코 내 얼굴을 보여주진 않았다.

알게 모르게 아타나시아와 나 사이에 생긴 감정의 골은 생각보다 깊을 것이 분명하다.

델라즈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말을 고르는 듯했다.

"나는 본래 원로원의 단원이지만 운이 좋았을 뿐이다. 마법에 적성이 어느 정도 있는, 마나량만 쓸데없이 많은 남자 마법사, 그게 나지. 하지만 결코 나는 유능하지 않아. 마법에 관심이 크게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책을 쓰는 걸 더 좋아한다. 하다못해 인간관계에서도 미숙하다.

이는 델라즈와 알고 지내며 어느 정도 짐작을 했던 부분이다.

원로원의 일은 노바를 찾는 것, 즉 굳이 힘을 합쳐 행동할 필요가 없었다.

매사에 귀찮아하며 책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델라즈의 성격 상 사람과 대화할 일도 거의 없었겠지.

그나마 아타나시아와는 사이가 좋아보이지만.

"원로원은 애초에 비정상인들이 모인 집단이야. 그중에서도 나는 말단이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고, 할 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다. 하물며 내가 어릴 때부터 돌봐온 애랑 제자년이 사이가 나빠졌다는데, 내가 그걸 좋게 푸는 방법을 알 리가 만무하지."

"그렇다면 아예 시도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에레브, 다들 입 밖으로 내지 않을 뿐이지 모두 너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다. 너가 병상으로 실려가는 걸 보고 모두 깨달았거든. 언젠가는 일어났어야 했던 일이었다. 베르노바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대항할 수 있던 우리 원로원이 해야만 했던 일이었지. 하지만 우리는 모르는 척 어물쩡 넘겨왔고, 결국에는 원로원도 아닌 스무 살짜리 여자애한테 기대고 말았다."

서행하던 차는 속도가 줄어들더니 이내 황무지 한가운데에 멈췄다.

내가 일부러 엑셀에서 발을 뗀 것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감정이 격해지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운전을 할 수는 없었다.

델라즈는 살아도 잘못하면 내가 죽는다.

난 죽고 싶지 않──

아.

아아?

아.

아하.

손목과 목에서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내 입꼬리가 비틀리는 게 내게도 느껴진다.

차는 이미 멈췄다.

이 분노를 통제해야 하는 이유를 나는 찾지 못했다.

해도 되는가?

해도 되는 것인가?

몇 번이고 자문했으나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폭발시키지 말지언정, 참지는 마라.

"…그렇게 미안해할 줄 아는 사람들이, 병문안 한 번 안 와요?"

"다들 미숙한 거다. 아케즈는 마법 강대국이다. 비정상적으로 강함에 집착하지. 마법의 적성을 비롯한 힘의 크기만이 아케즈 내부에서 위아래를 가르는 척도다. 일평생을 마법에 미친 채로 살아왔던 사람들이다. 솔직하게 사과하는 방법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야."

그것쯤은 알고 있었다.

군주인 베르노바조차 내정은 보살피지 않는데 단순히 세계최강이라는 이유로, 누구도 그를 건드릴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만인 위에 군림했다.

강함만이 그들의 삶을 유지하게 해주는 이유겠지.

하지만, 이것 역시 그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이유라는 걸 그들도 과연 아는 것인가?

델라즈는 말했다.

원로원은 모르는 척 어물쩡 넘겨왔고, 결국에는 씨발, 원로원도 아닌 스무 살짜리 여자애한테 기대고 말았다고.

그 스무 살짜리 여자애가 누구겠는가?

나였다.

원로원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노바를 찾기 위함이었다.

이것조차도 베르노바의 뜻이었다.

원로원은 그들 스스로 나라를 지킬 의지도, 인민들을 위해 일할 의지도 없다.

그들은 언제나 힘에 의존했고, 힘을 위해, 힘에 의해 살아왔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대체 원로원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

자연스레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원로원의 존재를 강요하던 베르노바는 이미 죽어버렸다.

그들이 존재할 이유일랑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법연구동은 원로원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요컨대 마법 실력에 대한 빈부격차였다.

이미 가장 강대한 이들만이 마법연구동을 이용해 더욱 실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웃기는 일이었다.

누굴 위한 원로원인가?

"…그래서요? 나한테는 궁색한 변명으로밖에 안 들리는데. 결국 원로원은 책임을 방조했어요. 무책임하게 그들의 역할과 책무를 유보했다고요. 내가 원로원을 이해해줘야 하나요? 사과도, 감사의 인사도 제대로 건넬 줄 모르는, 파렴치한 놈들을?"

이해되지도 않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솔직히 말할게요. 나는 일이 좋게 끝났으니까 입을 다물고 있는 거에요. 눈을 뜬 그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해왔어요.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나만의 일 때문에, 난 매일 자살충동이 들어요. 성별이 바뀌어본 기분을 알아요? 5년 동안 전전긍긍하다가 겨우 성공하나 싶었는데 눈앞에서 빼앗긴 기분을 아냐고요."

아무도 모를 거다.

"그때도 목 매달고 싶은 거 겨우겨우 참아가면서, 아저씨가 귀찮아하는 교수짓까지 떠넘겨받으면서 원로원에 들어가길 희망했어요. 내가 왜 원로원에 들어가고 싶어하는지 아저씨도 알잖아요. 마법을 연구하기 위해서였어요. 서클을 높이기 위해서였다고요. 하지만, 내가 베르노바를 참살하는 작전을 입안하고 실행에 옮기면서까지 총대를 멨는데도, 원로원은 뭘 했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철저하게 방관했다.

"제 편의를 봐주기를 했나요, 아니면 베르노바를 참살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길 했나요? 내가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로 판을 벌려놓으니까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든 것뿐이잖아요. 그마저도 내가 다 했어요. 원로원이 베르노바를 죽일 때 한 게 대체 뭐가 있는데요? 나 혼자 했어요. 씨발, 나 혼자 했다고요."

사실상 베르노바를 죽이는 데 일조한 사람은 나와 델라즈밖에는 없다.

베르노바의 죽음 이후, 내가 다른 모든 원로원은 적대하면서도 델라즈만큼은 예외로 대해주는 게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델라즈가 쏟아부어준 8서클 마나가 없었다면 그때의 일은 성공할 수 없었다.

"서클을 희생한 것도 나고, 베르노바의 심장을 꿰뚫은 것도 나에요. 도움도 되지 못했으면서, 마음 속으로 빚을 느끼기만 하면 다에요? 왜 그 흔한 감사인사, 사과의 말도 직접 못하는데요?"

내 입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눈을 뜬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아저씨랑 아타나시아 말고 나를 찾아온 원로원이 있어요? 없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내가 원로원을 이해해줘야만 하나요? 아저씨, 그나마 아저씨니까 이렇게라도 말하는 거에요. 제발 개소리하지 마세요. 죄다 죽여버리고 자살하고 싶으니까. 아타나시아랑 원만하게 지내라고 했죠? 됐어요. 난 못 해요."

다시 엑셀 위에 발을 올려두었다.

황무지에서는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침대에 누워서 눈을 붙이고 싶은 심정도 한몫했다.

"에레브."

"그만 지껄이는 게 좋을 거에요. 안 그래도 원로원에 대한 혐오감, 거부감이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는데, 아저씨까지 나한테 밉보이고 싶어요? 그만 말해요. 더 이상 이걸로 아저씨랑 얘기하기 싫어요. 아타나시아랑 얘기하기도 싫고요."

델라즈는 그 이상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협박이 효과적으로 먹힌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잘 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아타나시아 운운하면 그냥 이대로 급브레이크 밟아서 죄다 엎어버리고 싶었으니까.

원로원은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원로원 본가에 찾아갔을 때, 나를 호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보다 눈가를 찌푸린 채로 바라보는 사람이 더 많았다.

당시에는 계획을 성공시켜야 했으니 별 말 않고 넘겼지만, 이제 와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원로원은 책임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역겨운 쓰레기 집단이다.

내심 아타나시아가 통령으로 옹립된 것에도 나는 반발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봤자 아타나시아도 원로원이니까.

원로원의 해체까지 속으로 바라고 있던 내게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참았다.

꾹 묵혔다.

입을 열지 않았다.

닥쳤다.

나는 닥치고 있었다!

왜? 이왕 좋게 풀린 거 나 하나가 좆 같이 굴면서 분위기 망치기는 싫었으니까.

나는 영웅이었고, 아케즈는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역적 베르노바를 처단했다.

그런 상황에서 영웅이 우중충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대놓고 후회한다는 사실을 밝히라고?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결국에는 내 목표 또한 원로원에 들어가는 거다.

아쉬운 놈이 굽혀야지, 뭘 어쩌겠는가?

베르노바가 죽은 지금, 마법연구동을 사용해서 마법을 연구하는 데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나를 명예 원로원 같은 걸로 취임시켜서 마법연구동을 사용하게 해줄 수도 있는데, 저들은 내게 일언반구도 없이, 마치 베르노바가 죽은 그 날 따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굴고 있다.

그래도 난 참았다.

아쉬운 건 나였으니까.

베르노바를 참하면 마법연구동을 사용하게 해주겠다는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과욕에 불과할 뿐이라며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지금 나한테 돌아온 것은 뭐지?

대체 나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뭘 위해.

무엇에 의해?

기분이 더러웠다.

괜시리 목과 손목이 따가웠다.

그렇다고 옷을 벗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미치고 환장하겠군.

레블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내려서 혼자 걸었다.

길은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신분증은 아직 델라즈의 신분증과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문제도 없었다.

병실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무언가 일은 없었냐는 의사에 말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고 대답해준 다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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