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억을 위해 아카데미 교수가 되었다-105화 (105/247)

(EP.105)2부 002

하루에 한 시간 걷는 게 고작이던 운동은 내가 적극적으로 임하면서 본격적이게 되었다.

식단관리까지 병행할 정도로 철저하진 않았지만, 근육이 붙어야 했기에 충분히 먹었고 충분히 몸을 움직였다.

어느새 로부르크와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정확하게 일주일 후면 일전에 약속했던 한 달이 모두 지나갔을 때다.

몸이 아직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다면서 미루어도 크게 문제될 건 없겠지만, 아무래도 양심에 조금 찔렸다.

마지막 수업도 확실하게 해내고, 운동까지 하고 있는 사람이 뭘 못 하겠냐는 말이었다.

"아저씨 시간 날 때 가요."

내 말에 델라즈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현재의 나는 해외여행을 홀로 할 수 없는 몸이었다.

그렇기에 나에게 맞춰주는 델라즈의 편의라도 봐주자는 심산에서 말한 것이었는데,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가서 얼굴만 비추고 오는 거 맞지?"

"아마도요? 나는 그럴 생각이에요."

델라즈는 무엇이 문제인지 여전히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다 못해 한 소리 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요?"

"너랑 나를 그렇고 그런 사이로 오해할 일은 없겠지?"

내 표정이 단번에 썩었다.

델라즈도 자기가 못 할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는지 표정이 어두웠지만,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따져봤을 때 아무렴 나보다 심할까.

델라즈가 걱정하는 것은 아마도 이러했다.

로부르크의 아들이 나를 보고 싶어한다는 말에 데려가는데, 혹시나 바로 내 옆에 있는 자기를 오해해서 질투하기라도 해버리면 어쩌냐는 말이었다.

"로부르크 전하께서 직접 말씀하신 거잖아요. 괜찮아요."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로부르크의 아들, 왕자의 뜻.

로부르크는 아들의 부탁에 못이겨 내게 이야기를 꺼냈지만, 나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싫어 보다 약속을 가볍게 만들었다.

맞선이 아니라 안면만 터놓는 소개팅 느낌으로.

애초에 회담의 목적 자체가 바뀐 만큼, 델라즈에게 견제가 들어가는 일은 없을 거다.

로부르크의 아들이 자기 뜻대로 안 돼서 조금은 억울해할 수도 있겠다마는, 그거는 우리랑 아무런 상관이 없지.

뭣보다. 델라즈 나이는 서른셋, 아니, 서른넷이다. 그에 반해 나는 스물하나지.

엮는 것 자체가 나한테 실례라는 뜻이다.

델라즈는 한참을 더 고민하더니, 비장한 표정이 되었다.

"책은 나중에 써도 된다. 피곤한 일 먼저 처리해야지. 너가 가자는 대로 가마."

조금 의외였다. 이 아저씨가 귀찮은 거 정말 싫어하고 책 쓰는 거 정말 좋아하는 양반인데.

그걸 뒷전으로 밀어버리고 나를 위해준다니.

말은 이렇게 해도 나를 위해주지 않으면 내심 서운했을 것 같다.

내가 지금 뭘 하다가 이런 꼴이 됐는데.

이걸 무기로 삼아 휘두르고 싶은 것까진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억울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라를 구한 영웅이라는 칭호가 달갑지 않거나 부담스러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자부심이라도 느끼고 있기에 내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서클이 죄다 부서질 각오를 짊어지고 계획을 실행으로 옮긴 건 맞지만, 아까웠다.

그러지 말걸.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내가 굳이 희생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까.

요컨대 후회였다.

문제가 있다면 남한테 밝히기 어려운 내용의 후회라는 점일까.

이런 거다.

누군가가 내 목숨을 구해주고 그만의 무언가를 포기했는데, 나중 가서는 그것이 후회된다고 말하는 거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떨까.

나는 이기적인 사람이었지만, 이미 완성된 상황을 쥐고 흔들며 불만을 표출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기분이 언짢은 건 표현할 수 있었다.

그 누가 생각하든 서클을 여덟 개나 잃은 것에 대해 한탄하는 건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델라즈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겠지.

이 세계에서는 나에 대한 것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다.

비록 서로 알게 된지 적은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내 기분이 어떤지는 델라즈도 능히 추론해낼 수 있었을 거다.

그렇기에 내게 선택권을 양보한 것이겠지.

선택권이 내게 주어지니 또 고민되었다.

하루 빨리 다녀오는 것으로 심신을 안정시키는 것 또한 사리에 맞았지만, 어째서인지 페토라르의 왕자와 얼굴을 마주하긴 싫었기 때문이다.

페토라르가 내게 선물한 것은 반지.

그들이 내게 전한 메세지는 노골적이었다.

결코 달갑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그나마 기분이 덜 나쁘게 움직일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던 와중 델라즈가 말했다.

"너, 성대 한 번 들려야 한다."

"거긴 왜요?"

"너가 모든 것을 끝낸 장소인데, 한 번쯤은 확인하는 게 좋지 않겠냐. 평생 이렇게 울적하게만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무래도 델라즈는 내가 지난번에 자살하고 싶다고 충동적으로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사실 충동적이진 않지만.

나는 팔짱을 끼며 고민에 빠졌다.

이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카데미를 제외하면 처음 있는 일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여교수이자 노바 7서클 마법사 에레브의 흔적이 있는 곳에 가기는 꺼려졌다.

기숙사 가서 선물 확인하고 마지막 수업했던 거, 그거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조금 달랐다.

델라즈는 어디까지나 기분 전환을 목표로 나에게 권유했다.

내가 무조건 그에 응해야 하는 이유는 없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외면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델라즈가 날 걱정해주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지금 가요."

"…이렇게 갑자기?"

"기분 괜찮을 때 가는 게 낫지. 안 그래요?"

델라즈는 여전히 갈팡질팡했지만, 옷 갈아입게 방에서 나가라고 말하니 순순히 나갔다.

나는 얼마 전 선물받은 겨울옷으로 갈아입었다.

날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추웠다.

푸에고 하나 쓰지 못하는 내게 질병은 조금 치명적이게 다가왔다.

사전에 차단하는 게 좋겠지.

내 요청으로 우리는 발로 직접 걸었다.

아직도 기도하는 자들은 저곳에 있었는데, 얽히기는 싫었기에 굳이 멀리 돌아갔다.

성대 근처는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광경과는 사뭇 다른 풍경을 담고 있었다.

베르노바가 거주하던 건물이 있던 곳은 아예 평평했다.

베르노바가 성대를 폭발시키고, 델라즈를 위시로 한 여타 원로원의 단원들이 메테오를 쏟아붓느라 엉망이 되었던 곳이었다.

반년이 조금 넘게 지난 지금, 꺼진 땅은 완벽하게 수복이 되어 있었다.

눈에 띄는 건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베르노바와의 서약의 문제로 철거되었던 마법연구동이 다시 들어서 있었다.

어쩐지 나한테 태클을 거는 게 없더니만, 잘 풀렸나보네.

주위를 잘만 둘러보던 내 신경을 델라즈의 말이 두드렸다.

"베르노바를 여기에 묻었다."

"…묻어요?"

우리는 지금 성대 한가운데에 있었다.

우리가 밟고 있는 지금 이곳이 성대 본관이 있었던 곳이다.

즉, 베르노바는 자기가 먹고 살던 곳 바로 지하에 묻혔다는 것이었다.

내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하."

사람을 묻는다는 건, 고인에게 예를 표하는 행위였다.

땅 속에 묻음으로써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다시 삶의 굴레가 순환되리라는 생각을 막연히 품는 짓거리였다.

하지만, 베르노바에게 그런 예의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던가.

머릿속에 아타나시아가 스쳤다.

죽이는 것도 실패해서 일을 말아먹었으면서, 이제는 장례까지 치뤄줘?

"아타나시아의 뜻이 아니다."

델라즈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럼요?"

"감시하기 위해서야."

감시라니.

무엇을?

델라즈의 설명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성대 본관에서 각종 서적이 발견되었다. 주로 고대 문헌이었는데, 악마와의 계약 내용을 다루고 있는 책들이었다."

"악마와의 계약?"

"그래. 노바를 찾기 위해 별 개 같은 짓거리를 다 시도해본 모양이다."

악마와 계약해서 노바를 어떻게 찾아?

악마와 계약을 한다는 것부터가 금시초문인데, 또 그것으로 노바를 어떻게 찾는다는 말인가?

차라리 그럴 바에야 삼성교에 가입해서 예배라도 올리는 게 낫지 않았을까.

세 여신은 분명히 존재한다.

혹자는 구절로만 전승되어온 없는 신으로 취급할지도 모르겠으나, 여러가지 요인을 생각해봤을 때, 세 여신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존재하지 않으면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거든.

대표적으로 서약이 그러했다.

서약의 내용, 계약 이행은 철두철미하게 이루어진다.

마치 누군가가 그것을 직접 관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이것을 여신이 존재하는 증거로 삼고 있었다.

물론 뇌피셜이긴 하다.

"그거랑 이거랑 뭔 상관인데요?"

"책 중에는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술수도 서술되어 있었다."

내 표정이 구겨진다.

"진짜 좆 같은데."

"사체는 다 태워 뼈만 남았다. 혹시 모르니 그 뼈라도 여기 묻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거지."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순간, 서클이 접히며 꼬이는 감각이 어렴풋하게나마 다시 떠올랐지만, 최대한 머릿속으로 구겨넣었다.

정신을 잃기 직전에 느꼈던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던 고통, 내 몸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마법연구동은 정상으로 가동 중이다. 가볼 테냐."

"…됐어요. 내가 거길 가서 뭐해."

그나마 불행 중 몇 안 되는 다행에 속해 있는 정보였다.

멘탈 수복이 정상적으로 완료된다면, 저곳에 나를 투신하도록 하자고 다짐하며 델라즈를 끌고 나왔다.

그래도 괜찮은 정보를 얻었다.

악마와의 계약이라니.

그런 것까지 고려해보진 못했지만, 시도해볼 수 있는 게 늘었다면 좋아해야 하겠지.

노브와 관련해서 의문이었던 점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의문이란, 바로 이것.

노브는 어떻게 6서클을 찍을 수 있었는가?

로렌스와의 전쟁을 통해 노브가 방법을 알리지 않고 내게로 무작정 찾아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로렌스는 완벽하게 열세였으니까.

처음에는 노브가 멍청했구나, 하고 말았는데, 최근에야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혼수 상태에 빠져 있을 때, 마물과 관련해서 이렇다 할 큰 일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아타나시아와 델라즈에게 확인한 내용이었다.

적어도 아케즈가 신경쓸 정도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노브는 분명 4서클이었지만, 불과 한 달 만에 서클을 두 개나 더 늘렸다.

그만큼 리스크도 있을 테지만, 대부분의 마법사에게 있어 어지간한 리스크는 크게 와닿지 않는다.

그게 무엇이든 서클을 두 개나 늘려준다고 하면 좋다면서 받아들일걸.

하지만 아무도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나는 이렇다 할 정보가 모이지 않자, 생각을 점점 비틀던 도중이었다.

조건이 지극히 까다롭거나, 아니면 애초에 따라할 수 없는 방법이거나.

난 지금까지 악마와의 계약 같은 건 전혀 고려해보지 못했다.

그런 게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악마와 마법사는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진지하게 신봉하는 자는 드물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알아내고, 또 성공한다면, 다시 서클을 되찾는 데 있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다.

결국 나는 서클을 포기하진 않았으니까.

"그 책, 빌릴 수 있을까요?"

델라즈가 날 불퉁히 내려다본다.

"…원로원에서 확보한 걸 빌려주진 못한다. 하지만, 그래. 견본 정도라면 따로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어디서요?"

"내 제자 놈 기억하나?"

기억하지 못할 리 만무했다.

살다살다 그런 짐승 새끼는 처음 봤으니까.

왜 하필 지금 이 타이밍에 델라즈가 그 새끼를 입에 담았는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하아. 나중에 저 좀 거기 데려다주세요."

"그래. 널 믿는다."

이상하게도 나를 믿는다는 저 한 마디가 고마웠다.

"말하는 걸 잊었는데, 재단 차원에서 너한테 감사를 표하고 싶어하더라."

"…아카데미 재단?"

분명 여러 가문이 모여 아카데미를 후원하는 단체라고 들었는데.

델라즈가 고개를 끄덕인다.

"알아만 둬라. 나중에 해도 되는 거니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지금 다른 것에 열중할 여력 따위 없으니까.

"바로 갈 거냐?"

나는 델라즈의 그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페토라르로 바로 갈 거냐는 말이었다.

태양은 천원에서 살짝 아래였다.

"자고 올 거에요?"

"저쪽에서 부탁해서 가는 건데 그 정도는 괜찮겠지."

"그럼 뭐. 갑시다."

로부르크를 만나고 담판을 지어야지.

결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

이딴 데에서 남자한테 코가 꿰일까보냐.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어느 정도의 무례를 저지르는 한이 있더라도 확실하게 거절하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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