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9)IF 기억상실 에레브 ─ #005
오전 6시 50분, 에레브는 10분 일찍 약속 장소에 나와 있었다.
차림은 단조롭다 못해 이전보다 칙칙했다.
에레브가 기숙사에서 나오기 직전 페일리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간단하게 입고 나가.'
'그래도 돼?'
'응. 넌 좀 경각심을 가져야 해.'
저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페일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돈은…. 하루 걔가 다 내겠지 뭐.'
'걔 돈 많아?'
'응. 아카데미에는 재단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 유력 가문의 아들일걸? 꽤 입김이 세.'
'그렇구나.'
재단이고 나발이고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행함에 있어 돈이 부족하지 않다는 건 반길 일이었다.
어째서인지 깊이 안도감까지 느껴졌다.
그렇게 페일리가 에레브에게 입힌 옷은, 딱 평상복 차림이었다.
치마가 원래 입던 것에 비해 조금 길었기에, 에레브도 편하게 입을 수 있었다.
금새 자신이 조련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침울해졌지만.
"에레브! 많이 기다렸어?"
"아니."
암울한 새벽임에도 기운이 넘치는 하루를 보며 에레브가 속으로 혀를 찼다.
피곤해 죽겠는데 저렇게 활기찰 수가 있는 것일까.
"그럼, 가자."
길을 모르는 에레브였기에 하루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둘은 잡담을, 주로 에레브가 묻고 하루가 대답하며 걸었고,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락토의 마차대기소 앞에 도착했다.
"자, 어서 타."
"걸어서 가는 거 아니었어?"
"엄청 멀어서 안 돼. 돈은 많으니까 괜찮아."
에레브는 얌전히 마차에 올랐다.
하루와 마부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들어보니, 대충 에레브가 있기에 안전하니 믿고 가달라는 하루의 부탁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괜찮겠지.'
어째서인지 죽거나 상처입지 않을 거라는 묘한 확신도 있었지만, 그보다 호기심이 더 컸다.
하루는 분명 마물이라고 말했다. 마물이 대체 무엇인가?
적어도 하루에게 달려 있는 게 호두껍질이 아니라 뇌라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곳에 데려가겠거니 싶었다.
마부는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렸지만, 하루가 건넨 거금에 냉큼 말을 몰았다.
"얼마나 걸려?"
"못해도 한 시간은 걸려. 편하게 쉬어."
"…내가 쉬어도 되는 거야?"
"나오면 그때 대비하면 되지."
에레브가 생각했다.
참 대책없는 놈이다.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에레브는 바깥에 유의하며 바람을 맞았다.
둘은 마차 안에서 잡담을 나누었다.
"그러니까 결국 원로원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 집단인 거지?"
지금까지 하루가 말한 내용을 되짚어본 에레브가 말했다.
하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델라즈 교수님도 원로원 소속이고. 넌 교수님 제자인데 몰랐어?"
"…대단한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 구체적인 설명을 못 들었을 뿐이야."
에레브의 질문이 계속될수록 하루의 눈초리는 점점 매서워지고 있었다.
뭐든지 대답해주기로 했으니 대답은 해주는데, 너 참 수상하구나 하는 눈빛이었다.
"마물!"
그때였다. 마부가 꽥 소리질렀다.
에레브와 하루, 둘도 그에 놀라 마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하늘.
하늘에서 새가 불타고 있었다.
"에레브, 할 수 있겠어?"
하루가 진지하게 물었다.
낯빛에 긴장이 돌고 있었다.
그런 반면에, 에레브는 어딘가 나사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에레브? 왜 그래?"
"…어, 아니야. 뭔가 기시감이 좀."
"할 수 있겠어?"
"저거 그냥 물만 부으면 치킨 될 것 같은데…."
하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락조를 쓰러뜨릴 방법을 알아?!"
"쟤 이름이 화락조야?"
에레브의 질문에 하루가 표정을 굳혔다.
"몰랐어?"
"응."
"…일단, 어떻게든 해줄래? 저것들 곧 내려올 것 같은데."
하루의 말대로였다.
화락조들의 기세가 흉흉했다.
당장이라도 몸을 부딪혀 마차에 불을 지를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으응, 그러니까…."
에레브가 술식을 떠올리는 사이, 화락조가 하강했다.
"에레브!"
"아쿠아."
에레브가 영창함에 따라, 큰 파도가 마차의 뒤를 집어삼켰다.
화락조가 마차의 몸에 부딪히기 직전, 파도에 휩쓸리더니 불이 꺼졌다.
"…오."
"와!"
짧은 감탄사를 내뱉은 에레브에 반해 하루는 아예 함성을 질렀다.
"진짜 저걸 무찌르네!"
"…너 말야, 내가 저걸 못 잡으면 어떡하려고 그랬어?"
"응? 못 잡을 리가 없잖아."
에레브가 하루에 대한 평가를 마쳤다.
얘는 용감한 게 아니라 그냥 생각과 대책이 없는 빡대가리였다.
심하게 덜컹거리던 마차도 안정을 되찾았다.
마부가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조바심에 마차를 빨리 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들어온 거금에 일은 맡았지만 후회하고 있었던 마부는, 에레브가 쉽게 화락조를 무찌르는 모습에 안심했다.
이외에도 화락조는 몇 번이나 모습을 더 드러냈지만, 에레브가 만들어낸 파도에 모두 집어삼켜져 평범한 맹조가 되었다.
한 시간 조금 걸리지 않고, 마차는 프로바이오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하루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여기가, 프로바이오…!"
"…헤에."
별 감흥이 없을 것만 같았던 에레브도 눈과 귀, 코가 꽤나 즐거웠다.
축제도 그냥 축제가 아닌 듯했다.
어딜 가나 사람들로 붐볐고, 어딘가에서는 음악이 들려오며, 어딘가에서는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에레브, 배고파?"
헤벌레 웃고 있는 에레브를 보고 하루가 말했다.
에레브는 그제야 입꼬리를 관리했다.
"으, 응."
하지만 입은 솔직했다.
"아침부터 먹자."
둘은 먼저 음식점을 찾았다.
빅피그 정식과 화락조가 활개치는 레블과는 다르게, 이곳에서는 생선이 주된 식재료인 듯했다.
"와, 시발."
"에레브 너 욕도 해?"
"아니, 맛있네 이거."
급하게 변명하는 에레브를 보고 하루가 살풋 웃었다.
그 시선이 불편해 에레브는 꾸역꾸역 밥을 위장에 밀어넣었다.
여전히 맛있었다.
"축제는 처음 와봐. 너는 어때?"
"난…. 이런 데 와본 기억이 없어."
말 그대로 아무런 기억을 하지 못하는 에레브였다.
"그럼 우리 둘 다 처음이네! 마음껏 즐기자."
"이제 와서 묻는 것도 좀 그런데, 여기 몰래 온 거 들키면 어떻게 돼?"
"응? 혼나겠지."
에레브는 확신했다.
얜 정진정명 빡대가리에 쓰레기였다.
이에는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가 포함되었지만, 에레브는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일을 저질러놓았고, 수습할 수도 없는 노릇.
자신도 동조했기에 지금 여기에 있는 것 아니던가.
하루를 탓하기보단 이왕 온 거 즐기는 게 사리에 맞아보였다.
"다 먹었지? 가자!"
에레브는 한숨을 쉬면서도 하루의 뒤에 따라붙었다.
돈도 없고 하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지금, 길이라도 잃었다간 끝장이었다.
에레브는 하루의 팔 소매를 잡으려다가, 멈칫했다.
왜인지 하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가, 얘 때문에 무언가 큰 것을 말아먹을 것만 같은. 내가 고생이란 개고생은 다 할 것 같은, 무릎까지 꿇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
하지만 느낌은 느낌일 뿐, 근거가 없었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하루의 소매를 붙잡았다.
"우선은 여기!"
하루와 에레브가 멈춰선 곳은, 하나의 시설 앞이었다.
딱 봐도 분위기가 으스스해보였다.
"귀신의, 집?"
"여기 와본 적 있어?"
"아, 아니. 그냥 갑자기 떠올랐어."
에레브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는 듯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저런 시설을 귀신의 집이라고 부르는 듯했다.
"여기 들어가게…?"
"무서워?"
무섭다니.
에레브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정말로.
"들어가자."
속내가 들킬까 싶어 에레브는 앞장섰다.
"두 분이신가요?"
"네."
대금을 치른 둘은 시설 안으로 들어갔다.
하루가 생각했다.
'성공이다.'
무얼 숨길까.
에레브를 이곳으로 가장 먼저 데려온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에레브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안에서 무서워하면 그건 그거대로 귀여울 것 같고, 내친 김에 더 나아가 실패하면 에레브가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하루의 큰그림이었다.
시설을 아는 듯한 모습에 잠깐 긴장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에레브는 시설에 대해 완벽히 무지했다.
무섭냐고 도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에레브는 자신에게 훌륭히 낚여 시설에 들어왔다….
하루에게 악의란 딱히 없었다.
하루는 그저 '재미있는 일이 생기겠네'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조금 걸으니, 본격적으로 시설 내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검파랑색과 붉은색이 이곳저곳 칠해진, 으스스한 분위기의 시설 내에, 주인 잃은 사지들이 꼬물거렸다.
여길 처음 오는 사람이라면 지레 겁먹고 냉큼 달려버릴 만한 비주얼이었다.
라고, 하루는 생각했으나.
"오."
예상 외로 에레브는 냉큼 손가락을 집었다.
"신기하다. 오…."
"…안 무서워?"
"이거 다 마법인데?"
에레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루가 경악했다.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으응…? 이거 다 마법인데. 난 왜 느껴지지."
에레브는 그렇게 말하며 거침없이 나아갔다.
저렇게 생각없이 전진하면 함정에 빠지게 될 텐데.
아니나 다를까, 에레브의 경로에 제대로 닫히지 않은 함정이 보였다.
그나마 멀찍이 떨어져 있던 하루였기에 발견할 수 있는 틈이었다.
에레브가 그 함정을 밟─나 싶었지만.
"어우."
에레브는 그 한 마디만 내뱉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함정을 피했다.
"에레브, 함정이 보여?"
"함정? 웬 함정?"
"방금 지나친 거…."
"…이 구멍?"
에레브가 함정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에레브에게는 함정 자체가 훤히 보이는 듯했다.
통탄할 노릇이었다.
잘 쌓아올린 탑이, 큰그림이 망가졌다….
이제는 하루의 차례였다.
쪽이 팔려도 에레브와 같이 팔릴 것이라고 생각해 걱정하지 않던 하루였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에레브에게 쪽팔린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필사적으로 함정을 피해야만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최대한 조심해서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는 땅이 꺼지는 구멍 속으로 떨어져버렸다.
"으아아아악!"
에레브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깔이 안 달렸나."
눈이 달려 있으면 저걸 못 볼 리가 없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하루는 저것을 함정이라고 불렀지만, 그냥 단순한 구멍이었다.
멍청이나 주정뱅이가 아닌 이상 저기에 빠지진 않겠지.
하루는 아마도 전자에 속할 것이라고 에레브는 생각했다.
에레브는 계속 걸었다.
중간중간 길이 막혀 있기도 했지만, 간단한 퍼즐을 풀으니 모두 길이 열렸다.
시설에 들어온지 10분 정도가 지났을 때, 에레브의 눈에 출구가 보였다.
"끝인가."
출구로 나온 에레브가 담담히 말했다.
무서울 것 같아 긴장했지만 웬걸, 전혀 무섭지 않았다.
기어다니는 손가락들도 역하거나 하지 않고 신기할 뿐이었다.
마법이 걸려 있는데, 대체 무슨 마법이길래 저게 저렇게 움직인단 말인가.
에레브가 고개를 돌려가며 하루를 찾기 시작했다.
시설의 입구 쪽으로 가자, 한 큰 무대 위에서 하루가 보였다.
하루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오우…."
에레브가 눈쌀을 찌푸렸다.
쟨 왜 저기서 저러고 있는가.
계속 보고 있기도 쪽팔릴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하루가 무대에서 내려온 것은 그로부터 이 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하루의 얼굴이 새빨갰다.
"괜찮아?"
"…응."
하루가 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불쌍하거나 그런 생각이 들진 않았다.
잘못했다간 자신도 저렇게 되었을 거 아닌가.
하루는 야심차게 준비한 큰그림이 망가졌다는 것에 실망하며, 다른 놀거리를 찾았다.
둘은 그로부터 세 시간 동안이나 이곳저곳을 들리며 먹고 놀았다.
마지막으로, 낚시가 끝났을 때였다.
"슬슬 돌아가자. 수업 끝났을 거야."
둘은 마차대기소에 나란히 섰다.
쨍하게 내려쬐는 햇빛에 선한 바람이 불며 적당히 따뜻함과 시원함 사이를 오갔다.
기분 좋은 날씨였다.
하루가 무심코 에레브를 흘겨보았다.
"…."
바람에 휘날리는 적발이 예뻤다.
"너 예뻐."
무심코 그렇게 말해버렸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만 쏟아진 물이었다.
"어…."
에레브의 표정 또한 좋지 않았다.
좋아해줄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저런 표정까지 지을 것이라고는 예상 못한 하루였다.
"칭찬한 건데 왜 그래."
"딱히 기분이 좋진 않은데…."
에레브가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겨우 뒷말을 삼켰다.
'너한테 그런 말을 들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하루에 대한 호감도가 깎이고 있었다….
마차를 하나 잡고, 락토를 다시 건너는 도중, 이번에는 아무런 마물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마차는 시원하게 황무지를 달렸다.
역시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마차는 레블에 도착했다.
아카데미까지 돌아와서, 둘은 헤어졌다.
"내일 봐!"
"내일 봐."
기숙사로 돌아왔지만, 아직 페일리는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침대에 앉은 에레브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뭔가 중요한 게 있었는데."
에레브의 머릿속에 수천, 수만 장의, 사람이 그려진 종잇쪼가리가 스쳤다.
여전히 알 수 없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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