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4)094 ─ 1부 完
"그게 무슨 소리에요?"
내가 말한 게 아니었다.
델라즈도 아니었다.
목소리는 문쪽에서 들려왔으며, 우리는 모두 나란히 고개를 문쪽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앨버트와 페일리가 있었다.
페일리의 목소리였다.
페일리의 표정이 조금 험악했다.
"페일리, 나중에 와요."
"교수님?"
"페토라르의 국왕 전하이세요."
나는 조용히 눈짓했다.
하지만 페일리는 기세를 굽히지 않았다.
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교수님은 제 거에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어이가 없어 째진 눈으로 페일리를 쏘아보았으나, 페일리는 당당했다.
페일리의 당당함에 로부르크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아타나시아는 이미 한 번 나와 카웅을 만류했다. 카웅은 납득하고 돌아갔지."
"그럼 왜…."
"아타나시아의 만류는 억압이 아니라 권고였다."
아타나시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페일리의 표정이 썩었다.
내가 아타나시아를 꺼려하는 것만큼, 앨버트와 페일리도 아타나시아를 꺼려하고 있었다.
"너만 회유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거지. 의향이 있나?"
"아니요."
단호하게 거절했다.
뭐냐. 남자랑 선을 보라고?
지랄. 엿이나 쳐먹으라지.
지금 당장 두 손의 중지를 로부르크에게 내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내 인내심은 매우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합당한 보수를 요구하는 거다."
단호하게 말했는데도 로부르크는 말을 이어갔다.
"너의 부탁을 받아들여 과인은 로렌스를 통치하고 있다. 무려 6개월 동안이나 말이다."
"…예?"
"너는 분명 잠시만이라고 말했지.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아니었다. 합당한 보수를 요구하겠다."
나는 벙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걸 아직도 로부르크 당신이 하고 있었어?
난 말이 없길래 진작에 아타나시아한테 넘긴 줄 알았는데.
"전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에레브가 로렌스의 처우를 결정했다. 아케즈에서 로렌스를 관리하는 것으로. 다만 여력이 되지 않아 과인에게 잠시 맡긴다고 했지."
델라즈가 나를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이 물들어 있었다.
"에레브, 왜 말 안 했냐."
"네?"
"그런 짓을 했으면 말을 했어야지."
"아니, 전 당연히 알린…."
변명을 하기에는 델라즈의 얼굴이 너무나도 험상궂었다.
일국의 국왕 앞에서 이 무슨 무례인가 싶은데, 생각해보니 내가 트롤짓을 한 거잖아?
어라?
어라 시발?
"…죄송합니다."
델라즈가 이마를 짚었다.
"참고로 아타나시아도 모른다."
오늘은 날이 참 맑네, 하는 어조로 로부르크가 말했다.
화룡점정으로 확인사살까지.
델라즈의 얼굴이 더욱 구겨지는 게 내 눈에도 보인다.
"아무리 과인이라 한들 강요는 안 한다. 선을 보지 않아도 좋다. 한 번 만나만주게."
"…이유를 여쭤도 괜찮을까요."
"내 아들이 너를 보고 싶어한다."
참 대단한 이유였다.
아들 사랑이 얼마나 각별하면 반년 전 부탁을 핑계로 강요 아닌 요구를 저따구로 할까.
하지만, 그래.
얼굴만 보고 오면 되는 거지?
간단하군.
한 건물 내에만 있으려니 답답해 죽으려는 참이었다.
나들이 가는 기분으로 다녀와도 되는 거 아닐까.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마법을 이제 못 써서 스승님과 같이 가야 할 것 같은데요."
"그 정도라면 이해한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개를 들 때 페일리와 눈이 맞았는데, 페일리의 표정이 가히 좋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로부르크를 내보내고 대화를 해야겠군.
"볼일은 여기까지다. 부디 몸조리 잘해라. 한 달 내로 찾아올 수 있겠나?"
"몸이 회복되는 대로 방문하겠습니다."
"알았다."
로부르크는 그렇게 훌쩍 떠나버렸다.
정작 안부인사는 저 한 마디로 끝낼 거면서, 지 아들이랑 한 번 만나보라는 말 하나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다른 건 몰라도 로부르크 아들이 사랑을 굉장히 많이 받는 듯하군.
"…나도 간다."
델라즈는 여전히 이마를 짚은 상태로 방에서 나가버렸다.
아타나시아에게 가려는 건가.
본의 아니게 또 속을 썩인 것 같은데. 이거 참….
일단 내 탓은 아니다.
이제 남은 것은 페일리와 앨버트.
둘은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교수님, 꼭 가셔야 돼요?"
"저 남자한테 흥미 없어요. 그냥 나들이 다녀오는 거에요."
기분탓일까.
페일리가 순간 미소를 지은 것 같았는데.
앨버트는 입꼬리가 내려가 있다.
"그보다, 내가 페일리 거라뇨?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이거 하나만은 똑바로 해야 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난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것이다.
감히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다니, 불온하다!
"교수님은 마학 학생 모두의 것이에요. 얼른 복귀해주세요."
"…아마 교수로 복귀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미리 못을 박아두는 게 좋겠지.
나는 교수로 복귀할 생각이 없다.
교수직을 이어받았던 이유가 뭔가.
120억을 되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서클을 모두 부수어먹은 지금, 나는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이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페일리와 앨버트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왜요?!"
"으에?"
"교수님. 농담은 하지 말아주세요."
"아니, 농담 아닌데?"
대체 뭘 보고 농담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이해할 수가 없군. 나는 진심이었다.
페일리와 앨버트는 큰 충격을 받은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긴, 쟤네한테는 조금 크게 와닿으려나.
내가 그만두면 쟤네를 가르칠 교수가 사라지는 거다.
한편으로는 미안하지만, 내가 쟤네를 가르친다고 해서 뭐 좋을 게 있나 싶다.
뭣보다, 애들이 받아들일까 싶기도 하고.
나는 이제 노바 7서클 여교수 에레브가 아니라, 일반인 에레브이다.
갑자기 드는 생각이다만, 내 서클이랑 베르노바 목숨이랑 등가교환을 한 거면 그래도 싸게 먹힌 건가?
지랄도 병이군.
"오늘도 밥 먹고 가는 거죠?"
침묵이 어색하고 불편해 그리 물었다.
둘은 마치 녹슨 기계가 움직이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봉투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세 개.
하나를 넘겨받고, 개봉했다.
"흐아아…."
이 황홀한 냄새.
서클에 대한 잡념으로 기분이 더럽다가도 점심이 되어 이 도시락 냄새만 맡으면 기분이 그렇게 좋아진다.
솔직히 말해서 자살충동도 거의 사라지는 것 같다.
의사는 병원식을 먹길 권장했지만, 어림도 없지.
그딴 소금이 거의 안 들어간 맹탕 같은 음식들을 먹을까보냐.
도시락의 구성은 알뜰했다.
빅피그 정식이었는데, 고기와 밥의 양만 그대로 하고, 반찬의 양을 도시락 사이즈에 맞게끔 줄인 느낌이다.
요컨대, 고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좋아 죽을 만한 밥상이다.
만약에 내가 삶을 어쩔 수 없이 살아가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 때문 아닐까….
마타샤라면 내가 볼뽀뽀도 해줄 수 있다.
매일 점심마다 이런 걸 주는 사람한테 뭔들 못해주리.
"아, 칼은 미안하다고 전해줬죠?"
"네."
서클이 부수어지면서 인카르너 또한 풀려 마타샤 가게의 모든 칼이 사라졌을 거다.
내가 죽지 않는 이상 칼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놓았는데, 두 번이나 놀라게 만든 것이다.
비록 직접 가 사과하지는 못하지만, 페일리와 앨버트를 통해 감사와 사과를 동시에 전해주었다.
도시락을 전부 비웠다.
밥 한 톨 남기기 싫어 사용하지도 않던 숟가락까지 동원해 싹싹 긁어먹고서야 식사가 끝났다.
얘네는 진작에 다 먹었는지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거북했는데 이젠 이것도 익숙하다.
세쉬를 사용할 수 없는 건 슬픈 일이었다.
밥 먹고 나서 양치질을 직접 해야 한다니.
이게 무슨 고문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가 썩는 게 더 싫었기에 나는 얌전히 병실 내에 딸린 화장실로 가 양치질했다.
이 또한 얘네가 구경한다.
이를 다 닦고 말했다.
"나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으면 안 심심해요?"
"귀여워요."
"그렇구나."
뭐라고 말해도 귀엽다고 하는 거에도 익숙해졌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서.
이쯤이면 이제 돌아가라고 축객령을 놓겠으나, 아까 로부르크의 말을 들어서인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페일리, 앨버트. 나 좀 도와줄래요?"
"어떤 거요?"
"기숙사 좀 가고 싶은데."
둘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의사 선생님한테 허락 받으면요."
"허락 안 해줄 거 아니까 너희한테 이렇게 부탁하죠."
다름 아니라, 확인할 게 있어서.
사신들이 내게 주었던 선물, 그게 뭔지 확인해야겠다.
어차피 일도 전부 끝난 마당에 굳이 확인할 필요가 있나 해서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는데, 로부르크가 하는 말을 보아하니 그냥 선물도 아닌 것 같다.
확인해야지.
어차피 평생 이러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의사는 내게 충분한 수면과 휴식을 권장했지만, 내가 생각했을 때 나에게 문제란 더 이상 없었다.
하루 한 시간 걷는 것도, 사실 더 걸을 수 있는데 그만 걸으라는 말에 그만두는 거니까.
"안 돼요."
"흠."
어쩔 수 없지.
"소원입니다."
"네?"
"피구, 내가 이겼잖아요? 소원이에요. 나를 도우세요."
두 사람이 입을 떡 벌린다.
갑자기 여기서 그걸 꺼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눈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약속한 건 지켜야지.
"…앨버트, 나가 있어. 옷 갈아입는 거 도와드리게."
"그래도 되는 거야?"
"아니, 너도 나가 있으세요. 그건 나 혼자 할 수 있어요."
"그러다가 교수님 쓰러지셔서 모서리나 바닥에 머리 박으셔서 절명하시면 큰일 나요."
"나가 있을게."
어째 설명이 구체적이다.
나도 모르게 상상했더니 살짝 소름돋았다.
결국에는 수락했다.
난 여기서 제공한 환자복만 계속 입고 있었다.
앨버트가 방에서 나가고, 나는 교수였을 시절 입던 옷을 페일리의 도움으로 입었다.
솔직히 말해서, 제자한테 옷을 입혀진다는 상황이 부끄럽고 제자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게 매우 쪽팔렸다.
갈아입는 도중 한 번 휘청였다.
페일리 없었으면 어디 한 군데 박살났겠구나, 싶었다.
"갑시다. 근데 여기 어디에요?"
"30분 정도만 걸으면 돼요."
"와즈로 날아갈─아."
시발.
"…걸읍시다."
페일리의 강압 아래, 나는 이 년놈들과 손을 잡아야만 했다.
왼손에는 페일리의 손을, 오른손에는 앨버트의 손을.
부모님과 나들이 나온 꼬맹이와도 같은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니, 정정하겠다. 헛웃음이.
사람들과 계속해서 시선이 맞았다.
여기서 근무하는 사람들 같은데, 나를 볼 때마다 인사를 한다.
나도 그걸 받아주었는데, 생각해보니까 나 유명인사지?
밖으로 나가도 사람들이 다 나 알아보는 거 아닐까.
그럼 자연스레 의사도 알게 되겠지.
빠른 복귀를 목표로 하자.
"교수님, 조금 놀라실 수도 있어요."
"응? 뭐가요?"
"밖에 나가보시면 알아요."
그 이상으로 앨버트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려도 돌아오는 건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심히 건물 밖으로 나가니, 추위가 몰려왔다.
"으, 추…."
"푸에고."
내 앞에 작은 불씨가 생겼다.
앨버트.
"…고마워요."
건물에서 나와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꽤 큰 건물인 듯하다.
하지만 환자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병원이나 병동은 또 아닌 듯한데.
뭐하는 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따로 단지가 있다.
건물을 나와, 단지 정문으로 나오니.
"…아?"
수많은 사람들이.
매우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앞에 모여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촛불 수십 개를 앞에 두고 그것 앞에 서 합장해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행렬이 쭉 늘여져 있다.
"교수님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에요."
"…네?"
"교수님이 서클을 희생해서 나라를 구했다는 거, 모든 사람들이 알아요. 교수님은 나라의 영웅이니까요."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우스갯소리인 줄 알았는데, 날 영웅으로 삼았다는 게 진짜였어?
"직접적인 병문안을 허락받은 사람은 저희 여덟 명뿐이에요. 저희 둘 말고는 잘 안 오긴 하지만요."
"대부분이 종교인입니다. 저 사람들 모두가 교수님께서 서클을 되찾기를 기도해주고 있어요."
"기도…."
저들 중 한 명과 눈이 맞았다.
그는 옆사람에게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이내 사람들이 연달아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와 한 번씩 눈을 맞추더니,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기도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잘 모르는 문외한인 나도, 저것이 상당히 경건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한 발자국씩 계단을 내려갔다.
기도하는 자들과 가까워질수록 어째서인지 내 심장이 깊게 울렸다.
아니, 아니다.
나는 이 이유를 알고 있다.
이것은 모두 내 행동의 결과이다.
역적 베르노바를 처단했다는 나의 행동이, 여기 있는 모든 행동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자들은 물론이고, 일상을 영위하는 자들도 내가 있었기에 그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심금이.
심금이 울린다.
이제는 졸업했다고 생각한 눈물이지만, 코끝이 다시 찡해진다.
눈발이 내리는 서늘한 하늘 아래 있는, 아케즈의 모든 인민이 나에게 빚을 진 것이었다.
내가 여기 있는 모두의 적법한 인생을 되찾아주었다는 생각에 보람이 느껴졌다.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낀다.
촛불 앞에 기도하는 그들을 보니 나도 따라서 엄숙해졌다.
울적해져 내 신경의 끄트머리를 간질이고 괴롭히던 우울감이 녹아내린다.
보람이 아주 없진 않았구나.
나는 천천히 페일리와 앨버트의 손을 맞잡은 채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 중 일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맞이했다.
촛대는 유난히 짧았고, 흘러내려 굳은 촛농이 촛대 끝에서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 중 내 바로 앞에 있던 자가 나지막이 일렀다.
"알파, 베타, 델타께서 당신을 축복하실 겁니다. 설녀님."
***